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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역사(국내 .각지역.)

노량해전 , 露梁海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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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해전 , 露梁海戰.


정유재란 때인 1598년(선조 31) 11월 18일부터 19일 이틀 사이에 이순신()과 진린()이 이끄는 조·명 연합함대가 노량(경상남도 남해도와 하동 사이의 해협) 앞바다에서 왜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

조선 선조 31년(1598년)에 노량 앞바다에서 이순신이 왜병과 대결한 마지막 해전. 이 해전에서 이순신은 명나라 장군 진린()과 더불어 싸웠으며, 승리와 함께 전사함.

임진왜란 중 바다에서의 마지막 싸움이며, 이순신이 승리와 함께 전사한 해전이다.

1598년(선조 31) 11월 19일 노량 앞바다에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과 벌인 마지막 해전이다. 이 해전을 마지막으로 7년간 계속되었던 조선과 일본의 전쟁은 끝났고, 이순신도 이때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했다.

정유재란으로 조선을 침략한 왜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사() 소식을 듣고 철군하게 되었다. 이때 이순신은 명나라의 수사제독(진린()과 함께 퇴로를 막기로 하였다. 그런데 철수하는 왜군에게 해로를 열어줄 것을 조건으로 고니시 유키나가[西]에게서 뇌물을 받은 진린은 이순신에게 왜군의 퇴로를 차단하지 말자고 권고하였다. 이순신은 이에 강경하게 반대하여 진린을 설득한 후 함께 왜군을 치기로 하였다.

왜군의 철수
노량해전()은 임진왜란 7년의 전쟁 가운데서 마지막 전투이다. 1598년에는 4차례의 전투가 있었는데, 절이도전투(, 7월19일), 예교와 유도전투(9월 15일~10월 4일), 장도해전(, 9월 20일~10월 9일) 등 일본군이 철수하기 위한 전초전이 있었고 이러한 전투가 연장된 것이 바로 노량해전이다. 특히 예교에는 고니시 유키나카(西)가 지휘하는 일본군 15,000여 명이었는데, <초서체일기()>에 의하면 아군이 예교의 적군을 장도 뒤에서 10월 2일부터 나흘 동안 맹공격을 했으나, 불행히도 사선() 25척, 호선() 77척, 비해선() 17척, 잔선 9척 등 모두 128척을 가진 명나라 수군은 그 중 39척이 불에 타는 피해를 입었다. 조선 수군도 제포만호 주의수(), 사량만호 김성옥(), 해남현감 유형(), 진도군수 선의문(), 강진현감 송상보() 등 5명이 조총에 부상을 입었고, 사도첨사 황세득()과 군관 이청일() 등 2명은 전사하였다. 수병도 29명이 전사하였다.

왜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지난 8월 18일 횡사하였으므로, 철수하려 했다. <선조실록()>(권 103, 선조 31년 8월 19일(임신())에 의하면 “경상우수사 이순신()의 비밀 장계()가 왔다. 일본으로 잡혀갔다가 도망쳐 나온 사람이 말하기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7월 초에 병사했으므로, 흉적()이 장차 철수하기를 원한다.’고 했다.”

고니시 유키나카 등 왜군들은 빨리 철수할 것을 바라고 있었고, 이순신은 석 달이 지난 11월 8일 예교성에 있는 왜적들이 10일 안으로 탈출하려 한다는 소식을 명나라 유정()에게서 받았다. 이순신은 도망가는 왜적을 한 척도 돌려보내지 않을 비장한 각오로 11월 9일 고금도()를 떠나, 11월 11일 다시 유도에 도착하여 예교에 있는 왜적이 도망갈 길을 차단하였다. 이틀 뒤 왜적선 10여 척이 근처의 장도에 나타났다가, 이순신 함대의 추격을 피해 예교 가까운 포구인 신성포()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군은 종일 예교 앞에서 왜적을 유인하기도 하고, 바짝 압박을 가하기도 하면서 해상 봉쇄선을 장도까지 확장하였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던 왜군은 부하 8명을 통해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에게 돼지와 술 등 뇌물을 바치고 도망갈 길을 터 달라며 교섭을 시작했다. 진린은 손쉬운 전공을 세우려는 탐욕을 가졌음직 하나 이순신의 강경한 반대에 부딪혀 그들의 의도를 성사시키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1598년 11월 17일 저녁, 예교성에 갇힌 왜군은 횃불 신호로 남해 등지에 있는 그들의 아군에게 알리었다. 이에 호응하는 횃불이 여기저기서 보였다. 고성에 있는 다치바나(), 사천에 있는 시마즈(), 남해에 있는 무네() 등이 모두 노량 바다로 집결하여 고니시를 구출하고, 일본으로 되돌아갈 최후의 전투를 감행할 작정이었다. 이순신 역시 최후의 결전을 할 요량이었다. 이순신은 18일 밤 자정이 되자, 문득 대야에 깨끗한 물을 떠와 손을 씻었다. 혼자 갑판 위로 올라가 무릎을 꿇고, “이 원수 놈들을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고 하늘에 빌었다.(<이충무공전서()> 권() 9 부록() 31쪽「행록())

아무튼 이순신은 왜적선이 무수하게 이동한다는 정보에 명나라 수군을 지휘하여 11월 18일 밤 10시에 출항, 노량 앞 바다로 이동하였으며, 11월 18일 밤부터11월 19일까지 이틀 간 밤을 새가며 싸웠다. 11월 19일 새벽 2시쯤 아군 연합 함대는 왜적의 선단이 몰려오는 노량바다로 나아가고 있었다. 왜군이 새벽 4시 노량을 거쳐 관음포() 앞 바다에서 이르자, 이순신은 요격전()을 벌였다. 우리 수군은 전선 83척, 수군이 1만 7,000여 명이고, 명나라 수군은 전선 63척, 수군 2,600명이었다.

왜적의 병력은 대선 500여 척, 수군 6만여 명이었다. <선조실록()>(선조 31년 11월 27일 도체찰사 이덕형의 장계)에 의하면 “적선이 3백여 척”이라고 하였지만, <이충무공전서()>권 9 부록 1「행록」과 <선묘중흥지()>에는 “적선이 5백여 척”이라 하였으며, <선조실록>(선조 31년 11월 24일)에는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이 군문 형개에게 보고한 바에 따르면, 적선 100척을 나포하고 200척을 불태웠으며, 참수 500급, 생포 180여 명, 익사자는 아직 물위에 떠오르지 않아 알 수 없으며, 이총병(이순신)이 죽었다.”고 되어 있다.

이날 새벽 아군은 적들이 모르게 비밀리에 전진하였다. <명사()>에서 본 노량 관음포 해전의 기록을 살펴보면, “1598년 11월 가토 기요마사()가 배를 내어 먼저 달아났다. 마귀()는 드디어 도산(), 유포()에 들어갔고, 유정()은 예교를 공격하여 탈환하였다. 석만자가 수군을 이끌고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원하려 하자, 진린이 이를 맞아 쳐부수어 패배시켰다. 여러 곳의 왜군이 돛을 달고 모두 돌아갔다. 왜가 조선을 어지럽힌 지 7년 동안 잃은 군사가 수십만이나 되고, 소모한 군량이 수백만이나 되었다. 중앙의 조선과 그 속국들은 이길 가망이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도 관백()이 죽고서야 전쟁이 비로소 종식되었다.”라고 되어 있다.(<명사()>(권320「열전()」제208 외국() 1 조선) 여기서는 진린의 역할로 왜적선을 패배시킨 것으로 나타나 있으나 이순신의 역할이 가장 핵심이 됨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이순신 전사와 해전 마무리
마지막 전장()은 도산(), 유포(), 예교()가 있는 곳이다. 이 최후의 전쟁은 이순신이 순국하였으므로 이순신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기록한 <행록()>, <행장()>, <비문()>, <실록()> 및 모든 사료()를 종합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날 새벽 조() 명() 연합 함대는 좌우로 편을 갈라 행진했다. 그리고 이순신은 포구와 섬들마다 복병을 배치하여 적을 대비하도록 해가며 진군했다. 사천에 웅거하고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 등의 왜적들은 500여 척을 이끌고, 경상도 사천으로부터 남해 노량 사이에 있는 광주양()을 지나 곧장 노량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때, 조선 수군들은 대적선의 항로 전방인 죽도와 관음포 사이에 배치되었고, 명나라 수군은 죽도 북쪽에 매복하였다. 왜적선이 노량 수로를 지나 관음포 앞바다로 다가왔을 때, 우리 수군들은 좌우에서 번개처럼 나타나 일시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에 당황한 적들은 모였다 흩어졌다 하면서 갈팡질팡하다가는 이윽고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우리 수군에게 대항해 왔다. 그러자 우리 수군들은 적선에 근접하여 불붙는 땔감()을 마구 던져 적의 배들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적들은 날이 새기 시작할 무렵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관음포()로 도망을 치기 시작하였다.

왜적선들은 이 바다에서 싸우다가 남해 관음포로 쫓겨 들어갔다. 거기엔 밖에서 보면 마치 툭 트인 바다요, 수로 같이 보이지만, 돌아서기만 하면 바다가 막혀 달아날 길이 없는 곳이다. 왜적선들은 다시 돌아서서 대항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순신은 앞장서서 전군을 지휘했다. 북을 힘차게 치게 했다. 쥐새끼도 쫓기다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 돌아서서 고양이에게 달려들 듯이, 왜적선은 이순신의 배를 목표로 겹겹이 에워싸며 최후 발악으로 달려들었다. 이순신은 자못 위험해졌다. 이와 같은 상황을 본 진린은 포위망을 뚫고 들어와 이순신을 구해냈다. 이 때 진린의 배가 적선에게 포위되어 위급하게 되었다. 이순신은 적의 장수 세 명이 층각선()에 앉아 전투를 지휘 독려하고 있는 것을 보고 총과 화살을 그쪽으로 집중 사격하게 하여 그 중 한 명을 사살하였다. 이것을 본 적들은 자기 장수들을 구원해 내기 위해 진린의 배에서 포위망을 풀고 그 쪽으로 몰려갔기 때문에 진린은 위급함을 면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순신과 진린은 다시 힘을 다하여 호준포를 쏘아 적선을 계속 깨뜨렸다.

아군은 오전 10시경 이순신이 전사하자, 그의 명에 따라 죽음을 극비에 붙이고 곡도 하지 않았으며, 변함없이 독전기를 흔들며 지휘하였다. 유형( : 해남현감)과 송희립( : 이순신 전속부관)도 적탄에 맞았으나 잠시 기절했을 뿐, 다시 일어나 상처를 싸매고 싸웠다고 한다. 정오에 왜적을 크게 무찔렀으며, 적선 200여 척을 불태웠다. 적병은 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고, 살아남은 자들도 포로로 잡히거나 목 베여 죽는 등 대부분 전사하였다. 시마즈 등은 겨우 50척을 거두어 도망쳤다. <선묘중흥지()>(권)에 의하면 고니시 유키나가는 그 틈을 타서 묘도( : 여천군 삼일면 묘도)의 서쪽 해협을 통과하여 몰래 남쪽 외양()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우리 연합군의 맹렬한 공격은 쉬지 않았다. 이순신의 지휘 하에서 깨진 적선의 수만도 200여 척에 달하고 있었다. 적들은 패전의 빛이 짙어지자 관음포 앞을 벗어나 남쪽으로 도망칠 빛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적선 1척도 돌려보내지 않으려는 이순신은 스스로 앞장을 서서 달아나는 적의 뒤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북을 더 힘차게 두들기게 하여 군사들의 사기를 돋우었다. 바로 이때였다. 적의 탄환이 이순신의 왼쪽 가슴을 맞히고 겨드랑이를 관통하여 나갔다.

고니시는 경남 사천()에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와 남해의 소시라노부[調]에게 구원을 청하여 전선 500여 척을 노량 앞바다에 집결시켰다. 그러자 이순신은 휘하 장병에게 진격 명령을 내려 노량 앞바다로 쳐들어가 적선 50여 척을 격파하고 200여 명의 적병을 죽였다.

이때 왜군은 이순신을 잡을 목적으로 그를 포위하려 하였으나 도리어 진린의 협공을 받아 관음포() 방면으로 후퇴하였다. 이순신은 적선의 퇴로를 막고 이를 공격하여 격파하는 동시에 적에게 포위된 진린도 구출하였다.

이 해전에서 400여 척의 전선을 격파당한 왜군은 남해 방면으로 도망쳤는데, 이순신은 이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추격하였다. 이 추격전에서 이순신은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순신은 죽는 순간까지 자기의 죽음을 알리지 말고 추격을 계속하여 적을 격파하라고 유언했기 때문에, 조선군은 왜군을 격파한 후에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들었다. 이 추격전에서 왜군은 다시 50여 척의 전선이 격파당하고 50여 척의 남은 배를 수습하여 도망쳤다. 이 전투에서는 이순신 외에도 명나라의 등자룡(), 조선 수군의 가리포첨사(使이영남(), 낙안군수(방덕룡(), 흥양현감() 고득장() 등이 전사하였다. 이 전투의 승리는 7년간 계속되었던 조선과 일본과의 전쟁을 끝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597년 재침한 왜군은 그 해 9월 명량해전()에서 패배한 데 뒤이어 육전에서도 계속 고전하였다. 다음 해 8월 도요토미()가 병사하자, 왜군은 순천 등지로 집결하면서 철수작전을 서둘렀다.

이 소식을 접한 이순신은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과 함께 1598년 9월 고금도() 수군 진영을 떠나 노량 근해에 이르렀다. 명나라 육군장 유정()과 수륙합동작전을 펴 왜교()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 고니시(西)의 부대를 섬멸하기 위함이었다.

그 때 고니시는 수륙 양면으로 위협을 받게 되자 진린에게 뇌물을 바치고, 퇴로를 열어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진린은 고니시가 마지막으로 요청한 통신선 1척을 빠져 나가게 하고, 이순신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고니시는 통신선으로 사천() 등지의 시마쓰()와 연락해 남해·부산 등지에 있는 왜군 수군의 구원을 받아 조·명 연합수군을 협공하면서 퇴각하려는 생각이었다. 그러한 고니시의 전략을 잘 알고 있는 이순신은 진린을 꾸짖고 함께 진형을 재정비해 왜군을 맞아 격멸하기로 하였다.

11월 18일 밤 이순신의 예견대로 노량 수로와 왜교 등지에는 500여척의 왜선이 집결해 협공할 위세를 보였다. 200여척의 조·명 연합수군을 거느린 이순신은 “이 원수만 무찌른다면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고 하늘에 빌고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19일 새벽, 싸움은 막바지에 이르고 이순신과 진린은 서로 위급함을 구하면서 전투를 독려하자 왜의 수군 선박 200여척이 불에 타 침몰하거나 파손되고 100여 척이 이순신함대에 나포되었으며 나머지 패잔선들이 관음포 쪽으로 겨우 달아났다.

이순신은 같은 날 오전 관음포()로 도주하는 마지막 왜군을 추격하던 중 총환을 맞고 쓰러지면서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세계사상 길이 빛나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이 해전에서 명나라 장수 등자룡()과 가리포첨사(使) 이영남(), 낙안군수() 방덕룡() 등이 전사하였다. 한편, 순천 왜교에서 봉쇄당하고 있던 고니시의 군사들은 남해도 남쪽을 지나 퇴각해 시마쓰의 군과 함께 부산에 집결, 철수했다. 노량해전을 끝으로 정유재란은 막을 내렸다.


11월 19일 새벽(4시경)이 되자 조.명 연합 수군은 왜 적선에 대하여 일제히 포격을 가하면서 요격을 하였다. 노량. 관음포에서 왜 수군과 조.명 연합수군 사이에 격전이 벌어졌다.

조. 명 연합 수군은 1598년 11월18일 밤에 명량 앞 바다에서 왜 수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노량 앞 바다에 방어진을 쳤다.

노량해전에서 적선 200 여 척을 당파 또는 분멸했다. 왜선 50 여 척과 소서행장은 도망해 갔다. 조선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이 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로써 임진년에 조선을 침략하였던 왜군은 조선 땅에서 패전을 거듭한 나머지 모두 도망가 버렸고 임진왜란 전쟁은 이렇게 하여 끝났다.

정유재란 때인 1598년(선조 31) 11월 18일부터 19일 이틀 사이에 이순신()과 진린()이 이끄는 조·명 연합함대가 노량(경상남도 남해도와 하동 사이의 해협) 앞바다에서 왜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 임진왜란 중 바다에서의 마지막 싸움이며, 이순신이 승리와 함께 전사한 해전이다. 1597년 재침한 왜군은 그 해 9월 명량해전()에서 패배한 데 뒤이어 육전에서도 계속 고전하였다. 다음 해 8월 도요토미()가 병사하자, 왜군은 순천 등지로 집결하면서 철수작전을 서둘렀다. 이 소식을 접한 이순신은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과 함께 1598년 9월 고금도() 수군 진영을 떠나 노량 근해에 이르렀다.

명나라 육군장 유정()과 수륙합동작전을 펴 왜교()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 고니시(西)의 부대를 섬멸하기 위함이었다. 그 때 고니시는 수륙 양면으로 위협을 받게 되자 진린에게 뇌물을 바치고, 퇴로를 열어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진린은 고니시가 마지막으로 요청한 통신선 1척을 빠져 나가게 하고, 이순신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고니시는 통신선으로 사천() 등지의 시마쓰()와 연락해 남해·부산 등지에 있는 왜군 수군의 구원을 받아 조·명 연합수군을 협공하면서 퇴각하려는 생각이었다.

그러한 고니시의 전략을 잘 알고 있는 이순신은 진린을 꾸짖고 함께 진형을 재정비해 왜군을 맞아 격멸하기로 하였다. 19일 새벽, 싸움은 막바지에 이르고 이순신과 진린은 서로 위급함을 구하면서 전투를 독려하자 왜의 수군 선박 200여척이 불에 타거나 부서지고 패잔선 50여척이 겨우 달아났다. 이순신은 관음포()로 도주하는 마지막 왜군을 추격하던 중 총환을 맞고 쓰러지면서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세계사상 길이 빛나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이 해전에서 명나라 장수 등자룡()과 가리포첨사(使) 이영남(), 낙안군수() 방덕룡() 등이 전사하였다. 한편, 순천 왜교에서 봉쇄당하고 있던 고니시의 군사들은 남해도 남쪽을 지나 퇴각해 시마쓰의 군과 함께 부산에 집결, 철수했다. 노량해전을 끝으로 정유재란은 막을 내렸다.


해전의 복원

‘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 ‘각선도본’, ‘난중일기’, 임짐장초‘, ’이충무공전서‘, ’호좌수영지‘, ’조선삼도수군조련전진도‘, ’조선왕조군선연구‘, ’한국수군사연구‘,’이순신전사연구‘, ’한국의 배‘, ’충무공이순신전집‘, ’정한록’, ‘조선역수군사’ 등을 참고로 하고 최두환 교수의 고증과 최두환 교수의 논문 등을 참조하여 복원(도면) 하였다


노량해전 본문 이미지 2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문의리에 있는 나루터.

현재 남해대교가 놓여 있는 부근 일대를 말한다. 이곳은 예로부터 하동군 금남면과 남해군 설천면 사이를 잇는 나루터로 발달한 곳이며, 국립공원인 한려수도의 일부를 이루면서 여객선과 어선의 왕래가 많은 곳이다.

특히 임진왜란 때 삼대첩지()의 하나로 알려진 곳으로서 1598년(선조 31) 이순신()이 명나라 진린()과 함께 퇴각하려는 적을 필사적으로 쫓다가 적의 유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한 곳이다. 7년간 끌어온 싸움이 사실상 이곳에서 끝이 났다. 여기에 이순신을 추모하여 세운 충렬사()가 있다.

노량나루, - , Noryangnaru.

경상남도 남해군의 북쪽 설천면에 있는 나루이다. 약 400년 전에 이미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하니 현의 관문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노량이 "현의 북쪽 40리에 있다."라는 기록이 나타난다. 『여지도서』에 "현의 북쪽 38리에 있다."라고 수록되어있다. 『남해현읍지』에는 "현의 북쪽 37리에 있으며 곤양과 인접하여 경계를 이루며 진선() 1척이 있다."라는 내용이 있다. 『해동지도』에 충렬사와 함께 바닷가에 노량진으로 기재되어 있다.


조선 중엽 노량원은 곤양방면의 나루터로 노량진이라 불렀다. 남해현으로 귀양 오는 선비들이 바다를 건너는데 이슬방울처럼 작은 도선이 다리 역할을 한다 해서 노량이라 이름 한 것이라 하였다. 또한 일설에는 도선을 내리자마자 뒤돌아보니 다리는 이슬방울처럼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 데서 붙여진 것이라 한다.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와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 사이를 잇는 우리나라 최초의 현수교인 남해대교가 1973년에 개통되었다. 충렬사가 있는 유서 깊은 마을이며 남해대교가 건설되면서 관광지로 더욱 유명한 곳이 되었다. 

옛지명은 한동군 소속하에있었다.

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징비록(懲毖錄)』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선묘중흥지(宣廟中興志)』

『日本戰史朝鮮役』(香月鍈一, 財團法人偕行社, 1924)

노량 [露梁]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노량해전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한국의 배), 2002., 한국콘텐츠진흥원) 

노량나루 [露梁-, Noryangnaru] (한국지명유래집 경상편 지명, 2011.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