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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역사 (국내)

삼성 이건희 (李健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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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이건희(李健熙) 회장,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투병끝 별세, 향년 78세(상보), Lee Kun-Hee, force behind Samsung’s rise, dies at 78,

'재계의 거목'이자 '한국 경제 도약의 산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건희 삼성 회장이 끝내 유명을 달리했다. 2014년 5월 급성심근경색증으로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자택에서 쓰러졌던 이 회장은 장장 6년 5개월가량 입원 치료를 받아온 삼성서울병원에서 25일 별세했다고 삼성이 밝혔다. 이 회장의 사거는 확고부동한 재계 1위 그룹의 총수, 반도체와 모바일 등 분야에서 세계 선도 일류기업의 토대를 닦은 경영인이 생을 마감한 것 이상의 의미로 다가온다. 그의 인생 역정과 그가 경영한 기업의 행로가 명과 암으로 새겨진 한 시대의 역사를 오롯이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이 1987년 선친의 사망 후 45세의 나이로 당시에도 이미 한국 재계의 선두였던 삼성그룹의 경영권을 차지한 것은 물론 '핏줄' 덕분이었다. 그러나 개발도상국의 이름 없는 전자제품 생산업체였던 삼성전자를 세계에서 가장 명망 있고 앞서나가는 기업의 하나로 키워낸 일등 공로자가 이 회장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라는 명언은 기업 구성원들에게 혁신을 재촉하는 경영자의 호소 차원을 넘어 기존의 발상에서 벗어난 대담한 시도로 도약을 추구하겠다는 시대정신의 경구로 자리매김했다. 당연히 다른 여러 요인이 작용했겠지만, 이 발언이 나왔던 1993년의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기점으로 삼성전자는 물론 한국 기업들의 대도약이 시작됐고 한국은 비로소 선진국 대열에 진입할 발판을 마련했다. 모바일 시대 초창기였던 1995년 휴대전화 품질에 문제가 있다는 보고를 받은 이 회장이 삼성전자 구미사업장에 수천 명의 직원을 모아놓고 문제의 제품들을 불태운 '사건'은 너무나 유명한 일화다. 품질에 목숨을 걸다시피 했던 완벽주의 경영철학과 '모험사업'이던 반도체에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않은 결단력, 일찌감치 모바일 시대의 도래를 예측한 통찰력이 없었다면 오늘의 삼성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영전에 찬사만을 늘어놓지 못할 이유도 많다. 삼성의 제1인자가 되고부터 거동불능 상태로 병상에 눕기까지 '정경유착'이라는 음습한 단어는 내내 그를 따라다니는 꼬리표였다. 그룹 조직을 앞세운 '황제 경영', 불법도 마다하지 않을 만큼 무모했던 '무노조 경영' 원칙에 대한 집착, '삼성 공화국'이라는 용어가 말해주듯 한국 사회 곳곳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기업의 의사를 관철하려 했던 행태 등도 숱한 비판을 받아왔다. 개인적 취향을 앞세운 자동차 사업 진출은 대실패로 귀결됐다. 그의 존재를 가능케 했던 '세습 경영'을 이어가기 위한 편법의 여파는 현재진행형이다. 장남인 이재용 부회장은 '3세 승계'의 바탕이 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의 불법 행위 등을 이유로 아직도 재판을 받고 있다. 재판이 끝날 때까지, 어쩌면 그 이후로도 삼성의 족쇄가 될 이 사건의 뿌리는 이 회장과 그가 이끈 삼성 비서실에서 비롯되어 결국 부(負)의 유산으로 남게 되었다.

고인이 남긴 빛나는 업적을 계승해 발전시키는 것도, 그가 떠난 자리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내는 것도 남은 이들의 몫이다. 이 회장이 의식을 잃고 쓰러진 후 삼성에는 많은 변화와 진화가 있었다. 그룹 조직은 사실상 해체됐고 그가 그토록 거리를 두었던 노조의 설립 움직임도 활발하다. 주요 계열사별로 준법감시위원회가 설립되는 등 투명 경영 체제가 강화됐다. 무엇보다 모든 비리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경영 세습'의 폐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이재용 부회장이 '4세 경영 포기'를 공식 천명하기도 했다. 이 회장이 생전에 이런 삼성의 변화를 목도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모르지만, 명계에서는 마음에 들지 않을지라도 응원하고 격려해 주기를 바란다. 이 회장이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의 기치를 치켜올렸을 때와는 모든 것이 달라졌고 이제는 느리더라도 정도를 가야 한다는 것이 시대의 요구가 됐기 때문이다.

 

삼성병원에 입원한지도 꽤오랜시간이 지난듯한데...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이 아닌가???

이건희 회장이 IOC 위원 되었을때...

삼성차 사업에 진출했을때 그래도 보너스 100프로씩 받은듯한데.... 물론 삼성차 증권은 아직도 휴지되어 어디엔가 있을듯한데... 그래도 한때는 삼성에서 월급타고 자부심을 가지고 일을했었는데...

세월앞에는 병마 앞에는 아무런 장사도 없고 누구도 예외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부디 좋은곳에서 편히쉬시길 바랄뿐이다. 이건희 회장 관련 글이보여 사진과 함께 모셔와 봅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일생,

삼성전자 회장 겸 삼성그룹 총수, 대한민국 최고부자로 알려져 있다.

삼성그룹 창업주인 이병철의 셋째 아들로 첫째 형 이맹희 (CJ 그룹) 둘째 형 이창희(새한그룹) 를 제치고 삼성그룹의 후계자로 낙점되고 아버지 이병철이 사망한 1987년에 그룹 회장에 올라섰다. 1993년 6월 '신경영'을 주창하며 이후 자신의 모토로 삼아왔다.

- 경력

• 2012. 6. 삼성생명공익재단 이사장

• 2011. 10. 2018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 고문

• 2010. 3. ~ 삼성전자 회장

• 2010. 2.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

• 2005. 대한올림픽위원회 명예위원장

• 1998. 8. 삼성문화재단 이사장

• 1998. 4. ~ 2008. 4. 삼성전자 대표이사 회장

• 1996. 7. ~ 2008. 8.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

• 1993. 3. 대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 삼성미술문화재단 이사장

• 1989.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 1987. 11. ~ 1998. 4. 삼성그룹 회장

• 1987. 2.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 1982. ~ 1993. 2. 대한올림픽위원회 상임위원

• 1982. 3. ~ 1997. 3. 대한아마추어레슬링협회 회장

• 1981. 2. 한일경제협회 부회장

• 1980. 중앙일보 이사

• 1979. 2. ~ 1987. 11. 삼성그룹 부회장

• 1979. 2. 삼성물산 부회장

• 1966. 10. 동양방송 입사

2008년 김용철 전 법무팀장의 폭로로 드러난 비자금과 세금포탈 사건으로 인해 잠시 회장직에서 물러났으나 2010년에 삼성전자 회장직으로 복귀하였다. 2014년 5월에는 급성 심근경색이 와서 이후로는 사실상 코마상태로 정상적인 활동을 할수 없어 경영에서 물러난 상태로 직함만 유지 중이다. 현재 이건희 회장의 장남 이재용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사실상 삼성 총수 역할을 승계하였다.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와 어린시절 이건희,


이건희의 학창 시절

1942년 1월 9일,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대구부에서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얼마 안 가 어머니 품을 떠나 아버지 이병철의 고향인 경상남도 의령군의 할머니댁에서 3살 때까지 자랐고 이후 일본에서 소학교를 다녔다. 형과 자취생활을 했기 때문에 이 시기 이건희 남매가 부모와 함께 모인 자리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건희의 성격은 내성적이어서 어릴 때부터 말수가 적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단 혼자서 놀고 사색하는 시간이 많았다고 한다.

전란 중인 고학년 때 다시 한국으로 와 부산사범부속 국민학교를 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4, 5학년을 같이 다닌 권근술 전 한겨레신문 사장 증언에 의하면 부자집 도련님이라 신기한 장난감을 많이 가지고 와 같이 놀긴 했는데 말이 없고 장난도 잘 안 치던 아이라 그 외엔 기억이 잘 안 난다고 하였다.

 

고교시절엔 서울사대부고에 진학했는데 당시 이건희 회장의 동창이었던 홍사덕 전 의원이 2001년 한 인터뷰에 따르면, 미국에서 차관을 많이 들여와야 미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우리 안보가 튼튼해진다. 공장을 지어서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게 애국하는 길이다. 라며 1950년대 후반 고등학생이 생각하기 힘든 사고를 가졌다고 기억한다.

고교시절 이건희는 말이 없고 행동도 느릿느릿한 학생이었다고 하는데 학과공부에도 별 뜻이 없어 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 사냐고 물어보면 “나는 사람공부를 제일 많이 한다”는 황당한 답을 했다고 한다. 이후 삼성의 한 임원이 이병철 회장의 눈 밖에 나서 쫓겨난 일이 있었는데 당시 고교생이었던 이건희가 아버지를 찾아가 설득하자 이병철이 두 말 하지 않고 그 임원을 다시 불러들였다고 한다. 이병철은 스스로의 인사관리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보다도 고등학생 이건희의 사람 보는 눈을 더 인정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어느날 이건희가 홍사덕에게 느닷없이 일본 소학교 교과서 몇 권을 건네면서 “니 일본어 배워놔라. 니 정도면 두어 달만 해도 웬만큼 할끼다”고 했다. 먹물 좀 들었다는 고교생들에겐 반일감정이 팽배해있던 시절이라 홍사덕이 “그걸 뭐하러 배우노?” 하고 뜨악하게 물었더니 심드렁한 표정으로“일본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봐야 그 속에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찾게 된다”고 하였다.

사대부고 레슬링부에서도 활동했다고 한다. 공부에는 별 뜻이 없었던지 성적은 중간도 못 했다고 한다. 이후 연세대학교 상학과(경영학과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가 자퇴하고 와세다대학 상학부에 진학해 졸업했다.


이건희 회장의 군복무 및 기타 사생활

군복무를 했는지에 대해선 이야기가 엇갈린다. 일전에 강용석은 이건희가 정신질환으로 면제받았다는 주장을 했으나 그 근거로 든 게 근거가 없음이 드러났고 한겨레 신문의 취재에서는 만기 전역은 아니지만 복무를 하긴 했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삼성그룹 측의 공식적인 발표는 "이건희 회장님께서는 육군 현역병 출신으로 병장 만기전역을 하신 분이십니다."이다.

이건희가 현역병 출신이 아니라 방위병 출신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건희가 방위병 전역했다는 이야기는 거의 보통 라이벌 대기업인 현대그룹에서 나오는 말이다. 사실 지금도 '삼성가 남자라면 인생 낭비가 되는 군 복무를 하는 것보다 차라리 기업을 키워 일자리를 만드는 게 낫다'는 소릴 하는 사람들도 있다.

젊을 땐 술을 안 했다고 한다. 권근술 전 사장 말에 의하면 나이들어서는 하긴 하지만 잘 못 한다고 한다. 와인은 좋아한다는데 정작 와인 얘기를 하자 무관심했다는 소리도 있다.

자동차 매니아인 이회장은 유학생 시절 중고차를 사서 샅샅이 뜯어보고 다시 조립하곤 했다고 한다. 4200달러에 중고차를 사서 3~4달쯤 타고다니며 분해해본 뒤 수리해서 판매한 결과 700달러의 이윤을 남겼다. 유학시절 동안 중고차 6대를 수리해서 팔았다.


삼성그룹 승계

1966년 10월 동양방송에 입사한 뒤 1968년 주식회사 중앙일보·동양방송 이사, 1978년 삼성물산주식회사 부회장, 1980년 중앙일보 이사를 거쳐1987년 12월 삼성그룹 회장이 되었다.

1969년 말에 이건희 회장의 형들인 이맹희와 이창희가 아버지를 청와대에 고발하는 사건, 일명 왕자의 난을 터뜨리는 바람에 후계구도에서 쫓겨났다. 그 영향인지 장남이 아닌 셋째 아들 이건희 회장이 삼성그룹을 물려받았다. 이건희 본인이 능력을 보여준 덕도 크다.

현대그룹에서는 정주영 회장의 힘이 빠질 대로 빠진 정주영 회장의 사망 직전(2000년) 에 왕자의 난이 벌어져서 후계자들이 자신의 지분을 갈라 먹는 것에 성공하여 현대그룹이 분열되었던 반면 삼성그룹에서 왕자의 난은 이병철이 힘이 있었을 때 벌어졌고 그 결과로 이맹희와 이창희는 내쳐졌다.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이건희는 형이 두 명이나 있어서 삼성의 회장이 되리라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맹희의 무능과 이창희의 반란 등으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이건희에게도 기회가 왔고 이건희는 두 형들과는 대조적으로 아버지인 이병철의 마음에 들 정도의 업무성과를 내면서 후계자로 굳어졌다.

특히 동양방송을 전두환에게 뺏기기 전까지는 드라마 부문을 직접 챙겨서 키웠을 정도로 의욕적이었고 성과도 꽤 좋았다. 삼성그룹 내부 경영진의 반대에 개인 사재로 한국 반도체를 인수하고 지속적인 설득으로 이병철 회장의 삼성 그룹 차원의 투자를 이끌어냈는데 이것이 현재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부가 되었다.


이건희는 두 명의 스승으로 선친 이병철과 장인 홍진기를 꼽는다.

“선친은 경영일선에 항상 나를 동반하셨고 많은 일을 내게 직접 해보라고 주문하셨다. 하지만 자세하게 설명해주지는 않으셨다. 현장에 부딪치며 스스로 익히도록 하셨다. 이런 시간이 쌓이면서‘경영은 이론이 아닌 실제이며 감이다’는 체험적 교훈을 배웠다. 장인은 기업 경영과 관련된 정치, 경제, 법률, 행정 등의 지식이 어떻게 서로 작용하며 이 지식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문답식으로 자상하게 설명해 주셨다. 결국 나는 두 분의 가르침을 통해 경영에 관한 문(文)과 무(武)를 동시에 배운 셈이다.” -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이건희는 퇴근 후에 사람들과 어울려 술 마시고 놀지 않았다. 그럴 시간에 주로 기술 관련 서적을 탐독하거나 전자제품, 각종 기계류를 분해하고 조립하면서 연구를 거듭했다. 혼자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관련 전문가들을 집으로 불러다 가르침을 청했다. 그는 삼성 부회장 시절 사석에서“주말에 우리집으로 초청해 한수 배운 일본 기술자만도 수백 명이 넘는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NEC, 도시바, GM, 휴렛팩커드 등 세계 유수 기업의 CEO들도 방한 시 이회장 자택을 주요 방문지로 잡는다.

그의 한남동 자택을 자주 찾는 한 재계 인사는 “이회장의 서가엔 경영학 서적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반면 미래과학, 전자, 우주, 항공, 자동차, 엔진공학 등 이공학 관련서적이 즐비하게 꽂혀 있는데 전집류가 거의 없는 것으로 봐서 그 책들은 이회장이 직접 한 권 한 권 골라 읽은 것 같았다.”고 전한다.

웬만한 전자제품은 콩알만한 부품의 기능 차이까지 꿴다고 한다. 국산 제품과 외국산 제품을 갖다놓고 부품 하나하나를 비교하며 품질 격차의 원인이 된 부품을 밝혀낸 뒤 계열사 기술담당 임원을 불러 그것을 쥐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삼성그룹 회장 이건희
"극단적으로 얘기해. 농담이 아니야. 마누라, 자식 빼놓고 다 바꿔봐." - 이건희-

회장이 된 뒤 이듬해이자 삼성그룹 창업 50주년이 되는 1988년에 삼성의 제2창업을 선언하고 인간중심,기술중시,자율경영,사회공헌을 경영의 축으로 삼아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의 도약을 그룹의21세기 비전으로 정하였다.

일본인 고문인 후쿠다에게서 받은 이른바 '후쿠다 보고서'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아 1993년 6월 위로부터의 적극적인 혁신을 시작하여 그는 이러한'신경영'을 통해 획기적인 경영혁신을 추진해 나갔고 삼성전자를 세계 일류 기업으로 도약시켰다. 후쿠다 고문에게는 매우 두둑히 챙겨줬다고 하는데 일본에서는 한국 기업이 일본 기업들을 다 제치게 도와줬다면서 욕을 먹기도 했다고 한다.

삼성그룹 회의에서는 심심하면 위기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매출이 100조를 넘어도 시장 흐름이 바뀔지 모르니 걱정하고 매출이 줄면 줄었다고 걱정하고 이렇게 항상 경각심을 늦추지 않는 게 여러CEO들의 특징이기도 하고 삼성 성장의 비결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인텔의 前 CEO도 일본 업체에게 메모리반도체 분야를 추월당한 다음엔 맨날 위기론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다만 항상 그러는 건 아니라 2010년대 초반쯤엔 중국이 우릴 쫓아오려면 아직 멀었고 일본은 힘이 빠졌다는 뉘앙스로 낙관론을 내놓기도 해 이목을 끌기도 했다.

대기업을 이끄는 총수답게 경영 방식 또한 철두철미하고 세세하게 관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건희와 관련된 수많은 저서 중에는 제3자인 작가가 쓴 평전인 "이건희 스토리" 라는 책이 있는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이미지와 다른 그의 삶을 알고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책이다고 평하는 사람도 있다.

선대부터 이어져온 전통이긴 하지만 노조를 허용하지 않는 무노조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다만2010년대 이후부턴 기업규모가 커져 노조가 사실상 허용됐다는 주장도 있다. 이는 삼성에서 설립된 노조가 아니라 삼성이 합병하는 과정에서 합병당하는 회사에 있던 노조가 존속한 것이다.


입원

2014년 5월 급성 심근경색으로 인해 자택에서 가장 가까운 순천향대학교 서울병원 응급실에 입원했다. 심장이 멎는 급박한 사태에 이르기도 했으나 심폐소생술로 심장기능이 돌아온 후 삼성그룹 산하인 삼성서울병원에 이송됐다. 스텐트 시술을 받고나서 VIP병실에 입원했다. 그리고 몇 년째 계속 입원해있다. 주기적으로 그의 사망설이 돌고 있다.

반 식물인간 상태에서 눈을 뜨고 감는 등의 반사적인 행동은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재활치료도 진행 중인 것으로 보이는데 자기 구단에서 뛰고 있는 야구선수 이승엽의 홈런 소식에 눈을 번쩍 뜨기도 했다고 한다.

이 회장이 입원한 이후부터 삼성 경영권은 이미 이재용으로 넘어갔다고 봐도 무방한 상태다. 2015년 5월에는 삼성문화재단, 삼성생명공익재단 이사장직을 아들에게 넘겨주었다.

2016년 6월 30일경 이건희 회장이 사망했고 오후3시에 발표한다는 루머가 돌아 삼성주가가 폭등하는 해프닝이 벌이지기도 했으나 삼성은 사실 무근이라고 일축했다.

양양 낙산사 홍련암에는 관세음보살상 중앙에 이건희 앞으로 건강 발원을 빌며 가장 큰 초가 하나 공양이 되어 있는데 아마도 아들 이재용이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2017년 8월 1일, 한겨레는 "그룹 사정을 잘 아는 핵심 관계자" 가 이건희 회장의 건강 상태가 의사소통이 어렵다는 것을 제외하면 아주 양호하다. 건강한 상태다”라고 밝혔고 “침대에만 누워 있지 않고 간병인의 도움을 받아 휠체어를 타고 병실 복도를 오가기도 한다"는 말을 했다고 단독 보도했다.

2017년 11월 6일, 2년만에 TV조선 종합뉴스 9에서 이건희 회장의 근황을 취재한 영상이 보도되었다. 이건희 회장이 영화를 보면서 간호사와 의사소통을 하는 모습이 포착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이건희가 보고 있던 영화가 목소리의 형태였다고 한다.


성매매 의혹

2016년 7월 21일 오후 10시 인터넷 언론인 뉴스타파에 의해 이건희 회장의 불법 성매매 장면이 보도되었다.

영상이 촬영된 기간은 2014년 이건희 회장의 장기 입원이 시작되기 전인 2011년~2013년이다. 때문에 영상 속에는 건강했을 당시의 이건희 회장 모습과 목소리가 나온다. 그리고 수차례의 전문가 검증을 통해 위변조 가능성이 낮음을 확인했다.

영상에는 이건희 회장이 여러 여성에게 돈봉투를 건네주던 중 한 여성에게 "니가 오늘 수고했어. 응? 니 키스 때문에 오늘 OO했어."와 같은 음담패설을 내뱉는 등 누가 봐도 성매매로 의심할 만한 발언과 행동이 적나라하게 찍혔다.

뉴스타파 제작진은 취재 결과 이 영상이 삼성그룹으로부터 돈을 뜯어내려는 일당이 성매매 여성과 공모한 끝에 나온 것으로 보이며 성매매에 대한 삼성그룹의 조직적 지원이 있었을 가능성도 보도했다.

보도 직후 이 영상이 트위터 등 SNS를 통해 빠르게 퍼져 나갔고, 기사화까지 이루어지면서 포털 사이트 실시간 인기 검색어에 이름이 오르내렸다.

다수의 네티즌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이건희 회장이 올라간 걸 보고 지난 몇 년간 투병 중이던 이 회장이 결국 사망한 줄 알고 기사를 찾아봤다가 전혀 예상 못 한 소식에 놀랐다고 한다.

2016년 7월 22일, 삼성그룹이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물의가 빚어져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도 "회장의 사생활 관련이라 회사로서는 드릴 말씀이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검찰 조사 결과 영상에 등장하는 여성들에게 촬영을 지시한 사람은 CJ그룹의 차장급 직원인 S씨로 파악됐다. 구속 후 사직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성폭력처벌법에 따라 "카메라 등 기계를 이용해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의 신체를 몰래 찍고 이를 타인에게 제공하는 것"을 지시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에 수사팀은 S씨를 상대로 이 회장 동영상을 갖고 삼성그룹을 협박해 금품을 요구한 적이 있는지 조사 중이라고 전해졌다.

 

기타 여담

부산교육대학교부설초등학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중학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부잣집 도련님이라서 사립학교를 나왔을 것으로 보는 세간의 인식과 다르게 초중고는 모두 국립학교를 졸업하였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레슬링부에 들어있었다. 럭비도 좋아했고 승마도 즐겨했다. 이를 바탕으로 레슬링협회와 승마협회 회장직을 맡았다. 2008년 특검 수사 때는 수사관들에게 승마의 장점에 대해 줄줄이 설명하면서 아예 직접 배워보라고까지 권했었다고한다.

KBO 리그 창립 초창기에는 삼성 라이온즈 초대 구단주로서 야구에도 많은 관심을 보여 미국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영향을 받아 비슷한 구단 경영 방식을 도입하기도 했다. 1984년 한국시리즈 때 롯데 자이언츠에 패한 뒤로는 직관은 안 간다고 한다.

개와 같은 동물들을 좋아하여 한남동 자택에서 개를 직접 길렀다고 한다. 그래서 삼성화재에서는 안내견 관련 사업을 지금까지도 계속 하고 있다. 애견 사랑으로 유명하다. 한남동 자택에 한 때 수십 마리의 개를 키우기도 했다. 진돗개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그러나 특별히 아주 비싼 개를 키운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말없이 조용히 따르는 개를 특히 좋아하고 아꼈다고 한다. 특히 "벤지"라는 이름의 포메라니안을 무척 아껴서 이 개가 16세의 나이로 노령으로 사망하자 충남대에 연구비를 지원하여 이 개를 체세포 복제하기도 했다.

일본에서 산 유년 시절에는 영화광이었다고 한다. 가정교사의 특별교육만 받아 평범한 친구를 접할 기회가 없었던 이건희는 거의 하루종일 영화관에서 영화를 봤다고 한다. 이것은 이건희 회장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같은 영화를 수차례 관람하면서 각각 주연, 조연, 프로듀서의 입장에서 보는 버릇을 갖게 되었고 이는 회장이 된 후 다각적인 사고방식을 갖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한다.

자동차 매니아다. 자동차 수집과 운전도 좋아했다. 가끔은 에버랜드 서킷을 전세 내고 레이서에게 교습 받아가며 드라이빙을 배웠다고 한다. 1982년에는 차를 몰고 가다가 사고가 크게 나서 병원에서 대수술을 받아야 했을 정도다. 부가티 타입을 비롯한 클래식 카들은 물론 고급 세단을 수집하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슈퍼카 매니아로 알려져 있는데 2015년 조사 결과 26억원짜리 부가티 베이론 포함 총 126대의 차량을 보유하고 있고, 차량 가격을 다 합치면 총 477억 원에 달한다. 참고로 대한민국에 단 한대 있는 부가티 EB110도 소유 중이었는데, 삼풍백화점 붕괴 시기에 삼풍백화점에 있었는지라 현재 소유는 불명확하다.

에피소드로 외제차를 구매하다 영업사원에게 굴욕 아닌 굴욕을 당한 적이 있었다. 포르쉐를 구입하려 매장을 방문한 이건희가 포르쉐를 총 6대 고르고 계약사인을 하고 가는 이건희를 포르쉐 신입직원이 몰라보고 계약금을 달라며 발목을 붙잡은 일이 있었다. 이에 이건희는 지갑가져와라 하면서3억을 즉납했다는 일화도 있다.

벤틀리 매장에서는 벤틀리를 고르는데 역시나 이건희를 몰라본 직원이 차를 리스로 하면 좋다는 조언을 해주고 직원은 신원조회를 위해 이건희의 정보를 삼성 캐피탈에 의뢰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어렸을 때부터 혼자 있던 습관이 있었는지 경영권을 이어받은 후에는 회사일 외에 대중매체나 외부와의 접촉을 꺼리는 편이었다. 주로 한남동 자택에서 집무를 보며 은둔과 칩거 등을 반복하였다. 미국, 중국, 유럽 등으로 국외 출장도 잦았으며 암 투병 경험에 유전적으로 병이 있는 데다 폐까지 좋지 않아 요양 겸 하와이, 타이완 같은 곳으로도 오래 나갔다.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과는 선대째부터 내려져 오는 인연으로 10살의 나이 차이가 있지만 경영 멘토로서 매우 절친하게 지낸다고 한다. 김승연 회장이 중대한 경영상 결정 사항이 있으면 이 회장에게 찾아와 조언을 구하고, 반대로 당시 경영 일선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전이었던 이재용 부회장을 김승연 회장에게 보내 경영 수업을 받게 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건희 회장 본인이 별장으로 놀러 갔을때 한화 이글스 구단이 전지훈련을 오자 선물을 보내기도 했으며 승지원으로 김승연 회장을 불러 자주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덕분에 자식들도 나이차가 있음에도 절친하게 지낸다고 한다.

 

한국거래소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보통주 4.18%, 우선주 0.08%)의 가치가 지난 10일 종가 기준으로 14조8619억원을 기록했다고 1월12일 밝혔다. 작년 11월 말 12조5638억원에서 2조2981억원(18.29%) 늘어난 것이다. 이 회장의 배우자인 홍라희 전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의 지분 가치도 4982억원(2조7239억원→3조2221억원) 늘었다. 장남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지분 가치도 3866억원(2조1136억원→2조5002억원) 증가했다. 같은 기간 국민연금의 삼성전자 지분도 32조470억원에서 38조4316억원으로 6조245억원(18.59%) 늘었다. 국민연금은 작년 4분기에 삼성전자 지분율을 종전 9.14%에서 9.55%로 높여 삼성전자 주가 급등에 따른 혜택이 늘었다. 작년 12월 이후 삼성전자 보통주 가격은 18.29%, 우선주는 18.85% 각각 뛰어올랐다. 그 결과 보통주와 우선주 모두 지난 9일과 10일 이틀 연속으로 종가 기준 역대 최고가를 기록했다.


삼성전자 주가가 상장 이후 최고치를 기록하면서 글로벌 시가총액 순위 20위권 안에 진입했다. 이날 블룸버그는 삼성전자의 글로벌 시가총액 순위 20위권 안으로 진입했다고 밝혔다. 삼성전자는 지난 9일 종가 기준으로 글로벌 기업 시가총액 순위(상장지수펀드 제외) 18위로 올라섰다. 작년 초 28위에서 10계단 올랐다. 삼성전자의 시가총액은 작년 1월 2일 2065억7000만달러(231조3291억원)에서 지난 9일 316억5000만달러(349조8293억원)로 950억8000만달러(118조5002억원) 늘었다. 이 기간 삼성전자 주가는 3만8750원에서 5만8600원으로 51%나 올랐다. 이로써 삼성전자는 지난 9일 수정주가 기준으로 지난 1975년 6월 11일 상장 이후 약 45년 만의 최고 주가를 기록했다. 10일에는 전 거래일보다 1.54% 오른 5만9500원에 마감해 사상 최고가를 하루 만에 경신했다. 

삼성전자는 1년 새 미국 인텔(26위), AT&T(22위), 버라이즌(27위) 등을 제쳤다. 글로벌 기업 시가총액 순위 1위는 작년 말 상장한 사우디아라비아 국영 석유기업 아람코였다. 아람코의 시가총액은 약 1조8200억달러(약 2113조9300억원)에 달했다.  2위는 애플(약 1조3300억달러), 3위는 마이크로소프트(1조2200억달러) 순이었다. 구글의 모회사인 알파벳(9688억달러)과 아마존(9380억달러), 페이스북(6138억달러), 알리바바(5527억달러) 가 뒤를 이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25일 별세한 후 재산을 물려받을 이재용 부회장 등 상속인이 내야할

세금은 얼마나 될까?.

이 회장 자산이 천문학적인 규모인 만큼 상속세도 천문학적 규모가 예상된다.

상속세 전문 세무사들은 주식 평가액의 60%, 나머지 재산의 50%를 상속세로 내게 될 것으로

추정했다.

 

상속세법령에 따르면 증여액이 30억원을 넘으면 최고세율 50%가 적용되고, 고인이 최대주주

또는 그 특수관계인이라면 평가액에 20% 할증이 붙는다.

극단적으로는 한 계열사의 1주만 있어도 할증이 적용된다.

이 회장은 현재 국내 상장사 주식 부호 1위다.

그는 수년간 병상에 누워 지내면서도 주식 부호 1위 자리를 지켰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이 회장의 보유 주식 평가액은 23일 종가 기준으로

18조2251억원이다.

올해 6월 말 기준 이 회장은?

▲ 삼성전자 2억4927만3200주(지분율 4.18%)

▲ 삼성전자 우선주 61만9900주(0.08%)

▲ 삼성SDS 9701주(0.01%)

▲ 삼성물산 542만5733주(2.88%)

▲ 삼성생명 4천151만9180주(20.76%) 등을 보유했다.

이 회장은 이들 4개 계열사의 최대주주이거나 최대주주의 특수관계인이다.

모두 상속세법상 최대주주 할증 대상이다.

 

따라서 이들 4개 계열사 지분 상속에 대한 상속세 총액은 평가액 18조2천억원에 20%를 할증한 다음 50% 세율을 곱한 후 자진 신고에 따른 공제 3%를 적용하면 10조6000억여원이다.

 

주식 평가액은 사망 전후 2개월씩 총 4개월의 종가 평균을 기준으로 산출하므로 실제 세액은 달라질 수 있다.

 

부동산 등 다른 재산에 대한 세율은 50%가 적용된다.

상속인들은 상속세 총액 가운데 자신이 상속받은 비율만큼 납부하게 된다.

이 회장 상속인들의 상속세 신고·납부 기한은 내년 4월 말까지다.

 

상속·증여세 전문가인 고경희 세무사(광교세무법인)는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각종 공제가 있지만 상속 재산이 워낙 많아 큰 의미가 없다"며 "천문학적인 상속세를 한꺼번에 내기에 부담스럽다면 연부연납제도를 활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연부연납은 연이자 1.8%를 적용해 먼저 '6분의 1' 금액을 낸 뒤 나머지를 5년간 분할 납부하는 방식이다.

 

구광모 LG그룹 회장도 고 구본무 회장에게 물려받은 재산에 대한 상속세 9215억원을 이 같은 방식으로 내고 있다.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Lee Kun-Hee, the ailing Samsung Electronics chairman who transformed the small television maker into a global giant of consumer electronics, has died

소형 TV 메이커를 글로벌 거대 가전 제품으로 탈바꿈시킨 병든 삼성 전자 회장 이건희 사망,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건희 회장님이 운명을 달리하셨다는데 남기신 편지가 감동입니다.

 

SEOUL, South Korea -- Lee Kun-Hee, the ailing Samsung Electronics chairman who transformed the small television maker into a global giant of consumer electronics but whose leadership was also marred by corruption convictions, died on Sunday. He was 78.

서울, 대한민국-이건희 삼성 전자 회장은이 작은 TV 제조업체를 글로벌 거대 가전 제품으로 탈바꿈했지만 부패 유죄 판결로 리더십을 잃은 삼성 전자 회장이 일요일에 사망했다. 향년 78 세.

 

Lee died with his family members by his side, including his only son and Samsung Vice Chairman Lee Jae-yong, the company said in a statement.

이씨는 외아들과 이재용 삼성 부회장 등 가족과 함께 사망했다고 회사 측은 밝혔다.

 

Samsung didn’t announce the cause of his death, but Lee had been hospitalized since May 2014 after suffering a heart attack and the younger Lee has been running Samsung, South Korea's biggest company.

삼성은 사망 원인을 밝히지 않았지만 이명박은 2014 년 5 월 심장 마비로 병원에 입원했고, 이남은 한국 최대 기업인 삼성을 경영하고있다.

 

“All of us at Samsung will cherish his memory and are grateful for the journey we shared with him,” the Samsung statement said. “Our deepest sympathies are with his family, relatives and those nearest. His legacy will be everlasting.”

삼성의 성명서는 "삼성 직원 모두 그의 기억을 소중히 여기며 그와 함께한 여정에 감사 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의 가장 깊은 동정심은 그의 가족, 친척 및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그의 유산은 영원 할 것입니다.”

 

Lee's family said the funeral would be private but did not immediately release details.

이씨의 가족은 장례식이 사적인 것이라고 말했지만 즉시 세부 사항을 공개하지는 않았다.

 

Lee Kun-Hee inherited control of the company from his father, and during his nearly 30 years of leadership, Samsung Electronics Co. became a global brand and the world’s largest maker of smartphones, televisions and memory chips. Samsung sells Galaxy phones while also making the screens and microchips that power its major rivals — Apple’s iPhones and Google Android phones.

이건희는 아버지로부터 회사의 지배권을 물려 받았으며, 거의 30 년 동안의 리더십을 통해 삼성 전자는 글로벌 브랜드이자 세계 최대의 스마트 폰, TV, 메모리 칩 제조업체가되었습니다. 삼성은 갤럭시 폰을 판매하는 동시에 주요 라이벌 인 애플의 아이폰과 구글 안드로이드 폰을 구동하는 화면과 마이크로 칩도 만든다.

 

세계 의 시선,

 

Lee Kun-hee, the chairman of South Korea's largest conglomerate, Samsung Group, has died aged 78.

한국 최대 재벌인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이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Mr Lee helped to grow his father's small trading business into an economic powerhouse, diversifying into areas like insurance and shipping.

이씨는 아버지의 소규모 무역 사업을 보험과 해운과 같은 분야로 다양화하면서 경제 강국으로 성장시키는 것을 도왔다.

 

During his lifetime, Samsung Electronics also became one of the world's biggest tech firms.

그는 일생 동안 삼성전자를 세계 최대 기술 기업 중 하나로 키웠다.

 

He was the richest person in South Korea, according to Forbes, with a net worth of nearly $21bn (£16bn).

포브스에 따르면 그는 한국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었으며 순자산은 21억 달러에 육박했다.

 

Samsung said Mr Lee died on Sunday with family by his side, but did not state the exact cause of death. A heart attack in 2014 had left him living in care.

삼성은 이씨는 일요일 사망했지만 정확한 사망 원인은 밝히지 않았다고 말했다. 2014년 심장마비로 그는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All of us at Samsung will cherish his memory and are grateful for the journey we shared with him," the firm said in a statement.

회사 측은 성명을 통해 "삼성 내 우리 모두는 그의 기억을 소중히 간직할 것이며 그와 함께한 여정에 감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Mr Lee was the third son of Lee Byung-chul, who founded Samsung Group in 1938. He joined the family firm in 1968 and took over as chairman in 1987 after his father's death.

이씨는 1938년 삼성그룹을 설립한 이병철 회장의 셋째 아들이었다. 1968년 가족회사에 입사해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1987년 회장직을 맡았다.

 

At the time, Samsung was seen as a producer of cheap, low-quality products. But under his leadership radical reforms were introduced at the company.

당시 삼성은 값 싸고 품질이 낮은 제품의 생산자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지도력 아래 급진적 인 개혁이 회사에 도입되었습니다.

 

Mr Lee became famous for telling employees in 1993: "Let's change everything except our wives and kids." The firm then burned its entire mobile phone stock, consisting of 150,000 handsets.

이씨는 1993 년 직원들에게 "아내와 아이들을 제외한 모든 것을 바꾸자"고 말하는 것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이 회사는 15 만 개의 핸드셋으로 구성된 전체 휴대폰 재고를 소각했습니다.

 ‘Change everything except your wife,’ Lee told his employees

“아내만 빼고 전부 바꾸세요.” 라고 직원들에게 말했다.

 

Lee Kun-hee, who transformed Samsung Electronics Co. from a copycat South Korean appliance maker into the world’s biggest producer of smartphones, televisions and memory chips, has died. He was 78.

삼성 전자를 모방 한 한국 가전 업체에서 세계 최대의 스마트 폰, 텔레비전, 메모리 칩 생산자로 변모시킨 이건희가 사망했다. 향년 78 세.

 

Lee passed away on Sunday with his family by his side, the company said in a statement, without mentioning the cause of death. His family will hold a private funeral. He had been hospitalized since a a heart attack in 2014 and was treated for lung cancer in the late 1990s.

이씨는 일요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가족 장례식을 치를 것입니다. 그는 2014 년 심장 마비로 입원했으며 1990 년대 후반에 폐암 치료를 받았습니다.

 

Lee, who told employees to “change everything except your wife and children” during his drive to foster innovation and challenge rivals such as Sony Corp., was South Korea’s richest person. He had an estimated net worth of $20.7 billion, according to the Bloomberg Billionaires Index. Samsung, the biggest of South Korea’s family-run industrial groups, known as chaebol, has been led by his only son since the heart attack.

혁신을 육성하고 소니와 같은 라이벌에 도전하는 과정에서 직원들에게“아내와 자녀를 제외한 모든 것을 바꾸라”고 말한 이씨는 한국에서 가장 부유 한 사람이었다. Bloomberg Billionaires Index에 따르면 그는 순자산이 207 억 달러로 추정되었습니다. 재벌로 알려진 한국의 가족 경영 그룹 중 가장 큰 삼성은 심장 마비 이후 외아들이 이끌고 있습니다.

 

“Chairman Lee was a true visionary who transformed Samsung into the world-leading innovator and industrial powerhouse from a local business,” the company said. “His legacy will be everlasting.”

"이 회장은 삼성을 현지 기업에서 세계 최고의 혁신가이자 산업 강자로 탈바꿈시킨 진정한 비전가였습니다."라고 회사는 말했습니다. "그의 유산은 영원 할 것입니다."

 

The reins are now set to pass to his only son , who’s been the conglomerate’s de facto leader since his father’s hospitalization in 2014.

이제 고삐는 2014 년 아버지가 입원 한 이래 대기업의 사실상 리더였던 외아들에게 넘어갈 예정입니다.

 

His only son Jay Y. Lee has been the conglomerate’s de facto leader since his father’s hospitalization in 2014, but it isn’t clear whether he will take over his father’s role as had long been anticipated. Samsung, the maker of the Galaxy line of smartphones, also supplies semiconductors for Google’s data centers and Apple Inc.’s iPhone, and has been riding a Covid-era boom in online activity. It’s the world’s most advanced maker of displays for TVs, computers and mobile devices.

그의 외아들 이재영은 2014 년 아버지의 입원 이후 대기업의 사실상의 리더 였지만, 그가 오랫동안 예상했던 아버지의 역할을 이어 받을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갤럭시 스마트 폰 라인을 만드는 삼성도 구글 데이터 센터와 애플 아이폰에 반도체를 공급하고 있으며 온라인 활동에서 코로나 19 붐을 일으키고있다. TV, 컴퓨터 및 휴대 기기 용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세계에서 가장 앞선 제조업체입니다.

 

韓国最大財閥サムスングループのトップで中核のサムスン電子世界有数企業成長させたイ・ゴニ李健煕会長くなりました78でした

삼성그룹 최고경영자이자 삼성전자를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성장시킨 이건희 회장이 78세에 세상을 떠났다.

 

韓国のサムスン電子はイ・ゴニ会長25家族らに見守られるくなったと発表しました

한국의 삼성전자는 이건희 회장이 25일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별세했다고 발표했습니다.

 

会長サムスングループの創業者三男早稲田大学などでんだあと関連会社幹部などを1987にグループの会長就任しました

이 회장은 삼성그룹 창업주의 셋째 아들로 와세다대학 등에서 배운 뒤 계열사 간부를 거쳐 1987년 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強力なリーダーシップで長年にわたってグループをけん中核のサムスン電子半導体やスマートフォンなどの分野世界有数企業成長させ韓国代表するカリスマ経営者としてられていました

강력한 리더십으로 수년간 그룹을 이끌었고 핵심 삼성전자를 반도체와 스마트폰 등 분야에서 세계 유수의 기업으로 성장시켰으며, 한국을 대표하는 카리스마 있는 경영자로 알려졌습니다.

 

ここ数年体調不良のため姿すことはなく長男のイ・ジェヨン李在鎔副会長事実上のトップとして経営のかじりをっていました

최근 몇 년 동안은 컨디션 부실로 인해 공개적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장남 이재용 부회장이 사실상 최고 경영자다.

 

サムスングループは韓国経済多大影響力韓国メディアはイ会長死去相次いで速報するなどきくえています

삼성그룹은 한국 경제에 엄청난 영향력을 가졌으며 한국 언론들은 이 회장의 별세 소식을 잇따라 속보를 내는 등 크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건희 회장님 편지,

- 나의 편지를 읽는 아직은 건강한 그대들에게 -

아프지 않아도 해마다 건강 검진을 받아보고, 목마르지 않아도 물을 많이 마시며,
괴로운 일이 있어도 훌훌 털어버리는 법을 배우며,
양보하고 베푸는 삶도 나쁘지 않으니 그리한번 살아보세요.

돈과 권력이 있다해도 교만하지 말고, 부유하진 못해도 사소한것에 만족을 알며,
피로하지 않아도 휴식 할줄 알며, 아무리 바빠도 움직이고 또 운동하세요.
3천원짜리 옷 가치는 영수증이 증명해주고,
3천만원짜리 자가용은 수표가 증명해주고, 5억짜리 집은 집문서가 증명해주는데,
사람의 가치는 무엇이 증명해 주는지 알고 계시는지요?

바로 건강한 몸이요!
건강에 들인돈은 계산기로 두드리지 말고요.
건강할 때 있는돈은 자산이라고 부르지만, 아픈뒤 그대가 쥐고있는 돈은 그저 유산일뿐입니다.
세상에서 당신을 위해 차를 몰아줄 기사는 얼마든지 있고,
세상에서 당신을 위해 돈을 벌어줄 사람도 역시 있을것이요!
하지만 당신의 몸을 대신해 아파줄 사람은 결코 없을테니,
물건을 잃어버리면 다시 찿거나 사면 되지만,
영원히 되찿을수 없는 것은 하나뿐인 생명이라오!

내가 여기까지 와보니 돈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요?
무한한 재물의 추구는 나를 그저 탐욕스러운 늙은이로 만들어 버렸어요.
내가 죽으면 나의 호화로운 별장은 내가 아닌 누군가가 살게되겠지,
내가 죽으면 나의 고급차 열쇠는 누군가의 손에 넘어가겠지요.
내가 한때 당연한 것으로 알고 누렸던 많은것들....
돈, 권력, 직위가 이제는 그저 쓰레기에 불과할 뿐...

그러니 전반전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여!
너무 총망히 살지들 말고,
후반전에서 살고있는 사람들아!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으니 행복한 만년을 위해, 지금부터라도 자신을 사랑해 보세요.
전반전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던 나는,
후반전은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패배로 마무리 짓지만,
그래도 이 편지를 그대들에게 전할수 있음에 따뜻한 기쁨을 느낌니다.
바쁘게 세상을 살아가는 분들.....
자신을 사랑하고 돌보며 살아가기를 ...
힘없는 나는 이제 마음으로 그대들의 행운을 빌어줄 뿐이요!

- 이 건 희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별세했다.

향년 78세다.

25일 재계에 따르면 이 회장은 이날 장기 투병 끝에 사망했다.

1942년생인 고인은 지난 2014년 5월10일 급성심근경색으로 입원한 이후 6년 동안 투병

끝에 사망했다.

삼성그룹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의 아들인 이건희 회장은 1987년 삼성그룹 경영 승계

이후 2014년 입원 전까지 약 27년 동안 삼성그룹을 이끌었다.

이 회장은 삼성 경영 이후 반도체와 스마트폰, 바이오 등 신사업을 통해 삼성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일궜다는 평가를 받는다.

유족으로는 부인인 홍라희 전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이 있다.

 

 

 

*대한민국을 일으켜세운 몇몇분중의 한분 박정희 정주영 이병철 이건희 마지막남은 하나의축대가 무너져내리는 느낌이 오네요 고생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님덕택에 우리나라는 많이 성장하고 우러러보는 대한민국의 반도체 깊이깊이 새겨 마음속에 간직하겠습니다 편안하게 영면하시어 무너져가는 대한민국을 하늘에서라도 도와주시길 빕니다 고맙습니다,

조,석으로 기온 차 큰 계절입니다,

건강관리 잘 하시길 바람니다

오늘도 행복을 전합니다, ^0^

 

 오늘도 좋은 인연들로 찾아주신 이웃님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한 나날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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