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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역사 (국내)

을지문덕.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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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지문덕.2

신기한 그대의 작전은 하늘의 원리에 통달하였고 오묘한 꾀는 땅의 이치를 꿰뚫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공이 이미 높으니 만족한 줄 알고 그만둠이 어떠한가.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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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중문 자네가 뛰어난 인재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다. 그러니 이번 전투에서 개망신을 당하지 않으려면, 지금 말머리를 돌려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경고성 멘트였어요. 이 시를 본 우중문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군사들에게 급히 후퇴 명령을 내렸어요.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어요. 


고구려 군은 이런 날이 올 것을 미리 예상하여 수나라 군대가 되돌아가는 길목에 있던 살수의 상류를 흙과 돌로 막아 놓고 수나라 군사들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어요. 수나라의 30만 군대는 허겁지겁 후퇴하며 살수에 도착했어요. 강물을 보니 바지를 조금만 걷어 올리면 충분히 건널 수 있는 깊이였어요. 언제 어디서 고구려 군이 공격해 올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수의 군사들은 앞뒤 재지 않고 오합지졸이 되어 서로 경쟁하듯이 물속으로 뛰어 들었어요. 


강의 상류에서 기다리고 있던 고구려 군사들은 수의 군사들 대다수가 강물로 뛰어든 것을 보고 막아 놓았던 둑을 터 버렸어요. 수나라 군사들은 파도처럼 밀려오는 강물을 피하지 못하고 거의 전부가 물고기 밥이 되고 말았지요. 이곳에서 살아 돌아간 자가 2,700여 명에 불과했으니, 무려 29만 3천여 명이 물에 수장들 되었고 이 전투가 을지문덕의 "살수 대첩" 여기서 문덕의 강력한 잽이 중문에게 날아간다. 저 유명한 ‘여수장우중문시()’가 그것이다. 


신비로운 계책은 하늘의 흐름을 알아서 하고,(文), 기묘한 꾀는 땅의 이치를 다 알아서 하는 게지, (理), 싸움에서 이긴 공 높을 수밖에 없겠네, (高), 그만하면 족하니 이제 그치는 게 어떠한지, (止),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는 멋진 시이다. 이 시를 보고 중문이 답서를 보냈다고 하나 어떤 내용인지 전해지지 않는다. 


문덕의 마지막 작전은 이 시에 이어 나왔다. 다시 항복을 가장하고, “만일 군사를 철수한다면 틀림없이 왕을 모시고 행재소로 가서 인사드리겠다.”라고 하였다. 이미 수나라의 군사는 피곤하고 기운이 쇠진하여 더는 싸울 수 없었다. 더욱이 평양성은 험하고 견고하여 바로 함락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서 거짓 항복이라도 받은 상태에서 돌아가기로 하였다. 여기서 드디어 문덕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여름에 출정한 전쟁이 어느덧 가을을 지나가고 있었다. 


수나라군의 힘이란 힘은 다 빠져 있었다. 문덕은 군사를 출동시켜 사면으로 공격하였다. 드디어 살수에 이르고 거기는 수나라 군사의 수장처()가 되었다. 살수는 지금 평안남북도의 경계를 이루는 강이며, 낭림산에서 발원해 서해로 들어간다. 이 강은 구조적으로 거의 직선을 이루고 있는데, 강물로 뛰어드는 군사가 한눈에 보여 아주 쉬운 공격목표가 되었다. 중문과 문술이 끌고 온 군대는 30만 5천 명, 그러나 그들이 요동성에 돌아갔을 때는 다만 2천7백 명뿐이었다. 


고구려는 전통적으로 외적이 쳐들어오면 들판이나 집안에 있는 곡식들을 적들이 활용하지 못하도록 전부 불태워 버리고 성에 들어가 끈질기게 버티며 적을 괴롭히는 작전을 주로 썼어요. 이러한 전술을 들판을 텅 비게 만들어 먹을 것을 구할 수 없게 만든다고 해서 ‘맑을 청()’에 ‘들판 야()’를 써서 ‘청야 작전()’이라고 해요. 


어느 나라건, 고구려와 싸워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속전속결로 전쟁을 끝내야 했어요. 그런데 수나라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쳐들어왔지만, 첫 전투지인 요동성부터 난관에 부딪혔어요. 4개월 동안 젖먹던 힘까지 동원하여 요동성을 점령하려 했지만, 성은 생각처럼 쉽게 함락되지 않았어요. 


추운 겨울은 닥쳐오지, 준비해 온 양식은 달랑달랑하지, 수양제는 다급해졌어요. 그래서 그는 30만의 별동 부대를 재편성하여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직접 공격하려 했어요. 별동 부대는 ‘별도로 움직이는 부대’란 의미로, 요즘의 해병대라고 할 수 있어요. 이제 고구려는 꼼짝없이 당하게 생겼어요. 그러나 걱정 마세요. 고구려에는 명장 을지문덕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으니까요. 


을지문덕의 생애와 그 공적을 찬양한 이가 신채호였다. 기울어가는 나라의 모퉁이에서, 어떻게 하든 나라의 기둥이 쓰러지지 않도록 애쓴 신채호는 우리 역사상의 뛰어난 인물을 널리 알리려 애썼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을지문덕이었다. 1908년에 간행된 [을지문덕]이 바로 그것이다. 


여러 자료에서 을지문덕 시대의 정황과 그의 활동을 세밀히 쓴 점 말고도 진정 신채호가 규정한 을지문덕 생애에 대한 한마디 말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을지문덕주의’이다. 


지금부터 을지문덕이 이룩한 업적인 살수대첩에 대해 알아보겠다. 612년 수나라는 무려 113만 8천 명의 대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해 왔다. 병사들만 1백만이 넘는데다가 보급을 담당하는 보조인원까지 합치면 족히 300만이 넘는 엄청난 인원이 동원된 것이다. 고구려 영양왕은 이번 전쟁을 을지문덕과 자신의 동생인 건무에게 맡겼다. 


을지문덕은 적의 주 공격을 육지에서 막는 임무를, 건무는 적의 해군을 막고 수도를 보호하는 임무를 맡았다. 을지문덕은 비록 고구려군이 숫자는 적지만 반드시 적군을 물리치겠노라고 다짐했다. 


598년 수나라 군대를 요하도 건너오지 못하게 하고서 물리쳤던 경험이 있어서인지 고구려 사람들은 자신감이 넘쳤다. 을지문덕이 [삼국사기]의 열전에서 두 번째 인물로 등장하는 것은 뜻깊다. 첫 번째 인물이 김유신인 것과 견주어, 


신라의 김유신이라면 고구려의 을지문덕이라 판단한 김부식의 생각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김유신만큼 많은 양을 할애하지 않았고, 내용 또한 살수대첩 하나에 국한한 것이므로, 열전으로서의 모든 요소를 갖추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여기에는 을지문덕의 생몰연대조차 적혀 있지 않고, ‘그 조상이 누구인지 잘 모른다.’는 말로 그 집안에 대한 정보 또한 생략하고 말았다. 


그러나 ‘침착하고 굳센 성격에다 지략이 있고 글 짓는 법까지 알았다.’라고 해서, 을지문덕에 대한 기본적인 예우를 섭섭하게 하지 않았다. 양제()의 요동 전쟁은 출동 병력에서 전례가 없을 만큼 컸다. 


고구려는 한 모퉁이에 있는 조그마한 나라이다. 그런데도 이를 방어하고 스스로를 보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군사를 거의 섬멸해버릴 수 있었던 것은 문덕() 한 사람의 힘이었다. 


춘추 좌전에서, “군자가 없으면 어찌 나라를 다스릴 수 있으리오?” 라고 했으니, 참으로 옳은 말이다. “을지문덕 주의는 적이 커도 우리는 반드시 나아가고, 적이 강해도 우리는 반드시 나아가며, 적이 사납든지 용맹하든지 간에 우리는 반드시 나아가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면 식은땀으로 등이 젖고, 털끝만큼이라도 양보하면 입으로 피를 토하면서 이로써 자신을 독려하고, 이로써 동료를 고무하며, 이로써 전국 국민을 흥기 시켜, 그 삶을 조선으로서 하며 그 한 번 숨 쉬고 한 번 먹는 것을 반드시 조선으로서 한 결과, 마침내 여진 부락을 다 우리의 식민지로 만들었고, 중국의 천자를 우리 손으로 거의 사로잡을 뻔했던 것이다.” 


대참패를 당한 수나라가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 613년 봄 두 번째 동원령을 내려 고구려로 쳐들어왔다. 그러나 이때는 고구려의 안쪽 깊숙이 들어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수나라 내부에서 보급의 핵심을 맡고 있던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심각한 균열의 조짐마저 보였다. 614년의 3차 침공 준비는 더 싱겁게 끝나고 말았는데, 명예회복에 안달이 난 양제가 615년 동돌궐 군대에 사로잡힐 뻔한 일까지 벌어지자 마침내 전쟁을 포기하였다. 


이때 양제는 많은 포상을 지급할 것을 약속하며 구원병을 모집하는데, 여기에 나중당나라 태종이 되는 16세의 이세민도 달려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 가지 의문스러운 일은 613년부터 을지문덕의 이름이 더는 어디서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별한 전공이 없어서 굳이 쓸 까닭이 없었던 것인지, 어떤 몹쓸 음모에 말려 쓸쓸히 죽었던 것인지, 안타깝지만 아무리 상상을 동원해도 그 최후를 알 수 없다. 이 전쟁을 고비로 고구려는 급격히 쇠락의 길을 걸었다. 


영양왕의 시대가 굵직한 전쟁에 휘말려, 비록 을지문덕 같은 영웅의 활약으로 자기의 시대는 보전했으나, 그들에게 입혀진 상처 또한 만만하지 않아 고스란히 그 짐은 후대에 전해졌다. 그렇다면 을지문덕의 전공은 상처뿐인 영광이었을까. 전쟁을 그만두기로 한 3년 뒤, 곧 618년 3월에 나라 안에 정변이 일어 양제는 부하에게 살해되었다. 그것은 수나라의 최후나 마찬가지였다. 그 자리에 이세민의 당나라가 섰다. 그래서 신채호는 말하였다. 


“을지문덕이 갈아놓은 밭에서 이세민이 수확을 거두어들였으며, 을지문덕이 애를 쓴 덕에 이세민이 그 복을 누렸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상 최대의 전쟁을 수행하였던 고구려의 영양왕도 수양제가 죽은 6개월 뒤인 9월에 세상을 떴다. 수나라의 군대는 지금의 북경 지방에서 군대를 출발시켰다. 여기서 고구려의 방어선이 있는 요동까지는 무려 2천 리. 을지문덕은 적의 식량 보급을 차단하고 장기전으로 끌고 가면 아무리 대군이라고 하더라도 굶주려 싸울 힘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판단했다.


옛부터 만리장성 남쪽에 사는 사람들에게 요동은 아주 먼 별천지 같은 곳이었다. 수나라 군대는 이 먼 곳에 와서 빨리 전쟁을 끝내야만 했다. 요동의 겨울은 몹시 추워서 그때까지 전쟁을 치렀다가는 수나라 군사들이 다 얼어죽기 때문이었다. 612년 1월 북경 지역을 출발한 수나라 군대는 3월 중순 회원진에 이르러서 요하를 건너기 위한 준비를 했다. 고구려군은 요하 동쪽에 방어 진지를 만들고 요하를 건너오려는 적을 맞이했다. 


고구려와 수나라의 첫 번째 싸움인 요하전투가 벌어졌다. 수나라 군대는 고구려군을 피하여 요하 하류지역에 서둘러 뜬다리를 만들어 강 동쪽에 대놓고 강을 건너려 했다. 이들을 향해 고구려의 궁수들이 화살을 쏘았다. 고구려 궁수부대는 수나라 1군 총사령관 맥철장을 비롯해서 전사웅, 맹차 등 여러 장군들을 요하싸움에서 잇달아 활로 쏘아 죽였다. 


첫 싸움에서 요하를 건너지도 못하고 크게 패배한 수나라 군대는 일단 후퇴하고 뒤에 오는 부대를 기다렸다. 이 사이 을지문덕은 방어태세를 더욱 견고하게 했다. 4월 중순 수양제가 직접 요하 서쪽에 와서 지휘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적이 압도적인 병력으로 강을 건너는 작전을 시도하자, 고구려군은 일차 목표인 적의 진격속도를 늦추었던 것에 만족하고 요동성으로 퇴각하였다. 을지문덕은 고구려군에게 성을 굳게 지키고 나가서 적과 싸워 빨리 이기려고 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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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군은 요하를 건너자 곧 요동성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적군은 반드시 고구려를 물리쳐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들이 만든 새로운 무기들을 총동원했다. 높은 요동성을 넘기 위한 운제와 성문을 부수기 위한 충차, 불을 지르기 위한 화차, 돌을 던져 성벽을 부수는 발석차 등 최신 무기는 요동성의 고구려군에게 대단히 위협적이었다. 이에 맞선 고구려는 마름쇠를 성벽 주위에 집중적으로 뿌렸다. 


마름쇠는 밤송이처럼 뾰족한 쇠촉이 사방으로 나 있어 보병들이나 기병들이 마름쇠에 잘못 찔리면 큰 상처를 입는다. 따라서 적들의 성벽진입을 막는 무기다. 또 성에 접근하는 적군을 향해서 돌덩이를 날려 보낼 수 있는 포차를 성벽 곳곳에 배치했다. 또한 활을 잘 쏘는 고구려인답게 화살부대가 적군을 향해 활을 쏘았다. 수나라 사람들은 고구려를 두려워했다. 


수양제의 고구려 원정은 무모한 짓이라는 생각이 백성들 사이에 퍼지고 있었다. 그중에 하나가 「무향요동낭사가」라는 노래이다. 농민반란군을 지휘하던 자칭 지세랑이란 자가 지은 노래는 이러하다. 


장백산 아래에서 나는 비단옷 대신에 농부의 옷을 입었다. 긴 창이 하늘의 반을 가리우고, 전쟁무기를 실은 수레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네. 산 위에서 노루와 사슴을 잡고, 들에서는 소와 양을 잡으며 평화롭게 지냈는데 문득 들으니 관군이 도착하여 칼을 들고 전쟁터로 사람들을 끌고 가고 있다 하네. 사람들이여, 요동에서 죽는 것을 깨달아라. 참혹하게 머리가 잘리며 부상당한 모습을. 이 노래는 한가롭게 시골마을에서 사는 사람들이 갑자기 전쟁터에 끌려가 죽는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전쟁을 반대하는 당시 수나라 사람들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다. 


수나라 사람들은 10여 년 전 30만 대군이 고구려에서 모두 죽임을 당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고구려 사람들은 말 타고 활 쏘며 사냥하는데 익숙하고 용맹하다는 사실을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고구려를 두려워했다. 수나라 군대가 아무리 공격해 와도 강인한 고구려군의 반격에는 속수무책이었다. 4월 하순부터 시작된 수나라 군대의 요동성 공격을 고구려군은 6월 초순이 될 때까지 잘 막아내고 있었다. 


수나라의 수백만 대군은 고구려의 성을 단 한 곳도 함락시키지 못한 채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수나라 군대도 장점이 많았다. 그들은 엄청나게 많은 무기와 군용 물자들을 가져왔다. 수나라는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서 성에 쉽게 오를 수 있는 사다리인 운제, 성문을 부수는 데 이용하는 충차, 큰 돌을 던져 성벽을 부수는 데 사용하는 발석차 등 다양한 무기도 개발했다. 무엇보다 엄청나게 많은 병력이 가장 큰 힘이었다. 수나라의 대군에 맞선 고구려에는 견고하게 만들어진 성곽, 단결된 고구려인의 마음가짐과 드높은 사기, 그리고 을지문덕이 있었다. 


요동성의 고구려군은 너무나 잘 싸우고 있었다. 다만 이때 고구려의 요동성주가 누구인지는 기록이 전혀 없어 알 수가 없다. 이때 을지문덕은 적이 요동성을 지나 다른 성을 공격하는 것을 철저히 막았다. 


수양제는 고구려의 성을 하나도 빼앗지 못하자 잔뜩 화가 났다. “너희 장군놈들이 내가 직접 요동에 오는 것을 반대하더니 너희들의 이런 무능함을 보일까 봐 두려워서 그랬구나. 내가  너희들을  믿고 있다가는 요동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가겠다. 당장 고구려 수도로 쳐 들어가 고구려 왕과 을지문덕의 목을 베어 오지 못할까.” 수양제는 노발대발해서 부하장수들을 다그쳤다.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 30만 5천 명의 별동대를 보내 고구려 수도인 장안성을 직접 공격하자는 것이었다. 이미 수나라 해군은 산동 반도에서 출발해서 평양과 가까운 대동강 입구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들 해군과 연합하여 장안성을 공격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수나라 별동대는 여러 고구려 성들을 제쳐놓고 오로지 수도인 장안성을 향해 진격했다. 하지만 오직 장안성만을 공격하기 위해 고구려 군대를 피해 가다 보니 군사들의 식량과 물자의 보급이 자주 끊겼다. 30만 5천의 군대는 1인당 100일 분량의 식량을 각자 가지고 진격했다. 너무 많은 식량을 들 수 없던 병사들은 식량을 버리고 가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심각한 식량 부족 현상이 수나라 군대를 위협하게 되었다. 


적들이 압록강에 이르자 을지문덕은 적의 약점을 파악하여 언제 어떻게 공격을 할지 알아보기 위해 자신이 직접 적진에 사신의 임무를 가지고 방문했다. 을지문덕의 갑작스런 방문에 수나라 장군들은 당황했다. 


을지문덕은 수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사람이었다. 수양제는 일찍이 부하들에게 명령했었다. “고구려에서 반드시 잡아야 할 사람은 왕과 함께 뛰어난 장군인 을지문덕이다. 이 둘은 반드시 사로잡거나 죽여라.” 수나라 사령관 우중문은 을지문덕을 사로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때 유사룡이란 자가 사신으로 온 적장을 사로잡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니 돌려보내야 한다고 했다. 


을지문덕은 적군의 사정을 충분히 파악한 후에 적진을 빠져나왔다. 적장 우중문은 을지문덕을 돌려보낸 것을 후회하고서 다시 만나자고 사람을 보냈다. 하지만 을지문덕이 그 속셈을 모를 리 없었다. 뒤도 보지 않고 압록강을 건너 돌아왔다. 우중문은 유사룡에게 소리쳤다. “을지문덕을 네놈 때문에 놓쳤다. 놈을 반드시 잡아야 한다.” 


우중문과 함께 별동대를 지휘하던 우문술이 곁에 있다가 우중문에게 말했다. “장군, 우리 군대의 식량이 다 떨어져 가고 있소. 이쯤에서 돌아가야겠소.” 장군께서는 수십만의 군대를 이끌고 와서 적을 물리치지도 못하고 되돌아가면 무슨 면목으로 임금을 만날 수 있겠소이까. 지금 우리 정예부대로 고구려군을 쫓아가면 분명 공을 이룰 수 있을 것이오. 만일 우리가 이대로 물러나고 을지문덕을 놓친 일까지 임금이 아신다면 우리는 죄를 받을 것이오.” 


우중문이 이렇게 화를 내며 단호히 말하자 우문술도 마지못하여 우중문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고구려군을 추격하게 되었다. 『동사강목』에서는 을지문덕의 살수대첩과 양만춘의 안시성싸움으로 인해 많은 나라들이 우리나라를 강국으로 여겨 감히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는 을지문덕이 남긴 공적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일본에게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겨 나라를 잃었던 20세기 초에 나라를 구하고자 일어선 의병들이 부른 노래에는 을지문덕을 본받자는 내용이 많다. 


용진가": "한산도에 왜적을 쳐서 파하고 청천강수 수병(수나라 병사) 백만 몰살하오신 이순신과 을지공의 용진법대로 우리들도 그와 같이 원수쳐보세." 이처럼 을지문덕은 이순신 등과 함께 외적을 물리친 영웅으로 존경받았다.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대가 연합하여 고구려 수도를 공격하는 것을 막아야 했다. 


을지문덕은 요동성을 비롯한 요동에서의 방어를 부하들에게 맡기고 별동대를 상대하기로 했다. 


을지문덕은 명림답부 이래 고구려에서 사용해 오던 청야전술을 펼쳤다. 수나라 군사들이 고구려 영토 안에서 단 한톨의 식량도 얻지 못하도록 전쟁터 주변에 사람들과 먹을 것을 전부 치워 버렸다. 


수나라 군사들은 고구려 깊숙이 쳐들어오면서 점차 식량이 부족해졌다. 하나둘 굶주림에 지치기 시작했다. 청야전술이 가능했던 것은 고구려 사람들이 일치단결했기 때문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자신들의 물건과 식량을 전부 성 안으로 옮겨왔고, 적군과 몰래 정보를 주고받는 배신자도 없었다. “자, 빨리 식량과 물건을 성 안으로 옮기자. 적군이 와서 이것을 빼앗으면 적군이 강해지는 것이니 빨리 옮기는 것이 적군을 물리치는 일이 아니겠는가.”<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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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나라 군대가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단결하면 저들을 금방 물리칠 수 있을 거예요.” 고구려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가 되어 을지문덕의 작전에 적극 따라주었다. 만약 백성들이 호응해 주지 않았다면 을지문덕이라도 적을 쉽게 물리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싸움이 있은 후 780년이 지난 어느 날 조선의 창업공신인 조준은 명나라 사신 축맹과 더불어 청천강이 바라다보이는 백상루라는 누각에서 함께 술을 마시다가 시 한 수를 지었다. 


"살수의 물이 하늘에 출렁이는데 수나라 백만대군이 물고기가 되었음이여. 이제는 어부나 나무꾼의 이야기로만 남아 나그네의 작은 웃음거리도 못되는구나." 이 시를 들은 명나라 사신 축맹은 얼굴을 붉히고 붓을 던져 대답할 시를 짓지 못했다고 한다. 


조준은 시로써 우리 조상의 용맹함을 자랑하고 명나라 조상들의 어리석음을 조롱했다. 또한 명나라가 당시 큰 나라라고 해서 조선을 얕잡아보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수양제의 고구려 공격은 예전에 없던 대규모 병력이 동원된 것이다. 그럼에도 능히 이를 막아내어 고구려를 보존하고 적군을 물리친 것은 을지문덕 한 사람의 힘이었다.” 을지문덕은 단지 싸움만 잘하는 군인은 아니었다. 


을지문덕이 쓴 「우중문에게 보내는 시」는 그 작품의 완성도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래서 을지문덕은 가장 이상적이라고 불리는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여러 글에서 칭송을 받고 있다. 중국인들도 수나라가 고구려에게 패배한 것은 뛰어난 을지문덕 때문이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도 이렇게 말했다. 


일반 백성들만이 을지문덕을 숭배했던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 세조의 신하였던 양성지는 1458년 왕에게 국가에서 제사지내며 모셔야 할 역사적인 인물로 12명의 왕과 24명의 신하들을 추천하였는데, 그 가운데 고구려 시조인 추모왕과 함께 살수대첩의 주인공인 을지문덕과 영양왕이 함께 추천되었다. 


숙종 임금은 1680년 관리를 보내 을지문덕을 모신 사당에 간판을 다시 만들고, 제사를 지내 주기도 했다. 숙종 임금은 특별히 을지문덕의 제사에 많은 신경을 써 주기도 했다.또 전설적인 이야기가  한가지 더있다. 을지문덕의 혼자힘으로 이와 같은 승리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전쟁에 참여한 고구려 군인들과 백성들의 일치단결된 힘이 있었다. 평안도 안주땅의 ‘칠불사 전설’도 그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살수대첩은 세계전쟁사에서 보기 드문 대승리여서인지 어떻게 이겼는지에 대하여 많은 의문이 있었다. 그래서 일반 병사들의 활약도 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 것이다. 7명의 고구려 병사들이 모두 스님으로 가장했다. 아마도 수나라에는 스님이 많고, 스님은 전쟁과 관련 없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으므로 수나라 사람들을 속이기에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살수의 깊은 물 속을 얕은 개울물처럼 속이려고 바지를 걷어올리고 강을 건너는 시늉을 하였다. 이들이 강을 건너는 모습을 본 수나라 군사들은 서로들 자기가 먼저 빨리 강을 건너려고 했다. 추격해 오는 고구려군의 화살과 창칼로부터 도망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살수를 반쯤 건널 무렵 갑자기 위에서 엄청난 강물이 쏟아져 내려와 많은 병사들이 물에 빠져 죽었고, 수나라 군대는 혼란에 빠졌다. 이 기회에 고구려 군대가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이다. 


20세기 초 역사가 단재 신채호는 영양왕이 을지문덕과 함께 병사들을 몰아 수나라를 공격하여 중원땅으로 쳐들어갔으면 천하를 제패할 기회를 얻었을 것인데 못내 아쉽다고 했다. 을지문덕과 고구려." 전쟁은 끝났다. 전쟁이 끝난 후 을지문덕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기록은 전혀 없다. 


심지어는 그가 누구의 자손인지도 모른다. 태어난 시기도 알 수 없어서 몇 살의 나이에 수나라와 싸웠고, 언제 죽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가 612년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수나라에 알려질 정도로 뛰어난 무장이었다는 것과 전쟁 후 백성들의 사랑을 받으며 높은 지위와 명예를 얻고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라는 추정만이 가능할 뿐이다. 


을지문덕의 공로는 고구려와 수나라의 운명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고구려는 강대한 수나라를 물리쳤다는 자부심으로 30여 년 후에 쳐들어온 당나라 태종의 군대도 여지없이 물리쳤다. 고구려가 수나라를 물리쳤다는 사실은 국제적으로 고구려의 위상을 한껏 높였다.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수양제의 말로’ 이야기에는 이러한 아쉬움이 담겨져 있다. 내용은 이렇다. 


고구려와 수나라가 한참 전쟁을 마무리하던 614년 10월 영양왕이 사신을 통해 국서를 수나라 양제에게 보냈다. 이때 사신을 따라갔던 고구려의 용감한 무사가 있어 수양제가 탄 배 안에 이르렀다. 그는 수양제가 고구려에서 보낸 국서를 읽고 있는 기회를 틈타 품속에 넣어 가지고 갔던 작은 쇠뇌로 그의 가슴을 겨누어 쏘아 맞추었다는 것이다. 


깜짝 놀란 수양제는 군사를 돌이켜 퇴각하면서 한탄했다. “내가 큰 나라의 황제로서 작은 나라를 친히 정벌하다가 이기지 못하였으니 만대의 웃음거리가 되었구나.” 이 설화는 당시 고구려 사람들의 수나라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반영하는 것으로 사실일 가능성도 있다. 당시 고구려 백성들의 수나라에 대한 적개심은 대단했다.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적군을 물리치는 데 힘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전쟁 후 을지문덕이 수나라를 공격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왜 그랬을까. 혹시 전해지는 기록이 없을 뿐 을지문덕이 만리장성을 넘어 수나라를 공격하지는 않았을까. 하지만 다른 자료가 없는 한 아직까지는 추측일 뿐이다. 칠불사 전설은 고구려가 승리하도록 부처님이 스님을 보내 도와주웠고, 고구려에서 부처님께 고마움을 표시하고자 일곱 부처님을 기리기 위해 절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만일 을지문덕이 없었더라면, 그리하여 고구려가 수나라에게 멸망당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버지와 형제를 죽인 수양제가 고구려 백성들을 어떻게 괴롭혔을지는 상상이 갈 것이다. 대운하, 만리장성, 궁궐공사 등에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하고 노예처럼 일만 시켰을 것이다. 또한 백제나 신라도 수나라의 위협에 편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을지문덕이 언제 태어났고, 어떤 성장 과정을 보냈는지가 무척 궁금해요. 하지만 현재로써는 을지문덕이 살수 대첩을 성공리에 이끈 고구려 장군이라는 것 외에는 알 수 없어요. 왜냐하면, 그와 관련된 역사 기록이 살수대첩을 승리로 이끈 장군이라는 것 외에는 전혀 없거든요. 그가 수나라 장수 우중문을 비꼬면서 쓴 시로 보아 문장과 무술을 겸비한 능력있는 장군이었음을 짐작할 뿐이에요. 한편 일부 학자는 을지문덕을 선비족 출신의 고구려 장군으로 추정하고 있어요. 왜 그러냐고요? 


중국의 역사책인 『자치통감』에 을지문덕이 위지문덕()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위지’를 선비족의 성인 ‘위지()’로 판단하여 을지문덕을 선비족 출신의 고구려 망명객으로 생각하는 것이죠. 이 주장은 상당히 신빙성이 있어요. 


고구려는 다민족 국가였고, 고구려의 영토였던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는 우리 민족 외에 말갈, 거란족이 함께 살고 있었어요. 또 고구려는 내륙 아시아의 유목 민족들과 꾸준히 교류하였으며, 심지어는 중앙 아시아 지방의 사람들과도 교류를 했어요. 따라서 을지문덕이 순수 우리 민족이 아닌 선비족 출신일 가능성은 충분히 있어요. 


출신 성분도 모르는 을지문덕을 우리 민족의 위대한 영웅이라고 떠받들며 게거품을 무는 사람들을 나는 이해할 수 없어. 단재 신채호 선생이야 자신이 살았던 시대가 일제 침탈기여서 우리의 민족의식을 드높이기 위해 조금 엎시켰다고볼수도 있읍니다. 


일부학자들이 그를 선비족이라고 주장하는데, 만약에 그가 정말 선비족이라면, 그때도 왕 침 튀겨 가며 민족의 영웅이라고 말할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너무 민족, 민족 하면 지구촌 시대에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왕따만 당한다고. 민족의식도 적당한 선에서 강조해야 진정한 민족의식이지, 너무 지나치면 국수주의가 되어 일본 극우파와 똑같은 놈이 되고 만다고. 을지문덕은 우리 조상들의 행복한 삶을 지켜준 위대한 장군이었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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