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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역사 (국내)

관우關羽(,guān y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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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關羽.

자()는 운장(, 원래의 자는 장생())이다. 시호()는 장목후(라고도 쓴다)이다. 오래전부터 중국의 민간에서 충의()와 무용()의 상징으로 여겨져 무성()이나 관성제군(), 관제성군() 등으로 숭배되었고, 줄여서 관성제, 관제군, 관제, 성제 등으로도 불린다. 《삼국지연의》에는 아름다운 수염을 가지고 있었고, 유비(장비()와 함께 의형제로 도원결의()를 맺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때문에 미염공()이나 관이야() 등으로도 불린다.

중국 하동군 해현( , 현재의 산시성[西] 윈청시[]) 출신으로 이곳은 중국 최대의 염호()인 해지()가 있어 소금 생산지로 유명했던 곳이다. 한() 나라에서는 소금이 국가 전매품이어서 밀매가 성행했는데, 관우는 소금 밀매에 관여하다가 염상()을 죽이고 유주 탁군( 涿, 지금의 허베이성[] 줘저우시[涿])으로 도피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유비를 만나 장비와 함께 그의 호위관이 되었다. 유비가 평원상()이 되었을 때 관우는 장비와 함께 별부사마()가 되어 군대를 나누어 통솔했다. 

유비와 관우, 장비는 형제처럼 관계가 돈독하였다고 한다.  삼국 시대 촉()나라 하동() 해현() 사람. 자는 운장()이고, 본래 자는 장생()이다. 후한 말 동란기에 망명해 탁현(涿)으로 달아나 유비()를 만나 거병했다. 장비()와 함께 의형제를 맺고 평생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다. 건안() 5년(200) 조조()가 동정()하자 유비는 원소()에게 달아났는데, 그는 조조에게 사로잡혀 편장군()에 임명된 뒤 귀순 종용과 함께 예우를 극진히 받았다. 이에 관우는 조조의 적 원소의 부하 안량()을 베어 후대에 보답한 뒤 한수정후()에 봉해졌지만 유비에게 돌아갔다.</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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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208) 적벽대전 때 수군을 인솔하여 공을 세우고, 19년(214) 유비의 익주() 공략 때는 형주()를 지키면서 촉나라의 동방 방위를 맡는 등 무력과 위풍()이 조조와 손권()마저 두렵게 했다. 24년(219) 전장군()에 올랐다. 조인()을 공격해 격파하는 등 위세를 떨쳤다. 형주에서 촉나라 세력의 확립을 위해 진력하다가 얼마 뒤 손권()이 여몽()을 보내 형주를 공격했는데, 패하고 사로잡혀 아들 관평()과 함께 죽음을 당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는 충신의 전형으로 등장하고 있다. 송나라 이후 관제묘()를 세워 무신() 또는 재신()으로 모시는 등 중국 민중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시호는 장무()다.

199년 유비는 서주자사() 차주()를 죽이고 하비성()을 차지했고, 유비가 소패()로 귀환한 뒤에도 관우는 남아서 하비성을 지키며 태수()의 일을 맡았다. 그러나 200년 조조()가 동정()에 나서 유비가 원소()에게 투항하자, 관우는 유비의 가족과 함께 조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 조조는 관우를 편장군()으로 삼아 후하게 대우했으며, 관우는 백마()에서 벌어진 원소와의 전투에서 장료()와 함께 선봉으로 나서 원소의 수하장수인 안량()을 죽이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조조는 관우를 한수정후()로 봉했으나 관우는 조조를 떠나 다시 유비에게 합류했다. 그리고 유비와 함께 형주()의 유표()에게 가서 신야()에 주둔했다. 

208년 유표가 죽은 뒤 형주목()의 지위를 계승한 유종()은 남하한 조조의 군대에 항복했다. 그러자 관우는 유비와 함께 하구()에 주둔하던 유표의 장남 유기()와 합류했다. 그리고 손권()과 연합해 벌어진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군대를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 뒤 형주의 남군()을 둘러싸고 벌어진 공방전에서는 조조의 원군을 차단하는 임무를 맡았고, 유비가 강남의 무릉군()·장사군()·계양군()·영릉군() 등을 차지한 뒤에는 양양태수(), 탕구장군()으로 임명되어 강북 지역에 주둔했다.

유비가 익주() 정벌에 나섰을 때에도 관우는 형주에 남아 그곳을 지켰다. 215년에는 손권의 수하장수인 여몽()이 형주 공략에 나서 장사군·계양군·영릉군을 공격해오자 관우는 병사를 이끌고 출정해 익양()에 주둔했다. 그러나 조조가 한중()을 공격해오자 노숙()과의 담판으로 다시 손권과의 화친을 이끌어냈다. 219년 유비가 한중왕()이 된 뒤에 관우는 전장군()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 해에 조인이 지키던 번성()과 여상()이 지키던 양양()을 포위해 공격했다. 조조는 조인을 지원하기 위해 원병을 보냈는데, 우금()이 이끌던 원병은 범람한 강물에 갇혀 관우의 포로가 되었다. 

관우의 공세로 천도를 고려해야 할 정도로 위협을 느낀 조조는 서황()을 장수로 한 원군을 번성으로 보내는 한편, 강남의 영유권을 넘기는 조건으로 손권과 손을 잡았다. 손권은 자신의 영토인 상관()에서 관우가 쌀을 공출해간 것을 구실로 관우의 배후를 기습해 형주의 남군을 점령했고, 관우는 조조와 손권에게 양쪽에서 협공을 당하게 되었다. 결국 관우는 조조가 원군으로 보낸 서황의 군대에 패해 번성의 포위를 풀고 맥성()으로 퇴각했다. 그리고 포위를 뚫고 탈출을 시도하다가 중국 건안() 24년 음력 12월에 임저()에서 아들인 관평()과 함께 손권의 군대에 붙잡혀 참수되었다. 손권은 그의 머리를 조조에게 보냈고, 조조는 제후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오늘날 그의 몸이 매장된 것으로 알려진 후베이성() 당양()의 무덤은 관릉()으로, 그의 머리가 매장되었다는 허난 성() 뤄양()의 무덤은 관림()으로 불린다.

관우의 죽음에 분노한 유비는 221년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정벌에 나서 당양의 그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고 옥천산()에 사당을 세웠다. 그리고 유비의 아들인 유선()은 260년 관우에게 장목후()라는 시호를 주었다. 관우에게는 관평 이외에 관흥()이라는 아들이 있었고, 관흥에게는 관통()과 관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263년 나라가 멸망했을 때 관우에게 죽임을 당한 방덕()의 아들 방회()가 관우의 후손들을 모두 몰살시켰다고 전해진다.

《삼국지연의》에서 관우는 신장이 9척이나 되고, 붉은 얼굴에 2척이나 되는 길고 아름다운 수염을 가지고 있으며, 82근이나 되는 청룡언월도()를 휘두르고, 적토마()를 탄 용맹한 장수로 묘사된다. 그리고 유비·장비와 의형제로 도원결의를 맺었고, 화타가 마취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독화살을 맞은 어깨를 째서 뼈를 긁어내는 수술을 하는데도 태연하게 바둑을 두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그리고 맏아들인 관평은 양자로 기록되어 있고, 관색()이라는 아들도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이 내용들은 모두 실제의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고, 후대에 각색되어 덧붙여진 것들이다.

관우는 오래전부터 충의와 무용의 상징으로 중국의 민간에서 각별히 숭배되었다. 송()나라 이후에는 관제묘()를 세워 그를 무신()이나 재신()으로 모시는 등 민간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도교에서는 그를 협천대제()·복마대제()·익한천존() 등으로 숭배하며, 유교에서도 문형성제()로 숭배된다. 불교에서도 그를 호법신()의 하나로 받아들여 가람보살()로 숭배하기도 한다.</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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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관우 숭배는 임진왜란 때 파병된 명나라 병사들을 통해 조선에 전해지기도 했는데, 1601년(선조 34)에는 명나라의 요청으로 왕궁 인근에 관우에게 제사를 지내는 동관왕묘()가 세워지기도 했다. 줄여서 동묘()라고도 불리는 동관왕묘는 1963년에 보물 제142호로 지정되었다.


1. 삼국시대 명장군

삼국시대 촉한()의 명장군으로 자는 운장()이라 했고, 하동() 해량(, 지금의 산시(西)성 윈청())사람이다.

일찍이 장비와 함께 유비를 따라 혼란기 전쟁에 나서 별부사마 가 되었고, 세 사람은 한 몸처럼 마음이 통했다.

가족관계로는 장남 관평, 차남 관흥이 있었는데, 관평은 관우가 죽을 때 함께 죽었으며, 관흥은 제갈량의 6차 북벌 때 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2. 신격화되어 숭배하다

관우는 중국 문화사에서 충의와 용맹의 상징처럼 인식되는데, 민중들은 그를 존경하여 관공, 관노야라고 불렀다. 여러 차례 후대 제왕들의 추봉을 받았는데 그 중 위 무제(조조와 관련이 깊다.

중국에서는 관우를 무신과 재복의 신으로 추앙하는데 ‘관성제군()’, ‘관성제()’, ‘관제군()’, ‘관제()’ 등의 여러 이름으로 신격화하여 부른다. 도교에서도 받들어져 ‘문형성제()’, 혹은 ‘협천대제()’, ‘익한천존()’이라 하였다. 불교계에서도 호법신()으로 받들어져 ‘가람보살()’이라 하였다.

민간에서는 『삼국지연의』의 영향으로 관우와 유비장비가 결의형제로 알려져 있고, 그 중에 서열이 둘째로 인식되어 속칭 ‘관이야()’, ‘관이가()’ 등으로도 불렸다.

3. 전쟁의 영웅

헌제 건안() 5년(200) 유비가 조조에게 패하여 관우는 포로가 되었다. 조조는 관우를 극진히 대접하며 편장군()으로 삼았다. 관도지전 에서 조조가 원소와 전투를 벌였고, 원소의 대장 안량이 백마(, 지금의 허난()성 활현 동쪽)를 공격하자 관우는 만인이 보는 앞에서 말을 몰아 안량의 목을 베어 백마의 포위를 풀어 조조에게 보답을 했다. 그런 다음 관우는 유비에게로 되돌아갔다.

건안 13년(208) 조조가 남방 정벌에 나섰다. 유비는 번성(, 지금의 후베이성 양양)에서 철수하는 한편 관우에게 수군을 거느리고 한수() 강을 지나 강릉 에서 합류하도록 했다. 그런 다음 함께 하구()로 가서 손권의 군대와 연합하여 적벽()에서 조조의 군사와 전투를 벌였는데, 이것이 바로 적벽대전이다.

적벽대전 이후 관우는 양양태수() 겸 탕구장군()이 되었고, 유비가 익주 를 차지하자 관우는 형주(, 지금의 후베이성 징저우)를 관리하며 강릉에 주둔했다.

건안 24년(219) 전장군()으로 승진하여 군대를 이끌고 조조의 대장군 조인을 번성에서 포위했다. 때마침 한수 강이 넘쳐 조조의 7군을 수장시키고 우금()에게 항복을 받고 장수 방덕을 참수하여 북방에 그 위세를 떨쳤다. 이에 조조는 도성을 허()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전략으로 관우의 칼끝을 피할 수 있었다.

4. 손권의 형주 지배 야욕의 희생양

조조의 모사 사마의와 장제가 손권과 유비 간의 갈등을 이용하여 강남의 땅을 나누는 조건을 걸어 손권으로 하여금 관우의 후방을 공격하게 하자는 대책을 내놓자 조조가 이를 받아들였다. 그 해 손권은 관우가 번양(, 지금의 장시(西)성 포양현)에서 작전을 벌이고 있는 틈을 타서 여몽을 보내 형주를 습격하게 했다. 후방이 비어있는데다 관우가 평소 부하들에게 야박하게 대우한 불만 등이 겹쳐 강릉의 수장들은 싸우지도 않고 항복해버렸고, 이 통에 관우의 가족들이 모두 오나라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관우가 서둘러 양양에서 돌아왔지만 병사들이 너나할 것 없이 전투의욕을 잃어버려 하는 수 없이 서쪽 맥성()을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 12월 장향 에서 아들 관평과 함께 손권의 군사에게 포로로 잡혀 처형되고 말았다.

5. 충의의 화신

관우는 삼군을 통솔하면서도 『좌전()』과 같은 책을 즐겨 읽었다. 그래서인지 “그가 제기하는 책략은 모두 뛰어났다.”고 한다.

중국의 역대 황제에게 충의()의 화신인 관우는 무조건적 충성의 좋은 본보기였기에 관우를 우대하고 여러 시호를 봉했다. 그 종류는 아래와 같다.

나라황제연대봉호

북송

송 휘종

숭녕원년(1102년)

충혜공()

북송

송 휘종

숭녕3년(1104년)

숭녕진군()

북송

송 휘종

대관2년(1107년)

무안왕()

북송

송 휘종

선화5년(1123년)

의용무안왕()

남송

송 고종

건염2년 (1128년)

장무의용무안왕()

남송

송 효종

순희14년(1187년)

장무의용무안영제왕()

원 태정제

천력8년(1335년)

현령의용무안영제왕()

명 신종

만력42년(1613년)

단도복마(), 신위원진천존관성제군()

명 의종

숭정3년(1630년)

진원현응소명익한천존()

청 세조

순치9년(1652년)

충의신무관성대제()

청 세종

옹정3년(1725년)

삼대공작(), 성증조(), 광소공(), 성조(), 유창공(), 성고(), 성충공()

청 고종

건륭원년(1736년)

산서관부자(西)

청 고종

건륭31년(1767년)

영우() 산서관부자(西)

청 인종

가경18년(1813년)

인용() 영우() 산서관부자(西)

청 선종

도광8년(1828년)

충의신무영우인용위현관성대제()



6. 관련 유적

관우는 훗날 민간 숭배의 대상이 되었고, 중국인의 생활 깊숙이 큰 영향을 주어 공자와 함께 이름이 거론될 정도였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촉국 ‘오호상장’ 의 으뜸으로 추존되었고, 모종강은 그를 ‘의절()’이라 불렀다.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이후에 조선에도 관우 신앙이 전해지면서 한양의 동묘()를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관우 사당이 건립되었다.

중국 내 관우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무덤과 사당인데 현재 중국 내에는 대만 16군데를 비롯해서 약 200군데 이상의 관제묘가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그 중 후베이성 당양에 관릉()과 낙양의 관림()이 관우 무덤으로 가장 유명하고, 관림에는 조조에게 보내진 그의 머리가 묻혀 있다고 한다.

역사적 의미에서는 그가 태어난 산시성 윈청()시 상평촌()에 조상(부모) 및 처자식의 묘와 함께 세운 관묘(), 이른바 ‘관왕고리()’가 가장 유명하고, 규모면에서는 낙양의 관림을 능가하는 최대 규모의 산시성 윈청시 해주()의 관제묘가 있다.

이밖에도 허난성 쉬창()시의 춘추루()와 관제묘, 샹저우 고성의 관제묘, 후베이성 우창() 관공의 탁도천()과 관제묘가 비교적 많이 알려진 관우 관련 유적지들이며, 이밖에도 중국 전역은 물론 해외에도 관우와 관련된 사당이 적지 않게 설립되어 있다.

7. <참고자료> 관우 숭배 풍속

1) 관제신앙과 도교

청나라 때 원평현()에서는 매년 5월 13일이면 관제묘로 통하는 거리에 깃발을 든 한 무리의 사람들을 따라 악대가 북을 울리며 행진한다. 그리고 이 모습을 수많은 관중들이 지켜본다. 이 행렬은 다름 아닌 관제에게 도마(, 칼과 말)를 바치는 의장대이다.

도()는 쇠로 만든 무게 81근 짜리로 청룡언월도()의 표준과 완전히 부합한다. 적토마는 종이로 만든 높이 2장() 크기로, 말 몸뚱이에는 녹색 안장을 얹고 재갈에는 금색 문양을 그린 것이 기세가 당당하기 그지없다. 이렇게 칼과 말을 바치는 이른바 ‘진도마()’는 관제에게 제사를 드리는 민속의 하나이다.

청나라 이래로 각지에서 이러한 습속이 형형색색으로 대단히 풍부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를 모신 사당이 전국 각지에 퍼진 것은 물론 집집마다 관제의 상을 모셔놓고 향을 피웠다. 한족 외에 만주족이나 몽골족도 그를 지극히 존중했다.</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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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제신앙이 민간에 보급된 것은 도교의 움직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민간의 신을 두루 흡수한 것은 도교가 끊임없이 위세를 키워온 지름길의 하나였으며, 또 신권()을 통제하고 민중 신앙을 끌어들이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불교의 중국화 과정도 이와 비슷했다. 예컨대 중국 승려들은 관우를 가람신 으로 모셨다.

도교에서 관우는 더욱 특수한 지위와 의미를 갖는다. 그는 일찍부터 신장(, 장군의 신)의 대열에 들어서 오랑상장(), 괵마원수() 등으로 불렸다. 명 신종() 만력 20년(1592)에 도사 장통원()이 황제에게 건의하기를 관우에게 제()라는 작위를 주자고 했다. 20년 뒤 관우는 ‘삼계복마대제신위원진천존관성제군()’에 봉해졌다.

불교와 도교가 동시에 민간전설과 숭배를 통해 영웅이 된 관우를 쟁탈하려 했지만 도교의 힘이 더 컸다. 민간제사 중에 도교가 세운 관공묘, 관왕묘(명나라 이전), 관제묘(명나라 이후)는 특별한 우대를 받았다. 만력 42년(1614) 이후 불교 사찰에서 관우는 가람신이라는 지위를 위지공에게 넘겨줌으로써 더 이상 부처의 노비 역할을 하지 않게 되었다.

도교의 사회적 영향력이 불교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중국 민간에서 행해지고 있던 신사()에 대한 주도적 지위는 불교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이는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불교는 외래종교로 중국화했다고는 하지만 부처와 보살은 어디까지나 서역에서 온 존재였다. 오대산(), 아미산(), 보타산(), 구화산()이 4대 보살의 성지가 되었지만 서역 부처의 이미지를 바꾸지는 못했다.

도교는 중국 땅에서 자라난 종교로 그 신선계통이 민간신 및 역사상 영향을 미친 인물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졌다. 관운장으로 말하자면 칼만 들고 가람을 지키는 역할로는 너무 보잘 것 없지만, 도교에서 ‘관제’라는 신분은 대체로 역대 황제들이 직접 봉한 이름으로 그 지위가 다르다.

관우신에다 맨 먼저 봉호()를 준 황제는 송나라 휘종()이었고, 그 뒤 모두 15명의 황제가 관우에게 봉호나 편액 등을 내렸다. 후베이성 당양의 관릉에 있는 관우의 신도비에는 ‘충의신무영우인용위현관성대제한전장군한수정후()’라고 새겨져 있고, 정문 위에 큼지막한 ‘위진화하’ 라는 네 글자는 청나라 동치제()가 쓴 것이다.

역대 황제들의 이런 각별한 대우를 받으면서 관우는 ‘무성인()’, ‘성제()’라는 지위를 굳혀나갔다. 청나라 때 사람 조익은 “지금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그의 위세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를 위해 피우는 향의 불길은 하늘과 땅처럼 영원할 것이다.”(『해여총고()』 권35)라고 말했다. 다소의 과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사실에 가까운 말이다.

2) 관제 신상의 모습

여러 사당에 모셔진 관제의 신상은 대부분 붉은 얼굴에 긴 수염을 하고 있다. 여기에 붉은 봉황의 눈에 누에 같은 눈썹을 하고 전투복(녹색으로 많이 칠한다)을 입고 근엄하게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그 옆에는 검은 얼굴의 주창() 이 청룡언월도를 들고 서 있으며, 다른 한 쪽에는 흰 얼굴의 관평이 관제의 대인()을 들고 서 있다. 이 형상은 『삼국지연의』에서 묘사한 대로다.

지나치게 과장된 붉은 얼굴은 그의 용맹함과 충의를 표시하는 것으로 무대를 위해 분장하던 얼굴을 옮긴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다지 격식을 갖추지 못한 작은 사당들을 보면 관제가 오른손에 화살을 매긴 작은 활을 들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싸우는 모습이라고는 하지만 그 작은 화살로는 아무 일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위풍당당한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원래 이것은 고대의 이른바 호시(, 활과 화살)로 사내아이를 낳을 징조다. 아들을 낳으면 문밖에다 뽕나무로 만든 활과 화살을 걸어 아이의 평안을 지켜달라는 표시로 삼았다. 민간에서 신의 가호를 비는 중요한 내용의 하나는 가족의 평안과 자손의 번창을 구하는 것이었다.

“불효에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 후손 없는 것이 가장 큰 불효다”라는 말도 있듯이, 아들을 낳지 못한 가정은 이곳저곳에 가서 신이나 부처에게 비는 수밖에 없었다. 그 중 가장 많이 가는 곳이 바로 관제묘였다. 사람들은 그가 아들을 점지하고 아이가 클 때까지 그를 지키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믿었고, 그래서 이런 생각에 따라 관우상의 손에 호시를 들려 상징으로 삼은 것이다.

3) 관제와 민간 전설

관제는 본래 무장()으로 자손 보는 일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자손에 관여하는 신을 민간에서는 송자낭낭 또는 송자관음()이라 했는데, 관제가 자손에 관여하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민간 전설이 전한다.

한번은 관제가 외출하여 주창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주창이 술을 몇 잔 마시고는 정신이 혼미해져 잠시 졸았는데 몽롱한 중에 누군가가 제물을 바치며 절을 했다. 이에 주창은 기분이 좋아져 대길의 점괘를 뽑아 그들의 기도에 화답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들은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빈 것 같았다. 그 일은 관제묘에서 할 일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주창은 작은 꾀를 내서 손낭낭()의 자손당 에서 몰래 장원랑 을 훔쳐 그 집에 보냈다. 그 뒤 일은 더욱 복잡하게 꼬여 옥황대제의 금란전(殿, 황제가 조회를 하는 곳)까지 찾아가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민간전설은 관제가 자손 보는 일에까지 관여하는 것은 본분이 아니라는 것을 풍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은 관제묘에서 아들을 빌면 마찬가지로 효험이 있다고 믿었다.

4) 통치를 위한 우상화

관제가 자손 보는 일에 관여한 것이 신격()의 변이()라면, 관제 앞에서 의형제를 결의하는 일은 제대로 번지를 찾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유비, 관우, 장비가 도원결의()를 한 것은 일찍부터 성이 다른 형제가 결의하는 모범이라 하여 높이 받들어져 왔다. 따라서 관제의 생일이면 사람들이 사당에 몰려들어 의형제 결의를 위한 제사를 드린다. 그 뒤 방회(, 비밀단체조직)에서도 자신들을 따르는 무리들을 받아들일 때 왕왕 관제상 앞에서 향과 촛불을 피워놓고 의식을 행하곤 했다.

관제의 의리와 기상은 중국 민중이 모두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만주족의 청 왕조의 통치자도 이 점을 아주 잘 이용했다. 『청패류초()』 「제사류」에 따르면 청나라 사람들은 “몽골족을 묶어두기 위해 실제로 삼국지를 이용했다.” 청나라 세조가 입관하기 전에 먼저 몽골의 여러 부락을 정복하고 몽골의 여러 칸들과 형제가 되길 약속하면서 도원결의를 예로 들었다는 것이다. 만주는 유비로 자처하고 몽골을 관우라 한 것이다.

입관한 뒤에는 또 관우에 관작을 더하여 ‘충의신무영우인용위현호국보민정성수정익찬선덕관성대제()’라 했다. 따라서 몽골인들은 라마교 외에 관우를 가장 떠받들었다. 몽골의 왕공들은 관우를 자처하면서 마치 관우가 유비를 섬겼듯이 청 황조를 섬겼던 것이다. 관우가 청나라 때에 이처럼 정치적으로 교묘하게 이용되리라고 관우 자신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5) 관제의 제사

관제는 청나라 때 만주족, 한족, 몽골족이 모두 받들었다. 그래서 사당이 나라 전체에 퍼졌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관제는 복마대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해서 충의의 인격화와 우상화가 이루어졌다. 전국 각지에 퍼져 있는 사당을 통해 방회와 민간종교는 그에게 제사를 드렸다.

근대에 와서 상품경제가 발달하면서 많은 상인들이 도시로 모여들었는데, 같은 고향을 가진 상인들은 각지에 회관을 세우고 그곳에서 관례에 따라 관제에게 제사를 드렸다. 심지어 같은 고장 출신의 상인들이 먼저 공동으로 관제사당을 세우고 자신들만의 갖가지 규칙을 정해놓고 협동하고 분규를 해결하는 장소로 활용하기도 했다.

그런 다음 회관을 세웠다. 회관은 관우에게 제사를 드리고 객지에서 생활하는 상인들을 위해 신령의 보호를 비는 의미도 지니고 있었다. 또 관우의 충의와 정직을 거울삼아 그로 하여금 회원들의 충의와 정직을 감독하게 함으로써 조직의 단결을 도모한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었다.

관제의 생일은 민간에서는 대부분 5월 13일로 여기고 있지만, 5월 13일은 아들 관평의 생일이고 관우 본인은 동한(환제 연간 3년인 160년 6월 24일이라고 고증한 사람도 있다. 어쨌거나 민간에서는 5월 13일에 그를 위해 축수()를 드린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날은 관례에 따라 비를 뿌린다고 하는데, 이는 관제가 이날 큰칼을 갈고 그 빗물에 칼을 씻기 때문이고 그래서 이 비를 ‘마도우()’라 부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냇물이 불어 넘치면 ‘창대도수’ 라 했다. 사실 이 날은 우계에 든 날이고 특히 강남에서 5월 13일은 매우 계절이 시작된 뒤라 비가 내리는 경우가 다반사다. 물론 그의 생일이 6월 24일이라고 믿는 사람은 정확하다고 생각하는 그 날에 수례 를 맞춘다.

관제에 대한 제사는 5월 13일이 가장 성대하다. 관제묘는 말할 것도 없고 지방 관리들과 백성들이 모두 어우러져 향을 피우고 제물을 바치느라 법석이다. 그리고 청나라 때 수저우() 등 큰 도시에서는 각 회관들도 13일 전날 밤에 대제 때 사용할 세 가지 제물을 준비하는 동시에 희극과 같은 놀이를 벌인다. 이 희극은 수신 을 위해 연기하는 것인데, 관중은 회관의 동료들 및 근처의 시민들이다. 그리고 일반 주민들도 제사를 드린다.

초기에는 사대부들이 흰 수탉을 잡아 제사를 올렸으나 청나라 중엽 이후에는 보기 힘들어졌다. 일반적인 제사법은 향과 초를 피우는 것이 필수적이었고, 집에 걸린 관제상 앞에 제물을 바치고 폭죽을 터뜨리며 악기를 연주하면서 한바탕 난리법석을 떤다. 특히 상인들은 특별히 경건하면서 성대히 제사를 드리는데, 원래 민간전설에서는 재신()에도 문무의 구분이 있었고 관우는 복마대제이자 또 무인 재신이었으니 상인들이 더욱 제사에 정성을 들였다. 그래서 이 날이 되면 저자 큰 거리는 물론 골목마다 악기소리 폭죽소리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하루 종일 끊이지 않았다.

관제가 태어난 날에 제사를 드리는 것 외에도 사람들은 전염병이 돌거나 하면 사당에 가서 향을 피우고 기도를 드리는 경우가 아주 많았다. 신에게 기도를 올리고 나서 좋지 않은 일이 가시고 좋은 일이 생겼다면 다시 사당에 와서 향을 피우고 관제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것을 잊지 않는다.

관제 자체가 영험한 신령으로 간주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들고 있는 청룡언월도 역시 적지 않은 의미를 가졌다. 누군가가 병이 들어 오래 일어나지 못하면 왕왕 사당에 가서 소원을 비는데 이때 청룡언월도를 집으로 가지고 와서 붉은 수건에 잘 싸고 매일 향을 피우고 공을 들이면 효험이 아주 크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큰 사당에 있는 쇠칼을 가지고 와도 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작은 사당에 흙으로 빚은 주창의 상이 들고 있는 나무칼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미신 관습은 약과 의원이 부족했던 구시대 농촌사회에서 특히 성행했다.

삼국시대의 명장


관우 초상화

관우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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