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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역사 (국내)

이성계 李成桂, 이성계는 고려 공민왕(恭愍王, 1330~1374) 시기부터 급부상한 신흥 무장 세력이었다. 이자춘(李子春)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최한기(崔閑奇)의 딸이다. 비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韓氏)이다. 계비는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담대했다. 특히 활솜씨가 뛰어났다. 고려의 중앙 귀족 가문 출신이 아니라 원나라의 지배를 받던 쌍성총관부 지역에서 힘을 키워가던 변방의 세력이었다. 쌍성총관부는 원나라가 1258년(고려 고종 45년) 고려에 침입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한 후 설치한 통치 기구였다. 철령 이북의 땅은 공민왕이 이 지역을 수복하기 전까지, 근 100여 년 동안 원나라의 지배하에 있었다. 재위 1392∼1398.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이성계(李成桂)이다. 처음.. 더보기
서희. 서희" 고려의 문신으로 이예와 함께 한국 외교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 외교관 이미지에 너무 고착된 나머지 그 능력과 명성에 비해서는 의외로 대중들에게 제대로 된 평가를 못 받고 있는 측면도 있다. 외교관이라는 특정 지위 이상으로 대국을 보는 시야나 장기적인 안목을 지닌 전략가이자, 원칙과 책임의식을 지닌 훌륭한 정치인이기도 했다. 포스 넘치는 철혈 군주 광종 앞에서도 바른 말을 잘했던 강직한 재상 서필의 아들이다.그리고 아버지를 쏙 빼닮았는지 아들 서희도 거란 소손녕을 찾아 단신으로 담판을 짓고 오는 패기를 보이는데.. 서희는 1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전전하였고, 982년에 북송으로 가서 단절된 국교를 회복하고 돌아왔다. 이 때 송태조는 서희의 품격을 보고 감탄하여 '검교(檢校) 병부상서'라.. 더보기
장보고. 장보고"장보고의 출생과 부모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으나, 고향은 청해진이 설치되었던 완도 근처의 어느 섬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흥덕왕 때의 장수. 어릴 때 당나라로 건너가 무령군의 소장이 됨. 신라로 돌아와 청해진 대사로 임명되어 해적을 소탕하고, 신라와 당나라 사이의 무역을 활발하게 함. 신라에서 당으로 건너간 후 그곳에서 군인으로 출세했어요. 돌아와서는 완도에 청해진을 세우고 해상 무역을 장악해 명성을 떨쳤읍니다. 훗날 문성왕이 장보고의 딸을 두 번째 왕비로 맞이하려 할 때 신하들이 그가 ‘해도인(海島人)’이라는 이유로 반대했다는 부분이나, 시절을 함께 보낸 정년(鄭年)이 고향으로 돌아간다며 청해진으로 온 부분, 그리고 무엇보다 청해진이 그의 연고지였던 점으로 보아 그렇게 추측할 수 있다. .. 더보기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광개토대왕"이름은 담덕(談德)이고 고국양왕의 아들이다. 완전한 묘호(廟號)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이를 줄여서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 호태왕(好太王)으로 부르기도 하나, 일반적으로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재위 시의 칭호는 영락대왕(永樂大王)이었는데, '영락(永樂)'은 우리나라에서 사용된 최초의 연호로 알려져 있다. 최대의 영토를 확장한 정복 군주로서 완전한 묘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이를 줄여서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으로 부르기도 하나, 일반적으로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재위시의 칭호는 영락대왕(永樂大王)이었는데, '영락(永樂)'은 한국에서 사용된 최초의 연호로 알려져 있다. 광개토대.. 더보기
김구 金九, 2 김구 金九 1876(고종 13)-1949. 독립운동가, 정치가. 이봉창 의거와 윤봉길 의거를 지휘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을 했다. 광복 후에는 나라의 완전 자주독립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다가 암살당했다. 독립운동가인 김구가 쓴 자서전이다. ‘백범’은 김구의 호이다. 1947년 처음 책으로 만들어진 이후 10여 종의 책이 더 나왔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역사를 알려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4세 때 심한 천연두를 앓아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고, 9세에 한글과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아버지의 열성으로 집안에 서당을 세우기도 하였다. 14세에 『통감』·『사략』과 병서를 즐겨 읽었으며, 15세에는 정문재(鄭文哉)의 서당에서 본격적인 한학수업에 정진하였고, 17세에 조선왕조 최후.. 더보기
김구(金九, 1 김구(金九, 1876. 7. 11(음)고종 13)~1949. 6. 26) 자 연상(蓮上), 호 백범(白凡), 초호(初號)는 연하(蓮下) 본관 안동(安東) 출신지 황해도 해주 (선생은 1876년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基洞)에서 부친 김순영과 모친 현풍 곽씨 낙원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 아명은 창암(昌巖), 본명은 김창수(金昌洙), 개명하여 김구(金龜, 金九), 법명은 원종(圓宗), 두래(斗來), 구(龜), 구(九), 자는 연상(蓮上), 연하(蓮下), 호는 백범(白凡) 환속 후에는 김두래(金斗來)로 고쳤다. 인조 때 삼정승을 지낸 방조(傍祖) 김자점(金自點)이 권세 다툼에서 청병(淸兵)을 끌어들였다는 역모죄로 효종의 친국을 받고 1651년 사형당하자, 화를 피하여 선조되는 사람.. 더보기
을지문덕.2 을지문덕.2신기한 그대의 작전은 하늘의 원리에 통달하였고 오묘한 꾀는 땅의 이치를 꿰뚫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공이 이미 높으니 만족한 줄 알고 그만둠이 어떠한가. "우중문 자네가 뛰어난 인재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다. 그러니 이번 전투에서 개망신을 당하지 않으려면, 지금 말머리를 돌려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경고성 멘트였어요. 이 시를 본 우중문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군사들에게 급히 후퇴 명령을 내렸어요.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어요. 고구려 군은 이런 날이 올 것을 미리 예상하여 수나라 군대가 되돌아가는 길목에 있던 살수의 상류를 흙과 돌로 막아 놓고 수나라 군사들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어요. 수나라의 30만 군대는 허겁지겁 후퇴하며 살수에 도착했어요. 강물을 보니 바지를 조금만 걷.. 더보기
을지문덕.1 을지문덕. 언제 태어났고 언제 죽었는지?. 왜? 역사기록에 나와있지 않거든. 후세 사람들에 의해 살수의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현재의 청천강인 살수에서 수나라의 30만 대군을 수공작전(水攻作戰)으로 격퇴시켜 수나라 임금 양제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버렸어니. 자! 그럼 지금부터 내가 어떻게 수나라의 30만 대군을 물귀신으로 만들었는지 5, 6세기 중국 땅에는 여러 나라가 나타나서 중국 전체를 통일하기 위하여 서로 싸우고 있었고. 이 시기를 중국 역사에서는 남북조시대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중국의 남쪽 지역과 북쪽 지역에 하나 또는 두 개 나라가 연이어 나타나며 서로 대립했기 때문이에요. 이러한 남북조시대는 589년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함으로써 끝나요. 『역대명장전』에는 을지문덕을 평양 석다산 사람이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