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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역사 (국내)

조조曹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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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曹操.

자()는 맹덕(), 아명()은 아만()ㆍ길리()이다. 패국() 초현(, 지금의  ) 사람으로 후한 헌제(, 재위 189~220) 때에 승상()을 지냈으며, 위왕()으로 봉해졌다. 아들인 조비()가 위나라 황제의 지위에 오른 뒤에는 무황제()로 추존되었다.

조조()의 자는 맹덕()이고 소명()은 아만()이다. 패국() 초현(, 안휘성 호현) 사람으로, 아버지 하후숭()이 환제 때 대환관 조등()의 양자로 들어갔기 때문에 조등의 성을 따라 조씨 성으로 고쳤다.


위무제(). 후한 말기 패국() 초현() 사람. 자는 맹덕()이고, 묘호는 태조()며, 시호는 무황제()라 추존되었다. 본성은 하후()씨고, 조숭()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권모술수에 능했고, 나이 스물에 효렴()으로 천거되어 낭()이 되었다가 돈구령()으로 옮겼다. 기도위()가 되어 황건적() 토벌에 공을 세우고 두각을 나타내어 마침내 헌제()를 옹립하고 종횡으로 무략()을 휘두르게 되었다. 초평() 3년(192) 연주목()이 되어 황건군의 항복을 유도해 정예병을 청주병()으로 편입시켰다. 화북()을 거의 평정하고 나서 남하를 꾀했다.

건안() 13년(208) 승상()이 되고,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과 적벽()에서 싸워 대패했다. 이후 세력이 강남()에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위왕()에 봉해졌다. 정치상의 실권은 잡았지만 스스로는 제위에 오르지 않았다. 연강() 원년(220) 1월 낙양()에서 죽었다. 문학을 사랑하여 많은 문인들을 불러들였고, 자신도 두 아들 조비(), 조식()과 함께 시부()의 재능이 뛰어나, 이른바 건안문학()의 흥성을 가져오게 했다. 저서에 『손자약해()』와 『병서접요()』, 『조조집(


조조는 후한 환제(, 재위 146~168) 때인 155년( 원년)에 태위()를 지낸 조숭()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숭은 4대의 황제를 섬겨 환제 때에 비정후()로 봉해진 환관조등()의 양자였다. 배송지()는 진수의 《삼국지》에 주석을 달며 양자가 되기 전 조숭의 본성은 ‘하후()’였고, 따라서 조조와 하후돈()이 종형제 관계라는 해석을 남기기도 했다. </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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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는 어려서부터 책을 즐겨 읽었으며, 여러 분야에서 재능을 드러냈다. 고대 병법가의 저술을 연구하여 《손자병법()》에 주석을 붙인 《위무주손자()》라는 저술을 남겼다. 그리고 시부()에도 뛰어난 성취를 보여 두 아들인 조비(), 조식()과 함께 ‘삼조()’라 불리기도 한다. 조조는 20세 때인 174년 효렴()으로 천거되어 낭관()으로 관직에 올랐으며 낙양북부위(), 돈구현령(), 의랑() 등을 지냈다. 184년 황건의 난이 일어나자 기도위()로 임명되어 영천()에서 반란군 진압에 공을 세웠다. 그 공적으로 제남()의 동군태수()로 임명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조조는 어렸을 때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꾀가 많았으며 임기응변에 능했다. 당시 여남 사람 허소()가 인물 비평을 잘하기로 이름이 높았는데, 어느 날 조조는 그를 찾아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 달라고 했다. 허소는 말하기를 꺼려했으나 조조가 하도 요청을 하자 하는 수 없이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치세()에는 능신()이고 난세()에는 효웅()이 될 사람이네.”


그는 20세 때 낙양 북부위()가 되었다. 당시 낙양은 큰 도시로 황친국척과 높은 관리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 세도만을 믿고 무슨 짓이든 했으나 아무도 감히 그들을 어쩌지 못했다. 조조는 부임하자마자 다섯 색깔을 칠한 곤장을 열 개쯤 만들어 관청 앞에 매달아놓으라고 명했다. 그 누구든지 법과 금령을 어기면 사정없이 곤장을 친다는 뜻이었다. 그때 대환관 건석()의 숙부가 조카의 권세를 믿고 법을 마음대로 어기고 있었는데, 어느 날인가는 통금 시간이 지났는데도 칼을 들고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에 조조는 붙잡아다가 곤장을 때렸다. 그 다음부터 아무도 금령을 어기지 못했고, 따라서 낙양의 치안이 많이 호전되었으며 조조의 이름도 널리 알려졌다.


189년 영제()가 죽은 뒤, 소제()를 폐위하고 헌제()를 세워 정권을 장악한 동탁()이 조조를 효기교위()에 임명했다. 그러나 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낙양을 탈출해 고향으로 돌아가 병사를 모았다. 그는 190년 원술, 손견 등과 연합하여 동탁 토벌을 주창하며 거병했으며, 발해태수() 원소()가 맹주가 된 반동탁 연합군에서 분무장군()의 직위를 맡았다.


190년, 동탁을 토벌하는 여러 대군들이 진류 부근의 산조(, 하남성 정진현 서남)에 모여 ‘반동탁’ 연합군을 구성했다. 조조의 군대도 거기에 가담했으며, 연합군의 맹주로 원소가 추대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반동탁 무리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한 동탁은 두려움을 느꼈다. 그는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도성을 장안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헌제도 핍박에 못 이겨 낙양을 떠나 장안으로 가야만 했다. 동탁은 떠날 때 낙양에 불을 질렀다. 낙양성은 불바다가 되고 백성들은 집을 잃고 굶주렸다. 온 들판에 시체가 널렸다. 그런데 산조에 모여 있는 반동탁 연합군은 서로 관망만 하면서 움직이려 하지를 않았다. 이에 격분한 조조는 수하의 5천 장병을 이끌고 성고()로 진군했다. 조조의 군대가 변수()에 이르자 동탁의 부장 서영이 공격을 해왔다. 조조의 군대는 서영의 군대에 비해 역량이 매우 모자랐다. 조조의 군대는 패하고 말았다. 많은 병사를 잃고 산조로 돌아온 조조는, 반동탁 연합군 따위와는 아무런 대사도 성사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분연히 그곳을 떠났다. 그는 양주(, 안휘성 회수와 강소성 장강 이남)로 가서 군사를 모아 힘을 길렀다.


192년 동탁이 살해된 뒤 조조는 연주()를 평정하여 연주목()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95년 헌제가 장안()을 탈출하였을 때, 순욱()의 건의에 따라 황제를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이 일로 조조는 건덕장군(), 진동장군() 등에 임명되었고, 양조부인 조등과 마찬가지로 비정후로 봉해졌다. 196년에는 자신의 근거지인 허현(, 지금의  )에 궁을 지어 헌제를 그곳으로 옮겼다. 그 뒤 조조는 대장군()으로 임명되었으며, 무평후()로 봉해졌다. 그는 헌제를 자신의 보호 아래 둠으로써 후한 조정을 장악하였을 뿐 아니라, 황실의 권위를 배경으로 세력을 크게 확대할 수 있었다. 조조는 한호()의 건의를 받아들여 둔전제()를 실시했으며, 제도를 정비하고 수많은 인재를 등용하여 위() 건국의 기반을 마련했다.


조조는 202년 원소가 죽은 뒤 그의 아들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자 원소의 근거지인 하북() 지방 공략에 나섰고 207년 중국 북부를 통일하였다. 208년 승상의 지위에 오른 뒤에는 중국 통일을 위한 남정()에 나서 형주()를 점령하였으나, 적벽에서 손권()과 유비() 연합군에 패하여 형주의 일부를 도로 내주었다. 그 뒤로도 조조는 여러 차례 관중()과 한중() 지역을 공략하며 중국 통일을 시도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213년 조조는 위공()으로 봉해졌으며, 216년에는 스스로를 위왕()으로 봉하고 황제와 마찬가지의 권력과 위세를 행사하였다. 그는 220년 3월 15일( 25년 1월 23일)에 병으로 낙양에서 죽었는데, 죽은 뒤 무왕()의 시호를 받았으며, 4월 11일에 업성()의 고릉()에 묻혔다. 조조가 죽자 그의 아들 조비()가 위왕 지위를 계승했다. 이후 조비는 헌제에게 선양을 받아 위나라 황제가 되었으며, 조조는 무황제()로 추존되고 태조()라는 묘호()를 받았다.


1. 위나라의 창시자

조조의 초상화

조조의 초상화

패국() 초현 사람으로 자는 맹덕()이고, 다른 이름은 길리(), 아이 때 이름은 아만()이다. 본성은 하후()씨로 동한(후한) 환제 때 태위 를 지낸 조숭의 아들이다.

동한 헌제(, 재위 189~220) 때에 승상()을 지냈으며, 황제를 끼고 사방을 호령하면서 원소와 원술여포유표한수등을 제거했다. 대외적으로 흉노, 오환(, 내몽골 동쪽의 북방민족), 선비(, 몽골의 유목민) 등을 토벌하여 중국 북방을 통일했다. 더불어 경제생산을 증진시키고, 사회질서를 안정시켜 위나라 건국의 기초를 닦았다.

권모술수와 임기응변, 적재적소에 인재를 쓸 줄 아는 인용술에 능한 인물로 평가된다.

2. 사방을 호령하다

스무 살인 174년 효렴 으로 천거되어 낭관이 되었다가 허난()성 뤄양() 북부위(), 돈구 현령, 의랑() 등을 지냈다.

184년,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기도위(, 황제 호위직)가 되어 난을 진압했다. 이 공으로 산둥()성 지난()의 재상으로 승진하지만 그는 병을 핑계로 동군(, 허난성푸양 서남쪽) 태수() 직을 사양하고 귀향한다.

189년 영제가 죽자 뒤 이어 황제에 오른 소제를 폐위하고 헌제를 세운 동탁이 조조를 효기교위(, 경호장교)에 임명하였으나 사임했다.

190년 조조는 원술, 손견 등과 연합하여 동탁 토벌을 주창하며 거병했으며, 발해6) 태수로 있던 원소가 맹주가 된 반동탁 연합군에서 분무장군()의 직위를 맡았다.

헌제 초평() 3년(192) 동탁이 살해된 뒤 연주 목(, 지방장관)이 되어 황건군의 투항군을 청주(, 지금의 산둥성 칭저우) 병영으로 편입시켰다.</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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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년 헌제가 장안(, 지금의 산시(西)성 시안(西))을 탈출하였을 때, 순욱의 건의에 따라 황제를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이 일로 조조는 건덕장군(), 진동장군() 등에 임명되었고, 양조부 조등과 마찬가지로 비정후()로 봉해졌다.

196년에는 자신의 근거지인 허현(, 지금의 허난성 쉬창())에 궁을 지어 헌제를 그곳으로 옮겼다. 그 뒤 조조는 대장군(), 사예교위(), 녹상서사()로 임명되었으며, 무평후()로 봉해졌다.

그해 겨울 쉬창으로 도읍을 옮기고 헌제를 자신의 보호 아래 둠으로써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였다. 이로써 새로운 정국이 될 위나라 건국의 기틀을 마련해나가는데 장수 한호의 건의를 받아들여 둔전제를 실시하여 군량미를 확충하고 여러 제도를 정비해나갔다.

3. 위왕 정치적 실권을 잡다

건안 5년(200)에 관도 전투에서 당시 10만군에 달하던 원소의 군대를 불과 1만 명의 군사로 물리쳤다. 원소는 다시 전투를 벌였으나 창정(, 지금의 산둥성 양구()현)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이듬해 병사하였다. 그 후 원씨 가문에서 장자 원담과 막내 원상이 후계를 놓고 내분이 일자 조조는 원소의 근거지인 허베이() 지방 공략에 나서 207년 중국 대부분의 북부를 통일하게 되었다.

건안 13년(208)에 조조가 승상의 직위를 갖게 되자 중원 통일의 의지를 표명했다. 이듬해 여름 본격적으로 남진을 개시하였다가 적벽(, 지금의 후베이성 가어()현)에서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에 대패했다. 이후 세력이 강남()에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유비와 조조의 상

유비와 조조의 상

조조의 동상

조조의 동상

적벽대전의 패배 이후 조조는 내정에 힘을 썼다. 능력 있는 인재를 구한다는 <구현령()>을 내려 출신 성분에 관계없이 유능한 자를 요직에 임명하게 하였다.

건안 18년(213) 조조는 손권을 상대로 40만의 군사를 일으켰으나 수세에 몰려 철수하였다. 같은 해 5월 헌제는 조조를 위공()에 봉하고 216년 위왕()에 임명하였다. 이로써 조조는 사실상 정치상의 실권은 잡게 되었지만 스스로 제위에 오르지는 않았다.

220년 마침내 아들 조비가 헌제로부터 황위를 물려받게 되자 동한(후한)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위나라의 역사가 시작된다.

조조는 그해 1월 허난성 뤄양에서 죽은 뒤 시호가 무왕()이었다가 조비에 의해 태조 무황제()로 추봉되었다. 묘호()는 태조()이다.

4. 건안문학의 주도한 문학가

그는 시와 를 좋아하여 문인들을 가까이 하였으며, 자신의 두 아들 조비조식과 함께 건안문학의 흥성을 주도하였다. 두 아들과 함께 ‘삼조()’로 불린다. 대표작품으로 <관창해()>, <귀수수()>, <양현자명본지령()> 등이 있다.</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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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에 『손자약해()』와 『병서접요()』, 『조조집()』이 있으며 주석서로는 고대 병법가의 저술을 연구하여 『손자병법()』에 최초로 주석을 단 『위무주손자()』가 있다. 편저서로 『위무제집()』, 『병서()』, 『손자주()』 등이 있다.

조조의 글씨 ‘곤설’

조조의 글씨 ‘곤설’

조조의 글씨 ‘곤설’

글씨를 쓰는 조조의 모습을 그린 그림

글씨를 쓰는 조조의 모습을 그린 그림
 5. 관련 유적

중국 국가문물국은 2008년 허난성 안양()시 안풍향() 서고혈촌(西)에 있는 동한시대 무덤을 발굴하면서 이를 조조의 무덤이라 주장하였다. 결국 2010년 1월 “조조의 고분을 발굴하고 학술적인 검증을 거쳐 연구 성과를 발표한 절차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고고학계의 규칙에도 부합한다.”라고 하면서, 조조가 묻힌 고릉()으로 최종 확인된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 진위여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다.

조조의 무덤 발굴 현장

조조의 무덤 발굴 현장

조조기념관 앞의 조조상

조조기념관 앞의 조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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