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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사나이 "가황 나훈아는 왜 5·18 노래 ‘엄니’를 불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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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사나이 "가황 나훈아는 왜 5·18 노래 ‘엄니’를 불렀나?

'5.18 헌사' 바쳐온 김상봉 교수 "내년 5.18 기념식 때 나훈아 노래 부르자"

김상봉 교수는 클래식 음악 애호가다.

"혼자 있는 시간이 충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좋은 기운을 나눠줄 수 있다"며, 클래식 음악으로 스스로를 충만하게 채운다.

나이 들어 피아노를 배우고 연주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내년 5.18 42주년 기념식 때 가수 나훈아의 트로트 노래를 부르자고 한다.

'테스형'도 모른다면서, 왜 나훈아 노래를 부르자는 걸까?

5.18 41주년 기념식을 앞둔 5월 어느 날, 김상봉 교수는 "방송국에서 왜 나훈아를 다루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나훈아가 5.18 관련 노래를 만들었다는 건 그때 알았다.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 인터뷰 사진

그것도 엄혹한 5공 시절에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김상봉 교수는 5.18을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응답'이었다고 평한다.

응답은 반드시 다른 응답을 불러온다는 게 김 교수의 생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훈아의 노래는 5.18의 보편성을 확인해주는 '또 다른 응답'이다.

나훈아 "광주 달래는 노래 만들었지만, 정부 기관 방해로 뜻 이루지 못했다"

나훈아 씨는 지난해(2020년) '아홉 이야기'라는 앨범을 냈다.

그 안에 '엄니'라는 곡이 있다.

나훈아 씨는 먼저 숨져간 광주 젊은이들의 죽음을 그냥 두고 보기에 너무 안타까워 본인이 직접 작사, 작곡했다고 밝혔다.

1987년에 만들었다는 노래를 33년이 지나서야 정식 앨범에 실은 것이다.

그는 당시 만든 노래를 카세트 테이프 2천 개에 담아 광주MBC에 전달했지만 "정보기관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썼다.

수소문 끝에 당시 테이프를 받았다는 퇴직한 소수옥 PD와 연락이 닿았다.

나훈아씨가 5.18 관련 노래를 전라도 사투리로 불러보겠다고 했고, 이후 노래를 담은 카세트 50개를 받아 방송을 몇 번 했는데, 외부에서 '안 했으면 좋겠다'고 연락이 왔다고 했다.

소수옥씨는 나훈아씨가 광주에 올 때마다 아무도 모르게 5.18 묘역 참배를 했다는 사실도 알려줬다.

나훈아 앨범 ‘아홉 이야기’에 직접 쓴 ‘엄니’ 제작 사연

5.18 때 죽은 희생자가 어머니를 위로하는 내용의 가사는 전라도 사투리다.

"엄니 엄니 워째서 울어쌌소.

나 여그 있는디 왜 운당가...들리지라우 엄니 인자 그만 울지 마시오."

'부산시 동구 초량2동 415번지'에서 태어났다는 부산 사나이, 나훈아는 어쩌다 5.18을 노래했을까?

나훈아씨 인터뷰를 위해 기획사에 연락했지만, 응답이 오지 않았다.

김상봉 교수는 이렇게 평했다.

"나훈아씨가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문제에 개입하거나 자기 생각을 표현하시는 분이 아닌데, 유독 예외적으로 광주 5.18의 역사에 대해서만 이런 노래를 쓰고, 공개적인 자리에서 그 노래를 부르고 또 새로운 앨범에 수록을 하고 하는 것은 딱 한 가지 이유밖에 생각나지 않습니다.

마음이 순수한 사람, 편견이 없이 사물을 보는 사람, 역사를 바라보는 사람의 눈에는 누구에게라도 5.18은 슬픔과 분노,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역사다."

노래 ‘엄니’ 앨범 사진 속 나훈아

김상봉 "나훈아 노래 '엄니'... 5.18 상징하는 또 다른 노래로 불려지길"

김상봉 교수는 "많은 분들이 아실 법한 노래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사이에서 거의 알려져 있지 못한 것에 대해서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나훈아 씨가 이 노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별개로 광주의 5.18을 상징하는 또 다른 노래의 하나로 같이 불려지기를 바랍니다.

내년 5.18 기념식 때는 이 노래가 우리들 사이에서 같이 불려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나훈아의 엄니는 내년 5.18 기념행사 때 불려질 수 있을까?

 

국립 5.18 민주묘지

위치 : 광주광역시 북구 민주로 200 (운정동)

광주광역시 북구에 있는 공원으로 5·18묘역이라고도 한다.

문민정부 출범과 더불어 5.18 민주항쟁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지고 5.18 희생자 묘역을 민주 성지로 가꾸려는 움직임이 뜻있는 국민들로부터 일어났다.

광주광역시는 중앙 정부의 지원을 받아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 산34번지 165k㎡의 부지 위에 5.18묘지를 조성하였다.

묘역 안에는 5·18영령의 묘 764기(2017년 기준)가 있으며, 건축물 7동(민주의 문, 유영봉안소, 역사의 문, 숭모루, 추념문, 관리동, 휴게실)과 역사공간, 민주광장, 참배광장, 전시공간, 상징조형물, 광주민주화운동추모탑, 7개 역사마당(의병, 동학, 3·1운동, 광주학생운동, 4·19혁명, 광주민주화운동, 통일마당), 헌수기념비, 준공기념탑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5.18 민주 항쟁은 1980년 5월, 12.12사태와 당시의 군부에 의해 벌어진 정권 장악 음모에 대항해 일어난 전국적인 저항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자행된 대표적인 반민주 학살 사건이며, 이에 저항한 시민 민주항쟁이다.

광주광역시 북구에 있는 공원으로 5·18묘역,

이 묘지는 여기서 희생당한 광주 시민들의 넋을 기리며, 이땅에 다시는 불의와 독재가 발붙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리는, 살아 있는 역사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한편 민주 성지를 내손으로 가꾸기 위해 시작한 민주나무 헌수운동은 5.18의 숭고한 정신을 국내, 외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5ㆍ18 묘지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사각기둥인 탑신은 높이 40m로 우리나라 전통석조물인 당간지주를 현대감각에 맞게 형상화 했다.

탑신 가운데 감싸쥔 손 모양으로 중앙에 설치된 타원형 형상은 새로운 생명의 부활을 상징하며, 시시각각 변하는 태양광에 반사된 빛은 희망의 씨앗이다.

 

밑줄 쳐가며 읽는 농업·로컬 ③정은정 <아스팔트 위에 씨앗을 뿌리다>

전남 보성 농민 백남기. 2015년 11월 14일 서울에서 열린 민중총궐기 대회에 참석했다가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아 쓰러졌다.

사경을 헤매다 2016년 9월 25일 숨을 거뒀다.

25일은 백남기 농민의 5주기이다.

그가 입원했던 서울대병원은 그의 사망을 ‘외인사’가 아닌 ‘병사’라고 기재했고, 경찰은 그의 시신을 강제로 부검하려 했다.

정은정 작가가 쓴 <아스팔트 위에 씨앗을 뿌리다>는 백씨가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때부터, 가족들이 그의 장례를 치르기까지 투쟁 전반에 대해 기록한 책이다.

저자는 1970년 대부터 이어진 농민 운동의 큰 틀 안에서 이 사건을 설명하는데, 덕분에 독자들은 질문 하나를 계속 붙들면서 책을 읽어나가게 된다.

‘정권을 막론하고, 왜 그토록 많은 농민들이 매번 아스팔트 위에 설 수 밖에 없었을까.’

“투쟁 기록단은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를 맞고 쓰러지고 숨을 거두기까지의 ‘사건’을 기록하는 것은 물론, 백남기 농민이 서울로 가야했던 이유에 대해서도 매달리기로 했다.

왜냐하면 백남기 농민의 죽음의 원인은 두 가지였기 때문이다.

그 하나는 물대포라는 국가폭력의 물리적 실체이고, 다른 하나는 끝없이 추락하는 농촌과 농민의 삶 자체다.”(p.7)

백남기 농부와 아내 박경숙 농부는 전남 보성에서 벼농사를 지었다.

생산비도 건지지 못하는 쌀값 수준에 대한 농민들의 불만은 컸는데, 제18대 대통령 선거 당시 농촌 지역에 붙어있던 박근혜 대선 후보의 현수막에는 ‘쌀값 인상, (80㎏당) 17만원을 21만원으로’라는 글이 써 있었다.

이후 박근혜 정부는 ‘쌀값 인상은 공약이 아니었다’고 말해 농민들의 반발을 샀다.

경남의 밀양의 한 농촌마을에서 농부가 손 모내기를 하고 있다. 

백씨가 경찰 물대포에 쓰러지기 직전 해인 2014년에는, 정부가 20년 동안 막고 있었던 쌀 시장을 개방했다.

농민들은 ‘값싼 외국산 쌀이 본격적으로 수입되면 쌀 값이 더 떨어질 것’이라고 우려했지만, 농림축산식품부는 수입 쌀에 513%의 높은 관세를 물게 하면 문제 없다며 쌀시장 개방을 강행했다.

앞서 한국은 20년 동안 쌀시장 개방을 미뤄오면서 그 대신 매년 일정 물량의 쌀을 낮은 관세(5%)로 수입해 왔는데, 이 양(최소시장접근·MMA)이 매년 늘어나 2014년에는 40만8700톤이나 됐다.

이 안에는 밥쌀용 쌀도 포함돼 있었다.

쌀 시장 개방 이후에도 이 물량 만큼은 5%의 저율 관세로 매년 의무적으로 수입해야 하지만, 밥쌀용 쌀 포함 의무는 사라진다.

5%의 관세로 수입하는 쌀 40만8700톤 물량에 대해서는 밥쌀용이 아닌, 가공용 쌀을 수입하는 방식으로 국내 쌀 시장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당시 농림축산식품부는 5% 저율 관세로 들여오는 수입 쌀 일부 물량을 밥쌀용 쌀로 수입하겠다고 밝혔다.

백씨가 ‘밥쌀용 수입 저지!’라고 쓴 파란 조끼를 입고 상경 투쟁에 나선 건 이 때문이다. 

“농민단체들이 막무가내로 쌀 개방 반대를 외친 것이 아니었다.

농민단체들은, 어쩔 수 없이 수입 할당량을 채워야 한다면 밥쌀 말고 가공용 쌀로, 또 해외원조를 활용해 국내 농업이 입을 타격을 최소화하자고 제안했다.

타협안까지 제시하며 정부와 협의해 가고자하던 차에 밥쌀 수입이 기습적으로 결정돼 농민들의 분노가 더욱 거세졌다.”

쌀시장 개방 7년 째인 올해도 5%의 저율 관세를 물고 국내 시장에 들어온 밥쌀용 쌀들이 4만 톤에 달한다.

모내기한 논. 백남기·박경숙 농민은 전남 보성에서 벼와 밀 농사

모내기한 논. 백남기·박경숙 농민은 전남 보성에서 벼와 밀 농사를 지었다.

농산물 시장 개방은 세계무역기구(WTO) 체제가 만들어지면서 본격화했다.

2003년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WTO 각료회의에서 농부 이경해는 ‘WTO가 농민들을 죽인다’라는 문구를 몸에 두르고 자결했다.

그는 WTO에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 작목, 저 작목으로 틈새를 찾아다녔지만, 항상 그 틈새에서 도망친 다른 동료들을 만날 뿐이었다. (중략)

나는 하룻밤 새 정든 고향을 버리고 떠나버린 친구의 낡고 오래된 빈집을 돌아보며 그가 돌아오기를 바랄 뿐이다.

빚에 눌려 농약을 마시고 자살한 친구의 집으로 달려갔지만 친구 부인의 애달픈 울부짖음을 듣고도 아무 조치도 하지 못했다.”

WTO는 정부가 곡물을 높은 가격에 사들여, 시장에 낮은 가격으로 파는 ‘이중곡가제’를 ‘시장 가격을 왜곡시키는 보조금’이라며 금지했다.

이 때문에 쌀에 대한 각종 정책들이 폐지되거나 변경됐다.

“국가가 관장하고 국가 차원에서 쌀을 사들이던 시대는 진작에 끝났다.

오히려 쌀을 받아줄 수 없다며 농협과 국가가 버티고, 쌀 농사를 포기하면 보조금을 주겠다고 말한다.

농민대회 연단에 오른 경상도 출신의 사회자가 ‘살값 21만원 보장하라!’고 구호를 선창한다.

말 그대로, 쌀값은 농민의 살값이다.”

쌀값이 떨어지자 하우스를 짓고 다른 농사로 전환하려는 농민들이 늘었다. 

“처음 이 마을에 대형 시설은 여기 농장 뿐이었어요. 그런데 저길 보세요. 논 위에 비닐하우스가 해마다 올라와요.

저렇게 시설 재배가 늘어나고 무언가를 길러도 결국 전국적으로 다 늘어나니 가격은 떨어지죠.

폭락의 악순환이에요. 몇년 뒤에는 다시 시설을 보수해야 하니 남는 것이 없어요.

시설 업자와 자본만 돈을 버는거죠. 시설 걷어내고 그 자리를 논으로 다시 바꾸는 일은 불가능해요.”( 충남 예산 농민이자 전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 김영호의 말)

백남기·박경숙 농부는 밀농사도 지었다.

11월 경 씨앗을 뿌려 이듬해 6월에 수확하는 밀 농사는, 선뜻 결정하기 어려운 농사다.

벼농사에 비해 손은 덜 가지만, 수확을 해도 팔 곳이 없다.

이 때문에 밀의 경우, 자급률은 1% 수준이다.

책 <아스팔트 위에 씨앗을 뿌리다>

2011년 정부는 밀 자급률을 2015년까지 10%로 높이겠다고 했다가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2016년에는 ‘2020년까지 밀 자급률이 5.1%가 될 것’이라고 했다가, 2018년에는 ‘2020년까지 9.9%가 될 것’이라고도 했다.

지난해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2030년까지 밀 자급률을 10%로 높이겠다고 말했는데, 농민 대부분은 이 약속도 깨지리라는 것을 경험상 안다.

외국산 밀가루 수입으로 초토화된 국내 밀농사가 그나마 자급률 1%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건 십수 년간 ‘우리밀 살리기 운동’을 벌인 가톨릭 농민회와 한살림 등의 노력 덕분이다.

백남기 농민 역시 가톨릭 농민회 소속 농부다. 

“백남기 농민은 ‘쌀은 지키고 보리와 콩은 더 먹고 밀은 살리자’라고 농사의 결을 정한 뒤 동료와 후배들을 독려해 함께 밀농사와 콩농사를 지었다.

백남기 농민이 고향 보성에서 마지막으로 한 일도 아내 박경숙과 함께 백중밀 씨앗을 손으로 일일이 파종한 것이다.”(p.79)

거리로 나서는 ‘아스팔트 농사’가 본격화한 건 1976년 ‘함평 고구마투쟁’ 부터 였다.

당시 함평 농민들은 ‘고구마 전량을 사들이겠다’고 약속한 농협을 믿고 상인들에게 고구마를 넘기지 않았는데, 정작 농협은 생산된 고구마의 40%만 사들였다.

나머지 고구마가 썩어가기 시작했다.

가톨릭 농민회가 1년 7개월 투쟁 끝에 피해 보상을 받는데 성공했다.

서슬 퍼런 박정희 독재정권 하에서 농민이 승리한 첫 번째 싸움이었다.

신군부 때는 정부가 축산업을 밀어붙였다.

뉴질랜드와 캐나다 등에서 송아지가 수입됐고, 축사를 짓고 가축을 들인다고 하면 농협이 돈을 빌려줬다.

농민들은 송아지를 사서 키운 뒤 팔아서 빚을 갚으려고 했지만 소값이 폭락했다.

축산 농민들이 목을 매달았다.

1985년 소값 인상 투쟁(소몰이투쟁)이 진행됐다.

백남기·박경숙 부부도 1983년부터 3년 동안 소를 키웠다. 

“송아지를 들일 때 빌린 입식 비용과 사료값이 백남기 부부의 첫 농가 부채인데 이 빚이 계속 불어나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있다.”(p.74)

토종 종자들의 이름이 적힌 판자

책에 기록된 ‘백남기 농민 투쟁’은 남성 농민 만의 투쟁사가 아니다.

아내 박경숙 농민에 대해서는 백남기 농민과 함께 농사를 짓고 농민운동을 한 동지라는 점을 밝히고, 여성 농민 조직인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전여농)의 활약상을 비중있게 다룬다.

여성 농민들이 2016년 1월 광화문 광장에서 천 배를 올린 것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농사란 오로지 사람의 무릎과 허리로 짓는 것이다.

쪼그려 앉아서 해야 하는 밭일을 주로 담당하는 여성 농민의 무릎은 성한 경우가 드물다.

그 성치 않은 무릎을 천 번 끓어 광화문 광장 아스팔트를 녹였다”

백남기 농민 영정 경향신문 자료사진,겹쳐,

새 정부가 들어서자 새 정부 인사들과, 경찰 관료들이 백남기 농민 유족과 시민들에게 공식 사과했다.

하지만 저자는 “가장 제대로 된 사과는 농민들이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래서 굳이 보성에서 서울까지 집회하러 올라갈 필요 없도록 노력하는 것 뿐”이라고 말한다.

농촌이 가난해지면서 사람들이 다 떠났다.

보성에서 서울까지 집회를 하러 올라갈 농민들이 아무도 남아있지 않는 상황이 닥칠지도 모른다.

지금의 농정과 로컬 정책은 농민들이 편히 농사 지으면서 살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인가.

더 읽어볼만한 책으로 <땅의아들3: 농민운동가 노금노 유고집> (노금노유고집간행위원회 엮음, 돌베개)를 추천한다.

1970년대~1990년대 치열했던 농민운동의 역사가 담겨 있다. 

최근 농촌 현안과 이에 대한 농민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면 <2020 농민들>(한국농정신문 지음, 한국농정)을 봐도 좋을 듯 싶다.

※백남기농민 5주기 추모제는 25일 낮 12시 광주시 북구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옛 5.18 묘지)에서 열린다.

온라인추모관 ‘내가 백남기다’(http://baeknamgi2015.kr/)에서도 추모 글을 남길 수 있다.

 

5.18묘역은 6월부터 겨울이다,

[아이들은 나의 스승] 애먼 아이들에게 '참배객다움' 요구하는 성마른 어른들,

"버르장머리 없이 묘역에서는 웃지 마라. 예의에 어긋나는 짓이다."

묵직한 카메라를 든 한 참배객이 중학생 아이들을 호되게 꾸짖었다.

내 해설을 듣고 있던 그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지며 분위기가 데면데면해지고 말았다.

그들의 웃음은 "그때 너희들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질문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비 내리던 지난 17일 오전,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벌어진 일이다.

눈물의 5월  제41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을 하루 앞둔 17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열린 추모제에 참석한 유족이 어머니의 묘소 앞에서 오열하고 있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열여섯 살로, 항쟁 마지막 날 도청을 사수하다 숨진 안종필 열사의 묘소 앞이었다.

그는 같은 학교 동급생인 문재학 열사와 함께, 눈물로 말리는 부모의 손을 끝내 뿌리치고 도청에 걸어 들어간 고등학생 시민군이었다.

두 열사의 의로운 죽음 앞에 그들은 멋쩍게 웃음으로 얼버무린 것이다.

순간 아이들에게 '참배객다움'을 요구하는 그의 강퍅함이 안타까웠다.

때 이른 더위가 찾아온 며칠 전에도 묘역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다.

고등학생쯤 돼 보이는 몇몇 아이가 반바지에 샌들 차림으로 묘역을 돌아다니다가 나이 지긋한 어르신으로부터 혼쭐이 나는 모습을 봤다.

아이들의 표정은 일그러졌고, 쫓기듯 서둘러 묘역을 떠났다.

누구든 그들의 가벼운 옷차림이 묘역의 경건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할 순 있다.

그렇다고 애써 묘역을 찾아온 아이들을 초면에 다짜고짜 나무라는 건 어른스럽지 못하다.

외려 그들의 반감만 살 뿐이다.

단지 웃었다는 이유로 중학생들이 혼쭐 나고 있을 그때, 저 멀리서 요란한 셔터 소리가 들렸다.

소복을 입은 유족 한 분이 묘비를 부여잡고 통곡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열 명도 넘는 기자들이 달려들어 그분을 에워쌌다.

굳이 저래야 하나 싶을 정도로 서글픈 장면이었다.

터지는 카메라의 플래시와 셔터 소리 때문에 나이 지긋한 유족의 통곡조차 작위적인 행동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정치인들이 묘역을 찾아올 때마다 익히 봐온 장면이긴 하다.

따라온 카메라 기자의 수가 해당 정치인의 권력의 크기를 상징한다.

느닷없이 중학생들을 혼쭐낸 그분에게 묻고 싶다.

아이들의 웃음과 부나방처럼 몰려다니는 카메라 기자들의 요란한 셔터 소리 중 어느 것이 더 예의에 어긋나는 짓인가를. 또, 반바지 차림의 아이들과 사진만 찍고 돌아서는 정치인 중 누가 더 무례한 사람인지를 말이다.

5.18 민주묘지 찾은 아이들 야단치기 전에...

그런가 하면, 이태 전쯤 이런 날도 있었다. 해 짧은 겨울 어느 날, 퇴근 뒤 어둑해진 오후 몇몇 학생회 아이들과 묘역을 찾았다.

땅거미가 내려앉은 묘역의 고즈넉한 분위기는 대낮과는 달리, 아무런 설명 없이도 묘역을 거니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옷깃을 여미게 했다.

다섯 시 반쯤 됐을까.

오토바이를 탄 묘역 관리원이 우리 일행을 향해 어서 나가라고 고함을 치는 것이었다.

문 닫을 시간이라는 것이다.

국가 보훈처에 소속된 공공 기관이기에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만, 묘역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융통성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아이들은 화들짝 놀라 큰 죄라도 진 것처럼 뛰쳐나왔다.

묘역을 나온 뒤 성마른 그 관리원을 한마디씩 성토했다.

자신들을 마치 무덤 도굴꾼이나 간첩을 쳐다보는 듯한 눈빛이었다면서 무척 불쾌해했다.

그는 주어진 업무에 충실했을 뿐이지만, 아이들에겐 황당한 경험으로 남았다.

이후 그들은 묘역에 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누구의 잘잘못인가를 떠나 그날의 불쾌한 기억이 아이들의 마음을 닫게 한 것이다.

그러잖아도 5.18을 자신과는 상관없는 아주 먼 옛날의 일로 여기는 아이들에게 더더욱 괴리감을 느끼게 만드는 꼴이 됐다.

근무하는 학교와 집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라, 5월 들어 퇴근길 출근부에 도장 찍듯 묘역을 찾고 있다.

평소에도 마음이 심란할 때마다 즐겨 찾는 곳이다.

해마다 5월이면 묘역은 참배객으로 북적이지만, 부모를 따라온 어린이 말곤 눈 씻고 찾아봐도 중고등학생들은 없었다.

유가족과 정치인들, 깃발을 앞세운 노동조합, 시민단체 등의 발길은 끊이지 않는데, 정작 기억과 다짐이 계승되어야 할 청소년들은 묘역을 찾지 않는 거다.

백문이 불여일견. 백 번의 계기 수업보다 단 한 번의 묘역 방문이 더 효과적일 텐데도, 묘역은 그들에게 여전히 불친절하다.

5.18 진상 규명은 공식 사과와 피해 배상, 책임자 처벌만으로는 부족하다.

핵심은 미래세대에 역사적 의미와 가치, 정신 등을 전승하기 위한 추모 사업과 교육에 있다.

그러자면 우선 5.18에 대한 아이들의 괴리감을 줄여야 한다.

묘역을 공원처럼 여길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서양의 공원묘지와 단순히 비교할 순 없다.

불의한 공권력에 무참히 학살당한 시민들이 잠들어있는 묘역을 유원지로 여기는 건 희생자들을 모독하는 짓일 테다.

다만, 형식과 절차에 얽매이는 엄숙함만으론 묘역이 민주주의의 학습 공간으로 거듭날 수 없다.

지금처럼 1년에 한 번 5월 18일에 맞춰 당위적인 의무감으로 찾는 곳에 머물러서는 곤란하다.

기일에 차리는 제사상처럼 형식적이고 관행화한 의식이라면, 그곳에서 민주주의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럴 거면 차라리 아무 때나 찾아와 쉬었다 가는 공원인 게 더 낫다.



5월 18일 딱 하루만 기억돼서는 안 된다,

난 밀물처럼 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정부 주관의 추모 행사가 마뜩잖다.

그마저 없다면 묘역의 존재조차 잊힐 거라고들 하지만, 5.18 추모 행사가 끝난 뒤 을씨년스러운 묘역을 와본 이라면 알 것이다.

사람들에게 5월 18일 딱 하루만 기억되는 5.18 정신의 서글픔을.

지금 묘역을 뒤덮고 있는 현수막 물결은 고작 며칠 뒤 깨끗하게 치워질 테고, 늘 그래왔듯 내년 이맘때쯤이면 똑같은 모습이 재현될 것이다.

부모님과 가족 나들이 삼아 자주 묘역을 찾는다는 한 아이는 "묘역이 때아닌 겨울잠에 든다"고 표현했다.

묘역은 6월부터 겨울이다.

41주년 기념일 하루 앞둔 5.18 묘지  제41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을 하루 앞둔 17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에 추모객들의 참배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불경스럽다고 손가락질할지도 모르지만, 난 국립 5.18 민주묘지가 엄숙하기보단 자유롭고, 경건하기보단 편안한 분위기로 바뀌었으면 좋겠다.

하늘을 찌를 듯이 우뚝 선 추모탑보다 곳곳에 소담한 나무 그늘이 많았으면 좋겠고, 거울 같은 대리석 바닥보다 푹신한 흙바닥 위에 벤치가 놓여있다면 금상첨화겠다.

더 오래 편히 머물 수 있도록 말이다.

아이들에겐 오와 열을 맞춰야 하는 엄숙한 분향 의식도 부담스럽다.

추모의 마음을 그들의 정서와 감각에 맞게 표현할 수 있도록 격식의 파괴를 허용하면 안 될까.

학생회 아이들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록이나 힙합 버전으로 편곡하면 어떠냐고 제안한 게 이미 몇 해 전이다.

외양과 형식을 바꿀 수 없다면, 부디 어린 참배객을 대하는 기성세대의 강퍅한 마음가짐부터 누그러졌으면 좋겠다.

과연 느닷없이 혼쭐난 중학생 아이들이 '죄'를 반성하고 자발적으로 다시 묘역을 찾아올까.

다시 찾아오기는커녕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지 않으면 다행이다.

'오월, 시대와 눈 맞추자.

세대와 발맞추자.'

41주년을 맞은 올해 5.18 민주화운동의 슬로건이다.

민주, 인권, 평화라는 5.18의 정신을 현재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려는 노력이 '시대와 눈 맞추는' 일이라면, 그것이 미래세대 아이들의 가슴에 가닿도록 힘쓰는 것이 곧 '세대와 발맞추는' 일일 것이다.

애먼 아이들에게 '참배객다움'을 요구하기 전에, 기성세대인 우리의 역할을 먼저 성찰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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