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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자연, 산, 바다, 강,호수, (국내, 외),

동강 아름다운 경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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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강 아름다운 경치.


영월군을 동서로 가르며 흐른다 하여 동쪽을 동강, 서쪽을 서강으로 부른다. 
이 지역 사람들은 암강, 수강이라 부르기도 한다. 
동강은 평창군 오대산에서 발원하는 오대천과 정선군 북부를 흐르는 조양강이 합류하여 흐르다가 영월군 영월읍 하송리에서 서강과 만나 남한강 상류로 흘러든다. 
서강은 평창군 북부 오대산 남쪽에서 발원한 평창강과 태기산에서 발원한 주천강이 영월군 서면에서 합류해 흐르는데 이 지점부터 동강과 합류할 때까지의 강을 이른다.

한반도지형.
선암마을. 仙巖 .


서강(西)의 샛강인 평창강() 끝머리에 자리잡고 있으며, 마을 앞에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를 꼭 빼닮은 절벽지역인 한반도지형이 있어 유명해졌다. 

선암마을에는 고려 때 선암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며, 한때는 역말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평창강은 길지 않지만 유로연장()이 220km가 될 만큼 심하게 곡류하며, 주천강()과 합쳐지기 전에 크게 휘돌아치면서 동고서저(西) 경사까지 한반도를 닮은 특이한 구조의 절벽지역을 만들어냈다.

오간재 전망대에서 남산재 쪽을 바라보면, 한반도를 빼닮은 절벽지역을 내려다볼 수 있다. 

오간재는 이 절벽지역을 처음 발견하고 외부에 알린 이종만의 이름을 따서 종만봉이라고도 부른다. 

절벽지역은 동쪽으로 한반도의 백두대간을 연상시키는 산맥이 길게 이어져 있고 서쪽에는 서해처럼 넓은 모래사장도 있으며, 동쪽으로는 울릉도와 독도를 닮은 듯한 작은 바위도 있다.  

나무와 솔가지로 만든 임시다리인 섶다리(주천리와 판운리 2곳)를 건너면 갈 수 있는데, 여름에 큰물로 다리가 떠내려가면 옛 교통수단인 줄배를 타고 건너야 한다. 

백두대간격의 능선 중간쯤에는 한여름에도 시원한 바람이 끊이지 않는 큰 구멍 뚫린 구멍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 때문에 동네처녀가 바람이 나지 않는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한적하고 아름다운 강변마을로서, 마을 앞에는 넓은 자갈밭에 수박돌과 잔돌들이 깔려 있다. 

강 건너편은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바위절벽에 돌단풍이 군락을 이루어서, 가을에는 화려한 단풍으로 장관을 이룬다. 

자연환경이 잘 보존되어 있어 백로·비오리·원앙·수달 등 여러 동물을 볼 수 있으며, 강물 속에는 천연기념물인 쉬리·어름치와 민물조개다슬기 등이 서식하고 있다. 

섶다리마을이라고 불리는 주천리와 판운리에서는 2004년 6월 26~27일에 영월 주천감자꽃축제(또는 섶다리축제)를 처음으로 개최하였다.

주변에 장릉과 청령포 등의 단종 유적지와 동강, 서강, 김삿갓계곡을 비롯해 영월책박물관, 곤충생태박물관, 별마루천문대, 영월 고씨굴 등 관광명소가 많다.  

곡류하천을 가리키는 우리말로는 물도리, 물굽이 등이 있는데, 범람원에서 자유로이 곡류하는 자유곡류하천과 구분해서 감입곡류하천이라는 어려운 학술 용어를 사용한다. 

감입곡류하천의 경우 계곡 자체가 곡류하고 있다. 

곡류하천 만곡부의 산각이 한반도를 닮았다는 의미에서 이름 붙여진 한반도지형은 이제 전 국민적 고유명사, 아니 일반명사가 되었다. 

곡류하천이 발달한 남한강 유역의 여러 시ㆍ군에서는 지역 관광 상품의 주요 아이콘으로 한반도지형을 이용하고 있다. 

영월군은 2009년 10월 선암마을 한반도지형을 이러한 지형의 원조로 자리매김하려는 의도에서 영월군 서면을 영월군 한반도면으로 개칭했다.

감입곡류하천은 동해가 갈라지고 한반도가 융기하기 이전인 신생대 제3기 중엽에 한반도가 하천침식에 의해 평탄했다는 증거로 제시된다. 

지반의 융기로 하방침식이 진행되면서 과거 자유곡류하천의 평면 형태가 그대로 유지된 채 하도가 깊어진 것이다. 

선암마을 한반도지형은 한반도 동고서저의 지형적 특색을 모식적으로 보여 주고 있으며, 왼편의 모래톱은 서해안의 간석지를 닮았다. 

한반도지형 전망대로 가려면 산길을 따라 제법 가야 한다. 

산길 주변 평탄한 곳이 바로 평창강의 하안단구이며, 이곳에는 석회암의 용식지형인 돌리네가 곳곳에 나타난다.


동강(정선).

개요

한강의 발원지 태백의 검용소에서부터 시작된 골지천이 정선 임계를 지나 여량 아우라지에서 대관령에서부터 흘러내려오는 송천과 합류하여 조양강을 이룬다. 

조양강은 다시 나전리에서 오대산 발원의 오대천과 합류하여 수량을 불리우고 곧 정선시내를 휘돌아 흐른 뒤 가리왕산 회동계곡의 물을 받아 강폭을 더욱 넓힌다. 

정선읍 가수리에 이르면 태백 고원지역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동남천과 만나고 여기서 비로소 동강이 시작된다. 

멍석을 깔고 누우면 하늘이 멍석만하게 보인다는 첩첩산중의 정선땅을 흐르는 동강은 그 이름만큼 사연이 많다. 

댐건설로 동강이 동강날 판이었다는 웃지 못할 얘기나 다시 댐 건설 백지화로 인해 가슴앓이하는 과거 수몰예정지역 주민얘기들 모두 예나 지금이나 애환이 섞여있는 듯하다. 

동강은 가수리 동남천과 합류하는 지점부터 장장 51km를 흘러 영월에서 서강과 만나 남한강이 되어 흐른다. 

정선 동강은 가수리부터 강을 따라 약 21km에 이르는 구간이다.

정선-평창간 42번 국도 상의 광하교를 건너기 전 조양강 물줄기를 따라 들어가면 이내 산과 물이 돌고 도는 강변길이 시작되고 강변 양쪽에 띄엄띄엄 자리한 아담한 마을들이 눈에 들어온다. 

강마을 중 가장 큰 마을인 가수리를 뒤로 하고 가탄마을, 하미마을을 지나 운치리 점재에 이르면 작은 나루터가 있다. 

예전에는 동강변 어디에나 그러하지만 강 건너편 마을을 가기 위해서는 줄배를 타고 건너가야 했으나 지금은 잠수교가 놓여 있어 배를 타는 정겨운 모습은 볼 수 없다. 

줄배를 타고 강을 건너 점재마을에서는 동강의 기수라 할 수 있는 백운산(해발 882m)에 오를 수 있다. 

점재마을에서 정상까지는 약 2시간 30분 정도 숨이 턱밑에까지 차오는 급경사 길을 올라야 하지만 오름길 도중 보이는 뱀처럼 구불구불 돌아 흐르는 정선 동강의 모습은 잊을 수 없는 광경이다. 

길이 다소 험하고 급경사 절벽이 많아 조심해야 하지만 정선동강의 모습을 한눈에 보기엔 더할나위 없이 좋다. 

최근 여러 산악회나 단체에서 많이 오가면서 등산로는 잘 정비되어 있다. 
백운산 정상에서 사행천 동강의 모습을 바라보며 조심조심 2시간 정도 내려오면 칠족령(또는 칠목령)이다. 

칠족령에서 왼쪽으로 내려가면 정선 고성리 제장마을, 오른쪽 하산길은 평창 마하리 문희마을이다. 

문희마을의 유래가 그 마을에서 기르던 개이름이었다는 것, 

칠족령이란 지명도 '문희' 라는 개가 발바닥에 옻칠을 하고 넘어다녔다는 데서 이름붙여졌다는 이야기가 재미있다. 

문희마을부터는 평창군 동강지역이다. 

뇌른마을을 지나면 우렁찬 소리를 내며 세차게 흐르는 황새여울을 만나게 된다. 

이 여울과 영월 동강 어라연 앞의 된꼬까리(꼬까리는 여울이라는 지역 방언이다.)에서는 예전에 떼사공이 거친 물살에 많이 희생 당했다고 한다. 

진탄나루터를 지나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뉘어지는데 곧장 가면 영월 동강 문산마을로 갈 수 있다. 

직진하지 않고 윗길 마하본동을 지나 플라잉낚시로 유명한 기화천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평창군 미탄면 소재지로 갈 수 있다. 

백운산을 겸한 정선 동강 트레킹이 어렵다면 점재나루에서 계속 물길을 따라 고성리 고성산성에 올라 한폭의 동양화같은 백운산과 동강을 조망하는 것도 좋다.

백운산에서 제장마을로 내려와 건너편 고성리에서 덕천리 소사마을로 넘어가면 강 건너편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마을인 연포마을이 있다.


이 시냇물은 영월ㆍ

상동을 지나 정선 고을로 들어간다. 

고을 앞 임계 서쪽에 있는 산기슭 남쪽이 정선 여량촌()이고, 우통수 물이 북쪽에서 여량촌을 둘러 남쪽으로 흘러간다. 

양쪽 기슭이 제법 넓고 언덕 위에는 키 큰 소나무와 흰모래가 맑은 물결을 가리고 비추기 때문에 참으로 은자()가 살 만한 곳이다. 

전지()가 없는 것이 한스러우나 마을 백성은 모두 자급자족하여 넉넉하다.

『택리지』에 기록된 내용이다. 

정선은 산 깊은 골짜기인지라 사는 것이 쉽지 않은 고을이었던 모양이다.

이곳을 찾았던 허소유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땅이 궁벽하니 누구인들 쉽사리 갈 수 있으랴
온 종일 몰아 달려서 강성()을 택했네
개 어금니처럼 울퉁불퉁하여 고르지 않은 험한 길에 당했으니 고단(, 땅 이름)이 멀고
여자의 눈썹처럼 공중에 떴으니 태백산이 가로질렀네
냉담()한 것으로 즐거움을 삼으니 세속의 취미 어긋나고
평안하고 한가로움으로 스스로 즐기는 것이 나의 장점이네
토지는 메마르고 무거워서 유리()해 도망한 백성이 많으니
집집마다 석청(, 돌 사이에 모은 벌꿀)을 뽑아 바치는 것을 차마 못 보겠네

임계천을 받아들인 골지천은 구미정()을 지나 정선군 북면 여량리, 아우라지에서 송천을 받아들인다. 

아우라지는 정선군 북면 여량리 한강 상류에 있는 나루터로, 평창군 대관령면의 황병산과 구절리에서 흘러내린 송천, 동쪽에서 흘러온 임계천이 합류하는 곳이다.

이 아우라지의 뱃사공이 부르던 노래가 바로 「정선아리랑」이다. 

「정선아리랑」, 즉 「정선아라리」가 처음 불리기 시작한 것은 조선 초기부터였다고 한다. 

고려 왕조를 섬기고 벼슬에 올랐던 사람들 중 일곱 선비(전오륜, 고천우, 김충한, 변귀수, 김한, 이수생, 신안)가 불사이군()의 충성을 다짐하면서 개성의 깊은 산골 두문동에 은신하다가 지금의 정선군 남면 낙동리 거칠현동으로 옮겨와 살면서 지난날 섬기던 임금을 사모하고 고려 왕조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였다.  

보고 한시로 지어 읊은 것이 「정선아리랑」의 시원이 되었다고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주게
싸리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백은 낙엽에나 쌓이지
사시사철 임 그리워 나는 못 살겠네

다른 설에 따르면, 옛날 여량리에 사는 처녀와 아우라지 건너편 유천리에 사는 총각이 연애를 하였다.

그들은 동백을 따러 간다는 구실로 유천리에 있는 싸리골에서 서로 만나곤 하였다. 

어느 가을에 큰 홍수가 나서 아우라지에 나룻배가 다닐 수 없게 되자 그 처녀는 총각을 만나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정선아리랑」 가락에 실어 부르게 된 것이다.

눈이 오려나 비가 오려나 억수장마 지려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
명사십리가 아니라면은 해당화는 왜 피나
모춘삼월이 아니라면은 두견새는 왜 우나 ····
정선읍내 일백오십 호 몽땅 잠들여놓고서
이호장네 맏며느리 데리고 성마령을 넘자

그러나 「정선아라리」는 사회적, 시대적 흐름에 따라 새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반달 같은 우리 오빠는 대동아전쟁 갔는데 샛별 같은 우리 올케는 독수공방 지키네”라거나, “사발그릇은 깨어지면은 세네 쪽이 나고 삼팔선이 깨어지면은 한 덩어리로 뭉치네”라고 분단 상황을 노래하기도 하였으며, “아우라지 건너갈 때는 아우라지더니 가물재 넘어갈 때는 가물감실하네”라고 날 가문 날을 노래하기도 하였다.

이뿐만이 아니다. 

“동면같이 경치 좋은 곳에 놀러 한번 오세요. 

용산소, 폭포수 물 밑에도 해당화만 핍니다. 

산천이 고와서 뒤돌아다봤소. 

정든 곳이라서 뒤돌아다봤지”라는 구절도 있고, “겉눈은 슬쩍 감구야. 속눈으로 보니, 대관령 서낭님두 돈 시구 가잔다. 

연감은 할멈 치고, 할멈은 아 치고, 아는 개 치고, 개는 꼬리치고, 꼬리는 마당 치고, 마당 가역에 수양버들은 바람을 받아 치는데, 우리 집 그대는 낮잠만 자느냐”라고 노래하기도 하였다.

성마령()은 정선군과 평창군 사이에 있는 고개로 지금은 잘 쓰이지 않지만 옛날에는 이 고을의 관문이었다. 

어찌나 높은지 그 마루에 서면 별을 만질 수가 있을 듯하다는 뜻에서 성마령이라고 불렀다 한다.

정선군 북면 유천리 양짓말에서 갓거리로 넘어가는 가물재는 몹시 가팔라서 재 밑을 내려다보면 정신이 가물거린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고, 자족령이라고도 부르는 칠족령은 신동면 제장에서 평창군 미탄면 마사리 뇌룬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꽃베리는 강릉에서 정선읍으로 오려면 반드시 지나야 했던 베리, 곧 벼루(벼랑)였다. 

조선시대에 어느 관리가 가마를 타고 지나면서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자 가마꾼에게 얼마나 더 가야 되느냐고 몇 차례를 물었는데, 그때마다 가마꾼들이 곧 베리가 끝난다고 했던 데서 ‘곧베리’가 되었다가 나중에 ‘꽃베리’로 바뀌었다고 한다.

마전치는 정선읍 광하리 마전에서 평창군 미탄면 백운리로 넘어가는 재로, 고개가 하도 높아서 마치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비행고개라고도 부른다.


만항재에서 함백산만항마을 꼭대기에 위치한 만항재는 태백과 영월, 정선이 만나는 상징적인 경계에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자동차가 오를 수 있는 포장도로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조선시대에 이곳 여량리에는 여량역이 있었다. 

큰 말 2마리, 짐 싣는 말 4마리, 역리 84명, 역조 77명, 역비 12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피곤에 지친 말은 실처럼 가는 길 뚫고 가기 주저하는데
삐죽삐죽 산봉우리는 깎아지른 듯 겹쳐진 성과 같네
바람은 바위틈에서 나오니 대포 실은 수레가 구르는 듯하고
물은 마을 터 안고 흐르니 한 필의 비단 가로놓인 듯
내 신세 백년을 살며 양쪽 귀밑머리만 희어지고
강산 천리 길로 벼슬살이하러 다니는 심정이여
난간에 기대 앉아 동쪽 산에 떠오르는 달 기다리는데
고요한 밤 시를 짓고 싶은 마음 오래될수록 더욱 맑아져

용재 성현의 시가 흐르는 듯한 아우라지를 지난 강물은 나진을 지나고 한반도 지형을 빼닮은 상장산 자락을 지나 정선에 이른다. 

여기부터가 동강이다.

「정선아리랑」을 연구하는 진용선은 “옛 문헌을 보면 우리 선조들은 아우라지에서부터 동강이라는 말을 썼고, 표기도 지금의 ‘동녘 동()’이 아니라 ‘오동나무 동()’을 썼다”라고 말한다. 

영월읍을 중심으로 동쪽은 동강, 서쪽은 서강이라고 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였다는 것이다.


서강

강원도 영월군 서면에서 만난 평창강과 주천강이 영월읍 서쪽으로 흐르다가 다시 동강과 합류할 때까지의 강을 서강이라 한다.

동강에는 열두 곳의 아름다운 경치가 있다. 

여울과 소, 절벽, 섶다리, 마을 풍경이 그것들이다. 

1경은 가수리 느티나무와 마을 풍경이고, 

2경은 신동읍 운치리의 수동 섶다리다. 

3경은 나리소와 바리소(신동읍 고성리~운치리), 

4경은 백운산(고성리~운치리)과 칠족령(덕천리 소골~제장마을), 

5경은 고성리 산성(고성리 고방마을)과 주변 조망, 

6경은 바새마을 앞 뼝대, 

7경은 연포마을과 홍토 담배 건조막, 

8경은 백룡동굴(평창군 미탄면 마하리), 

9경은 황새여울과 바위들, 

10경은 두꺼비바위와 어우러진 자갈, 모래톱과 뼝대(영월읍 문산리 그무마을), 

11경은 어라연(거운리), 

12경은 된꼬까리 여울과 만지나루(거운리) 등이다.

산은 높고 골은 깊은 정선군에서 흘러내린 물이 골지천, 오대천, 지랑천, 용탄천, 어천, 임계천 같은 여러 내를 이루며 흘러내리다가 조양강이 되고 다시 더 내려가 동강이 된다.

정선은 고구려 때 잉매현()이었다가 신라의 경덕왕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 때 군으로 승격되어 조선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고려 때 사람인 곽충룡은 이곳 정선을 두고 “풍속은 순박하고 백성들은 송사를 벌이지 않는다”라고 하였고, 역시 고려 때의 문장가인 이색은 “일천 산엔 겹겹 푸름이 가로놓였으니 한 가닥 길은 푸른 공중으로 들어간다”라고 하였다. 

곽충룡은 이어서 “일백 번 굽이져 흐르는 냇물은 멀리 바다로 향하고 천 층으로 층계 진 절벽은 하늘에 의지해 가로질렀네”라고 하였다. 

산이 높고 물이 깊은 정선군을 일컬어 고려 때의 문인 한철충은 그의 시에서 “벼랑을 따라 보일 듯 말 듯 가느다란 길이 있구나. 

옛 읍이 산을 의지하였는데 산은 성을 이루었네. 산중에 숨어 살고자 하나 참으로 방도가 없구나. 

비록 벼슬을 그만두겠다고 말하나 진정()이 아닌 것만 같네”라고 하였다.

정추는 “하늘 모양은 작은 것이 우물 속에 비쳐서 보이는 것 같고, 산의 푸름은 멀리 구름 위에 가로놓였다. 

다섯 동혈()은 차고 서늘하여서 능히 뼛속까지 시리게 하고, 한 시냇물은 목메어 울어 순정()을 호소하는 것 같다”라고 노래하였다. 

이 근래에도 정선 사람들은 자신들의 고장을 두고 “하늘이 세 뼘밖에 되지 않는다”라거나 “앞산과 뒷산을 이어서 빨랫줄을 맬 수 있는 곳” 또는 “닭이 울면 그 소리가 온 고을을 메울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안축은 그의 시에서 “산마을에 돼지의 배부름은 반드시 새벽에 물 먹인 것이 아니요, 이웃집 닭이 살져도 날마다 훔쳐가는 자가 없다”라고 하였다.
정선 관아의 북쪽에는 봉서루라는 이름의 정자가 있었다. 

그 정자를 두고 안축은 다음의 시를 남겼다.

가파른 언덕을 빙빙 돌아 말을 급히 몰아가니
뽕나무와 삼[마()]이 십 리를 이은 옛 성터
거친 땅엔 자갈만 삐죽삐죽 규전()도 적고
비좁은 산허리에 가로질러진 실낱같이 가는 길
빗소리 들으니 나그네 시름 더하고
구름 보니 어버이 그리는 마음 참기 어렵네
바람 바위 물구멍은 사람 세상 아니로세
티끌 흔적 씻어내니 뼛속까지 시원하네

이곳 정선에서 거두어들인 전세()는 무명이 1동() 19필이었고 『여지도서』에 그 이동 경로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3월에 거두어들여 4월에 바친다. 

처음에는 육로로 실어 날라 사흘이면 충주 목계강에 도착한다. 

배에 싣고 출발해 자진포, 두무포를 거쳐 경강의 뚝섬에 도착한다. 

순풍을 만나면 이틀 반이면 호조에 바칠 수 있다. 

대동과 균세도 이와 같다.

두메산골이었던 정선이 새롭게 변모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정선 오일장의 부활이다. 

5월에서 가을까지 2일과 7일에 서는 정선 오일장에는 서울에서 관광차 오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정선읍내의 오일장에는 정선군 일대에서 채취된 산나물이 다 쏟아져 나온다. 

참취, 곰취, 며느리취, 나물취, 참나물, 누롯대, 참두릅, 개두릅, 더덕, 고비, 도라지, 곤드레 등 나물도 좋지만 무엇보다 정선 여행의 별미인 콧등치기와 올챙이국수를 맛볼 수 있어 더욱 좋다. 콧등치기는 일종의 메밀국수다. 

메밀을 반죽하여 국수를 만든 것인데 올챙이국수에 비해 끈기가 있고 단단하여 국숫발이 물에 쉽게 풀어지지 않는다. 

육수에 된장을 살짝 풀고 깨소금 양념을 하여 먹는데 맛이 좋아 급히 빨아들이다 보면 국숫발이 살아 있는 듯 콧등을 친다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

올챙이국수는 찰옥수수를 갈아서 묽게 반죽하여 나무로 만든 굵은 체에 내려 만든 것이다. 찰기가 적어서 국숫발이 부슬부슬 끊어지는데, 갖은 양념을 하여 묵처럼 말아서 숟갈로 떠먹는다. 

옛 시절 정선의 명물이었던 꿩꼬치산적 같은 음식은 아쉽게도 찾아볼 수가 없다.

태백에서 시작된 남한강이 유장하게 흐르는 영서지방을 두고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영의 오른쪽은 영서(西)라고 한다. 

모든 물이 서쪽으로 흘러 한강과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가는데, 물이 적은 데는 거룻배가 다닐 수 있고, 물이 많은 데는 큰 배가 다닐 수 있다.

이익이 생존했던 18세기 중엽만 해도 남한강엔 수없이 많은 배들이 오르내렸지만 오늘날엔 큰 배는커녕 고깃배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곳 정선군 고한읍에 자장율사가 세운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중의 하나인 정암사가 있다. 신라의 큰 스님이었던 자장율사가 태백산 서쪽 기슭에 정암사를 창건한 것은 선덕여왕 14년이었다. 

‘숲과 골짜기는 해를 가리고 멀리 세속의 티끌이 끊어져 정결하기 짝이 없다’는 의미에서 정암사라는 이름을 지었다는 이 절은 오대산의 상원사, 양산의 통도사, 영월의 법흥사, 설악산의 봉정암과 더불어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다. 

정암사의 창건 설화와 문수보살을 만난 자장율사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정암사 적멸보궁태백산 서쪽 기슭에 자리한 정암사는 신라의 큰스님이었던 자장율사가 선덕여왕 14년에 창건한 절이다.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다.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불교의 융성에 힘쓰던 자장율사는 진덕왕 때 대국통의 자리에서 물러나 강릉에 수다사를 세우고 살았다. 

어느 날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말했다. 

“내일 너를 대송정에서 보리라.” 

놀라 깨어난 자장이 대송정에 이르자 문수보살이 나타나 “태백의 갈반지에서 만나자” 하고 말한 뒤 다시 사라져버렸다. 

태백산에 들어가 갈반지를 찾아 헤매던 자장은 큰 구렁이들이 나무 아래 서로 얽혀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을 보고, 그곳이 문수보살이 말한 갈반지라 여겨 ‘석남원(, 곧 정암사)’이라는 절을 지었다.

자장율사가 석남원에 머물며 문수보살이 나타나기를 몹시 기다리던 어느 날 다 떨어진 가사를 걸친 초라한 늙은이가 죽은 개를 삼태기에 싸들고 와서 “자장을 보러 왔다”라고 하는 게 아닌가. 

자장율사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이 언짢았던 자장의 시중이 “어디서 온 누구인가?” 하고 호통을 치자, 

그 늙은이는 천연덕스럽게 “자장에게 전해라. 

그래야 갈 것이다”라고만 대꾸하였다.

자장율사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 늙은이를 쫓아내게 하였다. 

늙은이는 “아상이 있는 자가 어찌 나를 볼 수 있으리오” 하고 탄식하면서 가지고 온 삼태기를 뒤집으니 죽은 강아지가 푸른 사자로 변하였다. 

늙은이는 그 사자를 타고 빛을 뿌리며 하늘로 솟구쳐 올라갔다. 알고 보니 바로 그 노인이 문수보살이었던 것이다.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자장이 곧바로 뒤를 쫓아갔으나, 이미 문수보살은 떠나가버린 뒤였다. 자장은 몸을 남겨두고 떠나며 “석 달 뒤에 돌아오마. 

몸뚱이를 태워버리지 말고 기다려라” 하고 당부하였다.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한 스님이 와서 오래도록 다비하지 않음을 크게 나무란 뒤 자장의 몸뚱이를 태워버렸다. 

석 달 뒤 자장이 돌아왔으나 이미 몸이 없어진 뒤였다. 

자장은 “의탁할 몸이 없으니 끝이로구나! 어찌하겠는가. 내 유골을 석혈()에 안치하라” 하는 부탁을 하고 사라져버렸다.

한편 자장은 사북리의 산꼭대기에 사리탑을 세우려 하였으나 세울 때마다 계속 쓰러졌다. 간절히 기도하였더니 하룻밤 사이에 칡 세 줄기가 눈 위로 뻗어 지금의 수마노탑, 적멸보궁, 사찰 터에서 멈추었으므로 그 자리에 탑과 법당과 본당을 짓고 그 절의 이름을 갈래사()라고 하였다. 

고한읍에는 갈래라는 마을의 이름과 함께 갈래초등학교가 있고, 상갈래하갈래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정암사는 숙종 39년(1713)에 중수되었으나 낙뢰로 부서져 6년 뒤 다시 중건되었고, 1771년과 1872년 그리고 지난 1972년에 다시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아우라지 : 아우라지는 평창군 대관령면의 황병산과 구절리에서 흘러내린 송천, 동쪽에서 흘러온 임계천이 합류하는 곳이다. 

정선읍으로부터 19.4킬로미터 떨어져 있으며, 송천과 골지천이 이곳에서 합류하며 어우러진다고 하여 아우라지라고 한다.


사진은 선돌에서 서쪽으로 서강의 상류를 바라보고 촬영한 것이다. 

멀리 보이는 산들은 영월(강원도)과 제천(충청북도)의 경계를 이루는 산릉들이다. 

왼편에 송전탑과 독립가옥이 들어서 있는 하안단구의 가장자리에는 기반암으로 된 단구애가 발달해 있으며, 같은 하안을 따라 멀리 취락이 입지해 있는 하안단구보다는 고도가 더 높다. 

오른편 하안에 있는 하안단구는 왼편의 낮은 하안단구와 고도가 같다. 

같은 시기에 형성된 같은 높이의 하안단구가 하천 양안에 대칭적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한쪽에만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이곳은 취수가 어려워 밭농사 위주이며, 산촌()의 형태를 띤다.


하상()의 높이가 현재보다 높은 하천 양쪽의 계단상의 지형이다. 

하성단구()라고도 한다. 

하안단구는 하천유로를 따라 양쪽에 나타나는데 현재의 하천이 아닌 곳에 나타날 수도 있다. 

과거의 유로를 찾아 볼 수 있는 좋은 증거가 된다. 

하천이 빠른 속도로 하각작용을 할 때 단구애(terrace cliff)가 나타나며 구범람원의 형성 시에 쌓인 사력층이 존재하는데 이를 단구역층이라 하며 단구를 식별하는 좋은 증거가 된다. 

하안단구의 구성물질이 기반암석일 때 암석단구라 하고 구성물질이 사력층으로 이루어진 경우 사력단구라 한다. 

단구면이 하천의 측방침식에 의하여 평탄화된 것을 침식단구라 한다. 

한편 사력층의 두께가 두터운 단구를 퇴적단구라 한다. 하안단구를 성인적으로 구분하면 구조단구와 비구조단구로 나눌 수 있다. 

구조단구는 하상의 침강, 융기에 의해 이루어진 단구를 말하며 비구조단구는 기후단구()라고도 하는데 강수량의 변화, 간빙기와 빙기의 교대에 의해 형성된 단구를 말한다. 

하안단구는 하천의 성장, 쇠퇴의 기록이므로 지형발달을 연구하는 데 매우 좋은 예가 된다. 한편 단구면은 구하천의 하상()으로 구석기인의 거주의 중요무대(경기도 전곡리)였음을 알 수 있다. 

하안단구는 해수면 변화, 융기 등의 결과이다.


동강(영월).

개요

* 영월의 대표적인 자연관광지, 동강(영월) *
동강은 남한강 수계에 속하며 정선, 평창 일대 깊은 골짜기를 흘러내린 물들이 정선읍내에 이르면 조양강이라 부르고, 이 조양강에 동남천 물줄기가 합해지는 정선읍 남쪽 가수리부터 영월에 이르기까지의 51km 구간을 '동강'이라 부른다. 

산자락을 굽이굽이 헤집고 흘러내리는 동강은 마치 뱀이 기어가는 듯한 사행천()을 이루고 있으며, 전 구간에 걸쳐 깎아지른 듯한 절벽지형을 이루고 있다.
 
유역은 4억 5000만 년 전에 융기되어 형성된 석회암층 지역으로, 약 2억 년 전에 단층운동과 습곡운동의 영향으로 현재의 지형이 형성되었고, 현재도 하천운동으로 인한 퇴적작용과 침식작용 등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동강 유역에는 지표운동과 지하수·석회수의 용식작용 등으로 인해 많은 동굴이 형성되었는데, 2002년 현재까지 보고된 동굴만도 256개나 된다. 

백룡동굴()은 천연기념물 206호로 지정되어 있다.
 
생태계 역시 잘 보존되어 수달, 어름치·쉬리·버들치, 원앙·황조롱이·솔부엉이·소쩍새·비오리·흰꼬리독수리, 총채날개나방(미기록종)·노란누에나방, 동강할미꽃(미기록종)·백부자·꼬리겨우살이 등 미기록종을 포함해 많은 천연기념물·희귀동식물이 서식하는 생태계의 보고로 알려져 있다.
 
동강의 생태계를 한 눈에 
산림청 임업연구원들이 독자적으로 수행한 조사에는 ‘식물의 경우’ 신품종 후보종 1종 ‘뻐꾹채’ 와 ‘백부자’, ‘꼬리겨우살이’ 등 희귀식물 6종의 서식이 확인됐으며 포유류는 총 8종 가운데 천연기념물인 ‘수달’의 서식이 확인됐다. 

조류 분야에서는 천연기념물인 ‘원앙’, ‘소쩍새’, ‘까막딱따구리’ 의 서식지와 희귀조인 ‘비오리’도 확인됐다. 

산림곤충으로는 미기록종인 ‘총채날개나방’과 ‘노란누에나방’ 등 희귀종 2종이 확인됐다. 

산림경관으로는 석회암 붉은벽과 흰사구 등이 발달했으며 그 중 어라연 지역이 대표적으로 평가됐다.
 
동강의 백미, 어라연 
동강의 백미인 어라연은 뛰어난 경치로 인해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어린 나이에 죽은 단종의 혼령이 영월에서 경치가 가장 뛰어난 이곳의 경치를 보고 여기서 신선처럼 살고자 하였는데 이때 물고기들이 줄을 지어 반겼으며 그 일대가 마치 고기비늘로 덮힌 연못과 같았다고 '어라연'이란 지명을 붙였다고 한다. 

약 1km에 걸친 협곡을 따라 흐르는 동강의 중앙부에 3,000여 평의 바위섬이 위치한 어라연은 돌로 된 바위 위에 분재와 같은 소나무와 물에 잠긴 너럭바위에서 반사되는 햇살, 병풍 같은 절벽이 세상의 시름을 잊게 한다. 

가끔 이곳을 찾는 외국인들은 “한국의 그랜드 캐넌으로 중국의 계림에 버금가는 명승지다” 라고 말하기도 한다.


개요

동강은 남한강 수계에 속하며 정선읍 가수리부터 영월에 이르기 까지의 57km 구간을 이른다. 

동강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신비스러움에 싸인 어라연은 기암괴석과 어우러진 울창한 송림이 천혜의 절경을 이루고 있으며, 2004년 12월 7일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14호로 지정되었다. 

어라연은 자연환경보전지역으로 차량출입이 통제되어 트레킹으로 잣봉을 경유하여 어라연을 돌아보는 방법(3시간 소요)과 래프팅을 타고 둘러보는 방법(2시간~3시간 소요)이 있다.

이용안내

주차시설

있음(소형 50대 / 대형 10대 주차 가능)

수용인원

제한없음

신용카드가능여부

가능

애완동물가능여부

불가

체험안내

래프팅
※ 문의 : 영월군래프팅연합회 033-375-0012

문의및안내

영월관광안내 1577-0545

관련 홈페이지

영월 문화관광 http://www.ywtour.com

상세정보

입산통제 구간

지정된 등산로 이외 지역

관광코스안내

거운분교-마차-잣봉-어라연-만지동-거운분교(총7km, 총 3시간 30분)

입 장 료

없음(체험비별도)

화장실

있음

주차요금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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