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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역사 (국내)

최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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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무선(,1325~1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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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는 왜구의 침략으로 백성들이 많은 고통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최무선(,1325~1395)은 한국 역사상 최초로 화약을 발명하고, 이를 이용한 무기를 만들어 왜구를 물리친 위대한 과학자이자 무인이었다. 


"현자총통" 

최무선의 화약 발명은 이후 조선 시대에 국방력을 키우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어요. 


현자 총통은 조선 시대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에서 활약할 때 크게 활용했다고 해요. 


그는 중국으로부터 화약을 수입하여 고작해야 불꽃놀이에만 이용하곤 했던 시기에 선구자적인 안목과 노력으로 화약을 개발하여 국산화에 성공하였다. 


고려는 그가 발명한 화약과 새로운 무기를 가지고 해마다 쳐들어와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를 격퇴할 수 있었다.


긍정적 & 창조적인 인물로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는 최무선 졸기() 에 따르면, 젊은 시절 그가 항상 되뇌이는 말이 있었다.

“왜구를 막는 데는 화약만한 것이 없으나, 국내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태조실록] 1395년 4월 19일)

이 말은 그가 중국에 이어 고려인으로서 최초로 화약제조를 발명한 원동력이었다. 최무선은 고려인으로 태어났지만, 정작 [고려사]에는 기록이 별로 없다. 그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태조실록]에 실려 있는 졸기에서 찾을 수 있다. 

[태조실록]에 자세한 기록이 남겨진 이유는 고려 말에 왜구의 노략질을 막는데 최무선과 이성계가 함께 힘을 합쳤기 때문이다. 

고령의 최무선이 세상을 뜨자, 태조 이성계는 최무선과 함께 전장을 누볐던 사실을 기억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기록들을 모아 그의 일생을 재구성해 보면, 최무선은 1328년 경상북도 영천시 오계동 마단에서 광흥창사(使)를 지낸 최동순()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영주()로, 시조는 최한()이며 아마도 증조부인 최익겸 때에 이르러 영천에서 과거를 통해 개경으로 진입해 들어간 것으로 추측된다. 

부친이 재직했던 광흥창은 고려시대 관리들의 녹봉을 맡아 관리한 관청이었다. 광흥창사는 정5품의 관직으로, 관직 서열상 그리 낮은 관직이 아니다. 특이한 것은 7세손이었던 최무선 때부터 영성공파()라는 별도의 가계가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아마도 조선 초기에 그의 화약 발명의 공이 크게 인정받아 ‘영성공’으로 높임을 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후 그의 후손들은 영천 최씨 영성공파가 되었다.

최무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지금까지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다만, [태조실록]에 천성이 밝고 방략(: 일을 꾀하고 해 나가는 방법과 계략)이 많으며 병법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출생년도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시기는 고려왕조의 운명이 마치 바람 앞의 촛불과도 같은 때였다. 

지배층은 권력을 잡기 위해 정쟁만 일삼았고 백성들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었다. 게다가 왜구가 빈번히 전라도와 경상도 해안 지방에 출몰하여 많은 피해를 주고 있었다.

최무선은 어렸을 적부터 이런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자랐다. 아버지가 광흥창사였던 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부친의 직업으로 보아 개성 혹은 예성강 하구의 바닷가에 살면서 고려 사회의 위기 상황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광흥창사는 예성강 하구를 통해 개성을 비롯한 전국으로 운반되는 곡식을 책임지는 자리였다. 당시 왜구는 예성강으로 통하는 서해안 여러 항구의 쌀과 곡식을 노리고 있었다.

최무선이 언제 어떻게 관리가 되었는가는 밝혀져 있지 않다. 고려시대에도 과거를 통해 관직으로 나가긴 했지만, 조상의 음덕, 즉 음직()을 통해 관직을 얻는 경우가 더 많았다. 

어떤 경로를 통해 관직에 나갔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병법에 관심이 많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군기시() 소속의 하급 관리부터 출발했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훗날 최무선이 화통도감을 만든 것으로 보아 병기제작 관련 업무를 맡아왔을 가능성이 있다.

집념으로 화약을 만들다

최무선이 화약을 만든 것은 오로지 개인적인 집념의 결과였다. 당시 고려에는 화약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그는 항상 중국 강남에서 오는 상인이 있으면 곧장 달려가 만나보고 화약 만드는 법을 물었다고 한다. 

정이오()의 [화약고기()]에 따르면, 최무선은 중국말을 잘했다고 하고 [세조실록]에는 그가 원나라에 가서 화포 만드는 법을 배워왔다고 전한다.

최무선이 화약을 만드는 일에 대해 당시 사람들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중국에서 수입해 쓰면 되는 것이어서 귀찮게 국산으로 생산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더욱이 화약은 불꽃놀이와 같은 장난감에나 쓰는 것이지, 

무기에 사용할 수 있다는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최무선은 달랐다. 그는 일찍이 화약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있었다. 때문에 사람들에게 화약을 국산화하고, 화약을 이용한 무기도 개발하여 왜구 소탕에 사용하자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최무선의 오랜 꿈이 이루어 진 것은 1377년(우왕 3) 10월의 일이었다. 

최무선의 건의로 화약 및 화기()의 제조를 담당하는 화통도감()이 설치된 것이다. 

화통도감의 설치는 그가 화약 만드는 기술을 완전히 습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무선은 원나라 출신의 염초장() 이원()에게서 화약 제조 비법을 배웠다.

[고려사]에 따르면 최무선은 이원과 같은 동네에 살아 친하게 지내며 은근히 화약 만드는 기술을 물어보고 자기 집 하인 몇 명을 시켜 화약제조법을 완전히 익힌 다음, 고려 정부에 건의하여 화통도감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화약 제조뿐만 아니라 화통도감의 설치 또한 그의 오랜 노력의 결과였다. 

화약 제조 기술을 습득한 뒤에 최무선은 도당()에 건의하여 시험해 보려 했으나, 관료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속이려 하는 인물로 비난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에 좌절하지 않고 여러 해 동안 지속적으로 화약 제조를 건의했고, 그의 정성에 감동한 왕이 화약국()을 설치하게 하여 마침내 화약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화포의 제조와 왜구의 섬멸

전라북도 군산시에 위치한 진포대첩지비. 1380년(고려 우왕 6년) 진포에서 있었던 고려군과 왜군의 해상전투에서 고려군은 최무선이 만든 화포를 앞세워 큰 승리를 거두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화통도감을 맡은 최무선은 곧장 화포 제작에 착수했다. 

대장군포()·이장군포()·삼장군포()·육화석포()·화포()·신포()·화통(㷁)·화전()·철령전()·피령전()·질려포()·철탄자()·천산오룡전(穿)·유화()·주화()·촉천화() 등 다양한 화포들을 만들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화약 무기 제조의 결과는 엄청났다. 

1380년(우왕 8) 가을에 왜선() 3백여 척이 전라도 진포()에 침입했을 때, 조정에서는 최무선의 화약을 시험해 보고자 하여 그를 부원수()에 임명하였다. 최무선은 도원수 심덕부()·상원수 나세()와 함께 화포를 배에 싣고 왜구가 들끓고 있는 진포로 갔다. 

고려군에게 화약이 있는지 모르고 있던 왜구들이 배를 한곳에 집결시키자 최무선은 그곳을 향해 화포를 발사하여 배를 모두 불태워버렸다. 

배를 잃은 왜구 잔당들이 육지로 올라오자 이번에는 병마도원수였던 이성계가 여러 장수들과 함께 모두 섬멸시켰다. 진포 전투 이후로 왜구의 침략은 점차 사라졌고 백성들은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최무선이 그리도 열심히 만들어 낸 화통도감은 고려 창왕 때(재위기간 1388-1389) 없어지고, 그 기구는 군기시()에 흡수되었다. 

화통도감이 사라진 이유는 불분명하다. 왜구를 성공적으로 소탕한 뒤 더 이상 필요 없어져 버린 것인지, 아니면 고령이 되어 더 이상 공직 생활을 할 수 없던 최무선을 계승할 후계자가 없어서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화약 제조법, 조선으로 이어지다

최무선은 1395년 4월 19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는 아들 하나만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 1380-1443)은 바로 아버지가 진포 싸움에서 왜구를 물리친 그 해, 세상에 태어났다. 최무선이 죽었을 때 최해산의 나이는 불과 15세였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최무선은 아내 이씨에게 ‘아들이 장성하면 이 책을 주라’면서 화약제조의 비법이 적힌 책을 남겼다고 한다. 

부친의 유언을 받들어 최해산은 화약 제조법을 습득했고, 이후 1401년(태종 1) 군기시에 특채되어 화포 개발 실험에 주동적 역할을 했다. 

야사에 따르면 최해산은 장남이 아니고 차남인데, 장남은 화약 실험 중에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설도 전한다.

우리나라 무기의 역사를 바꿔 놓은 최무선이었지만, 아쉽게도 [고려사] ‘열전()’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그와 함께 진포전투에 참여한 나세 장군만 [고려사] 열전에 이름이 올랐다. 

나세는 원나라 출신으로 고려에 귀화해 홍건적과 왜적을 물리친 공을 남긴 장군이다. 최무선은 [고려사] 나세전에 살짝 거론되고 있을 뿐이다.

최무선이 발명한 화약과 무기는 다행히 사라지지 않고 그의 아들 최해산을 통해 조선왕조의 중요한 국방기술로 전수되었다. 세종대에 보다 향상된 화약제조법이 나오게 된 것 또한 최무선 부자의 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임진왜란 때 육지에서는 조총을 앞세운 왜군이 조선군을 압도했지만, 해전에서는 조선이 일본보다 화포 기술에서 앞서 있었던 것도 최무선의 화약제조 덕분이었다.

325(충숙왕 12)∼1395(태조 4). 고려 후기의 무기 발명가. 본관은 영주(: 현재의 영천). 광흥창사(使) 최동순()의 아들이다. 

우리나라에서 화약과 화약을 이용한 무기를 처음 제작, 사용하였다. 무관인 그는 고려 말기에 한창 기승을 부리던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화약과 총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연구에 임하였다. 

화통도감에서 제조된 각종 화기들은 모두 18가지로, 이 중에서 총포의 종류는 대장군()·이장군()·삼장군()·육화석포(: 완구의 일종)·화포()·신포()·화통() 등이며, 화전()·철령전()·피령전() 등은 발사물, 그 밖에 질려포()·철탄자()·천산오룡전(穿)·유화()·촉천화()와 로켓무기로 주화()가 있다. 

간단한 화약을 이용한 무기, 즉 화전() 등을 만들어 실험해 본 그는, 마침내 자신을 얻어 화약과 각종 화약을 이용한 무기를 연구하고 만들 화통도감()의 설치를 몇 번에 걸쳐 건의하였다. 

그리고는 끝에 허락받아 우리나라에서 화약과 화약무기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1377년 10월부터 시작하였다. 

화약을 만드는 세 가지 재료, 즉 초석·유황·분탄 중에서 유황과 분탄은 쉽게 구할 수 있으나 초석을 만드는 것이 가장 어렵고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래서 화약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 중국에서 배우기로 하고, 중국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무역항 벽란도에 가서 중국으로부터 오는 상객들 중에서 초석(염초)의 제조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을 찾았다. 


그러던 중 중국의 강남지방에서 온 이원()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후하게 대접하는 등 지극한 정성과, 화약을 만들어 국가를 살리겠다는 집념으로 이원을 감동시켜 초석을 흙에서 추출()하는 방법을 배우고, 드디어 화약을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1380년(우왕 6)에 왜구가 500여 척의 선박을 이끌고 금강 하구의 진포로 쳐들어왔을 때 원수() 나세()와 함께 각종 화기로 무장한 전함을 이끌고 나아가 싸워 격파시키는 큰 공을 세웠다. 


고려에서는 지문하부사()라는 벼슬까지 올랐으며, 조선 초에는 나이가 많아 등용되지는 못하였으나, 죽은 후에 그의 공을 생각하여 의정부우정승() 영성부원군()으로 추증()하였다. 


아들 최해산()과 손자 최공손()도 화약과 화기 연구에 참여하였다. 저서로는 『화약수련법()』을 남겼으나 전하지 않고 있다.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기록들을 모아 그의 일생을 재구성해 보면, 최무선은 1328년 경상북도 영천시 오계동 마단에서광흥창사(使)를 지낸 최동순()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영주()로, 시조는 최한()이며 아마도 증조부인 최익겸 때에 이르러 영천에서 과거를 통해 개경으로 진입해 들어간 것으로 추측된다. 부친이 재직했던 광흥창은 고려시대 관리들의 녹봉을 맡아 관리한 관청이었다. 광흥창사는 정5품의 관직으로, 관직 서열상 그리 낮은 관직이 아니다. 


특이한 것은 7세손이었던 최무선 때부터 영성공파()라는 별도의 가계가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아마도 조선 초기에 그의 화약 발명의 공이 크게 인정받아 ‘영성공’으로 높임을 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후 그의 후손들은 영천 최씨 영성공파가 되었다. 


최무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지금까지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다만, [태조실록]에 천성이 밝고 방략(: 일을 꾀하고 해 나가는 방법과 계략)이 많으며 병법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출생년도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시기는 고려왕조의 운명이 마치 바람 앞의 촛불과도 같은 때였다. 지배층은 권력을 잡기 위해 정쟁만 일삼았고 백성들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었다. 


게다가 왜구가 빈번히 전라도와 경상도 해안 지방에 출몰하여 많은 피해를 주고 있었다. 


최무선은 어렸을 적부터 이런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자랐다. 아버지가 광흥창사였던 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부친의 직업으로 보아 개성 혹은 예성강 하구의 바닷가에 살면서 고려 사회의 위기 상황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광흥창사는 예성강 하구를 통해 개성을 비롯한 전국으로 운반되는 곡식을 책임지는 자리였다. 당시 왜구는 예성강으로 통하는 서해안 여러 항구의 쌀과 곡식을 노리고 있었다. 


최무선의 오랜 꿈이 이루어 진 것은 1377년(우왕 3) 10월의 일이었다. 최무선의 건의로 화약 및 화기()의 제조를 담당하는 화통도감()이 설치된 것이다. 


화통도감의 설치는 그가 화약 만드는 기술을 완전히 습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무선은 원나라 출신의 염초장() 이원()에게서 화약 제조 비법을 배웠다.


[고려사]에 따르면 최무선은 이원과 같은 동네에 살아 친하게 지내며 은근히 화약 만드는 기술을 물어보고 자기 집 하인 몇 명을 시켜 화약제조법을 완전히 익힌 다음, 고려 정부에 건의하여 화통도감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화약 제조뿐만 아니라 화통도감의 설치 또한 그의 오랜 노력의 결과였다. 


화약 제조 기술을 습득한 뒤에 최무선은 도당()에 건의하여 시험해 보려 했으나, 관료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속이려 하는 인물로 비난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에 좌절하지 않고 여러 해 동안 지속적으로 화약 제조를 건의했고, 그의 정성에 감동한 왕이 화약국()을 설치하게 하여 마침내 화약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최무선이 언제 어떻게 관리가 되었는가는 밝혀져 있지 않다. 고려시대에도 과거를 통해 관직으로 나가긴 했지만, 조상의 음덕, 즉 음직()을 통해 관직을 얻는 경우가 더 많았다. 


어떤 경로를 통해 관직에 나갔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병법에 관심이 많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군기시() 소속의 하급 관리부터 출발했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훗날 최무선이 화통도감을 만든 것으로 보아 병기제작 관련 업무를 맡아왔을 가능성이 있다. 


고려후기 사회는 왜구의 침략으로 백성들이 많은 고통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최무선(,1325~1395)은 한국 역사상 최초로 화약을 발명하고, 이를 이용한 무기를 만들어 왜구를 물리친 위대한 과학자이자 무인이었다. 


그는 중국으로부터 화약을 수입하여 고작해야 불꽃놀이에만 이용하곤 했던 시기에 선구자적인 안목과 노력으로 화약을 개발하여 국산화에 성공하였다. 고려는 그가 발명한 화약과 새로운 무기를 가지고 해마다 쳐들어와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를 격퇴할 수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는 최무선졸기() 에 따르면, 젊은 시절 그가 항상 되뇌이는 말이 있었다. 


“왜구를 막는 데는 화약만한 것이 없으나, 국내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이 말은 그가 중국에 이어 고려인으로서 최초로 화약제조를 발명한 원동력이었다. 최무선은 고려인으로 태어났지만, 정작 [고려사]에는 기록이 별로 없다. 


최무선이 화약을 만든 것은 오로지 개인적인 집념의 결과였다. 당시 고려에는 화약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그는 항상 중국 강남에서 오는 상인이 있으면 곧장 달려가 만나보고 화약 만드는 법을 물었다고 한다.


정이오()의 [화약고기()]에 따르면, 최무선은 중국말을 잘했다고 하고 [세조실록]에는 그가 원나라에 가서 화포 만드는 법을 배워왔다고 전한다.최무선이 화약을 만드는 일에 대해 당시 사람들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중국에서 수입해 쓰면 되는 것이어서 귀찮게 국산으로 생산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더욱이 화약은 불꽃놀이와 같은 장난감에나 쓰는 것이지, 


무기에 사용할 수 있다는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최무선은 달랐다. 그는 일찍이 화약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있었다. 


때문에 사람들에게 화약을 국산화하고, 화약을 이용한 무기도 개발하여 왜구 소탕에 사용하자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태조실록]에 실려 있는 졸기에서 찾을 수 있다. 


[태조실록]에 자세한 기록이 남겨진 이유는 고려 말에 왜구의 노략질을 막는데 최무선과 이성계가 함께 힘을 합쳤기 때문이다. 


고령의 최무선이 세상을 뜨자, 태조 이성계는 최무선과 함께 전장을 누볐던 사실을 기억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화약은 10세기쯤 중국에서 발명되었어요. 중국인들은 화약을 이용해서 불꽃놀이를 하거나 신호용으로 썼지요. 화약은 유럽으로 전해져 소형 화기로 사용되었어요. 한국에 화약이 전해진 시기는 고려 말로, 최무선이 처음으로 화약을 이용해 군사 무기를 만들었어요. 



화약과 화통을 만드는 일을 하는 관아를 화통도감이라고 해요. 이 화통도감에 속한 최무선 영감이 화약 제조법을 배운 지 20년이 된 해에 엄청난 위력을 지닌 화약이 발명되었습니다. 


정말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지요. 사실 그 전까지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화약은 고작 불꽃놀이에만 사용할 수 있을 정도였지요. 


최무선은 오랜 연구 끝에 결국 폭발력을 최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습니다. 


진포에서 왜구를 크게 물리친 고려군은 이후 바다 싸움에서 강한 힘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최무선은 『화약수련법』과 『화포법』이라는 저서를 남겼고, 화약 제조 기술은 아들인 최해산에게 이어졌어요. 그리고 조선이 세워진 뒤에는 태종이 최해산을 등용해 화약 무기를 대량 생산했답니다. 


"현자총통" 

최무선의 화약 발명은 이후 조선 시대에 국방력을 키우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어요. 


현자 총통은 조선 시대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에서 활약할 때 크게 활용했다고 해요.


또 다른 볼거리.(싸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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