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China,中國, 3
소수민족
중국은 옛날부터 다민족 국가이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중앙정부를 통해 확인된 민족은 모두 56개이다. 한족(漢族) 이외의 55개 민족은 상대적으로 한족보다 인구가 적어서 관습적으로 소수민족이라고 칭한다.
중국 각 민족 분포의 특징은 잡거가 많고 집거가 적으며 상호 교차 거주하는 상태이다. 한족 지역에는 소수민족이 집거하고, 소수민족 지역에는 한족이 거주한다. 이런 분포 구조는 장기적인 역사의 발전 과정 중 각 민족 간의 상호 왕래와 이동에 따라 형성된 것이다. 중국 소수민족의 인구는 비록 적으나 그 분포 지역이 넓다.
전국 각 성(省)·자치구·직할시에는 모두 소수민족이 거주하고 있고, 대부분의 현(縣)급에는 모두 2개 이상의 민족이 거주하고 있다. 중국 소수민족의 주요 분포 지역은 몽고·신강(新疆)·영하(寧夏)·광서(廣西)·서장(西藏)·운남·귀주·청해·사천·감숙·요령·길림·호남·호북·해남·타이완 등의 성과 자치구이다. 중국 민족의 구성이 가장 많은 곳은 운남성으로 25개 민족이 있다.
민족 지역의 자치제도는 중국 정부가 중국의 현실 상황을 고려하여 채택한 기본 정책으로, 중국의 중요 정치제도이다.
1947년 5월 중국은 중국공산당의 지도 하에서 첫 번째로 성(省)급에 해당하는 민족자치지구 즉 내몽고자치구(內蒙古自治區)를 설치하였다. 중국 건국 후 계속하여 신강위구르자치구·광서장족(壯族)자치구·영하회족자치구·서장자치구를 설치하였다. 전국적으로 155개 민족자치지방을 설치하여, 그 중 자치구는 5곳, 자치주(州)는 30곳, 자치현(縣)·기(旗)는 120곳이다. 전국 55개 소수민족 중에서 44개 민족이 자치지방을 설치하였다. 자치를 실행하는 소수민족의 인구가 소수민족의 총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70%를 초과하고, 민족자치지방의 면적은 전국 국토 총면적의 약 64%이다.
문화
중국 고대 황하문명은 인류 역사에 있어 세계 4대 문명 중 하나이며, 유일하게 연속적으로 발전하고 중간에 단절된 적이 없는 문명이다. 황하문명의 발전과 번영에 따라 중국 고대 문화가 탄생하였으며, 지금까지 번성하고 쇠퇴하지 않았다.
문학
중국 최초의 문학적 성취는 기원전 6세기에 편찬된 중국 제일의 시가(詩歌) 총집 『시경(詩經)』이다. 그 후 질박한 선진(先秦) 산문, 화려한 한부(漢賦) 및 한나라 말기의 악부(樂府)·민요 등은 각각 그 당시의 문학적 면모를 대표하였다. 당나라 때에는 시가(詩歌)의 창작이 최고봉에 이르러, 이백(李白)·두보(杜甫)를 포함한 시인이 수천 명 탄생하였고, 현재까지 5만여 편의 시가 전해지고 있다. 송나라는 사(詞)가 가장 성하였고, 원나라 문학의 최고 성과는 잡극(雜劇)이다. 명·청(明·淸) 시기의 『삼국연의(三國演義』·『수호전(水滸傳)』·『서유기(西遊記)』·『홍루몽(紅樓夢)』 등 4편의 장편소설은 풍부한 문학과 역사를 혼합한 내용과 독특한 예술적 풍격으로 인해 고금에 걸쳐 명성을 얻고 있다.
20세기의 중국 문학은 20·30년대와 80·90년대에 각각 두 차례의 절정이 있었다. 전자의 절정은 ‘신문화운동’에서 발단하고, 시작과 동시에 강렬한 제국주의·봉건주의 반대의 사상을 띠었다. 노신(魯迅, Lu Xun)을 대표로 하는 진보 작가들은 중국 현대문학 활동을 전개하였다. 노신·심종문(沈從文)·파금(巴金)·로사(老舍)·장애령(張愛玲) 등이 당시 중국 문단의 거장이었다.
20세기 80·90년대 일군의 세계적 영향력을 지닌 신진 작가와 그 작품의 발표는 중국 당대 문학의 성과와 번영을 대표한다. 작가들은 현대 중국어로 현대 중국인의 생명과 심미에 관한 체험을 표현하여 더욱 성숙하였다. 전체 창작 수준에 있어, 당대 소설가들은 사용 언어의 사색과 표현 방면에서 높은 예술성에 도달하여 이미 그들의 선배들을 초과하였다. 21세기에 들어서, 문학 창작은 여성 세기로 진입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위로는 1930년대 출생한 여류작가에서 아래로는 20여 세의 신여성들이 동시에 문단에서 활약하고, 그 창작의 양과 질은 모두 현저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특히 60년대 이후 출생한 여류작가들의 작품은 고전소설이 설정한 인물 이미지 모델과 가치 취향을 비교적 많이 변화시켜서, 당대 사회의 특수한 인문적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중국에는 수 십 개의 문학상이 있고, 그 중에서 비교적 권위 있는 것은 모순문학상(矛盾文學獎)·노신문학상(魯迅文學獎)과 매년 중화문학인물평선(中華文學人物評選) 등이다. 2000년 북경에 건축한 중국현대문학관(中國現代文學館)은 최고로 저명한 18명의 중국 작가들이 사용한 책상·의자·필기구와 대량의 문학작품·필적·역문·편지 및 기타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하고 있다.
중국 한자(漢字)는 그림과 부호로부터 점차 변하여 형성된 것이고, 한자의 쓰기와 발전 과정으로 인해 서예가 탄생하였다. 중국에는 대대로 모두 저명한 서예가가 있었고, 그 서예와 풍격은 그 당시 서예의 전형적인 대표성을 지니고 있다.
서양의 유화와는 달리 중국의 전통 회화에는 독특한 표현 형식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7천 년 이전 신석기시대 도기 위에 그린 도화(圖畵)가 중국 최초의 회화 작품이다. 최초의 회화와 글자쓰기는 모두 동일한 도구를 사용하고 또한 선을 위주로 하였기 때문에, ‘서화동원(書畵同源: 서예와 회화는 근원이 같다)’이라고 하기도 한다. 중국 전통회화 작품에는 보통 모두 시쓰기와 글자쓰기가 있어, 시·서·화(詩·書·畵)가 조화롭게 결합되어 예술의 통일체를 이루고, 사람들에게 더욱 풍부한 미학적 내용을 부여한다. 인물화·산수화·화조화 등이 모두 전통회화의 중요 영역이다.
당대 중국 서예와 회화의 작품 활동은 상당히 활발하여, 중국미술관(中國美術館) 등 예술품 전시관에서는 매년 빈번히 개인전과 단체전을 개최할 뿐만 아니라, 중국화는 또한 외국으로 나가 여러 곳에서 전시되고 있다. 한편 예술품 경매 사업의 발전과 함께 최근 중국 화랑업계도 점차 국제적 관심을 받고 있으며, 매년 북경·상해·광주(廣州) 등 각지에서 예술박람회를 개최하여, 예술품 교역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 중에서 상해예술박람회(上海藝術博覽會)가 아시아의 전람회 참가 예술품 부문에서 가장 완비된 예술박람회이다.
중국 공예미술의 영역은 매우 다양하고 그 기예는 매우 능란하다. 공예미술은 특수전통공예와 민간공예로 대별할 수 있다.
특수전통공예는 진귀하거나 특수한 재료를 가공하여 제작한 것으로 품위가 고상하다. 옥조각은 옥석을 재료로 삼아 조각한 작품으로, 옥석의 천연 무늬·광택·색채·형상을 이용하여 가공하고, 옥석의 색깔과 작품의 형태를 기묘하게 결합시켜 자연적 매력을 드러내고 있다. 경태람(景泰藍)은 대내외적으로 유명한 공예품으로, 명나라 경태(景泰, 명나라 代宗의 연호, 1450·1456) 시기에 생산한 남색 유약이 뛰어나서 얻은 이름이고, 그 작품은 구리 바탕에 동선을 상감하고 금은으로 도금하여 화려하고 고급스러우며, 주요 작품 종류로는 병·사발·상배 등이 있다.
민간공예에는 가위로 자르고, 실로 짜고, 뜨개질하고, 자수를 놓고, 돌에 새기고, 흙으로 빚고, 그림을 그리는 등 기예를 이용하여 제작한 작품들이 다양하고 천태만상이며 토속적 분위기와 민족적 풍조가 농후하다.
희곡(경극)
중국의 전통연극은 독특한 명칭으로 희곡(戱曲)이라고 하며, 그리스 희비극·인도 연극과 함께 세계 3대 고대 희극문화로 불린다. 중국 희곡에는 300여 종류가 있고, 가무 형식을 운용하여 연극 줄거리를 표현하는 것은 중국 희곡의 주요 수단이다.
경극(京劇)은 가장 널리 퍼지고 영향력이 가장 큰 희곡 종류이며, 그 기원은 곤곡(昆曲)에 있다. 동시에 노래 부르고 대사를 낭독하며 악기를 연주하는 무대예술로 19세기 초 북경에서 시작되었고, 약 200년이 경과되면서 예술적 가치가 있는 1천 개 이상의 연극 제목과 고유한 음악 절박 형식 및 표현 양식을 형성하였다. 매난방(梅蘭芳)·정연추(程硯秋)·마련량(馬連良)·주신방(周信芳)·두근방(杜近芳) 등 우수한 경극 연기자 이후, 많은 젊은 연기자들이 경극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1990년대 이후 왕용용(王蓉蓉)·우괴지(于魁智) 등 젊은 연기자가 출현하였다. 2002년 중국경극원(中國京劇院)은 서양 교향악의 요소를 전통경극에 접합시키는 시도를 대담하게 추진하여 큰 호평을 받았다.
연극
중국 연극은 20세기 초 외국에서 유입되어, 1920년대부터 연극 무대에서 현실주의와 표현주의의 소재가 출현하기 시작하고, 30년대에 이르러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연극 대가 조우(曹禺) 시기의 3부작 『뇌우(雷雨』·『일출(日出)』·『원야(原野)』는 심오한 내용과 원숙한 기교로 중국 연극의 고전 작품으로 간주된다. 현재까지 이 3부작은 여전히 연극 무대에서 상연되고 있으며, 여러 차례 영화와 드라마로 각색되었다. 1952년 창립한 북경인민예술극원(北京人民藝術劇院)의 작품은 중국 연극의 최고 수준을 대표하고 있으며, 그 중 『다관(茶館)』·『융수구(龍須沟)』 등 연극 제목은 명성을 얻고 있다.
영화
중국 영화의 현실적 소재는 영화 발전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1980년대 중기부터 흥기하기 시작한 새로운 영화 제작의 최고조에서 『성남구사(城南舊事)』·『야산(野山)』·『부용진(芙蓉鎭)』·『개국대전(開國大典)』·『대결전(大決戰)』등은 당시의 대표작이 되었고, 이들 작품은 생활의 깊이와 넓이를 반영하고 소재·풍격·양식의 다양화를 실현하는 면에서, 그리고 영화 언어의 탐색과 창조 방면에서, 모두 높은 수준의 상태에 달해 있다. 이 기간 동안 제5세대 감독으로 불리는 장예모(張藝謨)·진개가(陳凱歌)·황건신(黃建新) 등의 출현은 국제 영화계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1990년대 후기 60·70년대 출생한 영화인들이 중국 영화계의 제6세대가 되어, 그 대표자로는 왕소수(王小帥)·장원(張元)·루엽(婁燁) 등이 있다. 그들의 영화 작품은 서민화 경향이 강해 대체로 현실 기술 수법으로 표현된다. 감독 풍소강(冯小剛)은 중국 상업 영화에서 흥행기록이 최고인 대표자가 되었고, 그의 작품이 서술하는 것은 대부분 서민의 이야기이다.
중국은 매년 국제영화제를 거행하고, 비교적 영향력 있는 것으로는 장춘국제영화제(長春國際電影節)와 상해국제영화제(上海國際電影節)가 있다. ‘금계상(金鷄獎)’은 중국 우수 영화의 최고상(最高賞)이고, 그 외에 중국 정부에서는 주류 영화의 발전을 격려하기 위해 ‘화표상(華表獎)’을 수여하며, 관중이 평가하여 수여하는 ‘백화상(百花獎)’이 있다.
문화교류
중국의 대형 국제 다자문화 교류활동이 최근 매우 생동감 있게 전개되고 있으며, 그 영향력도 날로 증대되고 있다. 최근까지 중국은 이미 143개 국가와 정부 차원의 문화 협정을 체결하고, 매년 중국 문화부가 허가한 중국과 외국의 문화 교류는 2천여 항목에 달하여, 60에서 70개 국가를 포함하고, 연인원 3만 명에 이른다.
과학기술
중국은 1949년 건국 이후 신속히 중국과학원(中國科學院)을 위주로 하는 과학연구 체계를 수립하고, 1978년 말 개혁개방정책 하에서는 국민경제를 새로운 기술 기초로 전이하기 위해 여러 과학연구 계획을 계속 실시하였다. 중국은 1978년 전국과학대회를 개최하여 「1978·1985년 전국 과학기술 발전기획 강령(全國科學技術發展規劃綱要)」을 제정하였다. 이 강령은 과학기술 사업의 기본 방침을, 과학기술은 경제발전의 촉진을 주요 임무로 하고, 과학기술 중에서 생산기술의 개발을 강화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이 방침은 90년대까지 적용되었고, 농업·에너지·컴퓨터·레이저·우주공학기술·고에너지 물리학·유전공학 등을 우선 발전의 중점으로 삼았다.
경제체제 개혁의 필요에 따라 1985년 중국은 「과학기술체제 개혁에 관한 결정(關于科學技術體制改革的決定)」을 발표하였다. 1998년 대·중형 공업기업이 설립한 기술개발 기구는 10,926개 소가 생겼고, 기구 총수의 50.5%를 점하였다. 이들 기구는 생산과 긴밀히 결합되어 생산에 직접 활용되었다. 1996년 3월 이후 중국은 ‘과교흥국(科敎興國: 과학교육의 국가 흥성) 전략’을 실시하고 있다. 즉 과학기술의 발전과 경제건설의 결합을 목표로 하며, 그 주요 내용은 시장 수요에 적응하여 기술 개발과 생산품 개발을 강화하고 과학기술 성과의 상품화·산업화의 추진을 가속화시키는 것이다.
자연과학 방면에서 중국의 과학기술 연구기구는 주로 중국과학원(中國科學院), 국무원과 지방정부 소속의 과학연구기구, 대학교의 과학연구기구, 국방과학연구기구, 광산기업의 과학연구기구 등이 있다. 최근 몇 년 간 민영 과학연구기구가 새로이 등장하여 주요 연구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1999년 말까지 전국에 이미 현급(縣級) 이상 지방정부 소속의 연구·개발 기구로는 5,400여 개 소, 대학원의 과학연구기구는 3,400여 개 소, 대·중형 국유기업의 과학연구기구는 1만 3천 여 개소가 있다. 민영 과학연구형 기업의 규모는 보통 크지 않으나 그 수량은 상당하여, 이미 7만 9천여 개 소에 달하고, 기업 총수입은 약 1조 위앤을 초과하였다. 그들은 합리적으로 분업하고 상호 보충하며, 전국적으로 기초과학·응용과학·고급 신기술·공익성 사회 과학기술 서비스에서 엔지니어링 설계 개발까지의 학문분야가 비교적 완비한 과학기술 체계를 형성하였다. 이외에 중국과학기술협회(中國科學技術協會) 소속의 160여 개 전국적 과학기술 학술단체 및 그들의 대·중 도시에 설립한 지점 기구들이 있다.
중국 과학기술의 주요한 성과를 살펴보면, 첫째로 응용과학 분야의 농업 방면에서, 중국은 밀·논벼·옥수수·면화 등 우량 품종을 배양하고 보급하여, 농작물 우량종 사용률은 80% 이상이고, 농업 생산의 안정적 발전을 촉진하였다. 중국 남부지방은 북위 18도에서 24도 사이의 지역에서 고무 시험재배가 성공하여, 중국의 고무 생산량을 세계 제5위로 끌어올렸다.
공업 방면에서, 중국 과학기술의 대부분 영역은 서양 선진국의 1960년대 수준에 머물러 있고, 일부 항목에서는 서양 선진국의 80년대 과학기술 수준이며, 소수 항목에서 세계 선진 대열에 진입하였다. 예로 석유공업은 시작은 비록 늦었지만 발전은 매우 빨라서, 50년대 후기 중국은 탐사의 이론과 기술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여, 대경유전(大慶油田)을 마침내 개발하였다. 대경유전은 연속적으로 20여 년 동안 매년 원유 5천 만 톤을 생산하여, 중국을 석유 부족 국가에서 석유 자급자족의 국가로 변신시켜 주었다.
교통운수 방면에서, 중국의 대형 교량 건설 기술 특히 수심이 깊은 시공기술은 세계적이어서 무한장강대교(武漢長江大橋)와 남경장강대교(南京長江大橋)를 성공적으로 건설하였다. 중국은 또한 지형·지질 조건이 복잡한 지역에서 철로와 터널의 건설기술이 뛰어나다. 이외에 중국의 조선업과 민간용 비행기 제조업도 진보되어 있다.
둘째로, 중국의 첨단 과학기술 분야는 건국 당시 전무 상태이었으나, 핵기술 방면에서 1960년대 중반 중국은 이미 핵무기 제조 기술을 개발하였고, 1964년과 1967년에는 원자탄과 수소폭탄의 폭발 시험을 성공하였다. 1971년에는 중국 최초의 핵잠수함 진수 시험을 성공하여, 중국이 성공적으로 세계 5대 선진 핵기술 보유국 중 하나가 되었음을 나타내었다.
우주공학 방면에서, 1970년 중국은 처음으로 인공위성을 발사하였고, 30년 동안 지속적으로 위성의 회수 및 5톤 이상 중형 위성의 발사와 통제를 실현하여, 위성 기술은 세계적으로 많은 나라를 앞서나가고 있으며, 2008년 9월에는 신주(神舟) 7호 유인 우주선의 지구 귀항을 성공시켰다.
생물공학 방면에서, 중국은 1965년 세계 최초로 소인슐린을 인공 합성하고, 70년대 후반 유전자공학 연구를 개시하여 B형 간염 예방치료에서 획기적인 효과를 보았다. 식물 조직 배양에서 중국은 세계적으로 효과가 가장 좋은 농작물 즉 멥쌀형 잡종강세수도를 발명하여 중국의 양식 생산량을 제고시켰다.
셋째로, 중국은 기초과학연구 분야에서 점진적인 발전을 꾀하며, 생물학 방면에서 최초의 소인슐린 인공 합성 이후 유전공학 방법을 이용하여 세균 중에서 인슐린을 제조하고 추출 효율을 크게 높였다. 1982년 중국은 인체 인터페론을 제조하여 세계적 선진 수준에 도달하였다.
물리학 방면에서, 중국은 초전도 온도를 제고하고 초전도 부속품을 연구함으로써 국제적 수준으로 진보하였다. 티타늄과 희토의 개발·연구, 광섬유 통신 설비의 연구·제작, 지진 예보, 암 진단과 예방, 복사 육종 등 방면에서 중국은 또한 세계적 선진 수준에 근접하고 있다.
넷째로, 의학의 과학기술 분야에서 중의학과 한방약의 발전이 현저하다. 중의학과 한방약은 중국 전통의 의약과학이다. 중의학의 기초이론 방면에서, 중국은 현대 과학기술 수단을 이용하여 경락(經絡)을 연구하고 이미 객관적으로 경락의 노선들을 밝혀냈다. 중국의 침구·침술 마취·침술 진통 등 연구는 침구 의학의 세계적 발전을 더욱 촉진하였다.
한방약의 연구 방면에서, 전국적인 한방약 자원의 일제 조사는 한방약 자원의 분포와 매장량에 대한 신뢰할 만한 통계수치를 제공하였다. 한방약재 품종의 정리 연구는 국가 표준의 제정을 위해 과학적 근거를 제공하였다. 천연 약물과 전통 약물의 연구 방면에서, 1980년대 이미 현저한 성적을 이루고, 그 중 결핍 약재에 대한 연구와 배양은 장족의 진보를 가져왔다. 1996년 천진(天津)이 생산한 ‘단삼적환(丹參滴丸)’은 미국 FDA의 허가를 받아, 한방약이 세계 시장으로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종합적으로 볼 때, 1949년 이후 중국의 과학기술은 일정 부분에서 성과를 달성하였으나, 중국 공업기술의 총체적 수준은 여전히 서방 선진국보다 낙후되어 있고, 고급 신기술의 발전은 설비와 기술의 도입에 대부분 의지하고 있으며, 일부 영역과 항목은 외국 선진국과의 수준에서 아직도 차이가 나고 있다.
우리와 의 관계
역사적 관계
선사시대부터 중국 대륙과의 관련이 깊었으며, 특히 위만(衛滿)의 침입과 한무제(漢武帝)의 침입으로 중국과의 접촉이 많아지고,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樂浪郡)에는 중국식 문화가 이식되었다. 중국인들은 고조선의 여러 종족을 포함하여 중국의 동쪽에 있던 민족을 동이(東夷)라고 불렀는데, 중국 선진(先秦)의 문헌에 동이와의 관계에 대한 많은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조선의 여러 민족도 일찍부터 중국과 접촉하고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또한 고대의 중국인은 동이에 대하여 다른 이민족보다 문화의 수준이 높다고 생각하여 친근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리하여 공자도 『논어(論語)』에서 “동이가 있는 곳에 살겠다(欲居九夷)”고 하였고, 『맹자(孟子)』에서는 중국의 전설적인 현군 순(舜)도 동이의 사람이라고 하였다.
조선(朝鮮)이라는 이름이 중국의 기록에 처음 보이는 것은 전국시대(기원전 475∼기원전 221)에 이루어진 『전국책(戰國策)』·『관자(管子)』 등에서 이며, 이들 기록에 따르면 조선은 전국시대 연(燕)나라의 동쪽에 있고, 호랑이와 표범의 가죽을 산출하여 중국에서 그것을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
기원전 11세기 말 중국의 은나라가 망한 뒤 주나라의 무왕(武王)이 은나라 왕실의 친척인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했다고 하여 기자조선이라고 한다. 그런데 기자가 봉해졌다는 최초의 기록은 전한(前漢) 때의 문헌인 『상서대전(尙書大傳)』과 『사기(史記)』에 보이는 것으로, 이것은 은나라가 망하고 800여 년이 지난 뒤의 기록이며, ‘조선’이라는 명칭도 은나라가 망한 뒤 적어도 600년 이후의 기록에 보이기 때문에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것은 후대에 조작된 전설일 가능성이 많다.
전한 초기에 한의 제후국인 연나라 사람 위만이 조선에 와서 기자조선을 멸망시키고 기원전 194년에 위만조선을 세웠다. 그가 멸망시킨 나라가 기자조선이라는 것은 믿기 어려우나 새로 나라를 세운 것은 사실이며, 위만이 조선에 올 때 상투를 틀고 있었기 때문에 그도 동이 계통의 사람일 것이라는 설이 있다.
위만조선은 80여 년 간 계속되다가 한무제의 침입으로 멸망하였으며, 한무제는 이곳에 4군(郡)을 설치하였다. 조선 땅에 두었던 4군은 조선의 세력에 굴복하여 설치된 지 20여 년 만에 4군 중 2군이 폐지되고, 현도군(玄菟郡)은 쫓겨서 서북으로 옮겨갔으며, 한반도 안에는 겨우 낙랑군만이 그 서북쪽에 남았으나 4세기 초에 모두 소멸되고 말았다.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이 고대국가로 발전한 시기는 중국 대륙에서 후한 이후 삼국(三國)·남북조(南北朝)의 분열기를 거쳐 통일제국인 수·당에 이르는 시기에 해당한다. 고구려는 이미 기원전 1세기에 국력이 성장하여 중국을 자주 괴롭혔다. 그러나 부여는 중국과 대체로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다.
부여는 삼국보다 일찍이 국가의 체제를 정비하고 중국과 접하고 있어서 기원전 1세기의 기록인 『사기(史記)』에 그 이름이 보이며, 49년에는 부여 왕이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에게 사신을 보낸 일이 있다. 또한 111년과 167년 부여 왕은 낙랑군과 현도군을 공격한 일도 있다. 하지만 중국과는 대체로 우호적이었고, 122년고구려가 현도성을 포위했을 때는 원병으로 이를 구원하기도 하였다. 200년경 부여의 위구태(尉仇台)는 공손탁(公孫度)과 혼인관계를 맺고, 244년과 245년위나라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칠 때 위나라 군사를 환영하고 군량을 공급하였다. 그러나 3세기 말에는 서쪽으로부터 선비족(鮮卑族) 출신 모용씨(慕容氏)의 침략을 받고, 이어서 남으로는 고구려의 침략을 받아 4세기 말에는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5세기에 한반도 및 요동·만주지역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고, 삼국의 주도적 위치를 유지하고 있던 고구려는 6세기 후반에 들면서 중국 대륙을 통일한 수나라와 충돌하게 되었다.
일찍이 고구려의 장수왕은 당시 중국이 남북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을 이용하여 북조의 북위(北魏)·동위(東魏)·북제(北齊)·북주(北周) 등과 차례로 통교하는 한편, 바다를 통해 남조의 동진(東晉)·송·제(齊)·양(梁)·진(陳) 등에도 사신을 보내어 친선을 도모함으로써 중국 세력을 견제하고 북방으로부터의 위협을 예방하였다.
그러나 수나라가 남북조를 통일하고(589년),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뒤 수나라와 직접적인 외교관계를 맺음으로써 고구려와 중국 사이의 우호관계는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하였다.
한편 4세기 후반에 그 세력이 커져 남조의 동진과 우호적인 관계를 통하여 북의 고구려를 견제하던 백제는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표면상 친화를 유지하면서 내용적으로는 이를 경계하고 왜(倭)와 연결하려 하였다. 이와 같이 고구려와 백제의 세력이 수나라에 대항하여 연결되는 반면, 신라는 오히려 수나라에 접근하였다. 그리하여 수나라와 그 뒤를 이은 당나라의 여러 차례에 걸친 고구려 침입이 시작되었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입하기에 앞서 고구려는 598년(영양왕 9)에 말갈의 군사를 동원하여 요서(遼西)지방을 공격하였다. 이에 수나라 문제(文帝)는 30만의 대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큰 타격을 입고 철수하였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번번이 실패하여 마침내 이로 말미암아 수나라는 망하고 당나라가 일어났다.
당나라 고조(高祖) 때는 고구려와의 화친을 꾀하여 서로 사신을 파견하고 포로를 교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뒤를 이은 태종(太宗)은 세계 제국을 건설하려는 야심으로 주위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고, 고구려에도 압력을 가하였다. 이에 대비하여 고구려는 16년간에 걸쳐 요동(遼東)지방에 1,000리에 이르는 장성(長城)을 쌓았다. 644년 드디어 태종은 오랜 준비 끝에 요동에 침략군을 보낸 후 이듬해에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여 요동성을 함락시켰으나, 50만 대군으로 2개월이 지나도록 작은 산성인 안시성(安市城)을 굴복시키지 못한 채 결국 철군하고 말았다. 2년 뒤 태종은 다시 고구려를 침입할 계획이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장기전을 택하기로 하였다.
그 뒤 당나라 고종(高宗)은 거듭 고구려를 공격하다가, 663년 드디어 신라와 연합해서 백제를 멸망시키고, 이어서 668년에는 고구려도 멸망시켰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고구려의 옛 땅에 9도독부(都督府)를 두었으며, 또 평양에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었는데, 그것은 고구려의 옛 땅뿐만 아니라 백제의 땅과 신라까지 그 지배하에 두기 위한 것이었다. 고구려가 망한 직후부터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는 고구려의 옛 땅을 지배하기 위한 분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신라는 그것을 용인하지 않아 고구려가 망한 지 8년이 지난 676년에 당나라 군사를 한강 유역에서 몰아내고 대동강 이남지역을 경계로 하는 한반도의 통일을 이루었다.
삼국시대 한·중 간의 문화관계를 보면,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한자문화(漢字文化)가 계속하여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한자 및 유교 문화의 보급은 삼국의 가족제도와 국가체제에 있어 유교적 이념과 제도 그리고 교육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와 함께 중국에서 전래된 불교는 토속신앙과 결부되어 호국신앙으로서의 기능이 매우 컸으며, 불교미술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문화는 우리 문화의 유산 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고대의 중국은 이민족의 내왕과 문물교류에서 개방적이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많은 승려와 학자가 중국에 가서 불교와 유학을 배우고 그 경전을 가져왔으며, 최치원(崔致遠)과 같이 그곳에 가서 수학한 후 과거에 합격하고 문필로 활약한 인물도 많았다. 또 중국의 산둥반도와 그 밖의 지역에는 신라인의 거류지인 신라방(新羅坊)이 있었고, 그들 거류민은 오늘날의 치외법권과 같은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진·한의 통일 이후 중국의 이민족에 대한 조공관계(朝貢關係)는 서서히 제도화되어, 처음의 삼국 대 중국 관계는 정식 조공이 아니라 입조(入朝)에 불과하던 것이 남북조시대에 이르러 정기적인 조공관계가 성립되었으며, 오랜 세월을 거쳐 명·청시대에 완비되었다.
고려가 건국했을 때 중국은 오대(五代)의 혼란기였다. 당나라가 망한(907년) 뒤 후량(後梁)이 섰으나 그 또한 얼마 되지 않아 망하고(923), 이어서 후당(後唐)·후진(後晋)·후한(後漢)·후주(後周) 등 모두 5왕조가 차례로 교체되었으며, 주변 지역에서도 10국이 흥망을 거듭하는 혼란기가 계속되고 있었다. 이들 여러 나라와 고려는 유교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문물의 교류와 조공을 통한 우호적 접촉을 유지해 갔다. 고려는 정치적 지원이나 물자의 교역 및 선진 문화의 수입 등을 목적으로 5대 제국(諸國)과 교섭을 계속하였으며, 5대 제국은 고려로부터 전적(典籍)을 얻어 가는 등 문물 교류를 통하여 이익을 보는 면이 많았다.
이러한 관계는 후주를 이은 송나라와의 교섭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때는 북방의 거란족·여진족·몽고족이 차례로 일어나 큰 세력을 형성함으로써 그 관계는 앞에서 지적했듯이 매우 어렵고도 복잡하였다. 송나라와 고려 간에 국교가 처음 열린 것은 962년(광종 13)이었다. 두 나라는 오랫동안 친선관계를 유지하였다. 고려는 송에 대하여 친선외교를 폄으로써 중간에 끼어 있는 거란족이나 여진족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의도와 함께 송의 선진 문화를 수입하려 하였다. 이에 비하여 송나라는 개국 이래로 문치주의를 채택한 결과 국방력이 극히 약화되어 동북으로부터 강대한 거란족과 여진족의 침략을 연이어 받고 있었으므로 고려를 통하여 그들의 압력을 배후에서 견제하려는 정치적·군사적 목적에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이처럼 두 나라는 서로 처지를 달리했지만 우호적인 관계는 끝까지 유지되었으며, 공식적인 조공관계나 비공식적인 접촉을 통한 문물 교류는 자못 성하였다.
거란족의 요나라는 발해를 멸망시킨 나라로 고려 초부터 고려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거란족은 3차(993년·1010년·1018년)에 걸쳐 고려를 침입했으나 서희(徐熙)의 담판과 강감찬(姜邯贊)의 구주대첩으로 실패하였다. 여러 차례의 침입에서 요나라는 번번이 대패했고, 고려 또한 오랜 전란에 지쳤으므로 두 나라는 서로 화평을 바라게 되어 1019년(현종 10)에 두 나라 간에 화약이 성립되었으며, 이후 두 나라 사이에는 대체적으로 평화관계가 유지되었다.
여진족은 본래 고려에 순종하여 투화(投化)하거나 조공을 바치다가 10세기 이후 그들의 세력이 커짐에 따라 고려의 북방을 침범하게 되었다. 이에 1107년(예종 2)에는 윤관(尹瓘)이 17만의 대군으로 그들을 토벌하고 9성(城)을 쌓았으며, 2년 뒤 여진족이 배반하지 않고 조공을 바치겠다는 청을 받아들여 9성에서 철수하였다. 1115년 여진족은 금(金)나라를 건국한 뒤 고려에 대하여 형제의 나라로 국교를 맺을 것을 청하였으며, 1125년(인종 3)요나라를 멸망시킨 뒤 금나라에 간 고려의 사신이 칭신(稱臣)하지 않는다 하여 고려의 국서를 받지 않았다. 이듬해 봄에 당시 고려 조정의 실권자 이자겸(李資謙)은 중의의 반대를 물리치고 금에 사신을 보내어 사대(事大)의 예를 취하기로 하였다. 그 뒤 고려 조정에서는 북벌론이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하고, 두 나라 관계는 그 후 약 1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금나라의 국력이 쇠퇴해 가는 13세기 초 몽고족이 대륙의 북방에 흥기하여 급격하게 세력을 떨치기 시작했는데, 같은 시기에 만주 방면에서는 거란족의 후예가 다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 거란족은 1216년(고종 3) 9만의 병력으로 압록강을 건너 고려에 침입한 일이 있으며, 거란족의 유적(流賊: 떠돌아다니며 노략질을 하는 도적)들의 침입이 빈번하였다. 이에 몽고족의 칭기즈칸(成吉思汗)은 1219년고려에 원군을 보내어 거란족의 유적을 무찔렀다. 그러나 그 뒤 몽고족은 고려에 많은 공물을 요구했는데, 고려는 이에 응하지 않고 몽고족의 사신을 냉대하였다. 그러다가 1225년 몽고족 사신 저고여(著古與)가 압록강에서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남으로써 두 나라 관계가 더욱 악화되어 1231년에 제1차 몽고침입이 있었다. 불시에 침입을 당한 고려는 당시의 집권자 최우(崔瑀)의 주장으로 강화도로 천도하여 항전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그 뒤 30년 간에 걸친 몽고족의 여러 차례의 침입과 약탈로 인하여 1258년 고려 조정의 육지 귀환과 태자의 친조(親朝)를 조건으로 두 나라가 강화를 맺었다. 그리하여 약 30년에 걸친 침략과 항쟁이 끝나고 두 나라의 관계는 다소 원만해졌다.
그러나 고려에 대한 원의 간섭과 영향력은 고려의 왕실·정치제도·습속 등에 크게 작용하였다. 두 왕실의 통혼으로 고려의 왕이 원의 공주나 종실(宗室: 왕의 친족)의 딸과 혼인하여 고려는 원의 부마국(駙馬國)이 되었으며, 고려의 관제나 칭호가 원의 제도와 상등한 것은 변경하여 원과의 차이를 표시하였다. 또 호복(胡服)과 변발 등 몽고족의 생활풍습과 몽고어가 침투하였고, 경제적·인적 착취도 강화하여 무리한 공물과 공녀를 요구하였다. 문화관계에서는 원나라의 학문과 서예가 전래되었고, 성리학이 전래되어 조선 왕조의 이념이 되었다.
조선시대 중국과의 관계는 곧 명·청의 관계인데, 조선 초기 명과의 관계는 그다지 원만하지는 않았다. 고려와 조선의 왕조 교체에 대한 명의 소극적인 태도와 북방의 여진족에 대한 두 나라의 세력관계에 따라 두 나라 사이에 몇 가지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조선의 태조이성계(李成桂)가 즉위한 직후의 문제로 태조의 즉위를 명나라가 승인하는 문제, 공로(貢路)를 폐쇄한 문제, 표전문제(表箋問題), 통혼문제, 명제로부터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받는 문제 등은 사신 내왕과 교섭 결과로 몇 년 사이에 해결되었으나, 여진문제와 세공문제, 그리고 화자(火者)와 처녀의 진헌(進獻)문제는 오랫동안 두 나라간의 현안(懸案)이 되었다.
이러한 현안들도 15세기에 접어들면서 두 나라 사이의 문물 교류가 성해짐에 따라 해결되어 조·명 관계는 원만해지고, 조선의 조정과 사대부 사이에는 점차 사대(事大)·숭명(崇明)의 경향이 나타났으며,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명의 원조를 계기로 그러한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이와 같은 조·명 간의 평화적인 관계는 북방의 여진족이 다시 흥기하여 1616년(광해군 8)누르하치(奴兒哈赤)가 후금(後金)을 건국함으로써 위협을 받게 되었다.
태조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태종(太宗)은 호전적이어서 1627년(인조 5) 봄 조선에 침입하여 정묘호란을 일으켰으며, 1636년 국호를 청(淸)이라고 고친 뒤 그 해 겨울 그들의 요구에 미온적이었던 조선을 침입하여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청군의 급격한 진격으로 왕자 등은 강화로 피난하고 인조와 세자는 황급하게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하였으나, 이듬해 정월에 한강변의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적인 화약을 맺었다.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끊고 청과 사대의 관계를 맺어 조·명 간의 옛 관습에 따라 정기적으로 사신을 보냈으며, 또 막대한 양의 세공을 바쳤다. 이러한 사행을 통하여 연경(燕京)에 가는 사신들은 중국 문물을 접하고 서적을 구입하였으며, 나아가서는 중국을 통하여 서양의 학술과 문물에도 접할 수 있었다. 특히, 청대 학술의 전성기인 고종(高宗)의 건륭시대는 조선의 영조와 정조에 걸친 시기에 해당되며, 이 시기의 학문 발달에 미친 청대 학술의 영향은 매우 컸다. 종교에서 천주교가 조선에 들어온 것도 중국을 통해서였다.
19세기 말 일본은 운양호사건(雲揚號事件)을 계기로 강화도조약을 맺어 그들의 조선에 대한 야심을 드러냈다. 한편 러시아가 극동에서 남하정책을 꾀하고 있었으므로 청은 조선에 권고하여 ‘조미수호조약(朝美修好條約)’을 맺게 함으로써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켰다. 1882년에는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의 간섭이 심해져 흥선대원군을 납치했으며, 군대를 훈련시켜 갑신정변을 진압하는 데도 큰 몫을 해냈다. 이러한 간섭은 조선의 불만을 야기시켜 친러정책을 취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뒤 1894년부터 1895년에 걸친 청일전쟁의 패배 결과 청은 조선에서 손을 떼고, 아울러 과거의 관계도 청산되어 조선은 형식상 독립국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청을 대신하여 제국주의 일본이 조선 침략의 야욕을 구체화하게 되었다. 따라서 애국지사들은 중국 본토와 만주 등지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이에 대하여 중국인들은 상당히 동정적이었다.
1912년 신해혁명의 결과로 중화민국이 수립되고 손문(孫文, Sun Wen)이 초대 임시총통에 취임하자, 한국 독립운동을 이끌던 애국지사들은 손문을 만나 한국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도록 요청하였으며, 손문도 깊은 관심과 동정을 표하였다. 또한, 1918년 11월 전후문제를 설명하고자 중국에 온 미국윌슨(Wilson, T. W.) 대통령의 특사 크레인(Crane, C. R.)과 만나 우리 대표의 파리강화회의 참석을 요구하는 자리를 마련한 것도 파리강화회의 중국측 대표였던 왕정연(王正延)과 육징상(陸徵祥)이었다. 이처럼 한국 독립운동은 중국인들, 특히 손문 중심의 광동군 정부(廣東軍政府) 관련 인물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1919년 상해에 한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중국 혁명지도자들과 한국 독립운동은 더욱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특히 5·4운동을 계기로 조중항일연석회의(朝中抗日聯席會議)를 소집하고 중국측은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한다고 성명하였다. 한국의 임시정부는 1921년 9월에 의정원(議政院)의 결의로 신규식(申圭植)을 전권사절로 임명하여 중국광주(廣州)의 광동호법정부(廣東護法政府)에 보냈다. 당시 비록 국제적으로 승인받지는 못했던 광동호법정부이었지만, 이 중국 정부는 한국 임시정부를 처음으로 승인하였다. 1925년 광동호법정부는 손문이 죽은 뒤 국민정부(國民政府)로 개조되어 북벌을 시작하였는데, 한국의 애국지사들도 참가하였다.
중국국민당의 좌우파 분열로 국민정부도 분열되자 한국 독립운동도 그 영향을 받아 일부는 중국공산당에 개별적으로 참여하였다. 또 1927년에는 조봉암(曺奉岩)·여운형(呂運亨)·홍남표(洪南杓) 등이 중국공산당 한인 지부를 결성하여 한국독립운동자동맹을 중국공산당에 조직적으로 결부시켰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에서는 전국적으로 반일 감정이 확대되었고, 이와 함께 1932년상해의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윤봉길(尹奉吉)의 의거가 일어남으로써 한국 독립운동은 중국의 정당·군·민간단체와 관련된 인사들로부터 적극적인 지원을 받게 되었다. 만주지역에서는 중국 의용군왕덕림(王德林)·마점산(馬占山) 등이 조선독립군과 연합하여 한중항일연군(韓中抗日聯軍)을 조직하여, 일본 관동군(關東軍)에 대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1937년에는 7·7사변으로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또한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져 국민정부가 전면 항일전으로 나가게 되었다. 따라서 중국의 한국 독립운동 지원은 바로 그들의 항일전과 같은 것이어서, 어떠한 제한도 고려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지원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김구(金九)·김약산(金若山)의 두 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김구는 남경(南京)에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光復陣線 혹은 光線으로 약칭)를 결성하였으며, 김약산 중심의 좌파단체들은 조선민족혁명당·조선민족해방운동자동맹·조선혁명자연맹의 세 단체를 소집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 약칭 民線)을 성립시킨 뒤 연맹의 투쟁 강령인 중국항일전쟁에의 참가에 따라 조선의용대를 조직하고 중국의 항일전에 참여하여 크게 기여하였다.
이처럼 한인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고 필요하게 되자 국민정부는 1939년김구와 김약산에게 좌우 양파인 ‘민선’과 ‘광선’을 연합하여 항일복국(抗日復國)을 결성하도록 권고하였다. 또한 1940년 9월한국 임시정부 안의 우익 3당(한독당·국민당·조선혁명당)의 요구 아래 한국광복군이 창설됨으로써 조선의용대를 한국광복군으로 개편하여 군사위원회에 예속시켰다.
그러나 그 뒤 한국광복군은 한국 임시정부에 예속되어 임시정부의 주권이 크게 향상되었다. 직접 미군 사령부에 요구하여 그들의 연락조를 한국광복군에 파견시켜 주도록 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했으며, 심지어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승만(李承晩)도 중국에 있는 한국광복군을 바탕으로 교섭하였다. 한편 중국공산당의 지원 아래 있던 연안파(延安派)는 별도로 조선의용군을 조직했는데, 그 배후에는 중국공산당과 8로군(八路軍)이 있었으며, 그들과 함께 항일전에서 활동을 전개하여 그 세력이 확충되었다. 이와 같이, 중국에서의 한국 독립운동은 중국의 항일운동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전개되었다.
일본의 투항이 너무 빨리 이루어지고, 종전 후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던 미국 점령군 사령관 하지(Hodge, J. R.)가 한국광복군은 해산하고 귀국해야 한다는 규정에 따르도록 요구하여 한국광복군은 해산된 채 귀국했으며, 조선의용군도 개인 자격으로 귀국함으로써 건국 이후의 국군으로 전환할 수 있는 기회를 잃고 말았다.
현대적 관계
중국과 북한
중국과 북한의 외교 수립은 1949년 10월에 이루어졌으며, 1950년 10월중국은 19개 군 57개 사단의 약 85만 명을 6·25전쟁에 참전시켰다. 중국의 6·25전쟁 참전 명분은 자신의 안전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脣亡齒寒 保家衛國) 자기 안전 확보에 두었으나, 당시 소련에 대한 중국의 의존성과 중국에 대한 소련의 절대적 영향력, 6·25전쟁 참전을 자신의 정치권력 통합에 이용하려는 정치적 목적 및 참전을 통한 스탈린(Stalin, I. V.)의 신임 획득 등 복합 원인에 의해 이루어졌다. 중국의 6·25전쟁 참전과 1953년 7월의 비밀군사협정 체결을 통하여 중국과 북한의 관계는 혈맹관계로 발전하였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중국과 북한의 관계는 중소(中蘇)분쟁의 표면화, 중국의 문화혁명, 월남전 확대 등의 사건으로 인하여 상호 밀착과 소원관계가 반복되었으나, 기본적으로 두 나라의 관계는 긴밀하였다. 이는 당시 중국의 외교정책이 기본적으로 양대진영론(兩大陣營論)과 중간지대론(中間地帶論) 같은 진영론에 입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 북한의 대남전략에 대한 적극 지원 확약과 1971년 8월의 무상군사원조협약 체결 등 중국의 북한에 대한 정치·경제·군사 분야의 지원이 활발히 전개되었는데, 여기에는 1970년대 모택동(毛澤東, Mao Zedong)과 화국봉(華國鋒, Hua Guofeng)에 의해 추구되었던 적극적인 반소노선이 중국에 대한 북한의 전략적 지위를 크게 제고시켰기 때문이다.
1975년 4월 김일성(金日成)의 중국 방문 및 1978년 5월화국봉과 9월등소평(鄧小平, Deng Xiaoping)의 북한 방문 등 최고 지도자들의 상호 방문으로 중국과 북한의 관계는 더욱 강화 되었고, 특히 중국은 북한의 통일노선을 지지함과 동시에 주한 미군의 철수를 주장하였으며, 두 개의 한국정책을 반대하였다.
1978년 말중국공산당의 11기 3중전회 이후 개혁개방의 실용주의노선 적극적으로 추진되면서 중국의 대외정책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과거 중국 외교정책의 신축성을 크게 제한했던 양대진영론과 이데올로기에서 탈피하여, 다원화를 추구하는 독립 자주외교 노선을 채택함에 따라 한국에 대한 중국의 인식과 태도에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중국의 새로운 외교정책과 한국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과거 북한관계에 기초하여 형성되어 온 중국의 한반도정책에 점진적인 수정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1980년대 말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남북한 대화 및 관계 발전에 대한 중국의 적극적인 처지가 북한의 처지와 일치되지 않았는데, 이것은 중국의 한반도정책이 북한정책과 완전히 일치했던 과거의 일원화정책과는 달리 점차 이원화 현상으로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북한 통일문제와 관련하여 중국은 교차 승인이나 유엔 동시가입 문제는 한반도의 통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반대하면서, 중국의 통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시했던 ‘1국가 2체제(一國兩制)’방식에 의한 남북한 문제 해결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1950년대 혁명과 이념적 일치성을 기반으로 했던 북방 삼각 협력체제가 중소분쟁으로 붕괴되자, 북방 삼각관계는 북한을 중심으로 하는 이변적 관계(二邊的 關係)로 발전하였다. 중·소 관계의 개선은 북방 삼각관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나, 1950년대와 같은 삼각 협력체제로 발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과거 중·소 대립의 악화는 중·소의 북한에 대한 경쟁관계를 심화시킴으로써 북한에 대한 그들의 행동반경을 제약하고, 동시에 중·소에 대한 북한의 행동반경을 확대시켰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소련의 해체로 중·소 관계는 중·러 관계로 변화되어 한반도에 대한 중·러의 행동반경을 제고시키게 되었고, 이는 중국과 북한, 중국과 한국의 관계 발전에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중국과 한국
중국은 1949년 10월 대륙에 정권을 수립한 이후 양대진영론에 입각한 대소(對蘇) 일변도정책을 선포하고 반미(反美)를 외교의 기본 척도로 삼았기 때문에, 모든 친미(親美) 국가는 곧 적대 국가로 여겨 중국의 한반도정책은 중국의 북한정책에 의해 결정되었고, 한국과의 관계는 근원적으로 단절되었다. 따라서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중국과 북한과의 관계가 중소분쟁의 표면화, 문화혁명, 월남전 확대 등으로 밀착과 소원의 관계가 반복되면서도 중국의 한국 관계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1972년 12월 등소평이 정권을 장악하여 개혁개방을 선언한 이후 많은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기본 정책노선은 여러 측면에서 전개되어, 1973년한국은 공산권에 대한 문호개방을 위해 6·23선언을 발표하였다. 이에 한국도 중국 접근정책을 추진함에 따라, 1974년 1월 「한일대륙붕협정」 체결을 비롯하여 한·중 간 어로분쟁 등과 관련한 비난을 전개하는 등 한국의 실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중국의 북한에 대한 정치·경제·군사 분야의 지원이 활발히 전개되었으며, 두 나라 최고 지도자의 상호 방문으로 중국과 북한의 관계가 더욱 강화되던 시기로, 남북한에 대한 기본 정책의 변화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1978년 말 개혁개방의 실용주의노선과 독립 자주외교 노선을 채택함에 따라, 한국에 대한 중국의 인식과 태도에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82년 제12기 전국인민대표대회(全國人民代表大會)의 호요방(胡耀邦, Hu Yaobang)의 정치 보고에서 중국이 우호국이 될 수 없는 국가군(國家群)에서 한국이 제외된 것은 바로 중국의 한국관에 이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중국의 한국관 및 인식의 변화는 과거 금기시해 왔던 한국과의 관계에서 신축성과 현실주의적인 정책 추구를 가능하게 하였다.
1983년 5월 중국인에 의한 중국민항기 납치로 한국에 불시착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중국은 국제민항기구나 일본 등 제3국을 통한 간접적인 해결방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급속히 중국 당국의 관계자를 파견하여 우리나라 관계자와 직접 사태 수습을 위한 교섭을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두 나라간의 교섭 결과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중국 정권 성립 후 처음으로 접촉을 갖게 되었다. 이때 ‘대한민국’이라는 정식 국호가 중국 당국자에 의해 처음으로 호칭되고 문서화되었다. 이것은 중국의 기존 한국정책에 중대한 변화를 의미함과 동시에 한·중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전환점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이 사건을 전후하여 중국은 간접 교역과 직접적인 인적·체육 교류의 확대 등 비정치적인 영역에서 한국과의 관계 개선에 보다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1979년부터 홍콩·일본 등 제3국을 통한 간접 교역이 시작된 이래 두 나라 사이의 교역은 크게 확대되어 왔다. 특히 이러한 간접 교역은 앞으로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서 직접 교역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다지는 역할을 하였으며, 더욱 발전할 수 있는 여건들이 점차 성숙되어 가고 있었다.
물질 유인·경쟁 개념과 시장경제이론 같은 자본주의 경제방식의 적극 도입, 지방과 기업의 자주권 확대, 민법통칙과 기타 경제법규 등을 비롯한 경제체제에 대한 적극적 개혁·개방정책은 중국 경제체제와 다른 이질적 체제의 서방이 중국 진출에 유리한 환경요인을 형성했을 뿐만 아니라, 외교관계가 없던 1991년까지 한국의 중국 경제 진출에도 유리하게 작용해 나가고 있었다.
특히 중국측은 한국 기업과의 접촉을 통하여 한국 기업의 중국 투자문제를 거론하고, 중국 내 자원개발과 건설사업의 참여에 대한 관심을 보여 왔다. 이에 따라 한국과 중국의 경제협력관계는 더욱 발전함과 동시에, 1992년 8월 외교관계를 수립함에 따라, 지금까지 추진되어 온 일련의 중국 경제 진출이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인적 교류면에서 1983년 7월 친인척 간의 상호 방문이 허용된 이래, 한국과 중국 간에는 이산가족들의 초청 방문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또 중국에서 개최되는 국제회의에 한국 관리의 입국이 허용됨으로써 한국인의 중국 방문이 확대되어 갔으며, 중국인들의 한국 방문도 점차 증대되었다.
특히 다른 어느 영역보다도 체육 교류가 활발히 전개되어 1979년 6월항주(杭州, Hangzhou)에서 개최된 세계배드민턴대회의 초청장을 보내는 등, 1970년대 말부터 적극적인 접근 자세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 뒤 1984년에 곤명(昆明, Kunming)에서 있었던 데이비스동부예선 테니스대회에 한국 대표단이 참석한 이후, 1984년 4월 광주(廣州, Guangzhou)의 제11회 아시아축구연맹총회, 10월 상해의 제10회 아시아여자농구선수권대회 및 1985년 4월 항주 제
17회 아시아역도선수권대회 등에 한국 대표단이 참석하였으며, 중국측은 1984년 4월 제8회 아시아청소년농구선수권대회와 제2회 아시아수영선수권대회에 참석한 것을 비롯하여 한국에서 개최되는 각종 대회에 적극 참여하였다. 또한 중국은 1984년 9월 제3차 아시아올림픽위원회 총회에 공식 대표단을 파견하였으며, 특히 1986년 제10회 서울아시아경기대회에 대규모 대표단을 파견함으로써 한국과 중국의 관계 발전에 중요한 전환점을 형성하였다. 그 뒤 19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경기대회에도 중국은 750명의 대규모 대표단을 파견하였으며, 1990년 북경에서 개최되는 제11회 북경아시아경기대회에는 한국 대표단이 참가하였다.
결국 1992년 8월 정식 국교가 수립됨에 따라 체육 교류도 더욱 활발해지면서 모든 구기종목이 교차로 두 나라를 오가며 정기적으로 개최되는 사례가 늘어나게 되었다. 한편, 두 나라 인적 교류도 1987년에는 1,800명에 불과하던 것이 1988년에는 1만 명에 이르고, 1989년에는 약 2만 3천 명이 상호 방문함으로써 2년 만에 10배 이상의 상호 방문이 이루어졌고, 중국에 대한 투자도 꾸준한 급신장세를 보여 2015년에는 수출 1,371억 4000만 달러와 수입 902억 4000만 달러에 이르는 급성장을 보였다.
특히 1990년 10월 20일 두 나라 간에 일부 영사 기능을 포함하는 무역대표부 설치를 합의함으로써 두 나라 관계 발전에 새로운 이정표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간접 교역과 인적·체육 교류의 확대 등 관계 개선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중국 간의 공식적이고 정치적인 영역에서의 관계 발전에는 1991년까지 엄격한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중국이 북한과의 기존 우호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얻고 있는 이익을 상쇄할 만한 중요한 이익이 한·중 간에 나타나지 않았던 정치적 역학관계는 두 나라 우호관계 증진 발전에 어려움을 가져왔고,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은 계속 두 나라 관계 발전의 주요 저해요인으로 작용하였다.
1978년 말 등소평의 등장에 따른 개방개혁정책을 선언한 중국의 새로운 대외정책과 1980년대 초부터 한국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과거 북한관계에 기초하여 형성되어 온 중국의 한반도정책에 수정을 가하게 하였다. 그리고 1980년대 말부터 해체되기 시작한 소련에서 러시아로의 변혁은 중·소 관계의 냉전체제 해소로 중국의 외교정책에 폭을 넓혀 주었다고 생각된다.
소련의 해체로 미국이 소련 관계에서 중국 관계로 중심축을 옮기게 되자 중국의 미국정책도 차츰 그 힘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입장은 1989년 천안문사태 이후 잠시 주춤하기는 했지만, 미국의 중국정책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중국이 택한 중국식의 개방과 중국의 독자노선을 미국이 상당 부분 인정하고 있다는 반증이며, 이를 바탕으로 한 중국은 한반도정책에서도 북한정책과 완전히 일치했던 과거의 일원화정책을 탈피하여 점차 다원화정책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다 경제적 실용노선을 추구하기 시작한 중국은 한국의 경제 발전이라는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변화는 드디어 1992년 8월 24일 양국의 국교정상화로 나타났고, 중국의 대외개방과 현대화정책 추진으로 양국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지고 경제교류는 급성장하게 되었다.
한·중 양국은 1992년 8월 수교 후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급속한 관계발전을 이룩하고 있다. 특히 양국은 함께 경제·통상 등 실질 협력관계를 증진시킴으로써, 각 방면에서의 관계가 전반적으로 양국의 이익에 부합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중국은 그간의 한·중 관계 발전에 따라 한국과의 협력을 더욱 중시하고 있으며, 개혁개방정책을 원만히 추진하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이 긴요한 만큼 4자회담을 거쳐 6자회담 참여 등을 통해 건설적인 역할을 다하겠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우리로서도 중국과의 대화와 협력을 강화해 나가고 있다.
한편, 한·중 양국 관계는 수교이후 경제분야 위주의 실질 우호 협력 증진에 중점을 두고 발전해 왔으나, 1998년도에는 정무분야를 포함한 포괄적 협력의 확대 기반을 마련한 중요한 해였다. 양국은 한반도 평화와 안정 유지 및 역내 경제·안보 분야 협력을 위해 4자회담은 물론 UN과 APEC 및 ASEM 등 국제무대에서의 협력관계를 강화해왔으며, 특히 1998년 11월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국빈 방중 때에는 ‘21세기의 한·중 협력동반자관계’ 구축을 규정한 「한·중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형사사법공조조약, 복수사증협정, 청소년 교류 양해각서, 철도분야 교류협력약정 등에 서명함으로써, 정치·경제·문화 등 제반 분야에서 포괄적인 협력기반을 마련하였다.
1998년에는 양국간 정부 고위인사 교류도 활성화되어, 11월김대중 대통령과 강택민(江澤民, Jiang Zemin) 중국 국가주석의 정상회담 및 4월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제2차 ASEM 정상회의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주용기(朱鎔基, Zhu Rongji) 중국 국무원 총리의 회담 등 정상급 교류는 물론, 7월 외교통상부장관 공식 방중 등 4차례의 한·중 외무장관회담(4월 ASEM 외무장관회의, 9월 UN 총회, 11월 대통령 국빈 방중)이 개최되었다. 양국 정부 간 관련부처에서도 상호 고위인사 교류가 활발히 전개되어 감사원장과 정보통신부장관과 문화관광부장관 등의 방중 및 중국 대외무역합작부 부부장 등의 방한이 있었다. 양국 의회 및 정당 간 교류도 활성화되어, 2월 김종필(金鍾泌) 자민련 명예총재, 5월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대표단, 11월 김용환(金龍煥) 의원 등 자민련 대표단, 12월 양성철 의원 등 새정치국민회의 대표단 등이 방중하였고, 3월 이성인(李成仁, Li Chengren) 공산당 대외연락부 부부장, 호금도(胡錦濤, Hu Jintao) 국가부주석 겸 공산당 중앙위 정치국 상무위원 등이 방한하였다. 한·중 간의 정책협의회도 빈번히 개최되어, 양국 간의 주요 현안들에 있어서 상호 입장 차이를 좁히는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된다.
서해에서의 어업 질서의 조속한 확립을 위한 양국 간 어업회담이 타결되어 한·중 어업협정이 11월 가서명되었고, 배타적 경제수역(Exclusive Economic Zone: EEZ) 경계획정회담도 열렸다. 그 외에 한·중 외교부 정책기획협의회와 영사국장회의, 문화공동위원회 등이 개최되었으며, 특히 중국이 해외여행 자유화 대상지역에 한국을 포함시키는 조치가 있었다.
또한 1998년도 대중국 교역액은 184억 달러(수출 119억 달러, 수입 65억 달러)로 양국은 상호 각각 3번째(미국, 일본 다음) 교역 대상국이 되었다. 대중국 투자 역시 활발히 진행되어서 실제 투자 기준으로 40억 달러에 달해 중국은 우리의 제2의(미국 다음) 투자대상국이 되었으며, 특히 건설부문에 있어서 중국은 우리의 최대 시장으로 부상하였다.
우리의 최대 무역 흑자 지역인 홍콩과의 실질관계도 주권반환 전과 다름없이 계속 증진되어, 한국·홍콩 간 1998년도 교역이 98억 달러(우리 무역 흑자 87억 달러)에 달하였으며, 인적 교류도 급증하여, 1998년에 35만명(홍콩 방문 12만 7천 명, 한국 방문 22만 4천 명)에 달했다. 이로써 홍콩을 포함한 중국이 우리의 최대 무역 흑자 국가로 급부상하였다.
한·중 간에 자동차, 고화질 텔레비젼, 전자교환기 분야 등 산업분야 협력의 진일보 발전을 위한 일련의 교섭이 꾸준히 진행되었다. 1994년 6월 한·중 환경협력공동위가 서울에서 개최된 이래 황해 오염 방지 및 산성비에 대처하기 위한 환경분야 협력도 강화해 나가고 있다. 이러한 협력 체제는 한·중 무역실무회의, 경제공동위원회·환경공동위원회 등 경제협력을 위한 각종 협의체제들이 정기화되면서 더욱 확대 심화되고 있다.
한편 각종 학술·예술 교류 등 문화 협력도 다양하게 전개되어 양국 국민 간의 상호 이해와 우의 증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1999년 9월 양국의 저명한 학자가 참가하는 제5차 한·중 미래포럼이 상해에서 개최되어 21세기에 한·중 관계의 바람직한 발전에 관해 심도 있는 논의를 하였으며, 11월에는 상해 사회과학원과 우리 외교안보연구원 간 세미나가 상해에서 개최되었다.
이러한 한·중 간 급속한 관계 발전에 힘입어 양국간 인적 교류도 급증하고 있다. 2015년도 한·중 인적 교류는 우리측 기준으로 1,042만 8000명(한국인 방중 444만 4천 명, 중국인 방한 598만 4천 명)이다다.
중국에는 1998년 말 1,500여 개의 업체가 진출해 있고, 3만 5천 명 이상의 교민이 장기체류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은 교민 보호 및 중국 진출 기업의 원활한 지원을 위한 총영사관 추가 개설 등 효율적인 공관 지원 체제의 정비가 필요하였다.
1992년 8월 24일 한·중 수교 이후, 양국의 우호협력관계는 여러 분야에서 신속한 발전을 이루었다. 정치적으로 양국 지도자의 평상적 상호 방문 혹은 국제 활동에서의 회견 등은 상호 이해와 신뢰를 증진시켰고 양국 관계의 발전을 추진시켰다. 경제적으로 양국의 호혜 협력은 계속 심화되고 서로가 중요한 무역 동반자가 되었다. 문화·교육·과학기술 등 분야에서의 교류와 협력도 날로 활발해지고 있다.
먼저, 정치관계와 고위층 상호 방문에서 있어, 2000년 10월김대중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중국주용기 총리가 방한하여 회담을 진행하고, 양국은 한·중 관계를 전면적 협력의 새 단계로 높이기로 동의하였다. 2003년 7월 7일부터 10일까지 노무현 대통령이 호금도 국가주석의 초청으로 중국을 공식 방문하여, 양국은 한·중 전면적 협력동반자관계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2008년 2월 25일 호금도 중국 국가주석의 특사로 국무원 위원 당가선(唐家璇, Tang Jiaxuan)이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였다. 당가선은 이명박 대통령과 만나 호금도 국가주석의 전언을 전달하고, 중국 정부가 한국 관계를 중시하며 한·중 관계 발전의 전면적 추진을 희망한다고 표명하였다.
2008년 5월 12일 중국 사천성(四川省)에서 대지진이 발생하자, 한국 정부는 중국에게 500만 달러의 원조를 제공하고 구조대를 파견하였다. 이명박 대통령은 방중 기간 사천성 재난지역을 직접 방문하여 위문하였다.
2008년 5월 27일부터 30일까지 이명박 대통령은 중국을 공식 방문하여 호금도 당시 중국 국가주석과 회담하고, 국무원 총리 온가보(溫家寶, Wen Jiabao), 전국정협주석 가경림(賈慶林, Jia Qinglin)과 각각 회견하였다. 쌍방은 한·중 우호협력관계의 진일보 발전 및 공동 관심의 지역과 국제문제에 대해 깊은 의견을 교환하고, 「한·중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한·중 전면적 협력동반자관계’를 ‘한·중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로 제고시키는 데 의견을 일치하였다.
2008년 8월 25일부터 26일까지 호금도 중국 국가주석은 한국을 공식 방문하여 이명박 대통령과 회담하고, 김형오 국회의장, 한승수 국무총리와 각각 회견하였다. 쌍방은 「한·중 공동 코뮈니케」를 발표하여, 한·중 관계는 양국에게 중요한 관계라고 인식을 같이 하고, 5월 양국이 발표한 「한·중 공동성명」의 기초 위에서 한·중 전략적 협력 동반자관계를 전면적으로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양국은 장기적인 공동 발전을 기본 목표로 삼아 상호 협력을 전방위적으로 확대 심화하고, 지역과 국제의 중요문제에서의 협조를 강화하며, 장기적 평화와 공동 번영의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인류의 발전과 진보를 위해 역량을 공헌하기로 선언하였다.
2008년 9월 6일부터 7일까지 한승수 국무총리는 중국을 방문하여 온가보 국무원 총리와 회견하였다. 중국은 한국과 환경보호·통신·금융·물류·에너지 등 분야에서의 협력을 강화하고, 한·중 자유무역지구 수립 절차를 추진하며, 산업 구조조정의 경험을 공유하여, 양국 경제가 지속 가능한 발전 중 호혜를 실현하기를 희망한다고 표명하였다.
2009년 4월 3일 이명박 대통령은 런던G20 제2차 금융 정상회의 기간에 호금도 국가주석과 회견하였다.
2009년 5월 25일 유명환 외무부 장관은 하노이 제9차 아시아·유럽 외무장관 회의 기간에 중국 외교부 장관 양길지(楊洁篪, Yang Jichi)와 회견하였다. 양국은 한·중 정치·경제·문화 등 각 분야에서의 양호한 교류 협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공동으로 노력하여 양국 관계의 지속적인 발전을 추진하기를 희망한다고 표명하였다. 양국은 최근의 정세 하에서 한반도 비핵화 절차를 지속적으로 견고히 추진하고, 한반도와 동북아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해야 한다고 인식을 같이 하였다.
둘째로, 경제 협력과 무역 관계에 있어, 국교가 정상화된 이후 과학·기술 협력 협정(1992년 10월), 무역 협정(1992년 10월), 경제·무역 및 기술 협력공동위 설립 협정(1992년 10월), 투자 보장 협정(1992년 12월), 해상 운송 협정(1993년 6월), 우편·전기통신 분야 협정(1993년 8월), 환경 협력 협정(1993년 11월), 문화 협정(1994년 4월), 산업협력위 설치 협정(1994년 6월), 한국기상청·중국기상국간 서울·북경간 기상통신회선 설치 협정(1994년 7월), 이중과세 방지 협정(1994년 9월), 항공 협정(1994년 10월), 원자력 협정(1995년 2월), 세관 협력 협정(1995년 4월) 등 양국 간 주요 협정이 단기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양국의 경제·무역 협력은 안정적이며 신속히 발전하였다.
중국 해관총서(海關總署, General Administration of Customs of the PRC)의 통계에 따르면, 2004년 한·중 무역액은 900억 7천 만 달러이고, 42.5% 성장하였다. 그 중 중국의 수출은 278억 2천 만 달러이고 수입은 622억 5천 만 달러로, 각각 성장은 38.4%와 44.3%이다. 2005년 양국 무역액은 1,119억 3천 만 달러에 달하고, 동기 대비 성장은 24.3%이다. 그 중 중국의 수출은 351억 달러이고, 동기 대비 성장은 26.2%이며, 수입은 768억 2천 만 달러이고 동기 대비 성장은 23.4%이다. 중국은 한국의 최대 무역 동반자이고 최대 수출 시장이며, 한국은 중국의 제3대 무역 동반자이다.
2005년 9월 말까지 한국의 대중 투자는 모두 37,532건이고, 실제 사용액은 295억 5천 만 달러이다. 그 중 2004년 한국의 실제 대중 투자는 62억 5천 만 달러로 39.2% 성장하고 한국 대외 투자 총액의 45.8%를 차지하며, 2005년 1월부터 9월까지 한국의 실제 대중 투자는 36억 1천 5백 만 달러이다. 중국은 한국의 최대 해외 투자 대상국이다.
2008년 한·중 무역액은 1,861억 1천 만 달러로 16.2% 성장하였다. 그 중 중국의 수출은 739억 5천 만 달러이고, 수입은 1,121억 6천 만 달러로, 각각 31%와 8% 성정하였다. 중국은 한국의 최대 무역 동반자이고 최대 수출 시장 겸 수입 공급자이며, 한국은 중국의 제3대 무역 동반자이다.
2008년 말까지 한국의 대중 투자 누계는 419억 달러로, 중국은 한국의 최대 해외 투자 대상국가이고, 한국은 중국의 제4대 외상 직접투자 공급국가이다.
끝으로, 한·중 양국은 과학기술·문화·교육·사법 분야와 지방정부 사이에서 모두 우호적인 교류와 협력관계를 수립하였다. 한국은 중국상해·청도(靑島)·광주(廣州)·심양(沈陽)·성도(成都)·홍콩에, 그리고 중국은 부산에 각각 총영사관을 설치하였다. 양국은 주요 도시 사이에 65개의 정기 여객기 항로를 개설하여 매주 375회 운행하고, 5개의 정기 화물기 항로를 개설하여 매주 13회 운행하고 있다. 한국 인천·부산은 중국천진(天津)·청도·대련(大連)·연대(烟臺)·위해(威海) 등지와 정기 여객선·화물선 항로를 개설하고 있다.
2015년 한·중 사이 인적 왕래는 연인원 1,042만 8천 명에 달하고, 그 중 한국인의 방중 연인원은 444만 4천 명이고, 중국 국민의 방한 연인원은 598만 4천 명이다. 2015년 말까지 한국의 재중 유학생은 약 80만 명으로 재중 외국 유학생 총수의 40%를 초과하며, 중국의 재한 유학생은 95만 명이다.
한·중 군사 교류는 점진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양국은 상대국 주재 대사관에 모두 무관을 파견하고 있다. 1998년 8월 중국인민해방군 부총참모장 웅광해(熊光楷, Xiong Guangjie)가 한국을 방문하였고, 1999년 8월 한국 국방부 장관 조성태가 중국을 방문하였다. 2000년 1월 중국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겸 국방부 장관 지호전(遲浩田, Chi Haotian)이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였다. 2001년 10월 한국 원양순항훈련편대가 중국을 방문하고, 12월 한국 국방부 장관 김동신이 방중하였다.
2002년 1월 한국 공군 참모총장 이억수가 방중하고, 2004년 10월 한국 해군 총참모장 문정일이 방중하였다.
양국은 문학·예술·체육·교육·위생·방송·영화·텔레비젼·신문·출판 등 분야에서도 신속한 교류를 발전시키고 있다.
양국 주요 도시 사이에는 47개 정기 여객기 항로가 있어 매주 830여 회가 운행되고, 10개 정기 화물기 항로가 있어 매주
47회가 운행되고 있다. 한국 인천·부산·평택은 중국천진·청도·대련·연대·위해·연운항(連雲港) 등지와 정기 여객선·화물선 항로가 있다.
양국은 모두 104 쌍의 우호 도시 관계를 맺고 있다. 양국의 우호 단체로는 한중우호협회·한중문화협회·21세기한중교류협회·한중경영인협회·한중친선협회와 중한우호협회 등이 있다. 양국 수도의 대사관 설치 이외에 한국은 중국상해·청도·광주·심양·성도·서안(西安)·홍콩에 그리고 중국은 한국 부산·광주에 각각 총영사관을 두고 있다.
한·중 양국은 역사적 연관성, 지정학적 근접성, 정치적 상관성, 문화적 유사성, 경제구조의 보완성 등 요인을 고려할 때, 21세기에도 양국 사이 우호와 협력 그리고 경쟁의 관계는 계속 진행되어 나갈 것이다. 특히 양국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유지가 동북아는 물론 세계의 평화와 안정 유지에도 긴요하다는 공통 인식을 견지하고 있어, 한반도 긴장 완화와 평화 정착을 위한 공동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다만 상이한 사회 체제에 따른 법과 제도 및 국민 간 인식의 차이에서 오는 문제점이 양국 관계의 진행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한·중 양국은 이들 문제를 원만히 극복해 나가기 위한 지속적인 상호 이해와 노력이 필요하다.
중국 안의 우리 문화
우리나라와 중국은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유일한 국가이기 때문에 특수하고 복잡미묘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첫째, 시대마다 국경선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국가 형성기에서부터 고구려시대까지 지금의 중국 동북지방 일대는 얼마간의 흥망성쇠가 있었지만 우리의 영토이었으며, 가장 많이 확장될 때는 중국 화북지방까지 넓혀진 적도 있다. 남북국시대인 발해 때도 다소 축소는 되었지만 역시 중국 동북지방은 우리의 영토가 분명한 우리의 옛 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뒤 우리 민족과 친연관계가 있는 요·금 등 동북방 민족이 우리의 옛 영토를 점령하였고, 명·청이 번갈아 지배하게 되어 지금까지 우리 민족은 이 지역에서 사실상 주권이 박탈당한 상태이다. 하지만 우리 민족의 피가 면면히 이어져 왔고 다시 근세의 이민으로 전체 인구의 상당수를 우리 민족이 차지하고 있으며, 옛 민족유산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현재 중국 동북부 일대는 한국 민족문화가 살아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우리나라와 국경선을 맞대고 있으므로 가장 밀접하게 문화교류가 이루어져 왔다는 점이다. 역대에 걸쳐 공식 사절의 내왕은 물론, 승려·상인의 교류와 함께 수시로 대규모의 이민도 있어서 중국 본토와의 교류도 매우 활발하였다. 따라서 중국 본토에 남아 있는 우리의 문화유적이나 유물도 상당수에 이르며, 간접적인 자료도 흔한 편이라고 하겠다. 또한, 중국 정사인 『이십오사(二十五史)』에 있는 우리 민족에 대한 기록은 사료로서 가치가 매우 높다.
선사(先史)시대
우리나라와 중국의 교류는 구석기시대부터 있어 왔겠지만 민족 교류의 실상은 거의 알 수 없다. 그러나 기원전 6000년 경 전후부터 시작된 신석기시대부터는 직접적인 교류 이루어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중국 쪽에서는 전 극동지역이 비슷한 신석기문화라고 이해하려는 경향도 있지만, 만주 일대나 현재의 우리나라를 포함한 각지의 신석기문화는 중국황하 유역인 이른바 중원(中原)과는 다른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상호간에 유사점이 많아 어느 정도의 교류관계는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였던 만주 일대의 신석기문화는 우리나라와 직접적으로 관련되고 있다. 가령 심양(瀋陽)의 신락문화(新樂文化)나 요령성(遼寧省)의 우하량유지, 객좌현 동산취문화(東山嘴文化) 등의 만주 일대 신석기문화는 시베리아 신석기문화 등과 관련하여 고조선(古朝鮮) 문화와의 관계를 신중히 고려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단군조선은 만주에서 우리나라 북부에 걸쳐 존재했던 우리의 신석기시대 문화를 반영하는 선국가(先國家) 형태이었다고 생각되므로, 하나의 문화권이었음이 분명하다. 중원의 신석기시대 문화인 용산문화(龍山文化) 등도 우리나라 신석기문화와 어느 정도 교류했던 것으로 믿어진다. 흑도의 유사성 등에서 이를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원전 2000년 경에서부터 1000년 경 사이에 시베리아 내지 만주 일대에서부터 우리나라에 걸쳐 동일한 청동기 문화가 존재한다. 신석기시대의 유문토기가 아닌 무문토기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고, 이들은 주로 구릉지대에서 농기구와 함께 나오고 있어 농경사회로 여겨지고 있는 문화이다. 묘제는 지석묘와 석관묘인데, 무문토기와 함께 중국의 중원지역에는 보이지 않는 특징적인 무덤형식이다. 여기에서는 마제석검과 더불어 세형동검(細形銅劍)이 반출되고 있는데, 세형동검은 이보다 선행하는 비파형동검(만주식 동검)에서 계승, 발전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함께 청동단추·세문경(細文鏡)·동모(銅鉾) 등 특징적인 청동기들이 대량으로 광범위하게 출토되고 있어서 바로 한국적인 청동기문화로 여겨지고 있다.
이러한 문화 유적은 몽고·만주·한국·시베리아 그리고 멀리 유럽까지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지만, 특히 우리 청동기문화와 가장 깊이 관련되고 있는 지역은 북으로 내몽고의 적봉(赤峯) 하가점, 동으로 만주의 길림과 송화강 일대, 서로는 요서(遼西)에 이르고 있다. 특히 길림의 소달구, 내몽고의 하가점, 요령의 조양 12대영자 등 수많은 문화층은 그 좋은 예이며, 요령 객좌현 북동의 청동기문화층도 이 같은 예에 속할 가능성이 짙다. 이 지역은 우리나라의 북부지역과 함께 기자조선의 영역으로 여겨지고 있다. 기자조선의 실체는 논의가 분분하지만, 만주와 우리나라 북부지역에 세력을 떨친 지배적인 국가형태가 존재했던 것이 분명하므로, 이 지역의 당시 국가로 생각한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기자조선으로 불릴 수 있는 이 지역 청동기문화를 담당한 민족은 신석기시대의 고아시아족이 아니라 예맥족(濊貊族)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 지역에 예맥족만 거주했다고는 보지 않으며, 선주민을 비롯해서 여러 민족이 혼재하면서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청동기문화의 담당 계층인 지배 민족은 예맥족으로 보는 견해에 일단 따라야 한다고 믿는다. 이 예맥족은 농경문화인 청동기문화를 바탕으로 기자조선이라는 국가 형태를 건설하여 고대 문명을 꽃피웠을 것이다. 우리는 만주 일대에 분포해 있는 청동기문화 유적에서 이런 사례를 충분히 입증할 수 있다. 청동기문화를 계승한 이 지역의 철기문화도 우리나라와 직접적으로 관련되고 있는데, 그것은 위만조선의 영토였기 때문이다.
출처 ^ 참고문헌
[중국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China, PRC, 中國]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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