쌀바위, [Ssalbawi], 1
강원도 옥초대, [ 沃焦臺 ]
옥적대, [玉笛臺]
분류/ 행정구역
자연지리정보관>지형지물>바위 · 화석 · 노두>대 |
강원도 |
강원도 금강산 내금강지역 명경대구역 영원암터 부근에 있는 대. 다섯 개의 바위가 어긋나게 서 있는 대이다. 옥적대라고도 한다. 영원동 일대를 전망하기 좋은 곳이다. 옛날 달밤이면 영원조사가 여기에 올라 옥적(대금)을 불 때마다 난새와 학이 날아와 춤을 추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옥초대 앞에는 책상처럼 생긴 책상바위가 있고 맞은편에는 영월대라는 또 하나의 전망대가 있다. 옥초대 주변에는 바위 밑에서 쌀이 흘러나왔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는 쌀바위와 10여 명이 앉을만한 배석이라는 바위가 있다. 또한 영원암터와 꼭대기가 뿔이 난 소머리 같고 그 아래가 말얼굴 같이 생겼다는 우두마면봉이 있다.
운문재, [ 雲門- ]
분야/ 유형/ 지역/ 시대/ 출처
지리/자연 지리 |
지명/자연 지명 |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
현대/현대 |
디지털청도문화대전-운문재 |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에서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으로 넘어가는 고개,
운문재(雲門재)[793m]는 청도군에서 울산광역시 울주군을 연결하는 도로로서, 문복 능선 분기점인 학대산을 지나는 낙동 정맥의 일부분이자, 북서로 흘러 운문호로 들어오는 신원천의 시발점이다.
운문면에서 가장 험준한 고개이며, 운문령 좌우편으로 문복산[1,014m], 가지산[1,240m], 운문산[1,188m] 등 높은 산이 자리 잡고 있어 지나가는 구름이 산허리를 넘지 못한 채 멈추어 구름문을 이루고 있다고 하여 운문재 또는 운문령(雲門嶺)이라 부른다. 과거 청도와 경산, 대구의 소금을 전담하던 마바리들이 통행하던 길이며, 울산과 경주에서 해물을 지고 내륙인 고령과 창녕 방면으로 지나던 상인들이 통하는 고갯길이기도 하다.
운문재는 가지산과 문복산 사이의 해발 고도 739m의 고개이다. 운문면의 계곡을 따라 오르면 산등성이에 이르기까지 넓은 면적을 소나무 군락이 압도하고 있다. 인근의 운문사 효종(雲門寺曉鍾)은 청도 팔경 중의 하나이다. 운문재 왼쪽으로 임도와 함께 등산로가 조성되어 있으며, 울산 방면으로 15분 가량 가면 석남사 갈림길에서 임도와 등산로가 갈라진다.
염창 마을에서 운문천의 지류인 신원천을 거슬러 삼계리에서 가장 긴 생금골을 택하여 오르면 운문재에 이른다. 과거 경주에서 해물을 지고 내륙 창녕과 고령 방면으로 가는 최단 거리가 운문재 고개를 넘는 길이었다.
『삼국사기』에 신라 원광 법사가 가슬갑사를 주석하고 화랑들이 국경 지대에서 무예를 연마하며 삼국 통일의 원동력을 일으키게 한 곳이 운문재로 알려져 있다. 경상북도와 경상남도의 도계에 해당되며, 청도군에서 울산광역시로 가는 유일한 관문이다. 조선 시대 운문면 신원리에는 삼기원, 방음리에 말음원, 대천리에 대천원이 각각 있었다.
운문재로 오르는 십리 능선 길 중 가지산 정상에는 쌀바위 이야기와 암행어사 박문수가 당한 봉변 이야기가 전해진다. 가지산 정상 인근에 쌀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었다. 옛날 이곳에 수도하던 승려가 있었는데, 양식이 떨어지면 마을로 내려와 동냥을 얻어 생활하였다고 한다. 이를 가엽게 여긴 부처님이 바위에 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쌀을 물방울 흐르듯 나오도록 하여 승려가 수도에 매진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욕심이 생긴 승려가 구멍을 크게 하면 쌀이 더 나올 것 같다는 생각에 바위 구멍을 크게 뚫었다. 하지만 뚫은 구멍에서는 이제 쌀이 아닌 물만 흘러나왔다고 한다.
조선 헌종 때 암행어사 박문수는 경상도 어사의 임무를 띠고 언양 고을의 민정을 살핀 다음, 청도 땅으로 가기로 하고 종인들과 헤어졌다. 하지만 노잣돈을 종인에게 모두 맡겨 무일푼이 된 박문수는 운문재에 이르러 수수떡을 부쳐 파는 두 여인을 발견하였다. 두 여인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떡을 간청했다. 한 명의 여인은 음담패설을 하는 반면, 다른 한 여인은 어사를 위로하며 돈을 받지 않은 채 떡을 주었다. 이후 청도 동헌에 도착한 박문수는 두 여인을 불렀고, 음담패설을 한 여인은 그제야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다른 여인은 상금을 받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운문재는 문복산과 가지산 사이에 있는 잘록한 곳을 이용하여 만들어진 길로서, 과거에는 좁은 길을 상인들이 이용하였지만 6·25 전쟁 직후 무장 공비 토벌을 위해서 확장 공사를 하면서 넓혀졌다. 오늘날은 국가 지원 지방도 69호선이 운문재를 통과하여, 경부 고속 도로와 연결된다. 2013년 운문령 터널이 길이 940m, 2차로 폭 11.5m로 건설될 예정이다.
운문산을 비롯한 자연 경관이 좋아 일찍이 펜션과 식당들이 즐비하게 들어와 있다. 운문재에서 5분 거리에 국립 운문산 자연 휴양림이 위치하며, 운문재 남쪽으로 가지산 도립 공원이 위치한다. 가지산은 영남 알프스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1979년 경상남도 도립 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쌀굴[ -堀 ]
분야/ 유형/ 지역/ 시대/ 출처/
지리/자연 지리 |
지명/자연 지명 |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수월리 |
현대/현대 |
디지털거창문화대전-쌀굴 |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수월리 고견사 동쪽의 기반암 하부에 형성된 풍화 동굴.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수월리 의상봉 남쪽 사면에 노출된 기반암의 하단부에 형성된 풍화 동굴로 높이 2m, 가로 2m, 깊이 3~4m 규모이다.
명칭 유래
‘쌀굴’ 지명은 고견사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의상봉 남쪽 사면에 위치한 고견사는 원효와 의상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며 의상 대사가 고견사에서 수도할 때 수도에 전념할 수 있도록 매일 두사람 분의 쌀이 나왔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울주군 가지산의 쌀바위 유래와 유사하다.
자연환경
쌀굴이 형성된 의상봉 일대는 중생대 백악기 이전에 관입한 시대 미상의 해인사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화강암 기반암에는 박리 현상 및 수직, 수평 절리 등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쌀굴은 절리 방향으로 형성되어 절리를 따라 공기 및 수분과 접촉하면서 기반암이 풍화되어 동굴이 형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현황
쌀굴은 산 중턱에 있고 인기있는 탐방로에서 벗어나 있어 많은 이가 찾고 있지는 않으며 원형 보존 상태가 좋다.
쌀 나오던 대운산 앙금할머니 샘,[ 大雲山 ]
분류
교통/통신/지리 > 뱃길이야기 > 설화 |
가지산 쌀바위 전설을 모방한 듯한 전설로 그 지명이 온양읍 대운산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 다를 뿐 유사한 전설이다. ‘앙금할머이’란 마고 할머니 같은 가공적인 인물인 것으로 짐작된다.
옛날에 그 저저 아들 놓으라고 공디리로(공들이러) 가인까네, 고오(거기) 옛날 기어 양금할머이새미라 캐. 앙금 할머이새미라 이러 쿠는데, (청중:앙금할매가 옛날에 고오 있었던갑데.) 예, 거어 있었거메 그렇지요. 앙금할머이 새미라 그러 쿠는데, 고래 고오 쌀이 또닥 또닥 흐리는데, 고오 좀 많이 나오라고 꼬장거리 가아(손을 들어 후려 파는 시늉을 하면서) 요매(조금) 쌀 나오는데, 꼬장키로 콕 쑤시 뿐게나 마 쌀이 안 나오고 마 물이 촐촐 나와.
지금 물이 나오고 ?이 안 나와. 저어 마 아주 방구 틈이고, 대운산(大雲山) 꼭대긴데, 마 방구 틈이 마(손으로 형용을 하면서)착착착착 요렇건만. 대운산.대운산 앙금할머이새미. [대운산 굴방우제 앙금할머이새미.) 울주시사, 1987
구비전승, [ 口碑傳承 ]
분야/ 유형/ 지역/ 시대/ 출처/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경상북도 칠곡군 |
현대/현대 |
디지털칠곡문화대전-구비전승 |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발생되어 말을 통해 전승되는 언어예술.
구비문학은 기록문학에 비해서 새로운 모습으로 발전할 수 있는 살아 있는 문학이다. 기록문학은 창작과 동시에 문자로 기록되어버려 개인적이고 고정적인 형태인데 비해 구비문학은 새로운 것을 수용할 수 있는 적층적이면서 유동적인 형태이다. 따라서 주위환경과 상황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면서 자신을 변화 발전시키는 열린 문학의 갈래이다.
그러나 구비문학은 말로 전승되기 때문에 자료의 보존이 일회성에 그친다는 단점을 가진다.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는 관계로 시간 속에서 나타나고 사라지는 일회성을 지닌다. 오직 인간의 기억에 의해 전승이 가능하므로 기억이 희미해질 수도 있고 완벽하게 재생될 수도 있지만 원래의 것과는 완전히 동일한 형태로 존재할 수는 없다.
설화
설화는 개인에 의해 창작된 이야기가 아니고 전승 집단의 문화나 가치관에 의해 형성되기 때문에 민중적이거나 지역적인 특색을 띠고 있는 경우가 많다. 칠곡군에서 구비전승되고 있는 설화의 유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칠곡군에서 전승되고 있는 설화 중에서 「의견총」, 「바위고개와 아기장수」, 「약사절 쌀바위」, 「좁쌀로 경상감사되다」 등은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이야기이다. 설화들은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기는 하지만, 전승 집단의 문화나 세계관에 의해 칠곡군의 특색을 가미시켜 전승되고 있다.
또한 내용이 비슷한 설화가 있는데, 다른 지역에 비해 유사한 구조와 내용을 가진 설화가 많다. 「말무덤골의 사람무덤」은 「사람무덤 말무덤」과 이야기의 길고 짧음의 차이 외에는 거의 같은 설화라고 볼 수 있다. 「바위고개와 아기장수」와 「바위고개의 비극」은 아기장수 설화의 내용이 주를 이루다가 마지막에 ‘아들바위’의 지명 설화로 끝을 맺는 부분까지 내용이 같은 설화이다. 특히 「법성사 전설」은 「송림사 창건설화」, 「약사절 쌀바위」, 「유학산 빈대 절 터」에서 등장하는 지명은 다르지만, 인간의 욕심으로 결국 절까지 폐사 당한다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불완전한 형태의 설화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설화는 산문적인 서사 구조의 형태를 지닌다. 그러나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어야 하는 한계 때문에 자료를 완벽하게 기억하지 못하게 되면 서사 구조를 유지하기 불가능하다. 「나쁜 마음으로 불난 동티」나 「산신령 말하다 욕 본 사람」 등은 설화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단순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결국 산문적인 서사 구조의 형태를 갖추지 못한 설화는 인간이 지닌 기억력의 한계 때문에 완벽한 재연이 되지 않았거나 아니면 이야기에 대한 흥미가 사라져 전승의 의지가 약화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자연적으로 소멸하거나 아니면 문학적인 상상력을 지닌 전승자에 의해 재창조되어 전승될 수 있다.
민요
옛날부터 민중들 사이에서 구전되면서 불리던 노래로서 민중들의 사상이나 생활, 그리고 감정들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민중적인 성격이 매우 강하다. 민요는 거의 대부분이 그 지방 민중들의 소박한 정서와 생활에 관련된 노래가 많다. 칠곡군에서 구비전승되고 있는 민요의 유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남요(男謠)보다는 부요(婦謠)가 많이 전승되고 있다. 남요는 남성들의 노래이고 부요는 여성들의 노래이다. 민요는 대부분이 노동과 깊은 관련이 있어 노동요가 많은 편이다. 특히 남성들이 노동을 많이 하기에 남요가 많은 편인데, 칠곡에서는 부요가 많은 편이다. 남요로는 농사를 지을 때 부르는 논매기노래, 모심기 노래, 두벌 논매기가 있고 의식을 행할 때 부르는 달구소리, 상여소리, 성주풀이 등이 있다. 그런 반면에 부요는 길쌈 노래, 시집살이 노래, 쌍가락지 노래, 물레질 노래, 바느질 노래, 방아타령, 밭매기 노래, 베틀 노래, 빨래 노래 등 다수의 노래가 전승되고 있다.
둘째, 시대에 따라 변모하는 민요라는 특성이 있다. 민요는 아주 오래되고 낡은 노래가 아니라 시대에 따라 민중들의 가치관이나 사상을 반영한 노래이다. 「가산산성 자진 아리랑」에서는 자동차나 비행기가 「숫자풀이」에서는 이승만 대통령, 남북통일, 유엔군, 6·25전쟁, 소집영장 등의 단어들이 등장하면서 당시 민중들의 의식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동요가 있는데, 어린 아이들이 부르는 동요는 가락이나 내용이 어른들의 노래보다는 매우 단순하다. 그렇지만 어린 아이들의 순수한 감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칠곡에서 전승되고 있는 「앞니 빠진 갈가지」는 앞니가 빠진 아이의 모습을 재미있게 표현한 노래이다.
법성사 전설, [ 法聖寺傳說 ]
분야/ 유형/ 지역/ 시대/ 출처/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작품/설화 |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기성리 |
조선/조선 전기 |
디지털칠곡문화대전-「법성사 전설」 |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기성리에 전해오는 법성사와 관련된 이야기.
‘쌀바위’ 설화, ‘미혈(米穴)’ 설화는 전국적으로 분포하는 이야기이다. 욕심을 너무 부리면 끝내 자연물에 의해 파괴된다는 우리 조상들의 소박한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채록/수집상황
칠곡군지편찬위원회가 채록하여 1994년 『칠곡군지』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기성리를 법성동 또는 법사라고도 하는데, 그 이유는 3층석탑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옛날에는 법성사라는 큰 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절이 없어지게 된 연유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하여 오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삼사백년 전에 없어진 법성사는 신라 말기에 창건되었다. 법성사는 크게 번창하여 일대가 하나의 절을 형성하고 있었다. 절이 번창하게 된 것은 법당의 천정에서 매 끼니 때마다 절에 있는 사람의 수에 꼭 맞는 쌀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밥 짓는 공양주가 한꺼번에 더 많은 쌀이 나오도록 막대기로 쌀이 나오는 구멍을 깊게 쑤시자, 그 곳에서 피[血]가 쏟아져 나와 온 사찰을 덮은 후 빈대로 변해버렸다. 그 후 법성사는 빈대가 들끓게 되어 결국 폐사가 되었다. 현재 법성사 터에는 논 사이에 3층석탑(보물 제510호)이 외로이 서 있으며, 지금도 빈대가 많이 나와 전설을 뒷받침하여 주고 있다. 또한 탑 옆에는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깊은 샘이 있어서 옛날 법성사가 크게 번창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모티브 분석
이야기의 모티브는 욕심 많은 공양주 때문에 쌀이 나오는 구멍에서 더 이상 쌀이 나오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그러한 욕심 때문에 절까지 폐사하고 만다는 것이다.
행곡 이야기, [ 杏谷- ]
분야/ 유형/ 지역/ 시대/ 출처/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작품/설화 |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행곡리 |
조선/조선 |
디지털울진문화대전-「행곡 이야기」 |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행곡리에서 행곡의 유래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행곡 이야기는 근남면 행곡리에 위치한 천량암과 주천대에 관련된 지명 전설이다. 원래의 지명은 천량암(天糧岩)[일명 쌀바위]의 구멍에서 아침저녁으로 쌀이 나온다고 하여 지은 마을 이름이 ‘쌀골’이었다. 그런데 만휴(萬休) 임유후(任有後)[1601~1673]가 주천대에서 시를 지을 때 살구꽃이 만발한 것을 보고 ‘쌀골[米谷]’보다 ‘살구골’이 좋다 하여 ‘행곡(杏谷)’이라고 했다.
채록/수집상황
1998년에 울진문화원에서 간행한 『울진의 설화』에 채록 내용이 실려 있다.
내용
근남면 행곡리에 관한 이야기이다. 행곡이라는 명칭은 천량암에서 쌀이 나왔다고 하여 ‘쌀골’이라고 불리다가 조선시대 인조 때, 이 마을에 머물렀던 만휴 임유후 선생이 주천대에서 묵객들과 시를 지을 때 냇가의 앞에 살구꽃이 만발한 것을 보고 ‘쌀골’보다 ‘살구골’이 좋다고 하여 ‘행곡’이라 하였다고 한다.
모티브 분석
행곡 이야기의 주요 모티브는 ‘천량암 쌀’과 ‘주천대 살구꽃’이다. 주천대의 살구꽃 경관이 뛰어난 봄 경치로 인하여 쌀골에서 살구골로 바뀌었고, 이것이 한자어로 변용되어 행곡으로 명명되었다는 지명유래 설화이다.
법화암, [ 法華庵 ]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영취산 남쪽 기슭에 있는 사찰.
종파/ 창건시기/ 소재지
대한불교조계종 |
신라 |
경남 창녕군 영산면 구계리 |
분류/ 위치/
인문(문화/예술/역사) > 역사관광지 > 사찰 |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적지길 184 |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이다. 신라 때 창건되었으나 이후의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창건 당시 영취산에 있던 보림사(寶林寺)의 부속 암자였으며, 1850년(조선 철종 1) 국의(國儀)가 중창하고 1857년(철종 8) 다시 국의가 중수하였다. 건물로는 법당이 남아 있고, 법당 안에는 법흥왕 때(재위:514∼540) 만들어졌다는 불상이 모셔져 있다.
문화재로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된 영산 법화암다층석탑이 전한다. 흔히 청석탑 또는 와탑이라고 부르는 이 탑은 본래 보림사에 있던 탑인데, 임진왜란 때 보림사가 불에 타자 법화암으로 옮겨온 것으로 추정된다. 해인사 원당의 다층석탑과 형태가 비슷하다.
이 절에는 쌀바위와 빈대에 얽힌 전설이 전한다. 어느 해에 흉년이 들어 한 승려가 굶어죽겠다고 하자 주지가 ‘쌀 담을 그릇을 가져오라’고 하였다. 승려가 그릇을 가져오자, 주지는 암자 뒤에 있는 큰 바위로 가더니 합장하고 염불을 외웠다. 그리고 석장으로 바위를 찔러 구멍을 내자 쌀이 나왔다. 쌀은 매일 먹을 만큼만 나왔다. 주지가 다른 곳으로 떠나고 새 주지가 부임해 왔다. 그는 쌀이 나오는 바위를 보자 욕심이 났다. 바위를 부수면 천 석, 만 석의 쌀이 나올 것으로 생각하고 석공을 시켜 구멍을 크게 뚫었다. 그러나 구멍에서는 쌀 대신 빈대가 쏟아져 나왔고 빈대가 온 절에 퍼져 절이 황폐해지고 말았다. 지금도 법화암 옛터 돌틈에는 빈대가 많이 기어다닌다고 한다.
마음의 안식처를 찾을 수 있는 사찰, 법화암,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이다. 신라 때 창건되었으나 이후의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창건 당시 영취산에 있던 보림사(寶林寺)의 부속 암자였으며, 1850년(조선 철종 1) 국의(國儀)가 중창하고 1857년(철종 8) 다시 국의가 중수하였다. 건물로는 법당이 남아 있고, 법당 안에는 법흥왕 때(재위:514∼540) 만들어졌다는 불상이 모셔져 있다. 문화재로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된 영산 법화암다층석탑이 전한다.
흔히 청석탑 또는 와탑이라고 부르는 이 탑은 본래 보림사에 있던 탑인데, 임진왜란 때 보림사가 불에 타자 법화암으로 옮겨온 것으로 추정된다. 해인사 원당의 다층석탑과 형태가 비슷하다. 또한 암자 뒤편의 기암괴석들이 만들어 내는 바위병풍은 길손들에게 또 다른 비경을 선물한다. 화려하거나 웅장하지는 않지만 고요함 속에서 들리는 풍경소리가 더 청정하게 느껴지는 법화암은 삶에 지친 중생들을 포근하게 감싸 안아 준다. 법화암은 지나가는 길손에게는 그저 스쳐가는 인연이지만 부처님과 인연한 이들에게는 법당의 문을 여 밀고 들어가 두 손 모아 삼배의 예를 올리면 잠시나마 마음의 때를 씻는 안식처와도 같은 곳이 되어 준다.
법화암에 대한 얽힌 전설,
법화암에는 쌀바위와 빈대에 얽힌 전설이 전한다. 어느 해에 흉년이 들어 한 승려가 굶어죽겠다고 하자 주지가 ‘쌀 담을 그릇을 가져오라’고 하였다. 승려가 그릇을 가져오자, 주지는 암자 뒤에 있는 큰 바위로 가더니 합장하고 염불을 외웠다. 그리고 석장으로 바위를 찔러 구멍을 내자 쌀이 나왔다. 쌀은 매일 먹을 만큼만 나왔다. 주지가 다른 곳으로 떠나고 새 주지가 부임해 왔다. 그는 쌀이 나오는 바위를 보자 욕심이 났다. 바위를 부수면 천 석, 만 석의 쌀이 나올 것으로 생각하고 석공을 시켜 구멍을 크게 뚫었다. 그러나 구멍에서는 쌀 대신 빈대가 쏟아져 나왔고 빈대가 온 절에 퍼져 절이 황폐해지고 말았다. 지금도 법화암 옛터 돌틈에는 빈대가 많이 기어다닌다고 한다.
이용안내
쉬는날
연중무휴
주차시설
주차 가능
유모차대여여부
불가
문의및안내
055-536-2403
상세정보
화장실
있음
한국어 안내서비스
불가
부처 바위
분야/ 유형/ 지역/ 시대/ 출처/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작품/설화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감천리 |
조선/조선 후기 |
디지털창원문화대전-「부처 바위」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에 전승되는 전설.
채록/수집 상황
『마산의 문화유산』[마산시, 1997]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감천리 무학산 기슭 대밭골 위엔 깎아지르듯 우뚝 서 있는 바위가 있다. 홍진(紅塵)속에 속세를 굽어보듯 중생들의 업보를 걱정하는 모습이 꼭 부처님 상을 닮았다 하여 부처 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이 바위는 멀리서 보면 흡사 사람 얼굴의 코와 같이 생겼다 하여 일명 코바위라고도 부른다. 천혜의 자연미를 혼자 포용하듯 빼어난 자태는 볼수록 감탄을 금치 못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암벽 중간에 약 한 평 반쯤의 석실이 있는데 이곳에서 임진왜란 시 광산사의 어느 스님 한 분이 부처와 불경을 이 석실에 봉안하고 난을 피했다고 한다. 기이하게도 피난하는 동안 석실 천장 한곳에 구멍이 있어 때가 되면 쌀과 물이 떨어져 한사람 분의 식량을 공급하였다. 그러나 피난처에서 겪는 고생이 심하였던 스님은 허기를 참지 못하여, 그 구멍을 넓혀 식량이 더 나오도록 자기도 모르게 욕심을 내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나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영원히 구멍이 막혀 버렸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부처 바위 밑 계곡에서 흐르는 물은 삼복더위 한여름에도 매우 차가우며 맑았다고 하여 이곳 주민들의 식수로도 사용하였다고 한다.
모티브 분석
「부처 바위」 이야기는 부처 바위의 ‘지명 유래담’과 인간의 한없는 욕심을 경계하는 ‘쌀 나오는 구멍바위’ 이야기로 짜여 있다. 이는 쌀바위 설화, 미혈 설화(米穴說話)라고도 하는데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며 전승되는 대표적인 광포 전설 중 하나이다. 인간의 과욕에 대한 징계를 반영하고 있다.
백암사 녹암 이야기, [ 白巖寺祿岩 ]
분야/ 유형/ 지역/ 출처/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작품/설화 |
경상북도 울진군 온정면 소태리 |
디지털울진문화대전-「백암사 녹암 이야기」 |
경상북도 울진군 온정면 소태리에서 녹바위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쌀바위설화, 미혈설화는 전국적으로 분포하는 이야기이다. 욕심에서 벗어나야 하는 승려가 욕심을 너무 부려서 끝내 벌을 받게 된다는 내용이다.
채록/수집상황
2001년 울진군지 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한 『울진군지』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경상북도 울진군 온정면 소태리 상류에 소재한 백암사에서 약 300미터 떨어진 곳에 전설의 바위가 있다. 바위의 이름은 녹바위인데, 바위의 구멍에서 쌀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백암사에서 얼마 되지 않은 거리에 있기 때문에 절을 찾아온 손님의 수에 관계없이 매일 녹바위 구멍에서 나오는 쌀로 손님들의 식사를 제공하였다.
백암사에 손님이 너무 많이 찾아오자, 한 스님이 녹바위 구멍에서 솟아 나오는 쌀을 많이 빼내려고 쇠가 달린 지팡이로 바위 구멍을 예전보다 훨씬 크게 뚫어놓았다. 그런데 그 후부터는 구멍에서 쌀이 한 톨도 나오지 않았다. 이것을 이상하게 여긴 스님이 백암사로 돌아가 법당을 살펴보니 전에 없었던 큰 기둥이 법당 앞에 하나 세워져 있었다. 스님이 지팡이로 그 기둥을 두드려보았더니 빈대 같은 벌레로 뭉쳐진 벌레 기둥이었다. 이후 백암사는 폐허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지금은 절이 있었다는 증거로 주춧돌만 남아 있다.
범굴사, [ 梵窟寺 ]
분야/ 유형/ 지역/ 시대/ 출처/
종교/불교 |
기관 단체/사찰 |
경기도 구리시 |
현대/현대 |
디지털구리문화대전-범굴사 |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에 있는 대한 불교 조계종 소속의 사찰.
건립 경위 및 변천
범굴사(梵窟寺)는 670년(신라 문무왕 10)에 의상 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사찰이다. 고려 시대인 1375년(우왕 1)에 나옹 화상이 중창했으며, 임진 왜란으로 소실된 후 1750년에 방지성이 초암을 짓고 확장을 했다. 1882년에 다시 소실된 후 폐사되었다가 1912년에 승려 정념이 중건하였다. 1928년에 승려 보광 스님이 대웅전과 나한전 등을 건립한 후 대성암(大聖庵)으로 개칭했고, 1936년에 보광이 중건하였다. 6·25 전쟁 때 재차 소실되었으며, 1954년에 당시 주지였던 승려 석하가 재건했고, 1981년에 대웅전, 삼성각, 종각이 재건축되는 등 이후 몇 차례 중건이 이루어졌으나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후 1992년에서 1996년 사이에 현재의 전각들이 모두 재건되었다. 1993년에 대한 불교 태고종 소속에서 개인 사찰로 변경되었다가, 2009년에 다시 범굴사로 개칭하면서 대한 불교 조계종 소속의 사찰이 되었다.
범굴사는 예불과 법회 등 불교 사찰의 고유한 활동 외에 특별한 활동은 없다.
현황(조직,시설 현황 포함)
범굴사는 2016년 2월 현재 법당인 대성전과 삼성각·종각·요사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2016년 1월 현재 주지는 승려 정산이다.
관련 문화재
범굴사에 문화재는 없지만, 법당 뒤편에 쌀바위로 알려진 바위가 있다. 대성암을 창건한 의상 대사가 수도하던 바위라고 하는데, 그곳에서 쌀이 나와 의상 대사에게서 가르침을 받고자 했던 사람들이 공양을 할 수 있었고, 그 쌀을 천공미(天供米)라 하였다고 한다. 후에 욕심이 많은 사람이 더 많은 쌀을 얻으려고 구멍을 크게 뚫자 타 버린 쌀과 뜨물만 나오다가 더 이상 쌀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관련 문물
대웅전·삼성각·범종각·요사채 등 사찰의 전각들이 있고, 안동준 거사 대성처 중창건 공덕비가 세워져 있으며, 법당 뒤쪽에는 범굴사 재산에 관한 기록인 '범굴사 불량권'과 '범굴사 불량 시주기' 암각문이 있다.
공주시의 자연지명,
공주시의 자연지명은?.
건지산, 계룡산, 공산, 구룡산, 구절산, 능산, 무성산, 복귀산, 봉황산, 사기코빼기산, 사마산, 성화산, 쌍령산, 연미산, 월성산, 장군산, 정지산, 주미산, 천봉산, 천태산, 취리산, 태봉산, 한산, 화산
가마봉, 걱정봉, 계봉, 고청봉, 국사봉, 노적봉
옥녀봉, 장군봉
주봉
각흘고개, 구재, 국고개, 굴티고개, 능치고개, 되재고개, 마치, 무네미고개, 발티고개, 불당고개, 성재, 솔치고개, 연미치, 오두재고개, 우금고개, 장고개, 종고개, 질마고개, 차동고개, 차령, 하고개 말바위, 사공암, 쌀바위, 요강바위, 요랑바위, 용바위, 울바위, 울바위, 창벽 공암굴, 아도화상토굴 용문폭포, 은선폭포 태조대왕기도굴 가다리들, 담보들, 도토방이들, 마루뜰, 섭자리들, 소정이펄, 수촌들, 양청들, 오인들, 우성농조들, 전금배들, 진양지들, 하부들
금강
가락천, 검상천, 계실천, 고성천, 고현천, 금천, 노성천, 대교천, 대룡천, 덕곡천, 도천, 동혈천, 두만천, 마곡천, 명곡천, 무릉천, 문동천, 반촌천, 방흥천, 봉곡천, 사기소천, 사봉천, 사현천, 상용천, 석성천, 성강천, 성두천, 송곡천, 송천, 신영천, 신흥천, 어물천, 어천, 오곡천, 왕촌천, 용두천, 용두천, 용성천, 용수천, 운곡천, 원봉천, 월송천, 월암천, 유구천, 전평천, 정안천, 제민천, 조평천, 중산천, 청룡천, 탄동천, 평정천, 하대천, 하신천, 혈저천
검상골나루, 곰나루, 금강나루, 놋점나루, 되데울나루, 말어구나루, 머거럼나루, 반여울나루, 분창나루, 불치나루, 새나루, 석장진나루, 오얏골나루, 장기대나루
모티브 분석
「백암사 녹암 이야기」의 모티브는 쌀이 나오는 바위에서 더 많은 쌀을 얻으려고 과욕을 부리다가, 결국은 절까지 폐사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황해북도 곡산군 동산리 고달산, [ 高達山 ]
분류/ 행정구역
자연지리정보관>지형지물>산 · 령 · 봉>산 |
황해북도>곡산군>동산리 |
황해북도 곡산군 동산리의 동쪽 강원도 판교군과의 경계에 있는 산. 고달사(高達寺)가 있었다. 산에는 둘레가 약 6m나 되는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깃들어 있다.
아득히 먼 옛날 이 바위 아래에는 주먹이 드나들 만한 구멍이 있었는데, 거기에서는 매일 고달사의 사람 에 해당하게 죽을 쑤어먹을 쌀이 나오곤 하였다. 어느 날 이 소문을 들은 한 중이 고달사로 찾아와서는 쌀 나오는 구멍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그 안의 쌀을 다 퍼내서 팔면 일약 큰 부자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리하여 중은 깊은 밤 사람들이 다 잠들자 큼직한 자루와 괭이를 메고 바위 밑에 이르러서는 안간힘을 다해서 바위 밑구멍을 사람도 드나들 수 있게 넓혔다. 그리고는 쌀을 퍼담으려고 구멍 안에 손을 넣었는데, 닿는 것은 돌멩이와 흙덩어리뿐이고 쌀은 한 알도 없었다. 자기의 꿈이 물거품처럼 되자 화가 난 중이 발길로 바위를 걷어차자 바위 속에서 웅글은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더니 우지직우지직 바윗돌이 굴러가기 시작하였다. 뜻밖의 광경에 온몸이 굳어진 중은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하고 바위에 깔리고 말았다. 절 안에서 자던 중들은 요란한 소리에 놀라 깨어나 밖으로 뛰쳐나와 보니 바위는 온데간데없고 거기에는 깔려 죽은 중만이 쓰러진 채로 있었다.
쌀바위가 없어진 다음부터 절에 찾아오던 사람들의 발길은 점차 끊어져 한적하게 되었고 불공을 못 받은 중들은 늘 굶주림에 시달렸다. 더는 굶주림을 참을 수 없었던 중들이 떨쳐나서 바위를 찾기 시작하였는데 바위는 골짜기 아래의 수풀 속에 박혀 있었다. 중들이 모두 힘을 합쳐 바윗돌을 굴려 오려고 했으나 끄떡도 하지 않아 산신령에게 도움을 청했더니 바위를 본래의 장소에 다시 끌어 올려다주었는데, 역시 쌀은 더 나오지 않았다 한다.
외금강 발연소구역의 발연동
목차
- 금강산 외금강 발연소구역 발연동의 바리소
- 금강산 외금강 발연소구역 발연동의 무지개다리와 발연사터
- 금강산 외금강 발연소구역 발연동의 누운폭포(《치폭》)와 폭포바위
- 금강산 외금강 발연소구역 발연동의 봉래섬과 계수란봉바위
금강산 외금강 발연소구역 발연동의 바리소,
발연동은 령신동계곡의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 골 안으로 흘러내리는 물은 집선봉과 소반덕 사이에서 발원하여 룡계에서 령신동계곡으로 흘러내리는 물과 합치게 된다. 발연동 역시 자기의 독특한 풍치를 자랑하는 곳이다.
령신동으로 들어가는 갈림길에서 동남쪽으로 고개 하나를 넘으면 발연동 입구에 들어서게 된다. 그리고 온정동에서 자동차도로를 따라 금천리(웃박수)를 거쳐 발연동 입구로 들어갈 수도 있다. 발연동 입구에서 오른쪽 집선봉의 바위벼랑과 왼쪽 둥글고 밋밋한 흙산을 쳐다보면서 개울을 따라 한참 올라가면 앞이 확 트인 넓은 골 안에 들어서게 된다. 여기에는 우묵평평한 너럭바위들이 쭉 깔려 있는데 그 한가운데로 수정같이 맑은 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개울을 따라 한참 오르면 바위벼랑을 오른쪽에 두고 골바닥에 층을 이루면서 치달아오른 한장의 큰 너럭바위 우에 3개의 담소가 있다. 그 중 한가운데에 있는 것이 바리소이다. 맑은 물을 가득 담고 있는 둥그런 소가 마치 밥바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바리소》라고 한다. 이 바리소를 중심으로 우에 있는 담소를 《웃소》, 아래에 있는 수백㎡ 잘 되는 큰 담소를 《아래소》라고 한다. 예로부터 그 누가 이곳에 와보아도 신통히도 밥바리를 닮았다고 말하였다는 이 바리소는 긴 쪽이 11m, 짧은 쪽이 9m, 깊이가 2.25m이다.
바리소를 발연동골 안의 명소로 보게 되는 것은 그 모양이 기묘한 데도 있겠지만 그의 주변 경개가 또한 절승이기 때문이다. 오른쪽에 우뚝 솟은 봉우리는 갖가지 기암을 층층으로 쌓아올린 듯하고 바위짬에 뿌리박고 자라는 푸른 소나무가 군데군데 서있어 소의 풍치를 더 한층 돋구어주고 있다. 게다가 그 바위벼랑과 담소 사이의 경사진 너럭바위에는 마치 보물을 감추어두는 곳인 듯한 종바리모양의 돌확 네 개가 련달려 있어 미묘한 맛을 더해주고 있다.
또한 바리소의 우와 아래에는 웃소와 아래소를 련결해주는 두개의 누운폭포가 걸려있어 계곡미를 더 한층 돋구어주고 있다. 특히 바리소가 있는 우로 뻗어간 골 안을 올려다보면 개울가로 나무숲이 우거진 둥그스름한 흙산이 있고 그 우로 바위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으며 또 그 우로는 숲이 우거진 밋밋한 산릉선이 하늘과 잇닿아있어 절경을 이루고 있다.
금강산 외금강 발연소구역 발연동의 무지개다리와 발연사터,
바리소에서 얼마쯤 더 올라가면 개울에 가로 놓인 무지개모양의 동그란 돌다리가 있다. 지난 날에는 발연사로 들어가는 이 돌다리를 《홍예교》라고 불렀으나 후에는 《무지개다리》로 고쳐불렀다.
무지개다리는 1t이 됨직한 화강석 40여 개를 다듬어서 25단으로 치밀하게 맞물려 쌓았다. 그 중 7계단은 절반씩 부러져 있는데 수십명이 올라서도 끄떡하지 않는다. 높이가 7.1m, 길이가 13m, 너비가 약 3.1m로서 금강산에는 하나 밖에 없는 돌다리이다. 무지개다리는 770년대에 만든 것으로서 현존 돌다리 가운데서 가장 오랜 것의 하나이다.
무지개다리(홍예교)에는 옛날 발연사의 욕심 많은 중이 이 다리를 놓으면 부자가 된다는 백발도사의 말을 듣고 자기재산을 모두 들여 다리를 놓았으나 결국 망하게 되였다는 전설이 깃들어있다.
무지개다리를 지나면 《구유소》라는 소가 있다. 동서로 길에 움푹 패인 곳에 푸른 물을 담고 있는 것이 신통하게도 돌구유 같다. 구유소에서 오른쪽 언덕 우에 올라서면 평평한 골 안에 들어서게 되는데 여기는 옛날 발연사가 있던 터이다. 그 동쪽에 삼각형처럼 생긴 높이 4m 가량되는 발연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벽 한쪽 면에 《발연》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서남쪽에는 이미 넘어져서 땅에 파묻힌 돌탑구조물들이 보인다.
발연사는 8세기 후반기에 진표률사라는 중이 처음으로 세웠는데 이 절간건축과 관련하여 《쌀바위와 진표률사》라는 전설이 전해온다. 발연사터에는 북쪽으로 작은 흙산을 넘어 령신골로 가는 길이 있고 남쪽으로는 소반덕으로 가는 길과 효양고개를 넘어 송림골로 가는 길이 있다. 이 효양고개는 발연사를 창건한 진표률사라고도 하고 혹은 이 절간의 심부름군이라고 하는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 송림골 안새미에서 살고 있는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추운 날 더운 날 가리지 않고 어김없이 그 고개를 넘어 20리길을 걸어가서 하루 세끼를 제 손으로 끓여 대접하였다는 전설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금강산 외금강 발연소구역 발연동의 누운폭포(《치폭》)와 폭포바위,
발연사터에서 다시 개울로 내려서면 담소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커보이는 푸른 못이 있고 그 우로 치달아오른 희멀건 너럭바위가 골바닥에 쭉 깔려있다. 그 너럭바위 한가운데는 길이 100m쯤되는 누운폭포가 있다. 누운폭포는 경사도가 40는 됨직한데 그 중간중간에 동그란 돌확까지 끼여 있어 홈을 따라 급히 흐르던 물은 돌확에서 한바퀴 휘돌고 아래로 미끄러져 내린다.
금강산의 수많은 누운폭포들 가운데서도 먼 옛날부터 널리 알려진 것이 바로 이곳 발연동의 누운폭포이다. 그것은 모양도 특이하지만 그보다도 폭포를 타고 미끄러져 내리는 놀이터라고 하여 더욱 이름났다. 그리하여 옛날에는 이 누운폭포를 두고 사람이 미끄러져 달리는 폭포라는 뜻에서 《치폭》이라고도 하였다.
옛날 발연사 중들은 옷을 벗고 나무가지를 꺾어서 깔고 이 미끄럼대로 흘러내리는 폭포수에 뛰여들어 아래의 소까지 미끄러져 내리군 하였는데 열에 일곱, 여덟은 제대로 타고 내려가고 둘, 셋은 뒤집혀서 물에 빠졌다고 한다. 만약 물에 빠진 경우에도 바위가 하도 미끄러워 상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누운폭포를 지나면 한번 앉고 싶고 눕고 싶은 깨끗한 너럭바위가 골바닥에 쭉 깔렸는데 그 우에 약간 경사진 큰 너럭바위가 있다. 이 바위가 바로 폭포바위(폭포암)이다. 이 너럭바위의 한가운데에는 양사언(1517년-1584년)이 썼다는 《폭포암》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 아래 《을사》라는 기년이 있는데 그것은 1545년에 해당한 것으로서 이것은 《폭포암》이라는 글자를 새긴 년대이다. 폭포바위는 먼 옛날부터 그 아래의 누운폭포와 함께 발연동의 《폭포내림》으로 알려져 있다.
금강산 외금강 발연소구역 발연동의 봉래섬과 계수란봉바위
폭포바위를 지나 올라가느라면 구부러진 개울에 이르게 되는데 여기에서 따로 떨어져 있는 골 안에 섬같이 생긴 흙산이 있고 그 밑에는 굴이 뚫어져 있다. 이를 가리켜 《봉래섬》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개울 왼쪽 바위벽에 양봉래가 썼다는 《봉래도》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바위벽에는 양봉래가 쓴 시구절이 새겨져 있다.
봉래섬을 지나 한참 올라가면 다시 넓고 긴 너럭바위가 쭉 깔려있다. 바위웃끝에 《계수란봉···》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오랜 세월 물에 씻기고 깎이여 《계수》라는 두 글자는 명백하지만 《란봉》 이하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란》자만은 아직도 희미하게 알아볼 수 있다.
옛날 환상적으로 불리우던 아름다운 새인 란새와 봉황새가 계수나무에 앉은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하여 이 너럭바위를 《계수란봉바위》라고 하였다. 계수란봉바위 밑에는 《계봉소》라는 푸른 소가 2개 있고 왼쪽으로 갈라져 들어가는 작은 골짜기 입구에는 《발연굴》이라는 자연돌굴이 있다. 이 골짜기 왼쪽으로 나지막한 봉우리꼭대기에 마치 큰 새 한마리가 앉은 듯한 묘한 바위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계수대이다.
계수란봉바위를 지나 개울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하나의 부도가 있고 그 우로 계속 오르면 집선봉 중턱에서 선하계곡과 통하는 길이 나진다.
참조항목
카테고리
출처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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