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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역사(국내 .각지역.)

대동법 , 大同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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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법 , 大同法. 1

실시와 확대"

공납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조 때(1569년) 이이()가 공납을 쌀로 내는 것을 건의했으나 실시되지는 못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군량미가 부족해지자 조정에서는 어쩔 수 없이 특산물 대신 쌀로 납부하기를 장려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대동법은 광해군 때 경기도에서 처음 실시되고 나서 100년 만에야 전국적으로 시행될 수 있었다. 지주들이 완강하게 저항하였기 때문이다. 이로써 농민들은 특산품을 현물 대신 쌀이나 베, 돈으로 납부하게 되었다. 나라에서는 필요한 물품을 공인이라는 상인에게 돈을 주고 사들이게 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다시 공납의 폐해가 심각해졌을 때 광해군이 즉위했어요.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원익은 대동법을 시행할 것을 재청했다. 그리하여 경기도에서 처음 실시되었다. 인조가 즉위하고(1626년)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까지 실시되기도 했다, 특산물을 공물로 바치는 것이 곧 백성들의 충성심이라고 여긴 인조와 신하들은 대동법 확대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효종 즉위 후, 김육 · 조익 등이 강력히 주장하면서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농민들의 굶주림은 계속되었다. 유형원은 "세금을 조금 줄여 준다고 해결될 단계는 지났습니다. 농민에게 토지가 골고루 돌아가게 해야만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지주 전호 제야 말로 하늘이 정한 이치입니다. 이것을 바꾸어서는 사회가 유지될 수 없습니다."라며 반대하였다.

임진왜란의 상처가 아물고 있던 1623년, 김육은 충청도 음성이라는 작은 고을의 원님이 되었다. 그는 위로는 임금을 잘 받들고 아래로는 백성을 잘 보살펴 훌륭한 원님이 되겠다고 여러 차례 다짐하였다. 하지만 음성에 도착한 김육은 고을 농민들의 비참한 삶을 보며 가슴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농민들은 대부분 제 땅이 아닌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있었다. 게다가 가을걷이의 절반은 지주에게 바쳐야만 하였다. 추수가 막 끝난 가을에도 굶주림은 계속되었고, 나라에 낼 세금을 마련하려고 다음 해 농사에 씨앗으로 써야 할 곡식마저 써 버리기 일쑤였다. 김육은 먹고살 길이 없어서 구걸하며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을 길거리에서 수없이 만났다. 

김육(1580~1658) [김육은 원님으로서 농민의 생활을 보살피려고 최선을 다하였다. ]

김육은 조세 제도의 개혁, 동전 사용 등 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바탕 위에서 나라 살림을 돌볼 수 있는 여러 개혁을 시도하였다. 작은 고을 원님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제도적인 문제가 있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세금 제도를 고쳐야만 농민들의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중앙 관직에 나가게 된 김육은 조세 제도의 대개혁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는 공물 내는 제도를 뜯어고치자고 하였다. 공물 납부를 둘러싼 폐해가 심했기 때문이다. 공물을 둘러싼 부정과 비리 탓에 호랑이 가죽으로 만든 깔개 하나가 무려 무명 200 필과 맞먹을 정도였다. 김육은 소유한 토지의 면적에 따라 공물을 쌀로 내게 하는 대동법을 확대하자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은 대동법이 확대될 경우 더 많은 세금을 낼 수밖에 없던 지주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던 많은 관리들도 그의 주장에 반대하고 나섰다. 그들은 '백성들이 떠돌아다니지 못하게 하면 세금이 잘 걷히고, 그러면 나라 살림도 차차 나아질 것'이라며 호패법의 강화를 주장하였다. 김육은 '호패법은 먹고살 길이 없는 농민들을 도적으로 만들 뿐'이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한 마을에 100집이 있다면 그 가운데 끼니 걱정을 하지 않는 집은 한둘에 지나지 않고, 건너뛰어서라도 겨우 끼니를 이어 가는 집이 열 집 정도이며, 나머지는 겨울이 지나기도 전에 아침저녁 연기가 끊어진 채 굶주림에 울부짖는다."

김육의 주장으로 전라, 충청 지역까지 대동법이 확대되어 조금 나아진 농촌의 모습이 이 정도였다.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지, 두 학자의 해결책을 들어 보자.

유형원(1622~1673); 관직을 멀리하고 전라도 부안에서 날로 어려워지는 농촌 사회의 현실을 직접 지켜보면서 사회 개혁론 정리에 몰두하고 있는 학자이다.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려면 백성의 세금을 덜어 주어야 합니다.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확대한다거나, 상민들만 부담하는 군포를 양반에게도 물린다면 백성의 생활도 나아질 것입니다. 

땅마다 임자가 있고, 땅이 없는 사람은 땅을 빌려 경작하는 지주 전호 제야 말로 하늘이 정한 이치입니다. 이것을 바꿔서는 사회가 유지될 수 없습니다. 위기의 근본적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지금 땅을 많이 가진 지주들 중에는 땅을 놀리는 사람도 있는데, 대다수 농민들은 경작할 땅이 없습니다. 농민이 어려운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송시열(1607~1689): 대표적인 유학자로 효종의 스승이다. 높은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여러 정책을 추진하였다. 조정은 물론 학자 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인물이다.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 대동법이 확대된 뒤에도 농민의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에 조정에서는 새로운 대책을 마련하느라 분주하였다. 하지만 조정에서 내린 결론은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토지 제도를 고쳐 농민의 생활을 안정시키자는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양반에게도 군포를 물려 농민의 세 부담을 줄여 주자'는 방안도 양반과 상놈의 차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이유로 거부되었다.

요란하게 출발한 개혁의 움직임은 대동법이 적용되는 지역을 늘리는 정도에서 끝났다. 결국 대동법은 전국적으로 실시되었으나, 땅 없는 농민들의 어려움은 아무도 살펴 주지 않았다. 지주들은 자신들이 내야 할 토지세를 소작농에게 떠넘기는 경우가 많았다. 나라에서도 새로운 세금을 자꾸 만들었기 때문에 농민의 생활은 실질적으로 개선되지 못하였다. 농민의 생활은

'대동법 실시 전보다 더 비참하다'라고 할 정도로 나빠졌다. 수탈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고향을 등지고 떠나, 어떤 고을은 '절반이 비었다'라고 보고될 정도였다. 이러한 현실에서 실학이라는, 사회 개혁을 주장하는 새로운 학문이 등장하였다.

역사가 송시열,,,
유형원의 주장을 서로 비교해 보자. 그리고 어느 한쪽의 입장을 선택하여 지지하는 글을 써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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