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골제[ 碧骨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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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유적성격: 저수지건립시기: 연도 330년소재지: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 포교리,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 월승리.
지정종목지정번호지정일소재지시대종류/분류
사적 |
사적 제111호 |
1963년 01월 21일 |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 월승리 119 지도 |
백제 |
저수지둑 |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에 있는삼국시대 백제의 저수지, 둑.
우리나라 최대의 고대 저수지이다. 역사적 연혁에 대해서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 흘해왕 21년조에 ‘시개벽골지안장일천팔백보(始開碧骨池岸長一千八百步)’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시기는 이 지역이 백제의 영토였으므로 후세 사가들이 신라기년(新羅紀年)으로 고쳐 신라기(新羅紀) 속에 삽입한 것으로 본다면 백제의 11대 비류왕 27년(330)에 축조된 것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그 뒤 790년(원성왕 6)에 증축한 사실이 있었고,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현종 때와 인종 21년(1143)에 수축하였다. 『고려사(高麗史)』 세가(世家)에 의하면 인종 24년(1146)에 왕의 건강이 위중해지자 무당의 말을 따라 내시(內侍)를 김제로 보내 벽골제의 제방을 트게 하였다. 그 뒤 조선시대 1415년(태종 15)에 다시 축조하였으나, 이익이 적고 폐단이 많았기 때문에 폐지하고 말았다.
그 유적은 포교리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월승리에 이르는 평지에 일직선으로 약 3㎞에 달하는 제방이 잔존하고 있다. 그러나 1925년에 동진(東津) 농지개량조합에서 이 제방을 관개용 기간수로(基幹水路)로 개조하여 이용함으로써 그 원형이 크게 손상되었다.
이 제방에 부수된 시설로는 3개 소에 수문지(水門址)가 있으며, 거대한 돌기둥들이 우뚝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실려 있는 벽골제중수비문에 보면 두 개의 수문이 더 있었다고 한다.
1975년 수문지 2개 소에 대한 발굴조사에 의하면 제방의 높이는 약 4.3m이고, 윗변의 너비가 7.5m, 그리고 밑변 너비는 17.5m의 규모로 축조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수문의 너비는 4.2m로서 여기에 사용된 돌기둥의 높이는 5.5m이며, 1개의 무게는 약 8t에 달하고 있다. 수문 외부에는 호안석(護岸石) 등이 견고하게 구축되어 있다.
저수지 수면의 만수 때 이 제방을 구축함으로써 확보되는 점유 총 면적은 37㎢, 즉 1120만 평의 방대한 지역에 달한 것으로 계산되고 있다.
이러한 토목공사는 정밀도가 매우 높은 수준측정법(水準測定法)을 전제로 해서 비로소 가능한 것으로, 이는 당시 토목기술이 고도로 발달되었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이 제방과 함께 이곳에 건립되어 있는 조선시대의 김제벽골제비는 1963년에 일괄해서 사적 제111호로 지정되었다.
김제 벽골제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 포교리에서 월승리에 이르기까지 제방이 남아 있는 백제시대의 저수지. 우리 나라 최대의 고대 저수지이다. 사적 제111호.
사적 제111호로 지정되었다. 김제 벽골제는 한국 최고(最古)·최대의 저수지 둑으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330년(백제 비류왕 27)에 쌓았고, 790년(원성왕 6)에 증축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후 고려·조선 시대에 수리하였다.
제방은 포교리(浦橋里)를 기점으로 월승리(月昇里)까지 남북으로 일직선을 이루어 약 3km의 거리에 남아 있는데, 수문지임을 알려주는 거대한 석주(石柱)가 3군데에 1쌍씩 있다. 그리고 1925년 간선수로로 이용하기 위한 공사에서 원형이 크게 손상되었으며, 제방은 절단되어 양분(兩分)된 중앙을 수로로 만들어 농업용수를 흐르게 하였다.
1975년 발굴·조사에 따르면, 제방 높이는 북단(北端)이 4.3m, 남단(南端)이 3.3m이고, 수문 구조는 높이 5.5m의 2개 석주를 4.2m 간격으로 세웠으며, 서로 마주보는 안쪽 면에 너비 20cm, 깊이 12cm 요구(凹溝)를 만들고 목제(木製) 둑판을 삽입하여 수량을 조절하였다. 석축(石築)은 약 6m이며 가장 낮은 곳이 1.1m이다.
김제 벽골제 벽골제비각 정측면김제 벽골제 북편에 위치한 벽골제비각의 정측면 모습이다.
전라북도 김제 지역에 펼쳐진 김제 평야는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곡창 지대1)예요. 동진강과 만경강이 흐르고 토양이 좋아 벼가 잘 자라지요. 김제에는 벼농사의 역사를 알려 주는 벽골제가 있어요.
벽골제는 저수지의 물이 넘치지 않도록 쌓은 제방이에요. 330년, 백제가 이곳을 다스리던 시기에 만들어졌어요. 3킬로미터가 넘는 제방에 모두 5개의 수문을 내어 물을 조절했지요. 제방 안의 저수지는 무척 넓었는데 무려 여의도의 4배 크기나 되었답니다.
우리 조상들은 벼농사를 짓기 위해 넓은 평야 주변 곳곳에 물을 저장할 수 있도록 저수지를 만들었어요.
벽골제는 평소에는 수문을 닫아 물을 저장했다가 모내기 철이나 벼에 물을 대는 시기가 오면 수문을 열어 주변 농지로 물을 공급했어요. 지금은 물이 있던 자리 대부분이 논과 마을로 바뀌었지만 제방과 2개의 수문은 남아 있어요.
벽골제는 벼농사를 위해 쌓은 제방이에요.
우리의 농경 문화
농사는 우리 민족의 중심이 되는 문화였어요. 사람들은 평야를 중심으로 마을을 이루고 농사를 지으면서 독특한 농경 문화를 만들었지요. 농사를 잘 짓기 위해 절기를 만들었고, 세시 풍속과 민속놀이도 발전했어요.
벼농사 과정
벼농사에는 물을 댄 논에 벼를 심는 방법과 밭에 볍씨를 뿌리는 방법이 있어요.
우리나라는 오래전부터 논을 만들고 벼농사를 지었어요. 논에 벼를 심어야 수확량이 늘어나기 때문이지요.
봄에 볍씨를 모판에 심어 키운 후, 물을 댄 논에 모내기를 해요.. 비료를 주어 모를 잘 자라게 한 후, 잡초를 뽑아 주는 김매기를 하고 벼가 잘 자라면 추수를 하지요.
모내기에 대해
벼농사를 지을 때 볍씨를 논에 직접 뿌리지 않고 모판이라는 판에서 싹을 먼저 틔워요. 파랗게 싹이 돋은 모를 적당한 시기에 물을 댄 논에 조금씩 덜어서 심는 일을 모내기 혹은 모심기라고 해요. 볍씨를 밭에 뿌려서 키우는 것보다 수확량이 많지만 물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예부터 평야 옆에는 큰 저수지가 있었답니다.
농사에 필요한 도구
농사에는 많은 도구가 필요해요.
대표적인 농기구로는 밭을 가는 데 사용하는 쟁기, 땅을 파거나 흙을 고르는 데 쓰는 괭이와 쇠스랑, 김매기에 사용하는 밀낫과 호미, 거름을 담아두는 오지장군, 똥장군 등이 있어요. 또, 물을 위로 퍼 올리는 무자위와 용두레, 두 사람이 함께 물을 퍼 올리는 맞두레 등이 있지요. 농기구는 쇠붙이와 나무, 짚, 대나무 등으로 만들었어요.
거름을 담아 두는 똥장군이에요.
농경 사회의 놀이
벼농사는 여러 사람이 함께 지어요. 그렇기 때문에 농경 사회에서는 농민들이 협동하는 놀이가 많이 생겨났지요.
벼농사를 짓는 마을에서는 어김없이 줄다리기가 펼쳐지곤 했어요. 줄다리기에서 이기면 마을에 풍년이 온다고 믿었답니다. 또 모내기, 김매기, 추수 같은 힘든 농사일이 끝나면 풍물놀이를 하면서 지친 몸을 달래기도 했지요.
쥐불놀이는 논두렁과 밭두렁에 볏짚을 놓고 해가 지면 일제히 불을 붙여 잡초를 태우고 해충을 없애던 행사예요. 쥐불놀이에는 농사지을 땅을 기름지게 만드는 조상의 지혜가 담겨 있답니다.
농사지을 때 노래
농민들은 힘든 농사를 지을 때 피로를 잊고 능률을 올리기 위해 노래를 부르며 일해요. 이 노래를 농요 또는 들노래라고 해요. 노래를 부르면서 협동심도 기르고 신 나게 일하지요. 논매기 노래, 벼 베기 노래, 모심기 노래, 방아 타령, 김매기 노래 등이 있어요. 농요는 한 사람이 먼저 노래를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이 후렴구를 함께 부르는 형식으로 진행돼요. 모내기나 추수를 끝낸 뒤에는 풍물패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진답니다.
옛날 농경 문화를 체험
추천 체험 학습 코스
벽골제 → 농경 문화 박물관 → 우도 농악관 → 농경사 주제관 및 체험관
추천 체험 학습 코스
벽골제
벽골제는 저수지에 물을 채우기 위해 쌓은 길고 높은 둑이에요. 수문에는 양쪽에 돌기둥을 세우고 나무판을 쇠줄에 달았어요. 쇠줄을 당겨 나무판을 들어 올리면 물이 흘러내렸지요. 벽골제는 고대 농경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유적지이기 때문에 사적 제111호로 지정되었어요.
김제에는 예부터 수리시설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호남평야는 평야의 크기에 비해 만경강과 동진강 두 하천의 규모가 작아 호남평야 전 지역에 물을 공급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백제시대부터 김제의 벽골제나 정읍의 눌제, 익산의 황등제 같은 수리시설이 만들어졌죠.
벽골제는 백제 비류왕 27년 때인 서기 330년에 축조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 둑인데요, 당시로서는 규모 면에서도 동양 최대였습니다.
벽골제의 주요 수원은 원평천과 두월천이라는 두 하천인데요, 벽골제는 이 두 하천이 합류되는 지점을 막아 물을 가두어 만든 것으로 제방의 길이가 총 3.3Km에 이릅니다. 이 벽골제의 물로 김제지역은 물론 정읍과 부안의 논에도 물을 댄 것이죠. 벽골제는 벼농사에 필요한 물을 가두었다가 농번기에 물 걱정 없이 농사를 짓기 위한 것으로 우리 조상들의 슬기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수리시설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벽골제와 숫자 3의 재미있는 인연을 발견해봅니다. 벽골제는 서기 330년에 축조되었으며, 신라 33대 원성왕 때 보수공사가 있어서 단야의 이야기가 생겨난 해이며, 벽골제의 길이는 3.3km이랍니다. 쿠쿠
지금도 인근의 지명 '신털미산'과 '되배미터'를 통해 벽골제가 얼마나 거댜한 저수지였는지 축조 당시의 공사가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신털미산'은 공사에 동원된 사람들이 짚신에 묻은 흙을 털어낸 것이 모아져 산이 되었고, '되배미터'는 인부들을 일일이 셀 수 없어 500평 되는 논에 지게를 짊어진 사람들이 모두 채워지면 500평으로 간주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벽골제라는 이름을 얻는데는 또 다른 유래가 있습니다. 벽골제를 쌓을 때만 해도 인근 바다의 조수가 이곳까지 밀려왔습니다. 공사 도중 매번 조수가 밀려와 그 동안의 공사를 망쳐놓곤 했는데요, 하루는 공사 감독의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푸른 뼈로 제방을 쌓아라"라고 말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동시에 같은 꿈을 꾸어서 벽골, 즉 말 뼈(푸른 뼈)를 흙과 함께 섞어 쌓아, 공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고, 벽골제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재밌는 건, 뼈의 주성분이 무엇인지 아세요? '인'이랍니다. 인이 흙을 단단하게 한다는 사실을 볼 때, 푸른 뼈에 대한 우리 선조들의 과학적 사고가 엿보이지요. 쿠쿠
단야를 들어봤나요?
단야라는 처녀가 심술을 부리는 청룡에게 스스로 몸을 바쳐 벽골제 보수공사가 성공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벽골제가 오래되어 보수공사를 해야 했어요. 왕이 원덕랑을 김제에 보내게 됩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토목기술자인 원덕랑은 김제 태수와 함께 일을 하게 되었는데, 태수의 딸이었던 단야도 일을 도우면서 원덕랑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원덕랑에게는 이미 '월내'라는 약혼자가 있었습니다.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는가 싶더니 마무리 무렵 그만 둑이 터져 버리는 것이었어요.
벽골제 주변에는 청룡과 백룡이 살고 있었는데요, 백룡은 천재, 폭우, 변란 등을 막아주었지만, 청룡은 백설등을 괴롭히고 사람을 죽이는 등 온갖 피해를 입혔습니다. 백룡의 만류에도 청룡이 벽골제 보수의 완성 단계에서, 공사를 못하게 천둥, 번개를 동원한 폭풍우를 내리고 제방을 헐려고 온갖 심술을 다 부렸어요.
산 처녀를 청룡에게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져만 갔습니다. 이런 와중에 원덕랑을 보기 위해 월내낭자가 왔고, 김제 태수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월내낭자를 보쌈해 청룡에게 제물로 바치면 공사를 성공할 수 있고, 딸도 원덕랑에게 시집보낼 수 있어서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에요. 김제 태수는 사람들을 시켜 밤중에 월내낭자를 보쌈해 청룡이 사는 못으로 데려갔습니다. 낭자를 못에 던지려고 할 즈음, 사람들은 그녀가 단야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김제 태수의 음모를 눈치 챈 단야가 대신 보쌈이 되어 왔던 것입니다. 단야는 순식간에 못에 몸을 던졌고, 그 후 보수공사는 순조롭게 끝날 수 있었습니다.
단야의 숨결을 간직한 벽골제의 물은 풍부히 흘러 만경 들판 수많은 농민들에게 젖줄이 되었으며 사람들은 단야의 희생과 사랑을 더욱 칭송하게 되었고, 단야의 벽골제는 더욱더 빛이 나고 있는 것입니다.
자연은 인간에게 무한히 베풀지만, 또한 가혹하기도 합니다. 전설에서의 백룡과 청룡이 이러한 자연의 두 얼굴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단야 이야기]는 전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김제 지역에 전승되는 쌍용놀이의 기원설화이기도 하고, 죽은 단야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세웠다는 단야각과 단야루를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오늘 저와 함께 한 단야의 벽골제 여행 어떠셨나요? 즐거움과 감동을 함께 나누고 싶었는데 부족한 게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매년 10월 초 농경문화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대한민국 대표축제인 지평선 축제가 여기 벽골제에서 열립니다. 우리나라의 축제 중 대상을 받은 짜임새 있고 놀거리, 먹거리, 즐길거리, 볼거리 등이 지천에 널린 벼마냥 많답니다. 기대하셔도 좋을 듯 합니다.
벽골제 축조 설화인 쌍용놀이가 거행되는데 김제 인들의 땀과 노력으로 연출한 작품도 볼 수 있답니다.
10월의 처음을 김제여행과 함께 열어보시는 건 어떨까요?
물도 바위를 만나야 아름다운 폭포가 되고, 벽골제도 푸른뼈와 단야의 희생을 만나 더욱 더 빛이 나는 것 같습니다.
역사의 진흙 속에서도 벽골제의 수문 하나 올곧이 남은 모습. 이 하루 벽골제의 인내가 마냥 고마운 후손, 류지영이었습니다.
농경 문화 박물관
벽골제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박물관이에요. 벽골제처럼 큰 저수지 시설을 옛 조상들이 어떻게 이용했는지 알아보고, 수리 시설의 발달 과정도 배울 수 있어요. 벼농사의 과정과 농경 문화를 알 수 있는 각종 유물도 전시되어 있지요. 야외 테마 연못에서는 물을 퍼나를 때 쓰던 농기구들도 직접 만져 볼 수 있답니다.
우도 농악관
농악은 농경 문화에서 나온 음악이에요. 징, 꽹과리, 북, 장구 등을 치며 흥겨운 춤을 곁들이지요.
우도 농악은 전라도 지역의 대표적인 농악 중 하나예요. 우도 농악관에서 풍물놀이를 배워 보세요.
농경사 주제관 및 체험관
어린이의 눈높이에서 농경 문화를 설명하는 전시관이에요.
농사철에 따라 사용하는 농기구를 살펴보고, 모내기도 직접 해 보면서 농경 문화를 쉽게 배울 수 있지요.
짚으로 만든 농기구와 재미있는 공예품들도 전시되어 있어요. 옛날 사람들은 농사일을 하지 않는 동안에는 짚을 꼬아 다양한 공예품을 만들었어요.
김제 평야와 지평선.
우리나라에는 산지와 구릉이 많아서 지평선을 볼 수 있는 지역이 많지 않아요. 언덕이나 산이 없는 평평한 평야 지대인 김제 평야 일대는 우리나라에서 지평선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예요. 또 가을에는 벼가 익으면서 김제 평야 일대가 황금빛으로 물들어요. 우리나라 최대의 곡창 지대임을 알 수 있어요.
김제 지평선 축제.
해마다 10월에는 벽골제에서 김제 지평선 축제가 열려요. 우리나라 전통 농경 문화를 체험하는 축제이지요. 벼농사의 과정을 배우고 직접 벼를 수확해 보는 농경 체험이 재미있어요. 전통 놀이 체험 행사도 다양하게 열려요. 재미있는 모양의 연을 만들어 날리는 지평선 연날리기 체험, 허수아비 체험, 나무 새총과 팽이, 제기를 만들어 보는 전통 놀이 도구 만들기 등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많아요.
체험 학습
김제 평야와 벽골제
산지가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지평선을 구경할 수 있는 곳이 드물다. 하지만 지난 주말에 다녀온 벽골제에서 지평선을 볼 수 있었다. 산이 없고 넓은 평야만 있어서 신기하게도 지평선이 보였다. 알고 보니 벽골제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이 잘 보이는 곳이라고 한다. 벽골제와 김제 평야를 구경하고 농경사 주제관에서 재미있는 농경 체험도 해 보았다.
벽골제 재미있었던 체험
모내기 체험 : 농경사 체험관에서 모내기를 해 보았다. 조화로 만든 모를 판에다 심는데, 실로 줄을 만들어 놓아서 줄에 맞춰 조금씩 모를 심었다. 줄에 맞춰서 심는 게 좀 어려웠지만 모판 하나를 다 심고 나니, 뿌듯했다.
물 대기 체험 : 물을 퍼 나르던 맞두레를 작동해 보았다. 맞두레는 두 사람이 함께 쓰는 농기구라서 아빠와 함께해 보았다. 나무와 짚으로 연결된 큰 도구로 연못의 물을 펐다. 여러 번 하니까 꽤 힘이 들었다.
느낀 점
벼농사는 물이 많이 필요해서 물 대던 일이 무척 중요하다고 한다. 우리 조상들도 벽골제에 물을 저장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 물을 흘려 이 지역의 논에 물을 공급했다.
물 대기와 모내기를 조금만 해도 무척 힘들었는데, 이 넓은 김제 평야에서 벼농사를 하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물 대기, 모내기 같은 농사일을 해 보면서 농사일은 협동심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참조항목
농업수리, 벽골제쌍룡놀이, 부량면, 인공호, 김제 벽골제, 제천 의림지와 제림, 수산제 수문, 상주 공검지
역참조항목
눌제, 모악산도립공원, 박습, 송일중, 수산제, 황등제, 호남지방, 밀양시의 교통관광.
카테고리
- 문화유적 > 한국 > 사적 > 전라북도
- 역사 > 아시아사 > 한국사 > 삼국시대
- 지역 > 아시아 > 한국 > 전라북도 >
- 역사 > 아시아사 > 한국사
- 경제·경영 > 산업 > 농업 > 농업일반
-
출처 & 참고문헌
- 『증보벽골제사』(대흥출판사, 1982)
- 『이조수리사연구』(한국연구원, 1961)
- 「김제벽골제발굴보고」(『백제연구』7, 1976)
- 벽골제 [碧骨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이조수리사연구』(한국연구원, 1961)
- 『여지도서(輿地圖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충청북도지(忠淸北道誌)』
- 『내고장전통가꾸기』(제천시, 1981)
- 대한민국구석구석 여행이야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encykorea.aks.ac.kr/
-
저자/제공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벽골제 [碧骨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김제 벽골제 [金堤 碧骨堤] (두산백과)
-
[네이버 지식백과] 김제 벽골제 (천재학습백과 초등 창의적 체험활동)
-
공검지 [恭儉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수산제 [守山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 『점필재집(佔畢齋集)』
- 『밀주지(密州誌)』(소장본)
- 『밀주구지(密州舊誌)』(소장본)
- 『교남지(嶠南誌)』(1940)
- 『한국수전의 기원』(1956)
- 『朝鮮全圖』(朝鮮總督府, 1924)
- 수산제 [守山堤] (두산백과)
- 수산제수문 [守山堤水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경상남도문화재대관(慶尙南道文化財大觀)』(경상남도, 1995)
- 『밀양지(密陽誌)』(밀양문화원, 1987)
- 제공처 정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encykorea.aks.ac.kr/
또 다른 구경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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