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법제사적 특징으로는 지속적인 법전 편찬을 들 수 있다.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즉위교서에서 의장(儀章)과 법제는 고려의 것을 준수하라고 천명하였으며 아울러 법전에 따른 법치주의를 표방하였다.
태조를 도와 조선을 건국한 정도전(鄭道傳)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찬술하여 법전 편찬과 통치 방침을 제시하였다.
1397년(태조 6)에는 『경제육전(經濟六典)』을 반포하였으며, 태종과 세종 때에도 법전을 편찬하였다.
이런 법에 따른 통치의 방침은 세조를 거쳐 1485년(성종 16)에 반포된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집대성되었다.
법전 편찬은 조선시대 후기에도 지속되어 1746년(영조 22)에 『속대전(續大典)』이, 1785년(정조 9)에 『대전통편(大典通編)』이, 1865년(고종 2)에 『대전회통(大典會通)』이 반포되었다.
전시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법전이 편찬된 점을 생각하면 조선시대는 통일법전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은 개창과 더불어 법전의 편찬에 착수하여 고려 말 이래의 각종 법령 및 판례법과 관습법을 수집하여 1397년(태조 6) 《경제육전(經濟六典)》을 제정, 시행하였다.
《경제육전》은 바로 수정되기 시작하여 태종 때에 《속육전(續六典)》이 만들어지고, 세종 때에도 법전의 보완작업이 계속되지만 미비하거나 현실과 모순된 것들이 많았다.
국가체제가 더욱 정비되어 감에 따라 조직적이고 통일된 법전을 만들 필요가 커졌다.
세조는 왕으로 되자 당시까지의 모든 법을 전체적으로 조화시켜 후대에 길이 전할 법전을 만들기 위해 육전상정소(六典詳定所)를 설치하고, 노사신(盧思愼). 최항(崔恒)· 김국광(金國光)· 강희맹(姜希孟)· 한계희(韓繼禧)· 임원준(任元濬)· 홍응(洪應)· 성임(成任)· 서거정(徐居正) 등에게 명하여 편찬작업을 시작하게 하였다.
1460년(세조 6) 먼저 〈호전(戶典)〉이 완성되고, 1466년에는 편찬이 일단락되었으나 보완을 계속하느라 전체적인 시행은 미루어졌다.
예종 때에 2차 작업이 끝났으나 예종의 죽음에 시행 못하다가, 성종 때 들어와서 수정이 계속되어 1471년(성종 2) 시행하기로 한 3차, 1474년 시행하기로 한 4차 《경국대전》이 만들어졌다.
1481년에는 다시 감교청(勘校廳)을 설치하고 많은 내용을 수정하여 5차 《경국대전》을 완성하였고 다시는 개수하지 않기로 하여, 1485년부터 시행하였다.
그 후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법령이 계속 마련되어 1492년의 《대전집록(大典輯錄)》, 1555년(명종 10)의 《경국대전주해》, 1698년(숙종 24)의 《수교집록(受敎輯錄)》 등을 거느리게 되었다.
1706년(숙종 32)의 《전록통고(典錄通考)》는 위의 법령집을 《경국대전》의 조문과 함께 묶은 것이다.
반포 때에 이미 〈예전(禮典)〉의 의식절차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따르고, 〈호전〉의 세입과 세출은 그 대장인 공안(貢案)과 횡간(橫看)에 의거하도록 규정되었다.
1746년(영조 22)에는 각종 법령 중 영구히 시행할 필요가 있는 법령만을 골라 《속대전》을 편찬하여 시행함으로써 또 하나의 법전이 나타났고,
1785년(정조 9)에는 《경국대전》과 《속대전》 및 《속대전》 이후의 법령을 합하여 하나의 법전으로 만든 《대전통편》이 시행되었으며, 그 이후의 법령을 추가한 《대전회통(大典會通)》이 조선왕조 최후의 법전으로서 1865년(고종 2)에 이루어졌다.
《경국대전》은 조선왕조 개창 때부터의 정부체제인 육전체제(六典體制)를 따라 6전으로 구성되었으며, 각기 14~61개의 항목으로 이루어졌다.
〈이전(吏典)〉은 궁중을 비롯하여 중앙과 지방의 직제 및 관리의 임면과 사령, 〈호전〉은 재정을 비롯하여 호적·조세·녹봉·통화와 상거래 등, 〈예전〉은 여러 종류의 과거와 관리의 의장, 외교, 의례, 공문서, 가족 등, 〈병전(兵典)〉은 군제와 군사, 〈형전〉은 형벌·재판·노비·상속 등, 〈공전(工典)〉은 도로·교량·도량형·산업 등에 대한 규정을 실었다.
짧게는 세조 때 편찬을 시작한 지 30년 만에, 길게는 고려 말부터 약 100년 간의 법률제정사업을 바탕으로 완성된 이 법전의 반포는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밑받침하는 통치규범의 확립을 의미하였다.
새로운 법의 일방적인 창조라기 보다 그당시 현존한 고유법을 성문화하여 중국법의 무제한적인 침투를 막고 조선 사회 나름의 질서를 후대로 이어주었다 는 의미를 지닌다.
예를들면 〈형전〉의 자녀균분상속법, 〈호전〉의 매매 및 사유권의 절대적 보호에 대한 규정, 〈형전〉의 민사적 소송절차에 대한 규정 등은 중국법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고유법이다.
당시 사회의 한계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국왕에 대한 규정이 없는 것이 한 예이다.
정치운영에서는 점점 세밀한 규정들이 수립되어 국왕의 권한에 많은 제약을 가하였지만, 조선 사회의 기본 정치이념에서 국왕은 법률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관리의 자격에 대해 천민이 아닐 것 이상의 신분적 제약을 정해놓지 않아 중세 신분제의 극복과정에서 한층 발전된 수준을 보여주지만, 노비에 대한 규정을 〈형전〉에 자세하게 담은 것은 당시의 지배층이 노비제의 기반 위에 서 있었고 그들을 죄인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법률의 개폐가 끊임없이 계속되고 그것을 반영한 법전이 출현하였지만, 이 법전의 기본체제와 이념은 큰 변화없이 이어졌다.
《대전회통》에는 비록 폐지된 것이라 하더라도 《경국대전》의 조항이 그 사실과 함께 모두 수록되었다.
사회운영의 질서는 실질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고 따라서 법전의 시행 내용 또한 매우 큰 폭으로 달라져 갔다.
단순한 법질서의 혼란이 아니라 사회의 변동과 발전에 대한 체제의 적응 노력이었다.
최고위 관서로 의정부가 있고 그곳의 3정승이 관료의 정상을 이룬다는 기본구조는 19세기 말까지 변화가 없었지만, 조선 전기 3정승과 의정부가 비교적 강력하게 백관을 통솔하고 국정을 총괄한 반면, 조선 중기 이후로는 비변사(備邊司)가 국정을 총괄하는 관서가 되었고 3정승이 그곳의 대표자로서 권한을 행사하였다.
이때의 비변사는 고위관리의 회의를 통해 운영되는 합좌기구로서 당시 지배층의 확산에 조응하여 좀더 많은 사람의 의견을 끌어모으고, 더욱 복잡해진 국가행정을 전문적으로 이끌어간다는 의미를 지녔다.
후기 법전인 《속대전》부터는 비변사에 대한 규정을 담고 있다.
《경국대전》은 조선시대가 계속되는 동안 최고법전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매우 여러 차례 간행되었으며 현대에 들어와서는 법제처가 1962년에 번역본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1985년에 번역본과 주석서를 함께 간행하였다.
2007년 7월 13일 보물 제1521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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