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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역사,(국외) 각지역.

잉글랜드.United Kingdom.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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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United Kingdom.


대처와 신보수주의.


1979년부터 12년간 영국을 통치한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는 보수당이면서도 시장, 통화주의정책, 공공경비의 축소, 권위주의적 정부로 대체하여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케인즈시대를 종결시켰다. 또한 '영국병'의 원인을 노동조합에서 찾아 노동조합세력의 약화가 이루어졌으며, 국유화된 기업의 사유화, 복지 규모 축소, 이윤과 부의 사회적 존경 및 최상위층 과세율 하향 조정의 조치가 이루어졌다. <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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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정책은 1980년대 초의 불경기를 극복하지 못하였으나 중반에 들어와 인플레이션이 급감하고 노동생산성이 향상, 주택건설 붐 조성, 금융업과 하이테크 산업이 크게 성장하여 1982년에서 1989년 사이에 연평균 성장율 2.5%-3%를 기록하였다.

1982년에 발발한 아르헨티나와의 포클랜드 전쟁(Falklands War)에서 승리하자 대중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고 광산 폐쇄에 따른 전국광부노조의 전국적인 파업을 성공하지 못하도록 하여 억압하여 순행을 계속한 대처는 1987년 총선에서 연속 3회의 집권에 승리, 대처주의가 지속되었다.  

대처가 중점적으로 행한 교육, 의료, 국유산업 등의 분야에서 시장체제가 도입됨으로써 경쟁력이 어느 정도 강화되었으며 영국민의 국가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졌지만 지역적인 경제 불균등을 심화시켰다. 대처의 경제정책은 빈부의 차를 심화시키는 반면 제조업에서 서비스 산업으로의 이동, 국유산업의 민영화, 공공주택의 사유화가 지전되었다. 대처에 의하여 영국은 보다 진취적이고 공격적이며 분열된 사회가 되었다. 


식민지에 대한 인식 변화.

7년 전쟁에서 이겼다는 승리감도 잠깐이고 현실적으로는 영국의 경제가 탕진되어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게다가 이때(1760년) 조지 2세의 서거마저 겹치자 한층 영국 내의 분위기는 무거워졌다. 

'소작인'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었고, 스코틀랜드인의 감정을 상하지 않으려고 '브리튼'이란 국명을 사용했으며, 의회를 배제한 정치를 원했던 조지 3세(1760~1820년)는 즉위하자마자 재정 문제를 풀어 보려고 새로운 국내 정치를 실시했다. 

그는 동시에 군비 지출이 많은 대외 강경 정책에 반대하며 영국 정치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조지 3세의 정책들은 식민지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아메리카로 이주한 영국민이 300만까지 증가해서 그곳에 지방 의회가 필요하게 되었다. 조지 3세가 언급한 것처럼 대외 정치면에서 재정 낭비를 줄이려는 움직임을 간파한 식민지인들은 7년 전쟁 중에 아메리카에서 프랑스군을 영국 본토군의 도움 없이 자신의 힘으로 몰아 낸 경험을 살려 7년 전쟁 후에도 식민지가 운영하는 독자적인 군대를 만들려고 했다. 이러한 식민지 쪽의 생각과는 달리, 영국 정부는 조지 3세의 의도를 기초로 국내 재정의 부족분을 식민지에서 흡수하려는 정책을 세웠다.

이를 '타운센드 법(1767. 6)'이라고 하는데, 그 법은 그동안 당밀, 양모품 등 큰 물품에 부과하던 관세를 없애고 유리, 종이, 잉크, 페인트, 납, 차 등 작은 상품에다 간접세를 부과하려는 것이었다. 이렇듯 교묘한 세금 착취법에 대해 아주 잘 인식하고 있던 식민지 지식인들은 버지니아 의회를 열어 주 대표들이 모인 자리에서 "영국의 상업적 번영을 위해 식민지가 착취당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대표 없는 곳에는 과세도 없다."는 선서를 했다.

필라델피아에서 주 대표가 모여 본국 상품 및 본국과의 단절을 선언했는데, 여기서 특이한 점은 북부 12개주만 참가했고 남부의 조지아 주는 빠졌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영국과 식민지 북부 간에는 수출품에 있어서 서로 경쟁 관계에 있었지만, 식민지 남부와 영국은 필수품의 수입과 상품 수출이라는 상호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 독립의 전개.

1770년에 수상이 된 노스(North) 경은 식민지의 불만을 알고 타운센드 법을 철회했으나 미국 식민지인들의 최고의 기호품인 '차'에 대한 세금만큼은 그대로 두어도 불만이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이를 유지시켰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인도에서 차(tea)가 과잉 생산되어 이를 소비하기 위해 차를 미국 식민지에 대량으로 소비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미국에 대한 차세가 강화된다는 것을 알게 된 식민지 지식인들은 분개하면서 보스턴에 정박해 있던 배에 실려 있던 차들을 모두 바다에 빠뜨리는 '보스턴 차 사건'을 일으키게 되었고, 이때부터 식민지와 영국 본국 간에 대립이 시작되었다.


양국 간의 무력 행사는 영국군이 렉싱턴의 군수 물자 창고를 기습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어, 이후 식민지 민병대들이 정규군으로 구성되면서 토머스 제퍼슨이 기초한 생명 자유, 행복 추구란 의미를 표현한 '독립 선언서'를 1776년 7월 4일에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영국과 무력 충돌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강세를 보이던 영국의 콘월리스(Cornwallis) 장군 휘하의 식민지 주둔 영국군이 패하고, 영국 내 여론도 식민지 독립에 동정적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하자 북미 식민지군의 승리가 점차 확실해졌다. 


1780년에 벤저민 프랭클린이 영국과 세력 균형책으로 대립하고 있던 프랑스를 자극하여 유럽 대륙의 각국이 식민지를 도와 주는 쪽으로 기울어지자 식민지의 승리는 거의 굳어졌다. 이듬해인 1781년 요크타운 전투에서 영국군이 대패하면서 식민지군의 승리가 확정되었고, 1783년 드디어 파리 조약으로 미국의 독립이 정식으로 승인되었다.


아메리카 식민지가 독립 운동을 전개시키는 동안 영국 내의 상황을 살펴보면, 1780년 존 더닝(John Dunning)은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식민지 독립이 실패하는 데 따른 왕권 강화를 우려하여 국왕권의 제한을 확인하는 절차를 하원에 제출했는데, 하원에서도 같은 생각이었기에 이 절차를 진행시켰다. 


요크타운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식민지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노스 수상이 1782년 3월에 사임했으며, 이 밖에도 미국 식민지처럼 아일랜드의 독립 의지도 우려하면서 가톨릭을 제외한 60여 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비정상적인 더블린 회의에 독립 입법권을 부여하는 유화 정책도 쓰고 있었다.


미국이 독립하자 우선 프랑스 왕조에 대한 영국 정부의 원망이 커졌고, 둘째로 2개의 강대한 앵글로색슨 민주 체제, 즉 입헌 군주제와 공화정이 분리되었다는 부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영 · 미 양국 간의 무역량은 증가했다. 


영국은 이제 미국을 그들의 식민지에서 제외하고 인도 경영에만 주력하게 되었으며, 노스 내각이 실패한 후 국왕 책임하의 내각이 없어짐으로써 진정한 책임 내각제가 도래했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다.<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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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의회가 조지 3세의 반동화의 가능성을 막는 법령을 가결시켰지만, 만약 식민지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했더라면 조지 3세의 성격상 틀림없이 의회를 무시하고 친히 전제 정치를 감행했을 것이고, 그러면 영국은 또다른 혁명에 말려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미국의 독립은 영국측에 있어서도 불행 중 다행한 일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대영 제국을 향한 첫걸음은 오스트리아 계승전(1740~1748년)의 수행이었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카를 6세가 서거한 후 남자 혈통이 없어 장녀인 마리아 테레지아 공주가 왕위에 즉위하였는데, 이에 대해 방계 혈통인 바바리아 선거후가 계승권을 주장하며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왕위를 차지하려 했다. 이때 하노버 집안과 이해 관계가 있는 오스트리아를 영국이 도와 주었으며, 이는 영국이 전혀 개입하지 않아도 되는 문제인데도 윌리엄 3세 이후 앤 여왕에 걸쳐 계속되었던 '대륙의 세력 균형(balance of power)'이라는 외교적 차원에서 프랑스의 반대편에 서서 전쟁에 참여한 것이다.


영국은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스코틀랜드의 하일랜드인들을 앞세워 북부 잉글랜드로 진격해 오던 스튜어트 왕계인 찰스 에드워드의 반란도 함께 치르게 되었다. 다행히 1746년 컬로든(Culloden) 전투에서 영국군이 승리함으로써 이 문제는 무마되었다. 또 인도에서 마드라스 지역을 놓고 영국과 프랑스의 동인도 회사가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럽에서 오스트리아 계승전이 끝나면서 1748년 악시 - 라 - 샤펠(Axi - la - chapelle) 조약이 맺어지자 영국과 프랑스의 대립도 끝이 났다.


악시 - 라 - 샤펠 조약에도 불구하고 인도에서의 영 · 프 대립은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1751년 아르코트(Arcot) 방위전에서 로버트 클라이브(R. Clive)가 이끄는 영국의 식민지 부대가 프랑스의 뒤플렉스(Dupleix, J. F.) 식민군을 물리쳤고, 1757년 플라시에서도 계속해서 승리함으로써 북인도를 점령하게 되자 영국은 동인도 회사를 접수하고 직접 인도 경영에 나섰다. 이로써 영국 제국을 인도에 본격적으로 건설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식민지를 향한 영국의 두 번째 걸음이었다.


세 번째 걸음은 윌리엄 피트가 활약한 7년 전쟁(1756~1763년)이었다. 7년 전쟁은 오스트리아 계승전에서 프러시아가 슐레지엔 지방을 얻은 것에 대해 오스트리아가 불만을 품고 프랑스, 러시아, 스웨덴과 동맹을 결성하고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이에 대해 영국은 프랑스가 또 개입하는 것을 보고 세력 균형을 위하여, 이번에는 프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전쟁에 참여했다. 이러한 세력 균형을 위한 두 전쟁을 역사에서는 '외교 혁명'이라고 하며 프랑스와 영국의 계속적인 대립이 15세기경 일어났던 백년 전쟁과 유사한 대립이 18세기에 다시 이어졌기에 이를 '2차 백년 전쟁'이라고도 한다.


7년 전쟁의 주역인 윌리엄 피트(대 피트)는 자신의 조부가 마드라스 총독을 지냈기에 그 영향을 받아 식민지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고, 영국을 제국화시키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7년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군대의 경리 총감이었던 그는 곧 전시 재상이 되어 영국 내 파벌 싸움을 중지시키고 제해권을 장악하는 외교적 수완을 나타냈다. 


프랑스가 북미의 오하이오 강과 미시시피 강 유역을 점령하려는 식민지에서의 전투가 치열했는데, 영국은 식민지 정책에 대한 준비를 단단히 해 두었기에 7년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만약 그가 없었더라면, 북미 대륙에서 프랑스가 미시시피까지 세력권을 확대하여 미합중국의 모체가 프랑스로 되었을지도 모른다.


영국과 나폴레옹.

소 피트가 수상직에 있을 동안 프랑스는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들어가 있었는데, 소 피트는 나름대로 프랑스 혁명의 파괴적인 사상이 영국에 미치는 영향과 혹시 있을지 모르는 침략 행위에 대비하여 거국 내각을 구성했다. 또 그는 프랑스 혁명 정부와 가능하면 중립을 유지하려 했으나 프랑스가 앤트워프를 흐르는 스헬데 강의 항로를 막아 네덜란드 항구를 침식시킬 계획을 세우자 영국은 윌리엄 3세 이후 네덜란드와 전통적으로 우호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즉각적인 대응책을 시도했다.

물론 그의 중심이 되는 정책은 기존의 영국 정책이었던 세력 균형책이었다. 그래서 대립 초기에는 네덜란드를 방위하고 앤트워프 지역과 벨기에가 프랑스란 강국의 세력권에 들어가는 것을 막고자 소규모의 전쟁만을 치렀다. 그러나 점차 나폴레옹이 대륙의 각국과 영국 점령 지역까지 - 심지어는 영국의 식민지들인 인도나 지중해 지역 섬까지 - 세력을 미치자, 이것을 막고자 전쟁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소 피트는, 첫째로 제해권의 확실한 확보와, 둘째로 무상 원조나 특혜 차관 등을 통해 군비를 지원하는 유럽 대륙 내 동맹군을 얻는 데 노력을 기울였고, 셋째로 군비를 얻기 위해 영국 내 모든 조세를 3배로 증액하고, 자진 헌금의 장려와 10%에 가까운 소득세를 신설했다. 이러한 노력 중에서도 세 번째 정책에 대한 영국민의 태도는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막대한 세금 부담에도 불구하고 영국 국민들은 불평 없이 피트의 정책에 따랐는데, 이것은 그동안 피트가 얼마나 정치를 잘 해 왔는가와 영국의 경제력이 이러한 상황을 감당할 만큼 성장해 있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였다.

이렇게 나폴레옹과 강한 대립을 보이던 그는 국내의 산업 혁명의 발전과 함께 영국이 대영 제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이 되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1801년 가톨릭에 하원 의석을 제공하려는 안건을 냈다가 국왕에게 승인받지 못하자 사임했다.

뒤이어 수상이 된 애딩턴(Addington, 1801~1804년) 경은 피트의 외교 정책을 무시하고 무사 안일한 발상에서 1802년에 프랑스와 '아미앵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이것은 애딩턴 경이 나폴레옹을 잘못 파악한 것으로, 이듬해인 1803년에 아미앵 평화 조약이 파기되면서 다시 전쟁이 재개되었다. 이로써 지중해에서 근거지만 잃고 프랑스가 영국 본토를 침공할 계획까지 세우게 만들었기 때문에 이 조약이 영국측에게는 중대한 외교적인 패배가 되었다.

나폴레옹의 본토 침입이 영국에게는 대단한 위기의 상황이었으나, 영국이 제해권을 장악함으로써 프랑스 함대를 봉쇄하고, 트라팔가르 해전(1805. 10)에서 넬슨 제독이 전사하면서까지 에스파냐와 프랑스 연합 함대를 격파하여 지중해와 대서양에서 영국의 제해권이 다시 유지되어 나폴레옹은 인도 항로마저 포기해야 했다. 이듬해인 1806년 피트는 나폴레옹으로부터 비록 완전히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소식을 들으면서 세상을 떠날 수 있었다.


영국에 대한 침략이 실패로 돌아가자,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대부분의 유럽 국가가 자국의 통제하에 있고 러시아도 프랑스와 무장 중립 조약을 맺고 있기에, 대륙 봉쇄령을 취하면 영국이 경제적으로 고통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에 대해 영국은 제해권의 이점을 살려 프랑스와 프랑스에 예속된 유럽 국가들의 대양을 통한 무역로를 차단하는 해상 봉쇄령(추밀원령)으로 대응하자, 유럽 내 모든 국가들이 심한 고통을 겪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농업에 의존하던 러시아가 가장 심한 고통을 느껴 프랑스가 내린 대륙 봉쇄령에 반발하여 영국과 몰래 해상을 통한 상거래를 시작했다.<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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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1811년 프랑스는 이것을 문제삼아 러시아를 공략했다. 그러나 이 러시아전에서 악천후와 전략적인 게릴라전에 말려들어 1813년 나폴레옹이 의도한 것과는 달리 패하자 이때부터 유럽에서 프랑스의 위력은 약해졌고, 1814년 나폴레옹은 황제 퇴위와 함께 엘바 섬으로 유배되었다.

1815년 루이 18세가 통치하는 본국이 혼란한 틈을 타서 엘바 섬을 탈출한 나폴레옹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다시 황제로 복귀한 후, 유럽 원정을 시도했지만 영국 주도하에 결성된 유럽 공동 방위군에 의해 워털루 전투에서 다시 패배하여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2차 유배 - 이를 나폴레옹의 '백일 천하'라 함 - 됨으로써 그의 야망과 꿈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영국은 이제 유일한 전승국이 되었는데, 이것은 바로 소 피트가 그동안 꾸준히 영국의 경제와 정치에 안정을 꾀하여 놓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가 수상 시절에 시작한 1차 대륙 회의가 2차, 3차, 4차까지 계속 되면서, 프랑스가 약화될 때마다 대륙 내 국가들과 꾸준히 공조 체제를 형성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전승이 가능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공조 체제는 '빈 체제'라고도 하며 '유럽 협조 체제(European Concert)'라는 19세기 국제 회의 시대를 열게 해 주었다.

비록 소 피트는 트라팔가르 해전에서의 승리만을 보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정치적인 준비 덕분에 영국은 나폴레옹의 야망을 견뎌 내고 그를 완전히 제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프랑스의 절대 왕정 시대는 지나가고, 영국의 자유주의와 상업주의가 빛을 발하는 제국주의 시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동시에 윌리엄 3세 이후 세력 균형을 위하여 꾸준히 프랑스와 대립해 오던 제2차 백년 전쟁이라 불리던 시기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농업혁명"

영국은 1700년경 인구가 550만이었던 것이 1821년경에는 1,400만으로 증가했다. 이에 따라 자연 식량 수요도 증가하여 생산량과 경지 면적의 확장이 절실해졌다. 1750년 이후 타운센드 경이나 털(Tull, J.) 등을 통해서 네덜란드와 프랑스에서 과학적 농업 기술을 꾸준히 받아들였으며 밭작물을 교대로 심는 윤작법으로 가축의 겨울 사료나 비료 생산에도 혁신이 일어나 농업 경영 및 가축 사육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과학적 영농법이 개발되자 일부 농업 대지주들은 농민들의 많은 손을 쓰지 않고도 생산을 증가시킬 수 있었고, 또 일부 대지주들은 아예 농업보다는 목축업을 통해 양모 산업으로 뛰어드는 부류들도 생겨났다. 게다가 양모업에 뛰어든 대지주들은 자신들의 의회 대표권을 이용하여 합법적으로 울타리를 치는 인클로저 법을 정함으로써 제2차 인클로저 사태가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중소 농민층들이 서야 할 땅들이 점차 줄어들자 일부의 자포 자기한 사람들은 북부 도시로 흘러들어가 산업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노동자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결국 농업 혁명은 농민들의 도시 노동자화를 촉진시킴으로써 산업 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 농사를 계속 하고자 했던 사람들은 캐나다나 북미 지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소작인이나 자유 농민의 길을 걸었는데, 이로써 북미에 영국민이 급속도로 확산되는 결과를 낳았다.


산업 혁명 역할"

산업 혁명의 원인들은 많이 있지만, 첫째로 농업 혁명과 제2차 인클로저 운동으로 도시에 임금 노동자들이 많이 생겨난 사실과, 둘째로 시민 혁명 후에 정치적 안정이 지속되었던 사실, 셋째는 과학의 발달을 통해 대량 생산에 필요한 많은 기계가 발명되었던 사실, 넷째로 이렇게 발명된 기계를 움직이는 데 필요한 철, 석탄 등과 같은 자원들의 수송에 편리한 천연 항구들이 많이 늘어난 점들을 주된 원인으로 꼽을 수가 있다.

산업 혁명은 1733년 존 케이가 '나는 북'이란 면직기를 만든 후, 1769년 아크라이트가 수력 면직기를, 1779년 크럼프턴이 뮬 방적기, 그리고 1791년 카트라이트가 역직기를 발명하면서 그동안의 모직물 생산 체계에서 면방직 생산 체계로의 발전을 가져왔다.


1784년 면공업에 의한 수입이 400만 파운드였던 것이 1833년에는 3억 파운드에 달했다. 또 제임스 와트가 다목적 증기 기관을 발명함으로써 한층 기계화 작업이 가속화되었고, 1807년 이 증기 기관을 이용한 풀턴의 증기선이나 1814년 스티븐슨의 증기 기관차 발명은 상품과 여객의 수송을 신속하게 만들었다. 영국의 산업 혁명은 1760년에서 1815년 사이에 완만하게 이루어지다가 나폴레옹 몰락 이후 유럽이 다시 안정 체제로 들어가자, 전반적인 산업 경제 제도에 변혁을 가해 유럽과 세계 시장으로 영국 상품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산업 혁명의 영향에 대하여 몇 가지를 분석해 보면, 첫째로 인구가 도시에 집중함으로써 범죄, 위생 문제 등 새로운 사회 문제가 나타났으며, 둘째로 신흥 공업 도시로 맨체스터(면공업)와 버밍엄(철공업), 글래스고(담배, 조선) 등이 생겨났고, 셋째로 대량 생산을 통해 부자가 된 자본가와 그 밑에서 법의 보호 없이 착취당하는 노동자란 두 계층이 새롭게 생겨났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시기의 자유로운 경제 사상에 대해 존 스튜어트 밀이나 리카도, 멜서스, 애덤 스미스 등이 그들의 사상을 전개했다.

물질적인 발전이 급속하게 이루어지자 전통적이며 심오한 기독교 윤리 차원에서는 복음화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느낀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년)는 대중의 열정적인 복음화를 추구하는 교리를 폈는데, 이것이 감리교(Methodist Church)의 시작이다. 문학 방면에는 사실적인 소설가로서 대니얼 디포(Daniel Defoe)가 『순례자의 과정』을 써서 중하층의 국교 반대를 표현했고, 또 문명의 이기()에 대한 공허감과 이를 탈피하고 싶은 마음을 『로빈슨 크루소』에서 표현했다.


외교 정책 수립.

영국이 1850년경 자유주의 정책을 표방했으나 이것은 대외적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러한 대내외 연결점은 국내에서 자유주의의 기초가 성립되는 19세기 초에 함께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1815년 빈 회의의 주된 목적은 패전국인 프랑스를 어떻게 다룰 것이며, 황폐해지고 혼란에 빠진 유럽 사회를 어떻게 바로잡느냐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전승국인 영국이 주된 역할을 시도하려 했으나 몇 가지 외교적인 문제에 빠졌다.

첫째는, 프러시아,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 황제국이라 자칭하는 그들이 영토 확장욕과 함께 왕정 복고를 꾀하는 신성 동맹을 맺으면서 그 의도를 흐리기 시작한 것이다.

둘째로는, 다행히 영국의 외무장관이던 캐슬레이(Castlereagh)의 노력으로 원래의 목적인 4국 회담이 열릴 수는 있었지만 이때에도 문제가 발생했다. 그것은 프랑스가 약화되었으나 국제 정치의 권한은 웨스트팔리아 조약(1648년)에 의해 프랑스에게 빼앗겼던 신성 로마 제국의 맥을 다시 계승한 오스트리아가 주도해야 한다며 메테르니히가 회의의 주동자 역할을 한 것이다.

1818년 프랑스가 협조 체제에 들어와 5국 동맹이 맺어지자, 이러한 사실 또한 영국에게는 탐탁찮았다. 더욱이 영국의 불만을 가중시킨 것은 1822년 스페인에 쿠데타가 발생했을 때 베로나 회의에서 스페인과 혈통 관계가 있는 프랑스에게 이 반란을 진압하라고 열강들이 허락한 것이었다. 


영국은 세력 균형상 프랑스가 새로운 국제적 입지를 획득한 것에 대하여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영국은 협조 체제에서 탈퇴하고, 이때부터 독자적인 외교 정책의 길을 걸었다.


영국의 독자적인 외교 정책의 길을 터놓은 사람은 1830년대 외무 장관과 수상을 지낸 캐닝이었다. 그는 자유주의적 외교를 주창한 인물이었는데, 휘그당 내에서뿐만 아니라 토리당에서도 폭넓은 지지를 받아 '자유주의 캐닝파'를 형성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업적은 그리스의 독립 운동(1821~1829년)에 대하여 자유주의적인 동정표를 던져 그리스를 도와 줌으로써 터키로부터 독립하려는 근동 지역의 여러 국가들에게 큰 자극을 준 것이었다.<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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