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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역사 (국내)

12·12군사반란,[ 十二十二軍事叛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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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군사반란,[  ]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노태우 등이 이끌던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세력이 일으킨 군사반란사건.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ㆍ노태우 등이 주동하고 군부내 사조직인 하나회가 중심이 되어 신군부 세력이 일으킨 군사반란으로,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 없이 당시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불법으로 강제 연행하는 등의 사건이 일어났다.

김재규가 대통령 박정희를 살해한 1979년 10ㆍ26사건을 계기로 하여 정승화 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에 취임한다.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은 정승화가 김재규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10ㆍ26사건 수사에 비협조적이라고 하여 정승화를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한다. 이 일련의 사건에 관여한 사람은 9사단장 노태우를 비롯하여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 1군단장 황영시, 수도군단장 차규헌, 20사단장 박준병, 1공수여단장 박희도, 3공수여단장 최세창, 5공수여단장 장기오,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우경윤 등이다.

10·26사건이 일어나 대통령 박정희가 암살된 뒤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던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간에는 사건수사와 군인사문제를 놓고 갈등이 있었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은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정승화가 김재규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10·26사건 수사에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임을 내세워 정승화를 강제 연행하기로 계획하였다.

정승화 총장의 신변안전에 책임이 있는 특전사령관 정병주, 수경사령관 장태완,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는 보안사 비서실장 허화평에게 유인되어 연희동 요정의 연회에 참석 중이었다.

당시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강제 연행은 당시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없이 진행되었고, 사후 재가를 받기 위하여 신군부 세력은 최규하에게 강압적으로 정승화 총장 연행의 재가를 요청하나 거절당한다. 이에 맞서 신군부 세력은 국방장관 노재현을 체포하여 노재현에게 대통령을 설득하도록 한다. 마침내 대통령 최규하는 13일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하였고, 이후 신군부 세력은 제5공화국의 핵심세력으로 등장한다.

대부분의 신군부 세력은 권력의 요직을 차지한다. 즉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이희성 중장, 수도경비사령관에 노태우 소장, 특전사령관에 정호용 소장이 임명되고, 그 외에 유병현ㆍ황영시ㆍ김복동ㆍ유학성ㆍ박준병 등은 군의 요직을 차지한다. 그리고 마침내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실시하여 국가권력을 탈취한다. 그 다음날 ‘5ㆍ18광주민주화운동’이 시작된다.

그 후로 12ㆍ12사태의 진상은 비밀로 묻혀 있다가, 김영삼 정부가 사실규명에 나서 사법적 심판에서 ‘하극상에 의한 군사쿠데타’로 규정되고 쿠데타의 주역인 전두환ㆍ노태우는 구속된다. 그 후 김영삼정부는 전두환ㆍ노태우를 특별사면 한다.

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11월 중순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 1군단장 황영시, 수도군단장 차규헌, 9사단장 노태우 등과 함께 모의한 후 12월 12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20사단장 박준병, 1공수여단장 박희도, 3공수여단장 최세창, 5공수여단장 장기오 등과 사전 접촉하였다. 그리고 12월 초순 전두환은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과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우경윤에게 정승화연행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12일 저녁 허삼수·우경윤 등 보안사 수사관과 수도경비사령부 33헌병대 병력 50명은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난입하여 경비원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제압한 후 정승화를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하였다.

한편, 총장의 연행에 저항할지도 모르는 특전사령관 정병주, 수경사령관 장태완,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는 보안사 비서실장 허화평에게 유인되어 연희동 요정의 연회에 초대되었다. 연회 도중 총장의 연행사실이 전해지자 정병주·장태완 등의 육군장성들이 대응태세를 갖추려 하였으나, 이미 전두환이 박희도와 장기오에게 지시하여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게 함으로써 육군지휘부를 무력화시킨 후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진전은 당시 대통령 최규하의 재가 없이 이루어졌다. 사후 승인을 받기 위하여 신군부세력은 최규하에게 압력을 가하여 총장연행 재가를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에 신군부세력은 국방장관 노재현을 체포하여 그를 통하여 대통령이 총장연행을 재가하게 설득하였다. 결국 최규하는 13일 새벽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하였고, 이후 신군부세력은 제5공화국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전두환 경남 합천 출생. 군인 출신으로 한국의 제11대, 제12대 대한민국 대통령을 역임한 인물로 군사정권을 이용하여 무고한 시민들을 무력 진압함으로서 많은 시민들을 희생시키고 군부독재라는 비판을 받았으나 재임기간 중 물가안정, 서울올림픽 유치, 무역흑자 등 경제면에서 기여한 바가 크다. 퇴임 후 광주민주화운동과 5공비리문제로 백담사에서 은둔생활을 하였고, 1996년 12·12 및 5·18사건, 비자금사건과 관련하여 사법처리되었다. 

"전두환(全斗煥, 1931년 3월 6일 (1931년 음력 1월 18일) - )은 대한민국 제11·12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완산(完山).

임기/ 국무총리/ 신상정보/ 출생일/ 출생지/ 거주지/ 정당/ 학력/ 별명/ 배우자/ 자녀/ 부모/ 서명/ 복무/ 복무기간/ 소속/  최종계급/ 지휘참전/

1980년 9월 1일 ~ 1988년 2월 24일
남덕우 (1980년 ~ 1982년)
유창순 (1982년)
김상협 (1982년 ~ 1983년)
진의종 (1983년 ~ 1985년)
노신영 (1985년 ~ 1987년)
김정렬 (1987년 ~ 1988년)

전임: 최규하(제10대)대통령

후임: 노태우(제13대)대통령

1931년 3월 6일 (89세)
일제 강점기 조선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민주정의당 (1980-1988)
무소속 (1988- )
육군사관학교 학사
호: 일해(日海)
자: 용성(勇星)
이순자
3남 1녀
아버지 전상우, 어머니 김점문
 
군사 경력

육군 대위 시절의 전두환 (1959년)
대한민국 국군
1955년 2월 ~ 1980년 8월 22일
대한민국 육군
호: 일해(日海)
자: 용성(勇星)
 대장(大將)
육군 수도경비사령부 제30대대장
파월 육군 백마부대 29연대장
1공수특전여단장
1사단장
국군 보안사령관
베트남 전쟁

경상남도 합천군에서 태어났지만 5세에 대구로 이주하였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자진하여 대한민국 국군으로 참전하였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전방 야전군 장교 시절을 거쳐, 60년대 베트남전에 연대장으로 참전하였다. 그후 보안사령관, 중앙정보부장 서리, 국보위 상임위원장 등을 역임, 육군 대장 예편 후 정계에 입문했다.

1955년 3월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소대장, 교육장교, 육군사관학교 구대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육사 11기 모임인 북극성회와 군내 기수별 친목모임인 하나회에 참여하였다. 그 뒤 하나회의 리더 중의 한 사람으로 성장하였다. 1961년 5월 16일 5.16 군사 쿠데타 당시 육사생도들의 쿠데타 지지 시위를 주도하였다.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관과 중정 인사과장 등을 거쳐 1970년 11월부터 1년간 백마부대 29연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었다가 귀국하였다. 1973년에는 1공수특전여단장 재직 중 윤필용 사건으로 숙청될 위기를 넘기고 1976년 3월 차지철, 박종규 등의 추천으로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 겸 보안차장보로 발탁되었다. 동시에 하나회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1979년 3월 육군본부 보안사령관으로 발탁되고, 10.26 사태 후 합동수사본부장이 되어 박정희 암살 사건을 수사하였다. 1979년 12월 12일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김재규의 협력자라는 혐의로 체포한 12·12 군사 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하였다.

1980년 3월에는 최규하, 신현확에게 중앙정보부장직을 요구, 그해 4월 14일 중앙정보부장 서리직을 겸직하였으며 대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발동하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유혈진압을 주도했다. 5월 27일에는 국보위를 조직하고 상임위원장이 되어 정부의 실권을 장악했다. 1980년 9월 1일 장충체육관에서의 간선제를 통해 스스로 대한민국의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81년 3월 3일 역시 체육관에서의 간접 선거를 통해 스스로 대한민국의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그해 5월 국풍 81 축제를 개최하여 광주 민주화 운동 1주기에 대한 관심과 분위기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 시도했다. 전두환 정권은 이후 1982년 한국프로야구를 창설하고 야간통행금지 조치를 해제하였으며, 학원 두발/복장 자율화 정책을 시도하고 서울지하철 2,3,4호선 등의 선진국형 국토개발에 주력하여 신군부에 반발하는 세력을 유화시킴과 동시에 국가의 문화 산업 발전과 국민 생활의 질적 향상을 위한 정책을 펼쳤다. 컬러 텔레비전 보급, 포르노 영화 장려로 대표되는 3S 정책 또한 이러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선진국으로 발돋움 하기 위한 새질서를 확립한다는 목적으로 삼청교육대를 창설하였으나, 활동 과정에서 유죄 판결을 내린 범법자들의 인권을 유린하였다, 민주화 운동에 대한 탄압 또한 지속하였다.

이러한 탄압의 연장선에서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일어난 6월 항쟁에 따라 시민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1987년 6월 29일 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하였다. 대통령 직선제 실시에 따라 후임 노태우 대통령 취임 전까지 재직하였다. 1989년 12월 31일 13대 국회의 증언대에서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을 '자위권 발동'이라고 진술하여 의원들의 항의를 받았다.

대통령직 퇴임 이후 7년 뒤인 1995년에 구속 기소되어 1심에서 내란죄  반란죄 수괴 혐의로 1심에서는 사형을,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1997년 12월 22일에 사면·복권되었다. 사실 1997년 12월, 제15대 대선 당시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3후보 모두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복권을 공약으로 내세워 논란을 빚기도 했고 이 전두환은 김대중대통령 시절인 1999년 사면된 이후에도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여 정계복귀를 노려왔던 것으로 밝혀져 논란을 빚었다.

1999년 3월에는 전두환과 5공 출신 인사들의 정계복귀가 밝혀져 눈길을 끌었다.

1999년 8월 31일, 전두환은 김중권 대통령 비서실장과의 골프회동에서 정계복귀에 대한 여운을 남겼다. 당시 전두환은 특가법상 뇌물수수죄로 추징금 2,200억원을 선고받았다. 2013년 9월에 추징금 완납 계획을 발표했으나 아직 완납하지 않은 상태이다. 2019년 3월 11일, 전두환은 대통령 재직시절 이후 35년만에 조비오 신부의 명예훼손 혐의로 광주로 내려가 재판에 참석했다."          

이 사건의 주도세력인 전두환과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재임한 1993년 초까지 12·12사태는 집권세력에 의하여 정당화되었으나, 그후 김영삼정부는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하였다.

노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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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1979년 12월 12일
한국
전두환, 노태우 등의 신군부세력
군사반란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를 연행하고 당시의 대통령이었던 최규하를 협박하여 사후승인을 받음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유형/ 시대/ 성격/ 발생/ 시작/ 일시/ 관련인물/ 단체/

사건
현대
군사충돌,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노태우

"노태우(盧泰愚, 1932년 12월 4일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달성 출생 ~ )는 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교하(交河)이다.

육군사관학교를 11기로 졸업하고 대장으로 예편하였다. 전두환, 김복동의 육사 동기이기도 하다.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와 12·12 군사 반란 등에 가담했다. 제12대 국회의원과 정무2장관, 체육부 내무부의 장관을 지냈으며 1988년부터 1993년까지 제13대 대통령을 지냈다.

대구공업중학교를 다니다가 경북중학교로 전학한 뒤 1950년 한국 전쟁 중 학도병으로 헌병학교에 입대하였다. 1951년에 육사에 11기 생도로 입학하여 1955년에 졸업하며 소위로 임관하였다. 1961년 8월 17일에는 학생군사교육단(ROTC의 전신)의 창설준비요원과 교관을 역임했고, 베트남 전쟁에는 1967년 지구대대의 대대장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1974년 장군으로 진급, 이후 신군부의 2인자로 제 9공수특전여단장, 청와대 작전차장보, 보안사령부 사령관 등을 지냈으며, 1980년에는 국가보위입법위원회 비상대책위원과 상임위원을 지냈다. 대장 예편 후 제5공화국에서 1981년 정무2장관, 대통령 특사, 1982년 체육부 장관, 41대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1985년에 민주정의당 최고위원으로 전두환 당시 총재로부터 내정되어 당권 전부를 위임받고 1987년부터 민주정의당의 총재가 되었으며 1988년의 대통령 선거에 근소한 표차로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79년 12월 12일 군부의 실세였던 전두환()·노태우()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군사반란 사건.

이들이 이끌던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세력이 당시 대통령이었던 최규하()의 재가도 없이 휘하 부대 병력을 동원하여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강제로 연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군사반란 사건이다. 유혈충돌이 수반된 하극상 사건이었다.

12·12군사반란·12·12하극상·12·12쿠데타·12·12쿠데타적사건 등이라고도 한다. 신군부 세력은 이 사건으로 군 내부의 주도권을 장악한 뒤 1980년의 5·17사건을 일으켜 새로운 권력을 획득하였다.

5·17사건은 명백한 정치적 쿠데타로 간주될 수 있지만 12·12사건 당시에는 신군부의 정권장악 목표가 아직 명백하게 표출되지 않았으므로 12·12군사반란은 예비 쿠데타로 간주되기도 한다.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된 뒤 최규하 과도정부는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정승화 육군참모총장(대장)을 계엄사령관에 임명하였다.   

정승화는 군 장악을 위해 윤성민(, 참모차장),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등을 중용하여 지휘계통을 개편하였으며, 10·26사태에 직접 연루되었던 중앙정보부와 대통령 경호실을 축소 개편하였다.

이로써 정승화는 군에 대한 지휘체계를 확보하고 자신이 정치 일정을 이끌어 가는 데 핵심역할을 담당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군부 내 사조직이었던 하나회가 4년제 육군사관학교 최초의 기수인 11기의 지도 아래 하나의 배타적인 파벌집단을 형성하면서 군부내 세력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보안사령관의 자격으로 10·26사태에 대한 수사를 전담하는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던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군부세력(신군부)이 기존의 육군지도부였던 정승화 세력과 갈등하게 되었던 것이다. 갈등을 일으키게 한 대립의 쟁점은 사건수사와 군의 인사문제였다.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세력은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정승화가 김재규()의 내란에 방조한 혐의가 있다고 주장하고, 10·26사태 수사에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임을 내세워 정승화를 강제 연행하기로 계획하였다.

10·26사태 당시 정승화는 궁정동 안가의 대통령 시해현장 부근에 대기하였으며 사건 이후 김재규를 구속할 때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등 그 수사를 지연시킨다는 의혹을 불러 일으켰다(물론 정승화가 10·26사태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은 후일 명백히 밝혀졌다).    

그리고 12월 초순 전두환은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과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우경윤에게 정승화 연행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하였다.

전두환 합수부장의 지시에 따라 12일 저녁 허삼수·우경윤 등 보안사 수사관과 수도경비사령부 제33헌병대 병력 65명은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

정승화의 연행을 실행하기 위해 11월 중순 국방부군수차관보 유학성(), 1군단장 황영시(), 수도군단장 차규헌(), 9사단장 노태우 등과 함께 모의한 뒤 12월 12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20사단장 박준병(), 1공수여단장 박희도(), 3공수여단장 최세창(), 5공수여단장 장기오() 등과 사전 접촉하였다.

그리고 12월 초순 전두환은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과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우경윤에게 정승화 연행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하였다.

전두환 합수부장의 지시에 따라 12일 저녁 허삼수·우경윤 등 보안사 수사관과 수도경비사령부 제33헌병대 병력 65명은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난입하여 경비원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제압한 뒤 정승화를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로 연행하였다.

윤성민 육군참모차장 지휘하의 육군 수뇌부는 이 사실을 확인하여 전군()에 비상을 발동하고 합동수사본부측에 정승화의 원상회복을 명령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미 1공수여단과 5공수여단 병력이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점령하였으며 9사단 병력 등은 중앙청으로 진입하였던 것이다. 이에 진압군 병력 출동을 추진하였던 육군수뇌부(장태완 수경사령관과 정병주 특전사령관,  3군사령관, 윤석민 참모차장,  합참본부장)는 모두 서빙고 분실로 불법 연행되었다.

이와 같은 반란군의 정승화 연행과 병력이동은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 없이 이루어졌다. 사후 승인을 받기 위하여 신군부세력은 최규하에게 압력을 가하여 총장연행 재가를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전두환 합수부장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승화가 김재규와 연루된 새로운 사실(돈을 받는 등)을 발견하였으니 정승화를 연행 조사토록 승인해 달라고 요청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정승화는 후일 김재규에게 받은 돈 300만 원은 단순한 추석 촌지로서 당시 전두환도 500만 원 수령 사실을 인정했었다고 주장하였다. 대통령의 재가를 얻는 데 실패한 신군부세력은 국방장관 노재현()을 체포하여 그를 통하여 대통령이 총장연행을 재가하도록 설득하였다.  

결국 최규하는 13일 새벽정승화의 연행을 재가할 수밖에 없었다. 13일 오전 9시 9사단장 노태우와 50사단장 정호용()은 각각 수경사령관과 특전사령관에 취임함으로써 당시의 군부가 반란의 주도세력에 의해 장악되었다.

결국 신군부세력은 1980년 5·17쿠데타까지 주도해 제5공화국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였다. 미국은 12·12사태를 사전에 알지 못했으며, 한미연합사의 작전통제권 하에 있는 부대들을 적절한 통고없이 사용한 데 대하여 한국 군부에 항의하였다.

12·12사건의 주도세력인 전두환과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재임한 1993년 초까지 12·12사건은 집권세력에 의하여 정당화되었으나, 김영삼()정부가 출범한 이후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자는 국민들의 요구가 있었으므로 김영삼정부는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하였다.

1993년 7월 19일 정승화 등 22명은 전두환·노태우 전임 대통령을 비롯한 38명을 12·12 군사반란 혐의로 고소하였으며, 1994년 5월 13일 정동년() 등 5·18광주민주화운동의 관련자들은 전두환·노태우 등 35명을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 혐의로 고소하였다.

이에 같은 해 10월 29일 검찰은 12·12 사건에 대해 기소유예 결정을 내렸으나 1995년 1월 19일에 헌법재판소에서는 12·12 사건에 대한 공소시효가 끝나지 않았다는 결정을 내려 논쟁이 계속되었다.

같은 해 7월 18일 검찰은 5·18 관련자들에 공소권이 없으므로 불기소 처분을 내린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5·18특별법을 제정하라는 요구가 있고 노태우 전 대통령이 11월 16일 비자금관련사건으로 구속되면서 11월 24일 김영삼 대통령은 민주자유당에 5·18특별법을 제정하라고 전격적으로 지시를 내렸다.

이 과정에서 김영삼은 국민들의 요구에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구호로 부응하였던 것이다. 11월 30일 검찰은 12·12사건과 5·18사건 특별수사본부를 구성하고 재수사에 착수하였으며, 전두환 전 대통령도 반란수괴 등의 혐의로 12월 3일 구속, 수감되었다. 12월 19일 5·18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였으며 1996년 1년 내내 전두환·노태우 피고인에 대한 12·12사건 및 5·18사건, 비자금 사건 관련 공판이 진행되었다.

재판의 과정에서 전두환은 제5공화국 정부는 합헌정부이며, 내란정부로 단죄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였으며, 노태우는 이 사건이 사법처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이에 재판부가 1997년 4월 17일 12·12사건은 명백한 군사반란이며 5·17사건과 5·18사건은 내란·내란목적살인 행위였다고 단정함으로써 폭력으로 군권이나 정권을 장악하는 쿠데타는 성공하더라도 사법심판의 대상이며 형사책임은 배척할 수 없다는 판례를 남겼다.

1996년 12월 16일 항소심에서 전두환은 무기징역, 벌금 2205억 원 추징을, 노태우는 징역 15년, 벌금 2626억 원 추징이 선고되었고, 1997년 4월 17일의 상고심에서 위 형량이 확정되었으나 김대중 후보의 대통령 당선에 즈음해 1997년 12월 22일 특별사면으로 양인 등은 석방되었다. → 십이륙사태, 오일팔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들 처벌은?

12·12 군사반란은  전두환에 이어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재임한 1993년 초까지 정당화되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자는 국민들의 요구가 거세졌고, 이에 김영삼 정부는 12·12 군사반란을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하게 된다.

그리고 1993년 7월 19일 정승화 등 22명은 전두환-노태우 전임 대통령을 비롯한 38명을 12·12 군사반란 혐의로 고소했다. 그리고 1994년 5월 13일에는 정동년 등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이 전두환-노태우 등 35명을 내란 및 내란목적 살인혐의로 고소했다. 그러나 1994년 10월 검찰은 12·12 사건에 대해 기소유예 결정을 내렸다. 반면 1995년 1월 헌법재판소는 12·12 사건에 대한 공소시효가 끝나지 않았다는 결정을 내려 논쟁이 이어졌다. 그리고 1995년 7월 검찰은 5·18 관련자들에게 공소권이 없으므로 불기소 처분을 내린다고 밝혔다. 

그러나 5·18 특별법을 제정하라는 요구가 있고,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5년 11월 비자금 관련 사건으로 구속되면서, 김영삼 대통령은 민자당에 5·18 특별법을 제정하라고 전격적으로 지시했다. 이에 검찰은 12·12와 5·18 사건 특별수사본부를 구성하고 재수사에 착수했으며, 그 결과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반란수괴 등 혐의로 12월 구속 수감됐다. 그리고 1995년 12월 5·18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으며, 1996년 1년 내내 전두환-노태우 피고인에 대한 12·12 및 5·18, 비자금 관련 공판이 진행됐다.

그리고 1996년 12월 항소심에서 전두환은 무기징역과 2,205억 원 추징을, 노태우는 징역 15년과 2,626억 원이 추징이 선고됐다. 이후 1997년 4월 17일의 상고심에서 이 형량이 확정되었으나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인 그해 12월 두 사람은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재판부는 1997년 4월 17일 "12·12는 명백한 군사반란이며 5·17과 5·18은 내란 또는 내란 목적 살인행위였다."고 단정, 폭력으로 군권이나 정권을 장악하는 쿠데타는 성공하더라도 사법심판의 대상이며 형사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판례를 남겼다. 

하극상,[  ]

계급이나 신분이 낮은 사람이 부당한 방법으로 높은 사람을 물리치고 지배하는 것이다. 일본의 전국시대(16세기)에는 중세적인 질서가 크게 파괴되었다. 중세적인 질서란 봉건적인 토지소유를 기초로 할거한 군사적인 지배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 통치자는 토지소유 귀족의 가이드맨이었던 무사군단이었다. 할거한 영지 내에 갇혀진 경제활동은 큰 구속이 되며, 통신, 교통 등의 기술 수준이 향상되어 시야에 넣은 큰 경제활동이 증가하였으며 또한 동아시아와의 교역이 비약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여기에 군사적 통일이 기도되어 그 대부분이 좌절된다. 그 과정 속에서 군사적인 강함과 개인의 명예만이 기준이 된다. ‘야-야-, 우리야말로 000씨 아무개의 혈통, 누가 뭐라 하든 장남’이라는 전투 개시의 구호가 있다. 지위가 낮아도 실력과 명예가 모든 것을 규정하였다. 여기에 아래가 위를 이기고 올라오는 현상이 발생한다. 나중의 시대에도 경쟁이 치열해져 지금까지의 경위라든가 전례가 경시되는 경우에는 하극상적인 상황이 된다.

참조항목,

전두환, 노태우, 5ㆍ18광주민주화운동, 제5공화국, 최규하, 쿠데타,

 

역참조항목,

계엄령, 제4공화국, 서울의 봄, 김대중 재판

카테고리,

출처 & 참고문헌,

  • 『12·12사건 정승화는 말한다』( 까치, 1987)
  • 「제5공화국 정치비사 2」(중원문화, 1987)
  • 「12·12쿠데타와 나」(명성출판사, 1993)
  • 『체제변동의 정치사회학』(한울출판사, 1995)
  • 『12·12, 5·18 실록』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1997)
  • 「신군부 권위주의체제의 등장과 정치갈등」(『한국정치동태론』, 오름, 1996)
  • 「군부 권위주의체제의 내부모순과 변화의 동학」(『한국 정치·사회의 새흐름』, 1986)
  • 『12·12와 미국의 딜레마』(존 위컴, 중앙 M&B, 1999)
  • 『알려지지 않은 역사』(윌리엄 글라이스턴, M&B, 1999)
  • [12·12군사반란 [十二十二軍事叛亂]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12·12사태 [十二十二事態] (두산백과)
  • [12·12 군사반란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 [네이버 지식백과] 12ㆍ12사태 (21세기 정치학대사전, 정치학대사전편찬위원회)
  • [21세기 정치학대사전]
  • [네이버 지식백과] 하극상 [下剋上] (21세기 정치학대사전, 정치학대사전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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