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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찰, 교회), 기타,,

대장경,[ 大藏經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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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경,[ 大藏經 ], 1

불교의 경장․율장․논장을 종류별로 분류하여 집대성한 것

대장경은 인도에서 완성된 경()․율()․논()의 삼장()과 중국 및 여러 나라 불교학자들이 저술한 논서들을 종류별로 분류하여 총합한 것을 말한다. 『삼국유사』 권3 탑상4 대산오만진신()조에서는 오대산 화장사()에서 대장경을 읽었다고 하였고, 전후소장사리()조에서는 신라말기에 보요(耀)선사가 두 차례 오월국()에 가서 대장경을 가지고 왔다고 하였다.

『삼국유사』 권3 탑상4 대산오만진신()조에 오대산 화장사()에서 대장경을 읽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그 주요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신문왕의 아들 보천과 효명이 오대산에 들어가 각각 암자를 짓고 수행하였다. 보천은 입적할 때에 오대산의 다섯 봉우리마다 국가를 위해 기도할 방법을 기록하였는데, 동대에는 원통사(), 남대에는 금강사(), 서대에는 수정사(), 북대에는 백련사(), 중대에는 화엄사()를 결성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살던 보천암을 화장사로 이름을 고치고 오대사()의 본사()로 삼아 그곳에 비로자나 삼존과 대장경을 모셔두고 5명의 승려로 하여금 낮에는 대장경을 읽고 밤에는 화엄신중()을 염송하도록 하였다.

대장경과 같은 불교경전은 대부분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것으로 『삼국유사』 권3 탑상4 전후소장사리()조에 그와 관련한 여러 기록을 전하고 있다. 이를 시대순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신라 진흥왕 26년(565)에 진()나라(557-589) 사신 유사()가 승려 명관()과 함께 불교 경전과 논서 1천 7백여 권을 가지고 왔고, 선덕여왕 12년(643)에 자장법사가 삼장() 4백여 함을 싣고 왔다. 신라말기에 보요(耀)선사가 두 차례 오월국(908-978)에 가서 대장경을 가지고 왔으며, 경순왕 2년(928)에 묵()화상이 당나라에 가서 대장경을 가지고 왔다. 고려 선종 3년(1086)에 대각국사() 의천()이 송나라로부터 천태종의 많은 책을 가지고 왔고, 고려 예종(1105-1122) 때 혜조국사()가 요본() 대장경 3부를 가지고 왔다.

이러한 전후소장사리()조의 기록 가운데 대장경 혹은 삼장이라고 명시한 기사는 신라시대에 자장법사, 보요선사, 묵화상이 중국 대장경을 수입한 것과 고려시대에 혜조국사가 거란의 요나라에서 간행한 대장경을 들여온 것이다. 자장법사가 대장경을 가지고 왔다는 기록은 『삼국유사』 권4 의해5 자장정률()조에도 보인다. 자장정률조에서는 자장법사가 신라에 아직 불경과 불상이 충분히 구비되지 못하였으므로 당나라 황제에게 대장경 1부와 불구() 등을 요청하여 가지고 왔다고 하였다. 그리고 묵화상이 대장경을 가지고 왔다는 기록은 『고려사』 권1 태조 11년(928)조에 보이는데, 『고려사』에서는 승려 홍경()이 대장경 1부를 싣고 예성강에 이르자 왕이 친히 맞이했다고 되어 있다. 묵화상과 홍경이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있다.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고려 고종 때 대장도감에서 판각한 대장경. 경판은 국보 제32호이다. 대장경은 부처님의 설법과 규칙, 논술을 모두 모은 것을 말하며, 경판은 현재 81,258매가 남아 있다.

대장경이라는 말은 중국에서 처음 사용된 용어이다. 인도에서는 삼장() 체계의 불교 경전이 성립되었을 뿐 대장경이라는 말은 없었다. 삼장이란 부처님의 설법을 기록한 경장()과 교단의 계율을 해설한 율장()과 후대의 학자들이 경전을 해석한 논장()을 말하는데, 이 삼장이 중국에 전래된 것은 기원전후에 인도로부터 온 전법사()가 불교를 중국에 소개하면서부터이다. 그 후 중국의 구도승()들이 인도에 유학하여 직접 경전을 수입하였다. 이에 삼장의 여러 경전들이 전법사와 구도승에 의해 개별적으로 수백 년에 걸쳐 중국에 전래되었다.(, 1989)

중국에 유입된 불교 경전이 점차 늘어나면서 경전의 성격을 정리할 필요성이 생겨났다. 인도로부터 무차별적으로 경전을 수입했기 때문에 중국에 수입되어 번역된 경전들이 대승의 경전인지, 아니면 소승의 경전인지를 구별하기 힘든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동진()의 도안(, 312-385)이 처음으로 『종리중경목록()』을 만들어 당시에 유통되던 경전의 목록을 만들고 그 경전들을 간략히 소개하였다.(미즈노 고겐, 1996) 그 후 불교교단이 발전하면서 경전을 전체적으로 수집하여 정리할 필요성이 생겨났고, 양나라 무제(, 재위 502-549)의 명령으로 경전을 수집하여 『화림원불교중경목록()』을 만들었다. 이때 수집된 경전들을 “대장경”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1989) 그리고 대장경이라는 용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은 수나라에 이르러서부터라고 한다.( 외, 2003)

대장경이 처음 나무에 새겨진 것은 송나라 태종 8년(983)에 완성된 『개보칙판인성대장경()』이다. 이 대장경은 송나라 태조(, 재위 960-976) 개보() 연간(968-976)에 황제의 칙명()으로 만들기 시작하여 태종 8년(983)에 완성된 것이다. 이 당시 목판 대장경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인쇄술의 발달 덕분이었다. 8세기 이전에는 목판술이 발달하지 못하여 대부분 필사한 사경()이었다. 수천 권이나 되는 대장경을 모두 필사하여 보관하였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목판술의 발달로 경전들을 나무에 새겨 인쇄하게 되었고, 송나라 태조 때에 비로소 수천 권의 대장경 전체를 목판으로 제작하게 되었다. 이때 만든 대장경은 730년에 지승()이 경전 목록을 정리한 『개원석교록()』에 의거한 것으로 총 5,048권이었다.( 외, 2003)

중국에서 처음 완성된 대장경은 이웃 나라에도 영향을 주어 고려와 거란에서도 대장경을 나무에 판각하였다. 먼저 판각을 시작한 것은 고려였다. 고려는 현종 1년(1010)에 거란의 침입을 받고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외적을 물리치고자 대장경 판각을 서원하였고, 거란이 물러가자 곧바로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 대장경은 현종 2년(1011)에 판각을 시작하여 현종 20년(1029)에 1차 작업이 완수되었다. 그 후 판각이 중단되었는데 그 사이 거란에서 대장경을 만들어 보내옴에 따라 그에 자극받아 문종 17년(1063)에 추가 판각을 시작하여 선종 4년(1087)에 완성하였다. 그것을 “초조대장경()”이라 부른다. 『초조대장경』의 목판은 팔공산 부인사()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고종 19년(1232) 몽고 침입 때 모두 불타버렸다.(천혜봉, 2003) 고려 조정은 강화도로 피신하여 다시 대장경을 판각하기 시작하였다.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몽고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고종 23년(1236)에 착수하여 고종 38년(1251)에 완성하였다. 이것을 “재조대장경()” 혹은 “팔만대장경()”이라고 부른다. 이 대장경의 목판이 현재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다.(박상국, 2003)

대장경 판각 사업은 중국 역대왕조에서 꾸준히 진행되어 북송대(960-1126)에 『개보칙판인성대장경』을 비롯하여 『숭녕만수대장()』 『비로장()』이 간행되고, 남송대(1127∼1279)에 『원각장()』, 『자복장()』이 간행되었다. 그리고 원나라 시대(1271-1368)에 『적사장()』, 『보녕장()』, 명나라 시대(1368-1644)에 『남장()』, 『북장()』, 『가흥장()』, 청나라 시대(1636∼1912)에 『용장()』이 간행되었다. 근대에는 『빈가장()』이 간행되었다. 한편, 일본에서는 에도시대(1603-1867)에 『천해장()』, 『황벽장()』, 근대에 『축쇄대장경()』, 『만자장경()』, 『만속장경()』, 『대정신수대장경()』이 간행되었다.( 외, 2003)

이상의 내용으로 볼 때 983년 이전에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대장경은 모두 필사본 대장경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대산오만진신조에 언급된 대장경과 전후소장사리조에서 신라시대에 자장법사, 보요선사, 묵화상이 중국에서 수입했다고 한 대장경은 모두 필사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고려시대에 혜조국사가 요본() 대장경을 들여왔다고 한 것은 목판본 『거란대장경』을 중국에서 가지고 온 것으로 보인다.

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3 탑상4 전후소장사리)

  使              使                                      使              使[ ]   使  <>[] 使 殿           使   使 滿              使                    使      使  殿殿 殿   殿                           殿                  殿     殿 殿         殿          滿               滿   錄殿  使錄    殿         使          使  耀         耀           耀               <>             西  [ ]               西 錄       西      <>        滿       滿滿            滿               

전후소장사리,
『국사()』에 이르길, 진흥왕(, 재위 540-576) 때인 태청(, 547-549) 3년 기사(, 549)에 양()나라가 심호()를 시켜 불사리() 몇 낱을 보내왔고, 선덕왕(, 재위 632-647) 때인 정관(, 627-649) 17년 계묘(, 643)에 자장법사()가 가지고 온 부처님의 두골(), 어금니, 사리 백 낱과 부처님이 입던 붉은 깁에 금점이 있는 가사() 한 벌이 있었는데, 그 사리는 셋으로 나누어 일부분은 황룡사탑()에 있고, 일부분은 태화사탑()에, 일부분은 가사와 함께 통도사() 계단()에 있으며, 그 나머지는 어디 있는지 자세하지 않다.

(통도사) 계단에는 단이 두층으로 되었는데, 위층 가운데에는 솥을 엎어놓은 것과 같은 돌뚜껑을 안치하였다. 속설()에는 옛날 본조(, 고려)에서 연달아 두 안렴사[使]가 계단에 예()를 하고 돌뚜껑을 들어 경배하였다. 앞의 안렴사는 긴 구렁이가 석함 속에 있는 것을 보았고, 뒤의 안렴사는 큰 두꺼비가 돌 속에 쪼그리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이후로는 감히 그 돌을 들어보지 못하였다. 근래에 상장군() 김이생()과 시랑() 유석()이 고종(, 재위 1213-1259)때 왕의 명을 받아 낙동강 동쪽을 지휘하였을 때 부절을 가지고 절에 이르러 돌뚜껑을 들어 예하고자 하니 절의 승려가 그 전의 일로 난처하게 여겼다.

두 사람이 군사를 시켜 굳이 들게 하였더니 그 안에 작은 석함이 있고 석함 속에 유리통이 들어 있는데, 통 속에 사리가 다만 네 낱이 들어 있었다. 서로 돌려보며 예경하였는데 통이 조금 상하여 금이 간 곳이 있었다. 마침 유공()이 수정함 하나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시주하여 그곳에 안치해 두게 하였다. 그 사실을 기록하였으니 (그 해는) 강도(, 강화도)로 서울을 옮긴지 4년째인 을미년(, 1235)이었다. 고기()에는 사리 백 낱을 세 곳에 나누어 안치하였다고 하였는데, 이제 겨우 네 낱뿐이라고 하였다. 이미 (사리가) 사라지고 나타남이 사람에 따라 많기도 하고 저기도 하니, 괴이하게 여길 것은 없다. 또 민간에서는 황룡사의 탑이 불에 타던 날에 돌뚜껑 동쪽 면에 처음 큰 반점이 생겼는데 지금까지 그대로 있다고 한다. (그때는) 곧 대요()의 응력(, 951-969) 3년 계축(, 953)이요, 본조(고려) 광종(, 재위 949-975) 5년이니, 탑이 세 번째 화재를 당하던 때였다. 조계(, 조계산) 무의자()가 남긴 시에 이르길, “듣건대 황룡사의 탑이 불타던 날에, 연이어 (통도사 돌뚜껑의) 일면도 탔으니 서로 떨어져 있지 않음을 보인 것이다.”라 하였는데 이것이다. 지원(, 1264-1294) 갑자(, 1264) 이래로 대조(, 원)의 사신과 본국의 사신이 다투어 와서 예배하고 사방의 운수(, 행각승)들도 몰려와서 참배하였는데, 혹은 (그 석함을) 들기도 하고 들지 않기도 하였다.

진신() 사리 네 낱 이외에 변신() 사리는 모래와 같이 부서져 돌뚜껑 밖에 나타났는데, 이상한 향기가 그윽하게 풍기어 여러 날 동안 없어지지 않는 일이 종종 있었으니 이는 말세에 한 가지 기이한 일이었다. 당() 대중(, 847-859) 5년 신미(, 851)에 입조사(使) 원홍()이 가지고 온 부처님의 어금니[지금은 있는 곳을 알 수 없으나 신라 문성왕(, 재위 839-857) 때 일이다.]와 후당() 동광(, 923-926) 원년 계미(, 923) (곧) 본조(고려) 태조(, 재위 918-943) 즉위 6년에 입조사(使) 윤질()이 가지고 온 5백 나한상()은 지금 북숭산() 신광사()에 있고, 대송() 선화(, 1119-1125) 원년 기해(, 1119)[예종(, 재위 1105-1122) 15년]에 입공사(使) 정극영(), 이지미() 등이 가지고 온 부처님 어금니는 지금 내전에 모셔둔 것이 그것이다. 전하는 말에 이르길, 옛날 의상법사()가 당나라에 들어가서 종남산() 지상사() 지엄존자()에게 이르니, 이웃에 선율사(, 도선율사)가 있어 항상 하늘로부터 공양을 받고, 재()를 올릴 때마다 하늘의 주방에서 음식을 보내왔다. 하루는 선율사가 의상법사를 재에 청하여, 의상이 와서 자리 잡고 앉은 지 오래되었으나 하늘의 공양은 시간이 지나도 이르지 않았다.

의상이 빈 바릿대로 돌아가자 천사(使)가 그제야 왔다. 율사가 묻기를, “오늘은 어째서 늦었는가?”하니, 천사가 말하기를, “온 골짜기에 신병()이 가로막고 있어 들어오지 못하였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율사는 의상에게 신의 호위가 있는 것을 알고 그 도()가 자기보다 뛰어남에 탄복하여 그 공양물을 그대로 두었다가 이튿날 또 지엄()과 의상 두 법사를 재에 청하여 그 사유를 자세히 말하였다. 의상이 조용히 선율사에게 말하기를, “스님은 이미 천제()의 존경을 받고 계시니 일찍이 듣건대 제석궁에는 부처님의 40개 치아 가운데 한 어금니가 있다고 하니, 우리들을 위해 청하여 인간에 내려 보내어 복을 삼게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라고 하였다.

율사가 후에 천사와 함께 그 뜻을 상제()에게 전달하니, 상제가 7일을 기한으로 의상에게 보내주었다. (의상이) 예경을 마친 후 맞이하여 대궐에 모셨다. 그 후 대송() 휘종(, 재위 1100-1125) 때에 이르러 좌도(, 도교)를 받드니 그때 나라 사람들이 도참()을 전파하여 말하기를, “금인()이 나라를 멸망시킨다.”고 하였다. 황건(, 도교)의 무리가 일관()을 움직여 아뢰기를, “금인()은 불교를 이름이니 장차 국가에 이롭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의논하여 장차 불교를 없애기 위해, 모든 승려를 묻어 죽이고, 경전을 불사르고, 따로 조그마한 배를 만들어 부처님의 어금니를 실어 바다에 띄워 어디든지 인연을 따라 흘러가게 하려고 하였다. 그때 마침 본조(고려)의 사신이 송()에 가 있다가 그 사실을 듣고 천화용() 50벌과 저포() 300필로써 배를 호송하는 관원에게 뇌물을 주고 몰래 부처님 어금니를 받고 빈 배만 띄우게 하였다. 사신들이 부처님 어금니를 얻어 가지고 돌아와 (임금께) 아뢰었다. 이에 예종()이 크게 기뻐하여 십원전(殿) 왼쪽 소전(殿)에 모시고, 항상 전각문을 자물쇠로 채워두고 밖에는 향을 피우고 등불을 밝혔다. 매번 친히 행차하는 날에는 전각문을 열고 예배하였다. 임진년(, 1232)에 서울을 옮길 때에 내관이 바쁘고 당황하여 (부처님 어금니를) 잊고 챙기지 못하였다.

병신년(, 1236) 4월에 이르러 왕의 원당()인 신효사()의 승려 온광()이 부처님 어금니에 예배하기를 청하여 왕에게 아뢰니, 왕은 내신을 시켜 궁중을 두루 찾아보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이때 백대(, 어사대) 시어사() 최충()이 설신()에게 명하여 급히 여러 알자방()을 불러 찾아보았으나 모두 어디 두었는지 몰랐다. 내신 김승로()가 아뢰기를, “임진년(1232) 서울을 옮길 때의 자문일기(, 궁중일기)를 찾아보십시오.”라고 하여 그 말대로 하였더니, 일기에는 입내시() 대부경() 이백전()이 부처님 어금니가 든 함을 받았다고 쓰여 있다. 이백전을 불러 문책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집으로 돌아가 다시 저의 일기를 찾아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집에 와서 살펴보고 좌번() 알자() 김서룡()이 부처님의 어금니가 든 함을 받았다는 기록을 가져다 바쳤다. 김서룡을 불러 물으니 대답하지 못하였다.

김승로()가 아뢰는대로 임진년(1232)으로부터 지금 병신년(1236)까지 5년 동안의 어불당()과 경령전(殿)의 상수(, 지키는 자)들을 잡아 가두고 심문하였으나 이렇다 할 결말이 나지 않았다. 3일이 지난 밤중에 김서룡의 집 담 안으로 무슨 물건을 던지는 소리가 나서 불을 켜서 살펴보니 곧 부처님 어금니가 든 함이었다. 함은 본래 안쪽 한 겹은 침향합()이고, 다음 바깥 겹은 순금합()이고, 다음 바깥 겹은 백은함(), 그 다음 바깥 겹은 유리함(), 또 그 다음 바깥 겹은 나전함()으로써 각 폭은 서로 맞게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다만 유리함뿐이었다. 함을 얻은 것을 기뻐하여 대궐로 들어가 아뢰었다.

유사()가 의논하여 김서룡과 양전(殿)의 상수들을 모두 죽이고자 하니 진양부()가 아뢰기를, “불사()로 인하여 사람을 많이 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하므로 모두 놓아 주었다. 다시 명하여 십원전(殿) 안뜰에 특별히 불아전(殿)을 만들어 봉안하고 장사()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또 길일을 택하여 신효사() 상방()의 온광()을 청하여 무리 30명을 거느리고 궐 내로 들어와 재를 올리고 정성을 드리게 하였다. 그날 입직()한 승선() 최홍()과 상장군() 최공연(), 이영장()과 내시(), 다방() 등이 불아전 뜰에서 왕을 모시고 서서 차례로 사리를 머리에 이고 예를 올렸는데, 부처의 어금니가 든 함의 틈 사이에 있는 사리는 그 수를 알 수 없었으나, 진양부가 백은합에 담아 모셨다. 그때 임금이 신하에게 이르기를, “내가 부처님의 어금니를 잃은 후로 스스로 네 가지 의심이 생겼다.

첫 번째는 천궁()의 7일 기한이 차서 하늘로 올라간 것이 아닐까 의심하였고,

두 번째는 나라가 이처럼 어지러우니 어금니는 신령스런 물건이므로 잠깐 인연이 있는 평온한 나라로 옮겨간 것이 아닐까 의심하였고,

세 번째는 재물를 탐내는 소인이 그 함만 훔치고 어금니는 구렁에 버렸을까 의심하였고,

네 번째는 도적이 사리를 훔쳐갔으나 밖에 드러내놓을 수 없어서 집 안에 감추어 둔 것이 아닐까 하였더니 이제 네 번째의 의심이 맞았다.”고 하며 소리를 내어 크게 우니, 온 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고 만수를 빌며 연정소비(, 촛불로 이마와 팔을 태우는 불교 기도 의식)하는 사람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이 실록()은 당시 내전 분수승이었던 전 기림사()의 대선사() 각유()에게서 얻은 것인데, (그때) 친히 본 바라 하여 나에게 기록하게 하였다. 또 경오년(, 1270)의 환도할 때의 난리는 낭패가 심함이 임진년(1232)보다도 더하였는데, 십원전의 감주()였던 선사 심감()은 위험을 무릅쓰고 (부처님 어금니가 든 함을) 가지고 와 도적의 환란에서 화를 면하게 되었다. 대궐에 알려져 그 공을 크게 포상하여 이름난 절로 옮겨 주었으니 지금 빙산사()에 주석하고 있다. 이 역시 그에게 친히 들은 바이다. 진흥왕() 때인 천가(, 560-566) 6년 을유(, 565)에 진()나라 사신 유사()와 승려 명관()이 불교 경론() 1천 7백여 권을 실어왔다.

정관() 17년(643)에는 자장법사()가 삼장() 400여 함을 실어 와서 통도사()에 안치하였다. 흥덕왕(, 재위 826-836) 때인 태화(, 827-835) 원년 정미(, 827)에는 입학승()인 고구려의 승려 구덕()이 불경 몇 상자를 가지고 왔으므로 왕이 여러 절의 승려들과 함께 흥륜사()의 앞길에서 맞이하였다.

대중() 5년(851)에는 입조사(使) 원홍이 불경 몇 축을 가지고 왔으며, 신라 말기에는 보요선사(耀)가 두 번이나 오월()에 가서 대장경()을 싣고 오니 곧 해룡왕사()의 개산조()였다. 대송() 원우(, 1086-1094) 갑술(, 1094)에 어떤 사람이 (선사의) 진영을 찬()하길, 위대하셔라 시조스님. 빼어나셨구나 그 모습. 두 번이나 오월에서 대장경을 가져오셨네. 보요란 작호 주시고, 조서를 내려 네 번이나 책봉했구나. 만일 그의 덕을 말하라면 명월과 청풍이라 하겠네. 또 대정() 연간(1161-1189)에 한남()의 관기() 팽조적()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수운()의 고요한 절간은 부처님 계신 곳, 더욱이 신룡()이 한 지경을 보호하네, 마침내 이 명찰을 뉘라서 이어받을까, 처음 불교는 남방에서 왔도다.

발문()은 다음과 같다.“옛날에 보요선사(耀)가 처음 남월()에서 대장경을 구해 돌아올 때 해풍이 갑자기 일어 작은 배가 물결 사이에 출몰하였다. 보요선사가 말하기를, ‘아마 신룡이 대장경을 머물게 하려는 것인가.’하고 드디어 주문으로 정성껏 축원하여 용까지 함께 받들고 돌아오니 바람이 잦아들고 물결이 가라앉았다. 본국에 돌아오자 산천을 두루 살펴보며 안치할 만한 곳을 구하다가 이 산에 이르러 홀연히 상서로운 구름이 산 위에서 일어남을 보고 이에 수제자 홍경()과 함께 절을 세우니, 불교의 동방전래는 실로 이때 시작되었다. 한남의 관기 팽조적이 제()한다.”이 절(해룡왕사)에는 용왕당()이 있는데, 꽤 신령하고 이상한 일이 많았으니 그때 대장경을 따라와 머물렀던 것으로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천성(, 926-930) 3년 무자(, 928)에 묵화상()이 당()에 건너가 역시 대장경을 싣고 왔으며, 본조(고려) 예종 때(1105-1122)에는 혜조국사()가 조서를 받들고 서역으로 유학가서 요나라 판본인 대장경 3부를 사가지고 왔는데, 그 한 본은 지금 정혜사()에 있다.[해인사()에 한 본이 있고 허참정()댁에 한 본이 있다.] 대안(, 1085-1094) 2년(1086) 본조(고려) 선종(, 재위 1083-1094) 때에 우세승통() 의천()이 송()에 들어가 천태 교관()을 많이 가지고 왔으며, 이밖에 서책에 실리지 않은 고승 신사()들이 왕래하여 가지고 온 것은 자세히 적을 수 없다.

불교의 동방전래는 한 없이 넓었으니 경사롭다. 찬한다.“중국과 동방이 아득히 떨어져 있고, 녹원(鹿)과 학수()로부터 2천 년이나 되었네. 해외로 전파되니 참으로 기쁘구나. 동국[]과 서방[西]이 한 세상이 되었구나.”이 기록의 의상전을 살펴보면, 영휘(, 650-655) 초년에 당()에 들어가 지엄법사를 찾아보았다고 하나, 부석사의 「본비()」에 의하면, 의상은 무덕(, 618-626) 8년(625)에 출생하여 어린 시절에 출가하고 영휘() 원년 경술(, 650)에 원효()와 함께 당()에 들어가려고 고구려에 이르렀다가 어려움이 있으므로 돌아왔다. 용삭(, 661-663) 원년 신유(, 661)에 당()에 들어가 지엄법사에게 나가아 배웠다.

총장(, 668-670) 원년(668)에 지엄법사가 세상을 떠나자 함형(, 670-674) 2년(671)에 의상이 신라로 돌아와서 장안(, 701-705) 2년 임인(, 702)에 세상을 떠났으니 나이 78세라고 하였다. 그러면 지엄과 함께 선율사(도선율사)가 있는 곳에서 재를 올리고 천궁의 부처님 어금니를 청하던 것은 신유(661)에서 무진(, 668)에 이르는 7,8년 사이가 될 것이다. 본조(고려)의 고종이 강화로 들어가던 임진년(1232)에 천궁의 7일 기한이 찼다고 의심한 것은 잘못이다. 도리천()의 하루 밤낮은 인간의 100년에 해당하는데, 의상이 처음 당()에 들어가던 신유(661)로부터 고종 임진(1232)까지 계산하면 693년이고, 경자(1240)에 이르러야 비로소 700년이 되며 7일 기한이 찬다.

강화도로부터 나오던 지원() 7년 경오(1270)까지는 730년이니, 만약 천제의 말과 같이 7일 후에 천궁으로 돌아갔다고 하면 선사 심감()이 강화도로부터 나올 때 가지고 와서 바친 것은 아마 부처님 어금니가 아닐 것이다. 이 해 봄 강화도로부터 나오기 전에 (왕은) 대궐에서 모든 종파의 고승을 모아 부처님 어금니와 사리를 정성껏 빌었지만 한 낱도 얻지 못하였으니, 7일 기한이 차서 하늘로 올라간 것도 그럴 듯하다. 지원 21년 갑신(, 1284)에 국청사() 금탑()을 보수하였다. 왕(충렬왕, 재위 1275-1309)은 장목왕후()와 같이 묘각사()에 행차하여 대중을 모아 경찬법회를 하였다. 그런 뒤 앞서 이야기한 부처님 어금니와 낙산사의 수정염주, 여의주를 군신과 대중이 모두 떠받들어 경배한 후 함께 금탑 안에 넣어 두었다. 나 또한 이 모임에 참례하여 이른바 부처님 어금니라는 것을 직접 보았는데, 그 길이가 3촌()쯤 되고 사리는 없었다. 무극()이 기록한다.

초조본 대반야바라밀다경 권162, 170, 463 고려 현종 때 새긴 초조대장경 가운데 하나인 ≪대반야바라밀다경≫. 국보 제284호.


[삼국유사, 권3 탑상4 대산오만진신],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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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西[西  ] 宿        [    <>        <>    ]      <>      滿    西                  <>      <>           ()                      簿    [     ] [ ]  殿          西                                                   ()  <>西   <>             <>()          <>          <>      西   

오대산의 5만 진신()
산 중의 고전()을 살펴보면, 이 산을 참다운 성인이 거주하는 곳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자장법사()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 법사가 중국 오대산()의 문수보살 진신()을 뵙고자 하여 선덕왕(, 재위 632-647) 때인 정관 10년 병신(636)에[『당승전()』에는 12년(638)이라고 했으나 여기서는 삼국본사()를 따른다.] 당()에 들어갔다. 먼저 중국 태화지()가의 문수보살 석상이 있는 곳에 이르러 7일 동안 정성스럽게 기도하였더니, 꿈에서 홀연히 대성()이 네 구절의 게()를 주었다. 꿈을 깨니 기억은 하겠으나 모두 범어()라 망연하여 이해하지 못하였다. 다음날 아침에 갑자기 한 승려가 붉은 비단에 금점()이 찍힌 가사() 한 벌과 부처의 바리때 한 개, 부처의 머리뼈 한 조각을 가지고 법사의 곁에 와서는 어찌하여 근심하는지를 물었다. 법사가 답하기를, “꿈에 받은 네 구절의 게()가 범어라 이해할 수 없어 그렇습니다.”라고 하였다. 승려가 그것을 풀이하여 말하기를, “‘가라파좌낭()’은 일체의 법을 깨달았다는 말이요, ‘달예치구야(

)’는 자성()은 정해진 바가 없다는 말입니다. ‘낭가사가낭()’은 이와 같이 법성()을 이해한다는 말이고, ‘달예노사나(

)’는 곧 노사나불을 뵌다는 말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가지고 온 가사 등을 맡기면서 부탁하기를, “이것들은 본사()이신 석가세존의 도구인데, 그대가 잘 간직하시오.”라고 하였다. 또한 말하기를, “그대의 본국() 동북방 명주() 내에 오대산이 있는데, 1만의 문수보살께서 항상 거기에 머무르고 계시니 그대는 가서 뵙도록 하시오.”라고 하고는 곧 사라졌다. (법사는) 영험한 유적들을 두루 찾아본 뒤 신라로 돌아오려 하였는데, 태화지의 용이 나타나 재() 지내주기를 청하므로 7일 동안 공양하였다. 이에 (용이) 고하여 말하기를, “예전에 게()를 풀이해 준 노승이 바로 진짜 문수보살이셨습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절을 짓고 탑을 세우는 것을 간곡히 부탁한 일은 별전(, 『삼국유사』 권4 의해5 자장정률조를 가리킴)에 자세히 실려 있다. 법사는 정관 17년(643) 이 산(오대산)에 이르러 (문수보살의) 진신()을 뵈려고 하였으나 3일 동안 날씨가 어두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다가, 다시 원령사()에 살면서 그때서야 비로소 (문수보살을) 뵈었다.

문수보살이 이르기를, “칡덩굴이 있는 곳으로 가라.”고 하였으니, 지금의 정암사가 이곳이다.[역시 별전(『삼국유사』 권4 의해5 자장정률)에 실려 있다.] 후에 두타() 신의()는 범일()의 문인이었는데, 와서 자장법사가 쉬었던 자리를 찾아 암자를 짓고 거처하였다. 신의가 죽은 뒤 암자 역시 오래도록 폐하였다가 수다사()의 장로인 유연()이 다시 짓고 거처하였는데, 지금의 월정사()가 이것이다. 자장법사가 신라에 돌아왔을 때 정신대왕()의 태자인 보천()과 효명() 두 형제가[『국사()』를 살펴보면 신라에는 정신․보천․효명 세 부자에 대한 글이 없다. 그러나 이 기록의 다음 글에서는 신룡() 원년(705)에 터를 닦고 절을 세웠다고 하였는데, 신룡은 곧 성덕왕(, 재위 702-737) 즉위한지 4년(705)인 을사()이다.

왕의 이름은 흥광()이고 본명은 융기()이며 신문왕(, 재위 681-692)의 둘째 아들이다. 성덕왕의 형인 효조왕(, 재위 692-702)의 이름은 이공(), 또는 이홍()이라고도 하는데, 역시 신문왕의 아들이다. 신문왕 정명()의 자()는 일조()이니 곧 “정신”은 아마도 신문왕 “정명”의 와전인 듯하다. “효명”은 곧 “효조” 또는 “효소()”의 와전이다. 기록에서 효명이 즉위하였다고는 하였으나, 신룡 연간에 터를 닦고 절을 세웠다고 한 것은 또한 자세한 말이 아니니, 신룡 연간에 절을 세운 사람은 성덕왕이었다.] 하서부(西)[또한 지금의 명주()에 하서군(西)이 있으니 이것이다.

혹은 하곡현()이라고도 쓰는데, 지금의 울주()는 이곳이 아니다.]에 이르러 세헌() 각간()의 집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이튿날 대령()를 지나 각각 천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성오평()에 이르러 여러 날을 유람하였다.

어느 날 저녁 갑자기 두 형제는 속세를 떠나 불문에 들어갈 것을 몰래 약속하고는 아무도 모르게 도망하여 오대산에 들어가 숨었고,[고기(, 『삼국유사』 권3 탑상4 명주오대산보질도태자전기)에는 “태화() 원년(647) 무신 8월 초에 왕이 산속으로 숨었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이 글이 크게 잘못된 듯하다. 살피건데, 효조왕 또는 효소왕은 천수() 3년 임진(692)에 즉위하였는데, 그 해 나이가 16세였고, 장안() 2년 임인(702)에 죽었으니 나이가 26세였다.

성덕왕은 이 해에 즉위하였으니 22세였다. 만약 태화 원년 무신이라고 말한다면 효조왕이 즉위한 임진년보다 빠른 것이니 이미 45년이나 지난 것으로, 곧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의 치세였다. 이로써 이 글이 잘못된 것을 알았으니 취하지 않는다.] 시위()하던 자들은 따를 곳을 알지 못하여 이에 서울로 돌아갔다. 두 태자가 산속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푸른 연꽃이 땅 위에 피어나니, 형 태자가 (그곳에) 암자를 짓고 살면서 이를 보천암()이라고 하였다.

동북쪽으로 600여 보 가니 북대() 남쪽 기슭에도 역시 푸른 연꽃이 피어난 곳이 있어 아우 태자 효명도 (그곳에) 암자를 짓고 머무르며 각각 부지런히 불법을 닦았다. 하루는 함께 다섯 봉우리에 올라가 예불을 올리려고 하였는데,

동대()인 만월산(滿)에는 1만 관음보살()의 진신()이 나타나 있었고,

남대()인 기린산()에는 팔대보살()을 우두머리로 한 1만의 지장보살(),

서대(西)인 장령산()에는 무량수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1만의 대세지보살(),

북대()인 상왕산()에는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5백 대아라한(), 중대()인 풍로산(), 다른 이름으로 지로산()에는 비로자나()를 우두머리로 한 1만의 문수보살() 진신() 등이 나타나 있었다.

이와 같은 5만의 진신()에게 일일이 예불을 올리니 매일 아침 인시(, 3시 30분-4시30분)에 문수보살이 진여원(), 지금의 상원(, 상원사)에 이르러서는 36가지의 형태로 변신하여 나타났는데, 어떤 때는 부처의 얼굴 형태로 나타나고, 혹은 보주()의 형태, 혹은 부처의 눈 형태, 혹은 부처의 손 형태, 혹은 보탑()의 형태, 혹은 만불()의 머리 형태, 혹은 만등()의 형태, 혹은 금교()의 형태, 혹은 금고()의 형태, 혹은 금종()의 형태, 혹은 신통() 형태, 혹은 금루()의 형태, 혹은 금륜()의 형태, 혹은 금강저()의 형태, 혹은 금옹()의 형태, 혹은 금비녀의 형태, 혹은 오색광명()의 형태, 혹은 오색원광()의 형태, 혹은 길상초()의 형태, 혹은 푸른 연꽃의 형태, 혹은 금전()의 형태, 혹은 은전()의 형태, 혹은 부처의 발 형태, 혹은 뇌전()의 형태, 혹은 여래()가 솟아나는 형태, 혹은 지신()이 솟아나는 형태, 혹은 금봉황의 형태, 혹은 금까마귀 형태, 혹은 말이 사자를 낳는 형태, 혹은 닭이 봉황을 낳는 형태, 혹은 푸른 용의 형태, 혹은 흰 코끼리의 형태, 혹은 까치의 형태, 혹은 소가 사자를 낳는 형태, 혹은 노는 멧돼지의 형태, 혹은 푸른 뱀의 형태 등이었다. 두 태자는 매번 골짜기의 물을 길어와 차를 다려 공양하고, 밤이 되면 각각의 암자에서 도를 닦았다.

정신왕의 아우가 왕과 더불어 왕위를 다투자 국인()들이 그를 폐하고, 장군 넷을 산으로 보내 두 태자를 맞이하게 하였다. 먼저 효명암 앞에 이르러 만세를 부르니 이때 오색의 구름이 7일 동안 드리워져 덮었다. 국인들은 구름을 좇아 모두 이르러서는 의장을 벌여 열을 짓고 장차 두 태자를 맞이하여 돌아가고자 하였다. 보천은 소리내 울면서 사양하므로 이내 효명을 받들어 돌아와 즉위하게 하였다.   

나라를 다스린 지 몇 해가 지나[기록에서 재위 20여 년이라고 한 것은 아마도 죽었을 때 나이인 스물여섯이 와전되어서일 것이다. 재위는 단 10년 뿐이었다. 또한 신문왕의 동생이 왕위를 다툰 일은 『국사()』에 기록이 없으므로 알 수 없다.] 신룡 원년[곧 당() 중종()이 복위한 해로, 성덕왕이 즉위한지 4년(705) 되는 해이다.] 을사 3월 초4일에 처음으로 진여원()을 개창하였다. 대왕께서 친히 백료들을 거느리고 산에 이르러 전당(殿)을 만들어 열고, 아울러 문수보살상을 흙으로 빚어 건물 안에 안치하였다.

지식() 영변() 등 다섯 명으로 하여금 『화엄경()』을 매일 읽도록 하고, 이로 인하여 화엄사()를 결성하도록 하였다. 오래토록 공양할 비용은 매 해 봄․가을에 산에서 가까운 주․현의 창()에서 조() 100석과 정유() 1석씩을 공급하도록 하여 항상 규칙으로 삼았고, 진여원에서 서쪽으로 6천보 떨어진 곳으로부터 모니점()과 고이현() 바깥에 이르기까지의 시지() 15결과 밤나무 숲 6결, 좌위(, 전답) 2결로써 장사()를 세우도록 하였다. 보천은 항상 그 신령스러운 골짜기의 물을 길어 마셨으므로 만년에 육신이 허공을 날아 유사강() 밖 울진국() 장천굴()에서 멈췄다.

수구다라니() 외기를 밤낮의 과업으로 삼았더니 굴의 신()이 몸을 드러내 말하기를, “나는 굴의 신이 된지 2천년이 되었지만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수구다라니의 참 도리를 들었으니 보살계() 받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보살계를) 받고 난 다음날 굴 또한 형체가 없어지니, 보천이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 20일을 머물고 난 뒤, 이내 오대산 신성굴()로 돌아왔다.

도를 닦던 50년 동안 도리천()의 신이 (하루에) 세 번 법을 들었고, 정거천()의 무리들이 차를 다려 공양하였으며, 40명의 성중이 공중을 10척이나 날아 항상 호위하였다. 지니고 있던 석장()은 하루에 세 번 소리를 내며 방을 세 바퀴 도니 이것으로 종()과 경()을 삼아 때를 좇아 수행하였고, 때로는 문수보살이 보천의 이마에 물을 붓고 성도()의 기별(, 약속)을 주기도 하였다. 보천이 장차 입적하려고 하던 날, 뒷날 산중에서 행하는 것으로 나라에 도움을 주는 일들을 기록하여 남겼다. (기록에) 이르기를, “이 산은 곧 백두산의 큰 줄기로 각 대()에는 (불보살들의) 진신()이 항상 거주하는 땅이다.

청색의 방위인 동대()의 북쪽 귀퉁이 아래, 북대() 남쪽 기슭 끝에는 마땅히 관음방()을 두고, 원상()의 관음보살과 푸른 바탕에 1만의 관음보살상을 그려 봉안하여라. 복전승으로는 5명을 두어, 낮에는 8권의 『금광명경()』․『인왕경()』․『반야경()』․『천수다라니()』를 읽게 하고, 밤으로는 관음예참()을 염송케 하며, 이름은 원통사()라고 칭하도록 하여라.

적색의 방위인 남대()의 남쪽 면에는 지장방()을 두고, 원상의 지장보살과 붉은 바탕에 팔대보살()을 우두머리로 한 1만의 지장보살상을 그려 봉안하여라. 복전승 5명에게 낮에는 『지장경()』․『금강반야경()』을 읽게 하고, 밤에는 점찰예참()을 염송하게 하며, 금강사()라 칭하게 하여라.

백색의 방위인 서대(西)의 남쪽 면에는 미타방()을 두고, 원상의 무량수여래()와 흰색 바탕에 무량수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1만의 대세지보살()을 그려 봉안하여라. 복전승 5명에게 낮으로는 8권의 『법화경()』을 읽게 하고, 밤으로는 미타예참()을 염송하게 하며, 수정사()라 칭하게 하여라.

흑색의 방위에 해당하는 땅인 북대()의 남쪽 면에는 나한당()을 두고, 원상의 석가여래와 검은 바탕에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5백나한()을 그려 봉안하여라. 복전승 5명에게 낮에는 『불보은경()』․『열반경()』을 읽게 하고, 밤에는 열반예참()을 염송하게 하며, 백련사()라 칭하게 하여라.

황색의 방위에 위치한 중대()의 진여원 안에는 흙으로 빚은 문수부동()을 안치하고, 뒷벽에는

황색 바탕에 비로자나불을 우두머리로 한 36가지의 형태를 그려 봉안하여라. 복전승 5명에게 낮으로는 『화엄경()』 『육백반야경()』을 읽게 하고, 밤으로는 문수예참()을 염송하게 하며, 화엄사()라 칭하여라.

보천암은 화장사()로 개창하고 원상의 비로자나 삼존불과 『대장경()』을 봉안하여라. 복전승 5명에게 항상 『대장경』을 열람하게 하고, 밤으로는 화엄신중()을 염송하게 하여라. 매년 화엄회()를 100일 동안 베풀고, 이름을 법륜사()라 칭하여라. 이 화장사를 오대사()의 본사()로 삼아 굳게 보호하고 지키며 행실이 정결한 복전승들에게 명하여 오래토록 향화를 받들게 하면, 국왕이 천추를 누리고 백성이 평안하며 문무가 화평하고 백곡이 풍요로울 것이다.

하원()의 문수갑사()를 열어 결사의 도회()로 삼고 복전승 7명에게 밤낮으로 항상 화엄신중예참()을 행하게 하여라. 이상 37명의 재()에 필요한 재료들과 의복의 비용은 하서부(西)의 도()에 속한 여덟 주()의 세금으로써 네 가지 일에 드는 비용으로 충당하여라. 대대로 군왕들이 잊지 않고 받들어 행한다면 다행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출처 ^ 참고문헌,

[大, 198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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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 2003, 『』, .

[대장경의 조판」, 『한국사』 16, 국사편찬위원회.2003,

[대장도감과 고려대장경판」, 『한국사』 21, 국사편찬위원회.2003,

[문화콘텐츠닷컴 원문보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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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대장경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삼국유사 사전/박물지 시범개발), 2007., 한국콘텐츠진흥원)

#불교 #본 #낭가사가낭() #오대산의 5만 진신() #대장경 [大藏經] #고려대장경 #19세기말부터 대장경도 신활자로 간행하게 되었다 #첫 번째가 역시 일본 #1880∼1885년에 #축쇄판(縮刷版)으로 간행 #「대일본교정대장경(大日本校訂大藏經)」이다 #대장경은 명치유신(明治維新) 직후 #불교 부흥책의 일환으로 시작 #인징이 고려 대장경과 대교한 #『여장대교록(麗藏對校錄)』을 본 것이 동기가 되어 #고려 대장경을 정본(定本)으로 삼고 송 원 명의 대장경을 참고하여 #차이가 나는 부분에 두주(頭註)를 달아 금속활자 5호로 간행 #판본은 일본 최초의 독창적인 판본이라 하겠다 #대장경은 1911년에 상해의 빈가정사 #4호 활자로 다시 배열하여 인쇄하였다 #활자가 커서 보기에는 편리하나 두 주를 생략한 것이 흠이 되고 있다 #1902년에 경도에 장경서원(藏經書院)이 설립 #인징의 『여장대교록(麗藏對校錄)』을 정본 #1912년에 출판된 것이 「만자장경(卍字藏經)」 #「만자속(卍字續)」 #불교 서적의 총서로 #동경대학(東京大學)의 범문학교실(梵文學敎室)의 다까구수[高楠順次郞] 등이 중심이 되어 #1922년∼1934년까지 13년이 걸려 완성한 것이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 #당시 유통이 되고 #축쇄판 #대장경이 비싸 학자들이 구입하기 어려웠고 #일본 국내 #필사본 대장경 #이본(異本)과 비교 조사하여 가장 정확한 대장경을 만들고자 하는 요망이 있었던 것이다 #『국사()』에 기록이 없으므로 알 수 없다 #신룡 원년[곧 당() 중종()이 복위 #성덕왕이 즉위한지 4년(705) #을사 3월 초4일에 처음으로 진여원()을 개창하였다 #문수보살상을 흙으로 빚어 건물 안에 안치 #지식() #영변() #『화엄경()』을 매일 읽도록 하고 #화엄사() #오래토록 공양할 비용 #매 해 봄 가을에 산에서 가까운 주 현의 창()에서 조() 100석과 정유() 1석씩을 공급 #진여원에서 서쪽으로 6천보 떨어진 곳으로부터 모니점() #고이현() #좌위(, 전답) #2결로써 장사() #보천은 항상 그 신령스러운 골짜기의 물을 길어 마셨으므로 #만년에 육신이 허공을 날아 #유사강() #울진국() #장천굴() #수구다라니() 외기 #나는 굴의 신이 된지 2천년 #수구다라니 #참 도리 #보살계() 받기 #(보살계를) 받고 난 다음날 굴 또한 형체가 없어 #오대산 #신성굴() #도를 닦던 50년 동안 #도리천() #정거천()의 무리들이 차를 다려 공양 #40명의 성중이 공중을 10척이나 날아 항상 호위 #석장()은 하루에 세 번 소리를 내며 방을 세 바퀴 도니 #종()과 경()을 삼아 때를 좇아 수행 #문수보살 #보천의 이마에 물을 붓고 #성도() #기별(, 약속) #보천 #입적 #산중에서 행하는 것 #나라에 도움을 주는 일 #기록 #산은 곧 백두산의 큰 줄기로 각 대() #불보살들 #진신()이 항상 거주하는 땅 #청색의 방위인 동대()의 북쪽 귀퉁이 아래 #북대() 남쪽 기슭 끝 #관음방() #원상() #관음보살과 푸른 바탕 #1만의 관음보살상을 그려 봉안 #복전승으로는 5명을 두어, 낮에는 8권 #『금광명경()』 #『인왕경()』 #『반야경()』 #『천수다라니()』 #밤으로는 관음예참()을 염송 #이름은 원통사() #적색의 방위인 남대() #남쪽 면에는 지장방() #원상의 지장보살과 붉은 바탕 #팔대보살() #우두머리로 한 1만의 지장보살상을 그려 봉안 #낮에는 『지장경()』 #『금강반야경()』 #밤에는 점찰예참()을 염송 #금강사() #백색의 방위인 서대(西)의 남쪽 면에는 #미타방() #원상의 무량수여래() #흰색 바탕에 무량수여래 #대세지보살()을 그려 봉안 #복전승 #낮으로는 8권의 『법화경()』 #밤으로는 미타예참()을 염송 #수정사() #흑색의 방위에 해당하는 땅 #북대()의 남쪽 면에는 나한당() #원상의 석가여래와 검은 바탕에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5백나한()을 그려 봉안하여라. 복전승 5명에게 #낮에는 『불보은경()』 #『열반경()』 #밤에는 열반예참()을 염송 #백련사() 황색의 방위에 위치한 중대()의 진여원 안에는 흙으로 빚은 문수부동()을 안치하고, 뒷벽에는 황색 바탕에 #비로자나불 #우두머리로 한 36가지의 형태를 그려 봉안 #복전승 5명에게 #『화엄경()』 #『육백반야경()』 #밤으로는 문수예참()을 염송 #화엄사() #보천암은 화장사()로 개창 #비로자나 삼존불 #대장경()을 봉안 #복전승 5명 #대장경 #화엄신중()을 염송하게 하여라 #매년 화엄회()를 100일 동안 베풀고 #법륜사() #화장사 #오대사() #본사()로 삼아 굳게 보호하고 지키며 행실이 정결 #복전승 #국왕이 천추를 누리고 백성이 평안하며 문무가 화평하고 #백곡이 풍요로울 것이다 #하원() #문수갑사()를 열어 결사 #도회()로 삼고 #복전승 7명에게 밤낮으로 #화엄신중예참() #37명의 재()에 필요한 재료들과 의복의 비용 #하서부(西) #도()에 속한 여덟 주()의 세금 #대산오만진신조 #대장경과 전후소장사리조에서 #신라시대에 자장법사 #보요선사 #묵화상이 중국에서 수입했다고 한 대장경은 모두 필사본이었음 #고려시대에 혜조국사가 요본() #대장경을 들여왔다고 한 것은 목판본 #『거란대장경』을 중국에서 가지고 온 것으로 보인다 #도리천()의 신이 (하루에) 세 번 법 #정거천() #동대()인 만월산(滿)에는 1만 관음보살()의 진신()이 나타나 있었고 #남대()인 기린산()에는 팔대보살()을 우두머리로 한 1만의 지장보살() #서대(西)인 장령산()에는 무량수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1만의 대세지보살() #북대()인 상왕산() #석가여래() 우두머리로 한 5백 대아라한() #중대() #풍로산() 다른 이름으로 지로산() #비로자나()를 우두머리로 한 1만의 #문수보살() 진신() #5만의 진신()에게 일일이 예불을 올리니 매일 아침 인시( 3시 30분-4시30분) #문수보살이 진여원() #지금의 상원( 상원사) #문수보살 #칡덩굴이 있는 곳으로 가라”고 하였으니 #지금의 정암사가 이곳이다 #별전(『삼국유사』 권4 의해5 자장정률)에 실려 있다 #두타() #신의() #범일()의 문인 #자장법사가 쉬었던 자리를 찾아 암자를 짓고 거처하였다 #신의가 죽은 뒤 암자 역시 오래도록 폐하였다가 #수다사()의 장로인 유연()이 다시 짓고 거처하였는데 #지금의 월정사()가 이것이다 #노사나불 #가사 #본사()이신 석가세존의 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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