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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역사 (국내)

조국근대화 의 박정희 대통령, Presiden Park Chung 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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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근대화 의 박정희 대통령, Presiden Park Chung Hee,

민족중흥, 조국근대화가 삶의 본질 그 자체였던 대통령, 하면된다는 의지로 근대화에 박차를 가했던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 업적 : 새마을 운동

처음에 농민들의 잘 살기 운동으로 시작한 새마을 운동은 해를 거듭할수록 농촌과 도시뿐 아니라 공장, 학교 등으로 번져 전 국민의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왜 욕먹어야 합니까?

저는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보수 청년이고요. 박정희 대통령이 왜 욕먹어야 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1. 박정희 대통령이 독재를 했다면 왜 경제가 발전했을까요?

2. 님이 박정희 대통령 시절 때 살아보셨습니까? 그때는 박정희 대통령 하나같이 위대한 대통령이라고 꼽을 정도인데요?

3.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이 많을까요, 문재인의 업적이 많을까요?

4. 박정희 대통령이 잘못한 것이 많을까요, 문재인이 잘못한 것이 많을까요?

5. 박정희 대통령 시절 박정희 대통령 지지율이 더 높았을까요, 아니면 지금 문재인 지지율이 더 높을까요?

6. 세계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더 선호할까요, 문재인을 더 선호할까요?

7. 흑자 한번 못냈다고 하시는데 그럼 이 자료는 뭘까요?

박정희 대통령때의 그림으로의 경제표,

마지막으로, 님같은 머리가 깨지신 분들만 박정희 대통령을 싫어하는 것이 아닐까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세계인들의 평가를 보시면 딱 답이 나오지 않나요? ^^

적어도 님보단 수백, 수천 배는 세상을 잘 보는 세계인들 같은데요??

1. 독재를 하면 경제가 절대 발전을 못한다는 근거가 멀까요?

독재자에게 있어 자신이 통치하는 나라는 개인의 사유재산과 같은 거랍니다.

독재자라고 해서 일부러 나라 망하게 할까? 나라가 잘되어야 독재자가 해처먹을 수 있는게 더 많으니까 당연히 경제발전에 힘을 쏟을수밖에 없는거지.중국도 공산당 1당 독재국가이지만 경제성장?

2. 박정희때 살아봤단다. 박정희때 하나같이 위대한 대통령이라고 꼽았다고? 부마항쟁은 아냐? 박정희의 독재에 대항해서 시위를 벌인 국민들이 엄청나게 많았답니다.

3. 4. 민주주의 국가에서 민주주의 파괴하고 독재를 일삼으며 국민을 잡아죽인게 잘한 일입니까?

5. 14대 대선에서 박정희와 김대중의 표차이가 얼마나 났는지는 알고 있읍니까?

박정희가 대통령으로서 온갖 금권선거나 관권선거는 물론이고 투개표 조작까지 했음에도 백만표 차이도 안 났답니다.

6. 박정희는 세계적인 독재자로 손꼽히는 사람이야.

이게 타임지 아시아판의 표지입니다.

박근혜가 독재자 박정희의 딸임을 나타낸건데 국내 일부 언론이나 박근혜측에서 스트롱맨을 독재자가 아닌 강력한 지도자라고 왜곡해서 해석하자 타임지가 어떻게 한줄 아십니까?

스트롱맨을 아예 딕테이터, 즉 독재자라는 명확한 문구로 바꿨단다.

타임지에서 박정희를 독재자로 평가한다는 거입니다.

7. 니가 경제성장률과 경상수지의 구분을 못하는 모양인데 경상수지가 뭔지부터?.

그리고 사진을 올리려면 글자나 보이게 원본 사이즈로 올리고. 아무리 독재자였다한들 해당 국가에 대놓고 당신네 나라의 전직 대통령은 독재자입니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흔합니까?

트럼프가 시진핑 만나서 모택동은 독재자야! 라고 말하고 푸틴 만나서 스탈린은 독재자야! 라고 하냐고?

누가 뭔소리를 하고 무슨 평가를 하건 박정희가 군사반란을 통해 불법적으로 정권을 탈취하고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헌법을 유린하며 독재에 항거하는 국민들을 잡아죽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단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성장률만 보지 말고 그 시대의 물가상승률이 얼마나 높았는지도 공부를 해보거라.

질문자님의 추가질문

님이 답변하신 것 중에서 하나하나 다 반박해볼게요^^

1. 중국이 공산국가인데 성장한다구요? 중국이 1인당 GDP가 높습니까? 그리고 중국은 인구가 자그마치 14억이나 되는데 GDP가 높을 수밖에 없죠. 중국이 우리보다 잘삽니까? 홍콩이나 마카오가 중국보다 수십배는 잘사는 거 알고는 계세요? 모택동이 중국 경제 발전 시켰습니까? 참새 다 죽이고 국민들 쫄쫄 굶게 한 중국 새끼랑 비교한다는 거 자체가 수준이 덜떨어지는데요?

2. 부마항쟁 참여자 수는 대략 1만명 입니다. 그때 한국 인구가 3,500만 정도 됐으니까 3,500명 중 한 명이 참가한 것이죠? 근데 지금 조국사퇴.문재인탄핵 광화문집회 참가자 수 얼만진 아십니까?

자그마치 200만명입니다. 약 25명 중 1명이 참가한 것이죠. 그리고 꼭 항상 박정희 대통령은 반대하는 항쟁이나 집회 같은 것은 광화문집회나 이런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의 불가합니다. 한마디로 빨갱이들이 많이 모여봐야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는 것입니다. 모여봐야 우파 발톱만큼도 안됩니다.

3.4. 민주주의 국가에서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많은 국민'을 잡아죽였다고요? 여기서 이 '많은 국민'은
사채업자, 전형적 빨갱이들을 말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선량한 국민을 뭣하러 죽입니까? 그 때는 득실득실하게 사채업자들이 많았던 터라 계엄령 선포하고 사채업자와 빨갱이들을 죽인 것입니다.
좌파들은 항상 불만을 품는 이기주의자거든요. 그래서 죽인겁니다. 좀 알고 말하시길 바랍니다.

5. 14대 대선은 김대중과 김영삼의 대선입니다. 박정희대통령은 그때 없었습니다. 14대 대선이 아니라 7대 대선 아닙니까? 좀 똑바로 알고 말하시죠. 100만 표밖에라뇨? 100만 표가 얼마나 큰 수인진 아십니까? 경기도 용인시 인구만큼입니다. 100만 차이가 난 것이 많이 난 거죠. 완전 김대중의 완패 아닙니까?

6번과 7번은 제한 수가 있어서 다 못 담겠군요. 

2019.11.06.

답변자님의 추가답변

님 학교 안 다녔나요? 아님 무슨 지적장애같은거 있어요? 발달장애야유?

1. 1인당 GDP가 가장 높은 나라가 어디일까? 룩셈부르크란다. 1인당 113,200달러지. 그럼 세계최대의 경제대국인 미국의 1인당 GDP는 얼마일까? 65,110달러로 세계 7위란다. 그렇다면 니 주장대로 해석할 경우 미국의 1인당 GDP는 룩셈부르크보다 한참 낮으니까 경제성장을 전혀 못한거네유?

2. 지금 문재인 반대시위에 참가자가 많은 이유가 뭔지 아니유? 박정희 시절처럼 잡아죽이지 않으니까 그런거야유. 박정희 시절에는 시위하면 잡아서 죽였거든유. 그 시절에 살아보지도 않은 놈이 할 소리가 아집니다. 그리고 불가가 아니라 불과유!

3.4. 그 시절에 박정희로 인해 죽임을 당한 사람들 대부분이 재심을 통해 무죄판결 난건 아니? 그리고 진짜 빨갱이는 박정희라는건 알아? 박정희가 남로당 빨갱이 출신이고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도 빨갱이질하다가 총맞아 죽었쥬. 거당시시절이???

박정희는 남로당 빨갱이질하다가 들통이 나서 군사재판에서 무기징역까지 선고받은 전력이 있어. 누가 빨갱이인지도 모르쥬.

5. 그래유 7대 대선 맞이유. 일일이 자료 찾아보지 않고 쓰다보니!.

그런데 온갖 부정선거를 저질렀음에도 백만표의 차이도 나지 않았다는건 부정선거가 없었을 경우 김대중이 당선되는 결과가 되는건???!.

이지문 중위 사건은 아냐? 군대에서 부정선거를 하는걸 폭로한 사람이 이지문 중위란다. 그게 1992년의 일이었어. 그보다 훨씬 앞선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에 선거가 공정했겠슈?

니들은 박정희가 경제발전시켰으니 잘못한것보다 잘한게 더 많다고 주장하는데 박정희 총맞아 죽을 때가 되어서야 북한보다 조금 잘 살았읍니다.

밥만 먹고 잘 살게 해주면 국민을 잡아죽여도 되나유? 그런식이면 김일성은유??? 2019.11.06.

이렇게 해도???

세계는 못할거라 했지만… ‘반도체-철강-포니차’ 보란듯 해냈다-박정희 대통령 고맙습니다.

"사상루각"은 모래밭위에  건축해 놓은 집은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면 부서지거나 날아가 버린다는 뜻으로 알고있다. 아주 오랜 옛날에, 한창 아직 한국이 농업국가에서 산업화된 사회로 경제의 틀이 바뀌고 있는 과정에서 발생했던 커다란 인재사고가 있었던 기억이 있다.

"와우아파트가 와르르 무너진 사고,성수대교가 폭삭주저앉은 대형사고"등등...
영국이 주도한 산업혁명 당시에도 예상치 않은 인재 사고는 빈발했었던것으로 배워 알고 있다.
한국이라고 예외일수는 없었지만, 당시의 박정희 대통령은, 신앙처럼 실천해 오면서 국민들에게 외쳐댔었던 구호가 있었다. "단군조선이래 5천년동안 보물처럼 후손들에게 전수해온 '가난'을 다시는 후손들에게 전해주지 말자. 열심히 일하면 극복된다'라는 신념과 Leadership을 국민들에게 주지시키면서 손수 앞장서서 경제건설의 현장에서 뛰면서 국민들을 이끌었었다.

농업국가에서 식량이 부족하다는것은,오늘날의 지식과 상식으로는 이해가 잘안되는 그런 사고방식들이 당시에는 당연한것쯤으로 여기고, 어쩌면 자포자기했었던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창원 울산에 공업단지를 조성하여 중화학공업을 시작으로, 경부고속도로를 뚫고, 지하철을 뚫고,서울인천, 서울 수원간에 현대철도인 전철화를 했었고, 포항제철을 경주의 허허벌판에 건설했었고,철강산업과 연결되는 자동차 산업에 시동을 걸었고....

그렇게해서, 세계 역사상 그유례를 찾아볼수없는, 불과 30여년만에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농업국가에서 산업화된 근대국가로 변환하여 유능한 젊은이들의 일자리를 창출했고, 수출의 붐이 일어, 첫번째 1억달러 수출했을때, 온 나라가 잔치를 하는것 처럼 경축했었던 그기억이 지금도 어제일처럼 뇌리속에 있다.

이런산업들 ???

요즘 고국 국민들의 삶의 질을 보면, Infrastructure를 포함하여 서구사회보다 훨씬 잘먹고, 즐기는것을 쉽게 구분할수있다. 정치만 빼고 모든면에서 세계일등국가들과 견주어 손색이 없어 보인다. 그위에 정치만 쪼끔만 정신 차려서 현재의 위치에서 약 5%만 Upgrade시킬수 있다면, 스웨덴 스위스 국가들보다 훨씬 잘사는 나라가 될수 있는 능력과 자질이 우리 한민족의 피속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정치꾼들이여 속좀 차리소서. 하루가 급하데이...

산업화를 위한 산업현장에 뛰어들지는 않고, 소위 '민주주의'를 외치던 그유명한 정치꾼들과 일부 국민들은 박정희시대에 있었던 '자유를 유보하고 독재를하고, 국민들자유를 억압했었다'라고 지금도 비난하는 자들이 있는것 알고있다.  그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편협주의자들이라는것을 나는 감히 외친다.

외모만 자유민주주의 신봉자였던 그사람들은 후에 대통령까지 했지만, 국가안위를 위해 국민들이 우러러 받들만한 업적을 찾기 힘들다. 국가 안보면에서는 더욱 그렇다. 햇볕정책의 허구때문에 오늘날에도 우리뿐만이 아니고 전서방세계가 위협을 느끼면서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하겠다.

영웅은 시대와 장소가 만들어 낸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지만,나는 그말을 진실로 믿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세종대왕이 추앙받지만, 미국의 George Washington대통령, 링컨 대통령,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시대를 현재의 Social Standard에 적용하면, 모두가 독재자일 뿐이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만 빼고, 전부다 지금 한국민의 눈에서는 영웅으로, 대왕으로 추앙받고 있다. 세종대왕시대의 국민들은 하나의 소모품이었었고, 미국의 대통령들은 노예를 개인적으로 500명 이상씩 소유하고 있었던,인권유린한 독재자였었다. 그러나 그런 나쁜점 보다는 국가를 위해 헌신한 점을 높이 샀기 때문에  미국의 영웅으로 한국의 대왕으로 칭송받는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런 영웅이면서 독재자들에 비하면 너무도 선량한 대통령이었다고 인정을 해주는 국민들의 정신적 성숙과 양심이 가슴속에자리하고 있어야 진정한 잘사는 나라의 긍지를 갖일수 있을 것이다.

아직 중학교 다닐때, 도덕시간에 배웠던 "대한민국은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지금도 기억하고있다.  그때는 그렇게 믿었었다. 세상 살아가면서, 국민들의 예의 범절을 놓고볼때, 훌륭한 조상님들, 선배님들에 대한 존경심은 거의 느껴본적이 없어, 나의 생각을 많이 Confuse하게된다. 이제라도 "김문수"전 경기도 지사의 말씀처럼, 잘한점은 추겨주고, 사소한 불찰은 덮어주어, 국가적 영웅을  만들어 내는데 국민들의 협동심과 지혜를 총동원해야 할때가 지금 아닐까?라고 믿는다.

동남와, 미국, 그리고 아프리카 국가들을 탐방해보면, 오히려 그곳의 국민들은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을 높이 칭송하면서, 한국민들은 참으로 복이 많다. 자기네 나라에도 그러한 위대한 지도자가 나오기를 고대하고 있다"라고 부러워 하는 표현을 하는 주민들과 많이 만나면서, 박대통령에 대한 고마움을 더했었다.  불행하게도 박정희 대통령을 후세에 기리기위한 기념관 또는 상징물 하나 없다고 들었다. 햇볕정책을 주창했던 그분은 기념관 또는 상징물이 무려 12개가 넘는다고 들었다. 이얼마나 편협적인 한국민들의 국가관인가?

https://lifemeansgo.blogspot.com/2019/10/blog-post_28.html

아래는 동아일보의 기사내용이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래 청진에 가자. 어디 가서 어떤 노동을 해도 지금보다야 못하겠는가.”(정주영 동아일보 에세이 ‘나의 기업 나의 인생’ 중) 

1931년 강원 통천군 시골마을의 배고픈 열여섯 살 소년은 구장집이 받아보는 동아일보에 실린 구인광고를 보자 가슴이 뛰었다. 소년은 아버지에게 드릴 땔감 값을 1, 2전씩 빼돌려 가출 자금을 모았다. 첫 번째 가출은 아버지에게 덜미 잡혀 실패로 끝났다. 세 번째 가출도 동아일보에 난 부기학원 광고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소를 판 돈을 훔쳐 서울로 야반도주해 부기학원을 다녔다. 몇 달 뒤 아버지가 찾아와 “종손은 고향을 지켜야 한다”고 하소연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네 번째 가출은 성공이었다. 서울 쌀가게의 배달원 정주영은 특유의 바지런하고 정직한 성품으로 주인과 손님의 신용을 얻었다. 주인이 쌀가게를 넘겨준 1937년, 22세의 청년 정주영은 서울 신당동 일대 ‘경일상회’ 사장이 됐다. 이 쌀가게는 오늘날 현대자동차그룹, 현대중공업그룹, 현대그룹을 탄생시킨 사업 밑천이 됐다. 

기업가 정신으로 일군 한국 기업 100년
  

동아일보가 자문위원 30인과 함께 100개를 선정한 ‘한국 기업 100년, 퀀텀점프의 순간들’ 중 상위 20개 가운데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 회장과 관련된 장면만 6개였다. ‘한국 최초의 독자개발 승용차 포니’(1976년·3위), ‘현대차 설립’(1967년·6위), ‘현대중공업 1호선 진수 및 인도’(1974년·8위) 등이 해당된다.

관련기사,

1915년에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1919년 3·1운동 이후 등장한 신문, 철도, 산업화 등 ‘근대화의 물결’을 타고 조선·자동차·건설 강국을 일궈낸 정 회장의 삶 자체가 한국 경제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위 중 삼성과 관련된 장면도 6개다. 1위인 ‘이병철 도쿄 선언’(1983년)을 비롯해 ‘삼성전자 설립’(1969년·4위), ‘이건희 신경영선언’(1993년·7위) 등이다. 포항제철 건설과 관련된 ‘포항제철 첫 쇳물 생산’(1973년·2위), ‘박태준의 하와이 구상’(1969년·15위)도 높은 지지를 받았다. 미국에서 제철소 건설에 필요한 차관을 얻는 데 실패한 박태준 당시 포철 사장이 하와이에서 목 놓아 울다가 대일청구권 자금 활용 아이디어를 떠올려 오늘날 포스코를 만든 그 장면이다.

정구현 연세대 명예교수는 “한국은 정부가 먼저 중화학산업 육성책을 내놓았고 기업이 이에 발맞춰 경제성장을 이뤘다. 당시 한국으로서는 불가능한 과제를 가능케 한,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리더들의 출현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1919년 첫 근대식 주식회사로 꼽히는 경성방직(경방)이 등장한 이후 창업가 정신으로 뭉친 기업인들이 농업 한국을 경공업 한국으로, 이어 중화학공업 한국, 첨단 전자산업 한국으로 퀀텀점프시키는 주역이었다는 의미다.

실제로 한국이 제철소, 조선소, 자동차 공장, 반도체 공장을 지을 때 세계는 비웃었다. 투자나 기술 자문을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현대차 설립이 1967년인 것은 마침 미국 포드가 1966년 한국에 진출할 목적으로 사업 파트너를 찾으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회사를 만들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포드가 기술 이전이 가능한 합작사 설립에는 발을 빼자 현대차는 독자 생존밖에 답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게 ‘포니’다.

1973년 6월 9일 오전 7시 30분, 포철 용광로에서 쇳물이 나오자 박태준 사장을 비롯한 창립요원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 1968년 세계은행이 “한국의 제철공장은 엄청난 외환비용에 비춰 경제성이 의심되므로 종합제철 건설을 연기하고 노동 및 기술 집약적인 기계 공업 개발을 우선 해야 한다”고 주장한 지 5년 만의 쾌거였다.

LG그룹 창업주 구인회 회장은 한국에 전자산업을 뿌리내린 혁신적 기업인이었다. 한국 최초의 라디오, TV, 세탁기, 냉장고는 모두 금성사(현 LG전자)에서 나왔다. 한국인의 일상을 바꾼 화장품(럭키크림), 하이타이(최초의 합성세제) 등도 LG의 작품이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기업가 정신이 오늘의 한국 일궈내” 

한국을 넘어 세계로,

1993년 이건희 삼성 회장의 ‘신경영선언’은 한국이 ‘품질 경영’으로 눈을 돌리는 계기를 마련한 획기적 순간이다. 시작은 일상에서 비롯됐다. 삼성 사내방송인 SBC가 한 프로그램에서 세탁기 뚜껑이 불량인데도 라인 작업자가 태연하게 부품을 칼로 깎아낸 뒤 대충 끼워 맞추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보도했다. 당시 일본에서 독일로 출장길에 올랐던 이 회장은 기내에서 이 소식을 듣고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서울 비서실로 전화해 200여 명의 삼성 수뇌부를 독일로 불러들였다. “아내와 자식만 빼놓고 모든 것을 바꿔야 한다”는 명언이 이때 나왔다.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미국이 일본 견제에 나서면서 ‘엔고’ 시대가 열렸다. 세계시장에서 일본 제품의 값이 비싸지면서 1990년대 초반 한국 상품은 잘 팔리고 있었다. 하지만 불량품을 칼로 깎아 억지 제품을 만드는 수준의 품질로는 일류기업 근처에도 못 간다는 게 이 회장의 판단이었다.

김경원 세종대 경영대 학장은 “1990년대 삼성의 혁신적 경영방침, 조직개편 등은 많은 다른 기업에 영향을 줬다. 품질경영 선언 역시 재계로 확산돼 한국 기업의 체질 변화를 가져왔다”고 평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 2000년 이후 글로벌 정상에 오르는 한국 기업들이 속속 등장했다. 2000년 한국 조선산업이 수주량, 건조량 등 모든 분야에서 세계 1위를 휩쓸었다. 2006년 삼성전자 TV는 소니를 이기고 세계 1위를 차지했다. 현대차는 1999년 미국에서 실시한 파격적인 10년, 10만 마일 무상 보증제로 글로벌 시장에서 인정받아 자동차 5대 메이커가 되기도 했다. 1986년 ‘엑셀’로 미국에 첫발을 내디딘 지 13년 만이었다.

이동통신·인터넷·뉴 키즈의 등장

1990년대 인터넷과 이동통신, 386 기업인의 등장은 한국 경제의 지형을 또 한 번 바꿨다. 현재 재계 3위인 SK그룹이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을 우여곡절 끝에 김영삼 정부 출범 둘째 해인 1994년 인수했다. 1996년 세계 최초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상용화에 성공하면서 한국은 통신강국으로 떠오르게 됐다.

1995년 한메일이라는 e메일 서비스를 바탕으로 한 다음의 등장(19위)과 1999년 네이버 서비스의 시작(12위)은 ‘뉴 키즈’ 기업인 시대를 예고했다. 이재웅 다음 창업자는 27세에,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는 32세에 회사를 차렸다.

한국 기업사의 주요 명장면 중에는 화려하게 등장했다 허무하게 사라진 ‘대우 해체’(1998년·10위)도 있다. 세계 경영의 자부심, 외환위기의 아픔, 어떤 기업도 영원할 수 없다는 교훈을 남긴 장면이었다.

▼ 자문위원 30명, 5개분야 나눠 사건 중요도 평가 ▼

퀀텀점프 100장면 어떻게 뽑았나

동아일보가 내년 창간 100주년을 맞아 선정한 ‘한국 기업 100년, 퀀텀점프의 순간들’은 취재팀이 자문위원 30명과 함께 자료 수집, 설문, 분석 등의 과정을 거쳐 나온 결과물이다. 동아일보 취재팀은 한국 기업사 주요 사건을 연도별로 1차 선정한 후 이를 △한국 기업사 △기술혁신 △거시경제 사건 △인수합병(M&A) △혁신 상품 및 브랜드 등 5가지 분야로 나눠 자문위원을 대상으로 설문조사 및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경제·경영학을 비롯한 이공계 분야 대학교수, 국책연구소, 경제단체, 전직 관료 등으로 구성된 자문위원은 중요한 장면에 순위를 매겼고 취재팀은 이를 바탕으로 총 100개를 확정했다.

자문위원 명단(30명·가나다순)

△ 권오경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석학교수·한국공학한림원 회장 △ 권태신 전국경제인연합회 한국경제연구원 원장 △ 김경원 세종대 경영대학장 겸 대외부총장 △ 김민호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 △ 김승우 순천향대 스마트자동차학과 교수·경영부총장 △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 △ 김현욱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 나정효 충남대 전기공학과 교수 △ 박영렬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 △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 △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서승원 중소기업중앙회 부회장 △ 서영경 대한상공회의소 지속가능경영이니셔티브(SGI) 원장 △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 △ 서진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신동엽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 △ 신민수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 △ 양현봉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여준상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 △ 이석준 전 국무조정실장 △ 이인실 서강대 경제대학원 교수 △ 이인호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 이형준 한국경영자총협회 기획실장 △ 장영재 KAIST 산업및시스템공학과 교수 △ 정구현 연세대 명예교수 △ 정희철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연구원 동향분석실장 △ 조장옥 서강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 최원식 맥킨지 한국사무소 대표 △ 하영원 서강대 경영학부 교수 △ 한상만 성균관대 경영학부 교수

경제 개발 동력,

오늘날 많은 외국인들은 우리의 경제발전을 가리켜 한강(漢江)의 기적(奇蹟)이니, 한국인(韓國人)의 경이(驚異)라고 표현하는가 하면, 한국(韓國)이 조만간 손꼽히는 경제대국(經濟大國)으로 부상(浮上)하리라고 예언하고 있다. 70년대(七十年代)에 이룩한 우리의 성장속도(成長速度)는 과거 기적적인 부흥(復興)을 이루었던 일본(日本)이나 독일(獨逸)의 그것을 단연 앞서기 시작했던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제발전은 결코 기적(奇蹟)이 아니라, 온 국민이 자립(自立)에의 의지(意志)를 갖고 함께 땀흘려 일한 당연한 결과이다. 우리는 실로 한데 뭉쳐 일함으로써, 극복하기 어려웠던 거듭된 시련(試鍊)을 극복했고, 그로 인해 우리의 전진(前進)이 더욱 값지고 빛나게 된 것이다. 1974년의 석유파동(石油波動)과 이에 뒤이은 세계적인 경기후퇴(景氣後退)만 하더라도, 수출을 주축(主軸)으로 성장해 온 우리의 경제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그 당시 유류가(油類價)가 일시에 네 배로 뛰었을 뿐 아니라, 설상가상으로 농산물의 국제가격(國際價格)도 아울러 폭등하여, 우리는 그렇지 않아도 어려웠던 국제수지(國際收支)에 더욱 심한 역조(逆調)를 보게 되었고, 그로 인해 국내물가(國內物價)마저 갑자기 뛰어오르는 시련을 겪었던 것이다.

많은 선진국(先進國)들은 국제수지(國際收支)의 악화를 막기 위하여 재정금융(財政金融)의 긴축(緊縮)을 강화함으로써, 국제통화(國際通貨)의 위기가 한층 심화(深化)되었고, 그 결과 그들의 경제는 오히려 답보상태를 면하지 못했다. 그러나 세계무역(世界貿易) 자체를 둔화(鈍化)시켰던 그 위기와 암영(暗影)속에서도, 우리는 끝내 이를 슬기롭게 극복하여 지속적인 경제의 고도성장(高度成長)을 이룩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정부는 정부대로, 물가(物價)의 상승(上昇)을 어느 정도 감수하면서도, 기업의 생산과 수출활동에 대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기업(企業)은 기업(企業)대로, 원가고(原價高)의 어려운 여건 아래서 활발한 생산활동을 계속했으며, 우리의 기술자와 근로자들은 생산성 향상(生産性 向上)과 상품의 품질향상을 위해 더욱 분발함으로써, 마침내 우리는 불경기에 허덕이는 선진국(先進國) 시장을 뚫고 들어가 수출을 증대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우리 나라의 수출신장률(輸出伸張率)은 세계무역량(世界貿易量)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던 1974 - 75년도에도 계속 30 % 선을 유지하여 세계(世界)의 이목(耳目)을 모았다. 이에 따라 제3차 오개년계획(第三次 五個年計劃) 기간 중, 당초의 목표보다 오히려 높은 성장률이 달성됨으로써, 자립경제(自立經濟)의 기반과 구조가 반석(盤石)처럼 굳어졌음은 물론, 산업(産業)과 산업간(産業間)의, 그리고 지역(地域)과 지역간(地域間)의 격차가 크게 줄어들어 균형 있는 발전의 산유국(産油國)을 제외한 세계(世界)의 많은 나라들이 경제적인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어려운 역경 속에서, 이렇다 할 부존자원(賦存資源)도 없이 대외의존도(對外依存度)가 높았던 동양(東洋)의 한 전통사회(傳統社會)가, 그처럼 줄기찬 고도성장(高度成長)을 지속한 것은, 우리 국민의 저력(底力)에 대한 국제적인 인식을 새롭게 하였을 뿐 아니라, 민족중흥(民族中興)을 향한 우리의 앞날에 무한한 가능성(可能性)을 확신케 해 준 귀중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확실히 우리 민족(民族)은 우수한 자질(資質)과 뛰어난 저력(底力)을 갖고 있다. 우리에게는 교육(敎育)되고 훈련된 풍부한 인적자원(人的資源)이 있다. 우리 국민은 일찍부터 문화(文化)와 학문(學問)을 숭상해 왔으며, 지금도 누구나 교육(敎育)의 기회가 주어지면 열심히 공부하는 분위기가 사회에 충일해 있다. 해방이래 우리 국민의 교육열(敎育熱)과 교육수준(敎育水準)은 그 어느 나라에 비해도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높았고, 교육(敎育)에 대한 공공투자(公共投資)도 컸으며, 이것이 우리 경제의 중요한 성장잠재력(成長潛在力)으로 작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중고등학교(中高等學校)와 대학(大學)은 물론, 군복무(軍服務)기간 중의 귀중한 교육의 기회가 충분히 활용되어, 유능한 인적자원(人的資源)이 풍부하게 배출되고 있다. 우리의 젊은 일군들이 근면하고 우수하다는 것은 이미 세계에 정평(定評)이 나 있으며, 그것은 우리의 기능공(技能工)들이 국제기능대회(國際技能大會)를 석권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우리 국민의 우수한 자질(資質)은 또한 근대화(近代化)과정에서 배출된 유능한 기업인들과 공무원에 의해서도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왕성한 기업의욕(企業意欲)을 가진 우리의 기업인들은 합리적인 경영(經營)과 전략(戰略)을 통해 생산(生産)과 수출(輸出)에 힘쓰고 있으며, 국내외에서 교육(敎育)받은 역량(力量)있는 공무원과 학자들이 투철한 사명감을 갖고 정책의 입안(立案)과 집행(執行)에 참여하여 경제건설의 역군(役軍)이 되고 있다.

이러한 우리 국민의 우수한 자질(資質)과 역량(力量)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가 개방사회(開放社會) 아래 자유경제(自由經濟)의 원리(原理)를 최대한으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유재산(私有財産)을 부정하고, 개인의 자유(自由)와 창의(創意)를 말살하고 있는 북한경제(北韓經濟)가 오늘날 얼마나 참담한 상태에 있는가를 보면 분명해진다. 북한(北韓)에서는 극단적인 폐쇄경제(閉鎖經濟) 아래 거주이전(居住移轉)이나 직업선택(職業選擇)의 자유(自由)를 박탈하고, 온 주민을 전쟁준비에 강제동원 함으로써 개인의 자유로운 생산활동이 완전히 봉쇄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우리 겨레의 숨은 저력(底力)이 발휘될 기회가 막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자유사회(自由社會)에서는 누구에게나 경제활동의 자유(自由)가 보장되어 모든 국민이 선의(善意)의 경쟁(競爭)을 통해 자기의 창의(創意)와 능력(能力)을 최대로 발휘하고 있고, 이것이 국가발전의 동력(動力)이 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처럼 효율적인 근대화(近代化)의 전략(戰略)을 세우고, 국민(國民)의 잠재력(潛在力)을 개발하여 이를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간의 정치적(政治的) 안정(安定)이 없었더라면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질서가 마비된 혼란(混亂)속에서는 건설(建設)과 성장(成長)이 있을 수 없으며, 안정(安定)이 위협받는 불안(不安)속에서는 개발(開發)과 발전(發展)이 있을 수 없다. 우리가 70년대 전반(前半)에 세계를 휩쓴 불경기(不景氣)속에서도 고도성장(高度成長)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실로 우리가 안정(安定)된 질서(秩序)의 바탕 위에서 합리적이며 효율적으로 위기에 대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들은 북한공산집단(北韓共産集團)의 끊임없는 도전과 그로 인한 전쟁의 위협 속에서 국력(國力)을 배양하는 것만이 우리의 생존과 번영을 보장하고, 평화통일(平和統一)의 소망(所望)을 이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한결같이 깨닫고, 너나 할 것 없이 국민총화(國民總和)에 앞장섰다. 이처럼 국가목표에 대한 확고한 국민적(國民的) 합의(合意)아래, 안정(安定)과 총화(總和)의 기틀이 마련됨으로써, 생산(生産)과 건설(建設)이 차질 없이 추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우리는 단순한 반공(反共)의 발판을 굳게 다져나가고 있다. 나는 일찍이 우리의 자유체제(自由體制)와 북한의 공산체제(共産體制) 가운데 어느 것이 더 국민을 풍요하고 잘 살게 할 수 있느냐를 결정하기 위해 개발과 건설의 경쟁에 나설 것을 제의했다. 이러한 남북한(南北韓)간의 선의(善意)의 경쟁은 이미 우리의 승리(勝利)로 판가름나고 있지만, 우리는 앞으로도 개방사회(開放社會)의 장점과 정치안정(政治安靜)의 바탕 위에서, 우리 국민의 자질(資質)을 더욱 발휘하여 경제의 고도성장(高度成長)을 지속시켜 나감으로써, 이 땅에 풍요한 고도산업사회(高度産業社會)를 이룩해야 한다.

물론, 고도성장(高度成長)이 앞으로도 가능하며, 과연 우리가 고도산업사회(高度産業社會)를 그렇게 빨리 이룩할 수 있느냐 하는 데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더러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들의 정신적(精神的) 자세(姿勢)와 노력이다. 이제 우리도 웬만큼 잘 살게 되었으니, 적당히 해두자는 식의 정신이완(精神弛緩)이 생긴다면, 더 이상의 발전은 어렵게 되고, 앞으로 더욱 치열해질 국제경쟁(國際競爭)에서 또다시 낙오함으로써, 그간 땀흘려 이룩한 성장(成長)의 성과마저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우리보다 수십 배의 국민소득(國民所得)을 가진 나라들은 현재의 수준에 만족할 수도 있겠지만, 그 동안 가난을 탈피하기 위해 피땀어린 노력을 기울여 온 우리로서는 현 단계에서 발전(發展)의 속도를 늦출 수는 없다. 모처럼 선진국(先進國)의 대열(隊列)에 올라설 수 있는 이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고 그만 여기서 주저앉고 만다면, 우리에게는 또다시 중흥(中興)의 기회가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우리가 이룩한 개발의 성과는 우리의 출발 당시의 실정에 비해 크다고 할 수 있을 뿐, 평화통일(平和統一)과 민족중흥(民族中興)을 이룩하겠다는 우리의 목표(目標)에는 아직도 미흡하다. 우리는 선진경제대국(先進經濟大國)들에 비해 아직도 뒤떨어져 있으며, 그들의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10여년이 중요한 고비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현실이나 국제정세는 우리가 이미 이룩한 성과(成果)로 자위(自慰)하거나 만족할 수 있는 여유를 허용치 않고 있으며, 오직 지속적 성장(成長)을 위한 부단한 노력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경제의 고도성장(高度成長)을 지속시켜 국민생활을 향상시키고, 사회복지(社會福祉)를 꾸준히 확대시켜 나가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아직도 일자리가 없는 사람이 많은 우리의 형편에서는, 경제성장(經濟成長)을 통해 새로운 고용의 기회(機會)를 창출(創出)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해마다 늘어나는 청소년인구(靑少年人口)만 해도 오십만(五十萬)명에 가까우며, 이들에게 새로운 일자리가 마련되지 않으면, 그들의 생활이 어려울 뿐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막대한 인적자원(人的資源)의 손실을 가져오게 된다. 마치 발전소(發電所)가 없으면, 전력(電力)을 생산(生産)할 수 있는 강물이 그냥 바다로 흘러가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복지정책(福祉政策)이라고 하면, 흔히 오늘의 서구선진사회(西歐先進社會)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과 같이, 일은 적게 하고 노후까지 편안하게 살 수 있게 정부가 각종 혜택(惠澤)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아직도 유휴노동력(遊休勞動力)이 많은 우리의 경우, 이들을 생산의 역군으로 돌리는 것이 바로 복지정책의 중요한 출발(出發)이며, 그것이 곧 경제발전과 복지사회(福祉社會) 건설(建設)의 원동력(原動力)이 되는 것이다.

우리 국민들이 그간의 경제발전(經濟發展)의 성과를 보고, 모처럼 잘 살게 되리라는 희망(希望)과 기대(期待)에 부풀어 있는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경제성장을 지속시켜 모든 국민에게 일자리를 마련하고, 아울러 그 후생(厚生)과 복지(福祉)를 더욱 향상시켜 나가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경제의 고도성장(高度成長)을 추구해야 하는 보다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북한(北韓)과의 대결에서 우리의 압도적인 우위(優位)를 확보해야 한다는 데 있다. 우리의 경제력(經濟力)은 이미 북한(北韓)의 세 배에 이르고 있지만, 호전적(好戰的)인 북한공산집단(北韓共義集團)은 그들의 모든 자원(資源)을 전쟁준비에 동원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군사적(軍事的) 위협은 아직도 크다.

이러한 침략의 위협을 저지(沮止)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자주국방력(自主國防力)을 더욱 강화해 나가야 할 형편이다. 특히 주한미군(駐韓美軍)의 철수로 인해 최신과학무기(最新科學武器)의 개발, 그리고 노후무기(老朽武器)의 대체 등에 필요한 국방비(國防費)의 부담이 날로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국방비(國防費) 증가(增加)를 감당할 수 있는 길은 경제성장(經濟成長)을 줄기차게 계속하는 것뿐이다. 

물론 고도경제성장(高度經濟成長)을 지속시켜 나가는 데 있어서는 어려운 문제와 난관이 없지 않다. 자주국방(自主國防)의 강화나 국민복지(國民福祉)의 확대는 경제성장을 필요로 하면서, 동시에 성장을 제약하는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어떻게 그들간의 균형과 조화를 이룩하느냐 하는 것도 어려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난날 우리는 훨씬 적은 경제규모 아래서도, 싸우면서 건설하고, 건설하면서 싸우는 저력(底力)을 발휘해 왔으며, 우리의 경제규모와 적응력이 계속 커지고 있는 만큼, 우리가 힘을 합쳐 노력하면 이를 충분히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수출(輸出)에 역점(力點)을 두고 있는 우리 경제는 해외시장이나 국제적인 여건의 변동에 커다란 영향을 받기 쉽기 때문에, 현재 대두되고 있는 자원민족주의(資源民族主義)나 보호무역주의(保護貿易主義)의 경향도 우리가 극복해야 할 난관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외부의 상황변화(狀況變化)를 미리 예측하고 판단하는 장기적인 안목(眼目)을 갖고, 그에 기민하고 신축성 있게 대처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다른 나라의 보호무역주의(保護貿易主義) 경향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국제화(國際化)의 전략(戰略)을 통해 꾸준히 경제발전(經濟發展)을 이룩해 왔으며, 앞으로도 이러한 경험을 살려 수입자유화(輸入自由化)를 비롯한 국제적인 교류(交流)와 협력(協力)을 더욱 강화하여, 우리 경제의 고도성장과 국제경제(國際經濟)의 안정에 이바지하는 길을 추구해 나갈 것이다.

선진국(先進國)들을 추격하는 입장에 있는 우리로서는, 오늘날의 선진국(先進國)들이 걸어온 전철(前轍)을 밟지 않을 수 있다는 이점(利點)은 있지만, 그 반면 그들과 국제시장(國際市場)에서 경쟁(競爭)해야 하는 부담과 함께, 그들 선진사회(先進社會)로부터 유입(流入)되는 문화(文化)와 사상(思想)으로 인해 가치(價値)의 혼란(混亂)을 겪게 되는 단점(短點)도 있다.

우리가 우리의 자주성(自主性)을 확고히 견지해 나가야 하는 이유도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우리의 선택(選擇)의 자유(自由)를 극대화(極大化)하기 위함이다. 더구나 우리는 선진국(先進國)들이 겪은 시행착오의 과정을 되풀이함이 없이, 하루 빨리 선진국(先進國) 대열(隊列)에 참여해야 할 과제를 갖고 있는 만큼, 선진국(先進國)들의 생활방식(生活方式)이나 태도를 무조건 추종하거나 이를 무분별하게 모방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선진국(先進國)들의 경험에서 참 교훈(敎訓)을 배우면서, 확고한 자주성(自主性)의 바탕 위에서, 우리의 발전(發展)의 방향을 스스로 설정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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