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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역사(국내 .각지역.)

경주 첨성대, [ 慶州 瞻星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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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첨성대, [   ]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시기의 천문관측소. 천문관측시설. 국보.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839-1
• 시대: 신라()
• 용도: 기타건축-기타
• 지정문화재: 국보

 

첨성대<>는 신라<> 선덕여왕<>(632-647) 때에 조영<>된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 관측대< >로 알려져 있다.

 

국보 제31호. 높이 약 9.5m. 첨성대가 위치한 곳은 옛날에는 경주부() 남쪽 월남리()라고 하였고, 계림()의 북방 약 150∼200m, 내물왕릉 동북방 약 300m 되는 곳이다. 이 근방을 속칭 비두골이라고도 한다.   
 

이칭/ 별칭/ 유형/ 시대/ 성격/ 건립시기·연도/ 소재지/ 소유자/ 관리자/ 문화재 지정번호/ 문화재 지정일/

점성대()

유적

고대/삼국/신라

천문관측소, 천문관측시설

632~647년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839-1

국유

경주시

국보 제31호

1962년 12월 20일

첨성대는 『삼국유사』기이() 권2의 별기()에 “이 왕대()에 돌을 다듬어서 첨성대를 쌓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신라 선덕여왕 때(재위 632∼647)에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같은 책 왕력() 제1에 신라 제17대 내물마립간() 이야기 끝에 “능은 점성대() 서남에 있다.”라는 기사가 있는데 현재의 내물왕릉과 첨성대의 위치 관계와 잘 부합된다. 이 기록에서 첨성대가 별명으로 점성대라고 불렸던 것을 알 수 있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1호로 지정되었다.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소재하며 높이 9.17m, 밑지름 4.93m, 윗지름 2.85m이다. 밑에서부터 4.16m 되는 곳의 남쪽 허리에 한 변이 1m인 정사각형 문이 달려 있다. 모양은 원통형으로 남쪽 문에 사다리를 걸었던 자리가 있다. 30cm 높이의 돌 361개 반을 사용하여 상층부와 기단을 제외한 27단을 쌓아 올렸다.(전체 돌의 개수는 401개)

내부는 제12단까지 흙이 차 있고, 제19단에서 제20단까지와 제25단에서 제26단까지의 두 곳에 정()자형 장대석()이 걸쳐 있는데 그 양끝이 밖으로 나가 있다. 제27단 내부의 반원()에는 판석()이 있고, 맞은편에는 판목()을 놓았던 곳으로 보이는 자리가 있다. 판석은 길이 156cm, 너비 60cm, 두께 24cm이다.  꼭대기에는 정자석()이 2단으로 짜여 있는데, 그 위에 관측기구를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혼천의()와 같은 관측기구를 정상에 설치하고 춘분·추분·동지·하지 등의 24절기를 별을 통하여 측정하였고, 정자석을 동서남북의 방위를 가리키는 기준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첨성대가 제단이었다는 학설도 있다. 《삼국유사()》에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첨성대의 기능에 대해서는 조선 말기 이후 일제강점기까지도 천문대(), 즉 천문관측을 하는 곳으로 이해되었다. 그런데 광복 이후에 갑자기 이에 대한 이설이 제기되며, 제단()·기념물·불교관계 건축물 등의 여러 가지 설과 이견이 속출되었다. 이런 설에 대하여 종전의 전통적인 입장에서 천문대로 해석하는 연구도 물론 진행되었다.

 

이설들이 나온 이유의 하나는 현존하는 첨성대가 평지()에 있다는 것, 첨성대 자체의 구조상 그 위로 오르내리는 통로가 매우 불편하다는 점 등이다. 그러나 당시의 역사적 환경은 나라마다 다른 첨성대 또는 점성대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고대천문학은 크게 천문()과 역법()으로 양분된다. 중국의 사서()에도 『역지()』 또는 『율력지()』와 『천문지()』가 뚜렷하게 구별되어 기재되어 있다. 천문관측은 크게 두 분야로 나눌 수 있겠는데, 첫째는 역법을 만들기 위한 태양·달·행성의 운행을 관측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점성()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바와 같이 항성()의 배치로 정해진 별자리[]를 지방 또는 국가로 분배하였다.     

 

그 분야에서 일어나는 제반 천문현상을 관찰하여 국가의 길흉을 점치는 일이다. 이러한 점성은 조선시대 말까지도 계속되었는데, 고대로 올라갈수록 그 비중이 컸던 것이다. 그러므로 또는 고대인의 자연철학적인 천문관측이 국가나 왕조에는 매우 중요하였으며, 되도록이면 왕궁에 가까워야 하였음은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점성적인 것이 제사()나 점복()과 가까울 수도 있음직한 것이다.

 

구조는 아래의 기단부(), 그 위의 술병형의 원통부(), 다시 그 위의 정자석() 정상부() 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땅속에는 잡석()과 목침() 크기의 받침돌, 그리고 기단부 서쪽으로는 일렬로 자연석이 놓여 있다. 이 기초를 다진 돌 위에 2단으로 된 기단석이 놓여 있다.

 

기단부는 정방형으로 한 변의 길이가 하단은 5.36m, 상단은 5.18m이며, 두 단이 다 높이가 39.5㎝로서 두 단을 합쳐서 79㎝의 높이가 된다. 이 기단부는 남쪽 변이 정남()에서 동쪽으로 19° 돌아서 있다. 기단 위의 원통부는 높이 약 30㎝인 부채꼴의 돌로 27단을 쌓아올렸는데, 27단의 높이는 8.08m이며, 최하단의 원둘레는 16m, 제14단의 둘레는 11.7m, 최상부인 제27단의 둘레는 9.2m이다.

 

제13∼15단에 걸쳐서 정남에서 동쪽으로 약 16°가 되는 방향을 향하여 한 변이 약 95㎝인 정방형의 창구()가 나 있다. 이 창구의 아랫변의 돌은 대형의 평판석()으로 되어 있어서 내부의 면적을 크게 차지하고 있다. 창구의 내부 아래쪽은 잡석으로 채워져 있으며, 그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는 형태이다. 그 내벽은 선형석()의 꼭지 부분이 삐죽삐죽 나와 있다. 

 

원통부의 제19단과 제20단에는 각각 남북·동서로 2개씩의 장대석이 걸쳐 있어 네 개가 ‘’자를 이루는데, 그 장대석의 끝은 원통부의 바깥까지 뚫고 나와 있다. 같은 구조가 제25단과 제26단에도 있는데, 여기서는 아래의 것이 동서, 위의 것이 남북으로 걸쳐서 ‘’자를 이룬다.

맨 위인 제27단에는 동쪽 절반이 평판석으로 막혀 있다. 이 평판석은 그 아래의 장대석에 놓여 있는데, 윗면이 둘레의 제27단보다 약 6㎝가 낮게 되어 있다. 그리고 평판석이 없이 환하게 뚫린 서쪽 절반의 공간으로 나온 제27단의 선형석의 끝에는 3개에 걸쳐서 일직선으로 인턱이 패어 있다. 두께 6㎝ 정도의 나무판[]을 동반부의 평판석과 이 인턱에 걸치면 중앙에서 위로 뚫린 공간이 막히고 상부에는 ‘’자석 안에 네모난 방이 형성된다.               

 

제27단의 원통부 위에는 각 네 개씩으로 짜인 ‘’자석이 두 단에 걸쳐서 놓여 있어서, 사각형의 정상부를 이룬다. 이 ‘’자석의 길이는 306㎝, 높이와 너비는 각각 32㎝, 두 단의 높이를 합치면 64㎝, ‘’자석이 이루는 내부 정방형의 한 변은 220㎝로서 재래의 한옥방 한 칸의 넓이가 된다.

경주 첨성대 야경 2007년 촬영된 경주 첨성대 야경의 모습이다.

이 ‘’자석은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에 자리를 바로잡아서 떨어지지 않게 수리를 하였다고 한다. 수리한 사람의 말에 의하면, 그때 방향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고 하나, 현재로서는 남쪽면이 정남에 대하여 서쪽으로 약 8°가 돌아간 방향을 향하고 있다.

 

첨성대의 석재는 화강석()인데 표면에 노출된 부분은 모두 다듬어져 있다. 석재의 개수는 종래 365개라고 하였으나 기단석까지 포함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정확히 365개는 아니다.

 

이와 같은 구조로 총 높이가 9.51m가 되는데, 홍사준()은 사다리 세 개를 마련하여 한 개는 지상에서 중앙 창구까지, 한 개는 중앙 창구 안에서 내부의 제19·20단의 ‘’자석까지, 나머지 한 개는 제19·20단에서 제25·26단의 ‘’자석까지 걸쳐서 정상의 ‘’자석 안으로 올라갈 수 있으며, 오르내리는 데 큰 불편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정상부에 서거나 앉거나 또는 누워서 하늘을 관찰하는 데 매우 편리하였다고 한다.

 

몸체 위에 2단으로 있는 형의 기구틀은 한쪽 모서리가 동쪽 해 뜨는 방향과 일치하며 다른 모서리는 신라 시조 5릉의 방향과 맞아떨어진다. 그러므로 첨성대는 천문기상관측 구조물일 뿐아니라 하늘에 제를 지내는 원구의 기능도 수행하 던 구조물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화강석<>을 가공<>하여 기단<>위에 27단의 석단<>을 원통형<>의 곡선<>으로 쌓아 올리고 그 위에 장대석<>을 정자형<>으로 얹어 천문을 살피도록 한 어떠한 시설을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남<>쪽의 석단에는 밑으로부터 제 13단과 제 15단 사이에 방형<>의 출입구<>가 있어 내부< >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고 이 출입구 아랫 부분 양쪽에는 사다리를 걸쳤던 흔적이 있다.

경주 첨성대 상단 경주에 위치한 첨성대 상단이다. 2005년 촬영.

첨성대의 규모는 밑면의 지름이 5.17m 높이가 9.4m 이며 신라시대<>의 석조물<>로서 귀중한 평가를 받고 있다. 몸채만은 27단인데 맨 위의 정자석과 합치면 28 기본 별자리 28수를 상징한다. 여기에 기단석을 합치면 29 한달 길이를 상징한다. 몸체 남쪽 중앙에 네모난 창이 있고 그 위로 12단 아래로 12단이니 이는 1년 12 달과 24절기를 상징하며 총 사용된 돌의 숫자는 어디까지 세느냐에 차이가 있지만 362개 즉 1년의 날수가 된다. 기단석은 동서남북 4방위에 맞추고 맨 위 정자석은 그 중앙을 갈라 8방위에 맞추었으며 창문은 정남이다.   

정남으로 향한 창은 춘분과 추분 태양 이 남중할 때 광선이 첨성대 밑바닥까지 완전히 비치게 되어 있고 하지와 동지에는 아랫부분에서 완전히 광선이 사라지므로 춘하 추동의 분점과 지점 측정의 역할을 한다. 석축부분의 1단에서 24단까지는 회전곡면의 모선이데 제 1단 밑면은 모선의 시작점으로 동지 12단의 윗끝은 모선의 중간점으로 춘추분 24단의 윗끝은 모선의 종점으로 하지에 해당한다는 해석도 있다.

첨성대(국보 31호)1300여 년의 비밀, 동양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 ※ 본 저작물은 문화재청에서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저작물로, 해당 저작물은 문화재청 누리집(홈페이지)(http://www.heritage.go.kr)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선덕여왕은 첨성대를  왜 지었나?

선덕여왕이 첨성대 건립을 언급하며 백성에게 하늘을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첨성대가 정말 별을 관측하는 곳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누가, 언제, 어떻게 기록을 했던 것인지 자세한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최근 서울여대 사학과 정연식 교수는 첨성대가 천문관측대가 아니라 선덕여왕의 상징물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과연 첨성대는 별을 보기 위해 지어진 건축물일까? 우선 첨성대의 모양과 구조는 천문대임을 유추할 수 있게 한다. 

 

상원하방()의 우아한 형상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설을 상징하고, 첨성대를 만든 365개 안팎의 돌은 1년의 일수를 나타낸다. 27단의 몸통은 선덕여왕이 27대 왕인 것과 관계가 있고, 꼭대기 우물 정()자 모양의 돌을 합치면 29단과 30단이 되는데 이는 음력 한 달의 날수와 일치한다. 가운데 창문을 기준으로 상단 12단과 하단 12단으로 나뉘는데 이는 각각 1년 12달, 합치면 24절기에 대응한다.

 

고대 문헌기록도 첨성대가 천문대의 역할을 했다고 전한다. ‘세종실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첨성대 안을 통해 사람이 오르내리면서 천문을 관측했다는 기사가 있고, ‘서운관지’와 ‘문헌비고’에도 첨성대가 천문대의 역할을 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첨성대에서 어떻게 별을 관측?

첨성대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학자들도 대부분 천문관측대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첨성대 위에 목조건물과 혼천의() 같은 관측기를 설치했다거나, 첨성대가 개방형 돔(dome) 형태의 관측소라고 주장한다. 이 외에도 첨성대 자체가 해시계의 바늘 역할인 규표(gnomon)의 역할을 했다는 설도 있다.

 

일제강점기의 일본 천문기상학자 와다()는 첨성대를 동양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꼽았다. 그는 1910년 ‘조선관측소 학술보고’에 ‘경주첨성대 설’을 내놓으며 목조건물과 혼천의 등을 첨성대 위에 설치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첨성대를 살펴보면 남쪽 창문 아래턱에 사다리를 걸어놓았을 것 같은 자리가 있다.

 

학자들은 여기에 사다리를 대고 첨성대 내부로 들어간 뒤에 위로 오르내렸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관측을 위해 매일 교대로 오르내리는 데 불편한 점이 많고, 그 위에 목조건물을 세운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만일 우물 정()자 모양의 꼭대기에 널판을 깔고 위에 혼천의 등을 설치했다면 관측자가 올라갈 계단이나 사다리를 따로 만들어야 하므로 상설 천문대로 사용했다는 의견에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에 첨성대는 개방형 돔 형태의 천문대라는 주장도 나온다. 첨성대는 석탑의 중앙부가 중천을 향해 개방돼 있고, 27단 내부에는 자리를 깔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흔적이 있다. 그러니 관측자는 남쪽 창문으로 올라가서 자리에 누워 중천을 쳐다보고, 별이 자오선을 지나는 남중시각과 각도를 측정해 춘 · 추분점과 동 · 하지점을 예측했다는 의견이다. 우물 정()자 모양의 정상은 관측자의 시야를 고정시키는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박동현 전 덕성여대 교수는 “첨성대는 탑 중앙부가 중천을 향해 네모나게 개방돼 있는 점이 오늘날의 개방식 돔과 다를 점이 없다. 역대의 관상감들은 사각형으로 개방된 돔을 통해 중천을 보고 별이 자오선을 통과하는 시간과 각도를 측정해 1년의 달력과 춘추분, 동 · 하지는 물론 일식과 월식을 예측하고 행성의 운행을 관측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개방식 돔으로 관측을 하기에도 첨성대의 내부는 불편한 구조다. 첨성대 내부는 매끈한 외부와 달리 내부의 석재는 다듬어지지 않은 채 그대로 뒀기 때문에 자리에 누워 천체관측을 하기에 마땅치 않다.

신라인들은 첨성대 남쪽으로 난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후 사다리를 타고 위로 정상으로 올라갔다고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다. 첨성대 내부에는 흙이 가득 차 있다. 

첨성대 내부에는 흙이 가득 차 있다. 신라인들은 첨성대 남쪽으로 난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후 사다리를 타고 위로 정상으로 올라갔다고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에 전상운 전 성신여대 교수는 첨성대가 규표(gnomon)을 중심으로 한 다목적 관측대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규표란 일종의 해시계 바늘로 옛날부터 동지점()을 관측하기 위해 땅에 세우고 그림자의 길이를 재던 수직막대를 이르는 말이다. 즉, 첨성대는 태양광선에 의해 생기는 해그림자를 측정해 태양고도를 알아내고, 춘추분점과 동하지점 특히 동지점과 시각을 결정하는데 쓰인 측경대()였다는 말이다. 

 

첨성대 실측 당시 주위에 석재가 깔려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그 중 일부는 비교적 질서정연한 상태였다. 이 같은 점을 미루어 원래는 그 일대에 표지석이 있어 해그림자를 측정했을 거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전상운 교수는 “첨성대는 규표의 기능을 주로하며 내부에서는 자오선을 통과하는 별을 관측해 4분지점을 맞춰보는 등 다목적의 관측대”라고 설명했다.

 

첨성대를 천문관측기구가 아니라 종교재단이라는 주장하는 학자도 있고, 단순히 상징적인 탑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 모양이 불교경전에 나오는 상상의 우주인 ‘수미산’과 닮았고, 높이가 10m 밖에 안 되며 오르기도 불편해 천문관측대로는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천문관련 기록을 통해 첨성대에서 천문을 관측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고,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역시 첨성대를 통해 하늘을 바라봤을 가능성이 높다. 또 첨성대를 세운 선덕여왕 대를 기준으로 기록을 분석해보면, 천문기록의 양이 무려 4배나 늘었고, 특히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등 오행성에 관한 기록도 늘어난 것을 알 수 있다.   

 

‘막대를 세워 그늘을 재고 해와 달을 관측한다. 대 위에 올라가 구름을 보며 별을 가지고 점을 친다’는 고려시대 시 한 수만 전할 뿐 첨성대에서 어떻게 천문을 관측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하지만 첨성대는 하늘을 알고자 했던 신라인의 지혜가 담긴 천문관측과 선덕여왕이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 있는 건축물인 것만은 분명하다. 

 

참조항목

경주국립공원관측기구선덕여왕천문대월성동

 

역참조항목

개성 첨성대경주 동부 사적지대신라미술국보석조건축혼천의경주시의 교통관광

 

카테고리

출처 & 참고문헌,

[역사란 - 인류가 걸어온 발자취 (생방송 한국사 1, 2017.01..,)

[과거와 현재의 대화 - 역사란 무엇인가 (고교생이 알아야 할 한국사 스페셜,(주)신원문화사 2009. 2..,)

[역사, History, 歷史, Geschichte] (철학사전, 2009.,)

[첨성대 [瞻星臺]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사진으로보는 한국전통건축), 2002., 한국콘텐츠진흥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문화유산채널

[대한민국 구석구석

[공유마당

[경주 첨성대 [慶州瞻星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경주 첨성대 [慶州瞻星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삼국유사(三國遺事)』

『고려사(高麗史)』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동경잡기(東京雜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한국과학기술사』(전상운, 정음사, 1979)

『연재고고논집』(홍사준, 고고미술동인회, 1967)

『조선과학사』(홍이섭, 정음사, 1946)

「첨성대에 관한 제설검토」(남천우, 『역사학보』64, 1974)

「경주 첨성대 실측 및 복원도에 의한 비례분석」(송민구, 『한국과학사학회지』3-1, 한국과학학학회, 1981)

「첨성대존의」(이용범, 『진단학보』38, 진단학회, 1974)

「첨성대소고」(김용운, 『역사학보』64, 역사학회,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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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첨성대 [慶州瞻星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경주 첨성대 [慶州瞻星臺] (두산백과)

[문화재청

[KISTI의 과학향기

[선덕여왕은 왜 첨성대를 지었나??? (KISTI의 과학향기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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