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서기 600) 봄 정월,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임금이 태학박사(太學博士) 이문진(李文眞)에게 옛 역사를 요약하여 다섯 권의 『신집(新集)』을 만들도록 명령하였다.
건국 초기에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했을 때 어떤 사람이 사적을 기록한 1백 권의 책을 쓰고 이것을 『유기(留記)』라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이를 정리하고 수정하였다.
十一年 春正月 遣使入隋朝貢 詔 太學博士李文眞 約古史爲新集五卷 國初始用文字時 有人記事一百卷 名曰留記 至是刪修
영양왕 14년(서기 603)
14년(서기 603), 임금이 장군 고승(高勝)을 보내 신라의 북한산성(北漢山城)을 공격하였다.
이를 구원하기 위하여 신라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한수(漢水)를 건너오자, 성 안에서 북을 울리고 떠들면서 서로 호응하였다.
고승이 상대의 군사가 많고 우리의 군사가 적어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물러났다.
十四年 王遣將軍高勝 攻新羅北漢山城 羅王率兵 過漢水 城中鼓噪相應 勝以彼衆我寡 恐不克而退
영양왕 18년(서기 607)
18년(서기 607), 초기 수 양제(煬帝)가 계민(啓民)의 막부에 행차하였을 때, 우리의 사신이 마침 계민과 함께 있었다.
계민이 우리의 사신을 감히 숨길 수 없어서, 우리의 사신과 함께 양제를 참배하였다.
황문시랑(黃門侍郞) 배구(裴矩)가 양제에게 말했다.
“고구려는 원래 기자(箕子)를 봉했던 땅으로, 한나라와 진나라가 모두 군, 현으로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신하의 나라로 행동하지 않고 별도의 지역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전 황제께서는 오랫동안 그들을 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양량(楊諒)에게 군사를 주어 출동시켰으나 그가 어리석고 못나서 공을 세우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는 폐하의 시대인데 어찌 그들을 정벌하지 않고 예절의 땅이 오랑캐의 소굴로 변하도록 내버려 두십니까? 오늘 고구려 사신은 계민이 나라를 바쳐 교화에 복종하는 것을 직접 보았으므로, 그가 우리를 두려워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고구려가 우리에게 조공하도록 위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양제가 이에 따라 고구려 사신에게 자신의 뜻을 전하도록 우홍(牛弘)에게 명령하였다.
“계민은 성심으로 중국을 받들었기 때문에 내가 직접 계민의 막부에 온 것이며, 내년에는 응당 탁군(涿郡)으로 갈 것이다.
너는 돌아가자마자 너의 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라.
마땅히 빠른 시간 내에 나를 조알하되, 스스로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이리하면 내가 너의 왕을 보호하기를 계민과 같이 할 것이다.
만약 너의 왕이 내게 찾아와서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다면 계민을 거느리고 너의 땅을 공격하리라.”
임금이 제후의 나라로써의 예절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양제가 장차 침범해 올 것을 걱정하였다. 계민은 돌궐의 가한(可汗), 즉 추장이다.
여름 5월, 임금이 군사를 보내어 백제의 송산성(松山城)을 공격하다가 함락시키지 못하자, 군사를 옮겨 석두성(石頭城)을 습격하여 3천 명의 남녀를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十八年 初 煬帝之幸啓民帳也 我使者在啓民所 啓民不敢隱 與之見帝 黃門侍郞裴矩說帝曰 高句麗本箕子所封之地 漢晋皆爲郡縣 今乃不臣 別爲異域 先帝欲征之久矣 但楊諒不肖 師出無功當陛下之時 安可不取 使冠帶之境 遂爲蠻貊之鄕乎 今其使者 親見啓民擧國從化 可因其恐懼脅使入朝 帝從之 勑牛弘宣旨曰 朕以啓民誠心奉國 故親至其帳 明年當往涿郡 爾還日語爾王宜早來朝 勿自疑懼 存育之禮 當如啓民 苟或不朝 將帥啓民 往巡彼土 王懼 藩禮頗闕 帝將討之啓民 突厥可汗也 夏五月 遣師攻百濟松山城 不下 移襲石頭城 虜男女三千而還
영양왕 19년(서기 608)
19년(서기 608) 봄 2월, 장수에게 신라의 북쪽 국경을 습격하도록 명령하여, 8천 명을 포로로 잡아왔다.
여름 4월, 신라의 우명산성(牛鳴山城)을 빼앗았다.
十九年 春二月 命將襲新羅北境 虜獲八千人 夏四月 拔新羅牛鳴山城
영양왕 22년(서기 611)
22년(서기 611) 봄 2월, 수 양제(煬帝)가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였다.
여름 4월, 양제의 행차가 탁군(涿郡)의 임삭궁(臨朔宮)에 도착했을 때, 사방의 군사들이 모두 탁군에 모였다.
二十二年 春二月 煬帝下詔 討高句麗 夏四月 車蓋至涿郡之臨朔宮 四方兵皆集涿郡
영양왕 23년(서기 612)
23년(서기 612) 봄 정월 임오일에 양제가 조서를 내려 말했다.
“고구려의 하찮은 자들이 어리석고 불손하게도 발해와 갈석(碣石) 사이에 모여 요동과 예맥의 땅을 잠식하여 왔다.
비록 한나라와 위나라의 거듭된 침입으로 그 소굴이 잠시 허물어졌으나, 그로부터 세월이 오래 지나자 그 족속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지난 세대에는 내와 늪의 물고기나 새처럼 조금씩 모였던 것이 이제는 퍼지고 번식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요동ㆍ현도ㆍ낙랑 등의 아름다운 강토를 돌아보았는데 이제 모두 오랑캐의 땅이 되었고, 세월이 지나 죄악이 이미 가득하였다.
하늘의 도리는 사악한 자에게 화를 내리기에 그들이 패망할 징조가 이미 나타났다.
그들이 도덕을 손상시키는 일이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드러나지 않은 흉악한 행동과 속에 품은 간사한 생각이 넘치고 있다.
조칙으로 내리는 엄명을 임금이 한 번도 직접 받는 일이 없으며, 임금이 나에게 직접 찾아와서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에도 직접 오기를 꺼려하였다.
중국의 반역자들을 수없이 유혹하고, 변방에 척후를 놓아 우리의 봉후들을 자주 괴롭혔다.
이로 말미암아 치안은 안정되지 못하였고, 백성들은 생업을 버리게 되었다. 지난날 문제의 정벌 시에 그들은 잡히지 않고 빠져 나갔다.
이전에 사로잡았을 때에는 죽이지 않은 채 놓아주었고, 뒷날 항복하였을 때도 처단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러한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죄를 저질러 거란의 무리들과 합세하여 바다의 우리 수비병들을 살해하였으며, 말갈의 행동을 본받아 요서를 침략하였다.
온 동방의 나라가 모두 조공을 하고 제후들이 천자를 찾아 아뢰며, 해변 지역의 모든 나라가 하나같이 신년이 되면 축하의 사절을 중국에 보내는데, 고구려는 이때 조공하는 물품을 탈취하고 다른 나라의 사절이 왕래하는 길을 막고 있다.
그들은 죄 없는 자를 학대하며 성실한 자를 해치고 있다.
천자의 사신이 탄 수레가 해동에 갈 때, 칙사의 행차는 속국의 국경을 통과하게 된다.
고구려는 도로를 차단하고 우리의 사신을 거절하니, 이는 임금을 섬길 마음이 없는 것이다.
이를 어찌 신하의 예절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런 행동을 용서한다면 어떤 행동인들 용서하지 못하겠는가!
고구려는 법령이 가혹하고 세금을 너무 많이 부과하며, 권력 있는 신하들과 세도 있는 벌족들이 나라의 권력을 잡고 당파끼리 결탁하는 것이 관습으로 되어 있다.
이들이 뇌물로 주고받는 재화가 시장을 만드는데, 백성들은 억울한 사정을 호소할 곳이 없다.
해마다 재앙과 흉년이 거듭 들어 집집마다 굶주리며, 전쟁은 그치지 않고 부역은 기한 없이 계속되어, 전쟁 물자를 나르는 일에 힘을 모두 소모하다가 지친 몸이 계곡에 쓰러져 간다.
이러한 백성들의 근심과 고통을 누가 제거해 줄 것인가?
고구려의 전 지역이 이와 같이 슬픔과 공포에 잠겨 있는 것을 보면, 그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머리를 돌려 백성들의 마음을 살펴보면, 그들은 각각 생명이나 보존하기를 도모하며, 늙은이와 어린이들까지도 모두 정치의 혹독함을 한탄하고 있다.
나는 지방의 풍속을 살피기 위하여 북방에 왔으며, 백성들을 위로하고 죄 있는 자에게 죄를 물어 두 번 다시 오지 않아도 되도록 할 것이다.
이에 나는 육사(六師)를 거느리고, 구벌(九伐)을 밝혀서 위급한 자를 구해주며, 하늘에 순종하여 이 역적을 무찔러 선조의 뜻을 이어갈 것이다.
이제 마땅히 군율에 따라 행군을 개시하되, 대오를 나누어 목적지로 떠날 것이며, 발해를 뒤덮어 우레같이 진동케 하고, 부여를 짓밟아 번개처럼 휩쓸 것이다.
병기와 갑마를 정돈하고 부대를 경계한 후에 행군할 것이며, 재삼재사 훈시하여 필승을 꾀한 후에 전투를 시작할 것이다.
좌 12군은 누방(鏤方), 장잠(長岑), 명해(溟海), 개마(蓋馬), 건안(建安), 남소(南蘇), 요동(遼東), 현도(玄菟), 부여(扶餘), 조선(朝鮮), 옥저(沃沮), 낙랑(樂浪) 방면으로 진군할 것이오, 우 12군은 점선(黏蟬), 함자(含資), 혼미(渾彌), 임둔(臨屯), 후성(候城), 제해(提奚), 답돈(踏頓), 숙신(肅愼), 갈석(碣石), 동이(東暆), 대방(蔕方), 양평(襄平) 방면으로 진군하되, 진군로를 서로 연락하여 전부 평양으로 집합하게 하라.”
군사의 총수는 1백13만3천8백 명이었는데, 외형적으로는 2백만 명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군량 수송을 맡은 자의 수는 배가 되었다.
수나라에서는 남쪽 상건수(桑乾水)에서 토지 신령께 제사 지내고, 임삭궁(臨朔宮)의 남쪽에서 상제께 제사 지내고, 계성(薊城)의 북쪽에서 마조(馬祖)에게 제사 지냈다.
양제는 직접 지휘관을 임명하여, 각 군에 상장(上將), 아장(亞將) 각 1명과 기병 40대를 두었다.
1대는 1백 명이며, 10대가 1단이다. 보병은 80대였는데, 4단으로 나누어 단마다 각각 편장(偏將) 1명을 두었으며, 단의 갑옷과 투구의 끈과 깃발의 빛깔을 다르게 하였다.
매일 1군씩 군사를 보내되, 서로간의 거리가 각각 40리 정도 되게 하였다.
군영이 연속적으로 출발하였다.
40일 만에 출발이 모두 끝났다.
한 대열의 뒤와 다음 대열의 앞이 서로 연결되고, 북과 나팔 소리가 연이어 들렸으며, 깃발은 9백 60리에 뻗쳤다.
양제의 진영에는 12위(衛), 3대(臺), 5성(省), 9시(寺)가 있는데, 내외, 전후, 좌우의 6군을 나누어 배속시켜 뒤따라 출발하게 하였다. 이 대열이 또한 80리에 다다랐다.
근래에 군사의 출동이 이와 같이 어마어마한 적이 없었다.
2월, 양제가 군대를 이끌고 요수에 도착하였다.
모든 군사가 모여들어 강 앞에 큰 진을 쳤다. 우리의 병사들은 물을 사이에 두고 방어하였기 때문에 수나라의 병사가 건너오지 못하였다.
양제가 공부상서(工部尙書) 우문개(宇文愷)에게 명하여, 요수의 서쪽 언덕에서 세 개의 부교를 만들도록 하였다.
그것이 완성된 후, 부교를 끌어 동쪽 언덕으로 잇고자 하였다.
부교가 1장(丈) 정도 짧아서 언덕까지 닿지 못하였다. 이 기회를 틈타 우리의 병사가 강하게 공격하였다.
수나라의 병사들 가운데 날쌔고 용맹한 자들이 물로 뛰어들어 접전을 벌였으나 우리의 병사들이 높은 곳에서 공격하였으므로, 수나라 병사들은 언덕에 오르지 못하였다.
수나라의 병사 중에 전사자가 매우 많았다.
맥철장(麥鐵杖)이 언덕으로 뛰어 올랐다가 전사웅(錢士雄), 맹차(孟叉) 등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기 때문에 수나라의 병사는 곧 부교를 걷어 다시 서쪽 언덕으로 돌아갔다.
양제가 다시 소부감(少府監) 하조(何稠)에게 명하여 부교를 길게 늘이도록 하였다.
부교는 이틀 만에 완성되었다.
모든 부대가 차례로 건너와 동쪽 언덕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다.
우리의 병사들이 크게 패하여 1만 명에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수나라의 여러 부대는 승세를 타고 진격하여 요동성을 포위하였다.
요동성은 곧 한나라 때의 양평성(襄平城)이다. 양제가 요에 이르러 조서를 내려 전국의 죄수를 풀어주게 하고, 형부상서(刑部尙書) 위문승(衛文昇) 등에게 요수의 왼쪽 지방 백성들을 위로하고 달래게 하였으며, 그들에게 10년간의 부역을 면제시켜 주고 그곳에 군현을 설치하여 통치하게 하였다.
二十三年 春正月壬午 帝下詔曰 高句麗小醜 迷昏不恭 崇聚渤碣之間 荐食遼濊之境 雖復漢魏誅戮 巢穴暫傾 亂離多阻 種落還集 萃川藪於往代 播寔繁以汔今 睠彼華壤 翦爲夷類 歷年永久惡稔旣盈 天道禍淫 亡徵已兆 亂常敗德 非可勝圖 掩慝懷姦 唯日不足 移告之嚴 未嘗面受 朝覲之禮 莫肯躬親 誘納亡叛 不知紀極 充斥邊垂 亟勞烽候 關柝以之不靜 生人爲之廢業 在昔薄伐已漏天網 旣緩前禽之戮 未卽後服之誅 曾不懷恩 翻爲長惡 乃兼契丹之黨 處劉海戍 習靺鞨之服 侵軼遼西 又靑丘之表 咸修職貢 碧海之濱 同稟正朔 遂復敓攘琛賮 遏絶往來 虐及弗辜 誠而遇禍 輶車奉使 爰曁海東 旌節所次 途經藩境 而擁塞道路 拒絶王人 無事君之心 豈爲臣之禮 此而可忍 孰不可容 且法令苛酷 賦斂煩重 强臣豪族 咸執國鈞 朋黨比周 以之成俗 賄貨如市 寃枉莫申 重以仍歲災凶 比屋饑饉 兵戈不息 徭役無期 力竭轉輸 身塡溝壑 百姓愁苦 爰誰適從 境內哀惶 不勝其弊 廻首面內 各懷性命之圖 黃髮稚齒 咸興酷毒之歎 省俗觀風 爰届幽朔 弔人問罪無俟再駕 於是 親摠六師 用申九伐 拯厥阽危 協從天意 殄玆逋穢 剋嗣先謨 今宜授律啓行 分麾届路 掩渤海而雷震 歷扶餘以電掃 比戈按甲誓旅而後行 三先五申必勝而後戰 左十二軍 出等道右十二軍 出黏蟬含資渾彌臨屯候城提奚踏頓肅愼碣石東暆帶方襄平等道 絡繹引途 摠集平壤凡一百十三萬三千八百人 號二百萬 其餽輸者倍之 宜社於南桑乾水上 類上帝於臨朔宮南 祭馬祖於薊城北 帝親授節度 每軍上將亞將各一人 騎兵四十隊 隊百人 十隊爲團 步卒八十隊 分爲四團 團各有偏將一人 其鎧冑纓拂旗旛 每團異色 日遣一軍 相去四十里 連營漸進 終四十日發乃盡 首尾相繼 鼓角相聞 旌旗亘九百六十里 御營內 合十二衛三臺五省九寺 分隸內外前後左右六軍 次後發 又亘八十里 近古出師之盛 未之有也
二月 帝御師進至遼水 衆軍摠會 臨水爲大陣 我兵阻水拒守 隋兵不得濟 帝命工部尙書宇文愷造浮橋三道於遼水西岸 旣成 引橋趣東岸 短不及岸丈餘 我兵大至 隋兵驍勇者 爭赴水接戰 我兵乘高擊之 隋兵不得登岸 死者甚衆 麥鐵杖躍登岸 與錢士雄孟叉等 皆戰死 乃斂兵引橋 復就西岸 更命少府監何稠接橋 二日而成 諸軍相次繼進 大戰于東岸 我兵大敗 死者萬計 諸軍乘勝進圍遼東城 則漢之襄平城也 車駕度遼 下詔赦天下 命刑部尙書衛文昇等 撫遼左之民 給復十年建置郡縣 以相統攝
여름 5월, 수나라의 장수들이 동쪽으로 이동하고자 할 때, 양제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주의를 주었다.
“모든 군대가 나아가고 물러날 때, 반드시 나에게 보고하고 나의 지시를 기다릴 것이며,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요동의 우리 군사는 자주 싸우는 것이 해롭다고 생각하여 성을 굳게 수비하고 있었다.
양제는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여 요동성을 치게 하고, 또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고구려가 만일 항복하면 그들을 받아들일 것이며, 병사들에게 방종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요동성이 무너질 상황에 처할 때마다 성 안의 사람들은 번번이 항복하겠다고 말했다.
수나라의 장수들은 양제의 지시로 말미암아 적시에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먼저 양제에게 보고를 띄웠다.
양제의 명령이 떨어질 때마다 성의 방어가 다시 갖추어져서 수시로 나와 항거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두세 번 계속되었으나 양제는 끝내 이를 알아채지 못하고, 성은 오랫동안 항복하지 않았다.
夏五月 初 隋諸將之東下也 帝戒之曰 凡軍事進止 皆須奏聞待報 無得專擅 遼東數出戰不利 乃嬰城固守 帝命諸軍攻之 又勑諸將 高句麗若降 則宜撫納 不得縱兵 遼東城將陷 城中人輒言請降 諸將奉旨 不敢赴機 先令馳奏 比報至 城中守禦亦備 隨出拒戰 如此再三 帝終不悟 旣而城久不下
6월 기미일에 양제가 요동성 남쪽으로 가서 성곽과 연못의 형세를 관찰하고, 곧 여러 장수들을 불러 꾸짖으며 말했다.
“너희들은 벼슬이 높다고, 혹은 가문과 세도를 믿고 나를 어리석은 자로 취급하려고 하는가? 전일 내가 도읍에 있을 때 너희들이 내가 이곳에 오는 것을 원하지 않은 것은, 단점이 드러날까 두려워했기 때문임을 알겠구나.
이제 내가 여기에 온 것은, 너희들의 잘못된 행실을 판단하여 목을 베려는 것이다.
너희들은 지금 죽는 것이 무서워 힘을 쏟지 않고 있으니, 내가 너희들을 죽일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는가?”
여러 장수들이 모두 놀라서 얼굴색이 변하고 무서움에 치를 떨었다.
양제는 성의 서쪽으로 몇 리 떨어진 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육합성(六合城)을 엿보고 있었으나, 우리의 병사들은 모든 성을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좌익위대장군(左翊衛大將軍) 내호아(來護兒)가 강회(江淮)의 수군을 실은 수백 리에 달하는 선단을 이끌고, 바다를 통하여 패수(浿水)로부터 들어오니 평양과의 거리가 60리였다.
우리의 병사와 조우하자 그들이 진격하여 우리가 대패하였다.
내호아는 승세를 타고 성으로 진격하려고 하였다.
부총관 주법상(周法尙)이 만류하며 여러 군사들이 오기를 기다려 함께 진격하자고 하였다.
내호아가 듣지 않고 수만 명의 정예병을 선발하여 곧장 성의 바로 아래에까지 이르렀다.
이때 우리의 장수는 외성에 있는 빈 절간에 병사를 숨겨 놓고, 병사를 출동시켜 내호아와 싸우다가 거짓으로 패하는 체 하였다.
내호아는 성 안으로 쫓아 들어와 군사들을 풀어 백성들을 사로잡고 재물을 약탈하며, 미처 대오를 정비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숨어있던 우리 병사들이 출동하여 내호아의 군사를 크게 물리쳤다.
내호아는 간신히 포로 신세를 면하였고, 살아서 돌아간 병사는 수천 명에 불과하였다.
우리의 군대는 선창까지 추격하였다.
수나라의 장수 주법상이 진을 정비하여 대비하고 있었으므로 우리의 군대는 곧 물러 나왔다.
내호아는 병사들을 이끌고 바닷가로 돌아가서 주둔하여, 다시는 감히 다른 군대와 호응하고 접촉할 수 없게 되었다.
六月己未 帝幸遼東城南 觀其城池形勢 因召諸將 詰責之曰 公等自以官高 又恃家世 欲以暗懦待我邪 在都之日 公等皆不願我來 恐見病敗耳 我今來此 正欲觀公等所爲 斬公輩爾 公今畏死莫肯盡力 謂我不能殺公邪 諸將咸戰懼失色 帝因留止城西數里 御六合城 我諸城堅守不下 左翊衛大將軍來護兒 帥江淮水軍 舳艫數百里 浮海先進入自浿水 去平壤六十里 與我軍相遇 進擊大破之 護兒欲乘勝趣其城 副摠管周法尙止之 請俟諸軍至俱進 護兒不聽 簡精甲數萬 直造城下我將伏兵於羅郭內空寺中 出兵與護兒戰 而僞敗 護兒逐之入城 縱兵俘掠 無復部伍 伏兵發 護兒大敗 僅而獲免 士卒還者 不過數千人 我軍追至舡所 周法尙整陣待之 我軍乃退 護兒引兵還屯海浦 不敢復留應接諸軍
좌익위대장군(左翊衛大將軍) 우문술(宇文述)은 부여(扶餘)로 출동하고, 우익위대장군(右翊衛大將軍) 우중문(于仲文)은 낙랑(樂浪)으로 출동하고,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형원항(荊元恒)은 요동(遼東)으로 출동하고, 우익위대장군(右翊衛大將軍) 설세웅(薛世雄)은 옥저(沃沮)로 출동하고, 우둔위장군(右屯衛將軍) 신세웅(辛世雄)은 현도(玄菟)로 출동하고, 우어위장군(右禦衛將軍) 장근(張瑾)은 양평(襄平)으로 출동하고, 우무후장군(右武侯將軍) 조효재(趙孝才)는 갈석(碣石)으로 출동하고, 탁군태수검교좌무위장군(涿郡太守檢校左武衛將軍) 최홍승(崔弘昇)은 수성(遂城)으로 출동하고, 검교우어위호분낭장(檢校右禦衛虎賁郞將) 위문승(衛文昇)은 증지(增地)로 출동하여 모두 압록강 서쪽에 집결하였다.
우문술 등의 군사가 노하(瀘河)와 회원(懷遠), 두 진 지역에서 군사와 말에게 각각 100일 분의 식량을 주고, 또한 갑옷, 짧은 창, 긴 창, 옷감, 전투 기재, 장막 등을 주었다.
이에 따라 병사마다 3섬 이상의 짐을 지게 되어 그 무게를 당해낼 수 없었다.
우문술은 병사들에게 명을 내려 ‘도중에서 곡식을 버리는 자는 참수한다.’고 하였다.
군졸들은 모두 장막 밑에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이리하여 겨우 중간쯤 행군하였을 때 군량은 이미 거의 떨어졌다.
이때 임금은 대신 을지문덕(乙支文德)을 수나라의 군영으로 보내어 거짓으로 항복하게 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이 실력이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 것이었다.
이보다 앞서 우중문은 양제로부터 만일 고구려왕이나 을지문덕이 찾아오는 기회가 있으면 꼭 사로잡으라는 비밀 지시를 받고 있었으므로, 을지문덕을 잡으려고 하였다.
상서우승(尙書右丞) 유사룡(劉士龍)이 위무사(慰撫使)로 와 있다가 이를 강하게 말렸다.
우중문은 마침내 이 말을 듣고 을지문덕으로 하여금 돌아가도록 하였다.
우중문은 금방 이를 후회하여 사람을 보내어 을지문덕에게 거짓으로 말했다.
“다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돌아와도 좋다.”
을지문덕은 뒤돌아보지 않고 압록강을 건넜다.
우중문과 우문술 등은 을지문덕을 놓치고 내심 불안하였다.
우문술은 군량이 떨어졌기에 돌아가려 하였다.
우중문이 우문술에게 정예 부대로 문덕을 추격하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으나, 우문술이 강하게 말렸다.
우중문이 성내며 말하였다.
“장군이 십만 대병을 거느리고도 수가 적은 적군을 깨뜨리지 못하면 무슨 낯으로 황제를 보려는가? 그리고 나는 이번의 정벌에 공이 없을 줄 미리부터 짐작하였다.
왜냐하면 옛날 명장들이 공을 이룬 것은, 군사에 관한 일이 한 사람에 의하여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사람마다 각기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어떻게 적을 이길 수 있겠는가?”
당시 양제는 우중문이 계교와 전략이 훌륭하다고 생각하여 모든 부대에게 지휘 사항을 자문하게 하였기 때문에, 중문이 이와 같은 말을 하였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우문술 등이 마지못해 우중문의 말대로 여러 장수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을지문덕을 추격하였다.
을지문덕은 우문술의 군사가 굶주린 기색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들을 피로하게 하기 위하여 싸울 때마다 도주하였다.
우문술은 하루에 일곱 번을 싸워서 모두 이겼다.
그들은 여러 번을 이겼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고, 또한 여러 사람들의 의견에 밀려서 곧 동쪽으로 진군하여 살수(薩水, 청천강)를 건넜다.
그들은 평양성 30리 떨어진 곳에 이르러 산을 의지하고 진을 쳤다.
을지문덕이 다시 사람을 보내어 거짓으로 항복을 하는 척 하면서 우문술에게 청하였다.
“만약 군사를 거두어 돌아간다면, 임금을 모시고 황제가 계신 곳으로 가서 예방하겠다.”
우문술은 자신의 군사들이 피로하여 다시 싸울 수 없음을 알고 있었고, 또한 평양성이 험하고 견고하여 조기에 무너뜨릴 수 없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우리의 거짓말을 곧이듣고 돌아갔다.
우문술은 방진(方陣)을 치면서 행군하였다.
우리의 군대가 사면으로 공격하였다.
우문술 등은 한편으로 싸우며 한편으로 행군하였다.
左翊衛大將軍宇文述 出扶餘道 右翊衛大將軍于仲文 出樂浪道 左驍衛大將軍荊元恒 出遼東道右翊衛大將軍薛世雄 出沃沮道 右屯衛將軍辛世雄 出玄菟道 右禦衛將軍張瑾 出襄平道 右武侯將軍趙孝才 出碣石道 涿郡太守檢校左武衛將軍崔弘昇 出遂城道 檢校右禦衛虎賁郞將衛文昇出增地道 皆會於鴨綠水西 述等兵 自瀘河懷遠二鎭 人馬皆給百日糧 又給排甲槍矟幷衣資戎具火幕 人別三石已上 重莫能勝致 下令軍中 遺棄米粟者斬 士卒皆於幕下 掘坑埋之 纔行及中路糧已將盡 王遣大臣乙支文德 詣其營詐降 實欲觀虛實 于仲文先奉密旨 若遇王及文德來者 必擒之 仲文將執之 尙書右丞劉士龍 爲慰撫使 固止之 仲文遂聽 文德還 旣而悔之 遣人紿文德曰 更欲有言 可復來 文德不顧 濟鴨綠水而去 仲文與述等 旣失文德 內不自安 述以糧盡欲還 仲文議以精銳追文德 可以有功 述固止之 仲文怒曰 將軍仗十萬之衆 不能破小賊 何顔以見帝 且仲文此行 固知無功 何則 古之良將 能成功者 軍中之事 決在一人 今人各有心 何以勝敵 時 帝以仲文有計劃 令諸軍諮稟節度 故有此言 由是 述等不得已而從之 與諸將 渡水追文德 文德見述軍士有饑色 故欲疲之 每戰輒走 述一日之中 七戰皆捷 旣恃驟勝 又逼群議 於是 遂進東濟薩水 去平壤城三十里 因山爲營 文德復遣使詐降 請於述曰 若旋師者 當奉王 朝行在所 述見士卒疲弊不可復戰 又平壤城險固 度難猝拔 遂因其詐而還 述等爲方陣而行 我軍四面鈔擊 述等且戰且行
가을 7월, 우문술의 군대가 살수에 이르러 강을 절반쯤 건널 때, 우리의 군사가 후방에서 그들의 후속 부대를 공격하였다.
적장 우둔위장군 신세웅이 여기에서 전사하였다.
여러 부대들이 한꺼번에 무너져 걷잡을 수가 없었다.
장수와 군졸이 뛰어 도주하는데, 하루 걸려서 압록강까지 4백5십 리를 행군하였다.
수나라의 장군으로서 천수(天水) 사람인 왕인공(王仁恭)이 후군이 되어 우리의 군대를 막아 물리쳤다.
내호아는 우문술이 패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역시 물러났다.
위문승의 군대만이 온전하였다.
처음 9군이 요동에 도착했을 때는 총수가 30만5천 명이었는데, 요동성으로 돌아갔을 때는 다만 2천7백 명뿐이었고, 수만에 달하는 군량과 군사 기재들이 탕진되었다.
양제가 크게 화를 내면서 우문술 등을 쇠사슬로 묶어 계묘일에 돌아갔다.
애초에 백제왕 장(璋, 무왕)이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를 치자고 요청했을 때, 양제는 백제에게 우리의 동정을 엿보게 하였다.
이때 백제왕 장은 비밀리에 우리와 정보를 교환하고 있었다.
수나라의 군사가 출동할 때, 백제왕 장이 그의 신하 국지모(國智牟)에게 수나라에 가서 양국 군사가 만날 기일을 알려주도록 요청하였다.
양제는 크게 기뻐하여 후하게 상을 주고, 상서기부랑(尙書起部郞) 석률(席律)을 백제에 보내어 양국 군사가 만날 기일을 알려 주었다.
수나라의 군사가 요수를 건너오게 되자 백제도 역시 국경에서 군사를 정비하고 수나라에 협조한다고 말하였다.
실제로는 양쪽을 모두 지지하였던 것이다.
이번 싸움에서 수나라는 요수의 서쪽에서 우리의 무려라(武厲邏) 지역을 빼앗아 요동군(遼東郡)과 통정진(通定鎭)을 설치하였을 뿐이었다.
秋七月 至薩水 軍半濟 我軍自後擊其後軍 右屯衛將軍辛世雄戰死 於是 諸軍俱潰 不可禁止 將士奔還 一日一夜 至鴨綠水 行四百五十里 將軍天水王仁恭爲殿 擊我軍却之 來護兒聞述等敗亦引還 唯衛文昇一軍獨全 初 九軍度遼 凡三十萬五千 及還至遼東城 唯二千七百人 資儲器械巨萬計 失亡蕩盡 帝大怒 鎖繫述等 癸卯引還 初 百濟王璋遣使 請討高句麗 帝使之覘我動靜 璋內與我潛通 隋軍將出 璋使其臣國智牟 入隋請師期 帝大悅 厚加賞賜 遣尙書起部郞席律 詣百濟 告以期會 及隋軍渡遼 百濟亦嚴兵境上 聲言助隋 實持兩端 是行也 唯於遼水西 拔我武厲邏置遼東郡及通定鎭而已
영양왕 24년(서기 613)
24년(서기 613) 봄 정월, 수나라의 양제가 조서를 내려 전국 군사들을 탁군(涿郡)으로 소집하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효과(驍果, 군직명)로 삼아 요동의 옛 성을 수리하고 군량을 저장하게 하였다.
2월, 양제가 신하들에게 말했다.
“고구려와 같이 하찮은 것들이 상국을 무시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의 국력이 바닷물을 뽑아내고 산을 옮길 수 있는데, 하물며 이런 따위의 적이야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양제가 고구려를 다시 정벌할 것을 논의하였다.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 곽영(郭榮)이 간언하였다.
“오랑캐가 예절을 지키지 못한 것은 신하들이 처리할 일입니다.
천근 무게의 큰 활은 생쥐를 잡기 위하여 사용하지 않는 법인데, 어찌하여 직접 천자의 자리를 더럽혀 작은 도적을 대적하려고 하십니까?”
그러나 양제는 이 말을 듣지 않았다.
二十四年 春正月 帝詔徵天下兵 集涿郡 募民爲驍果 修遼東古城 以貯軍糧 二月 帝謂侍臣曰 高句麗小虜 侮慢上國 今 拔海移山 猶望克果 况此虜乎 乃復議伐 左光祿大夫郭榮諫曰 戎狄失禮臣下之事 千鈞之弩 不爲鼷鼠發機 奈何親辱萬乘 以敵小寇乎 帝不聽
여름 4월, 양제는 요수를 건넜다.
그는 우문술과 양의신(楊義臣)에게 평양으로 향하게 하고, 왕인공(王仁恭)은 부여를 경유하여 신성으로 진군하게 하였다.
수만 명의 우리 병사들이 이들과 대항하여 싸우다가 왕인공의 강한 기병 1천여 명에게 패하였다.
우리의 군대는 성을 굳게 지켰다.
양제가 모든 장수에게 명령하여 요동을 치게 하고, 그들에게 사태에 따라 명령을 기다리지 말고 적절하게 조치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비루동(飛樓橦), 운제(雲梯), 지도(地道)를 이용하여 사면에서 동시에 밤낮으로 공격하였다.
우리도 그때마다 적절히 대응하였기 때문에 20여 일이 지나도록 성을 빼앗기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양편 모두 전사자가 매우 많았다.
수나라에서 길이가 열댓 길 되는 성곽 공격용 사다리를 세우고, 효과(驍果) 심광(沈光)이 그 끝에 올라서서 성을 내려다보며 우리의 군대와 짧은 병기를 가지고 접전하여 10여 명을 죽였다.
우리의 군사들이 앞다투어 그를 밀었는데, 그는 땅에 채 닿기 전에 사다리에 매달려 있던 줄을 잡고 다시 올라갔다.
양제가 이를 바라보고 장하게 여겨 즉시 그에게 조산대부(朝散大夫) 벼슬을 주었다.
요동성이 오래도록 무너지지 않자, 양제는 1백만 여 개의 자루를 만들어 보냈다.
그는 자루에 흙을 채운 후에, 넓이가 30보이며 성과 높이가 동일한 큰 둑길을 쌓게 하고, 병사들에게 그 위에 올라서서 성 안을 공격하게 하는 작전을 구상하였다.
한편으로 성보다 훨씬 높은 여덟 개의 바퀴 달린 고공 수레를 만들어, 새로 만든 큰 둑길에 세워 성 안을 내려다보며 활을 쏘게 하는 방법도 구상하였다.
장차 날짜를 정하여 이러한 방법으로 공격하려고 하자 성 안에서는 위협을 느끼고 크게 위축되어 있었다.
때마침 수나라에서 양현감(楊玄感)이 반역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양제는 이를 크게 두려워하였다.
고관들의 자제가 모두 양현감의 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더욱 걱정하게 되었다.
수나라의 병부시랑(兵部侍郞) 곡사정(斛斯政)이 본래부터 양현감과 친한 사이였으므로 내심 불안하게 생각하여 우리에게 도망쳐왔다.
양제는 밤에 여러 장수들을 조용히 불러 군대를 인솔하고 돌아가도록 하였다.
군수 기자재와 공격용 도구들이 산더미처럼 쌓였고, 병영과 보루, 장막들도 자리에 둔 채 그대로 있었다.
군사들의 마음이 흉흉하여 다시 부대를 정비하지 못하고 여러 길로 흩어졌다.
우리 군대는 이를 즉시 알았으나 감히 나가지는 못하였다.
성 안에서 북을 울리며 떠들고 있다가, 이튿날 오시(午時)에야 조금씩 밖으로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때도 수나라의 군사가 우리를 속이는 것으로 의심하였다. 이틀이 지나서야 수천 명의 병사를 내어 추적해 갔다.
수나라 군사의 수가 많은 것을 두려워하여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고 일정하게 8십 리에서 9십 리의 거리를 두고 따라갔다.
거의 요수에 이르러서야 양제의 친병이 모두 건너간 것을 알고, 곧 그들의 후군을 공격하였다.
이때에도 후군의 수가 수만 명이었는데, 우리의 군대가 따라 가면서 끝까지 공격하여 대략 수천 명을 죽였다.
夏四月 車駕度遼 遣宇文述與楊義臣 趣平壤 王仁恭出扶餘道 進軍至新城 我兵數萬拒戰 仁恭帥勁騎一千 擊破之 我軍嬰城固守 帝命諸將攻遼東 聽以便宜從事 飛樓橦雲梯地道 四面俱進晝夜不息 我應變拒之 二十餘日不拔 主客死者甚衆 衝梯竿長十五丈 驍果沈光升其端 臨城與我軍戰 短兵接殺十數人 我軍競擊之 而墜未及地 適遇竿有垂絙 光接而復上 帝望見壯之 卽拜朝散大夫 遼東城久不下 帝遣造布囊百餘萬口 滿貯土 欲積爲魚梁大道 闊三十步 高與城齊 使戰士登而攻之 又作八輪樓車 高出於城 夾魚梁道 欲俯射城內 指期將攻 城內危蹙 會 楊玄感叛書至 帝大懼 又聞達官子弟皆在玄感所 益憂之 兵部侍郞斛斯政 素與玄感善 內不自安 來奔 帝夜密召諸將 使引軍還 軍資器械攻具 積如丘山 營壘帳幕 案堵不動 衆心忷懼 無復部分 諸道分散我軍卽時覺之 然不敢出 但於城內鼓噪 至來日午時 方漸出外 猶疑隋軍詐之 經二日 乃出數千兵追躡 畏隋軍之衆 不敢逼 常相去八九十里 將至遼水 知御營畢度 乃敢逼後軍 時 後軍猶數萬人 我軍隨而鈔擊 殺略數千
영양왕 25년(서기 614)
25년(서기 614) 봄 2월, 양제가 백관들에게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공격하는 문제를 의논하게 하였으나, 여러 날 동안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양제가 조서를 내려 다시 전국 병사를 소집하여 여러 방면의 길로 일시에 진군하게 하였다.
가을 7월, 양제가 회원진(懷遠鎭)으로 행차하였다.
이때 수나라는 나라 전체가 이미 혼란하여 소집한 병사의 대부분이 기일을 어기고 오지 않았고, 우리나라도 역시 지치고 쇠약한 상태였다.
수나라의 장군 내호아가 비사성(卑奢城)에 이르자, 우리의 병사가 맞이하여 싸웠으나 호아가 승리하고 곧 평양으로 진격하려고 하였다.
임금이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청하고 곡사정(斛斯政)을 돌려보냈다.
양제가 크게 기뻐하여 신임표를 가진 사절을 보내어 내호아를 소환하였다.
8월, 양제가 회원진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
겨울 10월, 양제가 서경(西京)으로 돌아가서 우리의 사신과 곡사정에 대한 일을 태묘(太廟)에 고하고, 또한 우리의 임금에게 수나라의 조정에 들어와 예방하라고 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듣지 않았다.
양제가 장수들에게 엄밀하게 대비할 것을 명하고, 다시 공격할 것을 기도하였으나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二十五年 春二月 帝詔百寮 議伐高句麗 數日無敢言者 詔復徵天下兵 百道俱進 秋七月 車駕次懷遠鎭 時 天下已亂 所徵兵多失期不至 吾國亦困弊 來護兒至卑奢城 我兵逆戰 護兒擊克之 將趣平壤 王懼 遣使乞降 囚送斛斯政 帝大悅 遣使持節 召護兒還 八月 帝自懷遠鎭班師 冬十月帝還西京 以我使者及斛斯政 告大廟 仍徵王入朝 王竟不從 勑將帥嚴裝 更圖後擧 竟不果行
영양왕 29년(서기 618)
29년(서기 618) 가을 9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호를 영양왕(嬰陽王)이라 하였다.
二十九年 秋九月 王薨 號曰嬰陽王
문헌
[삼국사기]; [수서]; [일본서기]; [통전]; 김용만,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 창해, 2001; 서인한, [고구려 대수ㆍ당전쟁사],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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