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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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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이란???

이슬람은 아랍의 예언자 무함마드가 610년에 제창한 일신교로, 세계종교로서 서아시아, 아프리카, 인도대륙,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현재 약 10억의 신자를 가진다. 아라비아어로 정확하게는 이슬람이라고 하며, <유일한 신 알라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자를 무슬림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자>라는 뜻이다. 이슬람 그 자체가 종교의 이름이기 때문에 이슬람교라고 할 필요는 없다. 과거에 서구에서는 모하메트교(Mohammedanism), 마호멧교(Mahometanism), 중국에서 청진교, 회회교, 회교, 일본에서도 회교라고 불려지기도 했는데, 정확한 호칭은 아니기 때문에 현재는 거의 이용되지 않고 있으며, 영어로도 Islam이라고 표기된다.

 

확대되는 이슬람,

610년에 메카에서 무함마드가 이슬람을 제창했을 때, 그 가르침을 믿고 무슬림이 된 것은 아내 하디자, 사촌인 알리, 친구 아부 바르크 등 겨우 수명에 지나지 않았다. 622년 메디나로의 헤지라 때, 동행한 무슬림은 70여 명이었다. 당시 메디나에도 70여 명의 무슬림이 있어서, 이슬람은 겨우 150명 정도의 신자를 가지고 그 기원 원년을 맞이한 것이다. 632년 무함마드의 사망 후, 새로운 지도자로서 아부바르크를 칼리프로 선정한 무슬림은 그 지도하에 대규모적인 정복을 개시했다. 그들은 7세기 중반까지 사산조의 전영토를 점령하고, 시리아와 이집트를 비잔틴제국에서 빼앗았다. 옴미아드 왕조의 융성기인 8세기 초에는 중앙아시아, 서북 인도,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해서, 그 판도는 서북 인도를 제외하고, 그대로 아바스 왕조에 의해서 계승되었다.

 

정복자인 아랍은 처음에 정복지 주민의 이슬람으로의 개종에 열의를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나 8세기 초부터 정복지 주민의 이슬람으로의 개종이 서서히 진행되고, 그것은 아바스 왕조의 성립에 의해서 한층 촉진되었다. 9세기가 되자 아바스 왕조의 지배는 이완되고, 영내 각지에 사실상의 독립왕조가 자립해서 제국의 통일은 상실되었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동방에서는 터키인, 서방에서는 베르벨의 개종이 진행되고, 그들의 새로운 정복에 의해서 아나트리아, 북 인도, 서 수단이 이슬람 지배하로 들어와 제국 분열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세계는 오히려 확대를 계속했다. 이와 같은 정복에 의한 이슬람 세계의 확대는 오스만제국에 의한 발칸 정복과 데리 술탄조(), 무굴제국에 의한 인도대륙의 정복에 의해서 정점에 이르렀다.

 

이슬람 세계를 확대시킨 것은 단순히 정복만은 아니었다. 무슬림의 상인들은 이슬람 세계를 넘어서 먼 이국에 자유롭게 진출했다. 그들의 식민지는 주위 이교도 개종의 거점이 되고, 그것이 진행되면 현지 정권의 이슬람화, 또는 스스로 이슬람 정권의 수립에 이르지만 단순히 상인만이 아니다. 교회 조직을 가지지 않은 이슬람이지만, 12세기에는 신비주의 교단이 계속해서 설립되고, 13~14세기에는 한카, 자위야 등으로 불린 수도장의 네트워크가 이슬람 세계가 이르는 곳에 뻗쳤다. 이교도의 교화에 가장 열심이었던 것은 이와 같은 신비주의 교단의 교단원이며, 그들은 순교를 원해서 이교도의 땅에 부임하고, 유일한 신에 대한 신앙을 정열적으로 설득했다. 내륙 아프리카, 터키스탄, 발칸, 인도대륙, 동남아시아 섬들의 이슬람화는 주로 그들의 노력에 의하는 바가 크다.

 

코란의 세계,

무함마드는 610년의 어느 날, 유일신 알라의 계시를 받아서 스스로 신의 사도로서 자각하고, 최후의 심판의 날에 대비하도록 사람들에게 경고했다. 신의 계시는 무함마드의 죽음시까지 그에게 계속 내려지고, 후에 이를 1권의 책으로 정리한 것이 코란이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이슬람은 610년에 무함마드에 의해서 제창되었다. 그러나 코란에 기록되어 무슬림이 믿는 신앙의 입장에서 보면 이슬람은 610년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천지창조 이전부터 엄연히 존재하고 있으며, 신과 함께 영원한 이슬람이 610년에 신의 사도 무함마드에 의해서 재확인된 것이다.

 

아주 먼 옛날, 신은 천지를 창조하고, 하늘에는 해와 달과 별을, 땅에는 인류를 비롯한 생명을 창조했다. 신은 단지 자연과 인류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자연에는 천체의 운행이나 사계, 풍우, 낮과 밤의 변화 등 질서를 주고, 인류에게는 내세의 천국을 보증하기 위해서 현세에서 준수해야 할 규범을 주었다. 신이 인류에게 준 규범이 샤리아이며, 샤리아에 따라서 사는 것이 이슬람이다. 자비심 깊은 신은 인류를 내세의 천국으로 이끌기 위해서 많은 예언자를 지상에 보냈다. 『구약성서』의 아담도 노아도 아브라함도 무녀 같은 예언자였다. 그것만이 아니라 신은 인류 인도의 표시로서 계시서도 인류에게 주었다. 모세에게 준 율법의 책(구약성서), 예수에게 준 복음서(신약성서)가 그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참된 이슬람을 자각하지 못했다. 신이 보낸 예언자에 따르지 않아 절명된 사람들도 있다. 아드의 민족, 사무드의 민족 등이 그 예이다. 유대 교도와 그리스도 교도도 그들에게 주어진 계시서를 왜곡해서 은닉했다.

 

아랍의 먼 선조 아브라함(코란에서는 이브라힘이라고 한다)은 그 아들 이스마엘(이스마일)과 함께 메카 카바를 건설하고, 이를 거처로서 알라에게 헌상해서 자손 중 한 명을 사도로서 보내도록 기원했다. 아브라함은 계시서를 받지 못했지만, 모세(무사)보다 훨씬 오래된 예언자, 하니프, 무슬림이었다. 무함마드가 주장한 것은 아브라함의 종교의 부활이며, 그에게 준 계시서 코란은 그에 앞선 계시서를 개정한 것이다. 왜 이와 같은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카바 신전,

하늘의 천상인 신 옆에는 1장의 석판이 중요하게 보관되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원전이 된 계전의 모체인 움 알키타브(Umm al-Kitāb)이다. 신은 인류를 이슬람으로 이끌기 위해서 무함마드를 최후의 예언자로서 아랍민족에게 보내고, 계전의 모체를 아라비아어의 코란으로서 그에게 주었다. 코란과 그에 앞선 『구약성서』, 『신약성서』와의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경우에는 신이 계전의 모체에 의거해서 개정한 것이기 때문에 마지막에 인류에게 내린 계시서 코란이 가장 정확한데 코란에는 이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후의 울라마(학자, 종교지도자)가 정리한 바에 의하면 코란에 기록된 이슬람의 교의는 이만(īmān, 신앙), 이바다트('ibādāt), 무아말라트(mu malāt)로 이루어진다. 이만은 후에 알라, 천사, 계전, 예언자, 내세, 예정의 육신으로서 정형화된 신앙내용으로, 그 중 특히 중요한 것이 알라와, 마지막의 예언자인 무함마드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코란에서 알라는 유일신, 창조자, 자비심 깊은 분인 동시에 그 신자(아브드, 노예라는 의미) 위에 지배자로서 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자체가 피조물인 우상 숭배를 격렬하게 비판해서, 다른 죄는 신의 용서를 받을 수 있지만, 다신숭배는 절대로 용서되지 않는다. 이바다트는 문자의 뜻은 신에 대한 봉사이며, 종교학에서 말하는 의례에 상당한다. 후에 오주()로서 정형화된 점에서 신앙고백을 제외한 예배, 희사, 단식, 순례 외에 코란에서는 지하드가 특히 강조되고 있다. 무아말라트는 문자대로는 행동의 규범, 그 중에서도 신자 동지의 인간관계이며, 이에는 간음하지 말 것, 고아의 재산을 탐하지 말 것, 계약을 지킬 것, 저울을 속이지 말 것 등의 윤리적 규칙 외에 혼인, 이혼, 유산상속, 범죄에 관한 규정에서 이자의 금지, 고아의 부양과 후견, 돼지고기를 먹는 것의 금지, 일상의 예의작법까지를 포함한다. 즉 코란은 유일신과 그 최후의 예언자 무함마드를 믿고, 신에게 봉사하고 신이 좋다고 하는 올바른 인간관계를 맺고, 내세에는 천국으로 들어가도록 하는 가르침이다(육신오행).

 

지금까지 무함마드가 제창한 종교를 이슬람이라고 하였는데, 코란은 무함마드에게 계시된 종교를 단지 이슬람이라고만 부른 것은 아니다. 코란은 그것을 특정한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부를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적당히 이슬람, 이만, 딘(din), 밀라(milla) 등의 용어를 이용했다. 현재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곳에서는 이슬람은 유일신 알라에 절대적으로 복종할 것, 이만은 마음속의 신앙, 딘은 종교일반, 또는 내면적 이만과 밖으로 나타난 이슬람을 통일한 것으로 해석되며, 밀라는 아브라함의 종교라는 말에 전형적으로 나타난 것과 같이 과거의 특정한 예언자가 주장한 가르침이나 그 움마(공동체)에 대한 소속을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이들 용어 중 코란에서 가장 많이 이용된 것은 이만이며, 동시에 신자를 의미하는 용어로서도 가장 많이 이용된 것은 무민(mu'min)이다. 이슬람시대 초기, 이슬람 교도를 의미하는 용어로서 일반적으로 이용된 것은 무슬림이 아니라 무민이었다. 이는 우마르 1세가 이용한 칼리프의 칭호가 무슬림들의 아밀이 아니라, 무민들의 아밀이었다는 것에 잘 나타나 있다. 코란 49장 14절에 <유목민들은 "우리들은 믿는다(āmannā)"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말하기를 "너희들은 믿지 않는다. 단 우리들은 복종한다(aslamnā)라고 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너희들의 마음속에 아직 신앙이 들어있지 않다(후략)">고 되어 있듯이, 이슬람 시대 초기에는 이맘과 이슬람은 다른 것이거나 이슬람은 이만의 전 단계로 생각되고 있는 것 같다.

 

이슬람은 전형적인 세계종교인데, 코란이 아라비아어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슬람이 정복자 아랍의 종교였기 때문에 이슬람시대 초기의 오랫동안, 이슬람과 아랍의 동일시 현상이 나타났다. 이 시기에 정복지 주민의 이슬람으로의 개종은 거의 진행되지 않았는데, 마와리 문제, 우마르 2세의 신정책 등을 계기로 개종자가 증가했다. 거기에서 문제가 된 것은 어떤 조건을 만족시키면 무슬림으로 볼 수 있는가, 무슬림으로서의 최저한의 의무는 무엇일까라는 문제였다.

 

8세기 전반의 수니파 울라마의 선구자들에 의한 오주()의 정형화는 더욱 이와 같은 요청에 응하는 것이었다. 코란의 어디에도 그대로의 말로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 신앙고백은 무슬림들의 최소한 믿지 않으면 안되는 이만을 말로서 표명하는 것이다. 예배, 희사, 단식, 순례는 최소한 실천해야 하는 이바다트이다. 이 양자를 합쳐서 오주()로서 정형화함으로써 알라에 대한 절대적 복종은 오주의 실천에 있다고 하며, 9세기에 이르러 무함마드에 의해서 제창된 종교를 부르는 이름으로서 이슬람이 확립되었다. 즉 신앙 일반을 가리키는 이슬람은 특정 신앙내용을 가진 종교 이슬람이 되었으며, 동시에 신자를 부르는 이름으로서의 무슬림도 확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신학과 법학의 성립,

지식을 의미하는 아라비아어에 일름, 피크프(fiqh), 마리파(ma 'rifa), 히크마가 있다. 일름은 원래 노력에 의해서 습득되는 지식을 의미하며, 따라서 코란이나 하디스(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에 관한 전승)에 관한 지식, 즉 신학적 지식을 일름이라고 하였다. 피크프는 <기지의 것에서 미지의 것을 추측하는 것>ㆍ<연역>을 의미하며, 그 학문의 방법적 특징에서 법학이 피크프라고 불렸는데 마리파는 스피가 달인에게만 허용된다는 계시나 묵시에 의한 신에 대한 신비적 지식, 또는 감성적 인식이다.

 

히크마는 일반적으로 <지혜>ㆍ<총명>을 의미하는데, 철학자는 이를 그리스어 소피아의 역어로서 이용하며, 이븐 시나는 히크마를 <인간의 영혼의, 학문과 행위의 범위 내에서 가능한 완성으로의 도정>으로 정의한다. 후에 일름은 학문일반을 의미하게 되었는데, 무슬림 최초의 학문은 남이라크의 두 개의 군영도시, 바스라와 쿠파에서의 아라비아어에 관한 학문이었다. 그것은 부족마다 다른 방언을 이야기하는 아랍유목 부족민과 노동자로서 살아온 현지 주민에게 표준 아라비아어를 가르칠 필요상, 코란의 언어학적 연구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것은 문법학의 발달, 사전 편찬에 이르러 코란의 아라비아어 연구의 보조수단으로서 전이슬람시대의 고시()연구도 행하여져, 시학과 음률학이 발달했다.

최초에 코란의 언어학적 연구가 시작된 것의 의미는 컸다. 왜냐하면 그것은 코란의 신학적ㆍ법학적 연구의 전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바스라의 모스크의 중정()에 둥그렇게 둘러앉아서 열심히 스승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는 일단의 젊은이들이 있었다. 가운데에 있는 스승은 하산 알바슬리로, 그의 가르침의 중심은 금욕주의에 있으며, 자유의지인지 예정인지 등의 문제 제시는 하지 않았으나, 죄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무겁게 보고, 신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을 엄하게 경계했다. 하와리쥬파가 제기한 죄의 문제에 대해서, 그는 대죄를 범한 자를 무나피쿤(munāfiqūn, 위선자)이라고 하고, 이와 같은 자를 죽여서는 안되지만, 지옥에 떨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올바른 길로 이끌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가 의도하는 것은 지배자ㆍ피지배자 쌍방을 구속하는 이슬람의 종교적ㆍ윤리적 규범의 확립에 있으며, 코란과 예언자 무함마드의 말과 행위에 의해서 확립된 관행(수나)을 기준으로서 규범을 모색한 것으로 이와 같은 것이 이슬람 최초의 신학이었다.

예언자 모스크,

쿠파와 메디나 학자들의 주된 관심은 국가의 법을 이슬람의 이념에 의거해서 체계화하는 것에 있으며, 그 기준은 코란과 수나와 개인적 견해였다. 하산 알바슬리의 수나가 종교적ㆍ윤리적 관행을 의미한 것에 대해서, 법학자의 것은 법적 관행을 의미했다. 이 수나는 전승의 형태로 표명되었는데, 물론 엄밀한 의미에서의 하디스는 아니며, 실제로는 쿠파나 메디나 학자들의 라이의 평균치, 즉 후세의 용어로 이듀마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런 것이 이슬람 최초의 법학이다.

 

하디스 발상지는 예언자의 도시인 메디나인데, 그것은 예언자의 가르침을 지키고 그 인간상을 후세에 전하려는 사바하(교우)의 자연스러운 정에서 발생하였으며, 무함마드의 죽음 직후부터 수없이 이야기되어 전해지고, 주후리에 의해서 최초로 기록되었다. 그것은 한편, 무함마드전()으로 시작되는 이슬람의 역사 서술의 발달을 촉진하였는데, 한편, 신학자, 법학자 모두 하디스에 의해서 수나를 정립하기에 이르러서, 엄밀한 하디스 연구를 지향하는 학자들, 즉 하디스 신도가 생겨났다. 법학자 샤피이가 이슬람 법학의 방법론을 완성한 것은 전승과정의 기록 이스나드로서 예언자에게 거슬러 올라가는 객관적인 하디스를 그의 법원론에 도입했기 때문이다.

 

그의 밑에 제자들이 모여서 샤피이파가 형성되자, 그보다 약간 늦게 하나피파, 마리크파, 한바르파가 형성되어 현재까지 이어지는 수니파의 4법학파가 완성되었다.

 

샤리아에 대한 학문은 좁은 의미의 일름(신학)과 피크프(법학)였다. 샤리아는 무엇을 믿고, 어떻게 행동할지를 신이 인류에게 지시한 명령의 총체이다. 이슬람 법은 국가에 대한 정의가 결여되고, 다수의 무슬림이 모여서 오로지 1명의 무슬림의 수장을 선정하고, 그 책임하에 이슬람 법(샤리아)이 시행되는 곳을 이슬람 국가라고 한다. 따라서 이슬람 국가의 정의는 무슬림의 정의로 환원되며, 무슬림의 정의는 이슬람의 정의를 전제로 한다. 샤리아에 따라서 사는 것이 이슬람이기 때문에 신학ㆍ법학 양면에서의 접근없이 이슬람의 정의는 내려지지 않는다. 신학과 법학은 상호 보완하는 샤리아의 학문으로서 거의 같은 시기에 출발하였는데, 법학이 샤피이에 의해서 방법론적 완성을 본 것에 대해서 신학은 헬레니즘 사상의 세례를 받고, 비로소 방법론적 완성에 이르렀다.

 

10세기의 후반에 프와리즈미는 『학문의 열쇠』라는 책을 저술하고, 당시 행하여졌던 이슬람 교도의 학문을 분류했다. 이 책에 의하면 이슬람 교도의 학문은 ①아랍 기원의 학문 ②이민족 기원의 학문으로 이루어지며, ①에 속하는 것은 ⓐ법학 ⓑ신학 ⓒ문법학 ⓓ서기학(행정문서작성법) ⓔ시학과 음률학 ⓕ역사학이며, ②에 속하는 것은 ⓖ철학 ⓗ논리학 ⓘ의학 ⓙ산술 ⓚ기하학 ⓛ천문학 ⓜ음악이론 ⓝ기계학 ⓞ연금술이었다.

 

수니파 신앙의 확립,

하와리주파의 과격한 일파인 아즈라크(Azraq)파는 코란에 처벌이 규정된 벌 하드를 범하는 자는 무슬림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하였다고 했다. 이는 죄는 인간의 책임인가, 그렇지 않으면 신이 행하게 한 것인가의 문제, 즉 자유의지설과 예정설과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논쟁에서 자유의지설을 제창한 자를 카다르(Qadar)파, 예정설을 주장한 자를 쟈브르(Jabr)파라고 하는데, 앞에서 언급한 육신()에 예정이 거론되어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최종적으로는 예정설이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 논쟁에는 판단 보류라는 반응도 있었다. 원래 <연기하는 자>를 의미한 무르지아파는 하드의 죄를 범한 자가 무슬림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했는지 여부는 최후의 심판의 날, 신의 심판을 기다려야 한다고 하였다. 그들의 대부분은 쿠파의 초기법학자와 중합해서, 그들은 지옥에 떨어지는 자를 1명이라도 적게 하기 위해서 이슬람법의 체계화를 통해서 현세를 사는 행동지침을 사람들에게 제시하려고 하였다. 무르지아파의 판단 보류는 단순히 죄의 문제만이 아니라, 옴미아드 왕조와 하와리주파 시아파와의 항쟁에 대한 정치적 중립도 의미했다.

 

이와 같은 사상적 풍토에서 발생한 것에 무타질라파가 있다. 무타질라라고 불린 최초의 사람인 와실 분 아타(699~748)는 신앙(이만)과 무신앙(쿠플)의 문제에 관해서 그 어느 쪽도 아닌 <중간상태>를 제창했다고 전해진다. 무타질라파는 무르지아파와 마찬가지로 사상적ㆍ정치적 중립의 입장에 서며, 무르지아파가 법학에 치우친 것에 대해서 신학에 대한 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최초에 그들이 의도한 것은 이슬람의 근본적인 교의인 타우히드(신의 유일성)를 합리적 사유에 의해서 변호하는 것이며, 신과 피조물과의 격절성을 강조해서 신의 본질에서의 다양성을 단호히 거부했다. 이것이 그들의 <창조된 코란설>로, 신의 속성이 부정된 것이다. 마침내 헬레니즘적 관념에서의 신의 정의와 그것에 증명된 인간 의지의 자유가 강조되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 방법론이 되며, 그들은 반대자에 의해서 <칼람(kalām, 사변()의 무리>라고 불렸다.

 

아바스 왕조 초기의 이단 잔다카주의의 유행에 대해서, 정부는 탄압으로 대처하고자 하였는데, 무타질라파는 합리적인 신학의 확립에 의해서 신개종자의 불만을 흡수하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그들의 합리적인 학설은 이븐 한바르를 비롯한 보수적인 울라마만이 아니라, 무슬림 대중이 지지하지 않았다. 칼리프, 마문에 의한 무타질라파 교의의 공인도 마침내 무타와킬에 의한 취소를 당하게 된다. 이때에 원래 무타질라파에 속한 아슈아리는 이 파에서 배운 칼람을 방법론으로 하면서, 신앙에 있어서 이븐 한바르의 교의를 받아들일 것을 선언했다. 이와 같이 해서 계시를 이성에 의해서 지지하는 수니파의 합리적인 신학이 제창되고, 이때 이후 수니파 신학은 칼람이라고 불리게 된다.

 

9세기의 바이트 알히쿠마의 건설 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서는 계속해서 아라비아어로 번역되었다. 원래 무타질라파에 속한 킨디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기초적 개념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고자 무슬림 최초의 철학자가 되었다. 이슬람 철학의 출발점에는 신플라톤주의 사상에 의해서 해석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있으며, 그 종점에는 이븐 루슈드를 집대성자로 하는 방대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주석서가 있었다. 킨디와 파라비는 무타질라파와 마찬가지로 계시와 이성의 조화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이븐 시나에 이르러 신학과 철학은 각각 넘지 못하는 한계를 깨달았다. 철학자는 점점 순수하게 자신의 이론을 향해서 가고, 신학자는 철학자를 위험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븐루슈드를 마지막으로 무슬림의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의 전통은 끊기고, 그후에는 이븐 아르알라비의 신지학()과 스프라와르디의 조명()철학이 결합한 십이 이만파의 신학적 철학이 이란세계에세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었기 때문에, 이슬람에서는 계시와 이성과의 대결은 겨우 회피되었다.

 

이슬람 신비주의의 기원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서 의견이 나뉘어지는데, 어느 사람은 외래의 요소를 중시하고, 또 다른 사람은 내적 발전의 입장에 섰다. 이슬람 신비주의가 코란의 가르침과 무관계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데, 이슬람의 신비적 요소와 이슬람 신비주의는 결코 동일한 것이 아니다. 이슬람 신비주의는 9세기부터 10세기에 걸쳐서 신에 대한 사랑, 신과의 합일인 파나, 신에 대한 신비적 지식인 마리파라는 세 가지 요소를 통합하고, 그 경지에 이르기 위한 지클, 사마 등의 수행방법을 정리해서 성립했다는 것이 현재 가장 온당한 견해일 것이다.

 

이슬람 신비주의는 샤리아의 형식주의화에 대한 반동으로서 생기고, 신비주의자는 이와 같은 결과를 초래한 자로서 울라마를 비난해서 양자의 관계는 긴장되었다. 아슈아리파의 신학자 가자리는 이븐 시나의 철학을 비판적으로 섭취하는 동시에, 신자의 최고의 영적체험으로서의 파나(fanā)를 높이 평가하고, 인격적인 신비적 종교체험상 수니파 신학을 재건했다. 가자리야말로 신학자의 경건함과 철학자의 엄밀한 방법론, 그리고 신비주의자의 열성적인 신에 대한 정열을 하나로 통일해서, 이슬람사상에 완성을 가져온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부 신비주의자의 범신론적 경향, 신비주의 교단의 성자숭배는 이슬람의 신앙에서 위험한 요소를 내포했다. 그러나 가자리가 신비주의 사상을 엄밀한 철학적 개념으로 무장하고, 교단도 성자숭배를 종교적 사회운동의 틀안에 머물게 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이슬람 신비주의는 수니파 신앙에서 일탈하지 않았다.

 

수니파는 칼리프의 예언자 무함마드가 함께 가진 종교ㆍ정치의 두 권한 중 정치적 권한만을 승계하였다고 보고, 입법 및 교의결정에 관련된 칼리프의 종교적 권한을 인정하지 않는다. 단, 현실적으로는 옴미아드 왕조의 칼리프가 이단으로 칭해지는 자를 처형하고, 아바스 왕조에서도 마문이 무타질라파의 교의를 공인하고, 무타와킬이 이를 취소하였다. 그러나 무함마드의 종교적 권한을 계승한 것은 이론적으로는 무슬림 전체의 이주마(합의)이며, 실제로 그것은 울라마, 그 중에서도 무쥬타히드의 이듀마에 위임된다. 오늘날 우리들이 수니파라고 하는 것은 중세 무슬림의 문헌에서는 보통 <수나와 쟈마아(전체)의 백성(ahlal-sunna waljamā 'a)>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수니파는 먼저 다수파이어야 하며, 동시에 울라마가 이주마의 결과로서 수나(확립된 관행)로 인정하는 점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와 같이 무슬림 다수의 신앙에 입각하는 수니파는 이슬람 학자 H. 기브가 지적하는 대로 <의견의 상위는 신앙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는 것으로, 오히려 신의 은총인 관용>을 특징으로 한다. 카다르파, 무타질라파는 최종적으로는 수니파에 흡수되며, 철학은 방법론을, 신비주의는 인격적인 영적체험을 제공하고, 모두 수니파의 신앙내용을 풍부하게 하는 것에 봉사했다. <신은 유일하며, 무함마드는 신의 사도이다>라는 간결한 샤하다(신앙고백)만이 수니파의 관용을 단적으로 이야기한다.

 

이슬람의 국가구성법은 다수의 무슬림이 모여서 무슬림 국가를 건설하고, 단지 1명이 칼리프를 뽑아서 그에게 이슬람법 샤리아 시행의 모든 권한을 위임한다는 전제에 선다. 이슬람 세계에 3명의 칼리프가 나란히 서서 모든 국가, 모든 왕조가 각지에 분립하고,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가 브와이프 왕조(932~1062), 셀주크 왕조(1038~1194)의 무가정치하에 놓여졌을 때, 법학자는 법을 현실과 타협시키거나, 신수()의 법의 순수성을 유지하는 심각한 2자 선택이 요구된다. 그들은 후자의 길을 선택해서 <이쥬티하드의 문은 닫혀졌다>라고 하고, 그후의 일체의 새로운 입법의 길을 굳게 닫았다. 이는 단순히 법학상의 문제만에 그치지 않고, 신비주의가 수니파 신앙 안에 자리를 잡고, 일반적으로 신비주의적 경향이 강해진 것과 함께 수니파 신학의 고정화를 초래했다. 그후 이븐 타이미야와 같이 이쥬티하드의 문의 폐쇄에 강력하게 반대하고, 신비주의자의 범신론과 성자숭배를 예리하게 비난하는 자도 있었는데, 12세기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수니파 이슬람 세계에 사상의 안정화와 고정화의 시대가 찾아온다.

 

여러 분파의 활동,

전 근대 이슬람에서 분파적 종파로 볼 수 있는 것은 각 분파를 포함한 하와리주파와 시아파이다. 하와리주파의 활동은 일찍이 쇠퇴해서 현재에는 알제리 남부, 아라비아 반도의 오만, 거기에서 전해진 동아프리카의 잔지발에 그 일파인 이바드파의 신자가 약간 존재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한편 시아파 신자는 모든 무슬림 인구의 10분의 1을 차지한다고 추정되며, 이란, 이라크, 파키스탄, 레바논 남부에 많이 살며, 그 대다수는 사파비 왕조(1501~1736)에 의해서 국교가 된 십이이맘파에 속한다.

 

서구에서도 수니파는 가끔 정통파로 해석되고, 이에 대해서 하와리주파, 시아파는 이단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양자의 관계는 그리스도교에서의 정통과 이단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리스도교에서의 이단은 고대에는 공회의에서의 신학논쟁의 결과로서, 중세에는 확립된 교회의 권위, 공인된 교의에 대한 불복종으로서 생겨났다.

 

이슬람에는 교회가 없으며, 따라서 공회의도 없기 때문에 한편을 정통, 다른 편을 이단으로 정할 수는 없다. 그 뿐만이 아니라, 하와리쥬파, 시아파가 일어난 것은 수니파라는 관념 및 실체의 성립보다 훨씬 오래되었으며, 또한 기원은 정치적이었다. 아슈아리의 『이슬람인의 교설』이 무함마드 사망 후의 초대 칼리프 선출을 둘러싼 무하지른(이주자)과 안사르(원조자)와의 대립이 이슬람에서의 의견 불일치의 시작이며, 그것이 제1차 내란에서 결정적으로 되었다는 것은 이슬람에서의 종파의 기원이 정치적이었다는 것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것이다. 하와리주파, 시아파의 기원이 정치적인 것인 이상, 두 파는 주관적으로는 <정통>이며, 그들이 적대한 그 시대의 정치권력이야말로 이단의 권화()라고 보았다. 두 파가 분파에 머무른 것은 정치권력과의 싸움에 패하여 무슬림 전체 중에서 소수파에 머물러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수파가 다수 속에서 저항의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을 때, 그들은 그 자세와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이론 무장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이 이론 무장으로 두 파는 정치적 당파에서 종파로 발전한 것이다.

 

하와리주파가 자신을 무장한 이론은 극단적인 율법주의, 죄는 신앙을 잃고, 대죄를 범한 자는 무슬림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한다는 죄의 문제, 무슬림 최고의 지도자인 이맘은 특정한 가계ㆍ민족에 관계없이 가장 우수한 무슬림이어야 한다는 이맘론이었다.

 

시아파에 있어서 이맘은 알리의 피를 받은 자이어야 하며, 그는 무함마드가 함께 가진 종교ㆍ정치의 양권을 계승하고, 그것도 잘못이 없어야 한다는 독특한 이맘론이었다. 그러나 알리의 자손은 수없이 많으며, 그 중 누구를 이맘으로 인정할지에 따라서 시아파의 분파가 발생했다. 오랜 역사 중에서 하와리주파, 시아파 모두 극단적인 행동과 주장을 하였다. 아즈라크파는 무차별한 살전으로 두려움을 샀으며, 이스마일파는 코란에는 문자대로의 해석 외에 숨겨진 오의적()해석이 있으며, 그것은 무함마드로부터 알리를 거쳐서 대대의 이맘에 전수되었다고 주장하고, 바틴파라고도 하였다. 이와 같은 주장은 이슬람과 무관계한 개인숭배를 용인하는 것으로 수니파로부터 심하게 비난받았는데, 시아파의 일파에는 이맘에게 초인간적인 성격을 부여하며, 가장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자는 알리 및 그 자손인 이맘을 신의 화신으로 보기에 이르렀다.

 

십이이맘파는 제12대 이맘, 무하마드 알문타자르의 가이바(ghayba, 은둔)와 루쥬우(rujū', 재림)를 주장하는데, 그 이맘론은 일정한 태도를 견지한다. 그들은 샤하다(신앙고백) 후에 <그리고 알리는 신의 와리(친구)이다>라는 일구를 부가해서, 이슬람법에서 정하는 순례 외에 예언자나 이맘의 묘에 대한 참배인 지야라를 신자에게 의무지었는데, 육신오행 그 자체는 결코 부정하지 않으며 무슬림 전체의 이주마(합의)가 되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하디스의 권위는 인정하지만, 그것은 이맘의 언행록에 근거해야 한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이맘론을 제외하면 수니파와 십이이맘파와의 사이에 융화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며, 역사상 십이이맘파를 쟈파르(ja' far)파라고 해서 수니파의 4법학파와 함께 위치지으려는 시도도 여러 번 이루어졌는데, 결국 이렇다 할 성과는 올리지 못했다. 

 

근대의 이슬람,

나폴레옹군에 점령된 카이로에서 역사가 쟈바루티(al-Jabarti)는 격동의 헤지라력 1213년(1798:99) 최대의 사건은 이집트로부터의 메카 순례가 그치고, 맘루크 왕조시대 이래 매년의 관행이 되었던 키스와가 행하여지지 않았다는 점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외부로부터의 힘의 충격보다도 내적인 힘의 쇠약이 중요시되었다. 18세기를 통해서 무슬림 여러 국가의 쇠퇴가 진행되고 19세기에는 총 붕괴의 정세로 발전해서 유럽지배가 확대되었다. 그 기본 요인인 사회구조의 격변, 가치관의 혼란, 문화마찰, 무력감, 특히 거기에서의 이슬람법 및 전통적 사회조직의 해체가 이슬람의 위기라는 의식을 고양시켰다. 그러나 사태의 심각함은 이와 같은 변동이나 위기가 오히려 무슬림의 권력을 도입구로서 가져왔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이슬람의 역사를 반성해서 <현상>의 변혁을 요구하는 이슬람 개혁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정치적 예속이 이슬람의 위기를 초래한 것이 아니라, 이슬람의 위기가 정치적 예속을 초래했다고 생각되었다. 예속으로의 함몰을 초기 이슬람의 정신을 상실하고 자각하지 못한 채로 지나쳐버린 사회와 사상의 주체적 약화의 결과라고 생각,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주체의 참된 역량의 회복이 요구되며, 그것은 가능하다는 확신이 근대 이슬람을 특징짓고 있다.

즉, 추락해서 쇠약한 이슬람을 강력한 이슬람으로 변환시키는 에너지가 이슬람 그 자체안에 있다는 신념이다. 유럽에 대한 종속이 가져온 비참함이나 굴욕적인 현실하에서 저항의 발판을 찾아서, 스스로의 가치를 획득해서 고치려고 할 때 — 그것을 나후다라고 했다, 문제는 항상 이슬람의 원점 회복, 원칙에 대한 복귀로 돌아온다. 거기에는 가끔 사라프(선조)의 이슬람에 대한 회귀의 주장, 경직화한 이슬람의 철저한 개혁,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이쥬티하드의 재개, 즉 이슬람법의 창조적 적용에 대한 요구가 있었다. 또한 거기에는 비판하고 저항하는 주체, 투쟁하는 공동체 의식을 국토나 근거지에 뿌리내려서 발효시키려는 운동으로서의 강렬한 지하드의 지향 또한 볼 수 있었다.  

 

첫 번째로 들어야 하는 것은 아라비아 반도에 일어난 왓하브파의 운동이다. 거기에서 발휘된 이슬람의 복고적 순화 사상과 공통되는 것은 인도의 샤 와리우라의 입장이나 그 영향하에서 북인도에 지하드를 전개하려 한 사이이드 아흐마드 발레르비의 무쟈히딘 운동, 또는 벵골에서 강력하게 전개한 파라이지 운동 등에서도 이를 발견할 수 있다. 이슬람 신비주의를 재편해서 타리카(교단)의 전통적 조직원리를 새로운 시대에 활용해서 북아프리카에 저항선을 형성한 사누시파나, 금욕과 청빈의 강조와 강렬한 메시아주의 위에 시하드국가를 구축한 수단의 마후티파도, 각각에 근대 이슬람의 상술한 것과 같은 내적 동기부여를 명확하게 제시하는 것이다. 

 

서아시아, 인도대륙, 북아프리카에 걸친 다양한 운동의 궤적 중에서, 저항하는 민족주체의 형성과 이슬람 개혁을 불가분의 과제로서 주장한 아프가니는 제국주의의 위협에 대해서 무슬림의 자기변혁에 의거한 저항의 통일ㆍ연대를 강력하게 호소했다. 현재까지 미치는 그의 영향력은 특히 주목할만하다. 아프가니의 정치적 행동주의에서는 멀어졌지만, 이슬람개혁의 고유한 과제에 가장 본격적으로 임하려 한 것이 무함마드 아브두프나 그 제자인 라시드리다였다. 그러나 이들의 운동 중에는 현실에서 이슬람 문제를 던지는 모더니스트의 입장과, 이슬람에 비추어서 현실을 바꾸려는 판다멘타리스트의 입장의 대립이 현저하게 나타났다. 전자는 정치적으로 자유로우며, 국가와 종교와의 분리를 전제로 하고, 신앙을 개인의 내면 문제로 보는 세속주의ㆍ세속화의 입장을 취하는 경향을 나타내는데 대해서, 후자는 정치적ㆍ사회적으로 수구적이거나 현저하게 급진적이며, 이슬람 국가라는 형식에서 종교와 정치의 일치를 지향하는 경우가 많다.

 

1930년대 이후, 이들 근대 이슬람의 여러 조류는 무슬림 동포단이나 파키스탄의 쟈마아테 이슬람의 경우와 같이 광범위한 대중이 참가하는 사회운동으로서도 나타나게 되었는데, 70년대부터는 더욱 새로운 단계를 급속하게 전개하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이란혁명이나 메카의 카바점거사건 등으로 나타난 사회에 뿌리 깊게 퍼져있는 대중의 전반적 정치화ㆍ급진화 상황이 발생하고 있으며, 그중에서 이슬람 혁신과 이슬람에 의한 혁신과의 과제가 보다 전면적으로, 보다 근원적으로 재인식되고 있으며, 그 결과 이 문제에 관해서 기존의 모든 운동이나 입장의 객관적인 의미와 위치가 예리하며 격렬하게 변환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슬람 문제야말로 제3세계에서, 나아가서는 보편적으로 인류 전체에 있어서 새로운 가치와 질서의 적극적 형성에 대한 중대한 방향부여를 주는 것이라는 주장이 이슬람의 이름에서 더욱더 강하게 외쳐지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슬람을 비서구적 가치체계의 하나로 추정해서 이슬람 대 유럽이라는 단순한 대립의 도식을 설정하고, 유럽적 원리를 비판하는 이슬람 세력이라는 견해에서 이슬람의 근대사를 결론짓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그러나 이슬람 또한 근대세계의 대세에 밀려서 변모와 변질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견해로 잘라버릴 수도 없는데 이는 자신의 내면을 재인식하는 위기적 의식이 강하면 강할수록 주체적 거점으로서의 이슬람의 원칙적 입장을 강조하는 것에 인간으로서 결연히 거는 대중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출처 & 참고문헌,

[이슬람 [Islam, al-Islām] (종교학대사전, 1998. 8. 20.)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종교학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

[재미있는 지구촌 종교 이야기]

[(CC BY-SA)Tab59@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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