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Soviet Union , 蘇聯. (러시아) 3
시련을 이기고 승리로 ,대조국전쟁(1941년 ~ 1945년).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스탈린의 오판이 참화를 더 크게 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게다가 1930년대 말의 '대숙청'으로 군 고위 지휘관이 비교적 경력이 짧은 사람들로 대폭 교체됨으로써 군 전력도 크게 약화됐다.
대비를 못한 소련군은 초전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전선의 소련병사들은 물자도 충분치 못하고 후방 보급체계도 정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투에 돌입했다.
항전과 후퇴가 거듭되는 가운데 소련인의 조국애에 불이 붙었다.
900일간에 걸친 '레닌그라드 공방전'은 대조국전쟁사에서 영웅적인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소련국민의 용감한 저항은 겨울까지 유럽 러시아 거의 전역을 점령하겠다는 파시스트의 속도전 전략을 무산시켰다.
반히틀러 연합이 결성된 것은 이 무렵이다.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마침내 체제를 떠나 모든 민족과 국가가 파시즘 세력에 맞서 싸우는 반파쇼 해방전쟁으로 변했다.
1942년에 접어들면서 북부와 중부전선이 교착상태로 빠져들자, 독일군은 주력부대를 남부로 투입했다.
11월 19일, 소련군의 주력부대가 도시의 북쪽과 남쪽에서 볼가 강을 건너, 도시의 서쪽을 포위하고 있던 적병들을 역포위했다.
치열했던 카프카스 지역의 전투도 8개월간의 사투 끝에 마침내 독일군이 물러나면서 종식됐다.
7월 5일, 전투가 시작됐다.
이후 소련군은 맹렬한 반격을 펼쳐 전선을 계속 서쪽으로 몰고 갔다.
정규군과 함께 유격대(파르티잔)도 큰 활약을 했다.
1945년 4월 중순, 독소 전쟁의 최후를 장식하는 전투가 시작됐다.
독일 파시스트 사령부는 항복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거절했다.
이로써 4년간의 독소 전쟁은 소련의 최종 승리로 끝났다.
승리의 대가는 참으로 가혹했다.
2차대전 중 군인과 민간인을 포함하여 5,000만 이상이 사망했는데, 그중 절반인 2,700만 명이 소련인이었다.
혹독한 희생의 대가로 소련과 소련인민은 커다란 영예를 안았다.
그와 더불어, 민족해방운동이 격화되어 제국주의의 식민지 체제가 흔들리면서 수십 개의 독립국가가 생겨났다.
소련은 동유럽과 아시아의 사회주의 국가들, 사회주의적 발전의 길을 택한 신생국들, 자본주의 국가 내 의식 있는 노동자와 지식인들 사이에서 지도적인 위치를 굳혀갔다.
- 1922∼1991년 유라시아 대륙의 북부에 위치하는 여러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으로 구성된 최초의 사회주의 연방국가.
정식 명칭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USSR). 동유럽에서 북아시아 및 중앙아시아에 걸친 광대한 영역을 차지, 유럽에서는 노르웨이·핀란드·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루마니아와, 아시아에서는 터키·이란·아프가니스탄·중국·몽골·한국과 국경을 접하였다.
구성체는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우즈베크·카자흐·아제르바이잔·몰다비아·키르키스·타지크·아르메니아·투르크멘·그루지야·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의 15개 공화국이다.
소연방에 혼재한 많은 소수민족에게는 공화국 안에서 자치가 허락되었는데, 연방에는 20개의 자치공화국, 8개의 자치주, 10개의 민족관구가 있었다.
러시아인·우즈베크인·타타르인 등 약 130개 민족이 살고 있는데 대부분이 유럽계 민족이며, 아시아계 민족도 소수 포함되었다.
각 민족은 민족어와 공용어인 러시아어를 사용하였다.
1917년 11월 7일의 혁명으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가 성립됨에 따라 로마노프왕조의 군주를 차르(황제)로 하는 제정국가(帝政國家)가 무너졌다.
혁명정권은 1918년부터 1922년까지의 내정에 간섭하려는 외국과 전쟁을 치르는 한편, 국내 적대세력의 내란을 진압하고, 1922년 12월 소비에트 연방을 결성하였다.
그뒤 새 공화국의 가입으로 15개의 공화국이 공산당 일당독재에 의한 강력한 중앙집권의 연방을 이루었다.
1924년에 레닌이 죽자 스탈린이 소련의 지도자가 되었는데, 1928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 세 차례의 5개년 계획을 실시하여 국민경제의 사회주의화와 공업화가 병행되었으며, 농업은 집단화되었다.
소련이 가진 강대한 군사력과 경제력은 5개년 계획을 통하여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34년 말부터 1938년까지의 대숙청을 통하여 스탈린 독재정권을 확립, 개인의 자유와 정치적 발언을 봉쇄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소련은 막대한 손해를 입었으나, 대전이 끝난 뒤 동유럽과 아시아에서 사회주의 국가들이 생겨남에 따라 소련은 그 지도국이 되었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고, 말렌코프와 불가닌을 거쳐 1958년 2월에 흐루쇼프가 수상이 되었다.
1956년 2월에 개최된 제20회 당대회에서는 개인숭배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으며, 소비에트 사회주의 체제하에서의 개인적·정치적 자유의 회복이 큰 의제가 되었다.
1964년 10월에는 흐루쇼프 대신에 코시긴이 수상이 되었으며, 브레즈네프 당서기장, 포드고르니 최고회의간부회의 의장과의 집단지도제인 트로이카(三頭政治) 체제가 형성되었다.
1985년 고르바초프의 등장과 함께 이른바 페레스트로이카 및 그라스트노스트를 기초로 한 일련의 개혁정책의 여파로 자유화물결이 일어 1989년 동·서독이 통일되는 등 공산주의 국가들이 시장경제를 지향하게 되면서 보다 급진적인 개혁의 소리가 높아갔다.
1991년 보수파의 쿠데타가 발생, 이를 무력화시킨 옐친이 보다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하게 되었고, 1991년 공산주의 포기와 공산당 해체를 계기로 각 공화국이 독립을 강행함으로써 급속히 붕괴되었다.
연방 해체 후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등 발트3국을 제외한 12개 독립공화국이 1992년 1월 1일을 기해 독립국가연합(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CIS)을 형성함으로써 소련은 정식으로 해체되었다.
소비에트연방,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 Союз Советских.
1924년 1월 21일, 러시아 혁명을 응축시켜 몸속에 담고 있던 레닌이 죽었다.
혁명운동과 사회주의 건설에 몸을 혹사한데다 1918년 사회혁명당 테러리스트에게 당한 총격의 후유증이 겹쳐, 세 차례나 뇌졸중으로 쓰러졌다가 마침내 저세상으로 떠나버린 것이다.
1922년 12월 두 번째로 쓰러져 누운 병상에서 레닌은 여러 편의 논문과 편지를 구술하여 소련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이 시기에 구술한 것 중에 흔히 레닌의 '정치 유언'이라고 불리는 〈대회에 보낸 편지〉가 있다.
편지에 묘사된 몇몇 지도자의 특징 묘사는 날카롭고도 흥미롭다. 트로츠키에 대해서는, 그의 '비볼셰비즘'을 지적하고 '멘셰비즘' 재발 위험을 경고하면서, "당 중앙위원 중에서 가장 유능하나 자신과잉에 빠져 있고 사업을 순행정적 측면에서 접근하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스탈린에 대해서는, 당의 뛰어난 활동가임을 인정하는 한편으로 그의 결함을 비판하여 "서기장이 되어 무한한 권력을 손에 쥔 그가 이 권력을 늘 신중하게 행사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겠다"고 썼다.
레닌이 세 번째로 쓰러진 후 1923년 4월에 열린 제12차 당대회에서 레닌의 우려는 곧 현실로 드러났다.
당시 공산당 내에는 크게 세 가지 조류가 있었다.
부하린이 이끄는 우파도 러시아의 사회주의가 세계혁명의 성공 여부에 달렸다는 데에는 생각을 같이했다.
스탈린이 이끄는 중도파는 처음에는 자기 목소리를 갖지 않고 양자의 견해를 조정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러한 이론투쟁에, 당과 중앙위원회와 서기국의 권한강화에 대한 반발이 덧붙여졌다. 당내에 심각한 대립이 발생했다.
자신의 강력한 버팀대였던 레닌이 쓰러진 후, 신참 볼셰비키 트로츠키는 당에서 점점 고립돼갔다.
트로츠키가 1923년 10월 중앙위원회로 편지를 보냈다.
레닌이 죽은 후 '레닌 입당'으로 노동자들이 대거 공산당에 가입했다.
궁지에 몰린 트로츠키는 날카로운 필봉을 휘두르며 저항했다.
트로츠키 공격의 선봉에 나선 것은 스탈린이 아니라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였다.
1927년 곡물수매 위기가 빚어지면서, 스탈린은 좌선회하여 이전 좌파들의 주장을 대폭 받아들이고 농업의 희생을 토대로 한 급속한 공업화에 착수한다.
스탈린이 최고지도자의 자리에 오른 것은 당 권력의 강화와 당의 대중화, 당내의 그의 지위에 힘입은 바 컸으나, 당시 상황에 가장 적합한 국가건설의 방향을 제시한 측면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1927년 12월 27일 제15차 당대회는 '당의 일반노선으로부터의 이탈'을 철저하게 비판하면서 스탈린의 권위를 굳혀주었다.
1917년 11월 7일, 러시아에서 레닌이 이끈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볼셰비키파가 정권을 장악하고 11 월 15일에 ‘러시아 제 민족의 권리선언’을 발표하여 ‘분리와 독립국가형성의 권리를 포함한 러시아 제 민족의 자유로운 입헌군주제’을 옹호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후 내전과 관련하여 핀란드와 발트3국이 러시아에서 독립하였다.
1922년 12월 30일에 ‘제 민족의 자발적인 국가결합체’로서 소비에트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성립이 선언되었다.
그러한 경위가 제시하는 바와 같이 당초의 정권의 의도로서는, ‘제 민족의 감옥’ 제정 러시아에서의 민족 해방이 지향되어 각 민족의 민족어에 의한 출판과 교육이 장려되었다.
레닌에 의해 ‘대 러시아 민족주의자’라고 비판되었던 그루지야인 스탈린이 1920년대 중반에 권력을 장악하자 민족 기본권리의 원칙은 점차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큰 원인은 국가와 경제의 중앙집권체제가 확립되어 러시아인의 실제상의 권한이 증대한 것에 있다.
각 공화국의 당 제1 서기에는 해당민족의 지도자가 취임 하였지만 제2 서기에는 러시아인이 차지하여 중에 연결되는 실권을 그가 장악하였다.
민족어의 사용도시와 문학 이외에는 사용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소수민족의 부모도 장래를 생각하여 자녀의 러시아어 교육을 원하였다.
1930년대에 국제위기가 절박하자 스탈린은 유대인, 독일인, 타타르인 등을 집단적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스탈린 비판이 이루어져 그 난폭한 민족정책은 시정되었지만 러시아인 중심의 국가ㆍ경제정책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브레즈네프 정권하에서 국내의 다원적인 요구가 강해짐에 따라 연방 내의 제 민족, 특히 중앙아시아의 제 민족의 권한이 확대되어 정치, 경찰, 교육 등의 ‘현지화’가 진행되었다.
그것은 권리의식으로 자각한 소수민족에게 요구실현에 대한 차이의 크기를 깨닫게 하는 결과를 낳아 인종분쟁을 확대시켰다.
1985년에 고르바초프가 당서기장으로 취임하여 개혁을 시작하자 연방 내에서 억압되어 왔다고 느낀 제 민족이 일제히 민족의 자기주장을 하여 카프카스 지방 등에서 무력분쟁이 확대되었다.
1940년에 스탈린에 의해 소련에 합병된 이래 독립을 요구해 온 발트3국은 1990년에 독립선언을 하였지만 1991년에 소련군이 거기에 개입하자 국제적 비난이 쏟아졌다.
연방해체에 대한 위기감으로 취해진 보수파와 군 수뇌부가 8월에 쿠데타를 시도하였다가 실패함으로, 연방을 유지하고자 하는 계기를 잃게 되었다.
1991년 9월 6일, 소련국가평의회는 발트3국의 독립을 정식으로 승인하였다.
12월 8일에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의 슬라브계 3국이 ‘독립국가연합’(CIS)를 창설하는 협정에 서명하였다.
그 후 발트3국과 그루지야를 제외한 구 소련 의 11개의 공화국이 12월 21일 알마아타의 정상 회의에서 CIS에 참가하는 협정에 서명하였다.
이렇게 하여 동년 12월 31일 소비에트연방은 소멸하였다.
단, 아제르바이잔은 CIS 협정을 비준하지 않았으며 또한 CIS의 규약, 통일정치기구, 통일군 등을 둘러싼 협의는 난항을 거듭하고 흑해함대의 관할권을 둘러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격화하는 등, 정치, 군사면에서의 기구구축에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경제면에서는 러시아에 의한 석유공급의 대폭감소, 밀접한 상호의존 관계에 있던 생산체제의 단절은 모든 국가에서 심각하여 1993년 9월에 12개국이 공동체경제동맹 조약을 체결하였다.
소비에트 연방 창설.
모스크바에서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이 공식 선포되다.
1922년 U.S.S.R., 또는 소비에트 연방을 창설하자는 결정은, 공산당 내에서 러시아가 통치하는 여러 국가들에게 얼마만큼의 자치를 허용하느냐를 놓고 벌어진 논쟁에 마침표를 찍었다. 소비에트 연방은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독립을 쟁취한 폴란드와 핀란드를 제외하면, 구 차르 치하의 러시아 제국의 재현이라 할 수 있었다.
언제나 러시아의 입김에 좌지우지된 소비에트 연방은 처음에는 4개의 공화국-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트란스코카시아-만으로 구성되었지만, 볼셰비키들이 통제권을 강화하면서 더 많은 공화국들-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야, 카자흐스탄, 몰도바,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이 가입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의 발트 3국 역시 강제로 합병되었다.
1929년 스탈린이 독재자가 된 뒤 소비에트 연방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국토의 황폐화와 강요된 집단화, 산업화, 그리고 기아의 확산에도 불구하고 미국 다음 가는 세계 제2의 수퍼파워로 부상했다. 소비에트 연방은 동유럽으로 공산정권을 확장하였고, 전 세계 공산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미국과의 군비 경쟁 비용과 공산주의식 중앙 통제 경제의 필연적인 비효율성은 결국 소비에트 연방의 토대를 잠식하고 말았다.
"우리는…한 국가가 다른 국가의 복종을 강요할 수 없는 연합을 원한다…"
V. I. 레닌
러시아가 소련으로, 소비에트 연방의 탄생(1922년).
제정시대의 러시아 제국은 겉으로 보아 강력한 통일체를 이루고 있었다.
그 통일은 서로 다른 언어 · 관습 · 문화 등등, 여러 민족의 고유한 특성들을 폭력으로 눌러서 유지해온 통일이었다.
제국 내에 있는 각 민족의 자유로운 발전을 저해해온 이러한 '통일'은 마땅히 타파돼야 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10월혁명을 성공시킨 뒤 2주 후에 〈러시아 내 모든 민족의 권리선언〉을 발표했다.
〈선언〉은 동등권과 자주권, 나아가 분리독립권까지를 포함하는 각 민족의 완전한 자결권을 확립하고, 모든 종류의 민족적 · 종교적 특권과 제한을 폐지했다.
그 시행의 한 예로, 1979년 12월 인민위원회는 핀란드 정부의 요청에 따라 핀란드 공화국의 독립을 승인해주도록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에 제안했고, 중앙집행위는 이를 승인했다.
그루지야가 독자행동을 하는 등 다소 유여곡절을 겪기는 했으나, 공동의 혁명투쟁과 내전 속에서 형성된 여러 민족의 통일감은 곧 국가적 통일로 성장해갔다.
내전이 종반으로 접어든 1920년경, 옛 러시아 제국의 영토에는 크게 세 가지 범주의 권력이 확립돼 있었다.
독일군이 진주했던 폴란드, 발트 3국, 핀란드와 루마니아군이 점령한 베사라비야는 소비에트 국가로부터 완전히 떨어져나갔다.
러시아의 중앙부에는 러시아 사회주의연방 소비에트 공화국이 비러시아계 소수민족들을 자치 단위로 끌어안고서 혁명국가의 핵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 주변에는 각기 성격이 조금씩 다른 8개의 공화국이 있었다.
8개 공화국 중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그루지야의 5개 국가에는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이 수립됐고 당시 유일하게 멘셰비키가 주도하던 그루지야는 연합국과 연대하여 소비에트 정부에 저항했으나, 1921년 2월 민중봉기가 일어난 틈을 타 붉은군대가 진주하여 소비에트 권력을 세운다.
중앙아시아의 호레즘과 부하라에는 인민 소비에트공화국, 시베리아의 치타에는 극동공화국이 수립돼 있었다.
러시아까지 9개 공화국 중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수립한 6개 공화국에서, 힘을 합쳐 간섭군과 싸우고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한 동맹의 기운이 강하게 일기 시작했다.
공동투쟁 속에서 각 공화국의 군사 · 정치동맹이 형성, 강화돼가던 1920년 2월, 외교동맹이 먼저 성립됐다.
제노바에서 열린 유럽 경제회의에서 각 소비에트 공화국이 러시아 공화국에 자기네 이름으로 임의의 국가와 조약 또는 협정을 체결할 것을 위임한 것이다.
1922년 4월에는 소비에트 대표단이 6개 형제국의 이름으로 전면 군축, 서로 다른 체제를 가진 국가의 평화 공존 · 호혜평등의 경제협력을 제안했다.
공화국 간에 조약이 체결되면서 공동의 행동을 조정 · 통합하고자 하는 경향이 더욱 뚜렷해졌다.
조약들은 군대와 몇몇 경제 · 행정기관의 통합을 규정하고 있었다.
1922년 봄, 카프카스 산맥 너머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그루지야의 3국은 자카프카스 사회주의연방 소비에트공화국을 창설하는 조약을 맺었다.
뒤이어 자카프카스 연방과 다른 소비에트 공화국들 사이에서 단일 연방국가를 창설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레닌의 제안에 따라 소비에트 연방의 구성안이 마련됐다. 즉, 모든 공화국이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자유의사로 연방에 가입하며, 중앙에 최고권력기관으로 연방 중앙집행위를 둔다는 안이었다.
1922년 12월 23일,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에서 제10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열렸다.
대회는 "러시아 연방, 우크라이나, 자카프카스 연방, 벨로루시 공화국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으로 통합하는 데 찬성한다"는 결의를 채택했다.
직전에 열린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자카프카스의 각 소비에트 대회도 단일 연방국가의 창설에 찬동했다.
극동공화국은 그보다 조금 앞서 미군과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한 후 러시아 연방공화국에 흡수 통합됐다.
12월 30일 네 공화국의 대의원들이 제1차 전 연방 소비에트 대회에 참석했다.
대회에서 소비에트 연방의 결성이 제창되고, 선언과 동맹조약이 채택됐다.
선언문에는 "연방이 여러 민족의 자발적 통합이라는 것, 각 공화국의 자유로운 연방 탈퇴권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 지금 존재하거나 앞으로 세워질 모든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에게 연방가입의 문호가 열려 있다는 것, 새로운 연방국가는 1917년 10월에 이미 구축된 모든 민족의 평화공존과 협력의 토대를 더욱 확고히 다져 완성했다는 것"이 명시됐다.
1924년 1월, 제2차 연방 소비에트 대회에서 1차 대회의 선언과 조약을 토대로 해서 만든 소련 헌법이 승인됐다.
1920년대 말, 중앙아시아의 3개 공화국이 소련의 연방구성 공화국으로 인정되면서 소비에트 연방은 완성됐다.
소비에트 연방은 새로이 성립되는 소비에트 공화국에 문호를 개방하고 모든 민족의 동등권을 확립한다는 취지하에 종래의 '러시아'라는 역사적 · 지리적 · 민족적 호칭을 버렸다.
이후 소비에트 연방은 그냥 '소련'으로 불리고, '러시아'는 연방 최대의 러시아 공화국과 대러시아 민족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소련은 이후 유라시아 대륙 북부의 드넓은 영토에서 사회주의를 발전시켜가면서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는 강력한 제2의 체제를 수립하여 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트로츠키와 스탈린, 레닌의 죽음과 스탈린의 대두(1924년).
1922년 12월 두 번째로 쓰러져 누운 병상에서 레닌은 여러 편의 논문과 편지를 구술하여 소련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레닌은 사회주의 건설의 기본명제로서, 공업화의 강력한 추진, 협동조합의 발전을 통한 농업의 사회화, 문화혁명, 모든 민족의 평등우호 관계, 노동자 계급의 지도적 역할과 노농동맹의 강화, 대중의 창조력 중시, 당과 대중의 긴밀한 결합, 집단토론을 통한 의사결정 등을 역설했다.
이 시기에 구술한 것 중에 흔히 레닌의 '정치 유언'이라고 불리는 〈대회에 보낸 편지〉가 있다.
편지에 묘사된 몇몇 지도자의 특징 묘사는 날카롭고도 흥미롭다.
스탈린에 대해서는, 당의 뛰어난 활동가임을 인정하는 한편으로 그의 결함을 비판하여 "서기장이 되어 무한한 권력을 손에 쥔 그가 이 권력을 늘 신중하게 행사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겠다"고 썼다.
레닌이 세 번째로 쓰러진 후 1923년 4월에 열린 제12차 당대회에서 레닌의 우려는 곧 현실로 드러났다.
당시 공산당 내에는 크게 세 가지 조류가 있었다.
부하린이 이끄는 우파도 러시아의 사회주의가 세계혁명의 성공 여부에 달렸다는 데에는 생각을 같이했다.
스탈린이 이끄는 중도파는 처음에는 자기 목소리를 갖지 않고 양자의 견해를 조정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러한 이론투쟁에, 당과 중앙위원회와 서기국의 권한강화에 대한 반발이 덧붙여졌다. 당내에 심각한 대립이 발생했다.
자신의 강력한 버팀대였던 레닌이 쓰러진 후, 신참 볼셰비키 트로츠키는 당에서 점점 고립돼갔다.
트로츠키가 1923년 10월 중앙위원회로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서 그는 경제정책을 호되게 비판한 후 '서기국 관료주의'를 '당내 민주주의'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닌이 죽은 후 '레닌 입당'으로 노동자들이 대거 공산당에 가입했다.
궁지에 몰린 트로츠키는 날카로운 필봉을 휘두르며 저항했다.
트로츠키 공격의 선봉에 나선 것은 스탈린이 아니라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였다.
1927년 곡물수매 위기가 빚어지면서, 스탈린은 좌선회하여 이전 좌파들의 주장을 대폭 받아들이고 농업의 희생을 토대로 한 급속한 공업화에 착수한다.
스탈린이 최고지도자의 자리에 오른 것은 당 권력의 강화와 당의 대중화, 당내의 그의 지위에 힘입은 바 컸으나, 당시 상황에 가장 적합한 국가건설의 방향을 제시한 측면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1927년 12월 27일 제15차 당대회는 '당의 일반노선으로부터의 이탈'을 철저하게 비판하면서 스탈린의 권위를 굳혀주었다.
소비에트 연방 최후의 날 ,
한 장의 간단한 성명서와 함께 소련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1991년 말, 러시아 대통령 보리스 옐친과 우크라이나 대통령 레오니드 크라브추크, 벨라루스 대통령 스타니슬라우 슈슈케비치가 한자리에 모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더 이상 존속하지 않는다는 데에 합의하였다.
지난 8월 모스크바에서 쿠데타 시도가 일어난 뒤 소련 공산당은 급격히 위축되었으며, 그 권력과 특권도 붕괴되었다.
옐친에게 소련과 소련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불편한 존재로 남아 있었다.
전자를 없애면 후자도 자연히 따라서 사라지게 되며, 러시아 연방 내에서 옐친의 권력을 확고하게 해줄 것이었다.
그는 독립국가연합(CIS)이 소비에트 연방을 대체하고 세계에서 소련이 차지해왔던 지위를 유지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소비에트 연방 소속이었던 공화국 대다수, 특히 우크라이나는 CIS가 러시아에의 종속을 끝낼 수 있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였다.
심지어 발트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은 아예 CIS 가입을 거부하였다.
많은 러시아인들은 소련이 소유했던 힘의 상실을 아쉬워했고, 우크라이나가 영구적으로 떨어져나갔다는 사실을 수용하지 못했다.
러시아와 전 소비에트 연방 회원국들과의 관계는 항상 불편했으며, 이들 중 다수는 러시아가 자국의 내정에 간섭한다고 분노하였다.
이들 나라에 거주하는 2,500만 러시아인들은 하루 아침에 외국인이 되어버렸으며, 종종 심각한 차별 대우를 받았다.
러시아 연방 내에 존속한 민족 가운데 일부도 독립 투쟁에 나섰다.
1994년 체첸이 독립을 선언하자 야만적인 전쟁이 발발하였다.
러시아 내부에서는 극단적인 민족주의 세력이 등장하여 인종 차별적인 폭력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지금도 전 소련 회원국들은 많은 러시아인이 잃어버린 제국을 되찾기를 꿈꾸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브레즈네프와 1970년경의 소련사회
'발달한 사회주의' 선언(1971년)
1964년 10월, 흐루쇼프는 '건강상의 이유'로 당 제1서기직과 수상직을 내놓고 초야에 묻혔다.
당 기구를 공업과 농업의 두 부문으로 분할한 것, 경제관리의 지역 분권화, 스탈린 비판의 본격화, 독선적인 결정과 집행 등이 당 간부들의 불만을 산데다, 경제성장이 둔화되고 중점사업으로 추진한 농업정책에서까지도 부작용이 일어나면서 흐루쇼프의 기반이 무너져버린 것이다.
후임으로는 당 제1서기에 브레즈네프, 수상에 코시긴이 취임했다.
브레즈네프는 직업기술학교 출신의 농업기사로, 1930년대에 당 주위원회 서기로 진출한 뒤 승진을 거듭해온 전형적인 당료였다.
브레즈네프-코시긴의 양두체제는 당과 정부의 권한을 분할 장악하여 서로 협력하며 국정을 이끌어갔다.
브레즈네프와 코시긴은 흐루쇼프의 여러 개혁정책을 원점으로 돌리고, 안정성장을 지향하는 정책을 유도했다.
그와 더불어, 기업관리자에게 어느 정도 자율권을 부여하고, 이윤을 많이 내는 기업에 상여금을 많이 배당하여 물적 자극을 주는 것을 골자로 하는 부분적인 경제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이 '코시긴 개혁'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60년대 후반에는 60년대 전반에 비해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기는 했으나, 그 성과는 그리 크지 않았고, 60년대 말에 이르러 임금상승에 대비한 생산성 상승폭이 떨어지면서 노동규율의 강화라는 이전 방식으로 회귀하고 만다.
개혁조치는 비록 실패로 돌아갔으나, 브레즈네프는 사회주의 계획경제가 쌓아올린 그동안의 성과를 바탕으로 인민의 복지향상에 눈을 돌릴 수 있었다.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새로운 연금법이 시행됐고, 1967년에는 주휴 2일제가 전면 도입됐다.
1971년 제24차 당대회에서 브레즈네프는 소련이 '발달한 사회주의' 사회가 됐다고 선언했다.
사회주의의 초급단계를 지나 완전한 공산주의 단계로 이행해가는 과도기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경제발전에 관한 흐루쇼프의 지나친 낙관론을 현실에 맞게 수정하여 새로운 성장전략을 수립하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새로운 전략에서는 소비재 생산의 확대와 과학기술의 발전이 강조됐다.
브레즈네프는 그와 함께, 국민들의 지나친 기대상승과 이념의 이탈을 막기 위해, 과도한 소비를 배격하고 '사회주의적 생활양식'과 '사회주의적 인간형'을 강조했다.
사회주의적 연대 · 도덕성 등이 중요한 덕목으로 제시됐다.
농업과 소비재 산업의 저성장에 따른 국민경제의 불균형 발전, 행정 · 명령형 경제관리체계의 문제점 등이 노출되기는 했으나, 1950년대와 1960년대를 거치며 소련에서는 공업화 · 기계화 · 계획경제의 성과가 축적되어 1970년경에 이르면 이전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회가 형성된다.
카자흐스탄, 시베리아, 알타이 등지의 처녀지 개척사업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점점 그 웅자를 드러내, 제2, 제3의 곡창지대를 출현시켰다.
아무다리야 강의 운하는 서투르케스탄의 사막을 옥토로 바꾸어놓았다.
낙후돼 있던 외곽의 소수민족 거주지에 많은 공장이 들어서면서 지역적인 불균형과 격차도 크게 해소됐다.
곳곳마다 거대한 콤비나트, 강력한 발전소가 건설됐고, 그 주변에 광공업과 농업을 연관 지은 복합생산단지가 만들어졌다.
과학기술이 진보하면서 산업이 계속 성장함과 동시에 공업구조도 크게 바뀌었다.
노보시비르스크 교외의 과학도시, 아카뎀고로도크를 비롯한 대단위 연구단지의 훌륭한 시설과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소련의 과학자들은 미국에 버금가는 수준의 과학기술을 발전시켰고, 그에 따라 무선공학 · 전자공학 · 원자력공학 · 화학공학 · 기계공학 등, 고도의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하는 산업의 비중이 점점 커졌다.
공업부문의 연이은 고도성장에 힘입어 미국과의 총산업생산 격차는 1950년의 3.6:1에서 1970년에는 1.2:1로 줄어들었다.
1917년 10월혁명 이후 50년 동안에 소련인구는 1억 4,000만에서 2억 5,000만으로 늘었고, 그중 도시민의 비율은 20% 미만에서 50% 이상으로 증가했다.
노동자의 수도 급증하여 1970년대에는 전 국민의 약 60%가 노동자가 됐다.
공업화의 진전이 사회를 이렇게 변화시킨 것이다.
더욱이 사회의 중추를 이루는 노동자와 콜호스 농민에 대한 정부의 관심은 각별하여, 인텔리겐치아와 다름없는 생활을 보장받았고, 그 자녀들도 전혀 차별 없이 훌륭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와 더불어 국민들의 전반적인 생활수준도 크게 향상됐다.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없어졌고,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완비된 각종 연금 · 보험제도가 뿌리를 내리고, 무료 진료체계가 효율적으로 재편되어 모든 국민이 유사시나 노후의 걱정을 덜었다.
4년제 초등과정과 8년제(후에 10년제로 바뀜) 중등과정의 무상 의무교육이 실시됐고, 대학을 비롯한 고등교육기관의 수도 크게 늘어, 청년층의 약 30%가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도서관과 장서도 크게 늘어 소련인은 세계에서 가장 책을 많이 읽는 국민이 됐다.
거의 모든 국민이 악기 하나 정도는 다룰 줄 알았고, 예술창작과 체육활동에도 뜻만 있으면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었다.
소련인민들은 혁명이 그들을 위해 이뤄놓은 성과를 깊이 의식하고 그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들은 간혹 체제의 엄격함에 눈이 돌아가기도 했으나, 적어도 1970년대 중엽까지는 혁명의 성과가 그것을 덮어두기에 충분했다.
브레즈네프 시대의 소련사회는 변화무쌍한 자본주의 사회의 시각으로 보면 지루하게 느껴질 만큼 절대적인 안정을 유지했다.
적어도 국내에서는 계속되는 건설의 기계 소리, 망치 소리를 빼고는 변화의 움직임조차 느낄 수 없을 정도였다.
소련은 이 무서운 힘을 배경으로 미국과 맞서며 세계의 한 축을 형성했다.
그러나 사회의 안정은 한편으로 정체와 부패를 낳았다.
노동규율은 점점 느슨해졌고, 경제성장은 갈수록 둔화됐다.
국민들 사이에 공과 사의 구분이 만연하면서 공적인 영역의 공동화(空洞化)가 진행됐고, 이론파(異論派) 탄압을 계기로 사회에 폐쇄적인 분위기가 강화되기 시작했다.
1977년 새헌법인 '브레즈네프 헌법'이 제정되고 '성숙한 사회주의' 체제가 공표됐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때부터 소련의 상처는 안으로부터 서서히 곪아가고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상처가 그리 깊지 않아, 별 위험이 따르지 않는 수술로 치유할 수 있는 정도였다.
더 무서운 것은 폐쇄적인 관료체제였다.
경직된 관료체제는 이 위기를 깨닫지 못했고,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문제들을 은폐하기에 급급했다.
그 사이에 상처는 하루하루 더 깊어만 갔다.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Sergeyevich Gorbachyev .
-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추진하여 소련 국내의 개혁과 개방뿐 아니라, 동유럽의 민주화 개혁 등 세계질서에도 큰 변혁을 가져왔다.
- 199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으며, 1991년 공산당을 해체하여 소련의 공산 통치사에 마침표를 찍었다.
캅카스산맥 북쪽의 스타브로폴 지방 프리블례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콤바인을 운전하며 5년간 농장일을 하다가 19세 때인 1950년 모스크바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 2학년 때인 1952년 공산당에 입당하여 교내의 콤소몰(공산주의청년동맹) 조직원으로 활약하였다.
5년간의 대학과정을 마치고 1955년 고향 스타브로폴로 돌아와 콤소몰 서기로 일하다가, 1968년 지구당 제1서기를 거쳐 1971년 소련공산당 중앙위원이 되었다.
1978년 농업담당 당서기로 취임한 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지원을 받아 대규모 농업투자정책을 수행하였다.
1980년 정치국원으로 선출되어 권력의 핵심권에 접근, 유리 안드로포프가 집권하자 그의 후계자로 지목되었고, 콘스탄틴 체르넨코의 집권기간 중에도 제2인자의 위치를 굳혔다.
1985년 3월 체르넨코가 사망하자 당서기장에 선출된 뒤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추진하여 소련 국내에서의 개혁과 개방뿐만 아니라, 동유럽의 민주화 개혁 등 세계질서에도 큰 변혁을 가져오게 하였다.
1988년 연방최고회의 간부회의장을 겸하고, 1990년 3월 소련 최초의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며, 같은 해 세계 평화에 기여한 공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1991년 7월 마르크스-레닌주의 및 계급투쟁 포기의 소련공산당 새 강령을 마련하였다.
이와 같은 개혁의지는 1991년 8월 보수강경파에 의한 쿠데타를 유발시켜 한때 실각하였다가 쿠데타의 실패로 3일만에 복권하고, 공산당을 해체, 소련의 70년 공산 통치사에 종막을 고하게 하였다.
보리스 옐친 등의 주도로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되고 독립국연합이 탄생하자 1991년 12월 25일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사임 후 1992년에 국제 환경보호 운동과 전쟁난민 아동구호 사업 등을 목적으로 하는 고르바초프재단을 설립하였으며, 1993년 4월에 설립된 국제환경비정부기구 그린크로스인터내셔널의 초대 총장을 맡았다.
이후 환경운동에 앞장서 2007년에는 시사주간지 《타임》에서 선정한 '45인의 환경 영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으며, 2008년에는 2011년의 러시아 총선을 목표로 정계 복귀를 선언하기도 하였다.
1991년 한국과 소련의 수교 기념식 참석차 방한하였고, 2001년 11월 동아일보사와 인촌기념회의 초청으로 방한하여 고려대학교에서 '세계 정세와 한반도의 미래'라는 주제로 강연회를 열었다.
2008년 9월에도 그린크로스인터내셔널의 의장으로서 환경재단 기후변화센터와 세계사이버대학의 초청으로 방한하여 '러시아에서 투발루까지-기후변화와 인류의 미래'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이분이 최고 같읍니다...
보리스 옐친, Boris Nikolaevich Yeltsin .
우랄산맥 부근 부트카촌(村) 농가에서 태어나 공업도시 스베르들롭스크에서 성장하였다.
건축기사로 지내다가 1961년 공산당에 입당, 1976년 스베르들롭스크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를 거쳐 1981년 소련공산당 중앙위원이 되었으며, 이때부터 M.S.고르바초프와 친분을 맺기 시작하였다.
1985년 고르바초프가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되면서 옐친은 그에 의하여 모스크바시 당 제1서기와 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발탁, 일약 중앙정계로 부상하였다.
1987년 당 중앙위원회에서 당의 개혁의지 부족을 비판하고 급진적인 개혁을 요구하다 당내 보수세력에 의하여 정치국으로 밀려났다.
그 후 더욱 급진적 개혁논리를 주창, 수구적 자세를 맹렬히 공격하면서 개혁에 필요한 사회적 분위기 조성에 주도적 역할을 하여 대중의 절대적 지지를 획득하였으며, 1989년 새로 구성된 소련인민대표대회의 선거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었다.
의회 내에서 공산당 권력독점의 폐기를 주장하는 야당세력을 이끌어 오다가, 1990년 5월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체제내 야당'에서 권력의 핵심부로 군림하게 되었다.
당선 후 그는 “나는 소련의 주권과 15개 공화국의 평등 및 독립을 지지하며, 그것이 연방(소련)을 강화할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1991년 8월 19일 보수강경파에 의한 쿠데타가 발생하자 즉각 반(反)쿠데타세력의 선봉에 서서 소련 국민에게 저항할 것을 호소하며 총파업을 촉구, 60시간 만에 쿠데타를 실패로 끝나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그 후 고르바초프의 권력은 급속히 약해지고 옐친은 고르바초프의 미온적인 개혁정책을 맹렬히 비판하면서 그 해 12월 21일 발트 3국과 그루지야를 제외한 11개 공화국을 참여시켜 독립국가연합(CIS)을 결성하고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우크라이나공화국과의 CIS 주도권 싸움과 경제개혁의 실패, 군부의 반발 등으로 그의 정권유지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1992년 3월 러시아연방의 자치공화국들과 신연방조약을 맺고, 4월 경제개혁을 주도해 온 가이다르와 함께 내각 총사퇴를 표명함으로써 위기를 넘기게 되었다.
보수파가 주도하는 인민대표대회와의 날카로운 대립을 12월 타협으로 이끌고 1993년 4월 25일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결국 자신의 개혁의지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1999년 12월 31일 건강문제와 후진 양성을 이유로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를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지명하고 대통령직에서 사임하였다.
2007년 4월 23일 지병인 심장질환으로 타계했다.
| 이 름 | 재임기간 |
제1대 대통령 | 1991.07 ~ 1999.12 | |
제2대 대통령 | 1999.12 ~ 2008.05 | |
제3대 대통령 | 2008.05 ~ 2012.05 | |
제4대 대통령 | 2012.05 ~ 현재 |
개혁과 개방의 진통, 보 · 혁 갈등 시작(1987년).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이 되어 페레스트로이카에 착수할 당시, 세 파는 모두 같은 인식을 갖고 있었다.
1987년 후반까지 페레스트로이카는 세계인의 관심하에 온 국민의 호응을 받으며 순조롭게 진행됐고, 세 사람 사이에도 별문제가 없었다.
이때까지 옐친은 지지자가 별로 없는 독불장군이었다.
정통보수파는 이 사건을 계기로 페레스트로이카의 과도한 진전에 우려를 갖기 시작했다.
보수파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지 않으면 개혁이 도중 하차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고르바초프는 《프라브다》 편집부에 반박 논문을 게재하도록 요청했다.
광범한 정치개혁을 결의한 1988년 6월 제19차 당협의회를 기점으로 보 · 혁 논쟁의 2단계가 시작된다.
개혁파 · 보수파 · 급진개혁파의 구도가 확실하게 자리를 잡은 것은 이 무렵이다.
급진개혁파는 페레스트로이카, 즉 개혁과 재편의 차원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의 지속을 강조하면서, 당내 보수파의 입지는 약화됐다. 1988년 9월의 정치국 인사에서 보수파인 그로미코가 은퇴하고 리가초프가 이데올로기 담당에서 물러나 농업 담당으로 좌천됐다.
1989년 3월의 인민대의원 선거에서 옐친 등 급진개혁파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지역구에서 압승을 거두고 정계에 복귀했다.
7월에는 광부들의 대파업이 일어나 페레스트로이카의 위기를 심화시켰다.
정치경제의 위기에 더하여 이념적 혼란이 극심해진 상황에서 고르바초프는 당 개혁을 통해 개혁의 주도권을 확보하고자, 1991년으로 예정된 제28차 당대회를 1990년 7월에 앞당겨 열었다.
제28차 당대회의 다수파는 여전히 정통보수파와 중간파였다.
제28차 당대회를 계기로 보 · 혁 대립은 새로운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이후 보 · 혁 대립은 사실상 이념투쟁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정통보수파와 개혁주도파는 경제와 사회 전반의 위기를 극복하고 사회주의를 재건하려는 목적은 같았으나, 정통보수파가 더 이상의 개혁진행, 특히 시장요소의 급속한 도입은 사회주의의 붕괴를 가져온다고 생각하여 반대한 반면에, 개혁주도파는 개혁을 계속 진전시키고 시장경제를 도입해야 사회주의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페레스트로이카가 질척거리기 시작하면서 국론은 크게 양분됐다.
무너진 3일천하, 좌익 쿠데타의 실패와 옐친의 대두(1991년).
곧, 8인 비상사태위원회 위원의 면면이 밝혀졌다.
이들은 하루 전인 8월 18일, 크림 반도의 별장에서 고르바초프에게 비상사태선언 동조냐 사임이냐의 선택을 요구했다.
최고권력을 눈앞에 두고 있던 옐친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쿠데타가 발생한 지 몇 시간 안 돼서, 옐친은 주저 없이 러시아 공화국의 통제권을 자신이 전면 장악한다고 선언하고 불법 쿠데타에 대한 시민항쟁과 총파업을 촉구했다.
비상사태위원회는 그제서야 옐친과 러시아 공화국 지도자들을 검거하려 했으나, 이들은 이미 러시아 공화국 의사당으로 피신해 있었고, 의사당 주변에는 옐친 지지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8월 20일 오후, 주요 도시에서 총인원 80만이 참여하는 반쿠데타 집회와 시위가 전개됐다.
그날 밤, KGB 특수부대에 러시아 공화국 의사당을 공격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일단 거사하면 시민들이 묵묵히 사태를 받아들이리라고 생각한 쿠데타 지도부는 의외의 사태전개에 당황했다.
이것이 '3일천하'로 끝난 8월 19일 소련 보수 쿠데타의 전말이다.
소련에 쿠데타 가능성이 비치기 시작한 것은 1990년 말부터다.
1991년에 들어서면서 경제위기가 점점 심각해졌다.
사람들의 가장 큰 불만은 예전의 국가사회주의 체제로 쏠렸다.
이런 분위기에서 온건개혁 주장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갔고, 급진파는 이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도입을 노골적으로 주장하며 고르바초프에 대한 공세를 강화해갔다.
한편, 체제수호 세력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진퇴양난에 빠져 있던 고르바초프는 마침내 상황의 발전을 받아들이고, 4월 들어 옐친과 화해한 후 공화국들을 주체로 하는 새로운 연방을 구성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보수파는 다급해졌다.
쿠데타는 옐친이라는 영웅을 탄생시켰다.
가장 참담한 파멸을 맞은 것은 공산당이었다. 74년간이나 소련을 이끄는 집단으로서 최고의 권위를 누려온 공산당은, 쿠데타 실패 후 며칠 만에 구악을 대표하는 세력으로 지탄받으며 무대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쿠데타의 결행과 실패는 소련정국을 덮고 있던 안개를 깨끗이 걷어내고 옐친이 나아갈 길을 닦아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9월 6일, 전 세계에 생중계된 외국 언론사와의 합동 인터뷰에서 고르바초프는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의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볼 때, 이 땅에서 생겨난 공산주의 모델은 실패했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옐친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우리 땅에서 그런 실험이 있었다는 사실이 우리 국민들에게 큰 비극이었습니다."
후회많이들 했겠다.???? 글쓴이생각입니다.
러시아역사 연표
BC 10세기 - BC 9세기 | 자카프카스, 중앙아시아, 흑해 북안 등지에 우라르투, 호라즘, 킴메리아 등 고대국가 성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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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8세기 | 스키타이인, 흑해 북안 초원지대에 진출 |
BC 5세기 | 흑해 북안에 보스포루스 왕국 성립 |
BC 3세기 | 이란계 사르마트인, 흑해 북안 진출 |
AD 1세기 | 훈 족, 볼가 강 · 우랄 강 유역에 정착 |
AD 3세기 | 게르만계 고트 족 남하, 흑해 초원에 출현 |
372년경(이하 AD) | 훈 족, 서진 개시 |
453년 | 훈 족의 아틸라 제국 붕괴 |
5세기경 | 슬라브인, 동 · 서 · 남의 세 갈래로 분화 |
6세기 | 슬라브인, 드네프르 강 유역 진출. 흑해 초원에 투르크계 아바르인 진출 |
7세기 | 흑해, 카스피 해 연안에 하자르 국 성립 |
8세기 | 바랴기(노르만인), 루시의 땅에 출현 |
862년 | 류리크, 노브고로트에 진출 |
863년 | 비잔틴의 키릴로스, 글라골 문자를 만들어 모라비아에서 선교 |
882년 | 올레크가 남하, 키예프 점령('키예프 러시아' 탄생) |
907년 | 올레크, 콘스탄티노플 공략, 조약 체결 |
10세기 초 | 투루크계 페체네크인, 흑해 초원 진출 |
945년 | 이고리, 트레블랴닌 족과 싸우다 죽음 |
10세기 중엽 | 키릴 문자 전래 |
957년 | 올가, 기독교로 개종 |
965년 | 스뱌토슬라프, 하자르 공략 |
968년 | 스뱌토슬라프, 불가리아 원정 |
972년 | 스뱌토슬라프, 페체네크인에게 피살 |
980년 | 블라디미르, 키예프 대공위에 오름 |
988년 | 블라디미르, 기독교(그리스 정교)를 국교로 정하고 비잔틴 황제의 누이 안나를 왕비로 맞아들임 |
1019년 | 야로슬라프, 키예프 입성 |
1039년 | 키예프에 성 소피아 대성당 건축 |
11세기 전반 | 〈루스카야 프라브다〉편찬 착수 |
1068년 | 투르크계 폴로베츠인, 흑해 초원 진출 |
1097년 | 키예프 대공국, 분열 시작 |
1113년 | 블라디미르 모노마흐 즉위. 〈원초 연대기〉 편찬 |
1130년경 | 노브고로트에 민회 중심의 공화제 성립 |
1147년 | 한 연대기에 '모스크바' 처음 등장 |
1169년 | 동북 루시의 안드레이 보골류프스키, 키예프 공략 |
1187년경 | 〈이고리 공 원정기〉씌어짐 |
12세기 말 | 독일인, 발트 해 동안의 리보니아에 식민 개시 |
1202년 | 리보니아에 '도검기사 수도회' 세워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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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3년 | 칼가 강변의 전투(몽골군, 러시아에 출현) |
1237년 | 바투 휘하의 몽골군 침입, '타타르의 멍에' 시작 |
1238년 | 몽골군, 모스크바 공략. 블라디미르 대공국 괴멸 |
1240년 |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네바 강변에서 스웨덴 군 격파. 몽골군, 키예프 점령 |
1242년 |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독일 기사단 격파 |
1243년 | 몽골인, 킵차크 한국 세움 |
1276년경 | 다닐 공, 모스크바 공에 오름. 모스크바 러시아 발전 시작 |
1304년경 | 블라디미르 대공 자리를 두고 모스크바와 트베리의 쟁패 시작. 리투아니아, 동방진출 개시 |
1325년 | 이반 칼리타, 모스크바 공에 오름(1328년, 블라디미르 대공) |
1340년경 | 세르기 라도네슈스키, 트로이체 수도원 창설 |
1359년 | 디미트리 돈스코이, 모스크바 대공이 됨 |
1380년 | 쿨리코보 전투, 디미트리 휘하의 러시아 군이 몽골군 격파 |
15세기 초 | 성상화가 루블료프 활약 |
1437년 | 카잔 한국 성립, 킵차크 한국 분열 |
1448년 | 러시아 정교회, 콘스탄티노플 총주교관으로부터 독립 |
1462년 | 이반 3세 즉위 |
1478년 | 모스크바, 노브고로트 병합 |
1482년 | 이반 3세, 비잔틴 제국 마지막 황제의 조카와 결혼하고 쌍두 독수리 문장과 '차르' 칭호를 쓰기 시작 |
1497년 | 이반 3세의 법전 완성(농민 이전의 자유 제한) |
1503년 | 러시아 교회 내에서 소유파가 무소유파에 승리 |
1533년 | 이반 4세 즉위 |
1547년 | 이반 4세, '차르'를 공식칭호로 채택 |
1549년 | 최초의 전국회의(젬스키 소보르) 소집 |
1551년 | 스토글라프 회의 |
1552년 | 카잔 한국 병합. 바실리 대성당 건축 개시. 수도 대주교 마카리, 〈대성자전 집성〉 편찬 |
1556년 | 아스트라한 한국 병합 |
1558년 - 1583년 | 스웨덴과 리보니아 전쟁 |
1564년 | 이반 표도르, 최초의 인쇄본 〈사도행전〉 출판 |
1565년 - 1572년 | 오프리치니나 체제 |
1569년 | 루블린 연합 결성,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 성립 |
1579년 | 에르마크, 시베리아 원정 개시 |
1581년 | 농민 이전 '금지의 해' 시작 |
1589년 | 모스크바 총주교관 창설 |
1598년 | 류리크 왕조 단절. 보리스 고두노프, 차르로 선출됨 |
1604년 | 가짜 디미트리 거병, 동란(스무타) 시대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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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6년 - 1607년 | 볼로트니코프의 난 |
1610년 - 1612년 | 폴란드 군, 모스크바 점령. 러시아 국민군, 모스크바 해방시킴 |
1613년 | 미하일 로마노프 즉위, 로마노프 왕조 성립 |
1631년 | 키예프 신학교 설립 |
1645년 |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즉위 |
1648년 | 모스크바 '소금 폭동'. 우크라이나, 흐멜니츠키의 대 폴란드 반란 시작 |
1649년 | 〈회의법전〉 편찬(농노제, 법적으로 완성) |
1654년 | 총주교 니콘의 종교개혁, 분리파(라스콜니키) 형성 |
1654년 - 1667년 | 러시아-폴란드 전쟁 |
1670년 - 1671년 | 라진의 난 |
1682년 | 분리파 지도자 아바쿰 화형 |
1689년 | 표트르 1세, 실권 장악. 중국과 네르친스크 조약 체결 |
1697년 | 표트르 1세, 서유럽 '대사절단' 파견. '표트르의 개혁' 시작 |
1700년 - 1721년 | 스웨덴과 북방전쟁 |
1703년 - 1712년 | 신도시 페테르부르크 건설 |
1711년 | 원로원 개설 |
1713년 | 페테르부르크 천도 |
1719년 | 참사회(콜레기아) 설치 |
1721년 | 표트르, '황제' 칭호 사용, 러시아 제국 성립. 총주교제 폐지, 종무원(시노트) 설치 |
1722년 | 인두세 부과. 관등표 제정 |
1725년 | 과학 아카데미 창설. 베링의 북태평양 탐험 시작 |
1727년 | 중국과 캬흐타 조약 체결 |
1741년 |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즉위 |
1755년 | 모스크바 대학 창립 |
1756년 | 페테르부르크에 최초의 극장 개설 |
1762년 | 표트르 3세, 〈귀족의 자유에 관한 칙서〉 발표. 예카테리나 2세 즉위 |
1772년 - 1795년 | 폴란드 분할 |
1773년 - 1775년 | 푸가초프의 반란 |
1774년 | 투르크와 쿠추크 카이나르지 조약 체결, 흑해 진출 |
1783년 | 크림 한국 병합 |
1785년 | 귀족과 도시에 '특권인가장' 하사 |
1790년 | 라디시체프, 〈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까지의 여행〉 발표 |
1797년 | 장자 상속에 따른 제위계승법 제정 |
1798년 | 제2차 대불동맹 가담. 수보로프, 이탈리아와 스위스 원정 |
1801년 | 파벨 1세 암살, 알렉산드르 1세 즉위. '비밀위원회' 활동 개시. 그루지야 병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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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7년 | 틸지트 화약, 러시아 대륙봉쇄 가담 |
1809년 | 핀란드 병합. 스페란스키, 국가개조안 작성 |
1810년 | 국가평의회 발족 |
1812년 | 나폴레옹, 모스크바 원정(조국전쟁) |
1814년 | 러시아군, 파리 입성. 알렉산드르 1세, 빈 회의에서 신성동맹 제창 |
1816년 | 아락체예프, 실권 장악. 카람진, 〈러시아 국가사〉 발간 시작 |
1817년 | 카프카스 전쟁 시작 |
1819년 | 페테르부르크 대학 창립 |
1823년 | 푸시킨, 〈예브게니 오네긴〉 1, 2장 집필 |
1825년 | 데카브리스트의 반란. 니콜라이 1세 즉위.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 완공 |
1826년 | 황제직할청 제3부 설치. 검열법 제정 |
1828년 - 1829년 | 러시아-투르크 전쟁 |
1830년 | 〈러시아 제국 법률집성〉(전45권) 편찬 |
1830년 - 1831년 | 폴란드 반란 |
1832년 | 문교장관 우바로프, '전제 · 정교 · 국민정신'의 삼위일체론 제창 |
1833년 | 〈러시아 제국법전〉(전15권) 편찬 |
1836년 | 차다예프, 〈철학서한(제1편지)〉 러시아어로 출간. 서유럽파와 슬라브파의 논쟁 개시. 고골리의 〈검찰관〉 초연 |
1837년 | 러시아 최초의 철도 개통(페테르부르크-차르스코예 셀로) |
1847년 | 네크라소프, 〈현대인〉 창간 |
1849년 | 페트라셰프스키단 사건. 러시아군, 헝가리 혁명 압살 |
1853년 - 1856년 | 크림 전쟁 |
1855년 | 알렉산드르 2세 즉위 |
1857년 | 농노해방 준비 착수. 게르첸, 〈종(콜로콜)〉 발간 |
1858년 | 중국과 아이훈 조약 체결(아무르 강 동쪽 해안 획득) |
1859년 | 북카프카스 민족 지도자 샤밀 체포. 곤차로프, 〈오믈로모프〉 발표 |
1861년 | 농노해방령 발표. 대개혁 본격 착수 |
1862년 | 투르게네프, 〈아버지와 아들〉 발표. 이 무렵, 러시아 국민악파 형성 |
1863년 | 체르니셰프스키, 〈무엇을 할 것인가〉 발표. 대학령 제정 |
1863년 - 1864년 | 폴란드 반란 |
1864년 | 사법개혁. 젬스토브 설치 |
1865년 | 타슈켄트 점령, 중앙아시아 진출 개시 |
1866년 | 도스토옙스키, 〈죄와 벌〉 발표 |
1867년 | 알래스카, 미국에 매각 |
1869년 |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발표. 멘델레예프, 원소주기율 발견 |
1872년 | 〈자본론〉 제1권 러시아어 번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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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 | 3제동맹 결성(러 · 독 · 오) |
1873년 - 1875년 | '인민 속으로'(브나로드) 운동 |
1874년 | 무스르크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 초연 |
1876년 | '토지와 자유' 결성 |
1877년 - 1878년 | 러시아 · 투르크 전쟁 |
1878년 | 자술리치, 수도 지사 저격 |
1879년 | '토지와 자유' 분열. '인민의 의지', 테러리즘을 주요 투쟁수단으로 채택 |
1881년 |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알렉산드르 3세 즉위 |
1883년 | 노동자해방단 결성 |
1884년 | 신대학령 발표, 대학자치 철폐 |
1885년 | 플레하노프, 〈우리 의견의 차이〉 발표 |
1889년 | 지방관리관(젬스키 나찰니크)제 실시, 농민지배 강화 |
1890년 | 젬스트보 법 개정, 지방자치 제한 |
1891년 | 대기근. 시베리아 철도 착공 |
1892년 | 비테, 재무장관이 됨. 트레티야코프, 회화 소집품 모스크바 시에 기증 |
1893년 | 블류소프, 시문집 〈러시아 상징파〉 발표 |
1894년 | 러 · 불동맹 결성. 니콜라이 2세 즉위 |
1895년 | 독 · 불과 대 일본 삼국간섭. '페테르부르크 노동자계급 해방투쟁동맹' 결성 |
1896년 | 동청철도 계약. 페테르부르크 방직 노동자 총파업 |
1897년 | 금본위제 도입. 최초의 전국 국세 조사 |
1898년 |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1차 대회. 〈예술세계〉 창간. 모스크바 예술극장 개관 |
1900년 | 만주 점령. 〈이스크라〉 창간 |
1901년 | 학생운동 격화. 사회혁명당(SR) 결성 |
1902년 | 농민폭동. 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 발표. 주바토프의 경찰사회주의 활발해짐 |
1903년 | 남부의 노동자 총파업. 유태인 포그롬. 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대회,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분열. '해방동맹' 결성 |
1904년 - 1905년 | 러일전쟁 |
1904년 | 플레베 내무장관 암살. 체호프의 〈벚꽃 동산〉 초연 |
1905년 | '피의 일요일' 사건. 포튬킨 호 반란. 두마 설치법 공포. 10월 총파업.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 결성. '10월선언' 발표. 모스크바 봉기 |
1906년 | 국가기본법 공포. 제1두마 열림. 스톨리핀, 수상이 됨. 스톨리핀, 농업개혁 착수 |
1907년 | 제2두마 열림. 두마 선거법 개정. 삼국협상 성립. 제3두마 열림. 고리키, 〈어머니〉 발표 |
1909년 | 발레 뤼스, 파리 공연 |
1911년 | 스톨리핀 암살 |
1912년 | 볼셰비키 당 결성. 레나금광 학살사건. 제4두마 열림 |
1914년 | 페테르부르크 노동자 총파업. 제1차 세계대전 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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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 러시아군의 대퇴각 |
1916년 | 중앙아시아 민족반란. 노동자들의 반전파업. 라스푸틴 피살 |
1917년 | 3월혁명(러시아력 2월혁명), 제정타도. 소비에트와 임시정부의 '이중권력' 탄생. 레닌 '4월 테제' 발표. 7월사건. 케렌스키의 연립정부 구성. 코르닐로프의 반란. 11월혁명(러시아력 10월혁명). '평화에 대한 포고' '토지에 관한 포고' '러시아 내 모든 민족의 권리선언' 발표. 레닌을 수반으로 하는 인민위원회 성립. 체카 창설. 최고국민경제회의 창설. 좌파 사회혁명당 입각 |
1918년 | 헌법제정회의 해산. '근로 · 피착취 인민의 권리선언' 발표. 적군 창설. 그레고리 력 사용(2월 1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조약 체결. 좌파 사회혁명당 퇴진. 모스크바 천도. 전시 공산주의 채택. 좌파 사회혁명당 반란. 헌법제정. 내전 및 외국간섭군과의 전쟁 시작 |
1919년 | 백군 총공세. 코민테른 창립. |
1920년 | GOELRO 창설. 붉은군대의 대공세. VAPP 결성 |
1921년 | GOSPLAN 창설. 크론슈타트 반란. 노동조합 논쟁. 신경제정책(NEP) 채택. 볼가 유역의 기근 |
1922년 | 스탈린 서기장 취임. 소비에트 연방 수립 |
1923년 | 트로츠키아 스탈린의 대립 시작, 공업화 논쟁 |
1924년 | 레닌 죽음. 연방헌법 공포. 프레오브라젠스키, '사회주의적 원시축적론' 발표. 스탈린, '일국사회주의론' 제기 |
1925년 | 트로츠키, 군사인민위원에서 해임됨. '사회주의적 공업화' 방침 결정. 에이젠슈타인, 〈전함 포튬킨〉 제작. RAPP 결성 |
1926년 | 합동반대파 형성. 〈소비에트 대백과사전〉 간행 개시. 트로츠키, 정치국에서 추방됨 |
1927년 | 영국이 단교 선언. 곡물조달 위기. 제15차 당대회(합동반대파 괴멸, 5개년계획. 농업집단화 결정) |
1928년 | 스탈린과 부하린의 대립. 숄로호프, 〈고요한 돈 강〉 발표. 제1차 5개년계획 착수(10월) |
1932년 | 우크라이나 등지에 대기근 발생 |
1933년 | 제2차 5개년계획 착수 |
1934년 | 국제연맹 가입. 작가동맹 발족('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기본적 창작방법으로 채택). 키로프 암살 |
1935년 | 아르텔 모범정관 채택. 모스크바 지하철 개통. 코민테른 제7차 대회, 인민전선 전술 채택. 스타하노프 운동 개시 |
1936년 | 제1차 모스크바 재판. 대숙청 개시. 예조프, 내무인민위원 취임. 스탈린 헌법 채택 |
1937년 | 제2차 모스크바 재판 |
1938년 | 제3차 5개년계획 착수. 제3차 모스크바 재판 |
1939년 | 독 · 소 불가침조약 체결.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소련군, 폴란드 진주. 소련 · 핀란드 전쟁 |
1940년 | 발트 3국, 몰도바 병합 |
1941년 | 독 · 소 전쟁(대조국전쟁) 개시. 독일군, 레닌그라드 봉쇄, 모스크바 공격 |
1942년 | 스탈린그라드 공방전 개시 |
1943년 |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 전투에서 독일군 괴멸 |
1944년 | 소련군, 전영토 수복 후 동유럽 진공 개시 |
1945년 | 얄타 회담. 독일 항복. 포츠담 회담. 대일 참전. 제2차 세계대전 종결 |
1946년 | 동서냉전 개시. '주다노프 비판'. 제4차 5개년계획 착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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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 코민포름 결성 |
1948년 | 코민포름에서 유고슬라비아 제명. 베를린 봉쇄 시작 |
1949년 | 레닌그라드 사건. 코메콘 창설. 원자폭탄 보유 |
1950년 | 중 · 소 우호동맹조약 체결. 한국전쟁에서 북한 지원 |
1951년 | 제5차 5개년계획 착수 |
1953년 | '의사단 음모사건' 발표. 스탈린 사망. 후임 수상에 말렌코프 취임. 베리야 사형. 수소폭탄 보유. 흐루쇼프, 제1서기 취임 |
1954년 | 처녀지 개간운동 시작. KGB 발족. 원자력발전소 가동. 에렌부르크, 〈해빙〉 발표 |
1955년 | 바르샤뱌 조약기구 결성. 피숙청자 명예회복 시작 |
1956년 | 제20차 당대회, 평화공존 선언, 스탈린 비판 비밀보고. 유고슬라비아와 관계 개선. 헝가리 사건. 〈역사의 문제들〉지, 스탈린 비판 개시 |
1957년 | '반당 그룹' 추방. ICBM 개발. 스푸트니크 1호 발사 |
1958년 | 흐루쇼프, 수상 겸임. 파스테르나크, 노벨 문학상 사절 |
1959년 | 흐루쇼프 미국 방문 |
1960년 | U2기 격추사건. 중소대립 표면화 |
1961년 | 가가린, 보스토크 1호로 지구궤도 일주. 제22차 당대회, 전인민국가론 채택, 제2차 스탈린 비판 |
1962년 | 리베르만의 논문, 〈프라브다〉 게재. 쿠바 위기. 〈노비 미르〉지에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게재 |
1963년 | 중소논쟁 개시. 미 · 영 · 소, 부분 핵실험 정지조약 조인 |
1964년 | 흐루쇼프 해임. 후임에 브레즈네프 제1서기, 코시긴 수상 취임 |
1965년 | '코시긴 개혁' 실시. 숄로호프, 노벨 문학상 수상 |
1966년 | 다니엘 · 시냐프스키 재판, 이론파 대두 |
1967년 | 주휴 2일제 도입. 솔제니친, 〈수용소군도〉 완성 |
1968년 | 미 · 영 · 소 등 62개국, 핵확산 금지 조약 조인. R. 메드베데프, 〈역사의 심판에 부쳐〉 완성. 체코슬로바키아 사건. '브레즈네프 독트린' 발표 |
1969년 | 우수리 강에서 중 · 소 무력충돌 |
1970년 | 서독과의 조약 조인. 사하로프 등, '인권위원회' 설립 |
1972년 | 미 · 소, SALT 1 조인 |
1974년 | BAM 철도 착공. 솔제니친 국외 추방 |
1975년 | 유럽의 안전보장과 협력에 관한 헬싱키 선언. 미 · 소 우주선 도킹에 성공. 사하로프, 노벨 평화상 수상 |
1977년 | 브레즈네프,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 겸임. 브레즈네프 헌법 채택 |
1979년 | 미 · 소 정상, SALT 2 합의. 소련군, 아프가니스탄 진주 |
1980년 | 코시긴 수상 사임. 사하로프, 고리키 시로 유형당함. 모스크바 올림픽 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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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 미 · 소 START(전략무기 감축교섭) 개시. 브레즈네프 사망, 후임 서기장에 안드로포프 |
1983년 | 자슬라프스카야, 〈노보시비르스크 각서〉 작성. KAL기 격추사건 |
1984년 | 안드로포프 사망, 후임에 체르넨코 |
1985년 | 체르넨코 사망, 고르바초프 서기장 취임. 경제의 '가속화' 강조. 반 알코올 투쟁. 제네바 미 · 소 정상회담 |
1986년 | 개인영업 인가. 제27차 당대회(새 강령. 규약 채택). 체르노빌 원전 사고. '페레스트로이카' 노선 채택. '글라스노스트' 본격화. 알마아타 민중폭동 발생 |
1987년 | 합작기업법 제정. 국영기업법 제정(기업의 자주관리와 독립채산제). 크림 타타르인, 자치 요구 시위. 옐친, 고르바초프, 스탈린 시대의 행정 · 명령형 지도체제와 정치탄압 비판. 옐친, 당 지도부와 보수파를 비판하다 모스크파 시당 제1서기에서 해임됨. 워싱턴 미 · 소 정상회담에서 INF 전폐조약 조인 |
1988년 | 부하린, 리코프 등 명예회복.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의 민족분규 시작. 안드레예바의 논문, 〈원칙을 양보할 수는 없다〉 발표. 협동조합법 채택.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등 복권. 제19차 당협의회(간부의 임기제, 당과 국가의 분리, 법개혁 등 확인). 발트 3국에서 '인민전선' 결성. 헌법개정(인민대의원대회 설치 등) |
1989년 | 아프가니스탄 철병 완료. 연방 인민 대의원 선거, 옐친 정계복귀. 고르바초프 중국방문, 중 · 소 화해. 대규모 광부 파업. 발트 3국, 주권선언. 급진파, '지역 간 대의원 그룹' 결성. 고르바초프, 〈사회주의 사상과 혁명적 페레스트로이카〉 발표. 몰타 미 · 소 정상회담, 냉전종식선언 |
1990년 | 아제르바이잔 사태 격화. 당 강령 및 규약 개정(공산당의 권력 독점 폐지 및 다당제 도입, 사유재산 인정). 독 · 소 정상회담, 독일통일의 무조건 지지 천명. 발트 3국 독립 선언. 대통령제 도입, 고르바초프 대통령 취임. 대통령 자문위 설치. 고르바초프 '신연방안' 제시. 시장경제 도입 결정. 500일 계획 작성. 한 · 소 정상회담 및 수교. 러시아 공화국 주권선언. 제28차 당대회. 리가초프, 정계 은퇴. 급진파 탈당. 러시아 공화국, 급진 개혁안 채택. 고르바초프, 노벨 평화상 수상. 셰바르드나제 사임. 인민대의원대회 '신연방조약안' 승인 |
1991년 | 소련군, 리투아니아 유혈점령. 옐친, 고르바초프 사임 요구. 대규모 반정부 시위. 옐친,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에 당선. 미 · 소 START 조인. 보수파의 쿠데타와 실패. 공산당 해산. 발트 3국 완전 독립. 독립국가공동체(CIS) 발족. 고르바초프 사임, 소련 소멸 |
1992년 | 러시아, 급진개혁 착수. 군수산업 전환법 제정. 의회 내 반옐친 다수파 '구국전선' 결성. 급진파 가이다르 사퇴, 온건파 체르노미르딘 총리 취임. 전 시민에게 바우처(사유화 증권) 배부. 리투아니아, 옛 공산계 민주노동자당 재집권. 미 · 러, START 2 합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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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 '구국전선' 불법화. 러시아 공산당 재건. 옐친과 의회의 대립 격화. 대통령 신임 국민투표. 루츠코이 부통령 해임. 옐친, 새 헌법안 마련(대통령의 최고권력기관화, 양원제). 러시아 통화개혁. 미 · 러 합동군사훈련 협정 체결. 옐친, 의회해산령 발표. 의회와 시민 반발, 유혈 진압. 그루지야, CIS 가입. 친옐친 파 '러시아의 선택' 결성. 러시아 총선 및 개헌안 국민투표. 가즈프롬 민영화 등 사유화 정책 가속 |
1994년 | 반옐친계, 러시아 의회 재장악. 신흥재벌(올리가르히) 대두. 체첸 봉기, 무력 점령 |
1995년 | 러시아 경제, 성장 추세로 전환. '조-러 상호원조 및 우호협력조약' 폐지 |
1996년 | 옐친, 대통령 재선. 러시아군 체첸 철수 |
1997년 | 병력 감축, 군비 축소, 군수산업의 민수 전환 강력 추진. 동아시아 경제위기의 여파로 경제위기 닥침 |
1998년 | 모라토리움 선언. 화폐개혁(1,000:1). 중도연합인 '조국-전러시아당' 강력한 야당으로 부상 |
1999년 | 경제회복 및 성장 재개. 체첸 분리독립운동 재점화. 옐친, 푸틴 총리 임명. 12월 옐친 사임 후 푸틴이 대통령 권한대행 |
2000년 | 푸틴, 체첸 강경진압. 푸틴, 대통령 당선 후 '위대한 러시아' '강력한 러시아 국가' 재건이라는 국가주의적 슬로건 아래 경제사회적 안정화 추구. 신흥재벌 숙청. 루블화 평가절하. 원자력잠수함 크루즈크 호 침몰 |
2001년 | 체첸 전쟁 종전 선언. 우주정거장 '미르' 폐기. 통합러시아당(푸틴 지지자들과 조국-전러시아당이 합친 당) 결성 |
2002년 | 석유, 가스 등 전략 자원의 재국유화 추진. 체첸 분리주의자, '문화의 집'에서 대규모 인질극 |
2003년 | 의회(국가두마) 선거에서 푸틴의 통합러시아당 압승 |
2004년 | 푸틴, 대통령 재선. 가즈프롬 등 에너지산업의 재국유화 |
2005년 | 가즈프롬, 석유회사 시브네프트 인수합병 |
2006년 | 우크라이나 가스 공급 중단. 러시아, 세계 최대의 산유국으로 부상. 가즈프롬, 영국과 프랑스의 가스 공급업체 인수 |
2007년 | 의회 선거에서 통합러시아당 압승(64.1% 득표, 공산당 11.6%, 자유민주당 8.2%, 러시아정의당 7.8%). 당국의 선거개입, 국영 TV 매체의 여당 편향 방송, 금권선거 문제가 불거짐 |
2008년 | 러시아-그루지야 전쟁. 가을부터 경제위기 심화. 메드베데프, 대통령 당선. 메드베데프, 전 대통령 푸틴을 총리로 지명 |
2009년 | 유럽 가스 공급 대폭 축소. 경제위기에 따른 반정부시위 확산 |
소련의 반체제 지식인들. 사하로프, 노벨 평화상 수상(1975년).
어느 사회에나 비판세력은 있게 마련이다.
사람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고 생각과 경험 역시 모두 똑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비판세력들은 사회의 정체와 부패를 막고 새로운 정책과 방향을 제시하는 등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한편으로, 사회의 통일성을 깨뜨리고 반사회적 대중운동을 부추기는 등 부정적인 역할도 한다.
평가의 척도는 그들의 행동이 사회의 진보에 부합하느냐 역행하느냐이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뒤, 모든 종류의 착취를 없애고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사회를 이 땅에 실현하려는 숭고하고도 지난한 이상을 추구하는 소련사회에서, 그 목표와 방향을 둘러싸고 여러 이견이 표출되지 않을 리 없었다.
게다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체제대결을 벌이면서 때로는 말로, 때로는 무력으로 서로 자기를 관철하려 들려는 속에서, 두 체제는 자연히 상호영향을 미치게 되고, 그 영향은 어떤 식으로든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파급될 수밖에 없었다.
소련의 반체제 운동은 물론, 혁명 직후부터 시작됐다.
혁명 직후의 내전을 거치며 반혁명 세력은 거의 제거되거나 망명했고, 남은 적대세력은 이후 스탈린 시대에 가혹하게 처형 또는 추방되거나, 강제수용되어 노동을 통해 교정을 받는 운명을 겪었다.
그 과정에서 적대세력이 아닌 정치적 반대자와 양민들까지도 무더기로 피해를 당한 사례가 많았다.
1956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 이후 수백만의 억울한 피해자가 감옥과 강제수용소에서 풀려나 명예회복됐고, 사회 일각에서 스탈린 비판을 진전시키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사태의 악화를 우려한 정부의 태도변화로 1차 제동이 걸렸다.
그 후 1961년 제2차 스탈린 비판은 막힌 출구를 뚫어놓는 구실을 하여, 일단의 지식인들이 철저한 스탈린 비판과 더 나아가 사회의 민주화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타자기로 찍어서 유포하거나(사미즈다트), 광장에서 낭독집회를 열고, 해외에서 출판하기도 했다(타미즈다트).
흐루쇼프를 실각시키고 등장한 브레즈네프 정부가 다시 이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다.
스탈린 시대에 성장해온 브레즈네프 정부의 지도자들은 더 이상의 비판이 불러올 폐해를 우려하여 역사의 재고찰을 봉쇄했다.
1966년 2월 '반소련 선전' 내용이 담긴 자신의 작품을 해외출판한 작가 다니엘과 시냐프스키의 재판을 시작으로 1968년 1월까지 세 차례의 재판이 열리면서 공개적으로 체제를 비판하는 지식인의 탄압이 본격화됐다.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유죄판결을 비판, 항의하고 감형탄원에 참여했다.
1968년 여름의 체코슬로바키아 사건을 계기로 억압은 더욱 강화됐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자유화 운동 진압에 항의하는 붉은광장의 5인 시위자에게는 4~5년형이 선고됐다.
정부는 체제비판을 억제하는 한편으로, 개인적인 자유는 폭넓게 인정했다.
체제를 문제 삼는 견해를 공공연히 표명하는 것은 억압을 받았으나, 사생활에서는 금지된 간행물을 읽는 것도 용인됐다.
비판세력은 두 갈래로 갈라졌다.
지식인들의 태반은 체제 내로 복귀했으나, 이들 사이에서는 '공식적인 입장'과 '속마음'을 각각 달리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이를 거부하고 자신의 견해를 타이핑, 복사하여 사미즈다트(지하출판물)로 널리 유포시키며 저항을 계속한 사람들이 이론파(異論派)다. 사미즈다트는 해외에서 출판되어 다시 역수입되곤 했다.
1970년대 초의 대표적인 해외출판물은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와 메드베데프의 〈역사의 심판에 부쳐〉다.
이론파 운동은 적어도 이때까지는 정권타도를 목표로 하는 정치적 반대운동은 아니었고, 지도층의 권위주의적 지배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합리성과 도덕성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일종의 정치적 개량운동이었다.
운동은 체제 개선, 체제 민주화, 이데올로기 정화, 인권운동 등에 초점을 두고 진행됐다.
이론파에는 다양한 갈래가 있었다.
물리학자 사하로프는 지하출판물 〈진보, 평화공존, 지적 자유에 관한 고찰〉에서 지도자들이 스스로의 과오를 시정함으로써 체제의 모순을 개선할 수 있다는 온건한 주장을 폈다.
그에 반해 아말리크는 구조적 병리의 시정 가능성조차 의심한 과격파였다.
R.메드베데프는 민주개혁에 기대를 거는 공산주의자인 반면에, 솔제니친은 정교신앙에 기울어 사회주의 체제 자체에 회의를 품었다(솔제니친은 망명 후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되어 소련 비난의 선봉에 선다).
시냐프스키는 이념과 리더십의 쇄신을 통한 사회주의적 도덕성의 회복을 주장한 반면에, 카피차는 과학과 경제의 실용주의를 강조했다.
1970년대 초 이론파, 즉 반체제 지식인들은 억압에 대한 저항을 강화해나갔고, 정부는 새로운 억압책으로서 반체제 인사들의 출국을 허용하고 대신 시민권을 박탈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에 따라 솔제니친을 비롯해 첼로 연주자 로스트로포비치, 작가 보이노비치, 악쇼노프, 시냐프스키, 생물학자 J.메드베데프 등, 체제비판적인 이론파들이 잇따라 국외로 출국 또는 추방됐다.
해외이주를 희망하던 유태인의 출국도 용인되어 1973년까지 13만 명이 출국했다.
그로 인해 반체제 경향이 뚜렷한 이론파는 거의 망명자가 됐고, 이들 출국자와 이들이 낸 출판물들을 통해 소련사회의 어두운 부분이 서방세계에 널리 알려지면서 소련의 대외적 위신이 적잖이 실추됐다.
망명자들은 해외에서 반소 신문 · 잡지와 서적을 활발하게 출간하여 세계적으로 반소련 운동을 북돋우는 한편, 국내로도 출판물을 대량 유입시켜 국내의 반체제 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1970년대 중엽까지 소련에 남아 있던 비교적 온건한 체제비판 인사들은 합법단체를 조직, 합리적인 정책개발을 자극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등의 활동을 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단체들에는 야키르 등의 '인권옹호 그룹', 사하로프가 이끄는 '인권위원회', 투르친 등의 '앰네스티 국제 그룹', 오를료프 등의 '헬싱키 모니터 그룹' 등이 있었다.
1975년, 유명한 핵물리학자로 반체제 지식인들의 기둥이자 대변인 역할을 해온 인권운동가 사하로프에게 노벨 평화상이 수여됐다.
당시 사하로프는 사회주의의 개량 차원을 넘어서서 자유주의 성향을 점점 드러내고 있었다.
소련에 서방측의 편파적인 시각에 대한 비난이 일면서 반 사하로프 캠페인이 벌어졌다.
사하로프는 그 뒤에도 소련정부의 묵인하에 인권운동을 계속하다가 1979년 아프가니스탄 출병을 비판한 뒤 1980년 1월 고리키 시에 행정유형됐다.
그 뒤로도 이론파 운동은 미미하게 계속되다가 1982년 '헬싱키 모니터 그룹'의 해산 이후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대신 몇몇 연구소의 개혁 성향 연구원들을 중심으로 한 전면적인 경제개혁 주장이 점점 힘을 얻어갔다.
1980년대 중엽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되면서 개혁운동과 함께 체제비판운동이 다시 맹렬하게 타올랐고, 체제 내 개혁을 요구해온 사하로프, R.메드베데프 등의 지도자는 개혁파의 중추로서 화려하게 복귀했다.
찢겨져나가는 소비에트 연방, 민족문제의 심화(1989년 ~ 1990년).
소련은 본래 120여 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국가였다.
이 많은 민족들을 하나로 묶은 것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라는 이념과 소련시민으로서의 평등성, 그리고 소수민족의 자치권과 그들에 대한 정치 경제적 배려였다.
페레스트로이카 이전에 소련은 사회주의의 실현과 더불어 민족문제는 해결됐다고 말해왔다.
1986년에 카자흐 공화국 공산당 제1서기가 러시아인으로 교체되면서 일어난 폭동은 민족문제의 해소 주장이 얼마나 근거 없는 것인가를 보여주었다.
1988년 2월에는 아제르바이잔 공화국 내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의 아르메니아계 주민이 아르메니아와의 통일을 주장하면서 소요를 일으켰다.
1989년 인민대의원대회가 창설되고 각 공화국과 자치단체에서도 선거가 실시되면서 민족문제가 전연방 차원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발트 연안 3개 공화국에서는 '민족 우선'을 내세우는 인민전선이 조직되고 자발적인 대중운동이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규모로 발전해갔다.
이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소련정부와 공산당은 민족주의 감정을 자제하라는 경고를 발하는 한편으로, 공화국들의 주권이 형식에 그친 것이었음을 인정하면서 공화국에 더 많은 주권을 부여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민족강령'을 발표했다.
이미 완전 독립으로 방향을 굳힌 발트 3국 인민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이어 몰도바와 우즈베크 공화국의 주권선언이 있었다.
1991년 1월, 분리독립운동이 가장 치열하던 리투아니아에서 소련군부의 강경파가 독단으로 빌뉴스 텔레비전 방송국을 점거하는 과정에서, 저항하던 시민 15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3월 17일, 6개 공화국이 불참한 가운데 소련 존속을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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