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웅
신화
환웅(桓雄)은 신시(神市)라 불리기도 한다.
그는 환인(桓因)의 명을 받아, 혼돈의 세상을 갈라서 세상을 만들었다.
천부의 인(印) 세 가지를 갖고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데리고 태백산(지금의 백두산. 일설에는 중국의 태산(泰山) 혹은 돈황(燉煌))에 내려왔다.
태백산의 박달나무 아래에서 임금으로 추대되어 신시씨가 되었다.
치우(蚩尤)에게 명하여 사나운 짐승과 독충을 다스리게 하고, 고지(高矢)에게 명하여 곡식을 주관하도록 했다.
신지(神誌)에게 명하여 글자를 짓도록 하고 주인(朱因)을 시켜 혼례법을 만들게 했다.
역리(易理)의 기본법칙을 만들었으며, 중국의 복회, 수인과 동시대 사람이라고 한다.
웅녀(熊女)와 혼인하여 단군(檀君)을 낳았다고 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환웅, 천왕(天王), 신웅(神雄) 등으로, 『제왕운기(帝王韻紀)』에는 웅, 단웅천왕(檀雄天王)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음은『삼국유사』기이(紀異)편 ‘고조선’ 항목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옛날 환인의 서자(庶子 : 장남이 아닌 차남 이하의 아들을 말함) 환웅이 자주 세상에 내려가 인간 세상을 구하고자 하므로 아버지가 환웅의 뜻을 헤아려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어 세상에 내려가 사람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이 무리 3,000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꼭대기의 신단수(神壇樹) 밑에 내려와 그곳을 신시(神市)라 이르니 그가 곧 환웅천왕이다.
그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穀), 명(命), 병(病), 형(刑), 선(善), 악(惡) 등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맡아서 세상을 다스렸다.
이 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있어 같은 굴속에 살면서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빌었다.
환웅은 이들에게 신령스러운 쑥 한 줌과 마늘 20쪽을 주면서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된다고 일렀다.
곰과 범이 이것을 받아서 먹고 근신하였는데 3․7일(21일) 만에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범은 이것을 못 참아서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웅녀(熊女)는 그와 혼인해 주는 이가 없으므로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가지게 해 달라고 기원하였다.
이에 환웅이 잠시 변해 혼인하여 아이를 낳으니 그가 곧 단군왕검(壇君王儉)이다.
왕검이 당고(唐高 : 堯임금) 즉위 후 50년인 경인(庚寅 :
당고의 즉위년은 戊辰이므로 50년은 丁巳요 경인이 아니니 틀린 듯함)에 평양성(平壤城)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일컬었다.
도읍을 백악산(白岳山)의 아사달로 옮겼는데 그 곳을 궁홀산(弓忽山) 또는 금미달 (今彌達)이라고도 하였다.
단군은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고 주(周)나라 호왕(虎王 : 주나라의 武王)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箕子)를 조선의 임금으로 봉하였다.
단군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에 돌아와 숨어서 산신이 되니 나이가 1,908세였다.
『삼성기(參星旗)』 전 상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우리 환(桓)의 건국은 세상에서 가장 오랜 옛날이었는데 한 신이 있어 시베리아의 하늘에서 홀로 변화한 신이 되시니 밝은 빛은 온 우주를 비추고 큰 교화는 만물을 낳았다.
오래오래 살면서 늘 쾌락을 즐겼으니 지극한 기(氣)를 타고 노닐고 그 묘함을 저절로 기꺼웠다.
모습없이 볼 수 있고 함이 없으면서 모두 이루고 말 없으면서 다 행하였다.
어느 날인가 동녀동남(童女童男) 800이 흑수(黑水) 백산(白山)의 땅에 내려왔는데 이에 환인은 또한 감군(監群)으로서 천계(天界)에 계시면서 돌을 쳐 불을 일으켜서 날음식을 익혀 먹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치셨다.
이를 환국(桓國)(하느님나라)이라 하고 그를 가리켜 천제환인(天帝桓因)이라고 불렀다. 또한 안파견(安巴堅)이라고도 했다.
환인은 일곱 대(代)를 전했는데 그 연대는 알 수가 없다.
뒤에 환웅씨가 계속하여 일어나 천신의 뜻을 받들어 백산과 흑수 사이에 내려왔다.
사람 모이는 곳을 천평(千坪)에 마련하고 그곳을 청구(靑邱)로 정했다. 천부(天父)의 징표를 지니시고 다섯 가지 일을 주관하시며 세상에 계시면서 교화를 베푸시니 인간을 크게 유익하게 하였더라.
신시(神市)에 도읍을 세우시고 나라를 배달(倍達)이라 불렀다.
3, 7일을 택하여 천신께 제사지내고 밖의 물건을 꺼리고 근신하며, 문을 걸어 잠그사 스스로 주문을 외우며 몸을 닦아 공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더라. 약을 드시고 신선이 되시니, 팔괘를 그으사 올 것을 알며 상(象)을 잡으사 신을 움직였다.
여러 염험스러운 이들과 뭇 철인들이 보필하도록 하시더니 웅씨의 여인을 거두어 아내로 삼으시고 혼인의 예법을 정하매, 짐승 가죽으로써 폐물을 삼았다.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고 시장을 열어 교환하도록 하니, 온 세상이 조공을 바치며 새와 짐승도 덩달아 춤추었다.
뒷날 사람들은 그를 지상 최고의 신이라고 받들어 세세토록 제사가 끊임이 없었다.
『삼성기』 전 하편에서는 이런 기록도 있다.
인류의 조상을 나반(那般)이라 한다.
처음 아만(阿曼)과 서로 만난 곳은 아이사타(阿耳斯它)라고 하는데 꿈에 천신의 가르침을 받아서 스스로 혼례를 이루었으니 구환(九桓)의 무리는 모두가 그의 후손이다.
옛날 환국이 있었나니 백성은 부유하였고 또 많았다.
처음 환인께서 천산(天山)에 올라 도를 얻으시사 오래오래 사셨으니 몸에는 병도 없었다.
하늘을 대신해서 널리 교화하시니 사람들로 하여금 군대를 동원하여 싸울 일도 없게 하였으며, 누구나 힘껏 일하여 주리고 추위에 떠는 일이 없게 되었다.
다음에 혁서 환인, 고시리 환인, 주우양 환인, 석제임 환인, 구을리 환인에 전하고 지위리 환인에 이르더라. 환인은 혹은 단인(檀仁)이라고도 말한다.(중략)
환국의 말기에 안파견이 밑으로 삼위(三危)와 태백(太白)을 내려다보시며 ‘모두 가히 홍익인간(弘益人間)할 곳이로다’ 하시며 누구를 시킬 것인가 물으시니 오가(五加) 모두 대답하기를 ‘서자(庶子) 환웅이 있어 용맹함과 어진 지혜를 함께 갖추었으며 일찍이 홍익인간의 이념으로써 세상을 바꿀 뜻이 있었사오니 그를 태백산에 보내시어 이를 다스리게 함이 좋겠습니다’하니 마침내 천부인 세 가지를 내려주시고 이에 말씀을 내려, ‘사람과 물건의 할 바가 이미 다 이루어졌도다.
그대 수고로움을 아끼지 말고 무리 3,000을 이끌고 가 하늘의 뜻을 열고 가르침을 세워 세상에 있으면서 잘 다스려서 만세(萬世)의 자손들에게 큰 모범이 될지어다’라고 하셨다.
이에 환웅이 3,000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 밑에 내려오시니 이곳을 신시라 하고 이분을 환웅천왕이라 한다.
풍백, 우사, 운사를 데리고 곡식을 주관하고, 생명을 주관하고, 형벌을 주관하며, 병을 주관하고, 선악을 주관하며,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모두 주관하여 세상을 교화하였으니 널리 인간 세상에 유익함이 있었다.
한 곰과 한 범이 이웃하여 살더니 일찍이 신단수에서 빌었다.
‘원컨대 변하여 신계(神戒)의 한 무리가 되어지이다’하니, 환웅이 이를 듣고 말하기를, ‘가르쳐줄지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주술로써 몸을 바꾸고 정신을 바꾸었다.
먼저 신이 만들어 놓은 영혼을 고요하게 하는 것을 내놓았으니 즉, 쑥 한 다발과 마늘 스무 개라. 이에 경계하여 가로대 ‘너희들 이를 먹고 햇빛을 백 일 동안 보지 않으면 쉽사리 인간다움을 얻으리라’하니, 곰과 호랑이의 두 무리가 모두 이를 얻어먹고 삼칠일 동안 기(忌)하였는데 곰은 기한을 잘 지켜서 타이름을 따르매 모습을 얻게 되었지만, 범은 게으르고 참을성이 없어서 금지하는 바를 제대로 실행하지 못하니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이는 이들의 두 성질이 서로 닮지 않았기 때문이라. 웅녀는 더불어 혼인할 곳이 없었으므로 단수(壇樹)의 무성한 숲 밑에서 잉태하기를 간곡히 원하였다.
그래서 임시로 변화하여 환(桓)이 되고 그와 더불어 혼인하니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호적에 실리게 되었다.
환웅천왕이 처음으로 몸소 하늘에 제사지내고 백성을 낳아 교화를 베풀고 천경(天經)과 신고(神誥)를 가르치시니 무리들이 잘 따르게 되었다.
이로부터 후에 치우천황이 땅을 개간하고 구리와 쇠를 캐내서 군대를 조련하고 산업을 일으켰다.
2. 환웅신화에 대한 해석
일부 학자들은 환웅을 천제인 환인의 아들, 즉 신이라고 그대로 믿기 보다는 농경민족을 대표하는 인물이었을 것으로 이해한다.
이들의 주장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환웅은 사람 되는 길을 가르쳐 준다.
쑥과 마늘을 먹으며 햇빛을 보지 않고 동굴 속에서 백일을 견디라고 한다.
그것은 신이 준 금기이자, 지켜야 할 규범이다. 인격이 되기 위해 동물격이 거쳐야 할 일종의 통과의례이다.
단군신화에서 그리는 이상 사회는 곡채식을 하는 농본국이다. 농경생활을 위해서는 집을 짓고 정착생활을 해야 한다.
곰과 범으로 등장하는 동물들은 짐승을 잡아먹는 육식 또는 육식을 겸하는 초식동물로서 늘 떠돌아다닌다.
수렵민이나 유목민의 생활과 같다. 그래서 범과 곰은 각각 범토템족과 곰토템족을 상징한다고들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환웅은 농경생활을 하는 천신족을 상징하게 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농경생활을 이상으로 삼으며 그 쪽을 향하여 나아가는 단계에 있는 초기농경시대의 부족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단군신화와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무씨사당(武氏祠堂)의 벽화를 보면 청동기시대 초기의 유이민 사회가 농경보다는 목축을 기반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무씨사당 벽화를 분석한 김재원의 견해인데, 우리 민족이 북쪽에서부터 이 신화를 가지고 도래한 유이민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단군신화의 구체적 표현과 문맥을 통해서 볼 때, 그리고 무씨사당이 있는 중국 산동성에서 유이민들이 한반도까지 서서히 이주해 와서 정착하기까지의 시간적 경과로 볼 때, 반드시 무씨사당의 그림처럼 목축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리라고 보기 어렵다.
그것은 변화나 발전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이다.
무씨사당의 벽화와 다르게 단군신화에서는 범이 아닌 곰이 단군을 낳는 것으로 이야기가 크게 변화한 것처럼, 한반도에 들어오면서 산동 지역의 목축생활이 농경생활로 상당히 이행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단군신화를 전승하는 주체들은 어느 정도 목축생활을 하는 가운데 농경생활을 지향하며 초기농경생활로 발전한 상태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온당하겠다.
토착세력인 범토템족과 곰토템족들은 아직 이런 문화적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곰과 범이 일정한 수련 없이 갑자기 사람이 되어서는 인간 사회에 적응할 수 없듯이, 수렵민족이나 유목민족이 생활양식을 일시에 바꾸어 곡채식을 하는 농경민족의 정착생활을 쉽게 감당할 수 없다.
천신족으로 상징되는 환웅이 두 동물을 대상으로 쑥과 마늘을 준 뒤, 이를 먹고 견디게 하고 캄캄한 동굴 속에서 햇빛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인격적인 생활 또는 농경민의 생활을 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여부를 판별하기 위함이다.
그러한 과제는 인간적 삶의 수양이자 삶의 방식을 바꾸는 적응력의 검증 과정이기도 하다.
순전히 육식만 하는 수렵민족들은 식성과 정착생활이 다 맞지 않다.
너무 격차가 커서 참지 못하고 뛰쳐나갈 수밖에 없다.
먹이를 쫓아 날렵하게 움직이는 범에게 한 곳에 눌러앉아서 땅을 파먹고 살기를 요구하는 것은 지나치다.
정착생활에 적응하는 데 실패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곰은 육식뿐만 아니라 초식도 한다.
겨울이면 굴속에서 오랫동안 칩거도 할 수 있다. 유목민들도 그러하다.
수렵민들과 달리 어느 정도 곡채식을 하며 얼마간 정착생활도 한다.
유목민들은 농경생활을 다소 겸하기도 하므로 농경민으로 적응할 수 있는 역량이 상당히 갖추어져 있다.
곰이 범과 달리 사람으로 변신하고, 곰토템족이 천신족과 함께 농경생활을 하며 정착할 수 있었다.
두 동물이 사람으로 비약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하는 것은 사람과 동물 사이의 식성과 생활방식의 변별성을 드러낸 것이자,
인간 존재의 품격을 설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적어도 인간이 되려면 신격이 정해 준 규범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신이 정한 규범은 원초적으로는 자연의 이치이지만 문화적으로는 도덕률에 해당된다.
사람들이 신을 섬기고 따르는 것은 자연의 운행과 이치에 순응하며 변화무쌍한 자연 현상을 순조롭게 되돌리기 위한 것인 한편, 신의 뜻을 가치의 기준으로 삼고 이를 통해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신의 뜻이 사람 사회를 바르게 이끌어가는 도덕적 기준이 된다고 믿는 까닭이다.
사람의 마음과 행동거지를 바르게 틀지워 주는 것의 하나가 신의 존재이다. 신이 늘 지켜보고 있다는 신성의 인식이나 지키기 않으면 징벌을 받는다고 여기는 종교적 계율이 인간의 타락을 막아 주고 선한 마음가짐을 지속적으로 가지게 하는 중요한 장치가 된다.
동물들은 사람과 달리 거의 본능적으로 움직인다.
그러한 본능은 먹이활동을 통해서 두드러진다.
사람은 식문화가 있어 동물처럼 본능적으로 먹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식생활에서 지켜야 할 여러 가지 규범이 있어 이런 규범을 지키지 못하면 사람대접을 받을 수 없다. 주거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제멋대로 머물지 않는다.
한정된 공간에 정해진 생활방식에 따라 주거생활을 한다.
결국 신의 말씀을 따르는 도덕성을 갖추고 본능을 자제하며 규범을 지킬 줄 아는 문화적 역량이 있어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다.
환웅의 말을 따라 금기를 제대로 지킨 곰은 그러한 도덕적, 문화적 자질을 두루 갖추었으므로 인격으로 비약하게 된 것이다.
단군신화에서는 신과 인간, 동물이 더불어 등장한다.
그러면서 삼자 사이에 상호 이동이 가능하다. 신도 사람 세상에 뜻을 두면 인간이 될 수 있다.
동물이라도 정해진 규범을 온전하게 지키는 도덕성과 본능적 욕망을 자제할 줄 아는 문화적 역량을 지니면 인간으로 비약할 수 있다.
정해진 금령을 깨뜨리는 순간 범은 홍익인간의 세상에서 추방되었다.
범처럼 규범을 지키지 않는 이는 성취를 이루지 못하고 곰처럼 묵묵히 규범을 지킨 사람만이 성취를 이루는 세상이 바로 홍익인간의 세상이다.
3. 환웅과 환인, 단군
옛날 환인의 서자(庶子 : 장남이 아닌 차남 이하의 아들을 말함) 환웅이 자주 세상에 내려가 인간 세상을 구하고자 하므로 아버지가 환웅의 뜻을 헤아려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어 세상에 내려가 사람을 다스리게 하였다.
단군신화의 처음 부분은 하늘의 신들이 인간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고, 인간 세상을 다스리는 이상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대목이다.
여기 등장하는 환인제석(桓因帝釋) 또는 환인천제(桓因天帝)는 인간 세상과 연결되어 있는 하늘의 최고신 곧 ‘하느님’을 일컫는 말이자, ‘환인’의 어감으로 보아서 ‘환’한 빛의 세계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환인’은 하늘과 빛의 뜻을 지닌 가장 신성한 존재를 일컫는 우리말 이름을 비슷한 발음의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환인’은 하느님이라는 우리말 소릿값에 가까운 한자를 찾아 이두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그리고 ‘제석’이나 ‘천제’는 하느님이라는 우리말의 뜻을 지닌 한자말을 그대로 표기한 한문식 표현이다.
‘제석’은 불교적 세계관에서 인간을 다스리는 최고의 하늘인 제석천(帝釋天)의 신격으로서 최고의 천신이며, ‘천제’는 천제석(天帝釋)의 약자로서 제석을 뜻하기도 하지만 한자 문화권에서 하느님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환인’은 하늘과 빛의 뜻을 지닌 가장 신성한 존재를 일컫는 우리말 이름을 비슷한 발음의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환인’은 하느님이라는 우리말 소릿값에 가까운 한자를 찾아 이두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그
리고 ‘제석’이나 ‘천제’는 하느님이라는 우리말의 뜻을 지닌 한자말을 그대로 표기한 한문식 표현이다.
‘제석’은 불교적 세계관에서 인간을 다스리는 최고의 하늘인 제석천(帝釋天)의 신격으로서 최고의 천신이며, ‘천제’는 천제석(天帝釋)의 약자로서 제석을 뜻하기도 하지만 한자 문화권에서 하느님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삼국유사』에서는 ‘환인’이라는 명칭 다음에 협주로 ‘제석이라고 이른다’고 하여 이중명칭의 양식을 분명히 밝혀 놓고 있다.
『삼국유사』의 표기법이 한문 문법에 맞지 않는 독자성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때로는 이두식 표기가 있듯이, 한문으로 적절하게 나타낼 수 없는 우리말의 묘미를 살리거나 우리말의 소릿값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환인’이라는 우리말 소릿값과 하느님의 개념을 나타내는 ‘제석(천제)’이라는 한자말을 함께 쓴 것이다.
환웅천왕과 단군왕검에 대해서는 별도로 이중명칭 양식을 언급하지 않았는데, 이는 환인제석의 전례를 따른 때문이다.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3대 주인공인 ‘환인제석(천제)’과 ‘환웅천왕’, ‘단군왕검’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중복표기 가운데 앞의 명칭인 ‘환인’과 ‘환웅’, ‘단군’은 우리말의 소릿값에 해당되는 한자를 골라 소리나는 것과 가깝게 표기한 것이라면, ‘제석’과 ‘천왕’, ‘왕검’은 이들 세 인물의 위상과 지위를 우리말 뜻에 맞게 한자말로 표기한 것이다.
환인과 환웅 또는 단군을 고유명사처럼 인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하겠다.
천제와 천왕 곧 하느님과 그 아들을 일컫는 옛 우리말이 ‘환인(환님, 하느님)’과 ‘환웅(화눙, 하늘)’의 소릿값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인간 세상의 군장 곧 왕(왕검)을 일컫는 고대의 우리말이 ‘단군’ 또는 ‘단굴’, ‘단골’에 가까워서 ‘단군왕검’으로 이중표기를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단군의 수명을 1,908세라고 한 사실도 고조선을 건국한 개인의 고유명사인 단군의 나이라고 이해하기보다는 단군이라는 왕의 호칭을 쓴 역사가 약 2천 년 정도 된다고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환웅은 환인천제인 하느님의 아들이다.
물론 하느님의 유일한 아들이 아니라 서자(庶子)라고 한 걸 보면 여러 아들 가운데 한 아들이다.
사람의 아들이 사람이듯이 신의 아들 역시 신이다. 환인과 환웅은 초월적인 신격이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환인은 하늘 세계의 왕으로서 하느님이지만 그 아들인 환웅은 천제일 수 없다.
신들 사이에도 위상이 있으므로, 신이라고 하여 모두 천제일 수 없고 여러 신들 가운데 한 분만이 천제일 따름이다.
만일 하늘의 여러 신들이 일정한 세계를 다스려 보고 싶은 뜻이 있다면 하늘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를 택해야 그 세계의 왕이 될 수 있다.
환웅이 인간 세상에 뜻을 두었던 까닭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그 결과 환웅은 지상에 내려와 환웅천왕이 된다.
환웅천왕도 환인제석과 같은 양식의 이중명칭이다.
우리말의 소리를 살린 ‘환웅’은 천제(天帝)와 달리, ‘하느님’이 아닌 ‘하늘’을 나타낼 뿐이며, 한자말의 뜻대로 표기한 ‘천왕(天王)’ 또한, ‘제석(帝釋)’이나 ‘천제’와 같이 제석천의 천신이거나 하늘의 제왕이 아니라, 사천왕천의 사천왕을 나타낸다.
하늘 세계에서 사천왕천은 제석천과 달리 인간 세상과 접경에 있는 가장 낮은 단계의 하늘이다.
물론 사천왕천에서는 지상을 곧바로 내려다볼 수 있다.
하느님에 해당되는 환인은 초월적인 신격의 왕으로서 제석천의 천신이나 옥황상제와 같이 ‘천제’의 위상에 놓여 있다면, 하늘에 해당되는 환웅은 초월적인 존재이되 현실적인 인간 세상과 접점에 놓여 있는 사천왕천의 ‘왕’ 곧 천왕의 위상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다같이 하늘나라의 천신이되 그 상하위계가 우리말 소릿값과 한자말 개념에서 모두 분명하게 분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환웅은 그 위상이 환인에 비하여 낮을 수밖에 없다. 그야말로 환인과 환웅은 아버지와 아들로서 부자(父子)간의 위계질서와 같은 상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천상계에서는 수미산(須彌山) 맨 꼭대기에 있는 도리천(忉利天)의 한가운데 제석천이 자리잡고 있고 사천왕천은 그 바닥을 이루는 가장 아랫단계의 하늘이다.
세속적인 관계에서 하버지가 하늘이라면 그 자식이 흔히 땅에 비유되듯이, 하늘나라에서 제석천이 하늘이라면 사천왕천은 땅이나 다름없다.
환웅이 하늘 세계나 신들의 세상보다 땅의 세계나 사람들의 세상을 동경하다가 마침내 아래로 내려오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자연스럽다.
인간 세상을 동경한다는 것은 인간과 더불어 인간처럼 살아가고자 하는 소망을 품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환웅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신격(神格)이지만 그의 의식 속에는 인격성(人格性)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환웅과 해모수
북부여의 건국시조는 천제인 해모수이다.
천제는 곧 하늘의 옥황상제이자 하느님인 천신이다.
천신은 곧잘 하늘 또는 태양을 상징한다.
태양과 하늘에 비유되기도 한다.
그는 하늘에서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오룡거를 타고 내려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는 하늘 자체를 나타내는 하느님인 것일까.
그렇다면 환인, 환웅과 해모수는 같은 천신인가.
그러나 천제의 이름이 하늘을 나타나는 단군신화의 ‘환인’이나 ‘환웅’과 ‘해모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환인이나 환웅은 모두 ‘하느님’ 또는 ‘하늘’을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북부여의 천제는 스스로 자기 이름을 ‘해모수’라고 했다.
‘해모수’는 곧 ‘해 모습’을 뜻하는 이름이라고 보는 최래옥 교수의 해석을 따를 만하다.
왜냐하면 해 모습을 한 사람은 태양신에 해당되며, ‘환인제석’ 또는 ‘환웅천왕’의 명명법처럼, ‘해모수천제’ 또한 앞의 해모수가 ‘해 모습’이라는 우리말 소릿값대로 표기된 것이라 하고 천제는 한자말의 개념대로 표기된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천제는 그 성씨 또한 ‘해’씨로 삼았다. ‘해’는 태양을 나타내는 순 우리말이다.
태양을 섬기는 사람들은 모두 해씨계에 속한다. 해모수는 스스로 태양신을 자처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북부여 주민들이 그를 태양신처럼 받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특히 자연신화학파나 태양신화학파는 신화를 자연물의 의인화로 보는데 여기서도 그러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한결같이 천제 곧 천신을 표방하고 있으면서도 구체적으로 단군신화는 환인과 환웅처럼 하늘을 상징하고, 북부여신화는 해모수처럼 태양을 상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화학에서 해모수는 천신계로 보는데, '처음 공중에서 내려오는데 자신은 다섯 용의 수레를 타고, 따르는 사람 100여 명은 고니를 타고 털깃 옷을 화려하게 입었다.
맑은 풍악소리 쟁쟁하게 울리고 채색 구름은 뭉게뭉게 떴다'라든가 '아침에는 인간 세상에서 살고 저녁에는 천궁으로 돌아간다' 등의 표현은 하늘의 태양이 뜨고 지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해모수의 '해'가 오늘날의 '해'[日]와 같은 발음이라고도 추정한다.
해모수와 유화의 결합은 천신계와 수신계 집단의 결합으로 해석하며, 그 사이에서 태어난 주몽과 주몽의 아들 유리 등은 모두 천신계열의 신화적 영웅으로 규정한다.
『세종실록(世宗實錄)』권 제 154 지리지(地理志) ‘평안도 평양’조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해 두었다.
천제가 태자 해모수를 보내어 부여 고도(古都)에 내리어 놀게 하였다. 해모수가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오룡거를 타고 시종 백여명은 백곡(白鵠)을 탔다.
오색구름이 그 위에 떠 있고 음악소리가 구름 속에서 울려 나왔다.
웅심산(熊心山)에 머물러서 열흘을 지내고 난 다음에 비로소 땅으로 내려왔다.
머리에는 오우(烏羽)의 관을 쓰고 허리에는 용광검(龍光劍)을 찼는데, 아침이면 땅에서 일을 보고 저녁이면 하늘로 올라가니 세상에서 이르기를 ‘천왕랑(天王郞)’이라 하였다.
여기서는 해모수가 천제의 태자로 바뀌었다. 지상으로 내려온 환웅이 천제 환인의 아들인 것과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북부여 신화를 단군신화의 체계 속에서 인식하고 수용하는 한편, 해모수가 태양신이라는 사실을 한층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어 하늘신인 환웅과 차별화하는 경향을 드러내 준다.
북부여신화에서 덧붙여진 내용을 하나하나 검토해 보면 이러한 두 가지 의도가 두드러진다.
먼저 단군신화의 체계와 일치하는 부분을 보면, 해모수가 시종 백여 명을 이끌고 내려온 것이 환웅이 무리 3천을 거느리고 내려온 것에 상당한다.
웅심산에 내려왔다고 하는 사실 또한 환웅이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왔다는 맥락과 일치한다.
더군다나 ‘웅심산’은 곰을 상징하고 있다는 점에서 단군신화의 곰녀와 일맥상통한다.
단군신화는 청동기를 사용하는 북방계 민족의 신화로 이해되고 있는데, 여기서도 해모수가 오룡거를 탔을 뿐만 아니라 용광검을 찼다는 점에서 금속문명을 지닌 민족의 신화로 이해할 수 있다.
단군신화와 변별성을 지닌 내용으로는 해모수나 환웅이 모두 천제의 아들이긴 하되, 해모수는 하늘을 상징하는 환웅과 달리 ‘해 모습’을 한 태양신이라는 사실이다.
하늘이 태양까지 감싸 안는 포괄성과 너그러움을 지녔다면 태양신은 한층 뚜렷하고 강렬하며 눈부시도록 화려하다.
해모수가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시종 백여 명은 흰 고니를 탄 채 오색구름 밑으로 내려왔다고 하는 것은 태양빛이 흰 구름을 뚫고 내리비치는 모습을 의인화했다고 볼 수 있다.
환웅이 태백산 신단수 밑에 하강하는 것에 비하면 자못 화려하고 웅대하기 그지없다.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오룡거와 까마귀의 깃털로 장식한 오우관(烏羽冠)이 등장할 뿐 아니라, 용광검이라고 하는 신이한 칼까지 찼다.
특히 왕관에 해당되는 오우관은 왕의 권위와 위상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상징물이다.
어느 나라든 왕관을 통해서 왕의 권위가 인정되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왕좌를 물려받는 의식을 대관식이라 일컬으며 왕관을 물려받는 행위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동양에서는 세 개의 다리를 지닌 까마귀, 곧 삼족오(三足烏)가 태양신의 상징으로 간주된다.
오우관은 태양신 삼족오의 정체를 인간 세계에서 구현한 문화적 기호이다.
그러므로 해모수가 오우관을 썼다고 하는 것은 태양신으로서의 그의 권위와 성격을 함께 드러내는 것이다.
인간 세계에서 왕관이 왕좌를 상징한다면 수레와 칼은 왕의 권력과 힘을 상징하는 것이므로 오우관과 오룡거, 용광검은 곧 태양신인 해모수왕의 정치적 권위와 군사적 힘을 강력하게 뒷받침해 주는 것이다.
환웅천왕이 설정한 신시(神市)와 달리, 해모수왕이 다스리는 북부여는 그 만큼 세속화된 나라임을 알 수 있다.
한층 강력한 왕권과 군대의 무력을 장악하고 있어야 왕노릇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해모수왕의 이러한 차별성은 그의 통치 방식에서 두드러진다.
환웅천왕이 신시를 설정하고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며 세상을 다스리고 사람들을 교화한 동시에 곰과 호랑이까지 인간으로 교화시키려 했음은 삼라만상을 두루 감싸 안고 그 품안에서 살아가게 하는 ‘하늘다운’ 모습이다.
해모수왕은 사정이 다르다. 아침이면 땅에서 일을 본 뒤에 저녁이면 하늘로 올라가 버린다고 한다.
이것은 곧 태양의 하루 일과를 상징한다.
하늘이 밤낮이 없고 인간과 짐승을 구별하지 않는 포용력을 지녔다면, 태양은 밤낮이 분명할 뿐만 아니라 낮 동안만 지상 세계의 존재들에게 봉사한다.
사람들이 낮에 활동하고 밤에 칩거한다면 짐승들은 오히려 밤에 활동하는 경향이 더 두드러진다.
자연히 동물들은 해모수의 통치 범주에 포함되지 못하고 소외되게 마련이다.
해모수의 이러한 통치 방식은 태양신의 기능적 특성이자 짐승을 배제한 통치 경향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하늘신을 표방한 고조선의 단군신화에서는 구름과 비, 바람을 거느리고 곰과 범까지 인간적으로 교화하고자 했던 데 비하여, 태양신을 표방한 북부여의 해모수 신화에서는 짐승은 철저하게 배격하고 인간 중심의 세계상을 꾸려 나가고 있는 것이다.
단군시대에는 동식물을 포함한 자연과 더불어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는 것이 홍익인간의 이념이었으되, 해모수시대에는 인간 세상에서 동식물과 같은 자연물이 상당히 배격되고 있는 인간 중심의 세계를 추구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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