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과 유다, (창 49:8~12, 22~26), 1
이 설교의 고민은 꽤 오랜 시간 이어져 왔습니다. 그 고민은 간단히 말해 왜 야곱의 장자권은 요셉이 아닌 유다에게 넘어 갔을까…입니다. 모든 것 이전에 일단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부터 해결해야 될 것 같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49장 24절을 다시 읽어볼까요? 이 번역대로 보자면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마치 예수님일 것만 같고, 요셉의 가문에서 뭔가 중요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습니다. 저도 한동안은 이 부분을 놓고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다른 번역본들을 보니까 조금은 다른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표준 새번역에는 “목자이신 이스라엘의 반석께서 그와 함께 계시고…”
쉬운성경에는 “그의 능력은 이스라엘의 바위이신 목자에게서 온다.” NIV에서는 “because of the Shepherd, the Rock of Israel.” GNB에서는 “By the Shepherd, the Protector of Israel.” 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요즘 한국 교회에서 많이 쓰고 있는 개역개정판에서는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로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보고 나니까 일단 요셉의 가문에서 후대에 어떤 중요한 인물이 예언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이런 생각 안 해 보셨습니까? 야곱이 지독하게 편애했던 사람은 열 두 아들 중 바로 요셉이었습니다. 맏이 르우벤이 있었지만 어차피 그가 아닌 바에야, 2번째도 3번째도 아닌 4번째 아들 유다에게 장자권이 가야 할 명분은 없거든요. 요셉은 죽을 고비 넘겨 가며 총리도 되고 형제들과 조카들을 걷어 먹이기까지 했는데, 정작 장자권은 유다에게 허락되고 결국 그것은 다윗과 예수님이 유다자손에게서 태어나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계승자가 요셉이 아니고 유다인 이유를 살펴보려면 먼저 요셉부터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요셉의 인생으로도 몇 편의 설교가 되겠지만 오늘은 간단하게 지나가겠습니다. 일단 요셉은 ‘꿈 꾸는 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에 걸맞게 젊은이들의 꿈, 비전 등과 관련해서 자주 소개되는 사람입니다. 주된 내용으로는 어렸을 때의 꿈을 믿고 끝까지 참고 견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그 꿈을 위해 참고 견뎌서 요셉처럼 되십시오라는 식의 이야기를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만 성경을 살펴봐도 오히려 그 반대의 결과를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37장을 보시면 요셉의 꿈에 관한 이야기와 야곱의 편애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요셉은 그 때 당시 자기의 꿈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해하고 있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만약 자신의 꿈을 이해하고 그렇게 행동했다면 그게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일단 그 꿈의 내용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형과 부모님이 다 내 앞에 와서 무릎을 꿇더라는 것입니다. 큰 어머니 레아와 자신의 어머니 라헬 사이의 질투나 또한 아버지 야곱의 편애와 그와 관련해서 형들의 감정 등을 알고 있다면 그런 꿈은 그냥 자기만 알고 말아야죠. 그 꿈의 내용을 알고서도 그렇게 떠벌리고 다녔다면 그게 더 큰 문제입니다.
요즘 우리 교회에 아이들이 부쩍 많은데요, 아이들을 키우시는 부모님들의 걱정은 서로 비슷할 겁니다. 사랑 많이 받고 자란 귀한 아이들이 어딜 가서나 자신감이 넘치는 것은 좋은데 자칫하면 안하무인이 되기 쉬운 거죠. 요셉이 그런 것 같습니다.
37장 2절부터 4절을 읽어봅시다. 형제들의 잘못을 덮어주기 보다는 고자질하는 동생. 혼자 좋은 옷을 입고 다니는 요셉. 거기에다가 눈에 띄는 아버지의 편애. 이미 형들은 심기가 불편합니다. 얼마나 심했냐 하면 배 다른 형들이 요셉을 죽일 만큼 싫어했습니다. 무슨 왕권이나 수 백억의 재산을 가지고 싸우는 것도 아니고 오죽 미우면 죽이고 싶었겠습니까? 물론 형들에게도 문제가 있었고, 부모님에게도 문제가 있었을 것이고, 구조나 관계의 총체적 문제로 보입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분명 요셉에게도 문제가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요셉이 그 꿈의 내용을 알고 형들 앞에서 자랑하듯 말했다구요?
조금 전에도 말씀 드렸듯이 그렇다면 정말 큰 일입니다. 하나님은 앞으로 이 요셉을 통해서 애굽과 인근 백성들을 기근으로부터 구원해야 하는데, 또 요셉 하나 믿고 야곱의 식구들을 애굽으로 이주시켜야 하는데, 이런 눈치 없는 요셉을 그 자리에 앉히려니 깝깝한 겁니다. 요셉이 만약 당시에 자기의 꿈을 이해하고 실현될 것이라고 믿고 말했다면 요셉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안하무인이거나 눈치가 너무 없거나… 너무 가혹한가요? 그런데 정황상 십대의 요셉은 자신이 봐도 그 꿈이 너무 허무맹랑해서 어이없다는 듯 이야기한 거거든요. 쉽게 말해 개꿈인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노예로 팔려가고 감옥에 갇히는 동안 요셉은 정말 꿈에도 그 꿈을 이해하지 못 했고 심지어 기억조차 못 하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애굽에서 노예로 살면서, 감옥에 갇혀서도, ‘언젠가는 내가 다시 돌아가서 나를 판 형들을 내 앞에 무릎 꿇릴거야 혹은 저 멀리 살고 있는 형들이 나에게 와서 무릎을 꿇고 말거야.’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 고통의 시간을 견뎠다구요? 그것도 13년을요? 그러니 우리도 요셉처럼 힘든 시간이지만 주님이 주신 비전을 품고 견디자구요? 뭔가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또한 이 꿈이라는 것은 자기가 꾸려고 생각해서 꾸는 게 아닙니다. 자기가 꾸는 대로 꾸면 영화죠, 그게 꿈입니까? 자기는 생각도 못 했는데 어느 날 밤에 꾸게 되는 거죠. 이것을 흔히 말하는 우리가 미래의 자신의 모습을 뜻하는 꿈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흔히들 네 꿈이 뭐니? 라고 할 때의 그 꿈과 요셉이 자다가 꾼 꿈은 다른 겁니다. 자다가 꾸는 꿈은 완벽하게 수동적인 것이죠.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이고, 자신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죠.
다시 말씀 드리지만 요셉은 꿈에도 그 꿈이 이루어지리라고는 기대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고, 기억도 못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다만 제발 자유인만 됐으면 혹은 누명이라도 벗겨졌으면, 죽기 전에 아버지 얼굴이라도 한 번 봤으면… 이런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거거든요. 그러다가 정말 얼결에 총리가 되고 그러던 어느 날 그 먼 곳에 살고 있던 형들이 자기 앞에 와서 무릎을 끓은 것을 보게 되고 그때야 그 꿈이 생생하게 다시 떠오르는 거죠.
이렇게 흘러간 약 13년간의 세월은 여호와의 말씀이 요셉을 단련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꿈이고 뭐고 철저하게 부서지는 상황입니다. 그야말로 내려놓다 내려놓다 못해 모든 것을 내려 놓는 겁니다. 주님이 주신 비전을 붙잡고 있는다구요? 글쎄요 그것마저 내려놓고 무장해제 당하고 정말 살려만 주십시오 하고 기도했을 겁니다. 이 기간 동안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편애 속에서는 배우지 못 했을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도 배웠을 것이고, 실무행정도 익힐 수 있었습니다.
시편 105편 22절에는 총리가 된 요셉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임의로 백관을 제어하며 지혜로 장로들을 교훈하였다.’ 이 한 줄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 것을 여러분도 잘 알 것입니다. 똑똑하기만 해서도 안 되는 자리였습니다. 갑자기 굴러들어 온 돌에 대해서 얼마나 시기와 질투가 많았겠습니까?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서 끌어내리려고 했을 것입니다. 텃세는 오죽했겠습니까? 외국에 나와서 살아보시니까 아시잖아요? 외국인 총리로서 그 지역 전체를 휩쓰는 가뭄의 위기를 극복하고, 자신을 팔았던 형제들을 불러들여 용서하며 살아야하는 요셉을 만드시기 위해서 하나님에게는 또한 요셉에게는 이 단련의 시간이 필요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힘겨운 과정을 성경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다시 창세기로 돌아가서 39장 1절부터 3절을 읽어봅시다. 23절을 봅시다. 간단한 구조는 이렇습니다. 요셉이 갇혔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므로 형통하였다. 요셉이 누명을 쓰고 갇혔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므로 형통하였다. 미치는 일이죠. 이왕이면 감옥에 갈 상황에서 구해주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형통했기 때문이다. 누명을 쓰고 죽을 뻔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형통했다라고 전해주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이건 뭐 감옥 갈 거 다 가고, 누명은 누명대로 쓰고 죽게 생겼는데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형통했다라고 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런 형통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게 무슨 형통입니까? 주님이 함께 하셔서 만사형통하실 것입니다 라고 인사를 하는데, 그 형통함이 이런 것이라면 그게 욕이고 저주지 인사입니까? 사람들은 요셉의 이 13년을 ‘하나님의 학교’였다라고 말합니다. 예 결론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왕 학교라면 그리고 굳이 외국이어야 했다면 일종의 유학처럼 보내주면 될 것을 노예로, 나중에는 죄수로 꼭 그렇게 해야 했습니까?
아쉽게도 대답은 예! 입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그 정도는 해야 된다고 생각하신 겁니다. 7년의 기근을 관리하고 자기를 죽이려고 한 형제들을 용서해야만 하는 요셉에게는 죽을 만큼 힘든 교육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많은 이들의 아픔, 억울함 등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던 거죠. 그래서 집 떠나 먼 곳에서 아주 특별한 훈련과정을 거치면서 요셉은 만들어졌습니다. 결론을 아는 우리들에게는 쉬워 보이고 ‘하나님의 학교’였다 어쨌다 하지만 끝이 없어 보이는 터널을 통과하고 있는 당사자에게는 약올리는 말밖에 안 됩니다.
창세기 40장 마지막절도 그렇게 맺어집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지 않고 잊었더라.” 자기의 꿈 해석대로 살아난 그 관원장이 마지막 희망이었는데 그 사람에게서 이제나 저제나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 사람은 요셉을 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드라마처럼 다음 장에서 ‘2년후’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하루하루가 힘든데 그렇게 또 2년이 흘러갑니다.
요셉의 훈련은 정말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의 시간들이었습니다.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은 이처럼 요셉과 같은 훈련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혹은 지금 그런 과정을 거치고 계시는 분들도 있겠죠. 순간순간, 하루하루 응답을 기다리면서 살아가는데 그렇게 그렇게 2년이 흘러간답니다. 아니 그렇게 7년, 13년이 흘러갔습니다. 지나고 보면 간단히 2년이지만 하루하루가 쌓인 730일이고 거기에다가 24시간을 곱하고 60분을 계산하면 얼마나 긴 시간입니까? 이 어두운 터널에 끝이라도 보이면 좋겠는데 도대체 끝이 언제인지 모를 시간들을 보내시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요셉은 그렇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노예로, 죄수로, 13년을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간을 “형통”했다고 하는 거거든요. 그 후의 과정은 시간 관계상 생략하구요 결과적으로 총리 요셉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이집트 국립묘지에 묻힐 수도 있었겠지만 유언으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갈 때 자기의 유골을 들고 나가라고 부탁합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꿈을, 약속을, 결국에는 이루어 가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온 몸으로 배웠던 것입니다. (창 50 : 24 – 26)
그 약속은 400여년이 지나 모세를 통해 성취됩니다. (출 13 : 18 – 19) 땅 분배가 끝나는 여호수아 마지막 24장 32절을 보십시오.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여행의 시작은 요셉의 미이라를 들고 가는 것이었고, 그 여정의 마무리는 이장이었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이 요셉에게 원하셨던 사명은 ‘꿈은 이루어진다’가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요셉의 유언과 400여년이 지나고, 가나안의 땅 분배가 끝난 어느 시점으로 기준 하자면 500년에 가까운 어느 날, 요셉의 미이라가 가나안 땅에 묻힙니다. 이 장면은 결국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요셉에게 주신 꿈처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그리고 이제 이스라엘 전체에게 주신 그 약속도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이렇게 권선징악과 해피엔딩의 요소가 잘 어우러진 전형적인 영웅의 이야기입니다. 출생과정에서부터 성장과정에 이르기까지 또한 회를 거듭할수록 흥미진진해지는 이야기까지 그리고 에필로그처럼 이어지는 이장과 이스라엘의 가나안 회복 등 얼마나 멋집니까? 또한 요셉은 결국 형들과 같은 반열이 아니라 아버지와 같은 반열에 올라섭니다.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레위를 대신하여 열 두 지파의 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래서 야곱의 열 두 아들에는 요셉과 레위가 포함되지만 열 두 지파는 요셉과 레위가 빠지고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포함시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마무리하면 참 좋은데, 그리고 다윗 왕도 예수님도 요셉의 후손에서 태어나면 깔끔하고 좋은데… 문제는 장자권입니다. 야곱이 아버지와 형을 속이면서까지 가지려고 했던 그 장자권. 그런데 이게 가면 갈수록 대단해져서 여기에서 다윗왕이 나오고 결국, 예수님도 이 유다 지파에서 나온다는거죠. 그렇다면 도대체 유다에게는 어떤 비밀이 있었던 것일까요?
이제 유다의 입장에서 사건을 돌아봅시다. 아시다시피 첫 아들은 르우벤입니다. 또한 르우벤은 장자의 능력이 있었고 그에 맞는 역할이 기대되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 실수를 범하게 되고, 집안의 위기 때마다 장자의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야곱이 유언을 할 때 르우벤 또한 자기의 일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창세기 37장 18절이하에서 다른 동생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모의할 때, 분명 르우벤은 그들과 뜻이 달랐습니다. 그리고 일단 그들을 말리면서 시간을 벌었습니다.
37장 21절 이하입니다. 그리고는 29절로 미루어 보아 결정적 순간에 어디로 갔던 것 같고, 다시 나타났지만 벌써 일은 벌어지고 난 뒤였습니다.
반면 26절 이하를 보면 유다는 죽이기보다는 파는 게 낫다라고 하면서 일단 흥분한 다른 형제들의 손에서 요셉을 살려냅니다. 물론 가만히 놔뒀으면 정말 요셉을 죽이기야 했을까, 아니면 조금 더 기다렸더라면 르우벤이 와서 구해 줬을텐데...라고 할지 모르지만, 고자질장이 요셉을 어설프게 살려서 아버지에게 보낸다는 건 시한폭탄을 보내는 거죠. 살려서 돌려보내면 바로 아버지 야곱에게 가서 사실은 형들이 나를 죽이려고 했다가 겨우 살아났다고 말하는 건 시간 문제거든요. 시작을 안 했다면 모를까 아무리 봐도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요셉을 살려서 돌려보내기는 어려운 것 같고 그렇다면 외국 상인에게 팔아서라도 요셉을 죽이는 것만은 막아보려고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어지는 38장에서 우리는 유다와 다말의 사건 때문에 찜찜합니다. 하필 창세기는 이야기의 전개와 상관없는 이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를 교묘하게 38장에 두었습니다. 38장의 교묘함을 다시 본다면 이렇습니다.
37장 36절에서 39장 1절로 바로 이어서 읽어야 제대로 이어집니다. 같이 이어서 읽어볼까요? 어떻습니까? 매끄럽죠? 그런데 문제는 유다의 이야기가 여기에 있다는 거죠. 이 사건은 유다의 대표적인 이야기로 요셉과 비교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끼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38장에서 유다는 자발적으로 창기와 자러 갔고, 그런데 알고보니 며느리였고, 요셉은 39장에서 붙잡는 보디발의 아내에게서 도망가고 있는 것만 보입니다. 아버지의 첩과 잤던 르우벤은 그 일 때문에 장자권을 잃지만, 유다는 며느리 다말과의 관계에서 난 베레스로 오늘 문제의 핵심인 그 장자권을 이어갑니다. 어떻게… 이래도 오늘 설교의 끝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이 배경을 알려면 형사취수제라는 전통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형이 아들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취해서 아들을 낳아 형의 대를 이어주는 것입니다. 유다의 첫째 아들 엘은 다말과의 결혼 후, 자신의 죄 때문에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곳 풍습에 따라 둘째 아들 오난이 형수와 잠자리를 가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형수와의 관계를 통해 태어나게 될 아들입니다. 가만 있으면 자기가 장자가 되는데 형수랑 자서 아들이 태어나면 그 아이가 형의 뒤를 이어 장손이 되는 거거든요.
오난 또한 할아버지 야곱을 닮았는지 장자권에 대한 욕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난은 피임을 하게 되고 이것이 하나님의 분을 사서 오난 또한 죽게 됩니다. 이유야 어찌됐건 다말과 결혼만 하면 자신의 아들이 연달아 죽어 나가니 유다는 며느리 다말을 곱게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아들 셀라를 보호하기 위해 일단 다말을 고향으로 돌려 보냅니다. 여기까지는 있을 법한 이야기입니다.
요셉 성인은 마리아와 함께 구세주의 강생 신비에 동참한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성모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가정을 침묵과 순명으로 보호한 성실한 아버지로 ‘구세주의 보호자’ ‘교회의 아버지’ ‘성직자와 수도자, 가난한 이, 노동자, 임종자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그림은 요셉 성인이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 조토의 프레스코 작품으로 이탈리아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에 설치돼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다는 아내와 사별하였고, 어느덧 셀라는 장성했지만 유다는 다말을 불러 올리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막장 드라마가 되는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많은 해석들이 있습니다만 이 이야기의 핵심은 유다가 창기와 잤느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그것에 대한 언급은 한 마디도 없습니다. 또한 이 일은 유다의 장자권 승계에 하등의 영향을 끼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의문점이 있습니다. 물론 유다를 위한 변호도 있습니다. ‘일단 유다의 아내는 죽었다. 다말도 남편이 없었다. 둘 다 과거야 어떻든 지금은 남편과 아내를 먼저 떠나 보낸 과부고 홀아비다. 게다가 형사취수제 풍습이 있는 곳에서는 남편이 죽으면 동생 또는 가족 중 가장 가까운 남자가 대를 이어주는 곳도 있었다. 마침 그 사람이 시아버지가 될 수도 있다.’ 이상하죠?
그러나 어찌되었건 오늘의 이 사건의 핵심은 다말에 대한 유다의 판결입니다. 38장 24절부터 26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 이것이 유다의 고백입니다. 며느리의 부정을 심판하여 죽이려고 불렀는데 오히려 그 며느리가 자기보다 더 낫다고 인정합니다. 둘 다 떳떳하게 이야기 할 입장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보다 저 며느리가 더 옳다는 이야기를 한 겁니다.
사실 이것저것 변명하며 다말을 몰아붙일 수도 있었을텐데, 또한 그렇게 한들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하지만 유다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다말을 가족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렇다고 다말을 자기의 아내로 맞아들인 것도 아닙니다. 그는 다시는 다말을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다말은 죽은 두 남자를 대신해서 쌍둥이 두 아들을 얻게 되고, 결국 그렇게 아끼던 셋째 아들 셀라는 유다의 대를 잇지 못하고, 다말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베레스가 장자권을 잇게 됩니다.
그리고 39장으로 넘어가서 팔려간 요셉에게 다시 포커스가 맞춰지다가 르우벤과 유다를 다시 볼 수 있는 장면은 기근 때문에 요셉 앞에 선 42장 이하입니다. 2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20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그들은 동일하게 그 때의 자신들의 잘못을 기억해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장자인 르우벤은 20여년 전 요셉 사건이후 품어왔던 생각을 드러냅니다.
22절입니다. 그건 바로 다른 동생들에 대한 회한 섞인 책임전가입니다. 피 값 운운하는 것으로 봐서 어쩌면 르우벤은 요셉이 죽은 줄 알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그 사건 이후로 함께 흉금을 털어놓지 못하는 사이가 되었을 수도 있구요. 여하튼 요셉은 여기서 형제들을 시험합니다. 자신을 팔았던 형제들이 이번에는 시므온을 놓고 어떻게 하나 보는 거죠.
24~26절을 읽어봅시다. 요셉을 포기했던 형제들은 이번에도 시므온을 쉽게 포기하고 돌아옵니다. 물론 그 상황에서 어떻게 할 수 있었겠느냐라고 항변할 수도 있지만 시므온을 대신해서 자기가 죽음의 자리에 있겠다는 사람은 없구요, “그냥” 돌아옵니다. 르우벤은 돌아와서 사태의 전말을 보고하고 시므온의 귀환을 약속하며, 자기의 아들 둘을 담보로 내걸지만 베냐민을 데리고 가는 문제에 있어서 아버지를 설득하지 못합니다.
43장을 보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것 같습니다. 이제 지난 번에 가져왔던 곡식이 다 떨어졌고 이번에는 유다가 아버지를 설득합니다. 야곱은 르우벤이 아니라 유다를 의지하여 남아 있던 라헬의 마지막 아들, 어쩌면 요셉과 닮은 베냐민을 보냅니다. 다행히 모든 일이 잘 처리되고, 시므온도 풀려나고, 총리라는 사람은 복잡한 자기 형제들의 서열까지 알아서 자리를 배정할 정도로 극진하게 잔치도 베풀어주었습니다. 너무나 기쁘게 돌아오고 있는데 요셉의 두 번째 시험에 의해 이번에는 베냐민이 체포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형제들이 베냐민을 쉽게 포기하지 않고 함께 요셉 앞으로 돌아옵니다.
44장 14절을 보시면 이 때, ‘유다와 그 형제들’이라고 표현됩니다. 그리고 요셉과의 대화에서도 유다가 대표로 서게 됩니다. 이제는 베냐민에 대한 걱정 뿐만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걱정을 하는 유다입니다. 요셉을 팔고, 시므온을 포기하던 어슬펐던 그들의 형제애! 그러나 이제는 유다가 대표로 나서면서 베냐민을 대신해서 죽음의 자리에 서겠다는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44장 33, 3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르우벤이 아니라 유다가 아버지를 설득했고, 형제들을 이끌고 베냐민과 함께 요셉 앞에 선 사람도 유다이고, 이제는 베냐민을 대신해서 자기가 죽음에 자리에 있겠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클라이막스 아닙니까? 형제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요셉의 일생을 예수님과 비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장면에서 보면 오히려 유다가 바로 예수님을 닮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하여 이런 선택의 순간을 제공했고, 유다는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결정을 할 만큼 아름답게 빚어져 있었습니다.
도대체 유다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겁니까? 유다의 변화를 보여주는 장면은 다름 아닌 38장 26절에서 한 “그가 나보다 옳도다” 인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한 유다. 그는 요셉과 같이 먼 곳으로 가서 죽을 고생하면서 훈련을 받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요셉을 팔고 그 자책 때문인지 형제들 곁을 떠나 살던 38장의 기간 동안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한 형제들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아버지 야곱의 신임을 받는 사람으로, 결국엔 형제를 위해 대신 죽을 수 있는 사람으로 키워졌습니다. 요셉처럼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는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에 의해 이스라엘의 장자로 빚어졌고, 요셉 앞에서 아버지를 위해 베냐민을 대신해서 죽겠다고 서게 됩니다. 이 장면에서는 요셉이 아니라 유다가 모든 형제의 장자로 증명되는 자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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