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 India, 印度.
남부 아시아에 있는 나라로, 1857년 무굴제국이 멸망한 후 영국의 직할식민지로 편입되었다. 1947년 8월 15일 영국의 지배를 벗어나 힌두권인 인도와 이슬람권인 파키스탄이 각각 영국연방의 자치령으로 독립하였고, 1950년 자치령의 지위에서 벗어났다.
정식명칭은 인도공화국(Republic of India)이며, 힌디어(語)로는 바라트(Bharat)라고 한다. 서쪽으로 파키스탄, 북동쪽으로 중국·네팔·부탄, 동쪽으로 방글라데시·미얀마와 국경을 접한다. 1914년 맥마흔(McMahon) 선언에 따라 영국령인 인도와 중국의 국경이 히말라야 산맥 분수령에 설정된 이후 중국과 국경분쟁이 이어졌다.
1962년 전쟁까지 치렀다. 파키스탄과는 독립 당시부터 카슈미르 지역을 둘러싼 영토분쟁을 벌여왔다. 아시아 문명의 원천으로 불교가 발상한 곳이며, 천축(天竺)이란 이름으로 예부터 알려진 곳이다. 국명은 산스크리트어(語)로 된 인더스강(江)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국토면적은 세계 7위이며, 인구는 세계 2위이다. 행정구역은 29개 주(state)와 7개 연방직할지(union territory)로 되어 있다.
나마스떼(안녕하세요!) 인도에는 10억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어. 사람이 많다보니 종교와 문화도 참 다양해. 인도 고유의 종교인 힌두교는 인도인들의 생활 깊숙이 자리 잡고 있어서 인도를 여행하다 보면 곳곳에서 힌두교 사원을 볼 수 있다.
부처가 태어난 곳,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곳 등을 다니며 불교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지. 그뿐인 줄 알아?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이슬람 사원도 볼 수 있고, 영국의 지배를 받을 때 세워진 영국식 건물 사이를 누비다 보면 마치 그 거리가 인도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니까. 이제 인도의 신비한 매력 속으로 여행을...
랄 킬라(Red Fort)
델리가 인도의 수도였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야. 델리 성이라고도 하고, 붉은 사암으로 되어 있어서 ‘붉은성’이라고도 불러. 타지마할을 건축한 샤자한이 쌓은 것으로, 무굴 제국 전성기의 건축 기술을 볼 수 있는 곳
자미 마스지드
델리 최대의 모스크(이슬람 사원)로 한꺼번에 2,000명의 예배자가 들어갈 수 있대. 건축광 샤자한의 마지막 건축물이자 인도와 이슬람 양식이 융합된 무굴 건축의 걸작이야.
타지마할
무굴 제국의 황제 샤자한이 사랑했던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며 세운 것이야. 아그라 시는 타지마할을 보러온 사람들로 넘쳐나지. 타지마할은 아침, 태양빛이 가득한 한낮, 석양 무렵의 모습이 다르다고 해.
간디 슴리티
인도 건국의 아버지 간디가 암살당하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야. 지금은 기념관이 있어서 간디가 쓰던 침대와 사진, 간디의 행적을 따라 만들어 놓은 작은 인형들이 전시되어 있어.
아그라 성
무굴 제국의 악바르 황제가 수도를 델리에서 아그라로 옮기면서 건축하기 시작해서 그의 손자인 샤자한이 완성했어. 샤자한이 말년에 아들인 아우랑제브에 의해 갇힌 곳이 바로 이곳이야. 샤자한은 강 건너 사랑하는 아내가 묻혀있는 타지마할을 바라보다 끝내 숨을 거두었
카주라호 사원군
카주라호는 도시 전체가 거대한 유적지야. 힌두교와 자이나교 사원을 보고 싶다면 이곳을 꼭 가봐. 벽면을 수놓은 수많은 조각들을 통해 중세 인도의 부조를 한눈에 볼 수 있지.
불교의 성지
불교의 4대 성지를 아니? 석가모니가 태어난 룸비니, 깨달음을 얻은 부다가야, 처음 말씀을 전한 사르나트, 열반에 들어간 쿠시나가라! 이 중에서도 가장 성스러운 곳은 바로 깨달음을 얻은 부다가야야. 지금은 국제 사원으로 꾸며져 세계의 절을 다 볼 수 있어.
다르질링
히말라야 산맥 남동쪽 기슭에 있고, 7~8월에도 16℃ 정도로 시원한 곳이야. 1883년 영국이 이곳에 차를 재배하기 시작하면서 발전했대. 다르질링 히말라야 철도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어.
엘로라 석굴 사원 / 아잔타 석굴 사원
엘로라 석굴 사원은 인도 종교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 주는 곳이야. 불교뿐 아니라 힌두교와 자이나교의 석굴도 포함되어 있는데, 굴수는 모두 34개나 된대. 한편 아잔타 석굴 사원은 인도의 대표적인 고대 불교 석굴 사원이야. 현재는 인도뿐 아니라 세계가 인정하는 불교 예술의 보물 창고라 할 수 있는 곳이야.
IT 강국 인도
영국에서 독립한 후 인도는 정치에서는 민주주의를, 경제에서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섞어서 나라의 발전을 꾀했어. 그러다가 1990년대 IMF 외환 위기를 겪은 후 경제 개방을 더 많이 하면서 높은 국민 소득 증가를 이루어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지. 특히 IT 산업은 인도 경제의 중심으로, 세계 2위의 소프트웨어 수출국이야. 그렇다면 인도가 IT 강국으로 성장하게 된 배경은???
첫째, 인도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들 수 있어. 인도 정부는 80년대 후반부터 소프트웨어를 중심으로 IT 산업을 키우기 위해 노력해서 IT 산업에서 일하는 사람이 초기에 6,800명이던 것이 2007년에는 70만 명으로 늘어났다.
둘째, 인도는 질 높은 교육을 받은 우수한 인재들이 많아. 영어가 공용어 중 하나이고, 19×19단 암기로 계산력이 빠른 것도 장점이야. 또 인도인은 노벨상을 6번이나 수상했을 정도로 수학과 과학 실력이 뛰어나다.
셋째, 우수한 인력에 비해 인건비가 낮은 것도 큰 장점이야. 그래서 미국과 영국의 기업들이 앞다퉈 인도의 IT기업에 일을 맡기고 있다.
넷째, 인도는 IT 분야와 관련하여 미래의 큰 시장이 될 것으로 보여. 인도의 영화 산업 규모는 세계 최대로 극장표 판매량이 일 년에 28억 장이고, 영화도 일 년에 1,200편을 제작하고 있어. 인도 영화의 경쟁력과 우수한 IT 기술이 결합하면 애니메이션, 3D 영상 등이 발전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볼리우드는 인도 뭄바이의 옛지명인 봄베이와 미국 영화의 중심지인 할리우드를 합쳐서 만든 말이야. 할리우드에 비교할 만큼 뭄바이가 영화의 중심지라는 뜻이 담겨 있는 거지. 볼리우드의 영화는 인도뿐 아니라 중동, 아프리카, 동남아시아에서도 인기가 높아. 또한 인도 사람들이 많이 이주한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미국에서도 인기가 높다.
영화를 즐기는 인도인들?
극장에서 박수를 치거나 야유를 보내면 어떨까? 우리나라에서는 매너 없는 행동이라고 비난받을 일이지만, 인도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래. 멋있는 주인공이 나타나면 휘파람을 불며 박수를 치고, 악역을 맡은 사람이 나오면 야유를 보내기도 해. 영화 중간중간 춤과 노래가 나오면 박수치고 노래 부르면서 영화를 즐긴다.
영화 관람료도 매우 저렴해서 인도인들은 영화를 즐겨 본대. 영화의 내용은 거의 대부분 착한 사람은 복 받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 거래. 또 화려한 집과 멋진 배우가 등장하고 있대. 아마 현실에서 누릴 수 없는 것을 영화를 통해 누리고 싶은 인도인의 마음이 깔려 있는 걸지도 몰른다.
인구가 너무 많아
인도의 인구는 12억으로, 세계에서 중국 다음으로 인구가 많아. 게다가 인구는 계속 증가하고 있어. 인도 정부는 우리나라의 가족 계획 사업을 도입해서 출산율을 낮춰보려고 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어. 아기를 많이 낳는 하층민의 경우 교육을 못 받아 가족 계획 사업을 홍보하기 어려웠대. 인도의 경제 발전 문제는 인구 문제와 연결된다고 할 정도로 인구 문제 해결은 매우 중요하다.
공식 언어가 17가지나 돼
인도는 땅이 넓다보니 지방마다 쓰는 언어가 약간씩 달라서 현재 약 700개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어. 헌법에서 인정하는 공식 언어만 해도 17개나 돼. 인도의 주(州)는 언어에 따라 나뉘기 때문에 주마다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 그중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언어는 전 인구의 45%가 사용하는 힌디 어야. 하지만 힌디 어를 표준어로 하는 데 반대가 심해서 현재도 영어가 공용어로 쓰이고 있다.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싸움이 자꾸 일어나
인도는 지난 수천 년 동안 외부의 침략을 자주 받았는데 그중에서도 이슬람의 영향이 가장 오랫동안 지속되었어. 이 때문에 다양한 언어와 종교가 자리 잡았고 주민들의 생활 방식도 다양해졌어. 종교 간에 서로 싸울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잘 지냈어. 그런데 영국의 식민 지배를 거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200여 년간에 걸친 영국의 지배로부터 독립하면서 힌두교 중심의 인도, 이슬람교 중심의 파키스탄으로 나뉘게 되었어. 그런데 독립할 당시 국경선이 종교 집단을 경계로 정확하게 그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국경에서는 여전히 종교 갈등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
카스트 제도가 여전히 남아 있어
3,500년이나 묵은 인도의 카스트 제도는 너무나 단단해서 그 신분의 벽을 뛰어넘기가 쉽지 않아. 게다가 ‘닿기만 해도 부정해진다.’는 인도인들의 생각이 담겨있는 ‘불가촉 천민’문제는 인도가 급히 해결해야 할 숙제야. 1955년 〈불가촉 천민법〉이 만들어져 공식적으로는 이들에 대한 종교적·사회적·직업적 차별을 금하고 있어. 그리고 입학이나 취업, 의식의 일정 비율을 배정하는 등 차별을 없애기 위한 정책을 실시하고 있어. 하지만 대다수의 불가촉 천민은 아직도 가난에 시달리며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살고 있다.
남편따라 불길 속으로 - 사티.
- 16세기 전반에서 19세기 중엽까지 인도 지역을 통치한 이슬람 왕조(1526∼1857년).
- 인도의 분열을 틈타 들어온 이슬람 세력
6세기 말부터 굽타 왕조가 약해지고 인도를 이끌 큰 세력이 없자, 이슬람 세력이 차츰 손을 뻗기 시작했어. 8세기에는 인도 서북 지방에 자리 잡은 이슬람 세력이 인도 북부를 자주 침략하여 북인도 지역은 차츰 이슬람 세력에게 넘어갔고, 자연스럽게 이슬람의 문화와 종교가 스며들었어. 13세기 초에는 인도의 중심지인 델리가 이슬람의 손에 들어가게 되면서 이슬람의 인도 지배가 시작되었다.
통일보다 분열이 더 자연스러운 나라
북인도 | 남인도 |
---|---|
분열기·이슬람의 침입 | 힌두교를 믿는 여러 왕조가 나누어 다스림 |
이슬람 왕조 - 델리 술탄왕조 | |
무굴 제국.(16~19세기) |
생산력이 낮고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기에 인도와 같은 거대한 땅을 하나로 통일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어. 실제로
인도가 영국에 의해 지배당하기 이전에는 한 번도 통일을 이루지 못했으니까 말이야. 인도의 동부, 서북부, 그리고 남부에는
늘 서로 다른 왕조가 있었고, 서북부 지역에는 이슬람을 비롯한 수많은 이민족의 이동과 국가 간의 대결로 대단히 복잡한
역사가 펼쳐졌어.
힌두교와 카스트 제도의 신분 차별에 신음하던 인도의 하층민들은 이슬람 세력을 반겼어. 알라 앞에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교리에 끌렸던 거야. 자신의 세력을 키우려는 목적으로 이슬람교를 받아들이는 인도인들도 많았고, 전쟁을 피하거나 좀더 나은 위치에 서기 위해 종족 단위로 개종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슬람이 인도에 세운 제국
무굴 제국의 성립
1526년, 몽골의 후손인 티무르의 5대손 바부르가 인도의 새 주인이 되었어. 바부르의 세력이 북인도의 중심지인 델리와 아그라를 차지하면서, 무굴 제국이 탄생한 거야. 무굴 제국의 전성기는 악바르 왕 때였다. 그는 인도 북부와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하는 대제국을 건설하고, 정치·경제·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무굴 제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악바르 왕 자신은 이슬람교도였지만, 힌두교를 차별하지 않고 힌두교도에게 물리던 세금을 없애고 벼슬도 할 수 있는 기회를 줬어. 나아가 힌두교도의 공주와 결혼하여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 사이의 화합을 실천했다.
무굴 제국의 번영과 쇠퇴
무굴 제국은 17세기 아우랑제브 왕 때에 인도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크게 발전했어. 하지만 아우랑제브는 아버지 샤자한을 감옥에 가두고 두 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어.
이슬람교를 믿지 않는 힌두교도에게 엄청난 세금을 매기고, 수많은 힌두교 신전을 파괴한 후 그 자리에 이슬람 사원을 세웠다. 무굴 제국은 아우랑제브 왕 이후 국력이 급속히 약화되었고, 이러한 가운데 영국을 비롯한 서양 세력의 침략을 받아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슬람 문화와 힌두 문화의 만남
16세기 무굴 제국의 등장으로 이슬람교는 인도 사회에 깊이 파고들어 힌두 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융합된 문화를 만들었어. 힌두 문화의 바탕 위에 이슬람교의 유일신 사상을 받아들인 시크교는 우상 숭배를 거부하고 카스트 제도를 부정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
무굴 제국의 지배자들은 인도인들과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힌두 어, 페르시아 어, 아랍 어 등을 혼합하여 우루두 어를 만들었는데 오늘날에도 사용되고 있어. 건축에서는 타지마할 묘당과 같은 뛰어난 작품이 나타났어. 타지마할은 이슬람 사원의 양식에 연꽃 무늬를 비롯한 인도 고유의 문화를 잘 조화시켜 인도·이슬람 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타지마할은 ‘인간이 만든 최고의 걸작품’,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이라는 칭찬이 끊이지 않아. 타지마할은 샤자한이 사랑하던 왕비 뭄타즈 마할이 죽자 그녀를 기리기 위해 만든 무덤이다.
아름다웠던 왕비를 잃은 슬픔에 샤자한은 그의 온갖 예술적 정열과 국력을 쏟아 22년 동안 무덤을 짓는 데 열중했다. 평소에도 건축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세계 각지의 솜씨 있는 장인들을 불러 모으고, 백색의 대리석 외에도 보석들을 동원하여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어냈다.
무굴 제국의 성립
1526년, 몽골의 후손인 티무르의 5대손 바부르가 인도의 새 주인이 되었어. 바부르의 세력이 북인도의 중심지인 델리와 아그라를 차지하면서, 무굴 제국이 탄생한 거야. 무굴 제국의 전성기는 악바르 왕 때였다. 그는 인도 북부와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하는 대제국을 건설하고, 정치·경제·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무굴 제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악바르 왕 자신은 이슬람교도였지만, 힌두교를 차별하지 않고 힌두교도에게 물리던 세금을 없애고 벼슬도 할 수 있는 기회를 줬어. 나아가 힌두교도의 공주와 결혼하여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 사이의 화합을 실천했다.
무굴 제국의 번영과 쇠퇴
무굴 제국은 17세기 아우랑제브 왕 때에 인도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크게 발전했어. 하지만 아우랑제브는 아버지 샤자한을 감옥에 가두고 두 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어.
이슬람교를 믿지 않는 힌두교도에게 엄청난 세금을 매기고, 수많은 힌두교 신전을 파괴한 후 그 자리에 이슬람 사원을 세웠다. 무굴 제국은 아우랑제브 왕 이후 국력이 급속히 약화되었고, 이러한 가운데 영국을 비롯한 서양 세력의 침략을 받아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슬람 문화와 힌두 문화의 만남
16세기 무굴 제국의 등장으로 이슬람교는 인도 사회에 깊이 파고들어 힌두 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융합된 문화를 만들었어. 힌두 문화의 바탕 위에 이슬람교의 유일신 사상을 받아들인 시크교는 우상 숭배를 거부하고 카스트 제도를 부정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나라.역사(국내 .각지역.)'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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