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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역사(국내 .각지역.)

영양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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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왕 11년(서기 600)

11년(서기 600) 봄 정월,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임금이 태학박사() 이문진()에게 옛 역사를 요약하여 다섯 권의 『신집()』을 만들도록 명령하였다. 

건국 초기에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했을 때 어떤 사람이 사적을 기록한 1백 권의 책을 쓰고 이것을 『유기()』라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이를 정리하고 수정하였다.

  使       


영양왕 14년(서기 603)

14년(서기 603), 임금이 장군 고승()을 보내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하였다. 

이를 구원하기 위하여 신라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한수()를 건너오자, 성 안에서 북을 울리고 떠들면서 서로 호응하였다. 

고승이 상대의 군사가 많고 우리의 군사가 적어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물러났다.
       退


영양왕 18년(서기 607)

18년(서기 607), 초기 수 양제()가 계민()의 막부에 행차하였을 때, 우리의 사신이 마침 계민과 함께 있었다. 

계민이 우리의 사신을 감히 숨길 수 없어서, 우리의 사신과 함께 양제를 참배하였다. 

황문시랑() 배구()가 양제에게 말했다.


“고구려는 원래 기자()를 봉했던 땅으로, 한나라와 진나라가 모두 군, 현으로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신하의 나라로 행동하지 않고 별도의 지역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전 황제께서는 오랫동안 그들을 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양량()에게 군사를 주어 출동시켰으나 그가 어리석고 못나서 공을 세우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는 폐하의 시대인데 어찌 그들을 정벌하지 않고 예절의 땅이 오랑캐의 소굴로 변하도록 내버려 두십니까? 오늘 고구려 사신은 계민이 나라를 바쳐 교화에 복종하는 것을 직접 보았으므로, 그가 우리를 두려워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고구려가 우리에게 조공하도록 위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양제가 이에 따라 고구려 사신에게 자신의 뜻을 전하도록 우홍()에게 명령하였다.
“계민은 성심으로 중국을 받들었기 때문에 내가 직접 계민의 막부에 온 것이며, 내년에는 응당 탁군(涿)으로 갈 것이다. 

너는 돌아가자마자 너의 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라. 

마땅히 빠른 시간 내에 나를 조알하되, 스스로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이리하면 내가 너의 왕을 보호하기를 계민과 같이 할 것이다. 

만약 너의 왕이 내게 찾아와서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다면 계민을 거느리고 너의 땅을 공격하리라.”


임금이 제후의 나라로써의 예절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양제가 장차 침범해 올 것을 걱정하였다. 계민은 돌궐의 가한(), 즉 추장이다.

여름 5월, 임금이 군사를 보내어 백제의 송산성()을 공격하다가 함락시키지 못하자, 군사를 옮겨 석두성()을 습격하여 3천 명의 남녀를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使            使  使  使     涿                


영양왕 19년(서기 608)

19년(서기 608) 봄 2월, 장수에게 신라의 북쪽 국경을 습격하도록 명령하여, 8천 명을 포로로 잡아왔다.
여름 4월, 신라의 우명산성()을 빼앗았다.
     


영양왕 22년(서기 611)

22년(서기 611) 봄 2월, 수 양제()가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였다.
여름 4월, 양제의 행차가 탁군(涿)의 임삭궁()에 도착했을 때, 사방의 군사들이 모두 탁군에 모였다.
     涿 涿


영양왕 23년(서기 612)

23년(서기 612) 봄 정월 임오일에 양제가 조서를 내려 말했다.

“고구려의 하찮은 자들이 어리석고 불손하게도 발해와 갈석() 사이에 모여 요동과 예맥의 땅을 잠식하여 왔다. 

비록 한나라와 위나라의 거듭된 침입으로 그 소굴이 잠시 허물어졌으나, 그로부터 세월이 오래 지나자 그 족속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지난 세대에는 내와 늪의 물고기나 새처럼 조금씩 모였던 것이 이제는 퍼지고 번식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요동ㆍ현도ㆍ낙랑 등의 아름다운 강토를 돌아보았는데 이제 모두 오랑캐의 땅이 되었고, 세월이 지나 죄악이 이미 가득하였다.


하늘의 도리는 사악한 자에게 화를 내리기에 그들이 패망할 징조가 이미 나타났다. 

그들이 도덕을 손상시키는 일이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드러나지 않은 흉악한 행동과 속에 품은 간사한 생각이 넘치고 있다. 

조칙으로 내리는 엄명을 임금이 한 번도 직접 받는 일이 없으며, 임금이 나에게 직접 찾아와서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에도 직접 오기를 꺼려하였다. 


중국의 반역자들을 수없이 유혹하고, 변방에 척후를 놓아 우리의 봉후들을 자주 괴롭혔다. 

이로 말미암아 치안은 안정되지 못하였고, 백성들은 생업을 버리게 되었다. 지난날 문제의 정벌 시에 그들은 잡히지 않고 빠져 나갔다. 

이전에 사로잡았을 때에는 죽이지 않은 채 놓아주었고, 뒷날 항복하였을 때도 처단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러한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죄를 저질러 거란의 무리들과 합세하여 바다의 우리 수비병들을 살해하였으며, 말갈의 행동을 본받아 요서를 침략하였다.


온 동방의 나라가 모두 조공을 하고 제후들이 천자를 찾아 아뢰며, 해변 지역의 모든 나라가 하나같이 신년이 되면 축하의 사절을 중국에 보내는데, 고구려는 이때 조공하는 물품을 탈취하고 다른 나라의 사절이 왕래하는 길을 막고 있다. 

그들은 죄 없는 자를 학대하며 성실한 자를 해치고 있다.

 

천자의 사신이 탄 수레가 해동에 갈 때, 칙사의 행차는 속국의 국경을 통과하게 된다. 

고구려는 도로를 차단하고 우리의 사신을 거절하니, 이는 임금을 섬길 마음이 없는 것이다. 

이를 어찌 신하의 예절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런 행동을 용서한다면 어떤 행동인들 용서하지 못하겠는가!


고구려는 법령이 가혹하고 세금을 너무 많이 부과하며, 권력 있는 신하들과 세도 있는 벌족들이 나라의 권력을 잡고 당파끼리 결탁하는 것이 관습으로 되어 있다. 

이들이 뇌물로 주고받는 재화가 시장을 만드는데, 백성들은 억울한 사정을 호소할 곳이 없다. 

해마다 재앙과 흉년이 거듭 들어 집집마다 굶주리며, 전쟁은 그치지 않고 부역은 기한 없이 계속되어, 전쟁 물자를 나르는 일에 힘을 모두 소모하다가 지친 몸이 계곡에 쓰러져 간다. 

이러한 백성들의 근심과 고통을 누가 제거해 줄 것인가?


고구려의 전 지역이 이와 같이 슬픔과 공포에 잠겨 있는 것을 보면, 그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머리를 돌려 백성들의 마음을 살펴보면, 그들은 각각 생명이나 보존하기를 도모하며, 늙은이와 어린이들까지도 모두 정치의 혹독함을 한탄하고 있다. 

나는 지방의 풍속을 살피기 위하여 북방에 왔으며, 백성들을 위로하고 죄 있는 자에게 죄를 물어 두 번 다시 오지 않아도 되도록 할 것이다. 


이에 나는 육사()를 거느리고, 구벌()을 밝혀서 위급한 자를 구해주며, 하늘에 순종하여 이 역적을 무찔러 선조의 뜻을 이어갈 것이다.

이제 마땅히 군율에 따라 행군을 개시하되, 대오를 나누어 목적지로 떠날 것이며, 발해를 뒤덮어 우레같이 진동케 하고, 부여를 짓밟아 번개처럼 휩쓸 것이다. 

병기와 갑마를 정돈하고 부대를 경계한 후에 행군할 것이며, 재삼재사 훈시하여 필승을 꾀한 후에 전투를 시작할 것이다. 


좌 12군은 누방(), 장잠(), 명해(), 개마(), 건안(), 남소(), 요동(), 현도(), 부여(), 조선(), 옥저(), 낙랑() 방면으로 진군할 것이오, 우 12군은 점선(), 함자(), 혼미(), 임둔(), 후성(), 제해(), 답돈(), 숙신(), 갈석(), 동이(), 대방(), 양평() 방면으로 진군하되, 진군로를 서로 연락하여 전부 평양으로 집합하게 하라.”

군사의 총수는 1백13만3천8백 명이었는데, 외형적으로는 2백만 명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군량 수송을 맡은 자의 수는 배가 되었다. 

수나라에서는 남쪽 상건수()에서 토지 신령께 제사 지내고, 임삭궁()의 남쪽에서 상제께 제사 지내고, 계성()의 북쪽에서 마조()에게 제사 지냈다. 


양제는 직접 지휘관을 임명하여, 각 군에 상장(), 아장() 각 1명과 기병 40대를 두었다. 

1대는 1백 명이며, 10대가 1단이다. 보병은 80대였는데, 4단으로 나누어 단마다 각각 편장() 1명을 두었으며, 단의 갑옷과 투구의 끈과 깃발의 빛깔을 다르게 하였다. 

매일 1군씩 군사를 보내되, 서로간의 거리가 각각 40리 정도 되게 하였다. 

군영이 연속적으로 출발하였다. 

40일 만에 출발이 모두 끝났다. 


한 대열의 뒤와 다음 대열의 앞이 서로 연결되고, 북과 나팔 소리가 연이어 들렸으며, 깃발은 9백 60리에 뻗쳤다. 

양제의 진영에는 12위(), 3대(), 5성(), 9시()가 있는데, 내외, 전후, 좌우의 6군을 나누어 배속시켜 뒤따라 출발하게 하였다. 이 대열이 또한 80리에 다다랐다. 

근래에 군사의 출동이 이와 같이 어마어마한 적이 없었다.


2월, 양제가 군대를 이끌고 요수에 도착하였다. 

모든 군사가 모여들어 강 앞에 큰 진을 쳤다. 우리의 병사들은 물을 사이에 두고 방어하였기 때문에 수나라의 병사가 건너오지 못하였다. 


양제가 공부상서() 우문개()에게 명하여, 요수의 서쪽 언덕에서 세 개의 부교를 만들도록 하였다. 

그것이 완성된 후, 부교를 끌어 동쪽 언덕으로 잇고자 하였다. 

부교가 1장() 정도 짧아서 언덕까지 닿지 못하였다. 이 기회를 틈타 우리의 병사가 강하게 공격하였다. 


수나라의 병사들 가운데 날쌔고 용맹한 자들이 물로 뛰어들어 접전을 벌였으나 우리의 병사들이 높은 곳에서 공격하였으므로, 수나라 병사들은 언덕에 오르지 못하였다. 

수나라의 병사 중에 전사자가 매우 많았다. 

맥철장()이 언덕으로 뛰어 올랐다가 전사웅(), 맹차() 등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기 때문에 수나라의 병사는 곧 부교를 걷어 다시 서쪽 언덕으로 돌아갔다. 


양제가 다시 소부감() 하조()에게 명하여 부교를 길게 늘이도록 하였다. 

부교는 이틀 만에 완성되었다. 

모든 부대가 차례로 건너와 동쪽 언덕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다. 

우리의 병사들이 크게 패하여 1만 명에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수나라의 여러 부대는 승세를 타고 진격하여 요동성을 포위하였다. 


요동성은 곧 한나라 때의 양평성()이다. 양제가 요에 이르러 조서를 내려 전국의 죄수를 풀어주게 하고, 형부상서() 위문승() 등에게 요수의 왼쪽 지방 백성들을 위로하고 달래게 하였으며, 그들에게 10년간의 부역을 면제시켜 주고 그곳에 군현을 설치하여 통치하게 하였다.


                                        西         使                                                                                 
      西              西              


여름 5월, 수나라의 장수들이 동쪽으로 이동하고자 할 때, 양제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주의를 주었다.

“모든 군대가 나아가고 물러날 때, 반드시 나에게 보고하고 나의 지시를 기다릴 것이며,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요동의 우리 군사는 자주 싸우는 것이 해롭다고 생각하여 성을 굳게 수비하고 있었다. 

양제는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여 요동성을 치게 하고, 또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고구려가 만일 항복하면 그들을 받아들일 것이며, 병사들에게 방종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요동성이 무너질 상황에 처할 때마다 성 안의 사람들은 번번이 항복하겠다고 말했다. 


수나라의 장수들은 양제의 지시로 말미암아 적시에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먼저 양제에게 보고를 띄웠다.  

양제의 명령이 떨어질 때마다 성의 방어가 다시 갖추어져서 수시로 나와 항거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두세 번 계속되었으나 양제는 끝내 이를 알아채지 못하고, 성은 오랫동안 항복하지 않았다.


                        


6월 기미일에 양제가 요동성 남쪽으로 가서 성곽과 연못의 형세를 관찰하고, 곧 여러 장수들을 불러 꾸짖으며 말했다.

“너희들은 벼슬이 높다고, 혹은 가문과 세도를 믿고 나를 어리석은 자로 취급하려고 하는가? 전일 내가 도읍에 있을 때 너희들이 내가 이곳에 오는 것을 원하지 않은 것은, 단점이 드러날까 두려워했기 때문임을 알겠구나. 

이제 내가 여기에 온 것은, 너희들의 잘못된 행실을 판단하여 목을 베려는 것이다. 

너희들은 지금 죽는 것이 무서워 힘을 쏟지 않고 있으니, 내가 너희들을 죽일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는가?”

여러 장수들이 모두 놀라서 얼굴색이 변하고 무서움에 치를 떨었다. 

양제는 성의 서쪽으로 몇 리 떨어진 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육합성()을 엿보고 있었으나, 우리의 병사들은 모든 성을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좌익위대장군() 내호아()가 강회()의 수군을 실은 수백 리에 달하는 선단을 이끌고, 바다를 통하여 패수(浿)로부터 들어오니 평양과의 거리가 60리였다. 

우리의 병사와 조우하자 그들이 진격하여 우리가 대패하였다. 

내호아는 승세를 타고 성으로 진격하려고 하였다. 

부총관 주법상()이 만류하며 여러 군사들이 오기를 기다려 함께 진격하자고 하였다. 

내호아가 듣지 않고 수만 명의 정예병을 선발하여 곧장 성의 바로 아래에까지 이르렀다. 

이때 우리의 장수는 외성에 있는 빈 절간에 병사를 숨겨 놓고, 병사를 출동시켜 내호아와 싸우다가 거짓으로 패하는 체 하였다.


내호아는 성 안으로 쫓아 들어와 군사들을 풀어 백성들을 사로잡고 재물을 약탈하며, 미처 대오를 정비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숨어있던 우리 병사들이 출동하여 내호아의 군사를 크게 물리쳤다. 

내호아는 간신히 포로 신세를 면하였고, 살아서 돌아간 병사는 수천 명에 불과하였다. 

우리의 군대는 선창까지 추격하였다. 

수나라의 장수 주법상이 진을 정비하여 대비하고 있었으므로 우리의 군대는 곧 물러 나왔다. 

내호아는 병사들을 이끌고 바닷가로 돌아가서 주둔하여, 다시는 감히 다른 군대와 호응하고 접촉할 수 없게 되었다.


                 西      浿                      退  


좌익위대장군() 우문술()은 부여()로 출동하고, 우익위대장군() 우중문()은 낙랑()으로 출동하고, 좌효위대장군() 형원항()은 요동()으로 출동하고, 우익위대장군() 설세웅()은 옥저()로 출동하고, 우둔위장군() 신세웅()은 현도()로 출동하고, 우어위장군() 장근()은 양평()으로 출동하고, 우무후장군() 조효재()는 갈석()으로 출동하고, 탁군태수검교좌무위장군(涿) 최홍승()은 수성()으로 출동하고, 검교우어위호분낭장() 위문승()은 증지()로 출동하여 모두 압록강 서쪽에 집결하였다.


우문술 등의 군사가 노하()와 회원(), 두 진 지역에서 군사와 말에게 각각 100일 분의 식량을 주고, 또한 갑옷, 짧은 창, 긴 창, 옷감, 전투 기재, 장막 등을 주었다. 

이에 따라 병사마다 3섬 이상의 짐을 지게 되어 그 무게를 당해낼 수 없었다. 

우문술은 병사들에게 명을 내려 ‘도중에서 곡식을 버리는 자는 참수한다.’고 하였다. 

군졸들은 모두 장막 밑에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이리하여 겨우 중간쯤 행군하였을 때 군량은 이미 거의 떨어졌다. 

이때 임금은 대신 을지문덕()을 수나라의 군영으로 보내어 거짓으로 항복하게 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이 실력이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 것이었다. 

이보다 앞서 우중문은 양제로부터 만일 고구려왕이나 을지문덕이 찾아오는 기회가 있으면 꼭 사로잡으라는 비밀 지시를 받고 있었으므로, 을지문덕을 잡으려고 하였다. 

상서우승() 유사룡()이 위무사(使)로 와 있다가 이를 강하게 말렸다.

우중문은 마침내 이 말을 듣고 을지문덕으로 하여금 돌아가도록 하였다. 

우중문은 금방 이를 후회하여 사람을 보내어 을지문덕에게 거짓으로 말했다.
“다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돌아와도 좋다.”


을지문덕은 뒤돌아보지 않고 압록강을 건넜다. 

우중문과 우문술 등은 을지문덕을 놓치고 내심 불안하였다. 

우문술은 군량이 떨어졌기에 돌아가려 하였다. 

우중문이 우문술에게 정예 부대로 문덕을 추격하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으나, 우문술이 강하게 말렸다.

우중문이 성내며 말하였다.


“장군이 십만 대병을 거느리고도 수가 적은 적군을 깨뜨리지 못하면 무슨 낯으로 황제를 보려는가? 그리고 나는 이번의 정벌에 공이 없을 줄 미리부터 짐작하였다. 

왜냐하면 옛날 명장들이 공을 이룬 것은, 군사에 관한 일이 한 사람에 의하여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사람마다 각기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어떻게 적을 이길 수 있겠는가?”


당시 양제는 우중문이 계교와 전략이 훌륭하다고 생각하여 모든 부대에게 지휘 사항을 자문하게 하였기 때문에, 중문이 이와 같은 말을 하였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우문술 등이 마지못해 우중문의 말대로 여러 장수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을지문덕을 추격하였다. 

을지문덕은 우문술의 군사가 굶주린 기색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들을 피로하게 하기 위하여 싸울 때마다 도주하였다.


우문술은 하루에 일곱 번을 싸워서 모두 이겼다. 

그들은 여러 번을 이겼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고, 또한 여러 사람들의 의견에 밀려서 곧 동쪽으로 진군하여 살수(, 청천강)를 건넜다. 

그들은 평양성 30리 떨어진 곳에 이르러 산을 의지하고 진을 쳤다. 

을지문덕이 다시 사람을 보내어 거짓으로 항복을 하는 척 하면서 우문술에게 청하였다.

“만약 군사를 거두어 돌아간다면, 임금을 모시고 황제가 계신 곳으로 가서 예방하겠다.”


우문술은 자신의 군사들이 피로하여 다시 싸울 수 없음을 알고 있었고, 또한 평양성이 험하고 견고하여 조기에 무너뜨릴 수 없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우리의 거짓말을 곧이듣고 돌아갔다. 

우문술은 방진()을 치면서 행군하였다. 

우리의 군대가 사면으로 공격하였다. 

우문술 등은 한편으로 싸우며 한편으로 행군하였다.


             涿   西                    使     紿                                            使           


가을 7월, 우문술의 군대가 살수에 이르러 강을 절반쯤 건널 때, 우리의 군사가 후방에서 그들의 후속 부대를 공격하였다. 

적장 우둔위장군 신세웅이 여기에서 전사하였다. 

여러 부대들이 한꺼번에 무너져 걷잡을 수가 없었다. 

장수와 군졸이 뛰어 도주하는데, 하루 걸려서 압록강까지 4백5십 리를 행군하였다. 


수나라의 장군으로서 천수() 사람인 왕인공()이 후군이 되어 우리의 군대를 막아 물리쳤다. 

내호아는 우문술이 패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역시 물러났다. 

위문승의 군대만이 온전하였다. 

처음 9군이 요동에 도착했을 때는 총수가 30만5천 명이었는데, 요동성으로 돌아갔을 때는 다만 2천7백 명뿐이었고, 수만에 달하는 군량과 군사 기재들이 탕진되었다. 

양제가 크게 화를 내면서 우문술 등을 쇠사슬로 묶어 계묘일에 돌아갔다.


애초에 백제왕 장(무왕)이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를 치자고 요청했을 때, 양제는 백제에게 우리의 동정을 엿보게 하였다. 

이때 백제왕 장은 비밀리에 우리와 정보를 교환하고 있었다. 

수나라의 군사가 출동할 때, 백제왕 장이 그의 신하 국지모()에게 수나라에 가서 양국 군사가 만날 기일을 알려주도록 요청하였다. 


양제는 크게 기뻐하여 후하게 상을 주고, 상서기부랑() 석률()을 백제에 보내어 양국 군사가 만날 기일을 알려 주었다. 

수나라의 군사가 요수를 건너오게 되자 백제도 역시 국경에서 군사를 정비하고 수나라에 협조한다고 말하였다. 

실제로는 양쪽을 모두 지지하였던 것이다. 

이번 싸움에서 수나라는 요수의 서쪽에서 우리의 무려라() 지역을 빼앗아 요동군()과 통정진()을 설치하였을 뿐이었다.


            殿               使  使   使            西 


영양왕 24년(서기 613)

24년(서기 613) 봄 정월, 수나라의 양제가 조서를 내려 전국 군사들을 탁군(涿)으로 소집하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효과(, 군직명)로 삼아 요동의 옛 성을 수리하고 군량을 저장하게 하였다.

2월, 양제가 신하들에게 말했다.
“고구려와 같이 하찮은 것들이 상국을 무시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의 국력이 바닷물을 뽑아내고 산을 옮길 수 있는데, 하물며 이런 따위의 적이야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양제가 고구려를 다시 정벌할 것을 논의하였다. 

좌광록대부(祿) 곽영()이 간언하였다.
“오랑캐가 예절을 지키지 못한 것은 신하들이 처리할 일입니다. 

천근 무게의 큰 활은 생쥐를 잡기 위하여 사용하지 않는 법인데, 어찌하여 직접 천자의 자리를 더럽혀 작은 도적을 대적하려고 하십니까?”
그러나 양제는 이 말을 듣지 않았다.

   涿             祿      


여름 4월, 양제는 요수를 건넜다. 

그는 우문술과 양의신()에게 평양으로 향하게 하고, 왕인공()은 부여를 경유하여 신성으로 진군하게 하였다. 

수만 명의 우리 병사들이 이들과 대항하여 싸우다가 왕인공의 강한 기병 1천여 명에게 패하였다. 

우리의 군대는 성을 굳게 지켰다. 


양제가 모든 장수에게 명령하여 요동을 치게 하고, 그들에게 사태에 따라 명령을 기다리지 말고 적절하게 조치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비루동(), 운제(), 지도()를 이용하여 사면에서 동시에 밤낮으로 공격하였다.

우리도 그때마다 적절히 대응하였기 때문에 20여 일이 지나도록 성을 빼앗기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양편 모두 전사자가 매우 많았다. 


수나라에서 길이가 열댓 길 되는 성곽 공격용 사다리를 세우고, 효과() 심광()이 그 끝에 올라서서 성을 내려다보며 우리의 군대와 짧은 병기를 가지고 접전하여 10여 명을 죽였다. 

우리의 군사들이 앞다투어 그를 밀었는데, 그는 땅에 채 닿기 전에 사다리에 매달려 있던 줄을 잡고 다시 올라갔다. 

양제가 이를 바라보고 장하게 여겨 즉시 그에게 조산대부() 벼슬을 주었다.


요동성이 오래도록 무너지지 않자, 양제는 1백만 여 개의 자루를 만들어 보냈다. 

그는 자루에 흙을 채운 후에, 넓이가 30보이며 성과 높이가 동일한 큰 둑길을 쌓게 하고, 병사들에게 그 위에 올라서서 성 안을 공격하게 하는 작전을 구상하였다. 

한편으로 성보다 훨씬 높은 여덟 개의 바퀴 달린 고공 수레를 만들어, 새로 만든 큰 둑길에 세워 성 안을 내려다보며 활을 쏘게 하는 방법도 구상하였다. 


장차 날짜를 정하여 이러한 방법으로 공격하려고 하자 성 안에서는 위협을 느끼고 크게 위축되어 있었다.

때마침 수나라에서 양현감()이 반역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양제는 이를 크게 두려워하였다. 

고관들의 자제가 모두 양현감의 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더욱 걱정하게 되었다. 

수나라의 병부시랑() 곡사정()이 본래부터 양현감과 친한 사이였으므로 내심 불안하게 생각하여 우리에게 도망쳐왔다. 

양제는 밤에 여러 장수들을 조용히 불러 군대를 인솔하고 돌아가도록 하였다. 

군수 기자재와 공격용 도구들이 산더미처럼 쌓였고, 병영과 보루, 장막들도 자리에 둔 채 그대로 있었다.


군사들의 마음이 흉흉하여 다시 부대를 정비하지 못하고 여러 길로 흩어졌다. 

우리 군대는 이를 즉시 알았으나 감히 나가지는 못하였다. 

성 안에서 북을 울리며 떠들고 있다가, 이튿날 오시()에야 조금씩 밖으로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때도 수나라의 군사가 우리를 속이는 것으로 의심하였다. 이틀이 지나서야 수천 명의 병사를 내어 추적해 갔다.


수나라 군사의 수가 많은 것을 두려워하여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고 일정하게 8십 리에서 9십 리의 거리를 두고 따라갔다. 

거의 요수에 이르러서야 양제의 친병이 모두 건너간 것을 알고, 곧 그들의 후군을 공격하였다. 

이때에도 후군의 수가 수만 명이었는데, 우리의 군대가 따라 가면서 끝까지 공격하여 대략 수천 명을 죽였다.


           便      竿      竿      滿    使                 使                        


영양왕 25년(서기 614)

25년(서기 614) 봄 2월, 양제가 백관들에게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공격하는 문제를 의논하게 하였으나, 여러 날 동안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양제가 조서를 내려 다시 전국 병사를 소집하여 여러 방면의 길로 일시에 진군하게 하였다.

가을 7월, 양제가 회원진()으로 행차하였다. 


이때 수나라는 나라 전체가 이미 혼란하여 소집한 병사의 대부분이 기일을 어기고 오지 않았고, 우리나라도 역시 지치고 쇠약한 상태였다. 

수나라의 장군 내호아가 비사성()에 이르자, 우리의 병사가 맞이하여 싸웠으나 호아가 승리하고 곧 평양으로 진격하려고 하였다. 

임금이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청하고 곡사정()을 돌려보냈다. 

양제가 크게 기뻐하여 신임표를 가진 사절을 보내어 내호아를 소환하였다.

8월, 양제가 회원진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
겨울 10월, 양제가 서경(西)으로 돌아가서 우리의 사신과 곡사정에 대한 일을 태묘()에 고하고, 또한 우리의 임금에게 수나라의 조정에 들어와 예방하라고 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듣지 않았다. 

양제가 장수들에게 엄밀하게 대비할 것을 명하고, 다시 공격할 것을 기도하였으나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使   使    西 使      

영양왕 29년(서기 618)

29년(서기 618) 가을 9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호를 영양왕()이라 하였다.
   


문헌
[삼국사기]; [수서]; [일본서기]; [통전]; 김용만,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 창해, 2001; 서인한, [고구려 대수ㆍ당전쟁사],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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