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大韓民國 ],축구,[football, Soccer],
축구협회명축구협회 창립일리그 창립국가대표팀 첫 경기역대 최고 FIFA 랭킹월드컵 최고 성적대표팀 별칭최다 출전자최다 득점자프로 리그리그 현황,
국가
애국가
대한민국의 국가로, 공식 국가로 채택된 적은 없으나 한국 국민 누구나 국가로 인정하는 노래다. 안익태가 작곡했으며 작사가는 불명이다. 작사가로 추정되는 인물은 민영환, 최병헌, 안창호, 김인식, 윤치호 등이다. 일제 강점기 당시, 상해임시정부와 전국 각지의 학교에서 애창되었다 한다.
• 대한민국 국가,
— 1절 —
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 2절 —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 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 3절 —
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 4절 —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 후렴 —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1983년에 개막한 한국의 프로 축구 리그다. 처음에는 슈퍼리그라는 이름이었고, 5개 팀이 경쟁했다. 점점 몸집을 키워 아시아 최고의 리그로 거듭났고, ‘2002 한일 월드컵’을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연고지 정착이나 마케팅 측면에서는 아쉬운 부분이 있지만, 실력만큼은 여전히 아시아 최고다. 2013년에 승강제를 본격적으로 시행했다. 1부는 K리그 1, 2부는 챌린지라는 리그명을 쓰고 있다. 2016년 클래식에서는 12개 팀이 경쟁했다. 최다 우승팀은 성남 일화(성남 FC의 전신, 7회)다.
축구 역사,
축구 전래 130년, 아시아를 호령하다
한국의 축구 역사는 1882년(고종 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인천항에 정박한 영국 국함 ‘플라잉 호스호’의 승무원들이 인천 지역 사람들에게 축구를 전해주었다는 게 정설처럼 여겨지고 있다. 중국이나 일본보다도 빠른 편인데, 근대 축구를 가장 먼저 받아들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20년대에 간도 지방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이 축구를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다.
일제 강점기인 1928년에 조선심판협회가 만들어졌고, 1933년에 조선축구협회가 창립되면서 본격적인 축구 역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일제는 1938년 모든 체육단체를 해산시켰고, 이 과정에서 조선축구협회도 강제 해산됐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조선축구협회가 다시 창립됐고, 1948년 9월 4일 현재의 명칭과 같은 대한축구협회로 개칭했다. 대한축구협회 개칭 3개월 전인 5월에는 FIFA에 정식으로 가입했다. 1954년 5월, 아시아축구연맹(AFC)에 가입했고, 같은 해에는 아시아 대표로 ‘1954 스위스 월드컵’에 참가했다. 유일한 아시아 팀이었던 한국은 헝가리와 터키에 각각 9 : 0, 7 : 0으로 패하며 탈락했다. 세계 무대에서는 아쉬움을 삼켰지만 아시아 지역에서는 좋은 모습을 보였다. ‘1954 마닐라 아시안게임’ ‘1958 도쿄 아시안게임’ ‘1962 자카르타 아시안게임’에서 모두 동메달을 차지했다. 이후로도 아시아에서는 좋은 성적을 거뒀지만, 월드컵 도전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경쟁했던 호주와 이스라엘, 이란에 밀려 고전한 것이다.
한국은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 예선에서는 일본을 잡고 최종 예선에 진출했지만 본선으로 가는 데 실패했다. 8 경기에서 3승 4무 1패의 성적으로 2위를 차지했는데, 당시 1위는 6승 2무를 차지한 이란이었다. 한국은 차범근이라는 걸출한 스타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월드컵 본선에 오르지 못했다. ‘1982 스페인 월드컵’ 예선에서는 최종 예선에도 오르지 못했다. 쿠웨이트에 패하며 조 2위로 탈락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 32년 만에 본선에 올랐다. 1라운드를 무난하게 통과한 뒤 2라운드에서 인도네시아와 2경기를 치러 모두 승리했고, 3라운드에서는 숙적 일본을 만났다. 한국은 일본 도쿄에서 벌어진 1차전에서 2 : 1로 이겼고, 서울에서 벌어진 2차전에서도 허정무의 결승골로 1 : 0으로 승리했다. 이라크와 함께 본선으로 진출했지만, 역시 세계의 벽은 높았다. 아르헨티나, 이탈리아, 불가리아를 조별 리그에서만난 한국은 1차전인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호르헤 발다노에게 2골을내주며 1 : 3으로 졌다. 박창선이 월드컵 역사상 첫 골을 터뜨린 데 만족해야 했다. 불가리아와의 경기에서 1 : 1로 비겼고,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는 2 : 3으로 졌다. 한국은 비록 1무 2패로 탈락했지만, 인상적인 경기력을 보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회택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한국 대표팀은 9‘910 이탈리아 월드컵’ 본선에도 올랐다. 그러나 멕시코 월드컵보다 좋지 못한 성적을 거뒀다. 벨기에, 스페인, 우루과이에 모두 패한 것이다. 득점도 스페인전에서 나온 황보관의 프리킥 골이 전부였다. ‘1994 미국 월드컵’에는 김호 감독 체제의 대표팀이 도전했다. 당시 대표팀에는 홍명보, 황선홍, 서정원 같은 젊은 선수들이 대거 선발됐다. 한국은 스페인과의차 1전에서 2골을 내준 뒤 2 : 2 무승부를 만들며 기대감을 높였다. 볼리비아와의차 2전에서는 0 : 0으로 비겼고, 독일과의 3차전에서는 전반에 3골을 내주고 후반에 2골을 따라붙었다. 한국은 첫 16강 진출이라는 기대는 이루지 못했지만, 승점 2점을 땄다.
‘1998 프랑스 월드컵’을 맞아 대표팀의 지휘봉은 차범근 감독이 잡았다. 차범근은 예선에서 단 1 패만 기록하면서 주위의 기대를 모았다. 대회 직전에 주전 스트라이커 황선홍이 부상을 당하는 악재가 있었는데, 이 일은 본선에서 대표팀이 맞볼 악몽 같은 경기의 전조였는지도 모른다. 한국은 멕시코와의 1차전에서 사상 최초로 선제골을 기록했으나 이후 하석주가 퇴장당한 틈을 막지 못하고 1 : 3으로 졌으며, 거스 히딩크가 이끄는 네덜란드와의 2차전에서 0 : 5로 패하며 충격을 줬다. 대한축구협회는 대회 도중에 차범근을 경질하며 논란을 일으켰다. 감독 없이 치른 벨기에와의 3차전에서는 1 : 1로 비겼다.
2002년 한국은 일본과 함께 ‘2 002 한일 월드컵’을 개최했다. 감독으로는 프랑스 월드컵에서 한국을 무너뜨렸던 거스 히딩크를 초빙했다. 시작은 좋지 않았다.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프랑스에 0: 5로 패했고, 월드컵을 앞두고 벌인 유럽 평가전에서는 체코에 0 : 5로 졌다. 히딩크 감독은 월드컵을 50일 앞둔 시점에 “오늘부터 1%씩 발전할 것”이라고 공언했지만, 믿는 이는 별로 없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한국은 월드컵 첫 경기인 폴란드전에서 사상 첫 본선 승리(2 : 0)를 거뒀고, 미국과 1 : 1로 비겼다. 3차전에서는 우 승 후보인 포르투갈을 박지성의 골로 1 : 0으로 물리치며 16강으로 갔다. 16강전에서는 이탈리아에 먼저 골을 내줬지만, 설기현의 동점골과 안정환의 골든골로 승리했으며 8강전에서는 스페인에 승부차기로 이겼다. 전 국민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간 한국 대표팀의 기적은 여기까지였다. 4강전에서는 독일에 0 : 1로 패했고 3,4위전에서는 터키에 2 : 3으로 졌다. 4강전에서 패배했을 때는 모두가 아쉬움을 삼켰지만, 한국은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성과로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한국은 ‘2006 독일 월드컵’에서 1승 1무 1패로 16강 진출에 실패했지만,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박지성의 활약 속에 사상 첫 원정 16강을 이뤘다. 16강전에서는 루이스 수아레스에게 골을 허용하며 1: 2로 패했다. 한국은 ‘2014 브라질 월드컵’을 1년 앞두고 홍명보 감독을 선임했다. ‘2012 런던 올림픽’ 동메달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낸 홍 감독을 신임한 결과였다. 하지만 이 선택은 홍명보와 대한축구협회 모두에게 패착으로 이어졌다. 러시아와의 첫 경기에서 비겼고, 알제리와의차 2전에서 2 : 4로 무너졌다. 한국은 벨기에와의 최종전에서도 0 : 1로 패했다. 대회가 끝나고 온갖 루머와 잡음이 흘러나왔고, 홍명보는 결국 불명예스럽게 사퇴했다.
이후 독일 출신인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 부임했다. 슈틸리케 감독은 어수선한 대표팀의 분위기를 빠르게 수습했고, ‘2015 호주 아시안컵’에서 한국을 준우승으로 이끌었다.슈틸리케 감독은 최종예선까지만 팀을 이끌었고, 신태용 감독이 러시아 월드컵에서 지휘봉을 잡았다. 신 감독은 스웨덴과 멕시코에 연달아 패했으나 조별리그 3차전에서 전 대회 우승팀 독일을 2-0으로 이겼다. 대회가 끝난 뒤에는 포르투갈 출신 파울루 벤투 감독이 부임했다.
엠블럼,
새로운 호랑이,,,
2001년 5월 이후 대한축구협회(KFA)를 상징했던 엠블럼은 2020년 2월 4일로 임무를 마쳤다. 대한KFA는 2020년 2월 5일 새로운 엠블럼을 발표했다. 새로 공개된 엠블럼은 KFA와 축구국가대표팀의 상징인 호랑이 얼굴을 전면에 내세웠다. 호랑이 전신이 표출되었던 기존 엠블럼과는 달리, 한국 축구를 상징하는 용맹한 백호의 날카로운 눈매와 무늬를 반영해 획기적인 변화를 추구했다. ‘포워드 애로우’(Forward Arrow)라 통칭되는 디자인 모티프를 통해 KFA와 대표팀이 추구하는 ‘두려움 없는 전진’(Moving Forward)이라는 핵심 가치를 구현했다. 엠블럼의 사각 프레임은 그라운드를, 백호 얼굴의 형태는 축구의 주요 포메이션을 형상화했다.
기존 엠블럼의 복잡한 무늬와 글자를 배제하고 현대 트렌드에 맞는 간결함을 살리되, 힘 있는 눈매와 날카로운 라인처리를 통해 카리스마와 진취성을 드러냈다. 메인 엠블럼에는 대한민국의 상징색인 레드, 블루, 블랙, 화이트를 주요 컬러로 사용했고, 레드와 블루 색상의 채도를 조절해 현대미를 더했다. 각각의 컬러는 역동성, 용맹함과 도전정신, 신뢰감과 페어플레이를 상징한다.
유니폼
붉은 악마의 기원을 찾아
한국 유니폼은 1948년 첫 유니폼부터 2016년 3월에 발표된 유니폼까지 모두 빨간색이 중심이다. ‘1994 미국 월드컵’에서 흰색 상하의와 스타킹을 착용한 것을 제외하면 홈 유니폼의 상의는 언제나 빨간색이었다. 1983년 20세 이하 청소년 월드컵 축구에서 한국이 4강에 오르자 해외 언론들은 한국을 유니폼 색깔에 빗대어 레드 데빌스(red devils)라고 불렀고, ‘붉은 악마’라는 명칭은 한국 축구 응원팀의 이름으로 이어졌다.
하의는 빨간색과 하얀색을 가장 많이 입었다. ‘2002 한일 월드컵’ 이후로는 빨간색 상의에 파란색 하의를 입기도 한다. 원정 유니폼은 과거에 파란색 계열이 주류였으나 최근에는 흰색 유니폼이 더 많다. 한일 월드컵 이후에는 원정 유니폼이 모두 흰색이었다.
1977년부터 1984년까지 아디다스가 용품을 후원하는 가운데 아식스, 코오롱, 프로스펙스, 위크엔드 등의 국내외 브랜드가 건건이 유니폼을 준비했다.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스폰서십 계약이 없었던 까닭이다. 1984년부터 1987년까지는 위크엔드가 공식 스폰서였고, 1988년부터 1995년까지는 라피도가 유니폼을 공급했다. 1996년부터 2018년까지 나이키와 스폰서십을 유지하고 있다.
대표 선수
차범근(1952년생)
한국 축구가 낳은 세계적인 스타다. 여전히 대표팀 최다 득점 (58골)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스피드와 기술, 뛰어난 축구 지능을 겸비했다. 달리기가 빠르기 때문에 기술적인 부분을 폄하하는 이들이 있는데, 차범근은 동료를 이용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난 선수였다. 그의 경력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해외 진출이 쉽지 않았던 시대에 태어나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성공적인 선수 생활을 했다는 점이다.
분데스리가에서 UEFA컵을 두 번이나 들어 올렸다. 아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 바이어 04 레버쿠젠에서 308경기에 출전해 98골을 기록했다. 대표팀에서도 놀라운 활약을 펼쳤다. 차범근은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 예선전에서 일본을 상대로 결승골을 터뜨리며 팀을 최종 예선으로 이끌었고, 같은 해에 벌어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남다른 기량으로 팀을 도왔다. 차범근은 멕시코 월드컵을 끝으로 대표팀을 떠났으며 1989년에는 레버쿠젠에서 은퇴했다.
박지성(1981년생)
세계 최강으로 군림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7시즌이나 활약한 한국 축구의 영웅이다. 박지성은 올림픽 대표가 되기 전까지는 주목을 받지못했던 선수다. 그는 ‘2000 시드니 올림픽’ 대표로 선발되며 두각을 드러냈고 ‘2002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한국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거스 히딩크 감독에게 중용됐다. 박지성은 포르투갈과의 조별 리그차 3전에서 수비수를 완벽하게 제친 뒤 터트린 왼발 슛으로 한국을 16강에 올려놓았다. 박지성은 PSV 에인트호번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거치면서 점점 더 강해졌고 2000년대 후반 한국을 아시아 최강으로 올려놓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아시아에서는 박지성을 막을 선수가 없었다. 박지성은 ‘2006 독일 월드컵’에서 골을 터뜨렸고,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도 골을 터뜨리며 팀을 16강으로 이끌었다. 그는 고질적인 무릎 부상 때문에 ‘2011 카타르 아시안컵’을 끝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했다. A매치 100경기에 출전해 13골을 기록했다.
기성용(1989년생)
박지성이 대표팀을 떠난 뒤 대표팀을 이끌고 있는 리더다 F.C서울, 셀틱 FC, 스완지 시티를 거치면서 성숙한 기량을 뽐내고 있다. 안정적인 경기 운영과 정확한 패스로 어느 팀에서든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 2008년 9월 5일 요르단과의 친선전에서 대표팀으로 데뷔했고, 5일 뒤 벌어진 북한과의 ‘2010 남아공 월드컵’ 최종 예선에서 데뷔 골을 넣었다. ‘2012 런던 올림픽’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동메달을 따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기성용은 ‘2015 호주 아시안컵’을 앞두고 대표팀 주장이 됐고, 이후로는 실력과 리더십을 겸비하며 조금 더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보여주고 있다. 기성용은 2019년 1월 아시안컵을 끝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했다. 그는 2020년 1월 뉴캐슬유나이티드를 떠나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레알마요르카로 이적했다.
대표 감독
거스 히딩크(Guus Hiddink, 1946년생)
‘2002 한일 월드컵’에서 모두의 의심을 경악으로 바꾼 지도자다. PSV 에인트호번과 발렌시아, 네덜란드 대표팀, 레알 마드리드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고, 2001년 한국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다. 그는 월드컵 개최국인 한국의 대표팀을 맡으면서 대한축구협회에 전권을 줄 것을 요구했다. 히딩크는 “한국 선수들은 기술이 좋은데 체력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는 한국의 선후배 문화 등을 직접 건드리며 변화를 추구했다. 처음에는 가시적인 성과가 없었다. 프랑스와 체코에 0 : 5로 패하면서 ‘오대영’이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한때 조롱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히딩크는 자신감이 넘쳤다. 본선이 시작되자, 그의 자신감은 현실이 됐다. 1차전인 폴란드전을 2 : 0으로 이기면서 자신의 진가를 증명한 것이다. 히딩크는 인상 깊은 어록을 남긴 감독으로도 유명했다. 한국의 목표였던 16강을 달성한 뒤 진행한 인터뷰에서 “나는 여전히 배고프다(I’m still hungry)”라는 말을 해 국민들에게 감동을 전했다. 히딩크는 4강 신화를 이룬 뒤 한국과 이별했다.
역사적인 경기
‘2002 한일 월드컵’ 조별 리그 (vs 포르투갈)
한국은 지난 경기에서 1승 1무를 거뒀다. 미국과 폴란드의 경기 결과에 따라서 비기기만 해도 16강에 나갈 수 있었다. 상대는 황금 세대가 전성기를 지나 끝자락을 달리던 포르투갈. 루이스 피구, 후이 코스타 등 전설적인 선수들이 대거 포진한 나라였다. 세계적인 선수들을 앞에 두고 기가 죽을 만도 했지만 한국은 전혀 밀리지 않았다.
송종국과 이영표는 포르투갈이 자랑하는 윙어들을 꽁꽁 묶었고, 중원에서는 박지성이 맹활약했다. 전반 2 7분 주앙 핀투가 박지성에 거친 태클을 걸어 퇴장당했고, 후반 21분에는 베투가 경고 누적으로 퇴장당했다. 후반 25분 이영표의 크로스를 받은 박지성은 공을 살짝 넘기는 개인기로 콘세이상을 제친 뒤 왼발 슛을 날렸고, 그 공은 비토르 바이아 골키퍼의 가랑이 사이를 뚫었다. 박지성은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대는 세리머니를 한 뒤 히딩크 감독에게 달려가 안겼다. 한국 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었다.
대표 축구장
서울 월드컵 경기장(Seoul Worldcup Stadium, 66,704명)
‘2002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건설된 경기장이다. 류춘수 씨가 설계했고, 전체적으로는 커다란 방패연 모양(소반과 팔각모반, 황포돛배의 모양을 부분적으로 차용했다)을 형상화했다. 아시아 최대의 축구 전용 경기장으로, 2001년 11월 10일 첫 개장 경기(상대는 크로아티아)를 열었다. 월드컵에서는 프랑스와 세네갈의 개막전과 한국과 독일의 4강전을 치렀다. 월드컵이 끝난 뒤에는 FC 서울이 홈경기장으로 사용하고 있고, 국가대표팀도 이 경기장을 주로 사용한다. ‘2007 U ‐ 17 FIFA 월드컵’ 주 경기장으로 쓰이기도 했다.
대한축구협회(KFA, Korea Football Association) |
1933년 09월 04일 |
1983년 |
1948년 7월 6일, vs 홍콩(5 : 1, 승리) |
17위 |
4강(2002) |
태극 전사 |
홍명보(136경기) |
차범근(58골) |
K리그(K League) |
한국의 축구 역사
고대 신라 시대 '축국'이란 놀이 형태의 공차기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영국을 모태로 하는 근대 축구는 1882년 우리나라에 전파되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시대에 '축국(蹴鞠)'이란 놀이 형태의 공차기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축국은 둥근 놀이기구, 이를테면 가축의 방광이나 태반에 바람을 넣어 차거나 던지는 놀이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근대 축구의 전파
영국을 모태로 하는 근대 축구가 한국에 전파된 것은 1882년(고종 19년)으로, 인천항에 상륙한 영국 군함 플라잉 호스(Flying Horse)의 승무원들을 통해서인 것으로 전해진다. 1900년에는 유학생 출신의 궁내부 참리들과 어전통역관 등이 축구클럽을 조직했으며, 1904년 관립 외국어 학교에서 프랑스인 교사가 학생들에게 축구를 지도하기 시작하면서 체계적인 보급이 시작되었다. 한국 최초의 공개 축구 시합은 1905년 6월 10일 서울 훈련원에서 열린 대한축구구락부와 황성기독청년회(YMCA) 간의 시합이라고 할 수 있다.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규칙하에 경기에 필요한 각종 장비를 갖추고 경기가 열리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부터이다. 1921년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가 개최되었고, 1928년 조선심판협회(조선축구협회의 전신)가 창립되었다. 1933년 9월 19일에는 조선축구협회가 창립되었다. 특별한 장비 없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축구는 당시 큰 인기를 끌었으며, 1929년부터 시작된 경성(서울)축구단과 평양축구단의 친선축구시합인 ‘경평(京平)축구대회’는 축구에 대한 관심을 크게 증폭시켰다. 일제 말기 해산되었던 조선축구협회는 해방과 함께 1948년 대한축구협회로 개칭하면서 새롭게 출범했다. 동시에 우리나라는 FIFA(국제축구연맹)에 가입했고, 1954년에는 AFC(아시아 축구연맹)의 정식 회원국이 되었다.
세계 무대로의 진출
우리나라는 1948년 런던 올림픽 본선을 통해 처음으로 세계 무대에 발을 내딛었고, 1954년에는 스위스에서 열린 월드컵 본선에 최초로 진출하였다.
1971년에는 한국 최초의 국제축구대회인 ‘박대통령배 아시아 축구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는 1976년부터는 박대통령배 국제 축구대회, 1980년부터는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로 대회 명칭이 변경되었다. 이후 다시 명칭이 변경되어 1995년부터 코리아컵으로 불렸으며 1999년까지 개최되었다. 1983년 ‘슈퍼리그’라는 이름으로 프로축구가 출범하였는데, 5개 팀으로 시작한 한국프로축구는 2010년에는 15개 팀으로 늘어났다. 2012년까지 ‘K-리그’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2013년 승강제가 도입되면서 1부리그는 'K리그 클래식', 2부리그는 'K리그'로 명칭 변경되었다.
한국 축구의 월드컵 성과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남자)은 1986년 멕시코 월드컵부터 2018년 러시아 월드컵까지 연속 9회 월드컵 본선에 진출함으로써 아시아 최다 월드컵 본선 진출국(통산 10회)이 되었다. 2002년에는 일본과 함께 월드컵을 공동 개최하였으며, 이 대회에서 사상 처음 16강 본선 진출의 위업을 이룬 이후 4강까지 진출하면서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후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원정 첫 16강 진출이라는 성과를 거뒀다. 또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는 1948년 런던 올림픽 본선에 첫 출전한 지 64년 만에 올림픽 동메달을 수확했다.
여자 축구 역시 2010년 독일에서 열린 여자 U-20 월드컵에서 3위에 입상하였다. 또한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서 열린 2010 U-17 여자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한국 축구 역사상 첫 FIFA 대회 우승 기록을 수립했다.
여자축구,
16세기 영국에서는 여자축구가 남자축구 못지않게 성행했으며, 최초의 공식경기는 18세기 스코틀랜드에서 기혼여자팀과 미혼여자팀 간에 열렸다. 최초의 국제경기는 1920년 잉글랜드에서 열린 프랑스ㆍ잉글랜드 경기로 1만여 명이 입장하는 대성황을 이뤘다.
이후 여자축구의 인기가 시들해졌으나 1990년대부터 각종 국제대회가 개최되면서 다시 인기가 살아나고 있다.
월드컵 여자 축구대회,
1991년 제1회 '월드컵여자축구대회(FIFA Women's World Cup)'가 중국에서 개최되었으며 미국이 우승하였다. 1995년 제2회 스웨덴 대회에서는 노르웨이가 우승했으며, 1999년 제3회 미국 대회는 미국이 우승했다. 또 2003년 제4회 대회는 미국에서 개최되어 독일이 우승하였다. 2007년 제5회 중국 대회에서는 독일이 2연패로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2011년 제6회 대회는 독일 개최, 일본 우승으로 마무리되었다. 한편 2015년 제7회 대회는 캐나다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올림픽 여자 축구대회,
1996년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정식종목으로 첫 채택되어 미국이 우승하였다. 이후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선 노르웨이가 우승하였다. 하지만 2004년 아테네, 2008년 베이징,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미국이 3연패해 금메달을 차지했다.
아시안게임에서는 1990년 베이징 대회 때부터 정식종목이 되었으며, 1998년까지 중국이 3회 연속 금메달을 땄으나,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는 북한이 금메달을 획득했다. 한편 한국은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동메달을 따내며, 아시안게임 여자축구 첫 메달을 달성했다.
우리나라의 여자축구,
우리나라에서 여자축구가 공식대회에 첫선을 보인 것은 1949년 6월 28~29일 이틀간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전국여자체육대회였다. 체육신문사에서 주최한 대회로 육상, 테니스, 배구, 농구, 핸드볼과 함께 축구가 처음 선보였다. 그러나 한동안 여자축구가 사라졌다가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에 여자축구를 정식종목으로 삼으려는 중국 입장에 호응하기 위해 서둘러 대표팀이 구성됐다.
이후 1991년부터 차츰 대학팀, 고등학교팀, 실업팀이 생겼으며 2001년 대한축구협회 산하에 한국여자축구연맹이 출범하였다. 2012년 현재 국내 실업팀으로는 충북스포츠토토, 국민체육진흥공단 여자축구단, 충남일화천마, 인천현대제철, 서울시청, 부산상무, 고양대교, 수원시시설관리공단여자축구단 등 8개 여자축구단이 있다.
출처 & 참고문헌,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의 축구 역사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네이버 지식백과] 대한민국 [大韓民國] (월드컵 축구 엠블럼 사전, 2016. 06. 10., 류청)
[네이버 지식백과] 여자축구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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