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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역사 (국내)

이성계 李成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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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는 고려 공민왕(, 1330~1374) 시기부터 급부상한 신흥 무장 세력이었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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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춘()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최한기()의 딸이다. 비는 신의왕후 한씨()이다. 계비는 신덕왕후 강씨()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담대했다. 특히 활솜씨가 뛰어났다.  


고려의 중앙 귀족 가문 출신이 아니라 원나라의 지배를 받던 쌍성총관부 지역에서 힘을 키워가던 변방의 세력이었다. 쌍성총관부는 원나라가 1258년(고려 고종 45년) 고려에 침입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한 후 설치한 통치 기구였다. 


철령 이북의 땅은 공민왕이 이 지역을 수복하기 전까지, 근 100여 년 동안 원나라의 지배하에 있었다. 


재위 1392∼1398. 본관은 전주(). 초명은 이성계()이다. 처음 자는 중결()이다. 호는 송헌()·송헌거사()이다. 


등극 후에 이름을 이단(), 자를 군진()으로 고쳤다. 화령부(: 영흥)에서 태어났다. 


고려 말기인 1388년에 요동정벌군의 장수였던 이성계(李成桂), 조민수(曺敏修)가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정변(政變)을 일으키고 권력을 장악한 사건이다. 


아버지 이자춘의 노력으로 고려의 중앙 무대에 명함을 내민 이성계는 자신의 능력에 힘입어 곧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게다가 당시 잇따른 외적의 침입은 약화된 고려 조정으로서는 무척이나 괴로운 일이었지만, 청년 이성계에게는 무장으로서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뽐낼 수 있는 하늘이 준 기회나 마찬가지였다.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는 원래 전주 지역의 향리였는데, 가솔을 이끌고 쌍성총관부 지역으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이성계의 가문은 고조부 이안사부터 아버지 이자춘() 때까지 원나라로부터 천호()라는 지방관의 자리를 얻어, 대대로 이 지역 고려인과 여진족 위에 군림하는 세력가로 성장하였다. 안팎으로 혼란스러운 고려 말의 정국은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고려 정계의 내부에서부터 시작된 개혁의 의지는 고려왕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개혁을 하자는 쪽과, 모든 것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역성혁명을 도모하는 세력으로 나뉘었다. 역성혁명의 중심에는 고려 말 급부상한 신흥무장 세력 이성계(, 1335~1408, 재위: 1392~1398)와 그와 뜻을 같이한 급진파 신진사대부들이 있었다. 


신진사대부들과 함께 고려 왕조를 무너뜨린 이성계는 이전의 고려와는 다른 새로운 성격의 나라, 조선왕조를 열었다. 


14세기 중반 이후 원()나라가 몰락하면서 동아시아의 정치질서에 커다란 변동이 일어났고, 고려도 이러한 국제 정세에 맞추어 국가들과의 관계를 새롭게 모색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1354년(공민왕 3)에 고려는 농민반란으로 궁지에 몰린 원의 요청으로 최영을 장수로 하여 2천여명의 병력을 파견하기도 했으며, 1359년(공민왕 8)과 1361년(공민왕 10)에는 중국 허베이[] 지방에서 일어난 농민반란군인 홍건적()의 침입을 받아 큰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1368년 주원장()이 난징[]에서 명()을 건국한 뒤 북벌에 성공해 원나라의 세력을 북쪽으로 몰아낸 뒤에는 명나라로 사신을 보내 친명 반원의 태도를 분명히 하였다. 하지만 공민왕은 1369년과 1370년 두 차례에 걸쳐 요동() 지역의 동녕부()를 공격하며 북진()의 의지를 보이기도 하였고, 명나라는 고려가 요동으로 진출하지 않을까 우려하여 고려에 대한 경계와 압박을 늦추지 않았다. 


명나라는 1371년 요양()에 요동위()를 설치하여 본격적으로 요동지역으로의 영토 확장을 꾀했다. 요동()을 점령하고 있던 나하추[]와 원나라의 잔여 세력은 고려와 우호관계를 유지하여 명나라를 견제하려 했다. 


그리고 1374년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한 뒤 고려의 새로운 실권자로 떠오른 이인임()도 명나라 사신 채빈()의 살해사건 등을 계기로 원나라, 명나라 모두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양단 외교를 추진하며 두 세력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려 했다. 


1387년 나하추가 명나라에 항복하면서 명나라는 고려에 대해 직접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388년(우왕 14) 2월에는 과거 원나라 때 쌍성총관부()가 있었던 철령() 이북의 땅에 철령위()를 설치하겠다며 그 영토의 반환을 요구해왔다. 이 지역은 1356년(공민왕 5) 고려가 탈환하여 화주목()을 설치해 통치하고 있던 곳이었다. 


명나라의 무리한 요구에 대해 당시 이인임 일파를 몰아내고 고려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최영()은 명나라가 군사적으로 침략하기 위해 압박하는 것으로 보고 강하게 반발했다. 그래서 명나라의 홍무() 연호의 사용을 중지했으며, 명나라의 침략에 능동적으로 맞서기 위해 요동에 대한 원정을 준비하였다. 


우왕은 서경(西)에 머무르며 5만 여명의 군사를 징발하여 요동정벌군을 구성하였으며, 최영을 총사령관인 팔도도통사( 使)로 삼고, 조민수()를 좌군 도통사( 使), 이성계()를 우군 도통사( 使)로 삼았다. 


그리고 조민수와 이성계가 원정군을 이끌고 출정케 하였다. 음력 4월 18일에 서경을 떠난 원정군은 19일이 지난 음력 5월 7일에 압록강 하류의 위화도()에 도착했는데, 그곳에서 압록강의 물이 불어나 강을 건너기 어렵다며 진군을 중단하고 14일을 머물렀다. 


그리고 이성계는 조민수와 상의하여 명나라와 의 싸움 허지만 이성계가 군사들핑게로 위화도에서 회군을하게됩니다.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① 작은 나라로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은 옳지 않다(

②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옳지 않다(

③ 온 나라의 병사를 동원해 원정을 하면 왜적이 그 허술한 틈을 타서 침범할 염려가 있다(

④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이므로 활의 아교가 풀어지고 병사들도 전염병에 시달릴 염려가 있다()”는 이른바 ‘4불가론()’을 주장하며 요동 정벌을 중단하고 철병()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서경에 있던 우왕과 최영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도리어 속히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이성계와 조민수는 정변()을 모의하여 음력 5월 22일 회군을 결행하였다.  


우왕과 최영은 당황하여 서경을 떠나 수도인 개경으로 급히 돌아가 반격을 준비하였다. 위화도를 떠난 지 9일 만인 음력 6월 1일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끈 반란군은 개경 부근까지 진군했으며, 2일 후에는 개경을 함락시키고 우왕과 최영을 사로잡았다.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와 조민수는 우왕을 폐위시키고 강화도()로 유배하였으며, 최영은 고봉(, 지금의 경기도 고양)으로 유배하였다가 처형하였다. 그리고 우왕의 아들인 창왕()을 왕으로 세웠으며, 조민수는 우시중(), 이성계는 좌시중()의 지위에 올랐다. 그 뒤 조정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이성계와 조민수가 대립하였으나, 군사력뿐 아니라 신진사대부들을 기반으로 정치적 기반도 튼튼히 확보하고 있었던 이성계가 승리하였다.


이성계는 1389년(창왕 1) 사전() 개혁을 빌미로 조민수를 유배하였고, 조민수와 이색()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 창왕을 신돈()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새로 왕으로 세웠다. 이처럼 이성계가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면서 조선() 왕조가 창건되는 기초가 마련되었다. 


이성계 왕이되다"

태조 이성계는 국호를 조선으로 짓고, 수도를 한양으로 옮겼다. 


정도전의 도움으로 조선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과거제를 강화하고 중앙집권적 국가를 만들었다. 하지만 세자 책봉 과정에서 실수를 저질렀고 이방원의 난이 일어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의 선조 이안사()가 원나라의 지배 아래 여진인이 살고 있던 남경(: 간도지방)에 들어가 원나라의 지방관이 된 뒤부터 차차 그 지방에서 기반을 닦기 시작했다. 


이안사의 아들 이행리(), 손자 이춘(椿)이 대대로 두만강 또는 덕원지방의 천호()로서 원나라에 벼슬했다. 


이자춘도 원나라의 총관부()가 있던 쌍성()의 천호로 있었다. 


이자춘은 1356년(공민왕 5) 고려의 쌍성총관부 공격 때 내응해 원나라 세력을 축출하는 데 큰 공을 세우고 고려의 벼슬을 받았다. 


이자춘은 1361년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使)로 임명되어 동북면() 지방의 실력자가 되었다. 

이성계는 이러한 가문의 배경과 타고난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크게 활약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361년 10월에 반란을 일으킨 독로강만호(禿) 박의()를 잡아 죽였다. 같은 해 홍건적이 침입해 수도가 함락되자 이듬 해 정월 친병() 2,000명을 거느리고 수도탈환작전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다. 


1362년 원나라 장수 나하추[]가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홍원지방으로 쳐들어와 기세를 올리자 그는 동북면병마사에 임명되어 적을 치게 되었다. 여러 차례의 격전 끝에 마침내 함흥평야에서 적을 격퇴시켜 명성을 크게 떨쳤다. 


1364년 최유()가 원나라 황제에 의해 고려왕에 봉해진 덕흥군()을 받들고, 원병() 1만 명을 이끌고 평안도지방에 쳐들어왔다. 이에 최영()과 함께 수주() 달천()에서 이들을 섬멸했다. 이 무렵 여진족이 삼선()·삼개()의 지휘 아래 동북면에 침범하여, 함주까지 함락하는 등 한때 기세를 올렸다. 


이성계는 이들을 크게 무찔러 동북면의 평온을 되찾았다.이 해에 밀직부사의 벼슬과 단성양절익대공신()의 호를 받았다. 그 뒤 동북면원수지문하성사()·화령부윤 등의 벼슬을 역임했다. 


1377년(우왕 3) 크게 창궐하던 왜구를 경상도 일대와 지리산에서 대파했다. 


1380년에 양광·전라·경상도 도순찰사가 되어, 아기바투[]가 지휘하던 왜구를 운봉()에서 섬멸했다. 그 전과는 역사상 황산대첩()으로 알려질 만큼 혁혁한 것이었다. 


1382년 여진인 호바투[]가 동북면 일대를 노략질하여 그 피해가 극심했다. 이에 동북면도지휘사가 되어 이듬 해 이지란()과 함께 길주에서 호바투의 군대를 궤멸했다. 이어서 안변책()을 건의했다. 


1384년 동북면도원수문하찬성사()가 되었다. 이듬 해 함주에 쳐들어 온 왜구를 대파했다. 

1388년 수문하시중()이 되었다. 


이 때 최영과 함께 임견미()·염흥방()을 주살했다. 이 해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문제로 두 나라의 외교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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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요동정벌이 결정되어, 이에 반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우군도통사가 되어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함께 정벌군을 거느리고 위화도까지 나아갔으나, 결국 회군을 단행했다. 


개경에 돌아와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한 뒤 창왕을 옹립했다. 그리고 수시중()과 도총중외제군사()가 되어 정치·군사적 실권자의 자리를 굳혔다. 이듬해 다시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뒤 수문하시중이 되었다. 


1390년(공양왕 2) 전국의 병권을 장악했으며, 곧이어 영삼사사()가 되었다. 이 무렵 그는 신흥 정치세력의 대표로서 새 왕조 건국의 기반을 닦기 시작했다. 


1391년 삼군도총제사(使)가 되었다. 조준()의 건의에 따라 전제개혁()을 단행해, 구세력의 경제적 기반마저 박탈했다. 


마침내 1392년 7월 공양왕을 원주로 내쫓고, 새 왕조의 태조로서 왕위에 올랐다. 태조는 즉위 초에는 국호를 그대로 ‘고려()’라 칭하고 의장()과 법제도 모두 고려의 고사()를 따를 것임을 선언했다. 그러나 차츰 새 왕조의 기틀이 잡히자 고려의 체제에서 벗어나려 했다. 명나라에 대해 사대정책을 쓰면서, 명나라의 양해 아래 새 왕조의 국호를 ‘조선()’으로 확정했다. 


1393년(태조 2) 3월 15일부터 새 국호를 쓰기로 했다. 다음에는 새 수도의 건설이 필요했다. 우여곡절 끝에 왕사() 무학()의 의견에 따라 한양()을 새 서울로 삼기로 결정했다. 1393년 9월에 착공해 1396년 9월까지 태묘·사직·궁전 등과 숙정문()·흥인지문()·숭례문()·돈의문(西)의 4대문, 광희문()·소덕문()·창의문()·홍화문()의 4소문() 등을 지어 왕성의 규모를 갖추었다. 


법제 정비에도 힘써, 1394년 정도전()의 『조선경국전()』과 각종 법전이 편찬되었다. 또한, 숭유척불정책()을 시행해 서울에 성균관, 지방에는 향교를 세워 유학의 진흥을 꾀하는 동시에 불교를 배척하는 정책을 폈다. 이처럼 그는 새 왕조의 기반과 기본정책을 마련했다. 그러나 왕자 사이에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다. 


태조 즉위 후에 세자책립문제로 여러 의견이 있었으나, 계비 강씨의 소생인 이방석()을 세자로 결정했다. 이에 이방원(: 신의왕후 소생)의 불만은 대단했다. 


1398년 태조의 와병 중에 이방원은 세자인 이방석을 보필하고 있던 정도전·남은() 등이 자신을 비롯한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을 제거하려 한다는 이유로 사병을 동원해, 그들을 살해했다. 곧이어 이방석·이방번()마저 죽여 후환을 없앴다. 


새 세자는 이방원의 요청에 의해 이방과()로 결정했다. 


태조는 이방석·이방번 형제가 무참히 죽자 몹시 상심했다. 그는 곧 왕위를 이방과에게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다. 


1400년(정종 2)에 이방원이 세제로 책립되었다. 곧이어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정종은 상왕이 되고, 태조는 태상왕()이 되었다.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에 대한 태조의 증오심은 대단히 컸다. 

태종이 즉위한 뒤 태조는 한때 서울을 떠나 소요산()과 함주(: 지금의 함흥) 등지에 머물러 있기도 했다. 


특히, 함주에 있을 때 태종이 문안사(使)를 보내면, 그 때마다 그 차사(使)를 죽여 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어디에 가서 소식이 없을 경우에 일컫는 ‘함흥차사(使)’라는 말은 여기에서 유래했다. 


태종에 대한 태조의 증오심이 어떠했는지를 보여 주는 단적인 예이다. 태조는 태종이 보낸 무학의 간청으로 1402년(태종 2) 12월 서울로 돌아왔다. 


태조는 만년에 불도()에 의탁했다. 덕안전(殿)을 새로 지어 정사()로 삼고 염불삼매()의 조용한 나날을 보냈다. 고려의 중앙과는 거리가 먼 변경 지역의 세력, 심지어 고려의 관리도 아니었던 이성계가 고려의 중앙 조정에 데뷔하게 된 것은 공민왕의 반원() 정책 덕택이었다. 


중국의 원-명 교체기의 혼란한 국제 정세를 틈타 고려의 자주성을 되찾고자 했던 공민왕은 1356년 원의 간섭기에 잃어버렸던 땅, 쌍성총관부를 수복하려 하였다. 


이때 공민왕이 보낸 동북면병마사 유인우에게 협력하여 쌍성총관부 지역을 고려가 탈환할 수 있도록 도운 사람이 바로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이었다. 


당시 20대였던 이성계도 아버지와 함께 원나라 세력을 몰아내는 데 일조하였다. 


쌍성총관부를 폐지하고 이 지역에 화주목()을 설치한 공민왕은 이자춘의 공을 높이 사 그에게 고려의 벼슬을 내렸다. 


1361년 이자춘은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로 임명되어 동북면 지방의 실력자로 급부상하였다. 외침에 시달리고 내적으로는 권문세족의 득세로 왕권이 약화되어 군사 조직이 붕괴하고 국가 재정은 말이 아니었던 고려 말, 비록 변방의 세력이지만 착실히 군사력을 키운 이성계 가문의 힘은 만만히 평가될 것은 아니었다. 


이성계는 언제든지 동원할 수 있는 탄탄한 사병 조직을 가지고 있었고, 지역에 뿌리박고 살면서 키운 인맥과 경제력 또한 만만치 않았다. 당시 20대 청년이었던 이성계는 급부상한 집안의 배경과 함께 뛰어난 무예를 겸비하고 있었다. 

그는 활을 매우 잘 쏘았으며 동북면의 여진족과 고려인들을 수하로 부리면서 장수로서의 자질을 키워나갔다. 고려 조정에 내알한 뒤, 이성계의 본격적인 활동은 1361년 독로강(현재 평안북도 강계 지역) 만호 박의의 반란을 진압하면서부터 시작되어, 승승장구를 계속하였다. 


같은 해 겨울, 압록강이 얼어붙자 중국에서부터 쏟아지듯 침입해온 10만 명의 홍건적들이 수도 개경을 함락시켰다. 이때 이성계는 고려인과 여진족 2,000명으로 혼합 구성된 자신의 사병 조직을 이끌고 수도 탈환에 참가하였다. 그는 홍건적의 두목을 모두 활로 쏘아 죽이고, 개경에 맨 처음 입성하는 큰 공을 세웠다. 


이듬해에는 원나라 장수 나하추의 침입을 물리쳤으며, 1364년에는 공민왕을 폐하려는 원나라 황제의 명령으로 침입한 덕흥군과 최유의 1만 군대를 최영과 함께 무찔러 고려 왕실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또한 자신의 이종사촌이 되는 여진족 삼선ㆍ삼개의 난을 평정하여 동북면의 안정도 되찾았다. 이로써 그는 고려 중앙 조정에서 탄탄한 입지를 확보함과 동시에 중요 벼슬을 거치게 되었다. 


이성계의 활동은 동북쪽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당시 극심해진 삼남 지역의 왜구 침입을 막아내는 데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특히나 해안뿐만 아니라 내륙에까지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던 극악한 왜구를 황산에서 섬멸함으로써 그의 명성은 하늘을 찔렀다. 


이 전투를 ‘황산대첩’이라고 한다. 이성계는 북쪽과 남쪽을 오르내리며 근 20여 년간을 고려 조정을 위해 일했다. 그가 치르는 전투는 모두 승리하였으므로 그는 ‘불패의 사나이’, ‘난세를 구원할 영웅’으로 명성을 쌓아갔다. 거듭되는 승전은 그를 고려 조정에서 없어서는 안될 인물로 만들었고, 벼슬길은 승승장구였다. 또한 그의 인기와 명성을 좇아 많은 사람이 주변에 모여들게 되었다. 


그 중에는 이미 그 운이 다한 고려를 뒤엎고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하는 생각을 품은 신진사대부들도 있었다. 자신의 능력으로 승승장구하며, 아무리 그 입지를 확고히 한다 하여도 이성계에게는 변방지역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었기에, 누대에 걸쳐 뿌리내린 막강 권문세족들이 버티는 고려 중앙 정치 무대에서 그의 성장은 한계가 있었다. 


특히 같은 시기 이성계와 함께 외적을 퇴치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권문세족 출신의 최영에게는 이성계로서는 넘어서기어려운 존재감이 있었다. 공민왕 사후 한때 중앙 정계를 주름잡던 이인임 세력을 최영과 함께 물리친 이성계는 수문하시중의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언제나 최영의 다음 자리였다. 


국제 정세는 원나라가 북쪽 몽골 지역으로 쫓겨 가고 명나라가 중국 본토를 차지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었다. 중국 본토를 차지한 후, 명나라는 원∙명 교체기의 혼란한 상황 동안 돌아보지 못한 이웃 나라들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려 하였다. 


고려와의 관계에 있어서 명나라는 공민왕이 회복한 철령 이북의 땅을 다시 반납하라는 억지를 부리고 나섰다. 철령 이북의 땅은 원나라가 고려의 땅을 강제 점거하였던 쌍성총관부 지역으로 명나라는 이곳에 철령위를 세우면서 이전의 원나라의 땅이었던 지역은 모두 명나라의 소유라고 주장하였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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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과 그가 보호하고 있던 우왕은 명나라의 이러한 요구에 반발했다. 그리고 명나라 국초의 불안한 정국을 틈타 요동까지 정벌하자고 나섰다. 이성계는 최영의 의견에 반대했다. 


이성계는 최영이 울분에 차 전투의 시기와 국제 정세를 잘못 읽고 있다고 판단하고, 요동정벌이 불가한 4가지 이유를 들었다. 


그것은 여름철 농번기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부적당한 점,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라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쓰기 힘든 점, 요동을 공격하는 사이에 남쪽의 왜구가 침입할 우려, 그리고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의 의견은 군사에 정통한 장수로서 일견 타당한 부분도 있었으나 완강한 최영과 우왕에 의해 무시되었다. 


결국 이성계는 우왕과 최영의 명을 받아 우군도통사가 되어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요동정벌 길에 올랐다. 


그러나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들어가기 전 위화도에 주둔한 이성계는 큰 비를 만나고 더는 앞으로 나갈 수 없는 위기에 봉착하였다. 


이대로 물에 빠져 죽을 것인가 군대를 돌릴 것인가의 기로에서 이성계는 조민수를 설득해 회군을 선택했다. 


위화도에서 회군하면서 이성계는 이미 왕명을 거역한 반역자의 신세가 되었다. 이러나 저러나 운명의 기로에 서 있었던 그는 요동정벌을 위해 얻은 대군을 개경으로 끌고 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요동정벌대에 군사 대부분을 내주었던 최영은 적은 숫자로 이성계에게 맞섰지만 역부족이었다. 이성계는 쿠데타에 성공했고 자신을 가로막고 있던 태산과 같은 존재, 최영을 제거했다. 


이성계는 우왕을 왕위에서 내쫓고 고려 중앙 정계의 일인자가 되었다. 그의 쿠데타에 힘을 실어준 것은 공민왕 시기 중앙 정계로 진출하기 시작한 성리학을 신봉하는 신진사대부들이었다. 신진 사대부는 고려말의 사회적 모순을 고려왕조를 그대로 유지한 채 그 안에서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던 온건파와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급진파로 나뉘어 있었다. 


온건파로는 정몽주이색 등이 있었고 급진파로는 정도전이 대표적이었다. 처음에는 신진 사대부 전체가 이성계와 협력하여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왕위에 앉히는 등 정견을 같이하였지만, 새로운 왕조를 향한 급진파의 급격한 추진력은 결국 두 세력을 반목하게 하였다. 


결국 이성계는 정도전과 결탁하여 역성혁명을 반대하고 고려에 대한 충성을 주장하던 정몽주를 마지막으로 제거함으로써 역성혁명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 시기 이성계는 조준의 건의에 따라 전제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구세력의 경제력을 박탈하고 신진 사대부들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함으로써 새로운 나라를 향한 새로운 지배계층의 입지를 확고히 하기도 하였다. 


정몽주를 제거하고 4개월 뒤, 이성계는 정도전 등의 추대를 받아 1392년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그는 개경에서 공양왕에게 선위를 받는 형식으로 왕위에 올라 개국하였고, 이듬해 나라의 이름을 ‘조선’으로 바꾸었다. 


조선의 3대 기본 정책은 숭유억불∙농본주의∙사대주의였다. 이것은 이성계가 조선을 세울 때 이념적 바탕을 제공한 신진 사대부들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성리학을 신봉하고 고려시대 불교의 폐단을 비판하였던 신진 사대부들의 경험론이 반영된 숭유억불(유학을 높이고 불교를 누른다.), 중국 송나라에서부터 시작된 성리학 사상의 주요한 경제적 바탕이 된 농업을 국가의 중심 산업으로 하는 농본주의, 그리고 분수를 알아 큰 나라를 모시고 주변과 교린하는 성리학적 사대주의가 조선을 이루는 중심 사상이 된 것이다. 


사대주의는 [맹자(孟子)] ‘양혜왕() 하편’의 '오직 어진 자가 큰 나라로 작은 나라를 섬기고 오직 지혜로운 자가 능히 작은 나라로 큰 나라 섬긴다 ...(중략)...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의 이치를 즐기는 자요 작은 나라로써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의 이치를 두려워하는 자이니 하늘의 도리를 즐기는 자는 천하를 편안하게 하고 하늘의 도리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기 나라를 편안하게 다스릴 것이다.' 라는 글 중 ‘이소사대(작은 나라로 큰 나라를 섬긴다 )’에서 나온 말이다. 


이는 조선이 유학에서 최고로 치는 어진 자보다는 지혜로운 자라는 두 번째 자리를 택함으로써 중국에 비해 작은 나라인 조선의 안정과 당시 국제 정세 속에서 실리를 추구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성계가 세운 이 세 가지 건국이념은 이후 조선 500년의 정체성을 이루는 근간이 되었다. 


나라를 세운 뒤 이성계는 1394년 무학도사의 도움을 받아 한양에 도읍을 정하여 궁궐을 짓고 수도를 이전하였다. 이것은 고려의 본거지인 개경을 벗어남으로써 고려의 기득권층을 배제하고 새로운 지배계층을 형성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성계는 관제를 개편하여 유학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관제를 마련하고 너무 힘이 드세진 개국공신을 견제하면서 각지의 인재들을 아울러 왕권을 튼튼히 하였다. 또한 [경제육전]을 편집하게 하여 법치주의에 입각한 국가체제의 정비를 추구하였다. 


이 [경제육전]은 성종대 [경국대전]의 완성 이전까지 조선 초기 법전의 초석이 되었으며 조선 500년간 기본 법전이 된 [경국대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체성의 나라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재위 기간은 1392년부터 1398년까지 불과 6년밖에 되지 않는다. 


하늘 아래 가장 높은 자리인 왕위에 스스로 오르는 영웅다운 삶을 살아낸 그였지만 말년에 자식들이 벌이는 골육상잔의 권력 다툼 앞에서 그는 권력의 무상함을 느끼고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났다. 비극의 시작은 세자 책봉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는 데는 정도전을 대표로 하는 급진적 신진 사대부의 힘도 컸지만, 안으로는 이성계의 집안에서도 새 나라를 개창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사람이 두 사람 있었다. 그것은 이성계의 첫 부인 한씨의 소생인 다섯째 아들 이방원(훗날 태종)과 그의 두 번째 부인 강씨(신덕왕후)였다. 


개국공신에게 논공행상이 있듯이 집안의 큰 조력자들에게도 논공행상이 있어야 했다. 그것이 바로 다음 왕위를 예약하는 세자의 자리였다. 


아버지를 도와 나라를 세우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이방원은 그 세자 자리가 당연히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성계의 참모 역할을 했던 정도전과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도록 불철주야 내조한 강씨의 생각은 달랐다. 

왕권과 신권의 조화로운 정치를 추구하는 성리학의 골수 깊은 신봉자인 정도전에게 너무 강한 성격의 이방원이 다음 왕위를 잇는 것은 부담이었다. 


강씨는 내조의 공을 전실 자식인 이방원이 가져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성계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둔 강씨는 자신의 아들 중 하나가 다음 왕이 되기를 강력히 희망하였다. 이미 첫 부인 한씨가 사망한 뒤라 이성계의 곁에서 이방원의 편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방원으로서는 너무나 억울하게 ‘죽 쒀서 개 준 격’으로 강씨 소생의 막내아들 방석이 세자자리를 차지하였다. 나라도 무너뜨린 이방원이었다. 


눈앞에서 왕위가 사라지는 것을 가만 지켜볼 인물이 아니었던 이방원은 즉시 정도전과 맞서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자신의 사병을 일으켜 정도전을 급습해 죽이고 이복동생 방석과 방번을 모두 살해하였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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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이성계가 번연히 살아 있는 와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성계는 이 변란에서 두 아들과 사위까지 잃었고 권력 앞에 인면수심으로 행동하는자식들의 다툼에 인생무상을 느꼈다. 


이성계는 마침내 1398년 9월에 왕위를 둘째 아들 방과(정종)에게 물려주었다. 


정종의 즉위는 난을 일으킨 후 바로 왕위를 물려받는 것이 아버지를 협박해 왕위를 찬탈한 것처럼 보일까 염려한 이방원이 마련한, 왕으로 가기 전 일종의 유예기간인 셈이었다. 


이후 2년 뒤 이방원은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넷째 형 방간마저 물리치고,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넘겨받아 조선의 3번째 왕으로 등극하였다. 


왕위를 둘러싼 자식들의 목숨을 건 권력 다툼에 회의를 느낀 이성계는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고향인 함경도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다섯째 아들 이방원을 몹시도 증오하였지만 이미 이방원에게로 기운 대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이방원은 이성계를 모셔오기 위해 매번 차사를 보냈지만 이성계는 아들이 보낸 차사마저 모조리 죽여서 돌려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나온 말이 심부름을 간 사람이 소식이 아주 없거나 또는 회답이 좀처럼 오지 않을 때 쓰는 ‘함흥차사’란 말이다. 


이성계는 무학대사의 간곡한 설득으로 겨우 다시 한양으로 돌아와 태상왕의 자리에 있다가 창덕궁에서 7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이성계는 쉰여덟 살에 임금이 되었는데, 왕자들의 권력 다툼으로 인해 불행한 말년을 보냈다. 그가 둘째 부인인 강씨에게서 낳은 이방석을 세자로 삼자, 불만을 품은 다섯째 아들 이방원(태종)이 1398년에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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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년에는 넷째 아들 이방간과 이방원이 권력을 놓고 무력 충돌한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이성계는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둘째 아들인 방과(정종)에게 임금의 자리를 물려 주었다. 


제2차 왕자의 난 이후에는 이방원과 심한 갈등을 빚기도 하다가 1408년에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강헌지인 계운성문 신무대왕(仁 文 )이며, 묘호는 태조이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건원릉,이다. 


1408년 5월 24일 창덕궁() 별전(殿)에서 승하했다. 


시호는 강헌지인 계운성문 신무대왕(仁 文 )이다. 


묘호()는 태조()이다. 


능호는 건원릉()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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