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훈아~가고싶은 내고향,
네온불 피면 고향 그리워 목메어 운다
고 향:작사 / 남국인:작곡
고향,[ 故鄕 ],
태어나서 자라고 살아온 곳 혹은 마음속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
‘고향’이라는 말은 누구에게나 다정함과 그리움과 안타까움이라는 정감을 강하게 주는 말이면서도, 정작 ‘이것이 고향이다’라고 정의를 내리기는 어려운 단어이다.
고향은 나의 과거가 있는 곳이며, 정이 든 곳이며, 일정한 형태로 내게 형성된 하나의 세계이다. 고향은 공간이며 시간이며 마음[人間]이라는 세 요소가 불가분의 관계로 굳어진 복합된 심성이다. 공간, 시간, 마음 중에서 비중이나 우열을 논할 수는 없다. 살았던 장소와 오래 살았다는 긴 시간과 잊혀지지 않는 정을 분리시킬 수가 없다. 따라서, 고향은 구체적으로 객관적으로 어느 고을 어떤 지점을 제시할 수도 있고, 언제부터 어느 때까지 살았다는 시간을 제시할 수 있으면서도, 감정을 표현하는 데는 각인각색으로 모습을 달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움, 잊을 수 없음, 타향에서 곧장 갈 수 없는 안타까움이라는 면은 공통이다. 사람은 태어난 곳을 고향이라 한다.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 것은 생물학적인 탄생이며, 고향이라는 장소에서 태어난 것은 지리학적인 탄생이다. 그런데 내가 태어난 시간이 동일하기에 자연히 어머니와 고향은 하나가 된다. 대화로 고향을 정의하여 본다.
“댁은 삼터(쌈터라고도 한다.)가 어디시오?/예, 태어난 곳 태생지(胎生地) 말씀인가요? 전북 남원 운봉입니다. 지리산 기슭이지요. /아, 삼터 하나 좋습니다그려. 춘향이 고을 남원이며 산천 경개 좋은 운봉이니 말이오. /고맙습니다. 댁의 삼터는 어디인가요? /글쎄, 6·25 때 월남을 하였으니 실향민이지요. 함남 북청이지요. 아이들은 서울이고. /본향(本鄕)을 가보셔야 할 것인데……. /글쎄요, 죽기 전에 될는지 꿈에나 고향산천을 밟지 어디 통일이 쉬 되어야지요. 제일 선영(先瑩)이 그립습니다그려.”
지금은 돌아가셨을 부모와 조상의 묘가 있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이런 대화는 한국인의 고향관을 단적으로 표시한다. “이몸이 삼기실 제 님을 따라 삼기시니……”라는 조선시대 정철(鄭澈)의 <사미인곡> 첫머리에 있는 말대로 탄생이 ‘삼기다·삼다’이기에 고향은 출생지로서 ‘삼터’가 되고, 타향이나 객지가 아니기에 본향이다.
고향은 나와 다른 사람이라는 사람 외에 산천이라는 자연도 포함이 되기에 고향산천이라고 한다. 이전에는 고구(故丘: 옛 언덕)·고리(故里: 옛 마을)·고산(故山: 옛 산)·가향(家鄕: 집 있는 마을)·벽향(僻鄕: 먼 외진 고을)·향리(鄕里: 고향 마을)라고도 불렀다.
고향을 떠나면 출향관(出鄕關)·이향(離鄕), 타의에 의하여 잃으면 실향(失鄕)이며, 그런 사람은 나그네요 그 삶은 타향살이며 그의 고향 그리는 시름은 향수(鄕愁)며, 객수(客愁, 旅愁)라 하였다.
고향에 돌아온 것이 본 마음이면 귀향(歸鄕)이요, 어쩔 수 없으면 낙향(落鄕)이라 하였다. 이로써 보면 고향에 대해서는 그대로 눌러 사는 사람과 떠나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과 마침내 돌아가는 사람 등으로 분류가 된다.
그 상황에 따라 실로 다양한 단어가 있음은 한국인의 고향에 대한 심성이 어떠한가를 알 수 있다. 이는 고향을 떠난 사람이 주로 국내에 있는 경우이지만, 다른 나라에 가 있을 때는 좁은 고향 땅과 넓은 우리 나라 땅이 겹쳐서 고향이 곧 고국이며 조국이며 모국으로 확대된다. 이때 고국을 그리는 교포는 타국살이이며, 일제강점으로 인한 경우는 망국인이 되는 것이다.
고향에 대한 역사적 고찰
건국신화의 고향
우리 나라 건국신화의 주인공인 단군신화의 단군(檀君), 고구려 건국신화의 고주몽(高朱蒙), 백제의 비류(沸流)와 온조(溫祚), 신라의 박혁거세(朴赫居世), 석탈해(昔脫解)와 김알지(金閼智), 그리고 가락국의 김수로왕(金首露王) 등은 외지에서 들어오는 외래인이며, 먼저 살던 주민과 연합을 하여서 새 나라를 건설한다.
그런데 이 후기 외래인은 강력한 문화(철기문화·농경문화 등)를 소유하면서 대개 “하늘에서 하강한다.”는 천손하강(天孫下降) 모티프를 제시한다. 위에 든 인물 중 석탈해는 바다에서 오고 온조의 비류는 남하하는 변형이 있지만 그 본래 모습은 천손하강이다.
그런데 같은 건국신화라도 고려 건국신화나 조선 건국신화격인 <용비어천가>를 보면 “하늘에서 내려옴.” 대신에 빛나는 6대나 7대 조상이 등장한다.
이로 보면 단군신화 계열의 ‘하늘’은 건국영웅의 혈통상으로는 조상이요, 공간상으로는 조상이 살던 장소(주로 북방)요, 시간상으로는 조상의 시대이다. 그러므로 신화의 하늘은 바로 고향이 된다고 하겠다.
북쪽에서 남하해온 한민족의 이동을 본다면, 곧 고향은 북쪽이 되는 것이며, 그 고향은 하늘만큼 멀고 높고 고귀하며, 위대한 것이다.
이런 논리를 일본신화에 적용하면 일본신화의 하늘은 바로 이주(그들은 渡來)하기 전에 살던 조상의 땅 한반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고향은 조상이며 하늘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고향을 떠나는 것은 하늘을 잃음이요 조상과 이별하는 아픔이 된다. 이것을 극복하고 새로운 고향과 고국을 건설한 신화의 주인공은 진정 영웅이 되지만, 범인(凡人)은 고향상실이 곧 자기상실과 직결이 된다.
삼국·고려·조선시대의 고향
외교상의 인질(볼모)이나 전쟁 중의 포로는 고향을 강제로 상실한 불행한 무리이며, 망국의 비운 속에 적국으로 끌려간 포로는 고향과 고국을 함께 잃은 자이다. 한 예로 백제가 망하였을 때 의자왕을 위시하여 약 1만 3000명이 당나라에 포로로 끌려갔고 그들은 거의 다 귀국하지 못하였다.
그들의 재능은 파묻히고 치욕은 가득하고, 그러다가 중국인이 되고 그들을 잃은 백제는 재기할 수가 없었다. 일본으로 탈출한 백제 망국민의 일부는 바다에서 죽고, 일부는 일본 땅에 가서 고생을 하며 뿌리를 내려서 일본 사람이 되고 말았다. 고향의 상실이 조국의 상실이며, 혈연의 단절로 발전함을 볼 때 고향이 곧 생명이 된다고도 하겠다.
그 뒤 빈번한 외적의 침입으로 우리 동포가 외국에 끌려가는 일도 있었고, 한반도 내의 정치적인 변동으로 숱한 실향이 생겼다. 고려가 건국하면서 신라 왕족이나 후백제 중심 세력을 개성 방면으로 이주시킨 것이 그 한 예가 된다.
한반도를 침략하였던 외국인이 여기에 정착한 예도 있고, 외국인이 망명 혹은 경제적인 이유로 우리 나라에 정착하여 고향을 새로 정하고 살아온 예가 족보 시조이야기에 드러나기도 한다.
멀리 귀양을 갔다가 그곳에 정착한 경우나 생계와 전쟁 피난 때문에 어느 섬에 들어와 개척하여 터전을 마련한 예도 있다. 이것은 그들을 입도조(入島祖)나 입향조(入鄕祖)로 칭하는 후손에 의하여 족보에 또한 드러난다. 고향의 상실과 신설은 결국 국가 사회의 변동에 따른 개인의 생존방식에 의한다.
일제강점 이후의 고향
8세기 말 백제와 고구려가 패망한 이후 20세기 일제에 조선왕조가 강점을 당하기까지 1,000여 년간 우리 한반도에는 외국으로 나가야 하는 고향상실이 곧 고국상실로 직결되는 일은 없었다.
그 동안은 이 땅 안에서, 같은 문화와 혈통(동족) 안에서 고향상실이 거론될 뿐이었는데, 1910년을 전후하면서 일제가 이 땅에 진출하여 강점의 야욕을 보이자 고향상실 문제가 국외이주로 확대되었다. 또, 의병의 일부가 만주로 가고, 일제시대에는 중국·소련·미국 그리고 자의든 타의든 일본으로 가서 눌러 사는 동포가 많았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외국에 나갔던 동포가 귀국 및 귀향을 하기도 하였고, 기회가 없어서 현재까지 실향민으로 남기도 하였다. 이들이 실향 제1세대인데, 광복 40년이 지나자 사망하거나 노쇠하여서 2세와 3세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다시피 하였다.
2세와 3세는 그 몇 십년 살아온 나라를 조국이라 하여서 국적을 바꾸며 새로운 고향을 만들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언어와 풍속과 혈통의식이 다 사라진 것은 아니기에 기회가 있다면 귀국하고 싶어하며(소련의 사할린 동포), 고국방문을 원하며(일본교포 특히, 조총련의 조국방문), 문화와 인적 교류를 소원한다(중국의 만주, 소련의 우즈베크, 타슈켄트 거주 동포).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에 소련 극동지역으로 갔던 우리 교포는 소련의 이주정책에 따라서 중앙아시아로, 특히 타슈켄트로 몇 십만 명이 집단 강제이주가 되었는데, 이들은 그동안 한반도와 접할 기회가 없이 우리 언어와 문화를 고수하려고 노력하면서, 그러나 자연히 2대와 3대가 소련 국민으로 변하여 가는 것에 순응하면서 지내왔다.
그런데 최근 대한민국의 경제적 발전상과 1988년 올림픽 개최 소식을 접한 뒤, 고국과 고향에 대한 열의가 더해가면서 국어공부와 전통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여가고 있는 것이다.
결국, 해외에 이주한 교포들은 몇 십년이 지나도 고향과 고국을 잃을 뻔하다가 어떠한 연유로 재생한다는 끈질긴 생명력과 관심도를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일본이나 미국·중남미·오스트레일리아·동남아시아·유럽 등 자유 진영에 진출한 동포의 경우는 내왕이 자유로워서 공산권보다는 고향문제가 덜 심각한 편이라 할 것이나, 거기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람이란 객지살림·타향살이·타국생활이 고단하면 상대적으로 평안하고 포근하고 아름답고 부모형제와 선산(先山)이 있는 고향 땅을 그리게 마련이며, 바깥생활이 풍족하면 고향을 잊어버리는 법이다.
잘 산다는 자유 진영에 넉넉히 사는 교포보다 어려운 생활을 하는 중국이나 소련 동포가 국어와 우리 풍속을 더 잘 익히고 지니고 있음을 접한다. 이런 경우 고향의 의미는 타향의 고락과 상관관계가 있다고 할 것이다.
해외이주가 독립운동차·학문연구차·생계수단으로 또는 징병이나 징용 등에 의하여 발생하였는데, 떠날 때 강제로 끌려가야만 하였던 경우, 아직도 귀국하지 못하였다면 그들의 고향의식은 자발적으로 떠난 경우보다 강력하다. 강제 타향살이는 필연적인 귀향의식이 있을 때만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6·25 이후의 고향
1945년 광복 후 한반도는 남북을 가릴 것 없이 좌우 대결로 극심한 혼란을 빚었는데, 북에서 공산치하에 환멸을 느끼거나 신변의 위협 때문에 남하한 사람이 많았다.
1950년 6월 25일 공산군의 남침으로 인하여 300만에 이르는 대대적인 실향민이 발생하였다. 이것은 북한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되어서 북한 인구는 줄고, 남한 인구는 전쟁중의 인구 손실을 보충할 만큼 되었다.
지금도 학교나 직장에서 이북 피난민(실향민)의 자손은 손들어 보라고 하면 그 숫자가 파악이 될 만큼 대대적인 실향민 발생 사건이 곧 민족 대이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실향민은 북한 공산치하에서 탈출한 것을 다행으로 알고 남한에 정착하여 열심히 살아왔다.
멀지 않아 북한이 수복되면 귀향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타향에 와서 노력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생존본능에서 남하 초기에는 고향의식보다 살아가는 데 치중하여왔다.
그러나 몇 년 몇 십년이 흐르자 어쩔 수 없이 남한을 고향으로 삼고 각지에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런데 서해 쪽인 평안도나 황해도의 실향민은 서해 쪽에 많이 살며, 동해 쪽인 함경남북도와 강원도 북부에서 남하한 사람은 동해안에 많이 산다.
인천·서해5도(백령도·대청도·소청도·연평도 등)에는 전자가, 강릉·속초에는 후자가 많이 산다. 조금이라도 고향이 가까운 곳에서 살고자 한 것이다.
백령도 북쪽 두무진이라는 곳에서 보면 7㎞ 북방이 황해도의 돌출 부분인 장산곶이며 몽금포인데, 그곳에 70세가 넘은 어부가 있어 물으니 “여기가 고향이 제일 가깝기 때문에 눌러 사는 것이오. 이 나이가 되어도 물에 들어가는 것은 저기 빤히 보이는 장산곶 우리 마을인 앞 백사장에 내 몸이 닿은 바닷물이 찰삭거리라는 뜻이라오.”라고 비장하게 말하였다.
바닷물은 국경선을 무시한다는 실향민의 술회는 한국인의 고향의식을 잘 나타내는 것이다. 갈 수는 없는 고향에 될 수 있는 대로 가까이 가서 살겠다는 의지가 실현되지 못하면, 1년에 한두 번이라도 휴전선 가까운 임진각이나 강화도나 서해오도에 가서 북쪽을 바라보며, 제사를 지내고, 실향민끼리 만나서 소식을 주고받기도 한다.
북한에 남은 세대나 여기에 내려온 세대간에 깊은 차이가 있음은 물론 알지만, 고향이라는 공통분모는 있기에 이처럼 망향제(望鄕祭)가 지속이 되는 것이다. 남북고향방문단 구성이 거론된 것은 이 때문이다.
남한에 피난올 때 헤어져서 그 동안 소식을 모르던 일가친척이 현대의 문명이기인 텔레비전과 라디오에 의해서 ‘이산가족찾기운동’이 전개되어 만남에 성공을 한 일이 있는데, 이때 확인하는 두 가지 요소가 인적 사항인 성명·나이, 몸의 특징이며, 고향의 지명과 고향 동네의 요모조모였던 것이다.
고향을 공유하는 이산가족은 수십 년의 시간 차이를 단숨에 뛰어넘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은 한국 근대사의 ‘고향문제’이며 그 커다란 힘을 과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향을 뺀 근세사의 이해는 실로 어려운 것이다.
도시화와 고향상실
6·25는 극심한 파괴였다. 이 파괴는 단시간에 복구가 되어야 하였고, 많은 사람이 생존을 위해서 복구와 신설(건설)에 몰두하여야 하였다. 시급한 의식주문제를 해결할 여건은 농촌보다 도시가 유리하였다.
전쟁의 피해가 집중적으로 컸던 만큼, 그곳에 연고가 없이 살아야 하였던 이북 피난민과 도시 근처에서 도시처럼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본래 도시민과 함께 도시에 정착하여 복구사업을 하게 되었다.
정부는 급속도로 도시를 정비하여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투자를 하였다. 도시는 사람이 많고 일거리가 많고 돈이 많으며 정부의 정책 활동이 집중되어서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상업·공업·교통·유통·교육·정보산업·언론매체·무역 등등에서 농촌과 같은 농한기와 농번기 같은 완만한 반복 교대가 아니라, 후퇴가 없는 전진과 발전이 지속될 것이다.
똑같이 전쟁의 피해를 입은 국토였지만 몇 년이 지나자 도시는 활기를 띠고 농어촌은 정돈상태에 들어갔다. 땅에서 농업 소출을 하는 것은 1년에 한 번이다.
지출은 다양하게 확대가 되는데 수입은 매우 완만하고 소량이었다. 정부의 시책으로 큰 도시집중 현상을 일으켰고, 그래서 돈이 있고 살기 좋고 교육환경이 유리한 도시로 몰려들었다.
전쟁의 파괴를 복구하고 새로 건설하는 단계에서 수출입산업으로 경제 규모가 확대되자, 인력이 도시에서 급속히 요구되고 농촌 인구의 도시집중화가 일어났다. 그리하여 인구면에서 도시 증가와 농촌 축소의 대비가 점점 극심해졌다. 결국, 이북 실향민 상태와 같은 전후 남한의 실향민이 속출하게 된 것이다.
‘돈이 있는 곳을 찾아 살기 위하여 고향을 등지고’, ‘정들면 고향이니 도시가서 뿌리를 내리고’, ‘젊은 사람은 나가서 벌어야지.’,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랬지.’, ‘돈이 몰린 곳에 사람이 몰리게 마련’, ‘도시 발전에 먼저 참가한 자가 유리하다.’는 논리가 팽배하였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고 정책도 이 점을 수용하였다.
급속한 도시화 현상으로 농촌 인구는 줄고, 노동력은 노쇠하여 크게 감소되고 의욕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농촌에는 노인과 아녀자만 남고 젊은이는 도시로 빠져나간 형편에 생산을 올릴 수는 없었다.
농촌 기계화도 이들에게는 적합하지 못하였고 활용할 땅의 조건이나 기술 습득과 활용의 기회도 없었다. 1970년대의 ‘새마을운동’으로 농촌문제가 성공을 거두었으나 이런 문제에 대한 근본 해결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결국, 고향의 정의를 새로 할 때가 된 것이다.
우리 나라 사람의 호적은, 이북 피난민인 경우 고향인 이북은 원적(原籍)이며, 새로 정한 근거지는 본적(本籍)으로 나타났고, 현재 사는 곳이 주소(住所)이다. 남한 출신은 고향이 본적이며 현재 사는 곳이 주소이다. 본적은 변하지 않기에 어떤 서류를 뗄 때도 반드시 들어간다.
도시에 정착한 세대는 전반기 농촌(지방이라고 확대한 뜻이다.), 후반기 도시라는 두 가지 경험을 가져서, 고향이 평소에 잠재하다가 명절·제사와 생일 등 경조사에는 강력하게 대두하여, 다른 나라에서 보기 어려운 복잡한 귀향 활동을 일으키고 고향 사람을 만나서 향수를 달랜다. 설이나 추석 때 귀성객의 모습을 보면 잘 알 것이다.
그런데 그 자식세대에 이르면 부모의 고향이 실감이 나지 않으며, 그들이 태어나서 자랐거나 일찍 들어와서 자란 도시가 고향으로 자리잡는다. 아버지의 고향은 시골인데 아들의 고향은 도시가 된 것이다. 무슨 서류를 작성하려고 본적지인 아버지 고향을 찾아야 하거나 우편을 이용하는 경우, 고향은 힘든 곳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그런데 제2도시 세대라도 시골 고향을 버리는 것은 아니고 ‘지금 할아버지가 계신, 아버지가 이전에 자란 곳이면 나는 두 곳이 다 좋다.’는 생각은 있다. 만약, 3세대(손자)에 이르면 이런 생각은 많이 줄어들 것이다.
이북 피난민 세대가 봉착한 고향의 의미 변화는 자식과 손자를 데리고 가볼 수가 없는 북녘 땅이라는 현실이기에 더욱 심각하다.
이런 세대 변천에서 고향은 이전의 멋있는 땅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도시로 떠나온 사람은 이전 어릴 적의 고향을 생각할 때 ‘고정된 이전 모습’을 바꾸지 않았는데, 실제로 고향 땅에 가보면 거기도 적잖이 변하였기에, 고향의 꿈은 깨어지고 배신당한 것 같고, 귀중한 보물을 도둑맞은 것 같고, 고향을 방문한 자기는 늙지 않았는데, 고향 사람만 늙었다는 착잡한 생각에 빠진다.
고향의 살림 형편이 도시의 자기보다 낫다면 당혹한다. ‘정든 고향을 떠나서 생고생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을…….’하는 후회가 생긴다. 이것은 1970년대·1980년대·1990년대를 사는 한국인의 고향에 대한 심리의 일단이다.
고향의 요소들
고향을 시간과 공간과 인간의 복합개념이라고 할 때 시간은 구체적인 증거가 나타나지 않으므로 공간인 고향집·고향 마을·고향산천이 거론되고, 인간으로는 살아 있는 그곳의 고향 사람과 그곳에 묻힌 죽은 조상, 그리고 객지에 나와 있는 고향 사람들이 제시된다.
고향집
사는 곳에 따라서 농촌·산촌·어촌·강촌·도시 등이 있고, 위치에 따라 남부·중부·북부·내륙과 해안이 있고, 살림과 계급 형편에 따라서 잘 사는 곳과 못 사는 곳이 있어서 고향집은 각기 다르다.
그렇지만 대부분 시골의 농촌이라는 점에서 이를 근거로 설명하고자 한다. 집은 건물의 집과 식구들이 사는 가정의 집으로 나눌 수 있고, 인간거주·가축거주, 나아가서 가택신(家宅神)의 거주지가 되기도 한다.
옛날 집은 초가집이 거의 전부이며, 잘 사는 집이 기와집이었다. 초가집은 가을에 추수를 끝내고 이엉(날개)을 엮어서 지붕을 인다(올린다).
노란 짚으로 단정하게 지붕을 올리며 바람에 날아가지 못하도록 새끼로 사각형을 만들어가며 엮는다. 처마는 반듯하게 낫질하여 둔다. 머슴이 한해 일을 끝내는 것이 이 지붕 다듬기이며, 이것을 마치면 머슴이 떠나갈 수가 있다.
지붕뿐 아니라 담장 위에도 짚이엉을 엮어 얹기도 한다. 오래가도록 기와를 올리는 것은 기와집의 경우이다. 울타리는 나무를 베어다가 엮어서 세우는 것이 대부분이며, 대나무·탱자나무·사철나무·측백나무 같은 울타리나무를 심어서 자연스럽게 집을 두르기도 한다.
도둑을 막는 방범용 울타리 성격보다 여기가 나의 집 경계라는 표시이며, 바깥에서 안을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가리는 것이며 운치를 살리기 위한 것이다.
집안에는 살구나무·배나무·능금나무·감나무·고욤나무 등 유실수를 많이 심지만, 귀신이 살며, 그 꽃색이 도화색(桃花色)이기에 이 색에 물들어 여자의 풍기가 흐려질까 하여 복숭아나무는 집안에 심지 않는다. 또 버드나무는 요염한 여자의 허리와 비슷하여서(花柳界 뜻이 작용하여) 심지 않는다.
화단에 철철이 피는 꽃을 심는데, 집에 어린아이가 있으면 맨드라미는 그 씨가 어린아이 눈에 들어가서 비빌 때 실명할까 하여 심지 않으며, 오뉴월의 처자들의 손톱을 예쁘게 물들여주는 봉숭아꽃은 언제나 심는다.
선비는 오상고절(傲霜孤節 : 서릿발 속에서도 굽히지 아니하고 지키는 절개)의 군자정신을 자랑하는 뜻에서 국화를 심고, 사군자의 나머지인 난초·매화·대나무를 심어서 보기도 하고 그 식물에 담긴 정신을 새겨본다.
정원은 꾸미되 자연스럽게 하며 인공을 되도록 더하지 않는다. 집의 위치는 되도록 배산임수(背山臨水)라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뒤에는 산이 있고 앞에는 냇물과 들판이 있는 양지(남향)편 집을 짓는다.
땔감 제공장소·풍치장소·바람막이 장소로 산은 합당하며, 물은 식수·생활용수로 절실히 필요하기에 이런 집의 배치나 마을의 형국은 타당한 것이다.
고향집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실제 그렇지 않은 자기 집일지라도 양지바른 울타리 있는 널찍한 초가집을 그리며, 그러한 그림이나 문학작품을 좋아한다.
초가지붕에 호박이나 박넝쿨이 올라가서 주렁주렁 매달리는 것이나 울타리에 나팔꽃이 올라가며, 지붕 아래에 삼월삼짇날이면 찾아와서 새끼치며 살다가 구월구일 중구날[重九日]이 되면 강남으로 떠나는 제비가 사는 광경을 상상하기도 한다.
고향의 새로는 제비 말고 참새·까치·까마귀를 많이 드는데, 까치가 아침 일찍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오고, 까마귀가 울면 초상이 난다고 한다. 그래서 속담에, ‘까마귀라도 내 땅 까마귀라면 반갑다.’고 하여서 그 검고 흉물스러운 죽음의 사자 같은 까마귀마저 타향에서는 환영을 받는다. 고향 밖에 나와서는 고향 안의 나쁨은 다 사라지고 다 좋게만 보이는 것이다.
생활에 필수적인 우물이나 샘은 각기 자기 집에 있는 경우와 동네 모듬우물(공동샘)이 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 우물가에는 앵두나무·향나무·사철나무·버드나무를 심어서 풍취를 돋운다.
우리 집 우물은 다른 사람이 그날 먼저 길어 가면 나쁘기에 먼저 떠다두며, 따라서 우물이 없는 집은 해뜨기 전에 남의 집에 물을 길러 가는 것을 삼간다.
정월대보름에는 동네우물을 먼저 길어다 먹으려고 서로 경쟁하는 풍습(용알뜨기 풍습)이 여러 곳에 있다. 첫새벽의 물은 정기가 서린 물이기에 정화수(井華水)라고 하여서, 그릇에 떠서 장독대 같은 집안의 높은 곳에 두고 오래 치성을 하면 소원성취가 된다고 한다.
이 물은 부엌의 화신(火神)인 조왕신(竈王神)에게 바치기도 한다. 정월보름까지 농악대가 집집이 다니면서 일년 운수형통과 풍년을 빌어주는 지신밟기 걸립을 할 때 부엌에 들어가서 조왕신을 위한 굿을 한다.
집에는 조왕신뿐 아니라 여러 가지 가택신이 있어서 식구들을 보호하며 또한 그 집 사람들의 대접을 받고자 한다. 집을 지켜주는 제일 가는 신은 마루(또는 안방)에 좌정한 성주신[成造神]이며, 이 신을 위하여서 <성주풀이>라는 무당노래를 곧잘 불러주고, 장독간에는 그 집에서 제일 높은 장소로 신성하면서 간장과 된장이 음식 맛을 내는 주종을 차지한다.
따라서 건강을 좌우하기에 장독신(철륭신)을 모시고, 대문에는 잡귀와 병마가 들어오지 못하게 지키는 문신(門神)을 모신다. 문신 대신에 엄나무가시를 문의 마당 쪽 위에 걸어두는 것도 있다.
마당에는 지신이 있고 변소에는 측신(厠神)이 있으며 외양간에는 가축신이 있고, 상주하지 않는 신으로는 아기 낳을 때만 있는 삼신(삼시랑할머니, 産神)이 있고, 천연두가 돌 때는 마마(강남별성마마)가, 그리고 제사 때 찾아오는 조상신이 있다.
그런가 하면 고대 토템의 흔적으로 보이는 ‘업’이라는 준신(準神)이 있다. 구렁이업·도깨비업·족제비업, 심지어 인업(사람업)도 있다고 하는데, 좀체로 눈에 띄지 않으나, 한번 보이거나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가면 재물을 잃고 나중에 집까지 다 망한다고 한다.
업은 일종의 복신(福神)인데 대개 큰 구렁이라 하며, 누가 대문 밖에 버린 아이를 집주인이 기를 때는 ‘업이 들어왔다.’, ‘업동이가 생겼다.’고 주변 사람이 덕담을 한다.
집을 부분적인 기능으로 나누어서 신을 설정하여 섬기는 것은 가족구성원의 신앙심을 다양하게 기르는 것이기에, 고향을 떠나서 살더라도 가택신에 대한 본인이나 조상의 생각은 작용한다.
집에 함부로 못을 박거나 토목공사를 하면 ‘동티’가 난다는 의식은 바로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집이라는 중요한 가족의 공동 소유물이며 향유물을 파괴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이 들어 있다.
문지방은 신성한 안방과 속된 밖의 경계선이며, 방안의 복이 못 나가도록 막고 밖의 복이 들어오도록 열어주는 복의 출입과 개폐의 요긴한 장소이기에, 베고 자거나 걸터앉거나 발로 차고 다니지 못하도록 엄격히 자녀교육을 한다.
이것을 미신이나 불합리가 아니라 민간신앙과 속신과 금기로 보면 매우 타당한 것이다. 이러한 성장기의 고향 땅 민간 속신이 타향에 가서도 지속이 된다.
물론, 경로·효친·우애의 가풍은 고향의 전통 덕목이면서 타향에 가 있더라도 작용하는 것이다. 고향에 계신 부모에게 객지에 나간 자식이 어떻게 효도하며 금의환향을 할 것인가는 큰 염원이며 고민거리이다.
객지에 나간 자식을 위하여 고향의 부모가 희생하며 기도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고향의 정신적·물질적인 영향은 그 사람을 평생 동안 지배한다. 따라서, 고향은 장소를 옮겼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특히 고향집은 그러하다.
고향 마을
고향 마을은 고향집의 공간적인 확대이면서 어떤 문화 형태를 형성한다. 고향집의 가족이 아니라 고향 마을의 이웃과 벗과 일가친척이 된다. 고향의 마을에는 여러 가지 집이 있고 여러 사람이 산다.
간혹 미움도 있으나 사랑이 대부분이다. 사람끼리 직접 정이 오가기도 하며 나무·산·물·농토·학교·한길·고샅 같은 물질이 매개 구실을 하며, 일하기·공부하기·놀기 등의 행동이 유대를 공고히 한다.
같이 크고 같이 배우며 일한 공동의 성장 경험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우리 나라 근대화라는 이름 아래 도시집중이 일어나고 각지로 흩어진 죽마고우가 서신이나 만남으로써 이내 이 공동 경험에 도달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골목친구·동기동창·선후배·불알친구·꾀복장이동무(어려서 같이 옷벗고 컸다는 뜻) 네것 내것 없이 자란 친구라는 말이 여기에 합당한 것이다.
객지 생활이 어려울수록 고향은 그립고 객지에서 고독할수록 고향 사람은 절절한 정을 준다. 고향의 경험은 추억이 되는데, 그 추억은 기쁘고 슬프고 무서운 것이 강력한 법이다. 그 중 무서운 것은 고향 마을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담력을 기르고 용기를 심으며 겁을 물리치는 소년기의 고향 마을 경험은 차후에 부닥치는 숱한 난관을 극복할 힘으로 나타난다. 고향 마을은 일종의 예행연습 장소이며 세파를 이겨나갈 훈련장이 된다.
고향 마을에는 무서운 곳이 있게 마련이다. 상여집은 좀 떨어져서 산기슭이나 물가, 논 가운데에 있다. 상여기구 일체가 다 보관되어 있는데, 누구나 비가 올 때나 어두운 때는 가기를 꺼린다. 그러나 이곳을 갔다오는 어린아이의 용기를 또한 동네 사람은 요구한다. 무덤(공동묘지)은 이보다 더한 곳이다.
도깨비가 출몰하는 숲 속·물가·흉가는 흥미 반 공포 반을 준다. 도깨비와 씨름한 사람을 보거나 도깨비에게 홀린 경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무섭지만, 장차 인생사의 난관이 도깨비와 같을 수 있다는 데서 교훈을 받는다. 달걀귀신·멍석말이귀신이 나오는 고샅도 곳곳에 있다. 이것은 꼭 나쁜 것이 아니라 지나고 나면 유익한 것이다.
동구 밖, 곧 동네 입구에는 무서운 두 장승이 마주보고 있고, 그 동네 쪽에는 진대(솟대)에 오리가 세 마리 올려 있다. 남녀장승이 마주보고 있음은 인간미가 있는 것으로 마주본다는 것은 외부에서 잡귀가 침입하는 것을 함께 찾아내서 함께 막는다는 것이며, 동네 안의 복이 타지로 나가는 것을 막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장승은 외지인에게는 무섭고 동네 사람에게는 친근한 양면성을 가진다.
요즈음 이 친근감이 제거된 것은 장승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진대도 동네 수호신이며 홍수로 동네가 잠기듯 큰 재난이 닥칠지라도 높은 데 앉은 새가 살듯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는 것이다. 새가 높이 있어서 멀리서 오는 외적을 미리 찾아낸다는 뜻도 있다.
동구 밖의 정자나무(느티나무·팽나무·소나무)는 건드리면 마침내 병들어 죽거나 급살맞는다느니, 도둑이 물건을 훔쳐갈 때 거기를 맴돌게 하여 재물이 못 나가게 한다느니, 외적이 쳐들어오면 운다느니, 풍년과 흉년이 들 것을 미리 잎으로 보여준다는 등의 전설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늘을 드리워서 주민에게 휴식터를 제공한다.
자연보호의 일면은 이 고향 마을의 첫 정자나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만약, 이 나무가 베어지고 장승과 솟대가 사라졌으며, 도깨비숲과 상여집이 말끔하게 단장이 되었다면, 비록 건물로서 고향 마을은 있을지라도 마음의 고향 마을은 거의 사라진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자기가 사는 타향이 변모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기면서도 고향이 변모하는 것은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고향 사람
고향 사람은 이웃이다. 이웃집·이웃마을·이웃면·이웃군이라고 하여서 가까운 거리를 이웃이라 하는데, ‘이웃사촌’에서 보이듯이 이웃은 오랜 시간 사귄 인정을 내포한다.
논밭이 가까이 있으면 서로 논이웃·밭이웃이라고 한다. 이웃집은 담이나 길을 사이에 두고 있기에 그 집의 경조사는 물론, 숟가락이 몇 개인지 헤아릴 정도로 세간살이에 대하여서 훤하다.
밥상에 오른 숟가락과 반찬 정도까지 안다면 바로 경제적인 형편, 가족수의 변동,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을 다 꿰어 안다는 뜻이 된다. 이웃의 성명 삼자도 모르며 수인사도 없고 소 닭보듯 닭 소보듯 하는 몰인정의 도시 이웃 관계는 고향
이웃과 극심한 대비를 이룬다. 세세히 아는 이웃을 간섭이니 비밀노출이라고 나쁘게 보지 않는 이유는, 서로 아는 처지이기에 상부상조하고 권선징악하며 환난상휼(患難相恤)의 계제가 되며 공동이익이 되고, 이웃의 정을 악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향약(鄕約)이 조선시대 향촌의 자치규약으로 성행하면서 이웃간의 바람직한 사회생활을 부단히 교육해온 것은 이 이웃 정신에 근거한 것이다.
농업생산과 향약정신이 결합이 된 현대의 ‘새마을운동’이 농촌에서는 성공하고 도시에는 부진한 것은 이웃정신의 유무에 따른 것이다. 한 예로, 이웃이 이사를 가면 섭섭해하고 이사를 오면 반가워하였기에, 고향 사람은 정이 풍부한 사람이며, 그렇지 않은 도시는 정이 메마른 곳이라고 대비하여 말한다. 도시라도 이웃이 형성이 된 곳은 고향·이웃사람이 되기도 한다.
봄·여름·가을의 농번기에는 혼자 일을 할 수 없으므로 협동하는 ‘두레’와 ‘품앗이’가 성행한다. 공동 노동의 한 형태인 두레는 한 동네 전부나 일부가 한 덩어리가 되어서 집집이 돌려가면서 일을 하는 것으로, 이전에는 농기인 영기(令旗, 龍旗)를 세우고 일터로 나가고 논에서 풍악을 울리며 흥겹게 일을 하였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두레의 명맥만 전해오며, 경운기·이앙기·탈곡기 같은 기계를 이용하면서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부녀자들은 ‘김매기두레’·‘무명두레’·‘길쌈두레’를 하여 자기 집 연장(물레 같은 것)을 가져가서 한 집 일을 해주고 또 다른 집으로 옮겨가는 공동 노동을 하였다.
개인별로 노동을 맞바꾸는 것은 ‘품앗이’이다. 이 말은 고향을 떠난 사람이 피차 손해보지 않게 주고받는다는 말을 할 때도 쓴다. ‘혼사나 초상에 부조하는 품앗이’가 그 예이다.
이웃의 경조사에 돈을 내고 품(노동과 시간)을 들였는데도 정작 본인이 일을 당하였을 때 품앗이를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욕을 먹으며 심할 때는 공동 제재를 받는다.
머슴들의 사회에도 몇 가지 질서와 원칙이 있다. 일을 제일 잘하는 상머슴·중간머슴과 심부름을 하고 소먹이는 아이머슴은 깔(꼴)머슴이라 하여 새경에 차등을 둔다.
스무 살 안팎의 머슴은 상머슴 대우를 받기 위하여 동네 사람에게 ‘진서’(지방마다 이름이 다르다. 전북 남원의 경우 진서라 한다. 이것은 머슴의 成人式, 入社式 같은 것)라는 시험을 치른다.
담력시험과 들독들기도 있다. 들독들기는 동네 어귀의 큰 돌을 땅띔·무릎까지, 가슴까지 들어올리거나 뒤로 넘기기, 또는 나무 한 바퀴 돌기 등이다.
동네 선배 상머슴에게 술 몇 말과 고기 몇 근을 대접하면 당당한 일꾼 대우를 받는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이 머슴시험인 진서를 통과하지 못하면 제대로 대우를 못 받아서 “저 사람은 중머슴(젖머슴)밖에 못 된다.”고 하며 모자라는 사람으로 대한다.
머슴이 아니라도 들독들기는 어른이 된 증거로 하는 것이다. 일을 하여야 하는 고향 사람들에게 일정한 노동력의 층하를 두는 것이 풍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일이 없을 때는 이웃집 ‘마실가기’를 하며 이야기도 하고 음식도 해 먹고 놀기도 한다. 5일장에는 물건도 살 겸, 팔 겸, 사람도 만날 겸, 구경도 할 겸 해서 잔칫날처럼 붐비는데 이것 또한 고향 사람의 한 가지 활동이 된다.
동네에는 도덕적인 교육이 동네 사람, 특히 청소년에게 부단히 실시된다. 동네에 효자·효부나 열녀가 있으면 동네 상을 주거나 국가기관에 표창을 하도록 청원한다. 과거 그 흔적이 효자비·열녀비로서 동네에 남아 있다.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에는, 술 먹고 잠이 든 주인을 살리려는 개가 냇물에 몸을 적셔서 불을 꺼 주인을 살리고 개는 기진맥진하여 죽었다는 의견비(義犬碑)가 있다.
현재 전국 25개 장소에 의견비 같은 의견 증거물이 있다. 이밖에도 의우비(義牛碑)·의마비(義馬碑)가 있는 것은 결국 개·소·말보다 나은 도덕적인 인간이 되라는 교훈을 제시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불효자는 동네 벌을 주는데 한 예가 ‘멍석말림’이다. 멍석에 패륜아를 두르르 말아서 누가 때리는 줄도 모르게 공동으로 매질을 소리나게 하는 것인데, 고통보다는 인격적인 파탄자로 지목이 되어서 벌이 되는 것이다.
동네에는 이전에 좌장(座長), 향교의 담당자, 서당훈장, 문중어른, 우는 아이의 울음을 뚝 그치게 할 정도로 무서운 호랑이 할아버지 같은 존경받는 지도자가 있어서 풍기를 잡았다.
노인들이 가서 놀며 동네 인심을 평가하는 노인당(경로당, 노인정)이 곳곳에 있으며, 고향을 찾는 젊은 사람이 그 노인당에 가서 인사를 드리는 것이 법도이다. 문중어른이나 이웃어른에게 귀향한 젊은이가 인사올리는 것은 상식이다.
고향 사람들 중에는 궂은 일을 도맡다시피 하는 사람, 놀이나 제사를 주도하는 사람, 교육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신체나 정신면에서 부족하여 놀림감이 되는 사람도 있다.
대장간·가게·땜장이·접골사(接骨師 : 속칭 팔빼 박는 집), 체내는 집, 한의원·한약방, 민간요법에 달통한 사람, 그 민간 약을 모아둔 사람, 풍악을 잘 하거나 상여노래를 잘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소나 돼지나 말의 병을 잘 치료하는 수의사, 짐승의 접[交尾]을 붙여 새끼 낳게 하는 집, 옷집·목수·특수직업(갓장이·품팔이·한량노름) 등 필요한 사람이 동네 사람으로 살고 있다. 이들이 화제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딸부자·아들부자, 입담이 좋아서 몇 날 며칠 밤을 새워도 같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인기 있는 사람도 있다.
오래 전에 애국활동·교육활동·치산치수에 공을 세워서 후대 동민에게 혜택을 입히는 고마운 선인(先人), 문중을 빛낸 조상의 비가 실제 석비(石碑)로든, 또는 구전하는 구비(口碑)로든 존재한다.
벗이 되는 개, 재산을 불려주는 닭, 일 잘하는 소, 새끼 잘 낳는 돼지, 무서운 말 같은 가축도 고향 사람 같은 대우를 받는 구성원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소의 경우, 결코 어느 한 집의 소가 아니라 동네 전체의 일을 하는 공동소유의 성격을 띤다.
고향을 떠난 사람이 어느 곳에 모여서 일정한 때 군민회·면민회·향우회·동창회를 가지며, 고향이 동족 마을일 때는 문중회·화수회를 가진다. 객지의 고독을 서로 나누며 고향의 발전을 위해서 헌신도 한다.
한 예로 전라북도 남원의 음력 사월초파일인 춘향의 생일날을 기리는 춘향제는 현지 남원시 군민과 재경 남원향우회가 공동으로 주최를 하고 있다.
고향 모교 장학회도 한 예이다. 이북 피난민의 경우, 넓은 도까지 고향으로 여겨서 도민회를 성대히 가진다. 갈 수 없는 고향일 때는 그 규모가 더욱 커지는 것이다. 고향 사람과 고향 땅이라는 결합이 없다면 외국에까지 향우회나 동창회가 생길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제 고향은 국내 차원은 물론 국외까지 그 의미를 가진다.
회화에 나타난 고향
예술의 세계에서 고향은 아름다운 과거의 그림이며 어머니 같은 정서의 안정을 주는 대상이다. 이웃도 모르는 도시, 각박한 인심, 급변하는 사회, 영악한 이해관계, 외국문물이 쏟아지는 사회, 노쇠하여가는 나의 육신, 이러한 것과 대비가 되는 것이 고향이다.
그래서 그림에 나타나는 고향은 박이 오른 초가, 굽은 담, 잘 자란 벼, 여자가 김매는 밭, 효자비나 제각, 닭과 개 같은 가축, 담배를 문 할아버지, 둘러싼 산, 나무다리가 놓인 냇물, 어촌이면 만선의 깃발을 올린 어선, 산촌이면 지붕에 너와를 올린 너와집, 그리고 고향 마을 위에 있는 향교나 절, 정자나무와 장승이 잘 나타난다.
우리가 흔히 이발소 그림이라고 하는 풍경 그림은 대표적인 고향 이미지를 보여준다. 호수·산, 지게에 나무를 짊어진 농부, 소·개·닭·다리·물레방아, 연기가 오르는 초가의 굴뚝, 집뒤의 대나무(남부지방 경우)가 주된 소재이다. 크리스마스카드나 그림연하장도 마찬가지이다.
장날·혼인잔치·세배, 제기차기와 연날리기와 씨름 같은 놀이 및 세시풍습, 우물가나 냇물에서 빨래하는 여인도 카드에 잘 나타나는 소재이다. 이러한 소재를 볼 수 없게 되자 민속촌·민속마을·자연보호구역 같은 고향 지키기 형태가 곳곳에 생기게 되었다. 용인과 안동 민속촌이 대표적인 예이다.
민요와 시가와 가요에 나타난 고향
민요 <아리랑>의 고향은 고향을 떠나지 말라는 것이 주종이다. 고향에는 부모·임·인정 같은 불변의 요소가 있는데 어찌하여 낯설고 물선 곳으로 야속하게 가는가라는 만류와, 그래도 떠나는 사람에 대한 원망과 아쉬움이 들어 있다.
<아리랑>의 이별은 쓰리고 아린 심정이기에 ‘아리다’라고 하여 아리랑(쓰리고 아림이 합쳐서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이라고 한 것으로 추측된다.)이라는 말이 되었다고 어원을 추정한다면 고향은 그 쓰라림이 치유되는 곳이 된다.
그 시각적인 치유요소가 그림(회화)으로 형성이 된 것이고, 청각적으로 표현이 된 것이 기록문학과 구비문학이다. 김소월(金素月)의 <진달래꽃>과 고려가요의 <가시리>·<서경별곡>은 결국 고향에 있는 임에게 떠나지 말아달라는 당부인 것이다.
고려가요 <청산별곡>은 고향을 잃은 유랑의 무리가 부른 내용이다. 청산에 가서 살까, 바다에 가서 살까? 깊은 산중에서 절대 고독 속에 살까, 억울하게 돌을 맞고 살아가야 할까? 무엇을 먹고 무엇을 보고 어디에다가 정을 붙이고 살까? 이러한 고뇌를 담고 있는데, 이것은 다 고향을 떠나서 유랑하기 때문이다. 뿌리가 뽑힌 나무가 어찌 온전할 것인가, 고향을 떠난 사람이 어찌 평안할 것인가를 뜻한다.
‘고향 떠나면 고생이다.’, ‘고향을 떠나면 천하다.’, ‘내 집이 제일이다.’, ‘고기도 저 놀던 물이 좋다.’라는 우리 속담은 이 점을 잘 말해주는 것이다.
신라시대 최치원(崔致遠)이 당나라에 가서 쓴 <추야우중 秋夜雨中>이라는 시는 고향을 그리는 시의 고대 형태가 될 것이다.
“가을 바람에 홀로 시를 읊으니/세상에 내 마음 아는 이 없네/창밖에는 밤이 깊도록 비가 내리고/등 앞에 앉은 이내 마음은 만리고향으로 달리네.” 타향에서 비가 올 때는 울적하며, 달을 볼 때는 부모 생각이 간절하고, 몸이 아플 때는 슬프고, 돈이 떨어질 때는 막막하다. 이러한 경험은 바로 고향에는 이런 일이 없으리라는 것을 뜻한다. 최치원의 이 시에 나타난 향수는 예나 이제나 변함이 없다.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가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읊은 <봉사일본 奉使日本>에서도 고국을 그리는 정은 같다. “섬나라에 봄이 돌아와도/나는 하늘 끝에 떠도는 나그네/풀은 천리만리 짙푸르고/저 달은 두 나라를 비추누나/일본을 달래며 황금은 스러지고/돌아갈 이내 몸에는 흰 머리만 나누나/아, 사나이 품은 큰 뜻은/사방에 이름을 떨치는 이것뿐일까.” 멀지 않아 귀국할 사신이지만 고독하고 힘이 들기에 봄철 달을 보자 공명보다 더 귀한 고국과 고향 생각을 절절이 읊은 것이다.
조선 중종 때 시인 임억령(林憶齡)은 친우 백광훈(白光勳)이 귀향할 때 고향에 갈 수 없는 자기 신세를 <송백광훈환향 送白光勳還鄕>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강에 뜬 저 달은 둥글다가 이즈러지고/뜰 앞의 매화는 피고 지고 지고 피는데/다시금 봄이 와도 갈 수 없는 나는 갈 수 없어라/홀로 다락에 올라, 올라 고향을 바라보노라.”
이 시의 마지막 구인 ‘독상망향대(獨上望鄕臺)’에서 망향대라는 구절은 오늘날 임진강 근처의 망향의 장소, 서해 5도의 하나인 대청도(大靑島)의 망향비, 경부고속도로에 있는 휴게소인 망향의 동산 등과 무엇이 다른가? 이처럼 망향의 시정은 어느 때나 변함이 없다.
지금까지 인기 있는 일제강점기의 대중가요인 고복수(高福壽)가 부른 <타향살이>, 김정구(金貞九)가 부른 <눈물 젖은 두만강>이나 조용필(趙容弼)이 부른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다 고향을 그리는 가요이며 인기 있고 생명력이 긴 것이다. 어머니와 고향과 사랑이 가요의 중요한 요소임은 익히 아는 바이다.
이은상(李殷相)이 지은 10수의 연시조 <가고파>는 김동진(金東振)이 작곡하여 애송·애창이 되는데, 갈 수 없는 고향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10수 중에 제1수와 제10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내 고향 남쪽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꿈엔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바다/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와 “거기 아침은 오고 또 거기 석양은 져도/찬얼음 바람은 듣지 못하는 그 나라로/돌아가 알몸으로 살꺼나 깨끗이도 깨끗이”이다.
이 연시조의 끝마디는 가고파라 가고파(1절), 보고파라 보고파(2절), 돌아갈까 돌아가(3절), 찾아가자 찾아가(4절), 그리워라 그리워(5절), 가 안기자 가 안겨(6절), 아까워라 아까워(7절), 부러워라 부러워(8절), 노래하자 노래해(9절), 그리고 깨끗이도 깨끗이(10절)라고 하였다. 시인이 고향을 표현할 수 있는 겹쳐지는 이 10가지 단어는 심금을 울리는 공통분모이다.
박용철(朴龍喆)의 <고향>, 이병기(李秉岐)의 ≪가람문선≫에 실린 고향시, 노천명(盧天命)의 <고향>, 김수영(金洙暎)의 <고향>, 윤동주(尹東柱)의 <또 다른 고향>, 이원섭(李元燮)의 <내고향>, 김규동(金奎東)의 <고향> 같은 시는 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거나, 가보니 이전 고향을 잃어버린 아쉬움을 담고 있다. 시에서 고향은 아련하게 저 멀리 있는 것이다.
만약, 고향을 빼앗겼다면 어찌될까? 그 고향이 조국 땅이면 어떨까? 이상화(李相和)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첫 구절을 새겨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결국, 고향은 지켜야 하는 신성한 곳이며 반드시 가보아야 하는 운명의 장소이며, 시인을 격동시키고 독자를 눈물짓게 하는 마법과 같은 땅이며, 언제나 풍경이나 인정이 아름답다는 설정이다.
이원수(李元壽)의 <고향의 봄>이나 김동환(金東煥)의 <봄이 오면 산에 들에>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고향의 봄).
그리워는 하되 못 가서 안타깝다는 긴장은 없고 정지된 과거시간을 묘사하는 점이 잘 드러난다. 우리 나라의 시가에서 ‘고향을 떠나지 말자.’,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 ‘고향은 언제나 아름답다.’는 세 유형을 이처럼 제시하여보았다.
설화와 소설에 나타난 고향
이전에 벼슬을 살다가 낙향을 하는 선비는 그곳을 강호(江湖)라 하여서 여유 있게 살아, 시·시조·가사를 지었는데, 이들은 고향을 찬미하는 것보다 고향 땅 자연 자체가 자신이라는 점을 제시하였다.
낙향한 선비는 고향에서 의원·훈장·풍수(風水, 地師)·저술 등으로 시간을 보내며 수입을 만들었던 것이다. 고향은 이래서 물질과 정신면에서 생활을 보장하여주었다.
설화에서도 고향을 떠난 사람은 금의환향하여서 정든 부모가 있는 고향을 빛낸다고 하였다. ‘어떤 소년이 가난하게 살기에 점을 쳐서 노모를 고향에 두고 서천서역에 복을 타러 갔다. 도중에 만난 시집가고 싶은 여자, 황금꽃을 피우려는 아이, 등천하려는 이무기의 청까지 가지고 서역국에 가서 부처님을 만나니, 본시 복이 없어서 어찌할 수 없다고 하며 대신 세 명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소년은 심부름을 해준 대가로 이무기로부터 여의주[權, 貴]를, 아이로부터 황금[富, 財]을 얻어서 그 여자[色]를 아내로 맞아 집으로 돌아와서 잘 살았다.’는 <구복여행설화 求福旅行說話>, ‘어떤 사람이 장사를 나가 번 돈으로 점을 쳐서 그 점괘대로 더 큰 부자가 되어 귀향하여 잘 살았다.’는 <천냥점이야기> 등은 각오하고 고향 떠나기, 객지에서 고생과 돈벌기, 귀향하여 잘 살기 등의 구조를 가지는 것이다. 귀결점은 고향이다.
우리나라에서 나이 든 사람이 죽으면 ‘돌아가신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승은 나그넷길이요, 저승이 본 고향이 된다는 말이 된다.
이런 경우는 세상이 달라져서 내가 자란 고향개념이 잘 적용이 안 될 것 같으나, 크게 보면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의 개념이나 ‘돌아가신다’는 개념은 다 삶의 귀향의식, 귀소본능(歸巢本能)을 뜻하는 것이다.
현대소설에서 고향을 다룬 것은 허다하다. 최학송(崔鶴松)의 <탈출기 脫出記>, 이호철(李浩哲)의 <서울은 만원이다>, 이정환(李貞桓)의 <샛강> 등 여러 작품이 있는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김동인(金東仁)의 <붉은 산>이다.
이 작품은 1933년 만주로 풍토병을 조사하러 간 여(余)라는 의사의 수기 형식의 단편소설인데, 무대는 만주의 한국인 동네이다. 이곳 한국인은 고향 땅을 등진 실향민들이다. “문전옥답 다 버리고/바가지 쪽박이 웬말이냐.”는 1920년에 유행한 노래의 현장이라 할 곳이다.
여기에 천하의 악종인 파락호 ‘삵’이 등장하여서 갖은 악행을 저지르다가 나중에 민족의 의분이 끓어올라서 중국인 지주와 싸우다가 맞아서 허리가 기역자로 뒤로 부러져서 밭고랑에 넘어졌다.
그는 죽어가면서 “붉은 산과 흰 옷이 보고 싶다.”고 하며 애국가를 불러달라고 유언하였다. 아무리 악인이라 하여도 고향, 그 고향의 확대 발전 모습인 조국에 대한 아름다운 정은 있는 것이며, 이것이 진리라는 점을 드러낸 것이다. 고향 땅에 묻힐 수 없는 ‘삵’의 비극은 바로 민족항일기의 한국인을 상징한 것이다.
이정환은 1976년 ≪창작과 비평≫지에 <샛강>을 실었는데, 여기에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와서 고생하며 사는 실향민과 이농민의 생활이 있는가 하면(한강 하류의 샛강으로 상징), 남북이 분단되어 돌아갈 수 없는 실향민의 생활이 있다(임진강으로 비유). 갈라진 샛강이 다시 합해져야 하듯이, 귀향을 하여 통일을 해야 된다는 염원이 잘 나타난 작품이다.
나라를 잃어 외국에 나가서, 분단이 되어 남하하면서, 살기 위하여 도시로 와서 사는 실향민을 소재로 한 작품은 계속 출현할 것이며, 이때마다 ‘고향’이라는 구심점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명료하게 존재할 것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우리 한국인은 하와이·중남미 등으로 노동자이민을 가기도 하였다. 그 이전에는 임진왜란 때 포로로 일본에 끌려가서 정착한 사람(일본의 도예가 沈壽官의 조상, 천주교순교자 오다 주리아)과, 일본을 거쳐 유럽까지 가서 산 사람(이탈리아에 간 안토니오 金의 경우), 청나라 땅, 만주나 원나라 땅, 몽고로 끌려간 포로들도 있었다.
이들의 활동은 일부 작품이나 기록, 전설로 전해오고 있는데, 고향에 대한 향수는 더 논할 것이 없다. 임진왜란 때 남원에서 생이별을 한 부부가 중국에서 다시 만나 귀국, 귀향한 내용인 선조시대 유몽인(柳夢寅)의 <홍도전 紅桃傳>과 작자 미상의 <주생전 周生傳>에서도 그립고 반드시 돌아가야 한다는 고향의식을 역력히 볼 수 있다.
한국인의 고향-그 특징과 의미
한국인의 고향은 국내에 있을 때는 낳아서 자란 부모가 계신 고을이 되며, 국외에 나가 있을 때는 그 고을과 조국이 다 해당이 된다. 생사와 종교에 관해서는 이승일 때도 있고 저승일 때도 있다. 신화에서는 조상이 사는 북쪽이 고향이 되며 성스럽고 존경이 가는 땅이다. 이처럼 고향의 정의는 다양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고향은 고향집·고향 마을·고향산천·고향 사람들로 나타나는 시골의 정든 모습이며, 고향에 살고 있다면 아름답게 보존하거나 훌륭하게 발전시킬 일이며, 객지에 있다면 자랑하며 지원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곧, 현대의 도시집중화 현상과 6·25로 인한 북한 동포의 남하, 그 이전의 일제침략으로 인한 해외이주 등으로 고향은 심적으로는 영원한 구심점이 되지만 현실적으로는 실향상태가 발생하여 여러 가지 갈등을 양산하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변하는 한국의 시대상과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한국인의 심성이 예리한 대비를 한다고 하겠다. 이 심성은 회화·시가·소설·가요 등으로 다양하고도 절절하게 표현이 되었다.
돌아가야 한다는 당위와 갈 수 없다는 현실의 간격 속에 고향은 존재한다. 이 고향을 다시 찾아보겠다는 각오가 크면 클수록 지방과 도시가 고루 발전할 것이다.
또한 남북한의 통일이 촉진될 것이며, 해외 교포와 국내 동포 사이의 접촉이 일어나서 국가가 발전할 수 있을 것이며, 한국의 특수성과 세계의 보편성을 띤 예술작품이 생산될 수 있을 것이다. 곧, 한국인의 고향의 특징과 의의는 긍정적이며 생산적이라고 본다.
참고문헌
『한국민속대관』-1∼6(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1982)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충북편-(문화재관리국, 1977)
「이정환의 샛강론」(최래옥, 『장암지헌영선생고희기념논총』, 형설출판사, 1980)
「한국문학의 사회사」(임종국, 『정음문고』32, 정음사, 1974)
[고향 [故鄕]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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