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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역사(국내 .각지역.)

영월군. 寧越郡.Yeongwol-gun,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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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군. 寧越郡.Yeongwol-gun,


단종 유배지


슬픈 역사가?


강원도 영월은 예부터 명산준령과 산간계곡이 조화를 이룬 천혜의 비경을 간직한 산간 오지 마을로 꼽혀왔다. 

깊은 산골에서 한과 슬픔이 묻힌 역사의 현장으로 바뀐 것은 조선의 제6대 왕 단종의 유배지가 되면서부터다.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봉()당한 뒤 청령포에 유배되었다가 관풍헌에서 사약을 받고 장릉에 묻히기까지, 영월 곳곳에는 단종의 흔적이 남아 있다. 

단종의 자취를 따라 가면 슬픈 역사의 현장을 그대로 엿볼 수 있다.



『여지도서』 「풍속」조에 실린 영월은 원래 고구려 땅이었다. 영월의 옛 이름은 내성군()이고, 고려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조선 태종 원년에 충청도에서 떼어내 강원도로 편입하였다.

정추는 영월에 대하여 “칼 같은 산들은 얽히고설키었는데, 소나무와 전나무에 달이 비치고 비단결 같은 냇물은 맑고 찬란한데 풀과 나무에는 연기가 잠겼다”라고 하였고, 이첨은 “성곽이 쓸쓸하고 돌길은 비꼈는데, 민가와 아전의 집이 반반씩 여남은 집 살고 있네. 물방아 찧는 소리, 밤 도와 급한데 날이 장차 새려 하고 벼랑 위의 벌꿀에 가을이 깊어지니 국화가 한창이라네. 풍속은 때때로 옛 늙은이에게 묻고, 관가에 일이 없으니 아침의 아참()을 폐지하였네. 작은 고을을 누워서 다스리고, 그대는 박하다고 하지 마라. 어린이들이 대말 타고 맞이함이 또한 지금 할 만하네”라고 하였다.

『택리지』에는 “두 강 안쪽에 단종의 장릉()이 있다. 

숙종이 병자년에 단종의 왕위를 추복()하고 능호를 봉하였던 것이다. 

이보다 앞서 육신()의 묘를 능 곁에 지었으니 매우 장한 뜻이었다”라고 적었다.

이처럼 영월 땅에는 비운의 임금 단종의 자취가 여러 곳에 남아 있다. 

세종의 큰아들인 문종이 2년 만에 병사하자 단종은 어린 나이인 12세에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3년 후인 1455년에 첫째 작은아버지인 수양대군, 즉 세조에 의해 임금의 자리에서 쫓겨났다.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를 비롯한 이른바 사육신이 단종을 임금의 자리에 다시 앉히려고 꾀하다가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의금부도사 왕방연과 중추부사 어득해가 이끄는 군졸들에게 둘러싸여 영월군 남면 광천리 태화산 아래의 청령포로 유배를 떠났다.


머나먼 유배길로

숙부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은 멀고 먼 영월 땅으로 유배길에 오른다. 

창덕궁 대조전에서 유배교서를 받고 1456년 음력 6월 22일 돈화문을 출발해 한강나루에서 남한강 뱃길을 따라 양주, 광주, 양평, 여주, 원주를 거쳐 닷새 만에 영월 땅 주천에 당도했다. 

주천에 있는 마을의 우물에서 물 한 모금 마시며 갈증을 푼 뒤 공순원 주막에서 유배길 행차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그때 단종이 목을 축인 우물이 지금도 ‘어음정’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

공순원 주막에서 아침 일찍 출발한 단종의 유배 행렬은 험준한 군등치를 넘고 다시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배일치에 힘겹게 올랐다. 

배일치 고갯마루에 이른 단종은 자신을 위해 죽어간 사육신을 떠올리며 궁궐이 있는 서쪽을 향해 고마운 마음으로 큰절을 했다. 

지금 배일치 고갯마루에는 절을 하는 단종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배일치를 넘고 물길을 돌아 도착한 곳이 청령포다. 

서울에서 이곳까지 오는 데 이레가 걸렸다. 

청령포는 3면이 서강으로 둘러싸여 반도를 이루고, 나머지 한 면은 육육봉의 층암절벽으로 막혀 있어 육지이면서도 외딴 섬이나 다름없다. 

나룻배가 아니고서는 드나들 방법이 없는 천혜의 유배지인 이곳에서 단종은 두 달간 유배생활을 했다.


소나무들 은 임금 을 지켜보다.

단종어소 앞에 ‘단묘재본부시유지’라는 글자가 새겨진 단묘유지비가 있다. 

단종이 기거했던 옛 집터가 있었음을 표시하는 비다. 

본래 있던 건물이 소실되자 영조 39년(1763) 원주관아에서 어소가 있던 위치를 알리기 위해 비를 세웠다. 

단종어소에는 특이한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담장 밖에서 단종어소를 향해 절을 하듯 굽은 모양새가 눈길을 끈다.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지금의 장릉에 묻은 엄흥도(, ?~?)의 충절을 기려 ‘엄흥도소나무’라고 불린다.

단종어소를 나오면 수령 600년으로 추정되는 관음송이 웅장하게 서 있다. 

키가 30m에 달하는 이 나무는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소나무 중 가장 키가 크다. 

아랫부분에서 두 줄기가 하늘로 높이 뻗어 오른 모습이 품위 있고 자태가 아름답다. 관음송은 단종의 유배생활을 지켜본 증인이다.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오열하는 소리를 들었다 하여 볼 관(), 소리 음() 자를 써서 관음송이라 이름 붙였다.

뒷산 계단을 따라 오르면 단종이 정순왕후를 그리며 막돌을 주워 쌓아 올렸다는 망향탑이 층암절벽 위에 애처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단종이 유배생활의 한을 달래기 위해 자주 오르던 노산대도 볼 수 있다. 

계단을 내려오면 “동서로 300척, 남북으로 490척은 왕이 계시던 곳이니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쓰인 청령포금표비가 있다.


숙부에게 왕의자리 찬탈당한 어린왕의 외로운 감옥...

선착장에서 배를 타면 청령포까지 3분 남짓 걸린다. 

맑은 강물과 빽빽하게 늘어선 소나무가 유배지가 아닌 유원지 같은 느낌을 준다. 

어디까지나 청령포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다. 

이곳에 갇혀 꼼짝할 수 없었던 단종에게는 그야말로 창살 없는 감옥과도 같았을 터. 배에서 내려 소나무 숲에 발을 디디면 단종을 따라 온 궁녀와 관노가 생활하던 행랑채가 보인다. 

그 옆에 단종어소가 있다.

단종이 유배되어 왔을 때에는 따르는 궁녀가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단종이 청령포에 도착한 지 5일이 지나자 단종을 섬기던 궁녀들 중에서 4명은 단종비 정순왕후를 따르고 6명은 영월까지 먼 길을 따라왔다. 

당시 영의정 정인지(, 1396~1478)가 궁녀들이 따라가 노산군을 시종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세조에게 누차 고했으나 세조는 이를 듣지 않았다 한다.

단종어소는 육간대청처럼 큰 기와집이다. 

유배생활을 하던 단종이 이처럼 좋은 집에서 기거했다는 것이 어쩐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홍수로 떠내려 간 건물을 1996년에 새로 지으면서 제대로 된 고증 없이 올린 느낌이다. 

단종어소 방 안에는 단종의 유배생활을 짐작하게 해주는 인형과 물품이 전시되어 있다.


"달 밝은 밤 두견새 울 제 시름 못 잊어 누각 머리에 기대었노라

네 울음 슬프니 내 듣기 괴롭도다 네 소리 없었던들 내 시름없었을 것을

세상에 근심 많은 분들에게 이르나 부디 춘삼월 자규루에는 오르지 마오"


관풍헌

1457년 여름 청령포에 큰 홍수가 나자 단종의 유배지는 관풍헌으로 옮겨졌다. 

관풍헌은 조선 초기에 영월 동헌 터에 지은 객사다. 

넓은 마당을 두고 큰 건물 세 채가 동서로 나란히 붙어 있다. 

해방 전에는 영월군청이, 그 뒤에는 영월중학교가 들어서기도 했으나 지금은 보덕사의 포교당으로 쓰이고 있다.

관풍헌은 영월읍 중심부에 자리했다. 

담장 앞으로 도로가 나고 상가 건물이 바짝 들어서서 자칫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기 십상이다. 

그래서인지 이곳찾는 사람들의 발길도 뜸하다. 한적하다 못해 쓸쓸함이 가득한 것이 단종의 불행한 삶을 떠올리게 한다. 

1457년 10월 24일, 단종은 이곳에서 세조의 명으로 금부도사 왕방연이 가지고 온 사약을 받고 짧은 생을 마감했다.

관풍헌 마당 앞 좌측에는 2층 누각인 자규루가 있다. 

세종 때 영월군수였던 신권근이 세운 누각으로 본래 이름은 매죽루였다. 

단종이 관풍헌으로 옮겨오면서 누각에 올라 자신의 한을 담은 ‘자규사’ 라는 시를 짓고 나서 자규루로 불리게 되었다.

관풍헌에서 사약을 받고 죽은 단종의 시신은 수습되지 않고 동강에 버려졌다. 아무도 시신을 거두는 이가 없었다. 

세조가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엄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단종은 죽은 후에도 편안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영월 지방의 호장이었던 엄흥도가 목숨을 걸고 동강에 나가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거두었다.

엄흥도는 지게에 단종의 시신을 싣고 동을지산 능선을 오르다 노루가 잠자던 자리에 눈이 쌓여 있지 않은 것을 보고 그곳에 시신을 암매장했다. 

단종의 시신은 동강에 버려졌지만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주검을 거두지 못하였다. 

영월의 호장인 엄흥도가 어둠을 틈타 강에 뜬 단종의 송장을 몰래 건져서 동을지산에 묻었다. 

그것을 지켜본 일가붙이들이 화를 입을까 두려워 앞을 다투어 말렸는데도 듣지 않고 “선()을 행하다가 화를 입는 것은 내가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라고 말하였다. 

엄흥도의 충절을 높이 여긴 우의정 송시열이 현종에게 건의하여 엄흥도의 자손에게 벼슬을 주었고, 영조 때는 죽은 엄흥도에게 공조참판이라는 벼슬을 내리기도 하였다.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 버려졌던 단종의 무덤은 중종 11년에 되찾게 되었고, 숙종 때인 1698년에야 임금 대접을 받아 단종으로 불리게 되면서 그의 무덤도 ‘장릉’이라는 이름을 받아 임금의 무덤으로 대접을 받게 되었다. 

나라에서는 해마다 한식이면 이곳 장릉에서 한식제를 지내게 되었다. 

한식제는 1967년부터 단종제로 이름이 바뀌어서 이 지방의 향토문화제가 되었으며, 매년 4월 15일 무렵 단종제가 열릴 때는 영월군 사람뿐 아니라 전국의 여러 곳에서 사람들이 몰려온다.

속담에 ‘중매쟁이는 한 말이면 그만이고, 풍수는 두 말이면 그만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중매쟁이는 ‘혼처가 좋다’는 한마디면 그만이고, 풍수는 ‘명당자리다, 아니다’ 두 마디면 그만이라는 뜻이다. 

장릉은 한마디로 진짜 풍수지리상 길지 중의 길지라고 널리 알려졌다. 그런 연유로 풍수지리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사적 제196호로 지정된 장릉은 영월읍 영흥리 동을지산 기슭의 소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다. 

이곳의 소나무는 서쪽인 소나기재 쪽을 향해서 구부러진 것이 많아 서울을 그리던 단종의 넋이 소나무에 배어들어 그렇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장릉 옆에 있는 창절사()는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죽은 사육신의 높은 충절을 기리기 위해서 세운 사당이다. 

이곳에서는 사육신 여섯 사람의 신주와 함께 생육신인 김시습, 남효온과 충신 박심문, 엄흥도의 신주를 모셔두고 해마다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단종이 머물렀던 옛 집터는 기와집으로 새 단장을 하였고 단종의 귀양 생활을 지켜보았을 관음송(천연기념물 제349호)은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으며, 강 쪽으로는 이끼가 낀 비석이 서 있다. 

‘청령포금표()’라는 한자가 쓰인 이 비는 단종이 죽은 지 270년 뒤인 영조 2년(1726)에 세워진 것이다. 

‘동서로 300척, 남북으로 490척은 왕이 계시던 곳이므로 뭇사람은 들어오지 마라’라는 출입 금지 푯말인데, 단종이 이곳에 유배되었을 때도 이처럼 행동에 제약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영월군 남면 광천리의 배텃거리에서 남면 연당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각한()재 또는 각한치라고 부르는데, 쇠뿔에서 땀이 날 정도로 험하고 경사가 지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영월군 북면 덕상리에 있는 배거리산은 천지개벽 때 이 산 꼭대기에 배가 걸렸다는 곳이다. 

옥녀탄금형의 명당이 있다는 곳이다. 

배거리산에 있는 배거리굴은 1000여 명이 들어갈 수 있으며, 굴 안에 종유석과 조개껍데기가 붙어 있다.

옛날 한두만이라는 관포()가 나라에 바치는 짐승을 많이 잡았다고 하고 첨재라고도 부르는 영월군 무릉도원면 두산리의 두만동에 있는 초치()는 원주시 신림면 송계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세 고개가 있는데 그중 첫 번째 고개라고 한다. 

바로 근처에 있는 한치재는 두덕골에서 도원리 말구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매우 준험하여 이 고개를 넘으려면 땀을 흘린다고 하여 한치재라고 한다.

영월에서 서강이라 불리는 평창강이 남한강에 합류한다. 

길이가 149킬로미터에 이르는 평창강은 평창군 계방산에서 발원하여 속사천이 되고, 평창군 대화면과 봉평면 경계에 이르러 서북쪽에서 오는 홍정천을 합하여 남쪽으로 흘러, 대화면 하동미리에서 대화천을 합하여 평창강을 이룬다. 

평창읍을 지난 강물은 영월군 서면 신천리에 이르러 서북쪽에서 오는 주천강과 합쳐져 영월읍 남쪽에서 남한강에 합류한다.

이 지역 사람들이 동강, 서강이라 부르지 않고 암강, 수강이라 부르는 서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간 서면의 신암마을에는 서강이 휘돌아가면서 빚어낸 절경인 한반도를 닮은 지형이 있다.

세월이 흐른 뒤 영월에 부임하는 군수들이 줄줄이 죽는 괴이한 일이 발생했다. 

누구도 영월군수로 오려고 하지 않았는데, 박충원이라는 사람이 용기를 내 부임했다. 

어느 날 박충원의 꿈에 단종의 혼령이 나타나 산 속에 묻힌 사실을 알려주었고, 그곳을 수색한 결과 단종의 시신이 발견되어 봉분을 정성스레 조성했다. 

그 후로 영월군수가 변을 당하는 일이 없어졌고 영월 땅도 평안했다고 한다.

중종 이후 조정에서 단종의 제사와 무덤 조영에 대한 의견이 나오면서 선조 때 김성일, 정철 등의 장계로 영역을 수축하고 상석, 표석, 장명등, 망주석을 세웠다. 

숙종 24년(1698)에는 단종을 복위시켜 그의 무덤을 장릉이라 했다. 

죽어서도 한을 풀지 못했던 단종이 숙종에 의해 241년 만에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높은 언덕 위에 자리한 장릉은 울창한 소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다. 무덤으로 오르는 길에도 예외 없이 소나무들이 사열하듯 늘어서 있다. 

신기한 것은 소나무가 예를 갖춰 능을 향해 절을 하듯 굽어 있는 모양이 많다는 사실. 우연이겠지만 비통한 죽음을 맞은 단종의 넋을 기리는 듯하다.

영월군 주천면에는 술이 나오는 돌, 주천석()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그 내용이 『동국여지승람』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주천현의 남쪽 길가에 돌이 있으니 형상이 반 깨어진 돌 술통 같다. 

세상에 전해오는 말에 “이 돌 술통은 예전에는 서천가에 있었는데 거기에 가서 마시는 자에게는 넉넉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읍의 아전이 술을 마시려고 거기까지 왕래하는 것이 싫어 현 내로 옮기고자 하였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옮기니 갑자기 크게 우레가 치고 돌에 벼락이 내려서 부서져 세 개로 나뉘어 한 개는 못에 잠기고, 한 개는 있는 데를 알 수 없고, 한 개는 곧 이 돌이라.”


성임은 주천석의 샘물을 놓고 이렇게 노래하였다.

"술이 있어 샘물처럼 흘렀다네
똑똑 물방울처럼 떨어져 바윗돌 사이로 흘러드는가 하였더니
어느새 철철 넘쳐서 한 통이 다 찼다네
술 빚은 것이 누룩의 힘을 의지한 것도 아니고
그 맛은 자연 그대로라네
한 번 마시면 그 기분이 맑은 하늘 위에 노니는 것 같고
두 번 마시면 꿈속에서 봉래산 빈터에 이르게 되니라
줄줄 흘러 써도 써도 마르지 않으니
다만 마시고 취하는 대로 만족할 뿐 어찌 값을 말하랴
당시에 고을 이름 붙인 것도 다 뜻이 있었으리
마침내 산속의 귀신들이 우레와 폭풍우로
한밤중에 술 샘을 옮겨버렸네
옥검()을 위하여 깊은 동학()에 폐쇄한 것이 아니면
반드시 금단지에 저축하여 깊고 깊은 연못에 감추었으리라
감감하고 비어서 남은 자취 다시 볼 수 없게 되었고
오직 끊어진 돌 조각만 길가에 가로놓였네
내 하늘을 되돌려 옛날 샘의 맥을 돌려놓고자 하거니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군침 흘리지 말게 하라
내가 원하는 것은 천도복숭아를 안주 삼아 밝은 신 임금께 바치고
한 잔을 올리면 천년의 수()를 하려니
일만 잔 올린다면 다시 만만세를 기약하리니
길이 법궁()에 납시어 신선과 만나소서"


영월 청령포.Cheongnyeongpo, .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기념물 제5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12월 26일 명승 제50호로 변경되었다. 

영월군 남면 광천리 남한강 남한강 상류에 있다. 

강의 지류인 서강(西)이 휘돌아 흘러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쪽으로는 육륙봉()의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어서 마치 한반도처럼 생긴 지형이다. 

1457년(세조 3) 6월 조선 제6대 임금인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해 여름, 홍수로 서강이 범람하여 청령포가 물에 잠겼다. 

단종은 강 건너 영월부의 객사인 관풍헌()으로 처소를 옮기기 전까지 두어 달간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지세가 험준하고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단종이 이곳을 '육지고도()'라고 표현했다고 전한다. 

청령포에는 단종이 그곳에 살았음을 말해 주는 단묘유지비()와 어가, 단종이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고 전하는 노산대, 한양에 남겨진 정순왕후를 생각하며 쌓은 돌탑, 외인의 접근을 금하기 위해 영조가 세웠다는 금표비()가 있고 관음송(천연기념물 349)과 울창한 소나무숲 등이 남아 있다. 

단종은 그해 10월 관풍헌에서 17살의 어린나이에 숨졌다.

슬픈 역사가 남아 있는 유서 깊은 유적지가, 휘돌아 흐르는 서강과 어우러져 자연 경관이 뛰어난 명승지이다. 

보호면적은 204,241㎡로, 영월군이 관리한다.

강원도 영월군 남면 광천리의 남한강 상류에 있는 지명. 강원도 기념물 제5호. 남쪽은 층암절벽으로 막혀 있고 동, 북, 서쪽은 서강이 곡류하고 있어 배로 강을 건너지 않으면 밖으로 나갈 수 없는 특수 지형이다. 

이곳은 1457년(세조 3) 세조에 의하여 노산군으로 강봉된 단종이 유배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강원도 영월군 남면 광천리의 남한강 상류에 있는 명승지.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기념물 제5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12월 26일 명승 제50호로 변경되었다.

남쪽은 층암절벽으로 막혀 있고 동ㆍ북ㆍ서쪽은 남한강 상류의 지류인 서강(西)이 곡류하고 있어 배로 강을 건너지 않으면 밖으로 나갈 수 없는 특수지형이며, 현재도 도선을 이용해야만 방문이 가능하다. 

이곳은 1457년(세조 3) 세조()에 의하여 노산군()으로 강봉된 단종이 유배되었던 곳으로, 그 해 여름 홍수로 서강이 범람하여 처소를 영월 객사인 관풍헌()으로 옮기기까지 머물렀던 곳이다.

단종을 유배지로 인도하는 직책을 맡았지만 세조의 처사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사람이 왕방연이었다. 

그는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청령포를 감싸고 흐르는 서강의 물을 보고 그의 괴로운 심정을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임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더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라고 노래하였다.

단종의 자취가 서린 곳은 충청도와 강원도 일대에 많이 남아 있는데 서면 광전리에 있는 고개는 단종이 유배를 올 때 넘었다고 해서 ‘임금이 오른 고개’라는 뜻으로 군등치()라 불렸고, 서면 신천리에 있는 고개는 오랫동안 흐리던 날씨가 단종이 넘으려고 하자 개어 단종이 하늘을 향해 절을 올린 곳이라 해서 배일치()라고 불린다. 

단종의 유배를 슬프게 여긴 사람들이 통곡을 했다는 우래실(울래실) 마을이 서면 신천리에 있다.

단종이 귀양을 와서 머물렀던 청령포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우거지고 삼면이 깊은 강물로 둘러싸였으며 한쪽은 벼랑이 솟아 배로 건너지 않으면 빠져나갈 수 없는 절해고도와 같은 곳이다. 

단종이 유배되었던 그해 여름에 청령포가 홍수로 범람하자 단종은 영월읍 영흥리에 있는 관풍헌()으로 옮겨갔다. 

단종은 이곳에서 지내면서 동쪽에 있는 누각인 자규루()에 자주 올라 구슬픈 자신의 심정을 시로 읊었다. 

자규루는 현재 시가지 한가운데에 있지만 그 무렵에는 무성한 숲으로 둘러싸여서 두견새가 찾아와 울 정도였다고 한다. 

단종이 이곳에서 지은 시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자규시()」는 구중궁궐을 떠나 영월 땅에서 귀양살이하는 자신의 피맺힌 한을 표현한 것이다.

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을 떠난 뒤로 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가 푸른 산속을 헤맨다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을 못 이루고
해가 가고 밤이 와도 잠을 못 이루고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구나
두견 소리 끊어진 새벽 멧부리에 지새우는 달빛만 희고
피를 뿌린 듯한 봄 골짜기에 지는 꽃만 붉구나
하늘은 귀머거린가, 애달픈 하소연 어이 듣지 못하는가
어찌하여 수심 많은 이 사람의 귀만 홀로 밝은고

봉래산 자락 영흥리의 벼랑에는 단종에 얽힌 사연이 이렇게 전해온다. 

단종이 영월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그의 다섯째 작은아버지인 금성대군이 풍기에서 그를 다시 임금의 자리에 앉히려는 계획을 꾸몄다. 

이 사실이 발각되어 단종은 1457년 음력 10월 27일 저녁 17세의 나이에 결국 죽임을 당하였다. 

세조가 보낸 금부도사 왕방연이 가져온 약사발을 마시려고 하는데 화득이라는 사람이 뒤에서 달려들어 목을 졸라 죽였다. 

그다음 날 단종을 모시던 몸종 열한 명이 봉래산 아래쪽 벼랑에서 동강으로 몸을 던져 죽었다. 

사람들은 백제 멸망의 한을 품고 죽었다는 백제 궁녀의 전설이 어린 낙화암의 이름을 따서 그 벼랑을 낙화암이라고 부른다. 

현재 그 위에는 금강정(錦江亭)과 그때 함께 죽은 사람들의 넋을 기리는 사당 민충사(愍忠祠)가 있다.



명칭 유래

청령포라는 지명은 1763년(영조 39년)에 세워진 단종유지비에 영조가 직접 ‘단묘재본부시유지()’라고 써서 내렸고, 이것을 화강석 비좌 위에 올려진 오석()으로 된 비신에 새겼다. 

비()의 뒷면에 1763년 9월에 원주감영으로 하여금 쓰게 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고, 지명 청령포라고 썼다. 

이로 보아 청령포라는 지명은 유래가 깊은 것으로 보인다.


자연환경

이 지역은 감입곡류하던 서강이 청령포 부근에서 하천의 측방침식에 의하여 하천의 유로가 변경되어 형성된 지역이다. 

이 지역은 과거 서강이 우회하던 방절리 주변의 저지대에 현재는 논농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구하도와 미앤더 핵이라 불리는 지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학술적으로 중요하다. 

인근에 석회암 지대에 발달하는 카르스트지형과 구하도 상에 위치한 방절리의 하안단구() 등이 발달되어 있다.


형성 및 변천

이곳은 1457년(세조 3년)세조에 의하여 노산군()으로 강봉된 단종이 유배되었던 곳으로, 그 해 여름 홍수로 서강이 범람하여 처소를 영월 객사인 관풍헌()으로 옮기기까지 머물렀던 곳이다.


현황

유배 당시 세운 것으로 알려진 금표비()와 그 뒤 영조 때 세운 단묘유적비(), 2000년 4월 단종문화제 때 세운 단종어가가 있으며, 단종이 서낭당을 만들 듯이 쌓은 것이라 하는 돌탑 등이 있다.

청령포 수림지로 불리는 소나무숲이 울창하고 서강의 물이 맑아 예로부터 영월팔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명소로서 피서객과 낚시꾼이 많이 찾아온다.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기념물 제5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12월 26일 명승 제50호로 변경되었다.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서쪽은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는 마치 섬과도 같은 곳으로 남한강 상류인 서강이 곡류하여 반도 모양의 지형을 이루고 있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경관이 오히려 단종의 슬픈 비극과 대조를 이룬다. 

청령포 내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349호인 관음송은단종이 걸터앉아 노닐던 곳으로 이곳에서의 생활상들을 보고 들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수령이 600년이 넘는 우리나라 최고령의 소나무이다.


<가는 길>

중앙고속도로 제천IC → 38번 국도 영월 방면 → 느릅재터널 → 연당교 → 선돌교 → 서영월교차로 → 청령포교차로 → 청령포.


관광코스안내

청령포(단종어소-관음송-망향탑-금표비)- 장릉 - 보덕사 - 금몽암 - 관풍헌, 자규루 - 금강정


관광코스안내

KBS 대하사극 '용의눈물' 장릉 촬영지


입 장 료

[일반] 

어 른 : 개인 3,000원 / 단체 2,500원

청소년·군인 : 개인 2,500원 / 단체 2,000원 

어린이 : 개인 2,000원 / 단체 1,500원 

경로 : 개인 1,000원 / 단체 800원 


[영월군민]

어른 : 개인 1,500원 / 단체 1,300원

청소년·군인 : 개인 1,300원 / 단체 1,000원 

어린이 : 개인 1,000원 / 단체 800원 

경로 : 개인 500원 / 단체 400원 


이용가능시설

홍보관, 도선


화장실

있음(주차장 옆)


주차요금

무료


한국어 안내서비스

문화관광해설사 안내 가능

033-374-1317


내국인 예약안내

전화 예약 가능

※ 예약기간 - 방문일 일주일전까지 예약 접수 가능


외국인 예약안내

전화 예약 가능

※ 위 정보는 2012년 12월에 작성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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