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장성.The Great Wall,
만리장성.The Great Wall.
Die Chinesische Mauer, 中國─萬里長城.
중국의 역대 왕조들이 북방 유목민족의 침공을 막기 위해 세운 성벽으로 ‘장성(長城)’으로 줄여 부르기도 한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 때에 처음 건립되었다고 전해지지만, 오늘날 남아 있는 성벽은 대부분 15세기 이후 명나라 때에 쌓은 것이다.
길이가 서쪽의 간쑤성[甘肅省] 자위관[嘉峪關]에서 동쪽의 허베이성[河北省] 산하이관[山海關]까지 2,700㎞에 이른다. 지형의 높낮이 등을 반영하면 실제 성벽의 길이는 6,352km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문화유산으로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그리고 ‘인류 최대의 토목공사’라고 불리며 2007년에는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기원전 220년 진시황(秦始皇, BC 259~BC 210)은 북방 민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통합된 방어 산성을 쌓기로 하였다. 만리장성(萬里長城)의 축조는 그 후 명나라 시대(1368~1644)까지 계속되었고, 세계에서 가장 장대한 규모의 군사 시설물이 되었다. 이는 역사적·전략적으로 중요한 성벽인 동시에 건축학적으로도 탁월한 유적이다.
1947년에 씌어진 막스 프리슈(Max Rudolf Frisch)의 소극.
{1946년에 씌어졌으며 1955년에 수정판으로 다시 출판되었다. 카발렛타형식의 패러디로 씌어진 어리석고 비인간적인 독재정치에 대한 도덕적인 극으로 이 극의 장소는 ‘이 무대’이고 시간은 ‘오늘 저녁’이다.
2000년 전의 중국의 황티 황제가 세상을 모두 정복한 후에도 ‘국민의 소리’는 황티가 악한 독재자이며 만리장성을 쌓은 것은 외부로부터 적을 막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이윤을 위한 장삿속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황티는 자기에게 불리한 소문을 퍼뜨리는 장본인을 색출하려는 노력 끝에 말 못하는 가난한 중국인 벙어리 남자를 체포하였다.
벙어리를 심문하면서 황티는 자기 스스로의 죄와 본질을 드러내는 독백만 하게 된다. 황티는 이 벙어리가 그 ‘국민의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나 최후의 적인 ‘국민의 소리’까지 정복해야 한다는 독재정치의 논리에 따라 벙어리를 ‘국민의 소리’로 이용하였다.
황티에 의해 이용당한 벙어리는 마지막에 돈과 영예에 어두운 어머니 오란과 또 하나의 영웅을 필요로 하는 반란군 대중에 의해 다시 ‘국민의 소리’로 이용당하였다.
1955년의 수정본에 이어 1965년 함부르크에서 상연된 세 번째 판본과 1972년 파리의 네 번재 판본들도 작품집에 실려 있다. 프리슈 자신은 이 작품을 ‘우리의 의식에 대한 패러디’라고 규정하였다. 초기작품과 같이 이 작품에서도 무대에 올려진 것들의 연기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소외시키고 있다.
1940년대와 1950년대의 그의 이론서에서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의 연극론에 힘입어 전통적인 모방연극을 거부하였다.}
처음에 장성은 돌이 풍부한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흙을 다지거나 흙으로 만든 벽돌로 건축했어요. 흙으로 지은 까닭에 시간이 지나면서 방어용 기능이 점점 사라지게 되었지요. 진시황제 때 건설된 장성은 대부분 파괴되어 여러 곳에 그 흔적만 조금씩 남아 있을 뿐이에요.
진나라 때 건설된 만리장성은 한나라 때 고치고 덧붙여 짓는 작업이 이루어졌어요. 흉노족의 침략이 계속되자 한나라 황제 무제가 만리장성을 짓기 시작한 거예요. 이때 지어진 성은 진나라 때 지은 성에 비해 훨씬 견고하고 영역도 서쪽으로 더 연장되었어요. 그리고 진나라 때는 없었던 지휘소와 봉화대 같은 군사 시설이 보강되었지요.
한나라 이후에도 북위와 수, 요, 금나라 등에서도 장성을 복원하고 늘려 지었어요. 오늘날의 만리장성은 대부분 명나라 때 건설된 거예요. 명나라 최초의 황제인 홍무제(주원장)는 왕위에 오른 첫해인 1368년 대대적인 공사를 시작했어요.
훗날 명나라의 수도가 된 지금의 베이징 인근 바다링을 시작으로 허베이 성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장성을 고치고 늘려 지었습니다. 또한 3000개가 넘는 봉화대와 주요 거점지의 망루, 마차가 달릴 수 있는 넓은 도로도 명나라 때 지어졌습니다.
만리장성 공사는 이후 여러 황제에 의해 계속되었는데 정덕제 때 다시 대규모 공사가 진행되었어요. 오늘날 우리들이 볼 수 있는 만리장성은 17세기에 완성된 것입니다.
최종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만리장성은 총 길이가 6350km나 됩니다. 물론 총 길이는 2~3중으로 된 장성의 길이를 모두 합한 것이지요. 분명한 것은 만 리가 훨씬 넘는 1만 6000리나 된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중국인들이 ‘만리장성’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방어용 성벽을 유럽인은 ‘중국의 성벽(Wall ofChina)’ 혹은 ‘대성벽(Great Wall)’이라고 부른다. 탁월한 성벽 구축의 역사는 춘추시대(BC722~BC 481)와 전국시대(BC 453~AD 221)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벽 건설은 기원전 408년 위(魏)나라가 진나라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지은 성벽처럼 봉건적인 갈등에서 시작하였다. 중국 중심부에 보존된 유적들에 따르면 기원전 300년 무렵 북방의 침략자에 대항하여 진·조(趙)·연(燕)나라가 축성한 성벽들보다 먼저 축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기원전 220년 통일된 진나라를 건국한 진시황은 기원전 3세기 혹은 그 이전 시대에 구축된 몇몇 성벽을 연결시켜 재건하였다. 이는 내몽골의 오르도스(Ordos)에서부터 만주까지 성벽을 증축하는 것이었다. 그는 기원전 206년 한나라가 들어서기 이전에 이미 최초의 통합 방어체계로서 성벽을 서쪽으로 확장하였다. 이 시대에 만들어진 성벽의 모습은 황허(黃河) 유역의 계곡 지대와 란저우(蘭州)에 여전히 중요한 유적으로 남아 있다.
만리장성은 그 이후 더 확대되었는데, 한(漢)나라의 무제(武帝, BC 140~BC 87)는 중국 서쪽의 둔황 지역부터 동쪽의 보하이만(渤海灣)까지 약 6,000㎞에 해당하는 성벽을 더 지었다. 중국 북방 경계지역에서는 몽골족·투르크족을 비롯해 초원 지대 최초의 제국인 흉노 제국의 퉁구스족 등의 침략 위험이 커짐에 따라 이전보다 더욱 견고한 방어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서기 200년 한 왕조가 몰락하자 만리장성은 중세 시대에 접어들었다. 당시 중국은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추가적인 방어책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이상 만리장성을 증축하거나 유지 관리할 필요가 없었다. 몽골족의 멸망으로 오랜 갈등 기간을 끝낸 뒤 명나라는 진시황의 성벽 구축의 전통을 부활하여 5,650㎞에 이르는 성벽을 구축하였다. 북방 민족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한 만리장성은 수비대가 아닌 군이 관할하는 9개의 진(陣) 체제로 관리되었다.
마을, 산길, 여울을 방어할 수 있도록 전략적으로 지었다. 성벽의 맨 위쪽 길은 군대가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게 하고 연락병의 이동도 가능하게 했다. 2개의 상징적인 기념물이 오늘날까지도 성벽의 양 끝에 서 있다. 동쪽 끝 산하이관(山海關)이 첫 번째 성문이고, 1949년 이후에 완전하게 복구된 요새 자위관(嘉峪關)이 북서쪽 끝에 있는 마지막 성문이다.
만리장성은 복합적·통시적(通時的) 문화재로서 2,000년 동안 오직 전략적 목적으로 유지된 군사 건축물의 특별한 사례이다. 그리고 성벽 건설의 역사는 방어 기술과 정치 상황의 변화에 따라 계속 발전했다. 만리장성의 목적은 외부의 공격을 막아내고, 동시에 침략자들의 관습으로부터 중국인의 문화를 보존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성벽의 축조 과정 중에 백성의 고난이 있었기 때문에 만리장성에 대한 이해는 중국 문학을 이해하는 필수 요소이기도 하다.
명나라 시기의 만리장성은 거대한 공사를 수행하기 위한 대담성뿐 아니라 건축학적으로 완벽성을 지닌 걸작이다. 광대한 대륙의 경치와 어우러진 성벽은 완벽한 건축물의 예이다. 춘추시대 중국인들은 북쪽 변방을 따라 방어벽을 구축하면서 독자적인 건설 공법과 공간 구조를 확립하였다. 또한, 만리장성 공사에 동원하기 위해 인구를 이동시킴으로써 중국 인구의 확산이 두드러졌다. 만리장성은 탁월한 고대 중국 문명에 대한 증거이다. 당시 명나라는 간쑤(甘肅) 지역에 남아 있는 서한(西漢) 시대 진지 안에 흙을 다져 채워 넣는 방식으로 축성하였다.
만리장성의 역사
중국에서 북방 유목민족의 침공을 막기 위해 성벽을 쌓기 시작한 것은 춘추전국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춘추시대의 제(齊)ㆍ초(楚), 전국시대의 연(燕)ㆍ조(趙)ㆍ진(秦) 등이 유목민족과의 접경에 성벽을 쌓아 침공에 대비했다.
그러나 ‘만리장성’이라고 불리는, 동서로 길게 이어진 성벽을 쌓기 시작한 것은 진나라 시황제 때부터이다. 중국을 통일한 시황제는 흉노(匈奴)의 침공을 막기 위해 춘추전국시대에 각 나라가 만든 북방의 요새와 성벽을 연결시켜 기원전 214년에 만리장성을 쌓았다. 당시의 장성은 지금 남이 있는 장성보다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서쪽으로는 지금의 간쑤성 민현[岷縣] 지역인 임조(臨洮)에서 동쪽으로는 지금의 랴오닝성[遼寧省] 랴오양시[遼陽市] 지역인 요동(遼東)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당시의 장성은 성벽으로 계속 이어진 것이 아니라, 요충지에 요새와 초소 등을 만들어 구축한 국경 방어선의 의미가 강했다. 성벽을 쌓은 경우에도 흙을 다져서 쌓은 토벽이었으며, 높이도 2미터 정도로 높지 않았다.
시황제가 쌓은 장성은 한(漢)나라 때에도 국경 방어를 위해 중시되며 확장되었다. 하지만 삼국시대와 오호십육국시대를 거치며 흉노ㆍ선비(鮮卑) 등이 북방민족이 화북지방으로 진출해 왕조를 세우면서 기능을 잃고 방치되었다. 그러다 탁발부(拓跋部) 선비족이 세운 북위(北魏)가 화북지방을 통일해 남북조시대로 접어들면서, 북방 방어를 위해 다시 장성이 축조되기 시작했다. 지금의 베이징[北京] 일대인 평성(平城)을 도읍으로 삼은 북위는 북방의 유연(柔然)의 침공을 막기 위해 서쪽으로는 인산산맥[陰山山脈]의 남쪽 기슭에서 동쪽으로는 발해만(渤海灣)에 이르는 지역까지 장성을 쌓았다. 그 뒤 북제(北齊) 때에는 돌궐(突厥)의 남하를 막기 위해 산하이관 지역까지 장성을 확장했다. 이 시기의 장성은 진ㆍ한 시대보다 동쪽 지역은 훨씬 남쪽에 만들어졌으며, 서쪽 지역은 북쪽으로 만들어졌다.
장성은 당(唐)나라 이후에 다시 오랫동안 방치되었다. 그러다 몽골족이 세운 원(元)나라를 몰아내고 명(明)나라가 들어서면서 북방 방어를 위한 장성의 필요성이 다시 부각되었다. 특히 명나라가 제3대 왕인 영락제(永樂帝) 때에 수도를 난징[南京]에서 베이징[北京]으로 옮기면서 몽골족의 재침을 막기 위한 장성의 필요성은 더욱 커졌다. 영락제 때에 시작된 명나라의 장성 축조는 제5대 왕인 선덕제(宣德帝) 때에 이르러 본격화되었다. 특히 1449년 제6대 왕인 정통제(正統帝)가 오이라트 정벌에 나섰다가 붙잡혀 포로가 되는 일이 벌어진 뒤로는 장성의 개축과 연장이 꾸준히 추진되었다.
명나라 때 세워진 장성은 북위와 북제 시대에 만들어진 장성을 기초로 하였는데, 특히 수도인 베이징 부근은 이중으로 더욱 견고하게 성벽을 쌓았다. 그리고 요충지마다 벽돌로 성벽을 새로 쌓았는데, 명나라 때 세워진 장성의 평균 높이는 7.8m, 바닥의 두께는 6.5m에 이른다. 그래서 명나라 때에 이르러 간쑤성 서부의 자위관에서 허시후이랑[河西回廊]과 인촨평원[銀川平原] 북쪽의 고원 지대를 거쳐 허베이성 북쪽의 옌산산맥[燕山山脈]을 가로질러 산하이관에 이르는 만리장성이 완성되었다.
만리장성의 전체 길이를 둘러싼 논쟁
2009년 중국의 국가문물국(國家文物局)은 만리장성의 동쪽 끝을 기존의 산하이관에서 랴오닝성[遼寧省] 단둥시[丹東市]의 후산[虎山]으로 변경하며, 만리장성의 전체 길이를 종래의 6,352km에서 8,851km로 수정해서 발표했다.
명나라 때에 후금의 침공을 막기 위해 산하이관 동쪽으로 랴오닝성의 진저우[錦州], 안산[鞍山], 랴오양[遼陽], 선양[瀋陽], 푸순[撫順]을 거쳐 후산[虎山]에 이르는 지역에 장성을 연장해서 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2012년에는 명나라 때의 장성만이 아니라 진ㆍ한 등 역대 왕조에서 세워진 장성들을 모두 포함하면 전체 길이가 21,196km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중국 국가문물국의 주장은 만주가 예로부터 중국의 일부였음을 강조하려는 정치적 필요에서 비롯된 것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후금과의 대립 과정에서 이 지역에 요새가 세워진 것을 장성의 연장으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중국이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랴오닝성 지역에서 복구 작업을 벌이면서 과거 연(燕)나라와 고구려(高句麗) 시대의 유적들을 파괴하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후산[虎山]을 고구려 때의 박작성(泊灼城) 유적지로 보고 있는데, 중국이 만리장성의 일부임을 내세우기 위해 이곳에 후산장성[虎山長城]을 새로 만들면서 고구려의 유적지를 훼손한 점을 비판하고 있다.
춘추전국 시대에 소국들이 다른 나라의 침입을 막기 위해 각기 장성을 구축한 것을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나라 때 연결하여 완성시킨 것이 만리장성의 원형이다.
이후 장성의 수리와 확장이 계속되었으며 명대의 대규모 증개축을 마지막으로 지금의 장성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장성 터로는 베이징 주변의 팔달령 장성(八达岭长城)을 비롯해 명대 장성의 최동단인 산해관(山海关)과 명대 장성의 최서단인 가욕관(嘉峪关), 둔황 근처에 있는 한대의 장성인 옥문관(玉门关) 등이 있다. 베이징 근교에는 보존이 잘 되어 있어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팔달령 장성과 관문인 거용관(居庸关) 등 여러 장성을 견학할 수 있다.
만리장성 중 가장 잘 알려진 팔달령 장성은 베이징에서 북서쪽으로 70km 거리에 위치해 있다. 1505년에 축조되었으며 능선을 따라 연결된 장성의 모습이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로프웨이가 있어 장성에 올라 거닐 수 있다. 장성 기슭의 장성 박물관에서는 장성의 축조 과정이나 발굴품 등을 살펴볼 수 있다.
팔달령 장성 앞쪽 10km 지점에 있는 거용관은 베이징에서 몽골이나 서역으로 통하는 요충지에 해당하는 관문으로, 14세기에 처음 세워졌다. 현재는 관문과 성벽의 일부가 복원되어 있다. 관문에 있는 관청 내벽에 산스크리트, 위구르, 서하, 티베트, 바스파, 한자의 6개 문자로 쓰인 다라니 경문과 사천왕 등의 조각이 남아 있다.
모전욕 장성(慕田峪长城)은 베이징 북쪽 70km 지점에 있으며, 6세기 북제 시대 때 처음 지어진 장성이다. 팔달령 장성보다 관광객이 적어 여유롭게 둘러볼 수 있다.
베이징 시내에서 북동쪽으로 120km 떨어져 있는 사마대 장성(司马台长城)은 비교적 험준한 봉우리를 끼고 있는 장성이다. 망루가 135개나 되며, 특히 표고 986m에 있는 망경루(望京楼)에서 보는 경관은 실로 절경이다. 사마대 장성보다 좀 더 북쪽에 위치해 있는 금산령 장성(金山岭长城)은 24개의 망루가 있는데, 어느 곳에 올라도 훌륭한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 때에 처음 건립되었다고 전해지지만, 오늘날 남아 있는 성벽은 대부분 15세기 이후 명나라 때에 쌓은 것이다. 길이가 서쪽의 간쑤성[甘肅省] 자위관[嘉峪關]에서 동쪽의 허베이성[河北省] 산하이관[山海關]까지 2,700㎞에 이른다.
지형의 높낮이 등을 반영하면 실제 성벽의 길이는 6,352km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문화유산으로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그리고 ‘인류 최대의 토목공사’라고 불리며 2007년에는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세계인의 호기심을?
중국을 방문하는 외국인이 가장 먼저 보고 싶어하는 것은 만리장성이라고 한다. 1972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북경방문을 준비할 때 모택동에게 '아폴로 우주비행사들이 달에서부터 식별할 수 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조형물은 만리장성이라고 하더라'는 말을 할까 고려했었다고 한다. 그 말은 사실이 아니어서 그만두었으나 닉슨은 역사 깊은 유적지 만리장성에 대하여 대단한 호기심을 가졌음에 틀림없었다.
시황제가 아닌 명나라의 유산
현재의 만리장성은 17세기 초 명나라 때에 쌓은 성이며, 이는 기원전 3세기에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가 쌓은 만리장성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축성을 하는 데 100만 명이 희생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는 진시황제 때의 만리장성은 이미 매몰된 지 오래되었으며, 그 위치도 지금의 만리장성과는 다르다. 많은 사람들은 지금의 만리장성을 진나라 시대의 것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만리장성 하면 그들 머릿속에 먼저 진시황제가 떠오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장성을 쌓다
중국에서는 자국의 영토를 지키고 적국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국경을 따라 성벽을 쌓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전국시대 연(燕) · 제(齊) · 조(趙) 나라 등은 장성(長城)을 쌓았다. 기원전 221년 천하를 통일하고 최초의 황제가 된 진시황제는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옛 장성을 보수 · 연결시키고 새 장성을 쌓아서 대장성을 만들었는데, 그 장대함으로 '만리장성'이라 불렀다.
장성 축성, 압정의 수단이 되다
진시황제는 장군 몽염에게 북방의 흉노를 내몰고 장성을 쌓게 했는데, 완성될 때까지 10년이 넘는 공사를 벌였다. 만리장성은 그 군사적 가치보다는 오히려 축성하면서 진시황제가 보인 압정으로 더 유명해졌다.
본래 축성작업은 처음에는 흉노 침입을 막는 변방 수비병들이 맡았다. 그러나 진시황제는 죄수들을 보내서 공사에 투입하고 드디어는 정부에 불만을 품은 자까지 모두 공사장에 몰아넣었다.
지독한 독재와 폭정으로 백성을 탄압하다
진시황제는 지독한 독재자로 백성들을 탄압했다. 그는 언론을 통제하고, 승상 이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제자백가의 책들을 모두 불태우게 하고 유생들을 생매장하는 이른바 분서갱유를 저질렀다.
분서령을 지키지 않는 자들은 만리장성을 축조하는 공사장으로 유형을 보냈다. 통상 이들은 형기가 4년인데, 살아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 자가 드물고 대개는 공사장에서 죽어 이른바 장성 귀신이 되었다고 한다. 나중에는 범죄자, 불평불만자뿐만 아니라 소상인과 일반시민 등 무고한 백성까지 적당한 죄명을 씌워 장성을 쌓게 했다.
성의 실제 길이는 서쪽 감숙지방으로부터 동쪽 요동지방까지 2,400km에 달했다. 이보다 남쪽에 위치한 현재의 만리장성의 총 길이는 5,000km다. 이 장성이 현재의 규모로 된 것은 명나라 때로서,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만리장성이 백성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당시 민요 가운데 '장성가'라는 것이 전해지고 있는데, 만리장성의 한을 표현하는 대표적 타령이다. [중국의 UNESCO 세계유산]
농경민족과 유목민족의 치열한 각축을?
"전제군주시대에 국가 의식을 치르고 신하들의 하례와 사신을 맞이하던 근정전.
"중국의 전통가무극을 공연하는 사랑극의 한 장면.
"차의 문화를 일찍 일으킨 중국.
"만리장성은 흉노족, 몽고, 만주족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하여 쌓은 거대장성이다.
중국 의 문화유산. (세계 문화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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