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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역사 (국내)

김유신.(金庾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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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595~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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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5년 아버지 김서현과 어머니 만명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멸망한 가야 왕손으로 증조 할아버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이며, 할아버지는 관산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무력이다. 어머니인 만명부인은 진흥왕의 아우인 숙흘종의 딸이다. 김서현이 길에서 만명을 보고 사랑하여 중매를 거치지 않고 부부관계를 맺었는데, 이를 안 숙흘종이 딸을 가두어놓고 사람을 시켜 지키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것을 보면, 신라 왕실의 일원이었던 만명과 가야계였던 김서현과의 혼인은 당시 사회적으로 용납받기 어려운 결합이었다. 갑자기 벼락이 집 문을 쳐서 지키던 사람이 혼비백산한 틈에 만명은 빠져나가, 만노군 태수로 부임하던 김서현을 따라갔다고 한다. 아마, 만명의 가족들이 결혼을 묵인하고 김서현에게 만노군 태수라는 벼슬을 내렸을 것이다. 


만노군은 지금의 충청도 진천 지역으로, 이곳에서 김유신은 태어나고 자랐다. 열다섯 살이 되던 해 화랑이 된 김유신은 2년 뒤, 외적을 평정할 뜻을 품고 홀로 중악의 석굴로 들어가 수련했다. 이때 난승이라는 노인을 만나 삼국통일에 쓸 비법을 전수받았다. 또 다음 해에는 홀로 보검을 들고 인박산에 들어가 기도하니, 사흘째 되는 날 허성(북쪽의 넷째 별자리)과 각성(동쪽의 첫째 별자리) 두 별이 환하게 빛나면서 칼에 내려앉았다. 김유신이 소년 시절부터 삼국통일의 뜻을 품었고, 하늘의 도움으로 그 힘을 길러나갔다는 전설적인 일화들이다. 신라 42대 임금으로 9세기 전반에 나라를 다스렸던 흥덕왕은 살아생전에 왕을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김유신을 흥무대왕으로 추존하여 그를 높여 줌과 동시에 그의 후손들을 왕족으로 우대해 주었어요. 


김유신이 처음으로 전공을 세워 역사에 이름을 올린 것은 629년(진평왕 51년)의 일이다. 

신라는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공격은 실패하는 듯 보였다. 부상자가 늘어가는 가운데 신라군은 고구려의 기세에 밀리고 있었다. 이때 오늘날의 연대장이라 할 수 있는 부장군 자격으로 출전한 김유신은 그의 아버지 김서현 장군에게 허락을 구한 뒤 혼자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장군의싸운"

고구려군에서도 장수 한 명이 나와 김유신 앞을 막았다. 그러나 적장은 김유신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별이 김유신의 칼에 내려앉았다는 전설이 전하듯 김유신은 칼을 잘 쓰는 장수였다. 김유신의 칼이 적장의 목을 베는 순간 신라군의 함성은 하늘을 흔들었다. 그 기세로 몰아붙인 신라군은 고구려군 5,000여 명의 목을 베고 1,000여 명을 사로잡았다. 이 전투의 승리로 그의 명성이 온 나라에 퍼졌다. 그의 나이 서른셋에 전장에서 큰 공을 세우며 역사의 전면에 나선 것이다. 


열다섯에 화랑이되고 나서, 삼국통일의 비법을 전수받았다는 설화를 생각한다면, 빠른 등장이라고는 할 수 없다. 사실 철기문화가 발달했던 가야 왕족 출신의 3대, 김무력과 김서현, 김유신 모두 군사적인 능력이 우수했으나 가문은 점차 쇠락하고 있었다. 김무력은 신라 제1위 관등인 각간에 올랐지만, 김서현은 신라 제3위 관등인 소판에 그쳤고, 김유신도 30대 중반에 부장군에 불과했다. 가야계라는 신분적인 제한이 여전히 김유신의 발목을 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시대 문신이자 역사가였던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중요 인물들의 일대기를 기록해 놓은 열전 편의 첫 장에 김유신의 행적을 매우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어요. 


전설의적 이야기

김유신의 동생 문희가 언니 보희의 태몽을 산다. 김유신은 이 문제를 적극적인 방법으로 해결했다. 여동생을 김춘추에게 시집 보내 유력한 신라 왕실 가문과 인척관계를 맺은 것이다. 


김춘추는 “정사가 어지럽고 음란하다.”는 이유로 폐위당한 진지왕의 손자로, 왕권 계승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성골남성이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아, 성골 여성이 왕위를 잇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진골 신분인 김춘추와 힘을 합쳐 훗날을 도모할 수 있다고 김유신은 판단했다. 김유신은 김춘추를 집으로 불러 공차기를 하다가 일부터 그의 옷고름을 밟아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여동생을 불러  김춘추의 옷고름을 문희가 꿰매 주는 일이 생긴다.이를 계기로 동생 문희가 김춘추의 아이를 가졌으나 김춘추는 결혼을 주저했다. 역시 가야계라는 게 문제였을 것이다. 


김유신은 왕이 남산에 행차한 시간에 맞춰 여동생을 태워 죽인다며 연기를 피워 올렸다. 그렇게 왕의 주의를 끌어 결국 김춘추와 여동생의 결혼을 성사시켰다. 이후 김춘추의 뛰어난 정치적 수완과 김유신이 가진군사력의 결합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견인차가 된다.  이후 문희가 임신하자 김유신은 일부러 불을 피워 이 사실을 알리고, 이에 선덕 여왕은 김춘추와 문희를 결혼시킨다. 훗날 김유신은 왕이 된 처남 김춘추와 많은 공을 세우는데, 특히 소정방과의 대결에서 승리하며 삼국 통일을 이룬다. 많은 무속인들이 현재도 김유신을 신으로 모시고 있으며, 전국 각지에는 김유신과 관련된 전설들이 수없이 많이 전래되고 있어요.


김유신이 국선으로 있을 때, 그의 무리에 백석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고구려에서 보낸 첩자로 김유신과 함께 고구려 염탐에 참여하여 그를 죽이려 한다. 고구려에서는 김유신을 고구려 왕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추남이 환생한 것으로 보고 그를 죽이려 한 것이다. 김유신은 여인의 모습으로 변한 세 호국신의 도움으로 이 사실을 알게 되고, 백석을 처형한다. 


장군의어린시절"

김유신은 어린 시절 엄격한 어머니 교육 아래 자랐다. 어느 날 김유신이 우연히 기생집에서 자게 되고 이를 안 어머니가 눈물로 호소하자 다시는 기생집에 출입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러다가 술이 많이 취한 날, 말이 기생집으로 유신을 데리고 간다. 술에서 깬 김유신은 말의 목을 베고 돌아온다. 


595(진평17)∼673(문무왕 13). 신라의 삼국통일에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장군. 증조부는 532년(법흥왕 19) 신라에 투항한 금관가야의 구해왕이며, 할아버지는 무력(), 아버지는 서현()이다. 짝퉁 진골인 김유신 가문이 유신 대에 와서 크게 흥성한 이유는 김유신이 각종 전투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았을 정도로 지휘를 잘하여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며 신라의 군사권을 쥐고 흔들었기 때문이에요. 김유신 집안은 대대로 무장 집안이었어요. 유신의 할아버지인 김무력은 백제 성왕이 신라의 한강 하류 지역 점령에 격분하면서 관산성으로 쳐들어왔을 때, 성왕을 전사시키며 신라 사회에 이름을 떨쳤어요. 그리고 아버지인 서현 또한 무장으로 이름을 날렸어요. 이처럼 예나 지금이나 높은 평가를 받는 김유신은 진평왕 17년인 595년에 김서현을 아버지로, 만명 부인을 어머니로 해서 세상에 태어났어요. 


김유신의 집안은 진골 귀족 가문이었으나, 신라 땅에서 대대로 살면서 권세를 부려 온 정통 진골 귀족이 아니었고, 6세기 전반에 새로 진골 귀족 가문에 편입된 짝퉁 귀족 집안이었어요. 법흥왕에 의해서 멸망한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가 김유신의 증조할아버지였으며, 가야가 신라에 항복할 때 법흥왕이 구해 일족을 진골로 대접해 주어 신라의 지배층에 편입되었지요. 


어머니는 만명부인)이다. 어머니의 증조부는 지증왕, 할아버지는 진흥왕의 아버지인 입종갈문왕(), 아버지는 숙흘종()이다. 숙흘종은 만명을 감금하면서까지 서현과의 혼인을 반대한 바 있다. 이는 신라에 투항한 가야 왕족이 당시에 비록 진골 귀족()으로 편입되어 있기는 했지만, 왕족 출신과 통혼할 만한 대귀족은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에서 금관가야 왕족의 후예들은 신라 왕족의 김씨()와 구별하여 신김씨()라 칭하기도 하였다. 손자로는 윤중()·윤문()이 있었고, 현손으로는 그의 행록() 10권을 지었다는 장청()의 이름이 전한다. 아우로는 삼국통일 전쟁기에 장군으로 활약한 흠순()이 있다. 윤중의 서손() 암()은 둔갑술과 병법에 능하였다 한다. 


신라에 귀화한 가야 왕족인 그의 일족 중에는 전공()을 세워 두각을 나타낸 인물들을 여럿 찾아볼 수 있다. 신라의 토착 귀족들 틈에서 그들이 활로를 열기 위해서는 스스로 공을 세워 인정받아야 했는데, 그것은 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짝퉁 진골인 김유신 가문이 유신 대에 와서 크게 흥성한 이유는 김유신이 각종 전투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았을 정도로 지휘를 잘하여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며 신라의 군사권을 쥐고 흔들었기 때문이에요. 김유신 집안은 대대로 무장 집안이었어요. 


유신의 할아버지인 김무력은 백제 성왕이 신라의 한강 하류 지역 점령에 격분하면서 관산성으로 쳐들어왔을 때, 성왕을 전사시키며 신라 사회에 이름을 떨쳤어요. 그리고 아버지인 서현 또한 무장으로 이름을 날렸어요. 


≪삼국사기≫는 서현과 만명이 야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숙흘종이 만명을 감금한 곳에 갑자기 벼락이 쳐서 만명이 탈출하여 서현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설화도 전한다. 이러한 설화는 둘의 혼인이 파격적이고 극히 어려운 상황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김유신의 출신이 같은 진골 귀족이라 해도 당시 신라를 주도한 대귀족들과는 차이가 있었음도 암시해 준다. 지금의 진천 길상산()은 고려 때 태령산()으로 불렸고, 김유신의 태를 안치했다 하여 신라 이래로 김유신사()를 세워, 봄·가을로 국가에서 향()을 내려 제사하게 했음이 전해지고 있다. 감금에서 탈출한 만명은 만노군(: 지금의 충청북도 진천)의 태수로 부임하는 서현을 따라갔고, 그 곳에서 595년 김유신이 출생한 듯하다. 그의 가계가 왕실과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혼인하기 어려운 처지였음을 보여 준다. 그런데 김춘추와 혼인한 누이는 바로 문무왕과 김인문() 등을 낳은 문명왕후()로서, 이 혼인의 결과는 그 뒤 그의 일족의 세력이 성장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아내 지소부인()은 태종무열왕의 셋째 딸이었는데, 그와 태종의 이처럼 서로 얽힌 혼인 관계는 당시 신라 사회의 관습에 어긋나는 일은 아니었다. 지소부인과의 사이에는 삼광()·원술()·원정()·장이()·원망() 등 다섯 아들과 네 딸을 두었다. 그리고 서자로서 군승()이 있었다 한다. 김유신은 15세에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라 불리던 자신의 낭도()를 이끌었다. 그 무렵 화랑 수련 과정의 활동은 그에게 수련과 배움의 과정이 되기도 했지만, 이 때 맺은 낭도들과의 유대 관계도 장성한 뒤의 활동에 중요한 토대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활동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전투에서의 공로이다. 


그가 세운 큰 전공으로 전하는 것 중 최초의 것은 629년 34세 때의 일이다.당시 신라군은 고구려 낭비성()을 공격했는데, 1차 접전에서 패배하여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이 때 중당당주()로 출전한 그는 단신으로 적진에 돌입하여 유린함으로써 신라군의 사기를 북돋워 크게 승리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 무렵의 주()는 지방 행정 단위로서보다는 군사 작전 구역으로서의 성격이 강하였고, 주에 파견된 군주도 지방 주둔군 사령관으로서의 성격이 컸다. 642년 김춘추가 고구려를 향해 떠날 때 김유신은 압량주( :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의 군주가 되었는데, 이 때부터 신라에서 중요한 군사 직책을 맡게 되었다. 이후 그의 활약은 뚜렷해진다. 


김춘추는 642년(선덕여왕 11) 백제의 침공을 막기 위하여 과거 적대관계에 있기도 했던 고구려에 청병하러 갔는데, 이에 앞서 교섭 과정에서 일어날 위험에 대해 그와 상의하고 서로 목숨을 건 맹세를 했다. 그들은 당시 신라 조정에서 아직 최고 서열에는 들지 못했지만, 보수적인 신라 귀족 사회에서 큰 변화를 일으키게 될 그들의 정치적 결속이 이 때 이미 뚜렷하게 나타난다. 


644년에는 소판()이 되었고, 그 해 9월 상장군으로 백제 원정군의 최고 지휘관이 되어 전략상 요충인 가혜성()·성열성()·동화성() 등 7개 성을 점령하였다. 이듬 해 정월에는 원정에서 돌아오자마자 백제가 매리포성()에 침입하였다는 급보를 받고, 가족도 만나지 않은 채 다시 출전하여 승리하였다. 그 해 3월에도 귀환하기 전에 또 백제의 침입으로 출동하였는데, 이 때의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또한 647년에는 귀족 내부의 반란 진압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특히, 그 반란의 결과는 그 뒤 신라 정계의 변화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반란 세력의 우두머리는 당시 귀족회의의 장인 상대등 비담()이었다. 그들은 “여왕은 정치를 잘 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명활성()을 거점으로 월성()의 왕족 세력을 공격하였다. 반란군과 대치한 지 8일 만에 선덕여왕이 죽는가 하면, 흉조라고 믿어지던 유성()이 월성 쪽에 추락하여 왕실측의 사기는 위축된 반면, 반란군의 사기는 충천해 있었다. 이 때 그는 새로 등극한 진덕여왕과 귀족들을 이치로써 설득하는 한편, 종교적인 제전과 계략으로 왕실 쪽 군중의 사기를 북돋워 반란군과의 결전에서 승리하였다. 


반란이 진압된 뒤 상대등이 된 알천()은 신라의 전통적 귀족이었다. 또한 반란의 진압에서 전통적인 귀족들의 힘이 컸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김유신은 가야계 출신이면서도 신라 중앙 정부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큰 구실을 했고, 또 그로 인하여 그의 영향력도 커질 수 있었다. 당시 전열을 정비하여 즉시 떠나게 되자, 문밖에 나와 기다리는 가족들을 돌아보지도 않고 50보쯤 지나쳐 말을 멈춘 뒤, 집에서 물을 가져오게 하여 마셨다. 그리고는 “우리집 물이 아직도 예전 같은 맛이 있다.”고 말하고 출발하였다. 이에 군사들이 모두 이르기를, “대장군도 이러하거늘 우리들이 어찌 가족과 떨어짐을 한스럽게 여기겠는가.” 하고는 분발하여 나아가니, 백제군이 그 기세만 보고도 퇴각하였다고 한다. 654년에는 신라군대 통수부의 중심적 위치에 서서 새 왕의 추대에 중요한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진덕여왕이 죽자 당시 귀족회의에서는 상대등이던 알천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다음 왕에 즉위한 것은 김춘추, 곧 태종무열왕이다. 선덕여왕 말년에 발생한 비담의 난을 진압하는 데 주역으로 활약하며 출세 가도를 달리기 시작한 유신은 진덕여왕 시절에 매제인 춘추와 함께 여왕을 보필하면서 군사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신라 최고의 장군으로 활약했어요. 653년 3월, 진덕여왕이 재위 8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유신은 춘추를 추대하여 왕위에 올렸어요. 그러고는 군사뿐만 아니라 정치까지 담당하여 동분서주하다가 660년 1월에는 66세의 나이로 신라 최고 관등인 상대등에 올랐어요.  


≪삼국사기≫에는 비담의 반란 후 진덕여왕대에 치러진 세 차례의 대규모 전투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그 전투들에서 최고지휘관을 맡았다. 진덕여왕 1년(647)과 2년의 전투에서는 압량주군주로서 그 일대의 전투를 지휘했으나, 

진덕여왕 3년의 전투 당시에는 백제의 대대적인 침입을 막기 위하여 중앙군으로 편성된 군단을 지휘하였다. 당시 백제의 지휘관급 100인과 군졸 8,900여 인을 죽이거나 사로잡고 전투용 말 1만 필을 노획했다는 전과를 고려할 때, 신라 쪽에서도 주력부대를 투입한 대규모 방어군단을 편성했음을 알 수 있다. 


지휘관 편성을 놓고 보아도 대장군에 김유신, 그 아래 장군들에 진춘()·죽지()·천존() 등이 임명되었는데, 이들은 당대의 명장들이자 정치적으로도 큰 비중을 가지는 인물들이었다.  태종무열왕과는 젊어서부터 친분이 있었고 누이동생이 태종무열왕의 비였으니, 그들의 개인적 유대는 대단히 깊었다. 또한 642년의 목숨을 건 맹세에서 알 수 있듯 그들은 정치적으로도 밀착되어 있었다. 실제로 그가 태종무열왕의 즉위에 간여하였음은 열전에 나타나 있다.


김유신전에는 그가 알천과 상의하여 태종무열왕을 즉위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귀족들에 의해 왕위에 추대된 알천이 그 문제를 전통적 귀족이 아닌 신흥 귀족 출신과 상의했다는 것을 이해하려면 그 동기를 알아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알천이 전통적 귀족이 아닌 그와 상의하여 왕위를 양보하게 된 동기를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왕위가 태종무열왕에게 돌아가게 된 데에도 태종무열왕에 대한 그의 긴밀한 지지가 크게 작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유신에게 남은 유일한 꿈은 삼국 통일뿐이었어요. 드디어 기회가 왔어요. 당나라 군사들이 백제를 치기 위해 황해 바다를 건너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어요.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은 7월 10일에 백제의 수도 사비성에서 만나기로 하고, 당나라는 금강 하구 기벌포를 통해서 치고 올라왔으며, 신라는 5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상주를 거쳐 탄현을 넘어 황산벌로 쳐들어 왔어요. 하지만 당군과 사비성 앞에서 만나기로 한 7월 10일의 약속을 신라군은 지킬 수 없었어요 계백이 이끄는 5천의 백제 결사대가 신라의 사비 진출을 완강하게 막고 있었거든요. 신라군은 관창의 살신성인에 힘입어 백제군을 겨우 격파하고 사비성으로 진격했지만, 약속한 날에서 하루 정도 늦게 사비성에 도착했어요. 


당의 장수 소정방은 자신의 권위를 세우고 신라군의 기세를 꺽기 위해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신라군의 선봉장 김문영 장군을 죽이려 했어요. 이때 김유신은 최고 장군임을 상징하는 도끼를 손에 쥐고 부대 앞에 서서 소정방에게 엄포를 놓았어요. “문영 장군에게 죄를 묻는다면, 먼저 당군과 결전한 후에 백제를 치겠다.”

 

『삼국사기』 열전 편 김유신 조에 “성난 머리털이 꼿꼿이 일어서서 세워진 것 같았고, 허리의 보검은 저절로 칼집에서 튀어나왔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생트집을 잡아 부하 장수를 죽이려 하는 소정방에 대한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어요. 


김유신의 기세에 놀란 소정방은 김문영에 대한 문책을 없었던 일로 하고, 나·당 연합군은 사비성을 함께 공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어요. 이때가 660년 7월 18일이었어요. 661년에 태종 무열왕이 죽고 아들인 김법민이 왕위에 올랐어요. 이 이가 곧 문무왕으로, 그는 삼국 통일을 완수하기 위하여 당나라와 함께 고구려 공격을 서둘렀어요. 

신라군은 김유신의 지휘 아래 거의 매년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연개소문이 지휘하고 있던 고구려는 신라의 공격에 쉽게 무너지지 않았어요. 그런데 난공불락 같았던 고구려 함락은 고구려 지배층의 내분 때문에 의외로 쉽게 찾아왔어요. 


태종무열왕을 뒤이어 문무왕이 즉위한 뒤에도 그의 정치적 비중은 약화되지 않았다. 661년(문무왕 1) 6월에는 고구려를 원정하였다. 이를 통해 알천이 전통적 귀족이 아닌 그와 상의하여 왕위를 양보하게 된 동기를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왕위가 태종무열왕에게 돌아가게 된 데에도 태종무열왕에 대한 그의 긴밀한 지지가 크게 작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660년 정월에는 귀족회의의 수뇌인 상대등이 되어, 삼국통일 전쟁 과정에서 신라를 이끄는 중추적 구실을 하게 되었다. 그 해 그는 신라군을 이끌고 당나라 군대와 함께 백제를 멸하였다. 666년에 연개소문이 죽고 대막리지 자리를 놓고 연개소문 아들들 사이에 갈등이 생겼어요. 강력했던 고구려는 내분으로 인해 일시에 힘이 사라지며, 나·당 연합군은 668년 9월에 손쉽게 평양성을 함락하고 고구려를 역사 속으로 보내 버렸어요. 663년에는 백제 부흥을 꾀하는 백제 유민과 그들을 지원하는 왜()의 연합 세력을 격파하였고, 664년에도 백제 유민이 사비성에서 봉기하자 은밀한 계책을 일러 주어 평정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명의 당군은 산둥반도()의 내주()를 출발해 서해를 건너 백제로 진군했고, 김유신()과 흠춘()·품일() 등이 거느린 5만 명의 신라군은 육로로 백제를 공격하였다. 급보를 접한 의자왕은 군신을 모아 대책을 강구하였다. 이 때 좌평 의직()은 당군과 먼저 결전할 것을 주장했고, 달솔() 상영()은 신라군을 먼저 쳐서 예봉을 꺾은 뒤에 당군을 막자고 해 의견이 갈렸다. 그리고 귀양 중이던 흥수()가 왕의 요청에 응해, 평야에서 접전하면 불리하므로 백강(: 지금의 금강 하구)을 지켜 당군이 상륙하지 못하게 하고 탄현()을 막아 신라군이 넘지 못하게 해 양 군이 피곤해지기를 기다렸다가 공격하자고 건의하였다. 


반면에 대신들은 당군이 백강에 들어오고 신라군이 탄현을 오른 뒤에 공격하는 것이 이롭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백제 조정이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을 때 신라군은 그 해 5월 26일 왕경을 출발해 6월 18일 남천정( : 지금의 경기도 이천)에 이른 뒤, 7월 10일 백제의 도성인 사비에서 당군과 합세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김유신이 이끄는 5만 명의 신라군은 7월 9일 이미 탄현을 넘어 황산벌로 진군해 오고 있었다. 


탄현을 진수하지 못한 의자왕은 장군 계백()에게 5,000명의 결사대를 조직하게 해 신라군을 저지하도록 하였다. 출병에 즈음해 계백은 “처자가 적국의 노비가 되어 살아서 욕보기보다는 죽는 것이 낫다.”라고 하며 처자를 죽이고 비장한 각오로 출병하였다. 황산벌에 먼저 이른 계백은 험준한 곳을 가려 3개의 영채를 세우고 신라군을 기다렸다. 


김유신도 신라군을 3도()로 나누어 이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죽기로 싸우는 백제의 5,000결사대는 신라군과 네 번 싸워 네 번 모두 승리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군은 기력이 다하고 사기가 떨어졌다. 이 때 신라의 장군 흠춘이 군사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 아들 반굴()로 하여금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하게 하고, 장군 품일도 16세의 어린 아들 관창()을 백제군 속에 뛰어들어가 싸워 죽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청년 화랑들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 용감한 행동에 감격한 신라군은 사기가 크게 올라 총공격을 가하였다.


백제의 결사대는 여기에 맞서 용감히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대패하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계백은 전사하고, 좌평 충상()·상영 등 20여 명은 신라의 포로가 되었다. 황산벌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는, 소정방이 당군과 합세하기로 한 신라군이 기일을 어겨 도착했다고 해 신라독군()인 김문영()을 참하려 했을 때, 김유신이 “대장군이 황산벌의 싸움을 보지 못하고 다만 기일을 어긴 것으로 죄를 주려 하니, 기필코 먼저 당군과 결전한 뒤에 백제를 격파하겠다.”라고 한 말에서도 알 수 있다.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668년 신라군의 총사령관 격인 대총관()이 되었다. 그러나 늙고 병이 들어 원정에 참가하지는 못하고 왕경()에 남아 원정을 떠난 왕을 대신하여 신라 국내의 통치를 담당하였다. 문무왕과 생구관계()였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 원정군의 수뇌인 김인문과 김흠순도 생질과 아우였던만큼 국가의 원로로서 고문과 지도적 구실을 하여 신라 진영의 단결과 전략 수립에 기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 지배층 원로로서의 자문역은 계속한 것으로 보이며, 고구려 멸망 후 본격화된 당나라와의 투쟁에서도 지도적인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672년 석문()벌판의 전투에서 신라군이 당나라에 참패했을 때 문무왕이 그에게 자문을 구한 사실이 기록에 나타난다. 고구려를 평정한 직후에는 다시 한 등급을 높인 ‘태대서발한()’이 제수되고, 여러 가지 특전을 포상받았다. 그 뒤 자신이 직접 일선에서 정치나 군사적 일을 수행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가 정복된 해에 당나라는 그와 김인문에게 백제지역을 분봉()해 주겠다고 유혹함으로써 신라 지배층의 분열을 획책하며 신라를 침공할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이 때 역시 이러한 유혹을 거절하여 신라 지배층의 결속을 굳힘으로써 당나라의 계략을 무산시켰다. 고구려가 엄존하는 상황에서 당나라와의 정면 대결을 피해 신라군을 백제유민군으로 위장하여 당나라군의 행동에 군사적인 대처를 하였다. 당시 소정방은 신라는 상하가 굳게 결속되어 작지만 쉽게 정복할 수 없다고 본국에 보고하였다 한다. 그는 일찍부터 당나라의 대국주의 야욕을 간파하고 그에 대비하고 있었다. 660년에는 그가 백제군의 결사대를 격파하느라 당나라군과의 합류 지점에 늦게 도착하자, 당나라의 소정방()은 이를 빌미로 신라 장군의 참수()를 명하여 신라군의 통수권을 장악하려 하였다. 이 때 그는 먼저 당나라군과 결전하겠노라며 단호히 맞서 소정방의 기도를 무산시켰다.그 뒤에도 당나라는 665년에 그를 봉상정경 평양군 개국공 식읍 2,000호()로 봉하는 등 유혹의 손길을 뻗쳐 왔다. 그러나 그는 국제관계 속에서 당나라가 신라에 대해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를 간파하고 이에 대처함으로써 당나라의 침략 야욕을 분쇄할 수 있었다. 


김유신 집안이 아무리 무공으로 이름을 날렸다 해도, 가야에서 건너 온 귀화 집안이었기에 신라 진골 귀족 사회에서 김유신 집안은 영원한 아웃사이더, 비주류 집안에 불과했어요.나당 군사동맹을 성사시킨 것은 김춘추였고, 김유신은 대장군으로 군사를 이끌었다. 황산벌에서 백제의 계백을 무너뜨린 김유신은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을 공격하기 위해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와 합류했다. 황산벌 전투가 워낙 치열해 예정보다 하루 이틀 도착이 늦었다. 소정방은 이를 핑계로 신라의 장군 김문영을 목 베려 했다. 


신라군과의 첫 만남에서 자신의 위엄을 세우려는 술수였다. 그러자 김유신이 도끼를 잡고 “먼저 당나라 군사들과 싸우고 나서백제를 쳐부수겠다.”며 성난 머리털을 꼿꼿이 세웠다. 소정방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나당 연합군의 공격에 사비성은 일주일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김유신은 백제를 멸망시키는 데 이바지한 공을 인정받아 대각간이 되었다. 신라의 최고 관등인 각간에 ‘대’자를 더한 자리였다. 661년 태종무열왕이 죽고 그 아들이 왕위에 올라 문무왕이 되었다. 문무왕은 김유신에게 “과인에게 경이 있음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음과 같소.”라며 선왕과 다름없는 믿음을 보였고, 김유신 또한 죽을 때까지 문무왕에게 충성을 다했다. 


백제부흥군을 평정한 신라는 668년 당나라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했다. 74세의 나이로 병을 앓고 있었던 김유신을 배려한 왕은 전장에 참가하는 대신 국정을 살피게 했다. 그 해 9월 고구려가 멸망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김유신은 고속 출세를 할 수 있었을까요? 여기에는 선덕여왕의 동생인 천명 공주를 어머니로 둔 김춘추와의 끈적끈적한 유대가 자리 잡고 있어요. 


김춘추 또한 신라 사회에서 비주류였어요. 어머니가 왕의 동생이었지만, 할아버지인 진지왕(576~579)이 진골 귀족들의 힘에 밀려 강제로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고, 진지왕을 몰아내는 데 앞장선 귀족들이 선덕여왕 시절에도 정치를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정계에서 춘추가 큰 힘을 발휘하기는 불가능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술 실력과 지략이 출중한 김유신과 외교력과 정치력이 탁월한 김춘추가 함께 뭉치니,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힘이 생겨 둘은 서로를 끌어 주고 밀어 주며 진덕여왕(647~654) 시절에는 ‘정치하면 김춘추, 군사 하면 김유신’ 할 정도로 막강한 파워를 발휘하였어요. 이들이 큰 힘을 갖게 된 결정적 계기는 선덕여왕 말년에 일어난 비담의 난이었어요. 상대등으로 있던 비담이 여자가 왕이라는 이유로 난을 일으켰을 때, 둘은 선덕여왕 편에서 비담의 난을 진압했으며, 이때 비담 편에 섰던 귀족들을 깡그리 죽이며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시켰어요. 


김유신과 김춘추는 어떻게 해서 꽁꽁 뭉치게 되었을까요? 김춘추보다 8살이 많았던 김유신은 춘추가 20대 후반이던 시절에 함께 어울려 다니며 산천도 구경하고 때에 따라 신라 귀족 사회에서 유행했던 공차기 놀이도 곧잘 하고는 했어요. 그런데 유신이 보기에 춘추가 매우 크게 될 인물 같았어요. 그는 춘추와 자신의 여동생을 맺어 주려 했어요. 어느 날이었어요. 그 날도 둘은 다른 청년들과 어울려 공차기를 했어요. 유신은 공을 차다가 의도적으로 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떼어 버렸고, 이것을 빌미 삼아 자신의 집으로 춘추를 초청했어요. “어이, 미안하네. 우리 집에 가서 옷고름도 다시 달고, 술이나 한잔 하세.” 김유신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춘추는 유신의 집으로 순순히 따라왔어요. 


유신에게는 여동생이 두 명 있었는데, 첫째가 보희, 둘째가 문희였어요. 유신은 술상을 앞에 놓고 흥겹게 술을 마시며 춘추가 어느 정도 취하자, 보희에게 춘추의 옷고름을 손보게 했어요. 하지만 보희는 처녀가 외간 남자 앞에 함부로 나설 수는 없다고 거부했어요. 유신은 하는 수 없이 둘째 동생인 문희에게 부탁했어요. 문희는 오빠의 말에 순순히 응하여 실과 바늘을 가지고 나와 춘추의 옷고름을 달아 주었어요. 춘추가 보기에 얌전히 앉아 바느질을 하는 문희가 너무나 사랑스러웠어요. 이 일을 계기로 춘추와 문희 사이에는 사랑이 싹터서 그날부터 춘추는 문희의 처소를 문지방이 닳도록 빈번하게 출입했어요. 그러더니, 아니나 다를까 문희의 배가 점차 불러 오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춘추는 문희와 결혼하는 것을 고민했어요. 자신의 장래를 생각했을 때에 멸망한 가야의 후예와 결혼한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어요. 이러한 이유 때문에 춘추는 선뜻 결혼 결정을 못하고 있었는데, 이때 김유신이 깜짝 쇼를 하나 벌였어요. 


경주 남산으로 선덕여왕이 행차한다는 소식을 들은 유신은 “처녀인 동생이 부모 몰래 애를 가져 불에 태워 죽인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 놓고 선덕여왕이 남산으로 가는 시간에 맞춰서 집 마당에 장작불을 피워 올렸어요. 선덕여왕이 길을 가다가 유신의 집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아 오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그 연유를 물었어요. 신하 하나가 자초지종 이야기를 해 주자, 선덕여왕은 춘추에게 속히 가서 문희를 구하라 명령하면서 문희와의 결혼을 주선해 주었어요. 비록 하고 싶은 결혼은 아니었지만, 이 결혼은 김춘추에게 매우 큰 이익을 남겼어요. 그 이면에는 스스로를 엄격히 단속하며, 신라 다중()의 결속과 사기를 북돋우려는 한결같은 노력이 있었다. 


연속되는 출정 중에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 앞을 돌아보지도 않고 지나친 일이나, 혹독한 추위 속의 행군에 군사들이 지치자 어깨를 드러낸 채 앞장섰다는 일화, 그리고 아들인 원술이 당나라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도망해 오자 왕에게 참수형에 처하라고 건의하고 끝까지 용서하지 않은 일 등은 이러한 노력의 단면들이다. 그가 죽자 왕은 성대한 의장을 갖추어 금산원( : 지금의 경주시 송화산 기슭으로 추측됨)에 장사지내게 하고, 비를 세워 공적을 기록하게 했다 한다. 뒤에 흥덕왕(≪삼국유사≫에는 경명왕 때라 함)은 그를 흥무대왕()으로 추봉하였다. 훗날 진덕여왕이 죽고 진골 출신 중에서 왕을 선택해야 했을 때에 군사권을 쥐고 있던 김유신이 춘추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춘추가 진골 출신 최초의 왕이 될 수 있었거든요. 따라서 김유신의 잔머리 굴리기로 시작된 결혼 작전은 유신에게도 좋고 춘추에게도 좋은 윈 - 윈 전략이었어요. 


≪삼국유사≫에는 중요한 나라 일을 결정하던 4영지회의()의 구성원으로서 알천·임종()·술종()·호림()·염장()·유신이 열거되어 있다. 이 중 수석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 알천인데, 4영지회의의 구성원들은 유신의 위엄에 복종하였다고 한다. 이는 귀족회의의 공식적인 수뇌는 상대등인 알천이었으나, 비공식적인 실세는 그가 장악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태종무열왕의 즉위 후 그의 정치적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신라본기에는 태종무열왕의 즉위 다음 해 그의 관등이 대각간()으로도 나타난다. 그 해 10월에는 태종무열왕의 셋째 딸 지소와 혼인하였다. 이는 태종과의 결속이 더욱 긴밀해졌음을 반영하는 동시에, 종전과는 달리 가야계 출신으로서의 제약을 벗어나 왕실과도 통혼하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


김유신의 나이 74세로 젊어서부터 매제인 김춘추와 함께 꿈꾸었던 삼국 통일의 대업을 꼬부랑 노인이 되어서야 겨우 완성한 거예요. 삼국 통일을 달성한 문무왕은 그 주역인 김유신에게 태대각간 벼슬을 내려 그의 노고를 치하했어요. 각간은 17등급으로 구성된 신라의 관리 등급 중에서 최상위 관등으로 이벌찬이라고도 했는데, 김유신은 660년에 백제를 멸망시킨 공로로 대각간에 임명되었어며. 김유신의 나이 74세로 젊어서부터 매제인 김춘추와 함께 꿈꾸었던 삼국 통일의 대업을 꼬부랑 노인이 되어서야 겨우 완성한 읍니다. 


삼국 통일을 달성한 문무왕은 그 주역인 김유신에게 태대각간 벼슬을 내려 그의 노고를 치하했어요. 각간은 17등급으로 구성된 신라의 관리 등급 중에서 최상위 관등으로 이벌찬이라고도 했는데, 김유신은 660년에 백제를 멸망시킨 공로로 대각간에 임명되었어요. 이번에 고구려를 멸망시켜 대각간 앞에 ‘클 태()’ 자를 붙인 신라 역사상 유래가 없는 태대각간으로 임명되는 영예를 누리게 되었지요. 


이로써 김유신은 진골 귀족들에게 왕따를 당했던 자신의 가문을 신라 최고의 명문으로 성장시킴과 동시에 젊은 시절부터의 꿈이었던 삼국 통일을 완수하고, 673년 7월 1일에 편하게 세상과 작별했어요. 유신은 자신이 살았던 시대부터 영웅 취급을 받았고, 고려,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까지도 영웅으로 대접을 받아서 그와 연관된 전설이 매우 많이 남아 있어요. 김유신의 전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천관녀와의 사랑 이야기예요. 유신이 젊었을 때, 그는 한동안 친구들과 기방 출입을 자주 했어요. 거기에서 천관녀라는 기녀를 만나 사랑에 폭 빠져 버렸대요. (하지만 천관녀는 기녀보다는 하늘의 뜻을 인간 세상에 전달하는 무녀였을 가능성이 더 커요.) 유신의 어머니가 이 사실을 알고 하루는 유신을 불러 놓고 훈계를 했어요. 


“나는 이미 늙어서 밤낮으로 오직 네가 성장하여 가문을 빛내기만 바라고 있는데, 너는 기생집에서 사랑 놀음이나 하고 있느냐?” 울면서 질책하는 어머니의 훈계에 유신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라며 어머니 앞에서 맹세했어요. 며칠이 지나, 유신은 외출을 했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말 위에서 잠깐 잠이 들었어요. 말울음 소리에 정신을 차려 보니 말이 멈춘 곳은 자신이 자주 드나들던 천관녀의 집 앞이었어요. 말이 천관녀 집으로 유신을 데리고 온 것이지요. 


천관녀는 유신이 오랜만에 오자, 맨발로 뛰쳐 나와 유신을 맞이했어요. 하지만 유신은 천관녀는 쳐다보지도 않고 허리에 차고 있던 칼로 자신의 애마를 죽인 후에 한마디 말도 없이 자기 집으로 가 버렸어요. 유신의 매몰찬 행동을 본 천관녀가 어떠했겠어요. 천관녀는 놀라 까무러쳤어요. 물론 다시 깨어는 났지만, 사랑했던 유신과는 영영 이별이었어요. 유신은 젊은 날의 사랑인 천관녀에게 못내 미안했던지 훗날 천관녀가 죽자, 그녀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천관녀가 살던 곳에 절을 지어 천관사라 했으며, 자신이 말을 죽인 자리를 ‘참마항'이라 했대요. 이후 사람들은 “김유신의 삼국 통일 위업은 참마항에서 시작됐다.”고 이야기하고는 했어요. 이 이야기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같은 실제 사실을 기록한 역사책에는 나오지 않아요. 


민간에 전설로 떠돌아다니던 이야기를 고려 후기 문인인 이인로가 자신의 문집 『파한집』에 적어 놓아 현재 전하고 있지요. 또 경주에 가면 단석산()이 있는데, 이 산 이름도 김유신 때문에 생겼어요. 단석산의 단자가 ‘쪼갤 단’으로, 유신이 젊은 시절에 이 산에서 무술을 연마하면서 칼로 베어 낸 돌이 수북이 쌓였기에 산 이름을 단석산이라 했대요. 


『삼국유사』에도 김유신 전설이 수록되어 있어요. 유신이 화랑으로 있을 때, 유신을 따르는 무리 중에 백석이라는 젊은이가 있었는데, 그는 고구려 왕이 김유신을 제거하기 위해 파견한 간첩이었어요. 고구려 왕이 추남이라는 점쟁이를 죽였는데, 그가 죽으면서 자신은 장군으로 다시 태어나 반드시 고구려를 멸망시킬 것이라는 예언을 남겼어요. 고구려 왕의 꿈에 추남이 유신의 어머니인 만명 부인의 몸으로 들어가자, 이에 두려움을 느낀 고구려 왕은 김유신을 죽이려고 백석을 신라 땅에 파견했어요. 하지만 신라를 지키는 신이 나타나 보호해 주었으므로 김유신은 백석의 사탕발림에 넘어가지 않고 목숨을 지킬 수가 있었다는 설화로도유명하며. 


김유신의 아버지와 어머니 사랑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김유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불타는 사랑을 했어며, 유신의 어머니인 만명 부인은 신라의 왕족인 숙흘종의 딸이었어요. 숙흘종은 진흥왕의 아우였으니, 신라 사회에서 상당한 지위에 있던 사람. 그런데 딸이 멸망한 가야 왕의 손자인 별 볼 일 없는 서현과 사랑에 빠져 결혼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 숙흘종은 딸을 집안 깊숙이 가두어 놓고 문밖 출입을 금지 시킨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 번개가 치더니 숙흘종의 집 대문에 벼락이 떨어져서 문지기가 기절을 해 버렸어요. 


만명은 이 틈을 타서 집 밖으로 빠져나가 결국 서현과 결혼이 이루어 졋으며. 이 사례를 보면, 현대 사회도 그러하지만, 아주 오래전에도 자식 이기는 부모는 드물었던가 봐요. 하지만 이 이야기를 좀 더 깊게 파고들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어요. 마른하늘에서 왜 갑자기 벼락이 떨어졌을까요? 이건 숙흘종이 꾸민 이야기일 가능성이 커요. 서현과 만명의 사랑은 워낙 소문이 크게 퍼져서 경주 사람 전체가 알고 있었어요. 


숙흘종은 내심 서현과 만명의 결혼을 인정하고 싶었지만, 서현의 집안이 별 볼 일이 없어서 체면상 반대를 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결혼은 시켜야겠기에,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것이 ‘깜짝 쇼’였다고 할수... 결과가 좋아 문희가 왕비까지 되었지만, 만약 그러지 못했다면 문희는 미혼모가 되어 평생을 고생 했을만한 생각도???. 또 천관녀와의 사랑은 어떻고. 그토록 사랑했으면, 애마가 스스로 천관녀 집에 갔을 때, "그래, 잘 살았냐"하고 다정한 말 한마디쯤 해 주고 돌어설 수도 있잖아? 죽도록 사랑했던 여인에게 정을 끊는다고 홱 돌아서는 사람을 과연,????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이후 당이 한반도를 전체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야욕을 드러내면서 웅진 도독부(공주), 안동 도호부(평양), 계림 도독부(경주)를 설치하였다. 이후 신라는 당의 한반도 지배 야욕에 맞서 매소성(경기도 양주)·기벌포(금강 하구) 싸움에서 크게 승리하며 당군을 몰아내고 삼국통일을 달성하였다.(676) 


신라의 삼국 통일은 당이라는 외세를 이용하여 이룩한 것이었고 영토는 대동강에서 원산만 이남까지로 대동강의 이남 지역을 확보하는데 그치는 한계점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의 삼국통일은 당의 세력을 무력으로 축출한 자주적 통일이라는 점과 고구려, 백제의 문화 전통을 수용하여 민족 문화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였다는 점은 중요한 의의라고 말 할 수 있다. 


신라는 이전보다 넓은 영토를 갖게 되어 경제를 더욱 발전시켜 이전보다 풍부한 경제력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신라의 삼국 통일이 가지는 의미는 분립해서 존재하던 삼국이 하나의 국가 체제로 편입되어 민족 국가 형성의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특히 당이 고구려, 백제, 신라에 각각 도호부를 설치하면서 한반도 지역에 대한 직접 지배의 의도를 드러냈을 때 신라는 고구려, 백제의 유민들과 함께 당군을 축출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고 통일 과업을 완수하면서 한민족 형성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은 통일의 자주성으로 평가하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삼국 통일의 과정에서 당의 세력을 끌어들여 한반도를 중국세력의 지배 위협에 놓이게 했다는 점과 영토면에서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선으로 경계를 지어 고구려의 영역이었던 만주지역을 완전히 통합하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불완전한 통일로 한계를 지적할 수 있다.  불교를 공인하여 고대 국가의 통일을 위한 사상적 뒷받침을 마련하였다. 


법흥왕대의 체제 정비는 전제 왕권 확립의 기반으로 평가됨, 또한 진흥왕대의 화랑도의 제도화는 군사적인 통일의 배경 역할을 하였다. 경제적으로는 지증왕때에 우경을 시작(502)하였으며, 수리 사업을 활발히 진행하였다. 또한 순장을 금지(502)하고 동시()를 설치하였다. 이는 생산력이 크게 발전하였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신라의 삼국 통일을 이룰 수 있는 경제적 토대가 마련되었음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신라는 6C 이후 지증왕이 ‘왕()’호칭을 사용하고, 국호를 ‘’로 확정하는 등 내부 체제를 정비하고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기반을 착실히 다져갔다. 정치적으로 법흥왕(514~540) 때에 국가 체제를 정비하여 중앙 집권적인 귀족 국가로 통치체제를 갖추었다. 율령의 반포(520), 17관등제의 확립, 귀족의 이익을 대변하는 상대등과 군사 행정을 담당하는 병부도 설치하였으며, 건원()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채택(536)하여 대내적으로 왕권이 확립되고, 대외적으로 중국과 대등한 국가라는 자각을 가졌다. 


흥왕대의 한강 유역 확보는 보다 넓은 농업 생산 기지의 확보와 더불어 많은 인민을 지배하게 됨으로써 국가 경제의 기반이 보다 확충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대외적으로 지증왕 때 우산국을 복속(512)시키고, 법흥왕 때에는 김해의 금관가야를 병합하고 낙동강 하류지역으로 진출(532)하였으며, 진흥왕 때 한강 유역과 중부지방을 모두 차지함으로 삼국간 항쟁에서의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특히, 한강 유역의 확보는 외교적으로 남양만의 당항성을 통해 중국의 남북조와 직접적인 외교 창구를 확보한 것으로 삼국 통일을 위한 외교적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이것이 바탕이 되어 이후, 백제의 압박에서 벗어나고자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한 외교적 노력이 실패하게 되었을 때, 중국 세력(당)과 연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신라와 당이 모두 자기의 이해 관계를 충족시키기 위한 외교적 협상의 결과였으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게된 가장 중요한 외교적 토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동북 공정," 

이 말을 언뜻 들어보면 무슨 공사 이름인 듯 하다. 하지만 이 사업은 북경 사회과학원 산하의 한 연구소 주도로, 동북 3성의 사회 과학원과 그 지역 대학 및 연구기관들이 총동원되어 이루어지고 있는 대규모 연구프로젝트이다. 5년 간 사업비만도 2백억 위안, 우리 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약 3조원에 이르는 금액이다. 중국의 경제 현실을 고려했을 때,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숫자의 돈이다. 이 프로젝트의 목표는 중국 역사에 대한 재해석이다. 하지만 역사에 대한 단순 재해석이라면 문제될 것이 없겠지만, 그들이 목표하고 있는 것은 현재 중국의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중국 정부는 집안()일대의 고구려 유적들에 대한 대대적인 정화 작업을 벌이는 동시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 위원회에서 평양의 고구려 고분군과 함께 세계 문화 유산으로 신청할 예정이다. 만약 여기에서 평양의 고구려 고분군이 지정되지 않고, 집안 일대의 고구려 유적이 문화 유산으로 지정된다면 그것을 한국의 역사로 빼올 수 있는 길은 막연해 질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이론의 내면에는 중국이 지향하는 ‘통일적 다민족 국가’의 원리가 숨겨져 있다. 


중국은 한족을 중심으로 55개의 소수 민족이 만든 국가라는 것이다. 이 가운데 동북 지역은 만주족과 조선족을 중심으로 한 역사였으며, 지금 조선족 역시 중국의 일부를 이루고 있으므로 이 지역의 역사 역시 중국의 역사라는 관점이다. 역사 연구에 정치적 색채가 강하게 깔려 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특히 이것은 근래 조선족들의 한국 국적 신청 운동과 물려서 상당한 정치적 신경전을 예상케 한다. 문제는 이러한 정치적 색채를 띤 역사 연구의 주된 목표가 바로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라는 점이다. 그들의 이론대로 하면 현재 중국 국경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역사는 중국의 역사이므로 고구려사와 발해의 역사는 한국의 역사가 아니라 중국의 역사가 된다. 이것은 최근 돌출된 것이 아니라, 1992년 한·중 수교가 이루어 질 때부터 물밑으로 추진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 동북 지방을 여행하면서 발해와 고구려를 중국 당나라의 지방 정권 혹은 속국으로 표기해 놓은 것을 직접 본 사람도 있다. 


<김유신설화>

백석과의 사건과 동생의 결혼 관련 일화, 소정방과의 전쟁에 관한 일화, 말의 목을 베는 일화를 통해 천운, 지략과 용맹 그리고 자기절제의 의지를 갖춘 영웅의 모습을 형상화한다. 변이형 역시 이런 사건들과 관련된다. 특히 김유신이 말의 목을 베는 것을 본 기생이 슬픈 곡조의 노래를 부르고 이것이 관천사가 되었다는 것과 소정방과의 전쟁에서 갑자기 연기와 안개가 자욱해져 천지가 깜깜해지자 안개가 사라지면 천 개의 절을 짓겠다고 기도하고 이후 산세 때문에 절을 지을 수 없자 돌 천 개를 배치하여 절 형태로 만들어 절 한 채를 지어 천방사라 하였다는 유래담이 존재한다. 아울러 구비전승되는 유형 중 비록 김유신이 소정방에게 승리하였지만 땅을 내준 것은 잘못이며, 결국 이것도 얼마 지키지 못해 신라가 멸망하였다는 변이형 역시 존재한다. 


김유신은 역사적 인물이지만, 삼국 통일을 이루는 과정에서 보여 준 탁월한 능력으로 신화적 영웅의 반열에 오른다. 김유신이 갖춘 용맹과 지혜는 타고난 것이기도 하지만, 초월적인 도움에 의한 것이기도 하고 자신의 강인한 의지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신성과 세속을 아우르는 완벽한 영웅의 모습을 구현한다.이후 흥덕왕은 그를 흥무대왕이라 봉하고, 그 후손을 왕손으로 예우했다. 


[삼국사기]는 10권의 열전 가운데 3권을 내주며 삼국통일을 이룩한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삼국유사]는 김유신이 당대에 ‘성신’으로 추앙받았다고 적고 있다. 고려, 조선시대까지 김유신은 통일의 영웅이었다. 그러나 외세의 침략에 나라의 운명이 흔들리던 한말, 신채호는 “김유신은 지용이 있는 명장이 아니요, 음험하기가 사나운 독수리 같았던 정치가이며, 그 평생의 큰 공이 전장에 있지 않고 음모로 이웃 나라를 어지럽힌 자”라고 비난했다. 당이라는 외세를 끌어들여 같은 민족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는 이유 때문에, 그 책임을 김유신에게 물었다. 당시 시대정신을 반영한 신채호에 의해 김유신은 통일의 영웅에서 음험한 정치가로 평가절하되었다. 



또 다른 볼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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