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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유래,방식, 맛집. 국내 ,,,

한국민의 식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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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의 식생활.

식생활 풍습은 고려시대를 그대로 이어받았는데 사치성이 더욱 심해졌다. 

농서가 발간되고, 측우기 발명, 농사의 지도, 진휼 및 의료후생정책이 도입되었다.

후기 :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해 어려운 생활 : 진휼청, 상평창(곡식값 조절하는 물가 대반책의 역할)이 환곡으로 이어졌다.

식생활에 유교가 끼친 영향 : 

차 마시는 습관이 없어지고 화채와 한약재를 달여 만드는 탕자류와 주류의 종류가 많아지고 품질도 향상되었으며, 노인영양학이 발달하였다.

중기 이후 : 

남방으로부터 고추(고추장 개발, 김치에 고춧가루 사용), 감자, 고구마, 호박, 옥수수, 땅콩 등이 전래되면서 식생활에 변화를 가져왔다. 

식품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상차림의 형식을 갖췄다(주식과 부식으로 나누어서 식분이나 형편에 따라 3첩에서 12첩 반상을 차리는 형식 등장, 의례상차림인 혼례상, 회갑상, 제상 등이 생김).

조리서, 술 만드는 법을 적은 서적, 향토음식이 등장하였다.


미국대륙에서 건너온 원두()
호박(미국대륙이 원산지, 남과로 소개)

토마토(페루가 원산지, 중국에서 씨를 얻어와 재배, 초시, 일년감으로 불림)

고구마(남미의 열대지방이 원산지, 감저라 함)

감자(일본에 통신사로 간 조엄이 대마도에서 씨 감자를 얻어와 재배)

고추(왜개자, 왜초, 당초, 남초라고 함)

쇠고기는 선호하나 돼지고기는 선호하지 않았고, 개고기는 전국적으로 즐겨 먹었다.

<동국여지승람>에 명태란 명칭이 등장. 조기는 서해안의 대표적인 물고기로 석수어(관혼상제의 필수음식), 복어 · 준치 · 자라 등도 즐겨 식용됨.

물고기
왕권중심의 조선시대는 500년간의 사치스런 궁중생활과 함께 궁중식의 발전을 보았는데, 종류와 형식이 상당히 다양하였고 왕족과 귀족들도 특히 식생활에 있어서도 특별대우를 받고 있었다. 

식생활의 형식면에서도 양반사회를 중심으로 매우 다양해졌다.



근대화 이후

개화기의 식생활

생활자체의 급격한 변화는 없었으나 각국과의 통상조역이 이루어지고 상호 왕래가 활발해지면서 점차 외국의 식생활 습관이 널리 수입, 19세기 말에는 서양의 식품과 요리법, 식생활 관습이 전해져 우리나라의 식생활은 한식과 양식이 혼합시대를 이루게 되었다.


일본과의 교류 : 

수출된 식품은 쌀, 콩, 보리, 인삼, 수입식품은 향료, 조미료, 담배

청나라 : 

수출은 인삼, 해삼, 수입은 담배, 술

러시아 : 

수출은 귀리, 조, 두류, 담배, 어류, 어란


유길준 《서유견문록》 : 

서양음식의 종류와 중요성, 조리방법, 식료품에 관한 과학적 연구의 필요성, 식사기구와 그릇의 일반적 설명, 식사의 종류, 풍습이 소개되면서 식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궁중수라상을 위해 서양요리 주방이 별도로 마련되었고, 수라상에 1주일에 수차례 프랑스 요리와 커피와 케이크도 많이 즐기는 기호식품이 되었다.


일반서민에게 우유, 커피, 양과자가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1885년 전후로 서양 기독교 선교사가 들어오면서 남녀노소의 구별 없이 동석하고, 1880년대 교육기관에서 단체급식이 시작되었다.


일제 강점기의 식생활

토지조사사업, 산미증산계획으로 쌀소비가 격감하여 심각한 식량난에 봉착, 감자류로 식량을 대신(아침, 점심에는 감자, 풀뿌리, 나무열매, 옥수수, 귀리, 콩, 팥 등의 잡곡을 약간 섞어 먹는 정도, 저녁에는 조와 옥수수로 주로 끓여 먹거나 귀리가루와 메밀가루를 국물에 풀어먹는 정도, 겨울에는 점심을 거르는 것이 보통, 재해시에는 굶어죽음)하였다.

서양음식과 식품제조업이 발달(도정업, 제분업, 양조업, 청량음료제조업, 제빙업, 제염업, 통조림제조업, 면실유공장, 서울우유협동조합, 담배공장), 과자, 술, 청량음료, 식용유, 각종 통조림 등의 서구 식품들이 제조되어 일부 상류층의 식생활에 침투하고 있던 시기다.



통일신라 의 식생활

귀족과 서민이라는 계층의 차이에 따른 식생활이 정착되고 지방간의 식생활이 교류되면서 쌀의 수확량이 크게 증가하였으며, 불교와 함께 차를 마셨고, 강정과 유밀과가 이 때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채소, 과실류 : 

상추, 무, 마 외에 미나리, 오이가 부식으로 첨가, 밤, 잣, 자두, 배, 밀감, 앵두, 참외 등을 식용하였다.

수산물류 : 

8세기 초 잠수업이 성행하여 다시마, 해초 등을 식용하였다.

조미료 : 

소금, 생강, 천초, 귤피 등이 쓰였다.



삼국시대의 식생활

삼국시대 이후부터는 농경이 확립됨에 따라 목축, 수렵 어로로 얻는 식량은 보조 역할을 수행하였다.


쌀농사 중심의 농업경제로 들어가면서 주 · 부식 분리의 식생활이 정착되면서 쌀로 지은 밥이 맛있고 요리법이 간편해졌다.


농경은 고구려는 밭농사 중심, 신라 · 백제는 논농사 · 밭농사가 함께 발전하였다.

고구려는 위치적으로 벼농사에 부적합하여 철제농구의 보급, 농경법의 개선, 화전법 이용 등으로 벼농사 지역을 넓히면서 생산량이 증대되었다.


백제는 삼국 중 벼농사가 가장 발달, 철제농구를 도입한 후 더욱더 발전되면서, 중국 화남지방의 수준 높은 벼농사법을 도입하여 지역에 맞게 개량하고, 관개사업도 실시하였다.


신라는 농사짓기에 적합한 자연조건으로 관개시설, 중국으로부터 우차번을 도입하였고, 상 · 하층의 구별 없이 모든 백성이 쌀밥을 주식으로 하지는 못했다.

토지제도를 살펴보면, 삼국은 나라별로 차이는 있지만 토지국유제가 원칙이었으면서도 현실적으로는 귀족들에게 사유지가 인정되었다. 

공신들에게 주었던 사전(), 식읍(), 녹읍() 등은 귀족이나 공신들의 대토지소유를 가져와 심한 부의 편중을 가져왔다. 

철제농구의 사용과 농사기술의 발달로 강력한 국가체제가 성립되면서 피, 조, 기장, 콩, 메밀, 보리의 생산이 증대되었다.


농산물 : 

고구려의 상추 유명, 오이, 박, 아욱, 순무, 동아, 시금치, 쑥갓, 건대, 토란, 우엉, 버섯, 밤, 잣, 귤, 유자, 복숭아, 배, 살구 등이 재배되었다.

축산물 : 

사냥이 직업으로 자리 잡았으며, 소, 돼지, 닭, 개, 거위, 오리, 양 등이 가축으로 사육되었다.

수산물 : 

항해기술의 발전으로 먼 바다로 나가 고래, 바다표범, 새우, 조기, 상어, 돌고래, 가자미, 숭어, 붕어, 문어 등을 잡았으나, 불교가 유입되면서 어업은 타격을 입었다.



통일신라 시대의 식생활

귀족과 서민이라는 계층의 차이에 따른 식생활이 정착되고 지방간의 식생활이 교류되면서 쌀의 수확량이 크게 증가하였으며, 불교와 함께 차를 마셨고, 강정과 유밀과가 이 때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채소, 과실류 : 

상추, 무, 마 외에 미나리, 오이가 부식으로 첨가, 밤, 잣, 자두, 배, 밀감, 앵두, 참외 등을 식용하였다.

수산물류 : 

8세기 초 잠수업이 성행하여 다시마, 해초 등을 식용하였다.

조미료 : 

소금, 생강, 천초, 귤피 등이 쓰였다.



고려시대의 식생활

불교의 융성으로 육류와 어류의 섭취가 억제되었고, 어업과 양축이 금지되면서 곡류와 채식요리가 발달하여 식량증산과 양곡비축에 더욱 힘쓴 시대였다. 

의창, 상평창 등의 진휼제도(곡가조절제도)와 쌀밥의 보급으로 떡과 한과류가 발달하였다.


과일과 채소류 : 

우엉 · 연뿌리 · 토란 · 당근 · 더덕 · 연근 · 오이 · 파 · 아욱 · 가지 · 죽순 · 표고버섯 · 마늘 · 수박 · 포도가 처음으로 재배되었다.


어패류 : 

미꾸라지 · 전복 · 큰새우 · 대합조개 · 게 · 굴 · 거북 등을 식용하였다.

수조육류
고려 초기 : 

수조육류의 식용을 극히 삼가, 품귀, 도살법이 미숙, 우육식은 거의 없었다.


고려 말 : 

제주도에 목장 개설, 몽골의 도살법 사용, 고기요리법 발달, 쇠고기 식용, 식물성과 동물성 식품이 함께 선호되었다.


몽골에서는 맹물에 고기를 넣고 끓인 것을 곰탕 또는 슈루라 부르기도 하는데, 맹물에 소를 넣고 끓인다면 곰탕이나 설렁탕의 일종이다. 

이규보의 시에는 “고깃국에 파를 넣으면 맛이 좋아지네.”라고 하였다. 

비린내 나는 고기에 파를 섞어 국을 끓이는 방법이 시작되었고, 고려후기에 육식이 본격화되면서 개장, 즉 쇠고기를 넣은 육개장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원나라의 식품전래 : 

고종45년 원에 종속되면서 소주, 상화(만두류의 하나로 밀가루를 술로 반죽하여 팽화시킨 후 채소나 팥을 넣고 둥글게 빚은 것), 포도주, 후추, 사탕 등이 들어왔고, 특히 후추와 사탕 수입량이 증가되었다.



조선시대의 식생활

식생활 풍습은 고려시대를 그대로 이어받았는데 사치성이 더욱 심해졌다. 

농서가 발간되고, 측우기 발명, 농사의 지도, 진휼 및 의료후생정책이 도입되었다.


후기 :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해 어려운 생활 : 

진휼청, 상평창(곡식값 조절하는 물가 대반책의 역할)이 환곡으로 이어졌다.


식생활에 유교가 끼친 영향 : 

차 마시는 습관이 없어지고 화채와 한약재를 달여 만드는 탕자류와 주류의 종류가 많아지고 품질도 향상되었으며, 노인영양학이 발달하였다.


중기 이후 : 

남방으로부터 고추(고추장 개발, 김치에 고춧가루 사용), 감자, 고구마, 호박, 옥수수, 땅콩 등이 전래되면서 식생활에 변화를 가져왔다. 

식품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상차림의 형식을 갖췄다(주식과 부식으로 나누어서 식분이나 형편에 따라 3첩에서 12첩 반상을 차리는 형식 등장, 의례상차림인 혼례상, 회갑상, 제상 등이 생김).

조리서, 술 만드는 법을 적은 서적, 향토음식이 등장하였다.

미국대륙에서 건너온 원두()
- 호박(미국대륙이 원산지, 남과로 소개)
- 토마토(페루가 원산지, 중국에서 씨를 얻어와 재배, 초시, 일년감으로 불림)
- 고구마(남미의 열대지방이 원산지, 감저라 함)
- 감자(일본에 통신사로 간 조엄이 대마도에서 씨 감자를 얻어와 재배)
- 고추(왜개자, 왜초, 당초, 남초라고 함)

쇠고기는 선호하나 돼지고기는 선호하지 않았고, 개고기는 전국적으로 즐겨 먹었다.

<동국여지승람>에 명태란 명칭이 등장. 조기는 서해안의 대표적인 물고기로 석수어(관혼상제의 필수음식), 복어 · 준치 · 자라 등도 즐겨 식용됨.


왕권중심의 조선시대는 500년간의 사치스런 궁중생활과 함께 궁중식의 발전을 보았는데, 종류와 형식이 상당히 다양하였고 왕족과 귀족들도 특히 식생활에 있어서도 특별대우를 받고 있었다. 

식생활의 형식면에서도 양반사회를 중심으로 매우 다양해졌다.



근대화 이후의 식생활

개화기의 식생활

    생활자체의 급격한 변화는 없었으나 각국과의 통상조역이 이루어지고 상호 왕래가 활발해지면서 점차 외국의 식생활 습관이 널리 수입, 19세기 말에는 서양의 식품과 요리법, 식생활 관습이 전해져 우리나라의 식생활은 한식과 양식이 혼합시대를 이루게 되었다.


    일본과의 교류 : 

    수출된 식품은 쌀, 콩, 보리, 인삼, 수입식품은 향료, 조미료, 담배

    청나라 : 

    수출은 인삼, 해삼, 수입은 담배, 술

    러시아 : 

    수출은 귀리, 조, 두류, 담배, 어류, 어란


    유길준 《서유견문록》 : 

    서양음식의 종류와 중요성, 조리방법, 식료품에 관한 과학적 연구의 필요성, 식사기구와 그릇의 일반적 설명, 식사의 종류, 풍습이 소개되면서 식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궁중수라상을 위해 서양요리 주방이 별도로 마련되었고, 수라상에 1주일에 수차례 프랑스 요리와 커피와 케이크도 많이 즐기는 기호식품이 되었다.


    일반서민에게 우유, 커피, 양과자가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1885년 전후로 서양 기독교 선교사가 들어오면서 남녀노소의 구별 없이 동석하고, 1880년대 교육기관에서 단체급식이 시작되었다.


    일제 강점기의 식생활

    토지조사사업, 산미증산계획으로 쌀소비가 격감하여 심각한 식량난에 봉착, 감자류로 식량을 대신(아침, 점심에는 감자, 풀뿌리, 나무열매, 옥수수, 귀리, 콩, 팥 등의 잡곡을 약간 섞어 먹는 정도, 저녁에는 조와 옥수수로 주로 끓여 먹거나 귀리가루와 메밀가루를 국물에 풀어먹는 정도, 겨울에는 점심을 거르는 것이 보통, 재해시에는 굶어죽음)하였다.

    서양음식과 식품제조업이 발달(도정업, 제분업, 양조업, 청량음료제조업, 제빙업, 제염업, 통조림제조업, 면실유공장, 서울우유협동조합, 담배공장), 과자, 술, 청량음료, 식용유, 각종 통조림 등의 서구 식품들이 제조되어 일부 상류층의 식생활에 침투하고 있던 시기다.



    고씨례, 高禮.

    고씨례의 유래

    들에 나가 일을 하다 새참이나 점심을 먹을 때 또는 야외에서 식사를 할 때 첫 숟가락을 떠서 들판에 던지며 “고씨례”라고 말하는 풍속이 있다. 

    그래야 풍년이 들고 복을 받는다고 한다. 

    여기에는 도선국사 또는 진묵대사, 그 외 이름난 지사의 이야기라고 하는 설화가 있다.


    고씨 성을 가진 예쁘고 착한 처녀가 있었다. 

    하루는 냇가에서 빨래를 하는데 탐스럽게 생긴 복숭아가 하나 떠 내려와 남몰래 건져서 먹었다. 

    그 후로 잉태하여 배가 불러오더니 아들을 낳았다. 

    처녀의 부모가 이를 망측한 일이라 하여 어린아이를 개울가에 갖다 버렸다.

    그때는 마침 엄동설한이라 몹시 추운 날이었는데 갑자기 까마귀 수천 마리가 무리를 지어 날아와서는 날개를 서로 이어 어린아이를 덮어주고 먹이를 구해다 주어 수십 일이 지나도 어린아이가 죽지 않았다. 

    이를 보고 처녀의 부모가 이상히 여겨 다시 데려다 길렀다. 


    복숭아를 먹고 낳은 아들이라 하여 이름을 도손()이라고 지어 주었다.

    도손은 자라서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으며 중국에 건너가 도통한 스승으로부터 천문과 지리와 음양의 비법을 배워 풍수지리에 통달하게 되었다. 

    그가 귀국하자 시집도 못가고 혼자 산 어머니가 죽었다. 

    도손은 명당을 찾아 어머니를 묻기로 했다. 


    다른 자식도 없고 복숭아를 먹고 태어난 자신도 중이 되었기 때문에 발복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하면서 어머니를 산에 묻지 않고 들 한가운데에 묻었다. 

    사람들은 풍수지리에 통달한 사람이 어머니를 산에 묻지 않고 들에다 묻었다고 욕하였다. 

    도손은 “여기가 배고프지 않은 명당이다.”하며 그대로 두었다.


    농사철에 근처의 농부가 일을 하다가 점심을 먹을 때 제사를 지내주는 자손도 없는 묘를 보니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그 농부는 들에서 일하다가 밥을 먹을 때면 “고씨네 -”하면서 그 여자의 성을 부르며 밥 한 술을 던져주었다. 

    그 해에 가뭄으로 흉년이 들어 다른 집들은 농사가 다 망쳤는데, 그 농부의 농사만 풍년이 들었다.


    사람들은 그것이 고씨네 무덤에 적선을 했기 때문이라며 그 다음부터는 서로 묘에 음식을 주며 “고씨네 -”하고 불렀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발음의 변화로 인하여 고씨네가 고씨례로 변음된 것이라 볼 수 있으며 그 후로 들에 밥 한술을 던지며 “고씨례”하는 습관이 지금에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들밥을 먹을 때나 남의 집에서 들어온 별식을 먹을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농민들이 들에 나가 일을 할 때 점심밥을 들에서 먹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하는 풍속 가운데 고씨례가 있다. 

    좌중의 어른이 밥을 먹기 전에 밥 한 술을 떠서 들에 던지며 ‘고씨례!’를 외친 다음에 밥을 먹는 것이 고씨례 풍속이다.


    고씨례를 해야 농사가 잘되고 밥먹고 뒤탈이 없다는 믿음이 있다. 

    밥을 먹기 위해 농사를 지으면서도 밥을 먹기 전에 밥을 버리는 고씨례는 바로 생극논리에 입각해 있다. 밥을 얻기 위해서 밥을 버리는 것은 ‘생’이면서 또한 ‘극’이다. 

    밥을 버리는 것이 얻는 것이며 얻는 것이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씨례를 하지 않으면 배탈과 같은 탈이 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마찬가지이다. 


    첫 숟가락의 밥을 버리지 않아서 뒤탈이 나면 먹어도 먹은 것이 아닌 것이나 다름없다. 

    한 숟가락을 버림으로써 나머지 밥을 온전하게 소화할 수 있다면 버리는 것이 곧 온전히 먹는 것이다. 

    고씨례를 하면서 밥을 먹기 전에 버리는 일부터 하는 것은 밥을 헛되지 않게 제대로 먹기 위한 것이며, 밥을 제대로 먹으려면 고씨례를 통해 밥을 버리는 일부터 해야 하는 것이다.


    남의 집에서 별식이 들어왔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남의 집에서 들어온 음식은 공짜 음식이다. 

    순전히 음식의 ‘생’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를 그냥 먹었다가는 객귀에 잡히거나 배탈이 나므로 오히려 ‘극’이 된다. 

    고씨례를 함으로써 ‘생’이 ‘극’이 되고 ‘극’이 ‘생’이 되게 하는 것이다. 

    고씨례는 논리적으로만 생극론에 입각해 있는 것이 아니다. 

    생태학적으로 중요한 구실을 한다.


    사람이 먹어야 할 아까운 밥을 덜 먹고 한 숟가락씩 떠서 동서남북을 향해 뿌리는 의례는 결국 들에서 서식하는 이름 모를 벌레들이나 들쥐 등에게 먹을 것을 던져주는 일이다. 

    집집마다 던져주는 들밥 한 숟가락이 생물종의 다양성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처럼 자연에게 나눔의 의례를 한 다음에 비로소 사람들이 첫 술을 뜨게 되는데, 먹을 것을 자연에게 나누어주고 되돌려 줌으로써 경제적 풍요를 얻는다고 여기는 것은 그 자체로 납득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나눔은 지출이자 손해이지 수입이자 이득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태학적 시각에서 보면, 먹을 것을 자연과 나누는 풍속이야말로 생태계를 건강하게 하고 생물종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문화이다. 


    고씨례가 한갓 주술적 의례에 머물지 않는 것은 특히 들밥을 먹을 때, 곧 야외에서 자연과 더불어 밥을 먹을 때 자연을 향해 고씨례를 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생태학적 인식에 의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에서의 고씨례

    우리의 할머니들이 잔칫집에서 음식을 가져오시면 온 식구가 먹기 전 그 음식을 조금 떼어내어 고씨례하면서 문밖으로 던지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고씨례는 고수레의 방언으로 무당이 굿을 할 때나, 들에서 음식을 먹을 때나, 남의 집에서 음식을 가져왔을 때에 그 가운데서 조금씩 떼어 던지면서 부르는 소리이다.


    고씨례의 풍속은 환인 3세인 고시리() 환인께서 농사법을 발견하여 식생활이 풍족해지자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감사 인사를 예로 표시하게 된 것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 한다. 

    이렇게 고씨례한 음식은 벌레와 짐승과 새들이 먹게 되는데 우리 조상들은 이것을 마땅히 하여야 할 도리로 생각한 것이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주어서 감사합니다. 


    모든 생명들과 함께 나누어 먹겠습니다하는 모든 동물과 공동의 삶을 희구하는 마음이 깔려 있는 것이다.

    고씨례 풍속에서 묻어 나오는 정신을 현대적 의미로 분석해본다면 하늘과 자연과 국가와 민족에게 먼저 음식을 바치는 숭배정신, 은혜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처럼 우리가 흔히 가볍게 넘겨 버리고 마는 풍습 하나하나에도 모든 사물과 공생하려는 의지와 베풀어야 한다는 당위성이 베어 있음을 느낄 수가 있게 한 조상들이다.



    제의례의 의미

    예서()에 의하면 ‘제왕()은 하늘을 제사지내고 제후()는 산천을 제사지내며, 사대부()는 조상을 제사지낸다.’고 했다. 

    이것은 온 세상을 다스리는 제왕에게는 천지()가 절대자이고, 한 지역을 다스리는 제후에게는 산천()이 절대자이며, 그렇지 않은 사인()에게 있어서의 절대자는 조상()이라는 데에 연유한다.

    인간이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까닭은 효()를 계속하기 위함이며, 효란 자기존재에 대한 보답이다. 

    그래서 제의례를 근본에 보답하는 의례라는 뜻으로 보본의식()이라 한다. 

    효는 자기존재에 대한 보답()이기 때문에 인간의 온갖 행실() 중에서도 가장 근원()에 대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모심을 극진히 한다.

    이렇게 “살아 계신 조상은 극진히 받들면서 그 조상이 돌아가셨다고 잊어 버려 박하게 한다면 심히 옳지 못한 일이다.”라고 옛 현인()들은 말하고 있다. 

    진실로 자기존재를 고맙게 여기는 사람은 “돌아가신 조상 섬기기를 살아 계신 조상 모시듯”(사사여사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은 조상을 섬기는 제의례를 일러 “효를 계속하는 것”이라고 한다. 

    효는 조상이 살아계신 동안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계속 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모든 것의 근본으로 하는 성리학()에 바탕을 둔 《주자가례》는 조선왕조 오백 년 동안 우리의 조상숭배() 사상을 보편화시키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고, 가신() 신앙으로 승화되어 백성들의 사고 구조에까지 그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 의식 절차가 지나치게 까다롭고 복합하여 후손들이 진실한 공경심()보다는 형식()에 치우쳐서 가산()을 탕진()하는 허례허식()의 폐를 낳기도 하였다. 

    예의 근본에 대한 제자의 질문을 받은 공자는 ‘호화로움보다는 차라리 검소()함이 낫다.’고 하였다. 

    주자도 ‘검소함과 슬픔과 공경하는 마음에 바탕을 두어 예를 표하여야 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형편에 따르되, 진실한 공경심으로 정성껏 지내야 한다.

    제례는 본디 조상에 대한 숭앙심()과 추모()에 뜻이 있으나, 요즘 일부에서는 나의 근본인 조상에 대한 최소한의 도의심마저 고갈()되어 가고, 기껏 일 년에 한 번 돌아오는 기일()마저도 명분도 우러나지 않을 정도로 타락되어 가고 있다. 

    건전한 조상의 혈통을 이어 받았기 때문에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므로 누구라도 조상의 은혜에 성심으로 감사할 줄 아는 진정한 추모의 정을 지녀야 한다. 

    이는 금수()가 아닌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라면 결코 양심을 속이거나 망각()해서는 안 될 진리인 것이다.

    제사의 근원은 먼 옛날에 천재지변(), 질병(), 맹수()의 공격을 막기 위한 수단에서 비롯되었다. 

    근세에 와서는 유교사상으로 조상에 대한 존경과 애모의 표시로 변하게 되어 가장마다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 

    봉사대상은 시대에 따라 변천되어 왔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공민왕 2년에 포은 정몽주 선생이 제정한 제례규정에는 대부 이상의 관원은 삼대 봉사()로 하고 6품 이하의 신문을 가진 사람은 이대봉사이고, 7품 이하의 하급관원과 서민들은 부모제사만 지내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 후 조선시대 경국대전 예전편에 기록된 제례의 봉사대상을 보면 사대부 이상은 사대봉사, 6품 이상은 삼대봉사, 7품 이하는 이대봉사 일반서인()은 부모제사만 지내도록 되어 있다.

    그 당시 7품 이상의 관원은 불과 20% 미만으로 일반국민의 80% 상당의 인원이 7품 이하의 관원이나 서인이었기 때문에 전 국민 중 대부분이 부모제사만 지낸 셈이다. 

    그러하던 것이 한말 갑오경장(고종 21년) 이후로 구시대의 계급사회가 무너지자 반상의 구별없이 사대부의 예절을 따라 사대봉사를 해왔던 것이다.


    제사순서

    강신() : 

    강신이란 신위께서 강림하시어 음식을 드시기를 청한다는 뜻이다. 

    강신은 제주 이하 모든 참사자가 차례대로 선 뒤 제주가 신위 앞에 나아가 꿇어앉아 분향하고 동집사가 술을 따라 제주에게 주면, 제주는 잔을 받아서 모사() 그릇에 세 번 나누어 붓고 빈잔을 집사에게 다시 돌려주고 집사는 다시 상 위에 올린다. 

    제주는 일어나서 두 번 절한다. 

    향을 피움은 위에 계실지도 모르는 조상신이 향기를 타고 내려오시게 하는 것이고, 술을 모사에 따르는 것은 땅 아래 계실지도 모르는 조상의 혼백을 향기로운 술로 적셔서 모시고자 하는 상징적 행사이다.


    참신() : 

    조상에 대한 문안인사로 제주 이하 모든 참사자가 신위를 향하여 함께 남자 제관은 두 번 절하고 여자 제관은 네 번 절한다.


    초헌() : 

    첫잔을 올리는 행사로 반드시 제주가 신위 앞에 나아가 꿇어앉으면 집사가 제상의 남자조상 앞에 있는 잔반을 제주에게 주면 제주가 받아든 잔에 집사가 잔에 술을 가득 붓는다. 

    제주는 술이 담긴 이 잔반을 정성껏 받들어 집사에게 주면 서집사는 받아서 고위앞 잔반자리에 올린다. 

    여자조상에게도 이와 같은 절차로 잔에 술을 부어 올린 다음, 절을 두 번하고 약간 뒤로 물러 나와 꿇어앉는다.


    독축() : 

    축문을 읽으면서 제사를 받는 조상께 제사의 연유와 정성스런 감회를 고하고 마련한 제수를 권하는 것이다. 

    축문은 초헌자의 헌작이 끝난 다음 제주 이하 모든 제관이 꿇어앉은 다음 축관은 제주의 좌측에 꿇어앉아서 독축한다. 

    이 축문을 읽을 때는 엄숙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하여 목청을 가다듬어 천천히 그리고 크게 읽어야 한다. 

    축문을 다 읽고 나면 모든 제관은 일어서고 초헌관만 일어나 두 번 절한다.


    아헌() : 

    두 번째 잔을 올리는 것을 말한다. 

    아헌은 원래 제주의 아내가 초헌과 같이 잔을 올리고 4배를 하는 것이 원칙이나, 주부가 올리기 어려울 때는 제주의 다음가는 근친자, 즉 제주의 형제가 술을 올리고 절을 두 번한 후 물러난다.


    종헌() : 

    마지막 잔을 올리는 것을 말한다. 

    초헌과 같이 잔을 올리고 재배한다. 

    잔을 올릴 때 조금 덜 찬 잔을 올린다. 

    이것은 유식 때 첨잔을 하기 위해서이다.


    첨작() : 

    유식이라고도 하는데 조상께 식사를 권유하는 절차이다. 

    유식은 제주가 신위 앞에 나아가 종헌자가 덜 채운 잔에 세 번으로 나누어 첨작한 다음 두 번 절한다.


    계반() 삽시정저() : 

    계반은 메, 면, 뚜껑을 열고 삽시정저란 메에 숟가락을 꽂고(숟가락 바닥이 동쪽으로 가게 하여 꽂음) 저를 고른다. 

    가문에 따라 개반을 초헌 때 하는 경우도 있다. 

    정저란 저를 시접에 가지런히 바르게 하는 것이다.


    합문() : 

    참사자 일동이 방에서 나와 문을 닫는 것을 말하는데, 대청일 경우에는 뜰아래로 내려와 조용히 3, 4분간 기다린다. 

    단칸방이나 부득이 한 경우에는 제자리에 조용히 엎드려 부복하다가 축관이 세 번 기침하면 모두 일어선다.


    개문() : 

    개문이란 문을 여는 것을 말한다. 

    축관이 기침을 세 번하고 문을 열고 들어간다. 

    대청일 경우에는 대청으로 올라간다. 

    합문하지 않았으면 개문절차는 생략된다.


    헌다() : 

    갱을 내리고 숭늉을 바꾸어 올리고 메를 조금씩 세 번 떠서 숭늉에 말아놓고 숟가락 손잡이가 서쪽으로 가게 한다. 

    참사자 일동이 2~3분간 국긍(묵념)하고 있다가 축관이 어흠, 어흠, 어흠하면 참사자들은 평신한다.


    철시부반() : 

    숭늉 그릇에 놓인 수저를 거두어 시접에 놓고 그릇에 뚜껑을 다시 덮는다.


    사신() : 

    제사에 참여한 사람이 조상을 보내는 작별인사를 드리는 절차로 합동으로 배례를 한다. 

    참사자 중 남자는 두 번 절하고 여자는 네 번 절하고 난 후 지방과 축과 함께 불사른다. 

    지방과 축을 사를 때는 화재의 위험이 있으므로, 물을 담은 대접과 젓가락을 준비하여 젓가락으로 밖으로 나가 지방과 축을 잡고 타다 남은 재가 있으면 물이 담긴 대접에 버린 후 불씨가 남아 있는지 확인한다.


    철상() : 

    철상이란 모든 제수를 물리는 것으로 제수는 뒤에서부터 물린다.


    음복() : 

    음복이란 조상께서 주시는 복된 음식이란 뜻으로 제사가 끝나면 참사자와 가족이 모여서 제수와 제주를 나누어 먹는다.

    음식을 친족과 이웃에 나누어주기도 하고 이웃 어른께 갖다 대접하기도 한다.


    현대식 제례

    오늘날 제사의 의의

    옛날에는 제사가 형식에 치우쳐 낭비적인 요소가 많았다. 

    자손들이 대부분 흩어져 살 수밖에 없게 된 오늘날 새로운 각도에서 제사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사란 조상에 대한 후손들의 공경심과 효심을 나타내는 의식이다. 

    자라나는 자손들에게는 자신의 근본을 깨닫게 할 수 있으므로 그 의미는 여전히 존중되어야 마땅하다.

    현재의 나를 있게 해준 조상들에게 정성껏 예를 올리는 것은 자손의 당연한 도리이지 미신적인 차원에서 냉대받거나, 안 좋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지나친 형식과 복잡한 절차를 따르는 것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 

    제사의 참 의미를 새기고 현대에 맞는 의식절차에 따라야 할 것이다.


    제사의 종류

    일반적으로 제사의 종류는 기제(), 차례(), 묘제()의 세 가지로 나눈다. 

    기제는 해마다 돌아가신 날 지내는 제사이고, 차례는 음력 설날과 추석에 지내는 제사이다. 

    묘제는 한식과 추석 때에 산소에 찾아가 음식을 차려 놓고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이 밖에도 가족, 친지와 더불어 사회적 관계에 있는 여러 사람이 함께하는 추도식이나 위령제가 있다.

    고례()에는 기제의 경우를 4대조까지 매년 기일에 의식을 거행하였는데 오늘날도 그 습속()을 따르는 가정이 많이 있다. 

    정부가 1969년 가정의례준칙 및 가정의례법을 제정하여 허례허식()을 피하고 검소한 제례를 갖추도록 권장해온 이후, 기제의 대상이 부모, 조부모 및 배우자로 국한되는 경향이 많아졌다.

    1999년 8월 31일 ‘가정의례준칙’은 폐지하고 동일자로 ‘건전가정의례준칙’을 공포하였다. 

    ‘가정의례준칙’이 규제중심이였다면 ‘건전가정의례준칙’은 자율적인 정착에 역점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근래에 이르러서는 1969년 가정의례준칙이 제정되었는데 기제는 조부모까지만 봉사한다고 하였는데, 1973년 가정의례준칙을 전면개편하여 6월 1일부터 시행되다가 1999년 규제개혁철폐에 의하여 가정의례준칙은 폐지되고, 1999년에 건전가정의례준칙을 새로 제정하였는데 제례는 기제 및 명절차례로 구분되고 봉사는 제주로부터 2대조까지로 하고 성묘는 제수를 마련하지 아니하거나 간소하게 한다고 공표되었다.


    제사음식

    ① 홍동백서(西) : 붉은 과일은 동쪽(오른쪽)에 흰색 과일은 서쪽(왼쪽)에 놓는다.
    ② 조율시이() : 왼쪽부터 대추, 밤, 감, 배의 순서로 놓는다.
    ③ 생동숙서(西) : 김치는 동쪽에 나물은 서쪽에 놓는다.
    ④ 좌포우혜() : 포종류는 왼쪽에 놓고 식혜와 젖깔류는 오른쪽에 놓는다.
    ⑤ 어동육서(西) : 생선은 동쪽에 육고기는 서쪽에 놓는다.
    ⑥ 두동미서(西) : 생선의 머리는 동쪽으로 꼬리는 서쪽으로 향하게 놓는다.
    ⑦ 건좌습우() : 마른 것은 왼쪽에 젖은 것은 오른쪽에 놓는다.
    ⑧ 접동잔서(西) : 접시는 동쪽에 잔은 서쪽에 놓는다.
    ⑨ 우반좌갱() : 밥은 오른쪽에 놓고 국은 왼쪽에 놓는다.
    ⑩ 남좌여우() : 제삿상의 왼쪽에 남자가 오른쪽에 여자가 앉는다.
    ⑪ 좌면우병() : 좌는 국수, 우는 떡을 놓는다.
    ⑫ 적전중앙() : 적은 중앙에 놓는다.

    여기서 동쪽이란 제삿상을 앞에서 봤을 때 오른쪽을 말하고, 복숭아, 꽁치, 삼치, 갈치, 고추, 마늘 등은 상에 올리지 않으며 식혜, 탕, 면종류는 건더기만 사용한다.


    각 지방마다 음식이 약간 다른 경우
    각 지방마다 사투리가 있듯이 제사음식도 약간씩 틀린 경우가 있는데 제사음식에서는 그 지방 특산물이나 소중하게 여기는 음식을 제사상에 올린다. 

    어촌에는 생선이 많이 오르겠고 농촌이나 산촌에서는 그 지방에 맞게 산채가 많이 오르며, 과일이나 과자류나 전 종류는 거의 비슷하다.

    제사가 끝난 후 음식을 나눠먹는 이유는 조상님이 주신 복을 후손들이 나눈다는 의미가 있다. 

    제사행위 자체가 조상의 덕을 기리고 조상께서 후손에게 복을 내려 달라고 청하는 기복신앙의 일종이다. 

    조상에게 바쳤던 음식을 먹음으로써 조상님이 주신 복을 후손들이 나누어 먹는 결과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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