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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역사 (국외)

개자추 , 介子推. jiè zǐ tū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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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자추 , 介子推 jiè zǐ tūi


진나라의 현신(賢臣)


중국 춘추시대의 은사(隱士). 진나라 문공이 망명생활을 할 때 그를 모셨는데 후에 문공이 왕위에 올랐으나 개자추를 등용하지 않았다. 

실망한 그는 산에 들어가 살았는데 문공이 산에 불을 질러도 나오지 않고 타 죽었다.


개지추()라고도 한다. ê°œìžì¶”의 벽화

진()나라 문공()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아버지 헌공()에게 추방되었을 때, 19년 동안 그를 모시며 같이 망명생활하였다. 



뒤에 문공이 진()나라 목공()의 주선으로 귀국하여 왕위에 오르고 많은 현신()을 등용하였으나, 개자추에게는 봉록을 주지 않았다. 

실망한 그는 면산()에 들어가 숨어 살았다. 


문공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그를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다. 

문공은 그를 나오게 하기 위해 산에다 불을 질렀다. 

그러나 끝내 나오지 않고 어머니와 함께 그대로 타 죽었다.


한식()은 개자추가 타 죽은 것을 기리기 위하여 행사로 기념한 날로서, 이때 찬밥을 먹는다고 한다.




진문공을 수행하다

춘추시대 진나라 사람으로 개지추라고도 불린다. 

진 문공이 공자()였을 때 국내 정변을 피해 외국으로 망명했는데, 개자추가 19년 동안 문공을 수행했다.


산시(西)성 지에시우() 현의 면산(綿)에는 그의 무덤을 비롯하여 개자추와 관련된 유적들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특히 면산에는 개자추에 얽힌 전설과 유적이 많다. 


개자추 전설 중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전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춘추시대 진나라의 내정은 아주 복잡하고 어지러웠다. 


헌공이 여희(?~기원전 677)의 꾐에 빠져 태자 신생을 죽였고, 그 위기상황이 작은 아들 중이(훗날의 진문공)에게도 미칠 판이었다. 

이에 중이는 가신들을 거느리고 국외로 도망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개자추는 중이를 수행하며 충심을 다해 모셨다. 


중이가 배가 고파 먹을 것이 없을 때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고깃국을 끓여 줄 정도였다. 

‘허벅지 살을 베어 주군을 받들다’는 뜻의 ‘할고봉군()’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왔다.

추의 회한과 진문공의 후회

19년의 망명 생활 끝에 진나라 사람들과 진(, 중국 최초 통일국가)의 도움을 받아 중이는 권력을 잡을 수 있었는데, 군주로 즉위한 중이는 춘추오패 의 한 사람인 진문공이다.


그는 먼저 자신의 망명생활을 수행하며 도운 신하들을 모두 관직에 봉했다. 

그런데 개자추에게만 공로도 녹봉도 돌아가지 않았다. 

이에 개자추는 집으로 돌아와 홀어머니에게 “문공께서 돌아와 군주의 자리를 이은 것은 하늘의 안배입니다. 


몇몇 인사들이 그것을 자신의 공로라고 떠벌리고 있으니 어찌 공로와 상을 탐내고 군주를 속이는 짓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정말이지 그런 자들과 함께 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숨어 살기로 결심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네가 정말 그렇게 마음 먹었다면 나도 함께 가마.”라고 아들을 격려했다. 

그리하여 개자추는 벼슬을 마다하고 어머니와 함께 산속으로 숨어버렸다.


이때 개자추의 처지를 동정하는 사람들이 궁궐 곳곳에 무기명으로 “용이 하늘로 나니 다섯 마리 이무기가 보좌하는구나. 

용이 이미 구름 속으로 들어가니 네 마리 이무기가 각자 그 자리를 차지하는구나. 


오직 한 마리가 원망하니 그 간 곳을 아무도 모르는구나.”라는 글을 붙였다. 

이 사실을 보고 받은 문공은 “그건 바로 개자추를 말하는 것이다. 


내가 군왕이 되어 편안하게 살 수 있게 된 것이 정말 개자추 때문인데 그를 비굴하게 만들었구나.”라며 급히 사람을 보내 개자추의 행방을 찾게 했다.


개자추가 면산에 어머니와 함께 숨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문공이 몸소 면산으로 가서 사람들과 함께 개자추를 힘껏 불렀으나 산이 워낙 깊은지라 돌아오는 것은 메아리뿐이었다. 

이에 문공이 누군가의 건의를 받아들여 면산에 불을 질렀다. 

효자로 이름난 개자추가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밖으로 나올 것이라는 권유 때문이었다.


불은 3일 밤낮으로 탔지만 개자추 모자의 행방은 찾을 수 없었다. 

불이 온 산을 다 태우고 꺼진 뒤 비로소 모자가 끌어안은 채 나무 밑에서 새까맣게 타죽은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문공은 땅을 치며 후회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문공은 개자추 모자를 기념하기 위해 면산 주위의 땅을 개자추의 땅으로 봉하고 면산을 개산으로 고쳐 부르게 하는 한편, 그 일대 지역을 ‘개자추가 쉬었다’는 뜻의 ‘지에시우() 현’으로 불렀다. 

매년 면산에 불을 지른 날(청명절 하루 전날)을 한식()날로 정해 더운 음식을 먹지 못하게 했다.


문공은 불에 탄 면산의 나무로 나막신을 만들어 신었다고 한다. 

걸을 때마다 발밑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개자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귀한 친구를 부를 때 ‘족하()’라 했다고 하며, 흔히 일본의 고유한 신발로 알려진 ‘게다()’도 여기서 유래했다고 한다.

유적

산시성 지에시우 현의 면산에는 개자추의 사당과 무덤 등 개자추 관련 유적들이 매년 복원, 개발되고 있으며, 1년에 130만 명의 중국인이 다녀가는 관광지가 되었고, 국제적으로 유명한 명소가 되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후대 기념 작품

역대로 많은 시인 묵객들이 개자추의 정절을 기리는 문장을 남겼는데 당나라 때 시 두 구절을 소개해둔다.

부생과하모 ,

노거선개추 .


덧없는 인생에서 과연 무엇을 그리워하나?

늙어감에 개자추를 선망하나니.

고황의 <의고삼수()> 중에서 -

개자종지녹불급 祿,

왕손수긍일상련 .


개자추는 끝내 작록(작위와 녹봉)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알았고,

왕손(진문공)은 누구를 이토록 가엾어 하는가?

- 곽운()의 <한식기이보궐()> 중에서 -




춘추 시대 진()나라 사람. 은사(). 개지추()로도 불린다. 

진문공()이 공자()로서 망명 생활을 할 때 19년 동안 모셨는데, 문공에게 자기의 다리 살을 베어서 먹일 정도로 충성스럽게 섬겼다. 

문공이 귀국한 뒤 봉록(祿)을 주지 않자 어머니와 함께 면산(綿)에 숨었는데, 문공이 잘못을 뉘우치고 불렀지만 나오지 않았다. 


그를 나오게 하려고 산에 불을 질렀는데, 기어이 나오지 않고 타 죽었다고 한다. 

한식()은 개자추가 타 죽은 날을 추념하기 위해 불을 피우지 못하게 한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개자추 [介子推] (중국역대인명사전, 2010. 1. 20., 이회문화사)




춘추오패(春秋五覇) : 춘추시대에 패권을 쥐었던 다섯 나라의 맹주(盟主)를 말한다. 

오패(五覇)는 제환공, 진문공(晉文公), 초장왕, 오왕(吴王) 합려, 월왕(越王) 구천을 가리키는데, 진목공송양공이나 오왕(吴王) 부차 등을 꼽는 경우도 있다.


 개자추 [介子推, jiè zǐ tūi] (중국인물사전, 한국인문고전연구소)






타 죽은 개자추를 기리는 한식,

--食.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개자추와 한식에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한식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4대 명절 가운데 하나로서 동지에서 105일째 되는 날이다. 

보통 4월 5일이나 4월 6일쯤이 되며, 이때 민간에서는 조상의 산소를 찾아 제사를 지내고 사초()를 하는 등 묘를 돌아본다.


1981년 일조각에서 출간한 『한국구비전설의 연구』와 1983년 한국연구원에서 출간한 『한국설화의 유형적 연구』에 수록되어 있다. 

이후 1984년 안동군에서 출간한 『내고향 전통가꾸기』와 1991년 지식산업사에서 출간한 『설화작품의 현장론적 분석』, 그리고 1999년 안동시사편찬위원회에서 출간한 『안동시사』에 재수록되었다.


옛날에 개자추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난이 있어 임금을 업고 도피하게 되었다. 

임금이 ‘고기가 먹고 싶다’ 하여서 주위를 찾아보았으나 아무리 살펴보아도 고기는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개자추는 자기 허벅지를 끊어 불에 구어서 임금에게 쇠고기라 속이고 먹였다. 

개자추는 이렇게 자신의 몸을 해하면서까지 임금을 보호하는 충신이었다.


시간이 흘러 나라를 수복하여 임금이 다시 궁정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때 개자추와 함께 온 다섯 신하는 임금과 돌아가 조각(정부 개편)에 들어갔다. 


다섯 신하가 같이 돌아가자고 하였으나 개자추는 “나는 팔십 먹은 노모를 집에 두고 왔는데,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을 알 수 없으니 같이 갈 수 없다. 

너희들은 빨리 돌아가 정부 개편을 추진하라. 


나에게는 뒤에 연락을 해 달라”고 말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팔십 노모는 살아 있었다. 

개자추는 노모를 모시고 지내면서 이제나저제나 조정에서 소식이 있을까 기다렸지만 깜깜무소식이었다.


조정으로 돌아간 임금과 다섯 신하는 편안한 궁정 생활에 개자추를 잊어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 삼 년 정도 되었을 때 임금은 문득 개자추 생각이 났다. “아하! 이거 개자추를 잊어버렸었구나.” 


임금은 사자(使)를 시켜 개자추를 데려오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개자추는 아무리 기다려도 조정에서 소식이 없자 “내가 어째 이렇게 살고 있을까” 탄식하며 팔십 노모를 업고 중국 부춘 산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었다.


임금의 사자가 개자추의 고향에 가서 소식을 물어도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계속 수소문을 하다 보니 어떤 사람이 “개자추는 산으로 올라갔다”고 말해 주었다. 


사자는 산으로 올라가 개자추를 찾아 헤맸으나 그 험한 산천에 개자추가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에잇! 이거 안 되겠다” 하며 사자는 산에 불을 놓았다. 

개자추가 불길을 피해 산에서 내려올 것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개자추는 산에서 내려오지 않고 불길 속을 헤매다가 솔밭 밑에서 팔십 노모를 업은 채 타 죽었다. 

그렇게 불에 타 죽은 개자추를 안타깝이 여긴 임금은 “개자추 죽은 날에는 찬밥을 먹도록 하라”는 명을 내렸다. 

불을 지피지 말라는 것이었다. 

불이 없으니 찬밥을 먹을 수밖에 없어 이날을 한식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분석

「불에 타 죽은 개자추를 기리는 한식」의 주요 모티프는 ‘불에 타 죽은 개자추’와 ‘개자추를 기리는 한식’이다. 

불에 타 죽은 개자추를 안타깝게 생각하여 개자추가 죽은 날 불을 지피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날을 찬밥을 먹는 날이라 하여 한식이라 불렀다는 한식유래담이다.


안타까운 인물의 상황을 설정하고, 이러한 ‘원한’의 해원을 위해 한식을 전국적인 명절로 정하였다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보통 자기 살을 잘라 내 먹이는 모티프는 효 설화에 자주 등장하는데, 「불에 타 죽은 개자추를 기리는 한식」에서는 효와 충을 연관시켜 임금에 대한 충정을 표현하는 데 활용하였다. 

뒤늦게 상황을 알고 조치를 취하는 모티프 역시 널리 분포되어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 최래옥, 『한국구비전설의 연구』(일조각, 1981)
  • 조희웅, 『한국설화의 유형적 연구』(한국연구원, 1983)
  • 『내고향 전통가꾸기』(안동군, 1984)
  • 임재해, 『설화작품의 현장론적 분석』(지식산업사, 1991)
  • 『안동시사』(안동시사편찬위원회, 1999)


  • 「불에 타 죽은 개자추를 기리는 한식」 [-介子推-寒食]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식, 寒食.

동지로부터 105일째 되는 날이다. 

설날·단오·추석과 함께 4대 명절의 하나로, 음력 2월 또는 3월에 든다. 

2월에 한식이 드는 해는 철이 이르고, 3월에 드는 해는 철이 늦다. 

‘2월 한식에는 꽃이 피지 않아 3월 한식에는 꽃이 핀다.’는 말이 전한다.


한식은 어느 해나 청명절() 바로 다음날이거나 같은 날에 든다. 

이때는 양력 4월 5, 6일쯤으로 나무심기에 알맞은 시기이다. 

우리 나라에서 4월 5일을 식목일로 정하여 나무를 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24절후 속에 들어 있지는 않으나 습속으로 전해 내려오며, 다음과 같은 유래가 있다.


고대의 종교적 의미로 매년 봄에 나라에서 새불〔〕을 만들어 쓸 때 그에 앞서 어느 기간 동안 묵은 불〔〕을 일절 금단하던 예속()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기도 하고, 중국의 옛 풍속으로 이날은 풍우가 심하여 불을 금하고 찬밥을 먹는 습관에서 그 유래를 찾기도 한다.


개자추전설()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국 진()나라의 문공()이 국란을 당하여 개자추 등 여러 신하를 데리고 국외로 탈출하여 방랑할 때, 배가 고파서 거의 죽게 된 문공을 개자추가 자기 넓적다리살을 베어 구워먹여 살린 일이 있었다.

뒤에 왕위에 오른 문공이 개자추의 은덕을 생각하여 높은 벼슬을 시키려 하였다. 


개자추는 벼슬을 마다하고 면산()에 숨어(혹은 19년을 섬겼는데 祿을 주지 않으므로 숨었다고도 전한다.) 아무리 불러도 나오지 않으므로 개자추를 나오게 할 목적으로 면산에 불을 질렀다.


그는 끝까지 나오지 않고 홀어머니와 함께 버드나무 밑에서 불에 타죽고 말았다. 

그 뒤 그를 애도하는 뜻에서, 또 타죽은 사람에게 더운밥을 주는 것은 도의에 어긋난다 하여 불을 금하고 찬 음식을 먹는 풍속이 생겼다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이날 문에 버드나무를 꽂기도 하고 들에서 잡신제()인 야제()를 지내 그 영혼을 위로하기도 한다. 

개자추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비가 내리는 한식을 ‘물한식’이라고 하며, 한식날 비가 오면 그 해에는 풍년이 든다는 속설이 있다.


이날 나라에서는 종묘와 각 능원()에 제향(제사)하고, 민간에서는 술·과일·포·식혜·떡·국수·탕·적 등의 음식으로 제사지낸다. 

이를 명절제사, 곧 절사()라 한다. 

여러 가지 주과()를 마련하여 성묘하고, 조상의 묘가 헐었으면 봉분을 개수하고 주위에 식수도 하고 사초()도 한다.


만일 조상의 묘가 멀 때에는 묘지기가 대리로 제향(제사)를 올려준다. 

이날 성묘하는 습속은 당대로부터 시작되었다 하며, 우리 나라에 전해진 것은 신라 때로 알려져 있다. 

고려시대에는 한식이 대표적 명절의 하나로 중요시되어 관리에게 성묘를 허락하고 죄수의 금형()을 실시하였다.

조선시대 내병조()에서는 버드나무를 뚫어 불을 만들어 임금에게 올리면 임금은 그 불씨를 궁전 안에 있는 모든 관청과 대신들 집에 나누어주었다. 

한식날부터 농가에서는 채소 씨를 뿌리는 등 본격적인 농사철로 접어든다. 

이날 천둥이 치면 흉년이 들 뿐만 아니라 국가에 불상사가 일어난다고 믿어 매우 꺼린다.

 한식 [寒食]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