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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역사,(국외) 각지역.

러시아, Russia, Russian Federation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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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RussiaRussian Federation 1.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

러시아의 정식 명칭은 러시아 연방(Russian Federation)이며 공화국 21개, 주 49개, 변경 지역 6개, 자치주 1개, 자치구 10개, 수도인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특별시 2개 등 총 89개의 연방 주체로 구성되어 있다. 


우랄 산맥을 기준으로 동쪽은 아시아, 서쪽은 유럽과 맞닿아 있고 남동쪽은 험준한 산악 지대, 북서쪽은 광활한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총면적 1,709만km2로 세계에서 가장 큰 국토를 가진 나라이며, 지구 육지 면적의 7분의 1을 차지한다. 

국토가 넓어 러시아 안에서도 시차가 11시간까지 나며, 10개 이상의 국가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러시아연방공화국 이전의 구소련은 1917년 10월 볼셰비키혁명에 의하여 탄생된 사회주의 국가로서 정식명칭은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The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USSR)이었다. 

유럽과 아시아북부지역에 걸쳐 있었으며, 면적은 세계 제1위로서 2240만 2200㎢이었고, 인구는 세계 제3위로 2억 8450만 명(1988년 1월 기준)이었다.


대부분의 영토는 북위 45°이북, 즉 파미르고원과 북극 사이에 있어 추운 지역이며, 얼어붙은 불모지가 상당히 많아서 농경지대는 전체 국토의 13%에 지나지 않았다.

토양·동식물분포·지형·기후 등을 기준으로 동토지대()·삼림지대·초원지대·흑토지대()로 나누어졌고, 천연자원이 풍부해서 미국에 버금갈 정도였고, 전 세계 공업생산고의 약 20%를 생산하는 세계 제2위의 공업국이었다.


전체인구의 약 45%가 농촌에 거주하고, 노동인구의 약 28%가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전체생산물의 약 16%가 농업생산물이어서 농업국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공용어는 러시아어이나, 약 150개의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약 200개의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전 인구의 70%가 넘는 러시아슬라브족이었으며, 이들은 대부분 러시아정교를 신봉하였다.



러시아슬라브족은 다시 전 인구의 약 53%를 차지하는 대러시아족, 그리고 소러시아족(우크라이나인) 및 백러시아족으로 나누어졌으나 1992년 새로이 구소련을 계승한 러시아 연방공화국 주민은 러시아인(83%)과 독립된 국가들이 떨어져 나간 결과 200여 개의 소수민족에서 얼마간 줄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종교의 분포도 다양하여 전체인구의 약 82%가 러시아정교를, 약 14%가 회교를 각각 신봉하고 있다. 

기타 로마가톨릭이 약 1.5%, 유대교가 약 1.5%, 개신교가 약 0.5%를 차지하고 있다.

2015년 현재 국민총생산은 1조 2358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8,447달러이다.



인구는 약 1억 3,808만 명(2012년 기준)으로, 150여 개의 크고 작은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러시아인이 전체 인구의 80%를 차지한다. 

석탄, 석유, 천연가스 등의 생산량과 매장량은 세계 최대 수준으로 풍부한 자원과 다양한 개발 잠재력이 있는 나라이다.



러시아 국기(삼색기)러시아 국기(삼색기)흰색은 고귀함·자유·독립을, 파란색은 정직과 충성, 빨간색은 용기와 사랑을 뜻한다.


러시아 제국 시대의 쌍두 독수리 문장
러시아 제국 시대의 쌍두 독수리 문장문장의 형태는 수백 년 동안 유지되었지만, 각각이 상징하는 의미는 시대마다 바뀌었다.


러시아는 다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어 민족 간 융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때문에 정부는 일찍부터 여러 민족을 강제로 융화시키기보다 자치를 허용하고 소수 민족의 고유 언어와 관습 등을 인정하면서 서로 간의 갈등을 줄이려는 정책을 펴 왔다.


러시아는 89개의 연방 주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21개의 자치 공화국은 독자적 헌법과 의회, 내각 및 자체 언어를 보유하지만 독립국의 지위는 인정받지 못한다. 

때문에 체첸을 비롯한 여러 자치구들도 러시아로부터의 완전 독립을 요구하고 있어 지금도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국기와 문장

2000년 12월 8일 러시아 의회는 러시아 제국의 깃발이던 삼색기를 국기로, 러시아 제국의 쌍두 독수리를 국가 문장으로 채택했다. 

삼색기는 오래 전부터 러시아의 상징이었으며 17세기 후반부터 각종 배의 국가 표시나 축제 등에 사용되다 19세기 말 러시아 제국의 정식 국기로 채택되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세워진 소비에트 연방은 낫과 망치가 새겨진 붉은 깃발을 국기로 사용하였으나,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자 러시아는 다시 이 삼색기를 국기로 사용하게 되었다.


15세기 말 비잔틴 제국에서 계승된 쌍두 독수리 문장은 황실의 권력을 상징하며, 17세기부터 러시아의 공식 문장으로 사용되었다. 

쌍두 독수리의 머리 위에는 각각 작은 왕관이 있고 그 위에 다시 큰 왕관이 올려져 있으며, 쌍두 독수리는 오른발에 홀()을, 왼발에는 황금구를 쥐고 있다.

현재 러시아 연방에서 사용하는 쌍두 독수리 문장의 세 왕관은 행정권·입법권·사법권을 뜻하며, 홀과 구는 주권 수호와 국가의 통일성을 뜻한다.


기후

러시아는 동서는 물론 남북의 폭도 넓어 위치, 면적, 지형에 따라 기후가 다양하다. 

일반적으로는 춥고 긴 겨울과 짧고 서늘한 여름이 특징인 대륙성 기후로, 겨울과 여름이 시작될 때 급격히 계절이 바뀐다.

시베리아 베르호얀스크의 경우 가장 추운 달과 가장 따뜻한 달의 기온차가 약 60°C나 되어, 세계에서 가장 큰 연교차를 보인다. 

유라시아의 1~2월 평균 기온은 영하 10°C 전후지만 시베리아는 영하 15°C에서 영하 35°C이며, 내륙 지역은 영하 70°C 이하로 떨어지는 곳도 있다.


위치


우리나라와 러시아

1937년 러시아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한인의 3분의 2가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생활하게 되었고, 현재 교민 10만여 명과 체류자 2천여 명이 살고 있다.


우리나라는 1990년 9월, 당시 소련이었던 러시아와 첫 수교를 맺은 이래 극동과 시베리아 지역의 자원 개발 분야를 비롯해 첨단 기술의 공동 연구 및 인력 교류, 금융 투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경제 협력을 하고 있다.


러시아는 인구 1억 3,808만의 방대한 국내 시장과 풍부한 자연 자원, 뛰어난 기초 첨단 과학 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앞으로도 양국 간의 교류 발전과 그 잠재력은 매우 클 것으로 예상된다.













독립 국가 


러시아 본문 이미지 3구소련 당시에는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리투아니아를 비롯한 발트 해 연안 3국 등 민족과 언어가 다른 15개의 공화국이 소련을 구성하고 있었지만,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이들은 각각 독립되어 현재는 12개의 독립 국가 연합으로 분리되었다. 

각 공화국은 독립국으로 독자적인 법률, 정치, 외교의 권한을 가지고 있다.


카자흐스탄

독립 국가 연합 중 두 번째로 큰 국가이며, 풍부한 자원으로 발전 가능성이 큰 나라이다. 

농업 인구가 많은 편이지만, 최근에는 기술자와 전문직 종사자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러시아의 강제 이주 정책과 농업 이민으로 약 120여 민족이 살고 있다.

카자흐스탄의 국기



우즈베키스탄

우즈베키스탄 역시 125여 민족이 사는 다민족 국가로, 서로 다른 언어권의 의사 소통 문제와 러시아 정부의 정책으로 러시아어를 쓰기도 했지만 현재 국가 공용어는 우즈베크어이다. 

세계적인 양의 금과 천연가스를 보유하고 있다.      ìš°ì¦ˆë² í‚¤ìŠ¤íƒ„의 국기



 키르기스스탄 공화국

키르기스스탄 공화국의 국기

키르기스스탄은 동서 900km, 남북 410km의 비교적 짧은 넓이임에도 지형의 변화가 많은 산악 국가로, 중앙아시아의 스위스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산지가 92%에 평야가 8% 정도이며, 농지는 전 국토의 7%에 불과하다. 

유목민의 전통을 중시하며 부족주의가 발달해 북부와 남부의 문화 차이가 크다.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의 국기

수도인 키예프는 860년부터 12세기 초까지 러시아의 수도였다. 

우크라이나는 유럽에서 가장 큰 과학 중심지 중 하나이며 키예프에는 국립 과학 아카데미를 비롯한 32개의 박물관, 33개의 극장, 116개의 영화관이 있어 문화의 중심으로 불리고 있다.



벨로루시

벨로루시의 국기

벨로루시는 'White Russia(하얀 러시아)'란 뜻으로 예전에는 백러시아라고도 불렸다. 

나라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주민들은 흰색을 좋아하여, 흰옷을 즐겨 입고 집도 하얗게 칠한다. 

인종적으로도 백인이 많으며 흰 피부와 회색 눈동자를 가진 사람이 많다고 한다




형성 & 변천

러시아 이전의 구소련은 사회주의연방공화제를 채택하고 있었고, 15개 공화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일당독재체제로서 소련공산당이 최고권력기관으로 행정부와 입법부 및 사법부를 이끌어갔고, 소련공산당의 최고 권력기관은 정치국이었으며, 정치국의 제1인자가 구소련공산당 서기장으로 구소련을 통치하였다.


구소련의 입법부는 연방최고소비에트로 불리며, 연방소비에트(750명, 임기 5년)와 민족소비에트(750명, 임기 5년)의 양원제로 구성되어 있었다. 

연방최고소비에트 안에 상설위원회격인 간부회가 있었으며, 이 간부회의 의장이 국가원수가 되었다.


연방최고소비에트는 각료회의, 즉 내각을 선출하고, 각료회의의 의장이 수상으로서 행정부를 통솔하였다. 

각료회의는 약 100명으로 구성되었고, 그 중 10여명이 각료회의 간부회를 구성하였으며, 사법부는 각 구성 공화국이 모두 지방법원·중간단계법원·최고법원이라는 3급법원제도를 채택하였다.

그리고 연방 전체를 관할하는 연방최고법원이 있었는데, 이것은 연방최고소비에트에 의하여 선출되었다. 

1988년 6월 이후 권력구조의 개혁으로 인민대의원회의와 최고회의를 창설하고 의장을 투표로 선출하는가 하면 당기관에 임기제를 도입하였다.


구소련의 경제는 철저한 중앙통제경제 또는 명령경제로 이루어져왔다. 

경제계획은 행정부내의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가 담당하였다. 

국가계획위원회가 전국적인 경제계획과 관련해서 산업의 각 부문을 관리하는 전문부서들, 예를 들면 강철공업성·석유성·철도성·방직공업성 등의 생산목표를 설정하였다. 

이 성들은 전국의 모든 산하공장을 지휘, 감독하였다.


1988년 9월 이후 경제부문에 대한 당의 간섭이 완화되었으나 1986년 국민총생산은 2조620억달이고, 1인당국민소득은 7,400달러였다. 

주요수출품목은 원유·천연가스·농산물 등이며, 주요수입품목은 기계류·철강제품 등이었다.

1987년의 경우 수출액은 1,158억 4,000만달러, 수입액은 1,032억 5,800만달러에 이르렀다.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연방공화국이 형성된 1995년 수출액은 778억달러이고, 수입액은 579억달러로 여전히 구소련 보다 훨씬 밑도는 경제규모를 나타내고 있다.

구 소련은 혁명 당시 ‘계급없는 사회’를 표방하였으나 그것은 이론상으로나 실제상으로도 실현되지 않았다. 

구 소련당국은 ‘계급간의 적대감’은 사라졌고, 다만 ‘계급간의 차이’가 남아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구 소련에서는 ‘계급투쟁’은 끝났으며, 공산주의사회를 건설하는 노력만이 남았다고 하고, 구 소련당국은 소련에 노동자와 농민 및 인텔리겐치아라는 세 ‘사회그룹’이 있다고 설명하였다.

모든 성인들은 그가 종사하는 일에 따라 이 세 그룹 중의 하나에 속하며, 어린이는 그를 부양하는 사람이 속한 그룹에 속하였는데 인텔리겐치아 그룹은 엘리트·일반인텔리겐치아 그리고 화이트칼라노동자로 구분될 수 있었다. 

어린이는 7세가 되면 8년제의 초급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 여기서 졸업하면 세 갈래의 길이 있었다.


첫째 학업은 그만두고 직업을 가지는 길, 둘째 2년제 직업학교에 진학하여 좀더 나은 직업훈련을 받는 길, 셋째 2년제 일반학교에 진학해서 고등교육기관에 진학할 준비를 하는 길 등이었다.

고등교육기관은 대학·연구소, 기타 고등교육을 위한 센터의 세 종류가 있었는데, 이를 종합적으로 ‘부지(vuzy)’라고 하였고, 부지의 대종은 의사·엔지니어·교사·관리자 등의 양성을 주목적으로 하는 연구소이며, 학자를 양성하는 대학교는 소수이었다.


부지의 교육연한은 5년이었으며, 학비는 면제되고 전원이 생활비를 지급받았다.  

대외관계를 보면 1945년 10월 24일 구 소련 당시에 국제연합에 가입하였으며,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이다.


바르샤바조약기구의 중심회원국이었으며, 북한·폴란드·불가리아·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루마니아·유고슬라비아·몽고·동독 등과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하고 있었으며, 그리고 시리아·인도·아프가니스탄·앙골라·콩고·모잠비크·에티오피아·남예멘·이라크·베트남등과우호협력조약을체결하였다.


구 소련은 1985년 3월 고르바초프(Gorbachyov, M.) 등장 이후 이른바 개혁(Perestroika)과 개방(Glasnost)이라는 목표를내걸고권력구조·경제관리·대외정책 등에서 많은 변화를 보여왔다.

이와 같은 목표를 내건고르바초프(Gorbachev, M.)의 6년에 걸친 개혁은 무질서, 범죄의 증가, 지식인 이탈, 생산격감, 민족분리주의 요구증가 등을 가져왔으며, 이로 인하여 일어난 8월 쿠데타는 1991년 12월 25일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을 공식적으로 해체시키고 옐친(Yeltsin, B. N.)이 이끄는 러시아연방공화국을 출범시켰다.


옐친 대통령은 가이다르 내각을 중심으로 개혁을, 특히 가격 자유화를 출발점으로 하는 경제 개혁을 추진하였다.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등, 권력구조에 큰 변화를 주는 ‘새 헌법’안을 인민대표회의에 내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보수세력의 반대는 완강하였다. 

보수세력은 가이다르 총리 서리에 대한 인준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가이다르 내각의 총사퇴와 심지어 옐 친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였다.


그들은 ‘구국 전선’을 출범시키고 소련의 단계적 부활을 목표로 활동할 것임을 발표하였다. 

한편으로, 옐친은 고르바초프를 탄압하기 시작하였고, 고르바초프는 옐친에 반대하는 투쟁을 선언하였다.

옐친 대통령 세력과 반 옐친 대통령 세력 사이의 갈등과 반목은 격화되어 갔으며, 러시아 정치에는 위기가 조성되었다. 


다행히 타협이 성립되어, 1992년 12월에 가이다르 총리 서리는 퇴진하고 산업계 관료 출신의 체르노미딘(Victor Chernomyrdin) 부총리가 총리로 기용되었으며, 옐친이 제출한 새헌법안에 대해서는 1993년 4월 11일에 국민투표를 실시해 채택 여부를 결정하기로 합의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옐친 대통령은 러시아 연방공화국이 150만 명 규모의 독자 군대를 창설할 것임을 선언하는 포고령을 1992년 3월에 발표하였다. 

스스로 러시아군 최고사령관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뒤따라 마련된 ‘러시아 국방에 관한 법’은 국방과 관련해 대통령의 권한을 크게 줄였다. 


1993년에도 개혁 세력과 보수세력 사이에 정치적 투쟁이 계속되었다. 

첫 싸움은 보수세력의 승리로 돌아갔다.

그들은 4월 11일로 예정된 ‘새 헌법’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좌절시킨 것이다. 


그들은 여세를 몰아 옐친을 탄핵하려 하였으나 탄핵안은 부결되었다.

여기서 타협이 이루어져 옐친 대통령에 대한 신임여부, 옐친 대통령의 개혁 정책에 대한지지 여부, 옐친 대통령의 임기 단축과 대통령 선거의 조기 실시에 대한 지지 여부, 현 의회의 임기 단축과 새 의회조기 구성에 대한 지지 여부 등 4개 문항에 대해 국민투표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1993년 4월 25일에 실시된 국민투표는 대체로 옐친의 승리로 매듭지어졌다. 

옐친 대통령과 그의 개혁, 새 의회 조기 구성에 대한 지지와, 대통령 임기 단축에 대해서는 반대가 모두 절반을 넘어섰던 것이다. 

힘을 얻게된 옐친은 1993년 9월 21일에 기존의 최고회의 및 인민대표 회의를 해산시키고 새로운 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 실시와, 새 헌법안을 확정할 것임을 발표하였다.


보수파는 의회를 중심으로 반 옐친 운동을 펴면서 의회의 포고령을 통하여 루츠코이(Alecsandr Rutskoi) 부통령을 대통령 권한 대행으로 선출하고 공무원과 군인은 모두 이 정부를 따르라고 명령하였다. 

이 쿠데타는 곧 바로 진압되었다.


이 사건을 고비로 더 힘을 얻게 되자, 옐친은 1993년 12월 12일에 새 헌법안에 대한 국민투표와 새 의회 구성을 위한 선거를 동시에 실시하였다. 

우선 새 헌법안은 여유 있게 통과되었다. 

국가의회라고 할 수 있는 DUMA선거의 결과는 옐친에게 만족스럽지는 못하였다.


가이다르가 이끄는 개혁 세력 중심의 ‘러시아의 민주적 선택’ 당이 원내 제1당이 되기는 하였으나, 극우 민족주의자들의 집결체인 자유민주당과 러시아 연방 공산당이 뜻밖에 많은 의석을 확보하였기 때문이었다.


국가회의와 별개로 연방회의도 구성되어 전자를 하원으로 하고, 후자를 상원으로 하면서 양원제는 여전히 유지되었는데, 연방회의는 정치적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다.

새 헌법을 통해 훨씬 더 강화된 권한을 확보한 옐친은 시장경제체제로의 전환을 가속화시켰다. 


1994년 7월 발표된 제2단계 민영화포고령이 대표적 조처였다. 

이어 1994년 11월에는 급진 개혁파인 추바이스(AnatolⅡ Chubais)를 사유화 담당 부총리로 기용함과 동시에 시장경제에 밝은 실무형 관료를 내각의 요직들에 포진시켰다.

시장경제로의 이행은 결코 쉽지 않았다. 

1992년과 1993년에 인플레이션은 극심하였으며, 게다가 물자의 부족 역시 극심하여져 일반 국민들의 생활이 매우 어려워졌다.


국내총생산은 계속 떨어져 1996년의 경우에는 마이너스 6%를 기록하였으며, 인플레이션은 겨우 잡히기 시작했다고 해도 1996년의 경우에는 21.8%를 기록하였다. 

일반 국민들의 경제생활은 개선되지 않은 반면에 극소수의 신흥 부유층이 출현하였다. 

빈부의 격차가 두드러지게벌어지게 된 것이다. 사회적 안정은 크게 흔들려 살인과 폭력, 특히 마피아로 상징되는 조직 폭력이 난무하였다.


1992년, 인구 10만 명당 연평균 피살자의 수가 상시적() 내전 상태인 레바논의 20명에 육박하는 16∼17명으로, 세계에서 둘째에 이르렀다. 

관리들의 부조리와 부패 및 안일무사도 보편화되었다. 

그래도 옐친은 1996년 7월에 실시된 대통령의 직선의 결선투표에서 게나디 주가노프(Gennadi Zhuganov) 공산당을 압도적 표차로 누르고 재선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체르노미르딘 총리가 이끄는 ‘우리 집은 러시아’라는 이름의 정당 등의 도움을 받았다. 


재선으로 새롭게 5년의 임기를 시작하게 된 옐친은 1997년에 1988년 1월부터 루블화 가치를 1,000배 올리는 화폐계획안을 포함하여 러시아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한 몇 가지 조처들을 발표하였다. 

‘깊은 병’에 걸려 있는 러시아 경제가 그러한 조처들로 개선되기는 어려웠다.


1997년 말부터 시작된 동아시아 금융위기의 여파가 러시아에 밀어닥치면서 1998년 8월에 러시아는 루블화의 평가절하와 루블화 표시 외채에 대해 90일간의 지불유예(모라토리엄)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1998년 물가상승률이 약 80%를 기록한 데서, 그리고 러시아의 89개 지역에서 식량부족 현상이 일어났고, 일부 지역의 경우 기아현상이 일어날 가능성이 제시되는 사실에서 실증적으로 나타났다.


1999년에 들어서서는 1월초부터 금융기관의 파산이 줄을 잇고, 루블화의 폭락이 거듭되는 등 금융위기가 더욱 깊어졌다. 

대외 부채의 일부에 대해서는 채무 불이행(디폴트) 사태가 일어날 것이라는 전망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게다가 1996년에 심장수술을 받은 이후 옐친의 건강은 그가 언제 사망할 지 알 수 없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불안정하다. 

그래서 의회에서는 하야 권고안이 제출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그의 정치적 위신을 크게 격하시켰다. 


옐친은 1998년 11월 예브게니 프리마코프 총리에게 내정을 이양하고, 자신이 국방과 외교 등에 주력할 것임을 선언하였다. 

그것이 러시아의 국내정치를 결코 안정시키지는 못하였다.


옐친 이후를 내다보면서 1998년 말 이후 많은 정치인들이 여러 정당들을 새롭게 창당하고 있어서 러시아의 국내정치는 더욱 혼미해져 갔다. 

하지만 2000년 말 푸틴이 정권을 잡으면서 정치적으로는 어느정도 안정을 잡아가고 있다.


대외적으로 볼 때 러시아는 지난 날 구 소련을 구성하였다가 1991년 12월 21일 독립한 나라들 가운데 10개국과 함께 독립국가연합(CIS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회원국들은 서로 이해가 다른데다가 이 연합의 장래에 회의를 품어 연합의 유지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1992년 5월 11개 회원국들 가운데 러시아와 아르메니아를 포함한 6개국만이 집단안보 협력협정을 맺자 연합은 협정 서명국과 협정 비서명국으로 양분된 데다가 1992년 10월에 아제르바이잔이 회원국들 가운데 처음으로 탈퇴하고, 1992년 11월에 카자흐스탄 공화국이 제의한 공동경제 동맹결성안이 우크라이나 등 분리 지향적 회원국들의 반대로 거부되면서 연합의 존속에 대한 회의는 더욱 커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러시아 연방공화국의 한 공화국인 체첸공화국이 1994년 12월에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것은 독립국가연합에 속한 다른 국가들 내부의 민족분쟁에 자극을 주었고, 또 회원국들 사이의 민족분쟁에 대해서도 자극을 주었다. 

소수 민족들은 거의 모두 독립을 지향하려는 분위기 속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러시아 연방공화국은 체첸을 전격적으로 침공하여 무력으로 진압함으로써 소수민족들의 독립요구의 도미노현상을 막으려 하였다. 

소수민족들의 독립요구는 러시아 연방공화국 안에서도 독립국가연합 회원국들 각자의 내부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독립국가연합 내부의 회교도 국가들은 슬라브계 국가들에 반발하고 있다. 


그런데도 독립국가연합은 여전히 유지되어 왔다.

탈퇴하였던 아제르바이잔이 1993년 9월에 다시 가입하였고, 가입을 거부당하였던 그루지야가 1993년 12월에 받아들여졌다. 


독립국가연합은 최고 협의기구로 국가원수평의회를 두고 연2회 이상 회의를 연다.

1993년 10월에는 모든 회원국들이 경제공동체 형성에 찬성함으로써 연합의 존속에 힘을 실어 주었다. 

실무 기구로는 회원국 장관들로 구성되는 각료 위원회를 두고 있으며, 연4회 이상 회의를 연다.


러시아 연방공화국과 벨라루시 공화국 사이에는 1998년 말부터 통합이 협의되고 있다. 

이렇게 독립국가연합이 유지되는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연합을 중시하는 러시아의 입장이다. 

러시아는 연합에 가입한 나라들이 러시아의 안보에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결국 독립국가연합은 옐친의 슬라브 중심주의의 산물로서 고르바초프개혁에 대한 대중적 염증과 공화국들의 독립요구에 바탕한 것이다. 

엄밀히 말하여 그것은 구성국가들의 자주와 평등옹호 속에 러시아패권주의를 내장한 것으로서, 공동체적 결속보다는 공화국이기주의에 바탕한 경제적 생존전략의 일환이라 볼 수 있다.


독립국가연합은 당초 러시아·벨라루시·우크라이나 등 슬라브민족주의에 바탕하여 출발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분열현상을 보여, 슬라브계와 비슬라브계(특히 회교권), 러시아민족과 다른 소수민족들간의 암투로 발전, 경제문제와 관련하여 연합은 물론, 러시아 자신의 장래마저 불안 속에 놓이게 하고 있다.


1992년 러시아 연방공화국은 출범 당시부터 친서방 외교노선을 표방하였다. 

옐친은 러시아가 서방문명국들과 동반자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들로부터 자신의 개혁정책에 대한 정신적 및 재정적 지원을 받아 내고자 하였던 것이다.


미국과 서유럽 및 일본 등 부유한 서방 선진국들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으려면 그들과 우호적 협력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계산하였던 것이다.

친서방 외교노선의 핵심은 미국과의 우호 및 협력관계의 발전에 있었다. 


1994년 1월 13일에 미국 클린터(Bill Clinton) 대통령이 자신의 대통령직 취임 이후 처음으로 러시아를 방문하고, 옐친 대통령과 더불어 모스크바 선언을 발표하였는데, 이 문서는 두 나라가 탈냉전의 세계적 분위기 속에 평화를 더욱 확산시키기로 다짐하였다. 

이어 1994년 9월 27일에 옐친은 미국을 방문하고 클린턴 대통령과 더불어 유럽안보문제를 논의하였다.


여기서 제2단계 핵무기감축협정(START Ⅱ)의 일정을 앞당겨 핵탄두를 해체하기로 합의하였으며, 러시아군과 나토군사 사이에 합동 군사훈련을 실시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앞선 1993년 11월 2일에 러시아 연방공화국 국가안보위원회는 신() 군사독트린을 승인하였다.


이것은 탈냉전시대에 러시아는 특정 국가를 가상 적국으로 상정하지 않으며, 러시아 국익을 저해하지 않은 나라는 동반자로 여기고, 군사력의 사용은 방어에 한정하며 핵무기는 전쟁수단이 아니라 침략 억지를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중요하다는 등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처럼 옐친의 친서방, 친미외교는 서구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믿음 아래서 러시아의 외교 정치 행위를 미국의 그것에 종속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서방 세계는 러시아를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다. 


옐친의 친서방 외교는 큰 소득을 얻지 못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이른바 유라시아주의자들의 비판이 힘을 얻게 되었다.


독립국가연합의 회원국들 및 아시아·태평양 국가들과의 관계 강화에 대해서도 무게를 실어야 할 것을 강조하는 유라시아주의자들은 서방 세계와의 관계 강화를 앞세우는 이른바 대서양주의자들의 외교는 결과적으로 러시아를 미국 또는 서방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으며, 러시아 외교에서 자율성을 감소시킨 반면에 타율성을 증대시키고 있다고 비판한 것이다.


옐친은 이 나라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접근하는 등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점에서 1997년 중요한 기록들을 남겼다. 

우선 3월에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서 열린 미국과의 정상회담에서 두 나라는 2007년까지 냉전시절 두 나라가 가졌던 핵무기 최고 보유량의 80%를 줄인다고 합의하였다.


두 나라는 또 나토의 동유럽 확대를 지지하되 동유럽의 어느 나라에도 나토의 상주국이나 핵기지는 주둔시키지 않는다고 합의하였다.

이어 4월에 모스크바에서 중국과의 정상회담이 열렸다. 


이 회담에서 두 나라는 세계의 다극화를 선언하고, 미국이 단독적 패권을 행사하지 못하게끔 두 나라가 공동으로 보조를 취하기로 합의하였다. 

후속 정상회담이 11월에 베이징에서 열렸다. 여기서 4,300㎞에 이르는 국경선을 확정하는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두 나라 사이에 분쟁의 불씨로 남았던 국경분쟁이 해소되었다.

러시아는 11월 초순에 시베리아의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일본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여기서 두 나라는 2000년까지 두 나라 사이에 2차대전을 공식으로 마무리짓는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최대 현안인 북방 4개섬을 둘러싼 영토분쟁을 해결하기로 합의하였다.


러시아는 미국과는 여전히 탈 냉전시대에 걸 맞는 우호와 협력 및 평화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면서도 중국 및 일본과의 관계도 돈독히 함으로써 그것에 바탕을 두고 미국을 공동 견제하려는 입장을 취한 셈이다.


1998년 말에 미국이 이라크를 기습 공격한 사건은 러시아와 미국 사이의 관계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미국에 대한 견제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함으로써 무력함을 다시 드러내게 된 러시아가 마치 그것에 반발이나 하는 듯 미국을 강하게 비난함으로써 두 나라는 긴장을 보여 주게 된 것이다.


전반적으로 러시아는 ‘핵을 가진 제3세계’로 조롱될 만큼, 즉 초강대국 미국과 강대국 제1군 일본·중국 및 독일에 이어 영국 및 프랑스와 더불어 강대국 제2군에 속한 것으로 자위할 정도로 위신이 실추되었다. 

그만큼 러시아의 국제 정치력 영향력은 떨어지고 있다.


러시아가 미국과 유럽보다 덜 중요하게 여기는 동아시아에 대해서는 중국과 일본을 빼 놓고는 적극적인 정책을 펼 여력이 크게 줄었고, 그것에 비례해 영향력 역시 크게 줄어들었다.


한반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한반도에 대한 종래의 영향력을 회복하려고 몸부림치고 있으나 뜻대로 되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러시아를 외교적으로 경시하거나 심지어 괄시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러시아의 영향력이 현재 줄어들고 있음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일정한 발언권을 행사하고 있으며 실질적 강대국으로 다시 도약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와 우호 협력관계를 유지하는 노력은 계속해서 기울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 나라와 러시아와의 관계는 180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전 1246년에 고려인이 몽고의 수도인 캐라코람에서 러시아 수스달공국의 제로슬라프(Jeroslav)대공과 만났다는 기록이 있으며, 또 조선조 효종 때에는 청나라의 요청에 따라 두번에 걸친 나선정벌(, 1654·1658)이 실행된 사실이 있었다.

그러나 모두 단발적인 접촉으로 끝나 지속적인 관계가 유지된 것은 아니다. 

1800년대 이후 두 나라의 관계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3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1860년부터 한러수호조약을 체결하여 한반도에 거점을 확보하게 된 1884년까지, 제2기는 1884년부터 청일전쟁이 끝나 한반도에서 일본과 직접 대립하게 되는 1894년까지, 제3기는 1894년부터 러일전쟁에 패함으로써 한국을 부득이 포기하게 되는 1905년까지이다. 

1905년 이후부터 광복이 될 때까지는 사실상 두 나라 관계는 단절된 상태에 있었다.


제1기(1860∼1884)의 관계

러시아가 우리 나라에 본격적인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러청북경조약(, 1860)으로 약 40만 평방 마일이나 되는 연해주지역을 획득함으로써 국경을 서로 맞대면서부터이다. 

이 무렵 러시아의 주 관심은 우리 나라 영내에서 해군함대를 위한 부동항()을 얻는 데 있었다.

1854년에는 일본과 개항교섭업무를 맡았던 푸티아틴(Putiatin,E.) 제독이 거의 한달 가량 동해상에 머물면서 두만강 입구를 측량하고 영흥만도 답사하여 그 내만()인 송전만()을 포트 라자레프(Port Lazarev)라고 명명한 일이 있다.


1857년에는 영토문제 해결을 위하여 청나라로 가던 도중 거문도에 정박한 사실이 있기도 하였다. 

이는 어디까지나 한반도의 부동항에 대한 관심표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한반도의 부동항이 절실히 필요하게 된 것은, 러시아가 연해주라는 광대한 지역을 얻기는 하였지만 중심지역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육로로 이 지역과 통교하기 위해서는 2년이라는 긴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었다.


대지가 황폐하여 식량도 자급자족할 수 없을 뿐더러 강마저도 연평균 173일이나 얼어붙어서 하천교통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들로서는 아시아 영토와의 왕래 및 교역업무는 해운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는 연해주의 유지와 나아가 아시아 침략을 위해서도 해군력을 증강해야 하였고, 이를 위해서는 함대의 근거지가 될 수 있는 항만이 필요하였다. 

1860년에 건설한 블라디보스토크항이 있기는 하였지만 연간 4개월(12∼3월)이나 얼어붙어서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는 크게 부족하였다.


러시아는 부동항 대상지를 일본령으로 정하고, 1855년 러시아영토가 된 쿠릴열도(Kuril)와 일본령인 남부 사할린과의 교환계획을 추진하는 한편, 1861년에는 대마도()를 점령하기도 하였다.

이 계획은 영국과 일본의 견제로 좌절되었으며, 진출방향도 한반도로 바뀌게 되었다. 

1864년 5명의 러시아인이 경흥으로 찾아와 통상을 요구하기도 하였고, 1866년에는 러시아군함이 원산만에 들이닥친 일도 있었다.


러시아는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철수하였는데 이는 영국과 청의 견제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이후 러시아는 영국을 비롯한 열강의 의혹을 사게 될까 염려하여 한반도침투에 신중을 기하게 됨으로써 그 기선을 일본과 미국에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로 하여금 경계심까지 가지게 해버렸다.

러시아의 신중한 태도와 청나라의 사주에 의한 우리 나라의 경계심은 두 나라가 국경을 접하고 나서도 20년간이나 수교를 막았던 중대한 요인이었다.


제2기(1884∼1894)의 관계

러시아의 우리 나라에 대한 태도는 1880년을 전후하여 크게 바뀌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대원군의 실각으로 쇄국정책에 수정을 가하게 되었다. 

일본은 청나라가 이리분쟁()에 여념이 없는 틈을 타서 1876년 우리 나라와 강화도수호조약을 강압적으로 체결하였다.


우리 나라는 러시아와 일본의 위협을 막기 위해서는 구미열강을 끌어들여야 한다는 이홍장()의 권유에 따라 1882년 미국을 비롯한 영국·독일 등과 수교를 맺게 되었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우리 나라에 대한 청나라의 압제가 강화되자, 고종은 구미열강의 힘을 빌려 이를 견제하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고 오히려 역이용 당하였다.

영국은 한영조약의 비준을 거부하고 한영신조약을 강압하였다. 

이에 고종은 영국·미국의 반대세력인 러시아를 끌어들이게 된다. 

러시아로서도 종래의 신중한 태도를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영국·미국 등 적대세력이 한반도에 교두보를 마련하였기 때문이다. 

청나라와 프랑스의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영국·미국 등이 몇 개의 항만을 확보하게 될 것이고 이는 러시아에 대한 위협이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이를 아시아진출을 위한 기회로 보고 우리 나라와의 수교를 서두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묄렌도르프 (Möllendorf,P.G.)의 주선으로 1884년 7월 7일 한러수호조약()이 체결되었다. 러시아는 이로써 한반도에 있어 영국과 대등한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 뒤 일어난 갑신정변으로 개화파가 거세되고 수구파가 득세하게 되어 청나라의 압박이 더욱 강화되자, 다시 묄렌도르프가 주선하여 한러밀약()이 맺어졌다.

이로써 러시아는 그렇게 원했던 영흥만이라는 부동항을 얻게 되고, 영국을 앞서게 되었다. 

영국은 밀약의 대략을 탐지하자, 그렇지 않아도 아프가니스탄의 펜제(Pendjeh)위기로 러시아와의 대결을 계획하던 터라 1885년 4월 거문도를 점령해버렸다. 


이 사건은 한러밀약 실현을 위한 주일러시아공사관의 서기관 스페예르(Speyer, A.)와 우리 나라 외교부의 교섭(6월)을 무위로 끝나게 해버렸다.

이로 인하여 우리 나라와 러시아는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우선 우리 나라로서는 러시아의 새로운 영토적 침략을 영국의 힘을 빌려 막았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이이제이()에 성공하였던 셈이다. 


청나라의 압제를 제거하기 위하여 끌어들인 러시아가 영국에 의하여 견제됨으로써 더 심한 청나라의 속박에 시달리게 되었다.

더욱이, 영국은 거문도철수의 선행조건을 청나라에게 알려주며 영국과 러시아간의 조정역까지 맡겼는데, 이는 청나라의 대한종주권을 결정적으로 강화시켜주는 외교적 지원이었다. 


이런 상황하에 1885년 10월 3일 우리 나라에 온 위안스카이()는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라는 직책으로 내정에 깊이 간섭하였다.

그는 1886년 8월 ‘제2차한러밀약사건’을 조작하여 병합을 기도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러시아와의 충돌가능성 때문에 자제해서 1886년 10월 ‘이()·라디겐스키협정’을 맺음으로써 좌절되기는 하였지만, 청나라의 압력은 이처럼 강한 것이었다.  

러시아는 거문도사건을 계기로 동아시아지역 방위정책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하자 러시아함대는 동해를 벗어나기조차 힘들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시에는 중립국의 항구를 기지로 사용할 수 없으므로 별도로 저탄지()를 확보하지 않는 한 그들의 함대는 방어역할 밖에 할 수 없다는 점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그래서 육군에 의지하는 새로운 방위정책을 채택하게 되었다. 

그 구체적인 조처가 바로 1886년부터 논의되기 시작한 시베리아철도건설계획이다.


대한정책에 대한 기본적인 노선도 확립하게 되는데, 1888년 4월 26일 프리아무르 총독 코르프(Korf)와 외무성 아시아국장 지노비예프(Zinoviev)의 회담은 러한 요청에 부응한 것이었다. 

이 회담은 후자가 각서형식으로 정리한 문건에 코르프가 동의, 서명하는 절차를 밟았는데 이 두 사람의 결정이 청일전쟁 개전 때까지 러시아의 대한정책의 기조를 이루고 있다.


거문도사건이 있은 지 3년 후에야, 그것도 국장급의 모임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은 당시 러시아가 평가한 우리 나라의 비중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한반도는 관심의 대상이기는 하였지만 그렇게 중요한 나라는 아니었다.


러시아가 한반도병합을 기도할 경우 청나라와의 관계악화는 물론이고, 영국과의 관계도 악화시켜 영국과 청나라의 연합을 촉진시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라디겐스키회담이나 1888년의 한러육로통상장정()도 그런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제3기(1894∼1905)의 관계

러시아의 대한 기본노선은 이 기간 중 시베리아철도 착공(1891.5.31.)이 일본으로 하여금 청나라에 대한 개전을 서두르게 함으로써 바뀌게 되었다. 

시베리아철도는 거문도사건 직후 전략적인 목적으로 계획된 것이었다.

처음에는 재무상 비시네그라드스키(Vishnegradski)의 반대로 착공이 지연되었으나 위테(Witte,S.Y.)의 등장과 더불어 프랑스의 금융지원을 받아 이 철도가 군사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됨으로써 착공하게 되었다.


일본에게는 위협으로 받아들여졌고, 따라서 러시아가 시베리아철도를 완성해서 태평양연안에 접근하기 전에 청나라와의 관계를 해결해야만 하였다. 

시베리아철도가 완공되면 바로 아시아침략이 개시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러시아로서는 청일전쟁의 개시와 더불어 한반도를 둘러싼 종래의 대일정책을 급격히 바꾸게 되었다.


개전 직후에는 국외중립을 지켰지만, 전세가 일본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일본의 강화조약문이 1895년 3월 25일 이홍장에게 수교되자 강경한 태도로 돌변하였다. 

“일본의 요동반도 점령은 명백히 러시아의 철도를 겨냥한 것이며, 그들의 여순() 출현은 결과적으로 한반도 전체의 병합이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청일전쟁의 개전은 두 가지 점에서 러시아의 대한정책을 크게 바꾸어놓았으니, 첫 번째는 종래 국장급회의로 결정되던 대한정책을 각료회의의 논의대상으로 하였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한반도문제에 관한 한 일본과의 협조가 아니라 일본에 대하여 열강과 공동간섭을 계획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위테의 입안에 따라 러시아가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시모노세키조약() 조인 후 6일 만에 전격적으로 제기한 대일() 3국간섭이다(1895.4.23.).

일본은 러시아 등의 열강에 굴복, 요동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하게 되었다. 

우리정부에서는 노골적인 인아거일책( : 러시아를 끌어들이고 일본을 멀리하는 정책)을 써서 친일파 각료들을 제거하고 친러파를 중용하였다.


이에 일본은 약세를 만회하기 위하여 민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1895.10.8.)을 일으키게 된다. 

우리 나라 국내의 거센 반발과 국제적인 압력에 부닥치게 되고, 이어 아관파천(, 1896.2.11.∼1897.2.20.)으로 일본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일본은 어떻게 해서든 러시아와의 타협을 모색하는 입장이 된 반면, 러시아는 유리한 입장에서 외교활동과 이권획득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1896년 5월 14일 러시아·일본 양국의 주한공사들 사이에 합의된 베베르(Weber,K.)·고무라()각서는 러시아의 우위가 인정된 것이었다. 


니콜라이2세의 대관식 참석을 이용해서 모스크바에서 성립된 로바노프·야마가타()의정서(일명 모스크바의정서, 1896.6.9.)는 한반도에서의 양국의 지위를 협의한 고위층간의 타결이었다.

유리한 입장의 러시아가 일본과 타협한 것은 태평양연안에서 준비가 갖추어질 때까지 일본을 잠시 안정시키려는 속임수에 지나지 않았다.


위테는 이미 그보다 일주일 전에 대관식에 참석한 이홍장과 러청비밀동맹()이라는 대일본공동방위동맹을 맺어 동청()철도부설권을 획득하였고, 

6월 1일부터는 고종의 사절로 모스크바에 간 민영환()과도 로바노프·야마가타의정서와는 상반되는 목적을 가진 ‘조선사절에의 회답요점’을 마련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외교행각과 아울러 서울에서도 러시아공사관으로 온 고종을 상대로 이권획득활동을 전개하였다.


1896년 4월 니시첸스키(Nisichensky)라는 자의 명의로 함경북도 경원·종성일대의 광산채굴권이 러시아로 넘어갔고, 같은해 8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 상인 브린너(Brynner,Y.)의 명의로 압록강·두만강유역과 울릉도 삼림채굴권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동해의 포경권에도 손을 뻗쳐 울산·성진 등지의 어장까지 확보하게 되었다.

아관파천 시기의 러시아는 우리 나라의 군사·재정에 관한 대부분의 권력을 장악하였지만, 한반도에 대해서는 만주방위를 위한 완충지대의 역할밖에는 부여하지 않았다.


일본과의 평형을 유지하며 자국세력의 거점을 마련한 뒤, 친위대 및 군대의 훈련을 관장하고 재정고위직을 러시아인이 차지하는 데 그치려 하였다. 

1896년 8월 스트렐비트스키(Strelbitski)대령이 내한하였으며, 같은해 10월말에는 푸티아타(Putiata)대령 등 교관단일행이 민영환 등과 함께 서울로 왔다.


우리 나라 사절에게 약속하였던 차관제공을 미루고, 이것이 불신을 사게 되어 러시아의 한반도에서의 세력이 한때 흔들리는 위치에 있었다. 

경제적으로 일본에 훨씬 뒤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위테의 모든 관심이 만주횡단철도에 집중되어 이홍장과의 교섭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이러한 공백이 영국·프랑스 등의 열강에 이용당하였던 것이다. 고종의 환궁도 러시아에 대한 실망을 말해준다.


위테가 그의 비서장 로마노프(Romanov,P.M.)의 건의를 받아들여 새로이 대한진출을 결심하고 알렉세이프(Alexeiv,K.A.)를 파견함에 따라 사태는 다시 바뀌었다.

“한러은행설립을 준비하고 세관관리를 러시아인 수중에 넣으라.”는 위테의 훈령에 따라 1897년 9월초 서울도착과 함께 우리 나라 세관관리상태를 파악하고, 

영국인 총세무사 브라운(Brown,M.)의 부정행위 증거를 포착, 축출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10월 25일 그는 재정고문 및 총세무사로 임명되었고, 11월 10일까지는 세관의 모든 업무를 접수하였다. 

이로써 러시아의 약세는 완전히 만회되었다. 

그렇지만 위테의 이러한 대한정책도 자르의 신임이 외상 무라비에프(Muraviev)로 옮아가게 되고, 그의 제의에 따라 1897년 12월 19일 뤼순·다롄()을 점령하게 되자 다시 한번 크게 바뀌게 된다.


아시아정책이 한반도 중심에서 만주중심정책으로 바뀌게 되고, 그 반영으로서 러시아의 양보를 의미하는 1월의 제의가 1898년 4월 25일 로젠·니시(西)협상으로 매듭지어졌다. 

이에 앞서 러시아는 훈련교관과 재정고문을 자진 철수시켰고, 개점한 지 2개월밖에 안 되는 한러은행도 해체시켰다. 


로젠·니시협상에서는 일본의 경제적 우위만을 인정해주었지만, 그것은 결국 일본의 외교적 우위마저 인정해주는 셈이 되어 한반도에서의 러시아의 기반은 크게 약화되었다.

이는 만주중심의 정책을 수행하기 위하여 한반도를 일본을 견제하는 완충지대로서의 가치만으로 인정한 데에 그 원인이 있다. 

러시아가 일본의 정치적 우위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한반도에서 대일견제력을 유지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 단계에서는 이미 국제적 압력과 내부적인 ‘금융 및 산업위기’가 겹쳐 모든 사태를 1898년 중반으로 묶고 더 이상의 진전을 자제한다는 ‘신정책’이 확정된 상태였다.

따라서, 1899년 3월의 포경합동조약안이나 1899년 9월 1일과 1900년 3월 30일의 마산포()의 조차기도는 자르의 재가를 받은 것이기는 하였지만, 정책담당자의 최종적인 결정에 의한 조처는 아니었다.


의화단란()의 만주파급은 이러한 러시아의 자제정책을 계속 고수할 수 없게 만들었다. 

러시아는 이를 기화로 만주를 점령하고, 한편으로는 연합국과 더불어 북경교섭을 벌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청나라의 지방관리와 단독교섭을 하여 만주를 보호령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러시아는 일본의 견제조처가 있을 것을 예견하고 그 선수조처로서 열강보장하의 한반도중립화안을 일본에 제의하게 되었다.


1900년 8월말 친러파였던 주일한국공사 조병식()이 일본외상 아오키()에게, 1901년 1월 7일 주일러시아공사 이즈볼스키(Izwolski)가 가토()외상에게 각각 제의하였다. 

이것이 일본에 의하여 거부되자 러시아는 다시 1901년 7월 일본에 행정 및 재정고문과 경찰총감의 파한권()을 인정하는 한반도중립화안을 주한일본공사에게 제의하였다.


이것은 영국에 자극을 주어, 일본의 동맹제의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였던 영국으로 하여금 1902년 1월 이른바 영일동맹을 체결하게 하여주었다. 

이로 말미암아 러시아는 약세에 놓이게 되었다. 

러시아는 이러한 상황을 초강경책으로 극복하려고 하였다. 

만주철병은 위테가 실각하고 베조브라조프(Bezobrazov)가 득세하는 계기가 되었다.


베조브라조프의 ‘전진정책’이 사태를 지배하는 가운데 러시아는 무모하게도 우리 정부에 대하여 1896년 브린너가 획득한 압록강 삼림이권의 이용을 통고하고, 이어 용암포() 점령을 단행하였다. 

이를 계기로 러일전쟁이 개시되었으며, 러시아는 여기에서 패전하였다.


포츠머스조약에서 러시아는 일본에게 한반도의 보호만을 승인하였지만, 이는 한반도에 있어서 러시아의 대일견제력 상실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일본의 한국병합까지 가능하게 해준 것이었다.

그리하여 1905년 이후부터 광복이 될 때까지 러시아와 우리 나라의 관계는 사실상 단절된 상태에 놓이게 된다.




광복 이후 우리나라와 러시아의 관계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그 이북은 소련이 점령하고 그 이남은 미국이 점령하게 되었다. 

38도선은 한반도에 대한 소련의 전통적인 욕심을 고려한 미국이 구상하고 제의한 것이다.


소련은 이 제의를 받아들인 것이지만, 간접적으로는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잠정적으로 제안된 분단이 굳어지게 된 데는 소련의 책임도 있다. 

북한을 자신의 세력 속에 고정화시키려는 소련의 야심은 결국 북한에 소비에트체제를 이식시켰기 때문이다.


구 소련과 북한과의 관계

구 소련은 1945년 8월 8일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10일에는 함경북도 웅기에 상륙하였다. 

함경북도·함경남도의 주요지역을 장악한 다음 평안도로 들어와 8월 24일 평양에 도착하였다. 

평양에 들어온 구 소련 제25군은 직접통치방식을 회피하고 간접통치방식을 택하였다.


평양에 들어오기 전에 자체적으로 수립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평남지부를 일단 인정하고, 그 기구를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개편하여 배후에서 조종하였다. 

이 때 북한통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하수인으로 이용하였던 것이 바로 구 소련파 한국인이었다. 

이어 개최된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는 우리 나라에 대한 의정서가 발표되었다.


주요내용은 한반도 전역에 통치권을 가지는 한민족의 통일된 임시정부를 수립한다는 것, 그리고 이 정부를 미국·영국·중국·구 소련 4개국이 5년 이내 신탁통치한다는 것이었다.


구 소련은 이 모스크바공식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구 소련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을 때도 자신의 처지를 고수하고 비타협적인 자세를 보여줌으로써 결국 회담은 결렬되고 말았다.


미·소의 대립은 점점 돌이키기 어려운 상태에 빠지게 되고, 따라서 남북분단은 고정화되었다. 

결국, 1948년 9월 9일 북한에는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로써 구 소련은 북한의 소비에트화라는 점령 초기의 목표를 달성하였다. 

구 소련은 정권이 수립된 뒤에도 북한에 대하여 계속 많은 경제원조 및 군사원조를 제공하였다. 

이와 같은 구 소련의 원조가 남침준비의 원천이 되었다.


스탈린(Stalin, I. V. )이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승인하였을 때, 그들은 미국의 불개입을 전제하고 있었다. 

트루먼 (Truman, H. S. ) 행정부는 국제연합의 이름 아래 서방국가들과 함께 참전하였다.


연합국의 반격으로 북한이 붕괴의 위험에 빠지게 되었을 때, 구 소련은 중국의 참전을 적극 권유하였고, 중국의 참전과 더불어 전선이 교착되자 휴전을 제안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구 소련은 1951년 6월 휴전을 제의하게 되었고, 휴전협상이 개시되어 1953년 7월 마침내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한국전쟁에서의 중국의 개입과 1958년까지 계속된 중국군의 북한주둔은 구 소련과 북한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중국의 북한에 대한 영향력이 증대된 반면, 북한의 구 소련의존도는 줄어들게 되었다.


스탈린의 죽음과 그에 따른 소련지도자들의 내분도 구 소련의 영향력을 감소시켰다. 

거기에다가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제1서기 흐루시초프(Khrushchyov, N. S. )가 스탈린의 개인숭배와 1인독재체제를 비난하고 서방과의 평화공존을 옹호하자, 

김일성은 이러한 상황이 자신의 권력유지에 방해가 된다는 것을 감지하고 이에 다각적으로 대처하였다.

이 과정에서 구 소련과 북한의 갈등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구 소련은 1953년 9월 북한에 대한 원조협정을 체결하고 2억5000만달러의 전후복구비를 제공하기도 하였지만, 북한을 구 소련의 영향권내에 묶어두지는 못하였다. 

1960∼1961년 중소분쟁이 심각하게 노출되고 어느 한쪽을 선택하도록 강요당하자 북한은 중국을 선택하였다.


북한은 중국과 협력해서 구 소련의 수정주의·유화주의노선을 비난하게 되고, 구 소련은 북한에 대한 경제·군사·기술원조를 단절해버렸다. 

1964년 10월 흐루시초프의 실각과 새로운 지도층의 등장은 두 나라의 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구 소련은 1965년 5월 군사원조협정을 체결하고 그동안 끊겼던 군사원조를 재개하였다. 

1966년 2월에는 경제기술협정(1966∼1970)이, 1967년 3월에는 북한군사력강화를 위한 협정이 맺어졌고, 1967년 10월에는 경제·과학·기술조정위원회가 개최되었다.


두 나라 사이의 무역량은 늘어났으며, 평양화력발전소 및 김책제철소()의 확장과 기타 건설계획에 대한 구 소련의 원조가 재개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북한은 중소분쟁에 대한 중립을 선언하게 된다. 

구 소련의 이념노선에 반대하면서도 공리적인 타산으로 인하여 구 소련측으로 기울어져 있는 상태였다.


구 소련은 북한이 1968년 1월 미해군함 푸에블로호를 나포하고, 1969년 4월 미해군 정찰기 EC·121기를 격추시켰을 때, 그 비합리적이고 무책임한 행동에 대하여 경고하였다.

이에 북한은 1969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세계공산당대회에 불참하고, 1970년 3월 조소공동해양연구의 불참을 발표하였다. 


1970년대 초 미국과 중국의 관계가 개선되자, 북한은 거의 완전한 중립으로 바뀌게 되고, 구 소련은 이를 활용하려고 하였다.

1971년 11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북한의 경제사절단에게 1971∼1975년 동안의 추가 경제·군사원조를 제공하고, 이어 ‘공산주의지도 아래에서의 조선통일’을 강력히 지지하였다.


1972년에는 북한의 외상 허담()의 방문을 받아들여 브레즈네프(Brezhnev, L. I. )와 회담하였다. 

구 소련도 공식사절단을 북한에 파견하였으며, 북한은 1970년대의 긴장완화와 다원화 속에서 대외관계의 새로운 좌표를 설정한다. 

중국과 구 소련 사이에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비교적 중립적인 입장에서 이익을 추구하려는 태도, 즉 ‘자주노선’을 추구하게 된다.


구 소련은 이러한 눈치외교를 배척하기도 하고 북한의 ‘주체사상’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별종이라는 태도를 취하였다. 

고성능 항공기의 공급 및 김일성의 구 소련방문을 거절하기도 하였고, 북한군인들의 판문점에서의 미군장교 살해에 놀라기도 하였다. 

이러한 요인들로 인하여 구 소련은 1976년 말부터 북한에 대한 지원을 격감시켰고, 무역량도 크게 줄어들었다. 


기본적인 유대관계에는 거의 변함이 없었다.

1976년 7월 만기가 된 양국간의 상호방위조약 유효기간을 5년간 연장하였으며, 1978년 양국의 외교관계수립30주년에는 우호적이며 협조적인 관계를 공개적으로 다짐하였다.


1980년대에 들어서서도 이러한 기본적인 관계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지만, 1982년 8월 15일 구 소련이 북한에 보낸 광복37주년기념축하전문에서 “1945년 8월 구 소련군은 일본군국주의군대 가운데 가장 강한 관동군을 참패시켜 한국민을 일제식민지의 멍에로부터 해방시켰다. 

”고 명시한 데 대하여, 김일성은 상당한 불만을 표시하였다.


구 소련의 아프카니스탄 군사개입에 대해서도 불만을 표시하였다. 

1984년 김일성은 구 소련을 방문하여 구 소련공산당 서기장 체르넨코(Chernenko, K. )와 회담하면서 두 나라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하였다. 


1982년 이후 소련과 북한 사이에는 도서발행분야협조협정(1982. 10. )·과학기술협조협정(1984. 10. )·철도협정(1985. 2. )·국경협정(1985. 4. )·영사협정(1985. 4. )·과학기술정보교환협정(1985. 8. )·

관광교류협조협정(1985. 8. )·경제기술협조협정(1985. 12. )·원자력발전소건설협정(1985. 12. )·쌍방간의 인적교류협정(1986. 1. )·수산분야협조협정 (1987. 5. ) 등이 체결되었다.


1986년 구 소련의 대북한 수출액은 11억3550만달러에 이르렀으며, 그 주요품목은 원유와 밀이었다. 

수입액은 6억7650만달러에 이르렀으며, 주요품목은 압연강제·미곡 등이었다.


대한민국과 구 소련 의 관계

38도선 이북 지역에 대한 구 소련의 점령과 북한정권 수립으로 인하여 구 소련과 한국과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적대적인 성격을 지닌 채 출발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어 1950년 6월 25일 개시된 북한의 남침에 있어서 구 소련의 역할이 지대하였다는 것은 그러한 적대의식을 더욱 강화시켰다.


제1공화정의 이승만()대통령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을 요구하여, 결국 1953년 10월 1일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기본적으로 반소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구 소련의 팽창정책을 동맹조약으로 견제하려던 미국의 정책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호불신관계는 제2공화정에도 그대로 지속되었다.


1961년 군사쿠데타로 시작된 군정에서도 대외적으로는 친미정책, 대내적으로는 반공정책을 강화하였다. 

구 소련 관영통신은 군사정부를 비난하였고, 군사정부도 구 소련과의 접촉을 고려하지 않았다. 

제3공화정이 출범한 이후에도 이와 같은 관계는 계속되었다.


구 소련은 한일기본관계조약을 미국이 주도하는 동북아시아판 나토(NATO)라고 규탄하였다. 

1965년 2월 코시긴(Kosygin, A. N. ) 구 소련수상은 평양을 방문하고 공동성명을 통하여 같은 취지를 명확하게 밝혔다. 

구 소련은 또한 한국군의 베트남참전도 비난하였다.


1966년 6월 한국의 주도 아래 아시아·태평양이사회(ASPAC)가 창설되자 미국의 후원 아래 반공적인 군사동맹을 형성하려는 움직임이라고 비난하였다. 

이러한 적대감 속의 한소관계는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닉슨(Nixon, R. M. ) 행정부의 출범과 함께 미국의 세계정책이 바뀌고, 구 소련과 중국을 포함한 강대국관계도 바뀌게 된다. 

한국도 구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에 대하여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게 되었다.

구 소련도 한반도의 긴장완화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바뀌면서 한국과 제한된 범위 내에서나마 관계를 개선하려는 징후를 보였다. 


1971년 8월 김용식()외무장관은 국외에서 구 소련이 한국에 대하여 적대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구 소련과 외교관계를 수립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고, 당시의 박정희()대통령도 1972년 5월 16일 비슷한 취지를 밝혔다.


무역법도 고쳐 구 소련을 포함한 비적성 공산국가와의 교역도 허용하였다. 

1973년 6월 23일 박정희 대통령은 특별외교선언을 통하여 구 소련을 비롯한 공산국가에 대하여 문호를 개방할 용의가 있음을 밝히고, 그들도 호혜적인 조처를 취하여줄 것을 요청하였다.


구 소련의 한국에 대한 태도도 점차 바뀌었다. 

한국도 아시아집단안전기구의 회원이 될 수 있으며, 남북한의 국제회의 및 유엔동시가입 실현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하였다.


1973년부터는 대한민국여권을 소지한 사람들에게 소련입국을 허용하였다. 

국제연극협회 총회에 참석하는 연출가 및 유니버시아드체육대회에 참석하는 38명의 한국선수단을 입국시켰다.


비공식이지만 양국의 무역계약이 맺어졌고, 다양한 형태의 문화교류가 전개되었다. 

이러한 관계에 대해서 중국과 북한이 ‘2개의 조선정책’을 고취하는 것이라고 공격하였지만, 한국과 구 소련은 은밀한 관계의 접촉을 계속하였다.


구 소련은 북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의 입국을 계속 허용하였다. 

1975년 9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세계아마추어레슬링선수권대회에 참가하는 선수단, 국제연합협의회에 참가하는 한국대표단에 입국을 허용하였다. 


1978년 4월 대한항공 소속의 여객기가 실수로 구 소련영공을 침입하여 무르만스크에 불시착하였을 때에도 구 소련은 호의적으로 처리해주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담화를 통해서 구 소련정부에 고마움을 표시하였다. 

구 소련은 그 뒤에도 국제회의를 취재하는 기자들, 체육대회에 참가하는 선수단, 세계정치학회에 참석하는 학자들에게 입국을 허용하였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두 나라 사이의 관계는 개선과 악화가 교차되는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1983년 9월 1일 대한항공기가 구 소련영공을 침입하였다는 이유로 소련공군기가 이를 격추시켰다. 

이 사건은 구 소련에 대한 전통적인 불신과 적대감을 환기시켜주었다.


1984년 5월 김일성의 구 소련 방문과 구 소련과 북한의 군사유대강화는 구 소련이 북한의 군사모험주의를 부추기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도 한편으로는 구 소련과 한국의 관계개선 움직임이 있었다. 

1982년 가을에는 구 소련정부의 문화관계 관리가, 1986년에는 구 소련의 체육부장관이 각각 서울을 방문하였다.


두 나라 사이의 간접무역규모도 계속해서 확대되어왔다. 

1988년 제24회서울올림픽대회에는 788명의 선수단이 참가하였고 예술단이 서울에 왔다. 

서울올림픽 참가와 한국경제에 대한 높은 평가에 힘입어 두 나라 사이의 교역관계는 증대되고 있으며, 1988년에는 상호영사업무까지 취급하는 무역사무소를 개설하였다.


고르바초프의 등장과 구 소련의 남북한 관계

1985년 3월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고르바초프(Gorbachev, M. )가 취임하면서 구 소련은 개혁과 개방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고르바초프는 국제관계 전반을 탈냉전 화해와 협력으로 전환시키고자 노력하였으며,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우리 나라와 관계 개선을 추구하였다.


그 결과 1990년 6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제1차 한·소 정상회담이 열렸으며, 이해 10월에는 한·소국교가 수립되었고, 곧 바로 12월에는 제2차 한·소 정상회담이 모스크바에서 열린 데 이어 1991년 4월 제3차 한·소 정상회담이 제주도에서 열렸다. 

구 소련은 또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에 가입하도록 지원하였다. 구 소련의 이러한 대한정책은 북한의 불만을 불러 일으켰다.

1986년 김일성은 구 소련을 방문하고 고르바초프와 회담하면서 구 소련이 한국을 승인하는 것은 2개의 조선을 고착화시키는 일이라고 경계하였으며, 그 뒤에도 같은 뜻을 여러 차례 표시하였다.


러시아 와 남북한 

1991년 12월에 구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 연방공화국이 구 소련을 계승하였다. 

러시아는 중국과 함께 한반도와 국경을 접하면서 연해주와 사할린의 한인 동포 6만여명을 포함, 15만여명의 교포가 살고 있어 우리와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한러 관계의 발전은 1988년 한국 제6공화국정부의 출범과 함께 시작된 북방정책과 고르바초프가 1988년 9월 크라스노야르스크연설을 계기로 적극화된 한국과의 경제협력의사가 맞물리면서 급진전되었다.


1990년 9월 30일 국교가 정상화되면서 30억달러의 차관제공(1993년 5월 현재 14억7000만달러 제공)을 포함하여 자원·과학기술·수송·통신 분야에 걸친 각종 협력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였다.

1992년 11월 옐친의 한국방문 시 체결된 한·러 기본조약은 한·러관계가 단순한 관계정상화를 넘어 아시아·태평양지역의 동반자관계로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한·러관계 진전에 따른 한반도에서의 긴장완화, 중국과 일본을 포함한 역내국가들과의 관계개선 노력은 러시아가 앞으로 아·태 지역의 일원으로 부상하기에 충분한 계기가 되고 있다. 

동시에 러시아의 국내적 정치정세불안, 아·태지역에서의 강대국간 경쟁의 지속 등은 러시아의 이 지역정책과 관련하여 지속적인 문제로 남을 것이다.

교역관계를 보면 1989년의 경우 러시아는 한국으로부터 섬유·신발류 2억800만 달러를 수입하고, 어류·석탄·원목을 3억9200만 달러 상당 수출하였다. 


한·러교역액은 1991년 12억2600만 달러, 1992년 8억6000만 달러, 1993년 약 15억7000만 달러(수출 6억, 수입 9억7000만), 1994년 11월 현재 19억6000만 달러(수출 8억3000만, 수입 11억3000만)이다.

2015년 현재 우리나라의 대 러시아 수출액은 46억 9000만 달러이며, 수입액은 113억 1000만 달러이다.


구 소련과 북한은 1948년 10 월 12일에 수교한 이래 사회주의형제국으로 관계를 맺어왔으나, 

구 소련해체 이후 러시아가 구 소련이 체결한 모든 조약의 의무를 계승한다지만, 북한의 폐쇄성에서 오는 한계 때문에 쌍방관계는 원활한 편은 아니다.


1990년 러시아는 북한으로 원유·면화·직물류·공업설비 등 15억1700만달러를 수출하고, 북한으로부터 마그네샤크링카·의류·강철·축전지 등 10억4700만달러를 수입하였다. 

2014년 현재 북한의 대 러시아 수출액은 8217만 달러이며, 수입액은 1017만 달러이다.


러시아는 ‘2개의 코리아’ 정책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우선 한국과의 우호증진을 위하여 두 나라 수뇌부 사이에 공식방문이 뒤따랐다.


1994년에는 김영삼() 대통령이 국빈으로 방문하였으며, 1999년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국빈으로 방문하였다. 

1998년에는 외교적 분쟁이 발생하였으나 한국 쪽에서 외교통상부 장관을 경질하는 것으로 사태를 수습하였다.

러시아는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을 버리지 않고 있다. 

1999년에 크라신(Krassin) 외무차관이 북한을 방문하여 두 나라 사이의 방위동맹조약을 연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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